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를 읽었다. 분량도 많지 않지만, 좋아하는 철학자에 관한 책이어서 단숨에 읽었다, 는 아니고, 며칠 걸려 읽었다. 중간에 다른 일들이 항상 끼어들기 때문인데, 생각해보니 오고가는 전철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읽은 듯하다. 복사한 원서까지 무릎에 펴놓고...

일단 우리말 번역본은 아마도 좀더 편안하게 독자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갖은 짓'(친근한 표현으로)을 다했다. 그냥 '슬라보예 지젝'으로 돼 있는 원서의 제목을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로 바꿔놓았을 때 이미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책의 소제목들도 대부분이 옷을 갈아입거나 분칠을 했다(가령, "The curse of Jacques: Limitations on the influence of Zizek"이란 절은 두 대목으로 나뉘어 각각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혹은 생뚱맞은", "데리다와 라캉을 중재하려는 시도는 실패한다!"라 이름붙여졌다). 그리고 용어들도 가급적 이해하기 쉬운 걸로 바꾸었으며(가령 '누빔점'으로 번역되던 point de caption은 '소파 고정점'으로 바뀌었다) 원서에는 한 장도 들어가 있지 않은 인물사진/참고사진 등도 꽤 여러 장 집어넣었다(이런저런 이유로 책의 분량은 142쪽짜리 원서의 2배 가량이 되었다. 부록으로 원서에 없는 글 한편이 국역본에는 더 들어가 있더라도). 한마디로 편집자가 부릴 수 있는 수단은 다 부려본 게 아닌가라는 인상을 책을 읽으면서 받았다. 해서 한국어 독자들이 훨씬 더 친근감 있는 지젝을 만날 수 있는 멍석은 마련된 셈(*point de caption은 point de capiton의 오타이다. 이유가 없지는 않은 게 275쪽 '찾아보기'에 point de caption으로 잘못 타이핑돼 있고, 나는 그걸 받아적었던 것. 본문 134쪽에는 제대로 표기돼 있다) .

책이 나오기까지의 자초지종과는 무관한, 약간 도취적인 역자서문을 뒤로 하고 본문으로 들어가면, 한 입 크기로 잘 썰어놓은 지젝을 만나게 되는바, 우리말로 된 '가장 쉬운 지젝 입문서'란 선입견에 걸맞는 내용들이 펼쳐진다. 솔직히 두드러진 경력의 소유자로 보이지 않는 저자이지만 이 만한 '정리력'을 선보이는 게 영미학계의 '내공'이 아닌가란 생각도 든다. 1급 학자들을 뒷받침하는 2급 학자층이 두터워야, 즉 미드필드가 두터워야 새로운 이론/업적이 나오든가 말든가, 골도 들어가든가 말든가 한다. 골대 앞에 한 명 세워놓고 골이 들어가기만을 기다리는 건 전근대적인 방식이자 요즘의 동네축구도 못되는 방식이다. 하긴 핑계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이들은 영어사용자들이고, 지젝이 영어로 쓴 책들을 읽은 것이기 때문("지젝은 유연하면서 쉽게 이해되는 문체로 글을 쓰는데"(229쪽) 같은 소리를 들으면 기분 나쁜 한국 독자들도 있겠다). 애당초 지젝이 한국어로 책을 썼다면, '나'라도 이런 정리를 못하랴 싶다. 하지만, 핑계는 핑계로 내버려두기로 하자.  

어쨌든 이 슬로베니아 출신의 '괴물' 철학자는 영어권 학계/이론계에 등장한 지 불과 15년 정도만에 '우리 시대의 사상가' 명단에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등재시켰다. 그리고 일부 회의적인 시각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저자 마이어스의 주장대로 그의 파괴력/영향력은 갈수록 확고해질 가능성이 높다(마이어스의 마지막 문장. "한마디로, 지젝은 존재하게 될 것이다!Quite simply, Zizek will have been." 그러니까 그의 크기가 다 드러나고 제대로 평가받는 건 미래의 일이 될 거란 얘기). 적어도, 1989/1991년 이후 탈냉전 시대, 그리고 2001년 9.11 이후에 '가능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그의 작업들은 그가 '우리 시대의 철학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는 걸 확증해준다. 마이어스의 책은 그런 '지젝 따라잡기'로서 (현재로선) 더없이 유익한 길잡이이다. 그리고, 그런 의의를 책 제목에 반영하자면,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보다 더 적절한 제목은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두려워하랴?"가 될 것이다(초심자라도 두번쯤 책을 통독하게 되면, '웬만한' 지젝을 읽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다시 참조해가면서).    

번역본의 뒷표지에도 박혀 있지만, 마이어스가 지젝의 사상을 요약하기 위해서, 그에게 영향을 준 세 사람(헤겔, 마르크스, 라캉)에 대한 설명 이후에 내세운 핵심 이슈는 다섯 가지이다. (1)주체란 무엇이며, 왜 그토록 중요한가? (2)탈근대성에서 끔찍한 것은 무엇인가? (3)현실과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4)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5)왜 인종주의는 환상인가? 등. 이들 각 장마다 말미에 내용요약(Summary)까지 박스 처리돼 있는 책의 내용을 다시 요약한다는 건 동어반복이겠는지라(나중에 '읽기'를 시도한다면 모를까), 여기서는 국역본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몇 가지 오타와 미심쩍은 대목만을 지적해둔다. '이보다 더 쉬울 수 없는 지젝'이지만, 혹 옥의 티 때문에 독서의 재미가 반감되지 않을까라는 우려도 갖게 되기 때문에. 즉, 몇 가지 지적사항만 고려한다면, 책은 지젝 입문서로서 나무랄 데 없다는 걸 거듭 강조해둔다.

-32쪽에서 지젝의 동료이자 두번째 아내였던 '레나타 살레클(Renata Salecl)'의 올바른 표기는 언젠가 지적한 대로 '레나타 살레츨'이며 이미 도서출판b에서도 '살레츨'로 표기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지난 3월말에 지젝은 아르헨티나에서 세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30년 연하의 신부와(첫결혼을 일찍 한 그이기에 아마도 세번째 신부는 자신의 아들보다 나이가 더 어릴 듯하다). 마이어스가 요약해주고 있는 지적 경력에 따르면, 지젝은 1971년 그러니까 22살에, 철학과 사회학 학사를 취득하고, 1975년에 400쪽에 달하는 학위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리고는 대학교수직을 얻을 뻔하지만, 그의 '강의'가 학생들을 물들게 할지 모른다는 당국자들의 우려 때문에 결국 얻지 못한다. 그는 동료였던 믈라덴 돌라르와 함께 이론정신분석학회를 창설하고(지젝이 회장, 돌라르가 부회장이었다. 둘이 시작한 학회였고), <제문제>란 잡지와 <아날렉타>란 시리즈도 낸다(마이어스에 따르면, 지젝은 자신의 책에 대한 악평이나, 있지도 않은 책에 대한 서평을 잡지에 게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젝은 1979년 류블랴나 대학의 사회학연구소의 연구원이 되는데, 당국의 염려/배려에 따라 그는 강의 부담이 전혀 없이 순수하게 연구만을 수행하게 된다(이 때문에 지젝은 방한강연시 자리를 옮길 생각이 없노라고 조크를 섞어 얘기했다. 굳이 의무적인 강의까지 해야 하는 미국 등지의 대학으로 유명세에 걸맞게 옮길 이유가 없다는 것). 그리고 1981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터뷰에 따르면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슬로베니아를 방문했었던 라캉의 사위 자크-알랭 밀레르의 초청으로 친구인 돌라르와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서 밀레르의 세미나에 참석한다(그 세미나를 통해서 비로소 라캉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지젝은 고백한바 있다). 지젝은 세미나에 참석하는 한편, 밀레르의 정신분석도 받게 되는데, 이때 두 사람간에 트러블이 있었는지 1985년 밀레르의 지도로 지젝은 정신분석학 박사학위논문을 쓰게 되지만, 밀레르로부터는 논문의 출판을 거부당한다. '좌절'한 지젝은 슬로베니아로 돌아가며 정치활동에 뛰어든 그는 1990년에 슬로베니아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기도 한다. 그러는 와중에 출간한 것이 1989년의 (영어권)데뷔작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다. 이후에 그가 현재까지 (영어로) 낸 책이 최소 26권 이상인바(나는 그 중 24-5권 정도를 갖고 있다), 올해도 최소 2권 이상이 나올 예정이다(얼마전에는 란 연구서가 출간되기도 했다).  

이러한 경력에서 마이어스는 두 가지 중요한 모멘트를 지적한다. 비주류/비제도권적 성향과 관련한 것인데, "이와 같은 비제도성으로 인해 적어도 두 번(한번은 석사논문과 관련해서, 다른 한번은 두번째 박사학위와 관련해서) 기성제도에 편입할 기회를 놓쳤지만, 지젝은 제도에 대한 이런 저항을 통해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했다... 지젝 이론의 놀라운 성공은 부분적으론 이른 시기에 겪은 실패와 그 실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체제와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할 수 있었던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37쪽) 이러한 교훈을 따르자면, 이론가로서 성공하기 위한 요건은 '실패'이다. 그것도, 두 번. 지젝의 말을 비틀자면,  "이론가는 반드시 두번 실패해야 한다." 마이어스는 주체에 대한 지젝의 특이한 관점/이론이 이러한 자기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지적하는데, 그럴 법한 견해이다.

-58쪽. 라캉의 두 타자에 대해 설명하는 소단락에서 마지막 문장. "따라서 이런 타자성은 동일화 과정으로 내면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상징계의 타자성보다 훨씬 더 극단적이다."(58쪽) 여기서 '상징계'는 '상상계'의 오타이다. 문맥상 '이런 타자성'이란 게 '상징계의 타자성'이므로 원서와 대조하지 않더라도 오타라는 걸 알 수 있다.

-112쪽. "왜냐하면 어머니의 초자아적 명령 아래에서 이 딸에게 남겨진 유일한 쾌락의 통로는 고통의 강도에 개입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에서 '고통의 강도'는 'a degree of pain'을 옮긴 것인데,  별로 중요하진 않지만, '얼마간의 고통' 정도의 뜻이 아닐까 한다. 다른 대목들에서 읽기 편한 쪽으로 옮겨주고 있기 때문에 '고통의 강도'란 표현은 좀 낯설다. 113쪽 소단락에서 "이런 은폐야말로 법이 작동하는 데 필요한 긍정적 조건이기 때문이다"에서는 positive의 역어로 '긍정적'보다는 '실정적'이 낫지 않을까 싶다. 이건 오역을 지적한다기보다는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positive만 하더라도 우리말로는 적극적/긍정적/능동적/실정적 등으로 옮겨지는바,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르게 번역에서 애를 먹는 경우는 상응하는 우리말이 없을 때가 아니라 이처럼 너무 많을 때이다(주체/주어/주제로 번역되는 'subject'나 반성적/반사적/성찰적/재귀적으로 번역되는 reflexive도 마찬가지이다).

-115쪽에서, "이 예수상이 전하는 진짜 메시지는 실재 예수를 주창한 자들에게는 결코 오직 않을 그의 부활이 아니라, 실제 예수가 몸소 보여준 자기발전의 영적 편력이다." '오직 않을'은 물론 '오지 않을'의 오타이고, 시제상 예수의 부활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일어난 것이다(미래와 관련된 건 '부활'이 아니라 '재림'이다). 원문은 "Resurrection, which... never actually happened"이므로, "실제적으로는 일어난바 없는 부활" 정도의 뜻으로 옮겨져야겠다.

-119쪽. 오역이랄 건 없지만, 좀 모호한 대목: "지금까지 타자 속에서 찾으려 했던 것을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 속에서 찾으라고 요구한다... 여기서 타자란 그 자체로는 그/그녀의 주체가 못 되는 상상적 사본, 사실상 그/그녀를 향한 메시지로 자기충족적인 자아(타아)의 측면이다." 뒷문장의 원문은 "[T]he Other is reduced to the other, an Imaginary counterpart who is not a subject in his/her own right, but in effect, an aspect of a self-sufficient ego (the other) with a message for him/her."(59쪽) 여기서는 대문자 타자Other와 소문자 타자other 간의 구별이 중요한데, 다른 대목들에서 Other를 '대타자'라고 옮겼으므로, 처음에 나오는 '타자' 역시 '대타자'라고 옮겨져야 한다. 그리고 소문자 타자라는 것, 이런 대타자의 상상적 대응물(counterpart)이다. 그런 한에서, 이 소문자 타자는 (대타자와 같은) 제 값의 주체가 아니며, 단지 자기-충족적인 자아의 측면에 불과하다. 대략 그런 정도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147쪽. 첫문장에 '좌파 이데올로기는 한물 갔다가도 얘기되는 오늘날"에서 '좌파'는 동사 leave의 과거분사형left를 명사로 잘못 옮긴 것이다('이데올로기 일반론'이 갑자기 '좌파 이데올로기론'으로 둔갑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편집상의 실수인데, "지젝은 두 죽음.."으로 시작되는 대목부터 149쪽 전체는 147쪽의 "상징적 죽음과 실재적 죽음"이라는 소단락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아마도 책을 급하게 내느라고 꼼꼼하게 교정을 보지 않은 탓으로 보인다(재판을 찍는다면, 마땅히 교정되어야 할 것이다). 해서, "이데올로기에서 현실을 구분해내는 법"이란 장의 결론은 이렇다. "현대 정치의 문제는 그것이 비정치적이라는 것, 현존하는 자본주의 사회 체제를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이 구조를 바꾸기 위한 첫 단계는 그 '자연성'이 이데올로기적 형성물임을 폭로하는 것이며, 그런 비판을 위한 첫걸음은 그것의 실행가능성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젝의 모델이 지향하는 목표이다."(147쪽)

-154쪽. "지젝은 이 공식(=라캉의 성차 공식)의 난폭한 수용에 언제나 경의를 표하지는 않는다." '난폭한 수용'은 'outraged reception'인데, 내가 보기에는 라캉의 성차공식에 대해 '불편해하는', 혹은 '다혈질적인 반응' 정도의 뜻이다. 지젝은 (라캉처럼) 그런 반응에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는 것. 조금 내려가서, "이론이 뉘앙스가 풍부한 사유보다 독실한 신임을 얻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드는 이 시대에, 이런 전략은 확실히 참신한 우상파괴처럼 느껴진다." 원문은 "In an era where theory often spends more time establishing its pious credentials than actually articulating nuanced thought..."이다. 번역문은 '이론'과 '사유'를 비교의 대상으로 놓았는데, 이건 오류이다. 이론이 뭐하는 것보다 뭐하는 데 더 시간을 많이 보내는, 즉 더 전력하는 시대에, 란 뜻이어야 한다. nuanced thought란 '뉘앙스가 풍부한 사유'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뉘앙스를 갖고 있어서) '다소 모호한 사유'란 뜻이다. articulate란 것은 그걸 분명하게/명료하게 한다는 뜻이고. 지젝은 그런 뉘앙스를 즐기지 않고 대놓고, 아주 공격적으로 말한다. 에둘러 말하지 않는 것, 그게 지젝다운 면모이다.   

-159쪽. 이것도 편집상의 실수인데, "마르크스가 자유, 평등, 사유재산, 벤담의 <자유. 평등. 사유재산의 배타적 영역과 벤담>에 대해 논할 때"가 말이 되는가? 173쪽에서는 한 문장이 누락됐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이데올로기와 비슷하다." 다음에 "우리는 그것을 '성적 차이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we may even say that it is the ideology of sexual difference.)가 빠졌다. 마지막 문장의 '일치'는 '화해' 혹은 '조화' 정도의 뜻이다(남성과 여성의 '일치'가 불가능한 건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당연하지 않은가?). 원문은 "[I]t is not possible to reconcile 'man' with 'woman'."

-224쪽. 이건 궁금한 점이다. 지젝 비판가들을 다루면서 마이어스가 "Theorists such as Teresa Ebert and Denise Gigante..."라고 한 대목을 번역본은 "좌파 페미니스트로 유명한 테레사 에버트, 프린스턴 대학 영문학 박사과정에 있는 데니스 히간테 같은 좌파 이론가들은"이라고 옮겼다. 역자가 얼마나 '수고'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테레사 에버트'와 '데니스 히간테'의 뒷조사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Gigante'가 '히간테'로 표음된 것은 어떤 근거에서인지?(일부 인구어에서 g와 h 사이에 호환성이 있다는 건 알지만, 이 경우에도 그런 건지 궁금하고 Gigante란 이름만 갖고 이 사람의 출신 국적까지 파악되는 건지 신기하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마지막에 부록으로 실린 글 "향락과 그것의 정치적 부침"은 역자에 따르면, "지젝의 이 책의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하여 보내준 미발표 원고"(235쪽)인데, 대부분, 즉 241쪽에서 252쪽까지는 이미 작년에 당대비평 특별호 <아부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생각의나무)에 "아메리카 하위문화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또는 럼스펠드가 아부 그라이브에 관해 알고 있는 모르는 것"이란 제목으로 실렸던 것이다. 물론 다른 대목들도 아주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알베르트 슈만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환상의 돌림병>을 참조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유감스러운 건, 252쪽에서 Walter Benjamin을 '발터 베냐민'으로 표기한 것(이전에도 지적한바 있지만, '벤야민'이란 기존의 표기가 어떤 점에서 결격인지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유식한 자들의 이런 '상징폭력'은 불쾌하다. 저서도 아니고 번역서인 경우엔 상식과 관행을 존중하면 된다).

원서의 Further Reading은 번역서에서 '지젝의 모든 것'이란 제목으로 갈무리돼 있다(이 책이 2003년에 나온지라 작년에 나온 <이라크> 등은 서지에서 빠져 있다). 이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서 몇 가지 간추리면, 마이어스는 먼저 지젝의 책 중 단 한권만 읽는다면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권하겠다고. 그가 어려운 책으로 꼽는 것은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근간)이고, 초심자가 읽기에 가장 좋은 책은 <환상의 돌림병>이다(국역본은 물론 '만만찮다'). 최근에 나온 <까다로운 주체>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편"에 속하는 책이지만, "부분적으로는 무척 어렵"다. 그리고 <믿음에 대하여>는 "지젝의 다른 저작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그래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인데, 우리의 경우엔 유감스럽게도 가장 못 믿을 책이며 따라서 가장 안 팔린 책이다(나도 뜯어말린 책이지만). 현재까지 나와 있는 지젝 선집으로는 라이트Wright 부부가 편집한  <The Zizek Reader>(Blackwell, 1999)가 있다. 지젝의 원문을 '한번' 읽어보고픈 독자에게 한권만 추천하라고 한다면 이 책을 꼽을 수 있겠다...

05. 05. 16.

P.S. 한 가지. 248쪽에서 언급되고 있는 영화 <이중처벌Double Jeopardy>의 국내 출시명은 <더불 크라임>(1999)이다. 토미 리 존스와 애슐리 저드가 나오는 영화. 애슐리 저드가 찍은 이 계통의 영화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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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5-05-18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복이어서 이전 글을 삭제했더니 아니다 다를까 댓글도 사라져버렸네요. 자명한 산책님과 self-so님의 양해를 바랍니다...

lizom 2005-05-21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가 로자님에게




다른 사람의 번역본을 꼼꼼하게 원문 대조까지 하면서 읽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닌데, 이토록 꼼꼼하게 읽고 교정까지 해 주신 건 지젝에 대한 로자님의 각별한 애정과 출판 기획자 겸 번역자로서의 소명의식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말씀 하신 대로,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는 출판사(앨피)의 공격적인 개입이 두드러진 번역서입니다. 번역에서부터 교정까지 모든 작업을 번역자에게 일임하고 그저 ‘제본’만 하는 기존 출판사의 안일함과 비교할 때 앨피의 ‘과도할’ 정도의 개입은 제게 신선한 충격이자 출판 기획자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한 기회였습니다. 원고 내용을 완전히 소화하여 소제목을 바꿔 달고, 성실한 교열과 그림 선별 및 해설까지 달아준 앨피의 노력에 대해서는 결과와는 무관하게 박수를 보내야할 것입니다.




제목에 대해: 지적 발랄함이나, 대중적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지젝이 한국의 지식사회에 안정적으로 터를 잡지 못한 건 그의 이론이 접근하기 ‘두려울’ 만큼 난해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입장에 ‘미워할’ 만한 점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만큼 논쟁적이라는 거죠. 그 ‘미워할 만함’에 그의 작업이 지닌 생산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와 제국적-민족주의로 재무장한 우파와 교착 상태에 빠진 구좌파 양쪽에 대해 공격의 칼날을 휘두르는 지젝의 논의는 확실히 한국 사회의 지식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다만, 저는 지젝의 사유 ‘결과’보다, 그 사유의 ‘과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칸트, 헤겔, 마르크스를 현대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입각해서 재독해 할 필요성을 던져 주는 데 지젝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역에 대해: 영국식 영어문장에 익숙지 않아 정확치 못하거나 불명확한 번역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112쪽 ‘고통의 강도'는 ’얼마간의 고통’으로 고치는 게 맞습니다.(참고로, 말씀하신 대로 저는 원문의 내용을 훼손하지 않는 한, 한국어스럽게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13쪽 ‘긍정적positive 조건’의 positive는 ‘실증적’과 ‘긍정적’의 두 가지 뉘앙스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그래서 보통은 실정적으로 번역했는데) 이 경우는 부정되어야 할 것처럼 여겨지는 ‘은폐’가 오히려 법의 긍정적 조건이 된다는 것을 살려 ‘긍정적’으로 썼습니다.


 관련하여, 항상 고민스러운 reflexive의 번역어를 처음엔 ‘반성적’이라고 했다가, 문맥상 닿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아 ‘무리하게’ ‘재귀적’으로 고쳤는데, 사실, 여전히 불만스럽습니다.


147쪽의 "이론이 뉘앙스가 풍부한 사유보다 독실한 신임을 얻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드는 이 시대에, 이런 전략은 확실히 참신한 우상파괴처럼 느껴진다."(In an era where theory often spends more time establishing its pious credentials than actually articulating nuanced thought...") 는 “이론이 불명료한 사유를 명확하게 하는 것보다 자신의 신자를 확보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시대”로 고치는 게 맞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결정적으로, 


147쪽 첫문장 '좌파 이데올로기는 한물 갔다가도 얘기되는 오늘날"의 오역(leave의 과거분사 left를 명사로 잘못 읽은 것)


147쪽의 본문과 상자글 편집 실수.


159쪽. "마르크스가 자유, 평등, 사유재산, 벤담의 <자유. 평등. 사유재산의 배타적 영역과 벤담>에 대해 논할 때" -> <자유, 평등, 사유재산의 배타적 영역과 벤담>


등은 마지막 최종 교정을 거치지 않아 생긴 ‘결정적’실수입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인명에 대해: 인명 표기는 항상 고민스러운데, 성실한 조사가 관건이겠죠. Denise Gigante를 데니스 지간트로 발음하지 않고 데니스 히칸테로 한 건, Gigante가 giant(거인)에 해당하는 스페인어이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어에서 G와 J는 ‘ㅎ’ 에 가까운 [x]로 발음되어, Gigante는 ‘히간떼’로 들린다는 데 착안하여 그렇게 표기한 것입니다. 물론, 미국식으로 ‘지간트’라고 불릴 수도 있지만.




252쪽에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을 '발터 베냐민'으로 표기한 것은 오타입니다. 죄송합니다.


저 역시 유식한 자들의 ‘상징폭력’에 대해서는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로자님이 이번에 번역하신 <까다로운 주체>의 163-164쪽 “실체는 praxis, 즉 능동적 개입인 반면에 주체는 theoria, 즉 수동적 직관이다. 여기서 Sein과 Sollen이, 진과 선이 대립하고 있다.”에서 원어praxis, theoria, Sein, Sollen에 해당하는 한국어(가령, 실천활동, 이론활동, 존재태, 당위태 같은)나 발음표기도 없이 그대로 남겨둔 것이 혹 그 상징폭력에 해당하는 건 아닐까요?


 다시 한번, 꼼꼼한 지적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누가...>와 <까다로운 주체>가 서로 상승작용하여 지젝이 많이 읽히는 데 기여하기를 바랍니다. 건강하십시오.


로쟈 2005-05-21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세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제 생각에도 편집진이 '과도하게' 개입하는 과정에서 마지막 교정은 좀 소홀하지 않았나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굉장히 읽기 편한 번역이어서 몇 가지 '옥의 티'들이 못내 아쉽더군요. 그리고 저는 <까다로운 주체>의 번역자가 아닙니다. 아마 '로카드님'과 혼동하신 모양입니다.^^

로즈마리 2005-06-07 0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분 다 대단하시네요. ^^
 

도시락으로 싸온 김밥을 먹으며 몇 자 적는다. 어제 하려고 했던 책 얘기이다. 지난주에는 딱히 관심사에 부합하는 책들이 별로 없어서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막판에 두어 권이 합류하는 바람에 다섯 권이 채워졌다. 앞으론 이 '기록'도 그냥 부정기적으로 다섯 권의 책이 채워지면 기록해두는 방식으로 해볼 생각이다.

 

 

 

 

첫번째 책은 김윤식의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문학사상사)이다. 월간 <문학사상>에 연재되었던 원로 비평가의 자서전/회고록이다. 그는 36년생으로 올해 고희를 맞았다. 최근에 몇 권의 책이 거푸 출간되고 있는 건 그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책과 함께 비평집 <작은 글쓰기, 큰 글쓰기>(문학수첩)도 지난주에 나왔다. 신간은 '갈 수 있고, 가야 할 길, 가버린 길'이란 부제를 담고 있는데, 그 길이란 사실 책들과의 만남으로 다 채워져 있다. 사람들과의 만남이란 것도 자서전의 한 축을 구성할 테지만, 그건 오직 책들과의 만남을 보완하는 의미일 테다. '20세기의 문학과 사상'이란 제목의 문구가 거창하지 않은 것은 그가 읽고 쓴 책들이 우리문학의 20세기를 그대로 웅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 김영랑의 본명으로서의 김윤식이 아니라 비평가 김윤식이란 이름을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교과서에서였다. 거기엔 '한국문학의 연속성'이란 단원이 있었던바, 고 3때의 국어선생님은 이게 비교적 어려운 글이라고 했다. 나름대로 시골뜨기였던(19살의 내가 경험했던 서울은 작년에 내가 경험한 모스크바 이상으로 낯선 도시였다) 내가 대학에 들어와 다소 놀랐던 건 교과서(혹은 신문)에나 나오던 이들이 버젓이 교정과 강의실을 활보하고 다니던 것. 첫학기에 나는 문학개론과 같이 신청했던 철학개론을 종교학개론으로 변경신청해서 듣고는, 2학기에 (비평가가 아닌) 김윤식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그이는 매번 강의시간이 되면 (대형)강의실에 들어와서는 강의를 하고 끝나면 나갔다. 미스테리란 아주 단순한 것에 있는데, 나에게 미스테리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저자들'이 걸어다닌다는 것!(하이데거의 현존재, 즉 거기에-있음과는 좀 다른 양태로 '저기에-있음'이란 것. 어, 저 사람이 저기에 있네! 철학자 박이문이 파리 유학시절에 강의실에서 본 데리다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저기에 있다니! 그러니까 미스테리라든가 기적이란 것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에 의해 좌우되는 양태론적인 것일 테다. 어떤 인간/사물의 존재는 그 자체로 기적/미스테리가 된다. 그걸 바라보는 시선/태도에 의해. 그걸 '대상 a'로 보는?) 하여간에 그런 거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나는 종교학과 국문학쪽 강의를 학부 내내 들었다(대학원 강의를 청강하기도 했다).

해서,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의 많은 대목을 나는 비평가의 육성으로 읽을 수 있다. 잡지에 연재되었을 때 처음 몇 번은 도서관에서 복사를 해 읽었더랬는데, 많은 대목들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언제가 들어본, 들어본 거 같은, 이미 들어버린 이야기들이었던 것). 그걸로 656쪽이다. 나는 그의 비평열차가 20세기의 종반을 향하던 무렵에 탑승한 승객이지만 나름대로 끼어들 감상이 없지는 않다. 그가 쓴 책들이 내가 젊은 날 읽은 책들의 서가 한 켠 정도는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계속 진화해나간다지만 인간의 열정까지 진화해가는 것 같지는 않으며, 따라서 문학/사상에 대한 열정에 있어서 나름의 폭과 크기를 자랑했던 앞 세대의 비평가들이 점차 황혼에 접어들고 있는 풍경은, 아쉬운 장관이다.

 

 

 

 

두번째 책은 박홍규 교수의 번역으로 다시 나온 에드워드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문예출판사). 이미 두 영문학 교수의 번역으로 10년전에 책이 나왔더랬다. <문화와 제국주의>(창, 1995). 나는 그 책을 당시 내한했던 사이드의 강연장에서 구입했다. 강의는 주로 헌틴턴의 문명충돌론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오리엔탈리즘>이 한창 키워드로 부각되고 있던 시기여서 나름대로 성황을 이루었던 강의였다. 곰곰 생각해 보면, 내가 읽은 사이드는 그의 자서전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Out of Place)>, 김석희 역(살림, 2001) 밖에 없는 듯하다. 그것도 다 읽지는 않았지만, 좋은 번역이었다. 하지만, 사이드의 나머지 책들은 사정이 그렇지 않은 모양이어서 인터넷서점의 서평들은 대부분 번역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 차 있다. 대표작인 <오리엔탈리즘>(교보문고, 1991/2000)부터가 그렇다. 그러니 내가 그 책들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크게 손해본 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내용을 잘 요약해주고 있는 책들은 많다). 해서, 이번 번역본도 반신반의하게 된다.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우물이 있는 집, 2003)까지 낸 역자이지만 사이드 번역은 저작보다 더 만만찮은 모양이다.

 

 

 

 

사이드 입문서로서 가장 추천할 만한 것은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와 함께 역시나 얼마전에 나온 크리티컬 씽커즈 시리즈의 <다시 에드워드 사이드를 위하여>(앨피)이다(얼마전 독지가께서 보내주신 책의 하나인데, 원서는 언젠가 복사해두었던 책이다). 사이드와 함께 소위 탈식민주의 3인방을 이루는 이가 스피박과 호미 바바인바, <다른 세상에서>(여이연, 2003)의 저자 스피박에 대해서는 역시나 같은 시리즈의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이 근간 예정이므로 기다려볼 일이다(스피박은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의 영역자로 유명하다). 그리고 호미 바바의 책으론 <문화의 위치>(소명출판, 2002)가 출간돼 있다. 언젠가 이 연재에서 한번쯤은 언급했던 책들일 것이다(물론 쉽게 읽히는 책들은 전혀 아니다. 아무래도 번역에 있어서의 식민상태를 우리는 아직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우리 머리/언어로는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 새로운 세대, 새로운 경향의 탈식민주의에 대해서는 현대 중국영화에 관한 책인, 레이 초우의 <원시적 열정>(이산, 2004)을 단연 손꼽을 만하다(따라서 우리도 탈식민주의와 관련하여 '고전적인' 책이 곧 나올 만하다).

 

 

 

 

세번째 책은 재작년인가 한번 예고가 되었던 책인데, 우리의 영미문학 번역 실상을 점검한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창비)이다. 이 책은 고전이라는 '상징계' 너머, 고전 번역의 '실재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각 대학마다 교양필독서의 목록들을 '남발'하고는 있지만, 정확하게 어떤 책을, 혹은 어떤 번역서를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나 가이드는 태부족인 게 현실이다(나는 이게 '기만적 현실'이라고 본다). 영어로 된 원서라면, 그나마 원서 추천이라는 게 말이 될 수도 있지만, '기타' 언어의 고전들은 어떻게 읽으라는 말인가. 물론 번역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그렇다고 영역이나 일역으로?). 하니 고전이 아무리 숭고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접하는 건 턱없는 번역들뿐이다. 따라서, 그 턱(수준)을 좀 높이는 노력이 필요한 건 당연하며,  그 사전정지 작업으로 번역서에 대한 점검 또한 요구되는 것. 이게 간단히 정리한 이 책이 의의이다(아쉽다면, 이런 가이드북은 재생지를 쓰더라도 책값을 싸게 매겨서 널리 보급시키는 게 좋지 않았을까 라는 점. 32,000원은 부담스럽다.) 

584쪽의 책은 나름대로 방대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고 나는 모든 언어권에 걸쳐서, 그리고 철학/과학을 막론한 모든 분야에 걸쳐서 이러한 점검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교양필독서를 꼭 집어줄 수 있어야 하며, 번역서의 경우 (랭킹까지는 아니더라도) 등급/평점까지는 매겨질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나무에 가서 고기를 구하는 어리석은 짓이 재연되지 않는다.  가령 <로빈슨 크루소>, <오만과 편견>, <막대한 유산>, <모비 딕>, <무기여 잘 있거라>, <허클베리 핀의 모험>, <소리와 분노> 등 영미문학의 대표작 12편의 경우 읽을만한 추천본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 그동안 우리는 무얼 읽어왔다는 말인가?(이런 건 하고많은 영문학도들이 석고대죄할 일이다.)   

 

 

 

 

네번째 책은 W. I. T. 미첼의 <아이코놀로지: 이미지, 텍스트, 이데올로기>(서지락)이다. 소개에 따르면 "이미지와 말의 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천착해온 시카고대 영문학/미술사 교수인 저자가 언어적 관점에서 이미지의 본질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네 명의 이론가, 넬슨 굿맨, 곰브리치, 레싱, 그리고 에드먼드 버크를 역순으로 짚어가면서 이미지와 말의 관계에 관한 이들의 논의를 정리하며, 그 이면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파헤친다." 이 책이 눈에 띈 건 내가 원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3부 '이미지와 이데올로기'는 이 방면의 다른 책들에서 자주 추천되는 대목이므로 일독할 만하다(마지막 장은 "우상파괴의 수사학: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 물신숭배"란 제목을 갖고 있다). 예술/대중문화쪽으로 분류돼 있지만, 언어학/기호학쪽으로도 분류되어야 하는 책이다.

 

 

 

 

다섯번째 책은 앤드루 고든의 <현대 일본의 역사>(이산). 원저는 2002년에 나왔고 말 그대로 도쿠가와 시대부터 2001년가지의 일본 현대사를 훑은 책이라고 한다. 656쪽으로 분량도 맘에 든다. 저자는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라는데, 동양학에 있어서만큼은 하버드대가 이름값을 한다는 게 내 인상이다. 껄끄러운 일본과의 관계에서 미래지향적인 것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지일(知日)이다. '애국적'인 견지에서라도 짬찜이 읽어볼 만한 책(일본 망가만 보지 말고). 

엊그제 EBS에서 우연히 청소년을 위한 도올 김용옥 강의를 보게 되었는데,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강의하면서 우리 주변의 4강,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는 걸 그는 특히 강조했다. 당연히 영어,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정도는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그는 특히 러시아어를 강조했다). 유전 사업과 관련하여 매일같이 '러시아'는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지만, 정작 러시아에 관한 좋은 책들은 나오지 않고 있다(일본이나 중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유감스러운 일이다. '애국적'인 견지에서도(러시아어도 좀 배웁시다!). 

05. 0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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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5-11 12:51   좋아요 0 | URL
님으로부터 러시아 공부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로쟈 2005-05-11 12:54   좋아요 0 | URL
파란 여우님의 직업이 혹 알라딘 모니터링은 아니신지요? 제가 다시 읽어보기도 전에 댓글을 다시다니!..

파란여우 2005-05-11 13:12   좋아요 0 | URL
제 직업은 5월 7일까지는 공무원이었구요
지금은 무한정 놀기 시작한...^^
오타도 전 사랑하거든요...
아, 그리고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묵직한...
어찌 시간대가 잘 맞는지 히히^^

릴케 현상 2005-05-11 13:35   좋아요 0 | URL
부산에 살때 비교적 자주 볼 수 있는 외국인들이 러시아 사람이었던데다가 우리회사 사장이 러시아어 두 달 공부하고는 러시아여자랑 결혼을 해버려서 꽤 가깝게 느끼게 되어버렸어요^^ 요즘 영어와 제2외국어 공부를 고민하고 있는 중인데...중국어 대신 고려를...

로쟈 2005-05-11 13:36   좋아요 0 | URL
파란여우님/ '놀기 시작'하신 건 좀 되지 않으셨는지?^^ 자명한산책님/ 러시아 여성과의 결혼이라... 해볼 만한 '모험'이지요.^^

마냐 2005-05-11 13:36   좋아요 0 | URL
사이드의 책을 주말까지 숙제로 받아놓았슴다. 좀 바쁜 주라...제대로 읽을런지...쩝.

로쟈 2005-05-11 13:37   좋아요 0 | URL
<다시 에드워드 사이드를 위하여> 등에서 '컨닝'을 좀 하심이.^^

로쟈 2005-05-12 13:37   좋아요 0 | URL
번역서로서 표준적이었던 건 랴자노프스키의 <러시아사>였습니다. 그리고 호스킹의 <소련사>. 사실 러시아사는 1991년 이후의 시각에서 다시 정리돼야 하는데, 그런 시각에서의 최신사는 아직 번역/소개돼 있지 않습니다...

테렌티우스 2006-12-09 13:13   좋아요 0 | URL
아 사이드의 강연장에 계셨군요! 저는 그날 수업이 있어서 그 강의를 들으러 택시를 타고가 앞 부분을 놓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는데요... 강의 후 질문시간에 누군가가 오늘날의 사회에 있어서 종교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는데, 사이드가 '종교? 바로 종교가 문제지!'하는 대답을 해서 사람들이 다같이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여하튼 그럼 로쟈님과 저는 구면(?)이네요...^^

로쟈 2006-12-09 15:52   좋아요 0 | URL
저는 통역하던 배유정씨만 기억이 나는데요.^^
 

지난주는 전공 관련 글을 쓰느라고 바쁘게 지냈다. 어제로써 승전 60주년을 맞은 러시아도 못지 않게 바빴을 법하다(푸틴 왈, "그래도 스탈린이 히틀러보다는 낫다." 이건 슬라보예 지젝의 단골 구호이기도 하다). TV에서 본 외신에 따르면 기념행사는 (언제나 그렇듯이) 크레믈린 광장에서의 불꽃놀이 행사로 마무리되었다. 그걸 보면서 든 단상들이 없지 않아서 몇 자 적어내려가다가 그만 날려버렸다. 다시 쓸 형편은 아닌지라, 그냥 막바로 책 얘기나 하기로 하겠다. 대신에 다른 자리에 남겼던 코멘트 하나만을 옮겨놓고.

(현 푸틴 정부의 독재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강경하지 않은, 노골적이지 않은 독재도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 현 상황에서라면 그건 (아직도 덩치가 제법 큰) 러시아의 해체를 의미합니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몰락 이후에 러시아라는 다민족 국가를 묶어줄 수 있는 끈이 없거든요. 전승 60주년을 그토록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이고. 체첸 분리주의에 대해서 강경하게 대응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터입니다. 해서 현재로선 (민주주의가 아니라) 애국주의 모드밖에는 없습니다. 먹고 살 만큼 경제적 상황이 호전될 때까지는 애국심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전에 모스크바 통신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농부(=러시아)의 자유와 장사꾼(=서구)의 자유는 의미의 외연이 같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많은 땅이 필요하지 않듯이 많은 자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적어로 대개의 러시아인들이 생각하기엔(물론 경제엘리트 자유주의자들은 또 생각이 다르지만. 대신에 경제엘리트들에겐 관료엘리트들과는 달리 애국심이 결여돼 있습니다). 요컨대, 현단계에서 러시아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입니다(그래서 나온 것이 러시아식 민주주의일 겁니다).."

지난주 이건희 삼성회장이 고대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으러 갔다가 반대하는 학생들에게 '봉변'을 당한 뉴스도 여기저기서 도마에 오르고 있는데,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이번주 <씨네21> 의 한 꼭지도 그랬다. 진중권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가 "수령님, 우리들의 수령님"이란 제하에 이 '사건'을 다루고 있었는데,  새삼스러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음미할 만한 비유: "이번 사건은 종교적 경지에 달한 북조선 수령 문화의 자본주의적 버전이다." 요컨대, '빨간 바이러스' 진중권의 진보주의는 북조선의 수령주의와 남조선의 재벌주의(혹은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똑같이 비판적인 것. "북조선에서는 수령님이 인민을 먹여살린다. 남조선에서는 삼성이 국민을 먹여살린다."

물론 여기엔 비아냥이 들어가 있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름대로의 메시지도 포함하고 있다. 남조선 '삼성맨'들은 북조선 '주체맨'들을 비판할 근거가 없다는 것. 왜? 똑같은 놈들이니까(수령이나 재벌이나 다 '돼지'라는 아이콘으로 표상된다). 이것이 진중권의 입장이라면, 그것은 나치즘/파시즘과 스탈린주의를 똑같은 '전체주의'로 묶어서 비판한 한나 아렌트식의 '자유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니, 그가 당파성에 보다 충실하다면, 비록 똑같이 종교적 경지에 달했다 하더라도, "(굶어죽는) 북조선의 수령주의가 (소수만 배터지는) 남조선의 재벌주의보다는 더 낫다"고 말해야 한다(스탈린주의가 파시즘보다는 낫다는 맥락에서). 적어도 그는 자칭 '레드 바이러스'이니까.

진중권의 결론: "삼성 철학의 상상력 밖에서는, 자주는 아니더라도 아주 가끔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도 있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그 가치는 인문정신을 담당하는 교수들이 앞장서서 지켰어야 한다. 그들이 방기한 그 일을, 학생드링 했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교수들은 그 장한 학생들을 '징계'하겠다고 벼르고 자빠진 모양이다." 일리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전제는 좀 의심스럽다. 교수들이 (소위 돈 주고 살 수 없는 가치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인문정신의 전도사요, 어쩌면 전사라는 전제 자체는 너무도 고루하면서 '보수적'이다. 설사 그러한 교수분들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아주 가끔' 존재하는 것 아닌가? 그게 (이미 혁신된) '현실' 아닌가? (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말로 돈이 지배한다는 걸 보여주는 교수들의 행동이야말로 어줍잖은 반대자들의 비아냥들보다 훨씬 '교육적'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적당한 반대라는 건(수사적인 발언의 '수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언제나 체제와 공생적이지 않은가?

또다른 논평: "특히 이번 해프닝을 계기로 부총장 이하 보직교수 전원이 총사퇴를 결의하고 시위 학생들에게 징계위협을 가하고 있는 고려대학교 학교당국의 반응은 정말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전직 대통령이 정문조차 넘지 못하는 수모를 당하고 돌아갔을 때에도 태연하던 이들이 모든 학문적 양심을 480억 원에 팔아치우고 재벌총수에게 굽실거리는 꼴이란 정말 실망스럽다 못해 측은하기까지 하다. "인간보다 돈을 중시하는 이에게 철학박사 학위를 팔아먹고도 당신들이 더 이상 인문학의 위기를 운운할 수 있겠냐"는 인터넷 상의 한 고려대학교 학생의 울분에 찬 토로는 신자유주의 시대 대학의 위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뼛속깊이 실감하게 한다. 이참에 사직서를 제출한 고려대학교 교수들은 보직만 내놓을 것이 아니라 아예 교수직까지 반납하고 학교를 떠났으면 한다." 혹 그들의 보직을 내놓으면서까지 '시위'하는 건 (교수직이라는) 자리를 보전하기 위함이 아닐까?

계속. " '옳고 그름'이 아니라 '돈과 이익'에 따라 몰려다니는 교수들의 모습을 보고 학생들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대학을 더 상품가치가 높은 노동력을 찍어내는 '취업알선소'쯤으로 여기는 교수들이나, 부끄러움을 모르고 학생들을 '폭력집단 철부지'로 매도할 줄이나 아는 '어른'들 속에서, 그래도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학문의 정신이 있음을 당당히 얘기하고 살아있는 비판적 지성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자 한 고려대학교 학생들에게 늦게나마 박수를 보낸다. 나아가 삼성과 같은 악질자본들의 탄압에 맞서 힘겹게 싸워왔던 노동자들의 투쟁에 오랜 기간 꿋꿋이 연대해왔던 학생운동을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노동자 사회운동이 적극적으로 나서 이들을 지지 엄호해야할 때다."(<사회화와 노동>, 263호)

옳은 얘기다. 혹은 옳기로 작정한 얘기다. 하지만, "인민의 재앙과 초절정 사기술책으로 성장한 삼성", 그리고 그 '삼성과 같은 악질자본들의 탄압'에 대한 비판의 칼날은 역시나 동형론적으로, "인민의 재앙과 초절정 사기술책으로 버티고 있는 북조선"에 대해서도 마땅히 겨누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게 아니라면, 아주 당당하게 "(인간적으로 다수가 굶어죽는) 북조선의 수령주의가 (비인간적으로 소수만 배터지는) 남조선의 재벌주의보다는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잘 사는 세상'으로서의 '참세상'에 대한 비전은 보다 솔직해져야 한다. '모두가 잘 산다는 비전'은 자본주의적 비전/미끼이다(더불어, 모순적이다. '모두가 잘 산다면' 아무도 잘 사는 게 아니다). '모두가 똑같이/적당히 못사는 세상', 그게 보다 솔직한 공산주의 비전이다. 혹은 삶에 대한 평가의 기준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배는 곯더라도 발레 보러 다니는 게 '참인생'이라는 식으로. 그런 게 고상한 비전이다. 인간이란 종의 본성이 그런 비전에 걸맞을 정도로 고상한가 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이지만. 

 

 

 

 

 

이런 식으로 투덜거리는 나의 온건한 결론은 역시나 이번주 <씨네21>에 실린 '투덜양'의 그것이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 대한 감상문을 작성하면서 김은형 기자는 이렇게 쓴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현실주의자의 이야기다. 누군가는 현실주의가 아니라 패배주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구리들은 지는 싸움을 한다. 애당초 그들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목숨 걸고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하겠다는 비장감이 없다. 심각하게 대책회의를 하다가도 '누가 나설래?' 그러면 모두 자는 척을 하고, 또 그러다가 회의 끝나고 햄버거를 하나씩 돌리니 입이 찢어진다." 그 햄버거가 적(인간)들이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해서 "뭘하든 (이들의) 시작은 창대하지만 그 끝은 미미하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뭐, 어때'라는 식이다.  현실은 이들을 밀쳐내지만 이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악질적인 돼지과도 아니고 그렇다고 빨간 바이러스과도 아닌 나로선 이런 너구리과에 분류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즉, 나는 현실주의자이고 패배주의자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변혁이나 혁명과 달리 다수 의견의 난장으로서의 '정치'란 그런 현실주의/패배주의의 장이다. 그리고 그 장은 소설의 장이기도 하다. 내가 사랑하는 건 그 소설들의 세계이고 너구리들의 세계이다. 그 세계가 각각 경제적/ 도덕적으로 잘난 체하는 '돼지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으면 좋겠다...(하겠다던 책 얘기는 다음에 해야겠다.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역시 미미하군... )

05. 0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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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5-10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녁 시간에 너구리 친구 한 명 다녀 갑니다.^^

로쟈 2005-05-10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도 고치기 전에 다녀가셨군요.^^

깍두기 2005-05-10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구린데요.....그래도 진중권의 글은 멋졌어요^^;;;
(햄버거는 어디서 주나요?? =3=3=3)

로쟈 2005-05-10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그는 주로 '멋있는' 말을 하죠...

종이 2005-05-11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수의견의 난장으로서의 '정치'가 주는 혐오감이 소설과 같은 장에 두고 말할 수 없게 합니다. 소설이 포함하는 자괴감과 부끄러움을 현실정치는 모르니까.
대중인쇄물에서 그나마 진중권과 같은 발언을 확인하는 거는 좋았습니다.

로쟈 2005-05-11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탈린도 박정희도 그런 '정치'를 혐오했지요...
 

지난번 '최근에 나온 책들(37)'과 관련하여 내게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었다. '좋은 일'이란 건 나의 궁색한 소리에 한 독지가께서 한꺼번에 다섯 권의 책을 '선물'로 보내주신 것. 거기에는 내가 그 글에서 언급한 지젝 책 두 권과 박노자의 책이 포함돼 있었다. 처음엔 선의를 사양했지만, 나중에 갚으면 된다라는 말씀에 넙죽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책들을 오늘 받았다(이 분은 나의 주소지도 알고 있었다). 고맙고 기쁜 일이다.

반면에, '나쁜 일'이란 건 강유원씨에 대한 언급과 벤야민 번역에 대한 지적이 때아닌 구설수에 올랐다는 것. 나로선 번역 텍스트들에 대한 자세한 읽기를 5월중에 시도해보겠다고 했건만 한 성급한 독자의 선의/악의 때문에 성마른 비난들에 내몰렸다(물론 일부에 국한되는 얘기이긴 하지만, 그것이 인문학에 대한 과도한 열기의 분출인지 종교적 열정의 갈급한 표출인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그에 대한 성급한 판단은 잠시 미뤄두도록 하겠다). 그 대부분의 비난들에서 내가 별로 얻을 게 없었다는 건 유감스럽다.

텍스트는 읽으면 되는 것이고, 강유원씨의 작업도 기본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읽기이다. 하지만 모든 언어의 텍스트를 그 모든 언어로 읽을 수는 없으므로 번역이 필요하며 또 요긴하다. 번역의 중요성과 의의에 대해서는 항상 강조해온 바이므로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 또 번역이 중요한 만큼 번역에 대한 비판, 즉 번역의 장단점을 짚어보는 일 또한 중요하다는 건 당연하다(강유원씨 또한 이 일에 앞장서 온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일에 사적인 감정이라는 건 우습고도 같잖은 것이다(일면 면식도 없는 강유원씨에 대해서 내가 사적인 감정을 갖고 있을 리 만무하다). 중요한 건 텍스트 읽기이고, 이해이다. 그걸 위해서 서로가 도움을 줄 수 있고 서로의 오류는 교정받을 수 있다. 나머지는 나의 관심사항이 아니며, 번역에 대한 나의 지적에 대해서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되기를 기대한다.

어쨌든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었으며, 좋은 일에 대해서는 오래 기억해두도록 하고 나쁜 일에 대해서는 곧 잊어버릴 작정이다. 그게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기에. 한편, 당부의 말씀을 덧붙이자면, '최근에 나온 책들'이라는 연재는 나의 블로그와 내가 드나드는 카페에만 올려놓는 것이므로 허락없이 다른 공간에 퍼나르는 일은 삼가해주셨으면 한다. 글의 성격상 이 연재는 순전히 나의 '기억'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다(물론 몇 분의 지인들 정도는 염두에 두고 있다). 그것이 다른 분들의 기억 보조에 사용되는 건, 가능한 일이긴 하나 나로선 부수적인 일이다. 이건 기본적인 전제이다. 거기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일은 내가 보기에 주제넘는 일이면서 당나귀들의 일이다. 나와 친분이 있는 사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에서도 다섯 권을 꼽는 일은 식은 죽먹기이다. 아마도 몇 권은 어림짐작으로 맞히실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꼽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 지식의 대통합>(사이언스북스)이다. 나는 언제가 '윌슨의 모든 책'이라고 쓴바 있으며(나는 한 리뷰에 '에드워드 윌슨과 나'라고까지 적었다. 비록 '객기'일지언정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다), 그의 <통섭(Consilience)> 또한 예외는 아니다(사회생물학과 생물철학쪽 서가를 보니 이 책의 복사본이 뉘어져 있다). '사회생물학'을 창시한 지 30년만에 우리말로 번역되는 그의 또다른 주저이기에 반갑고, 무엇보다도 최적임의 역자들이 수고해준 것이 미덥다(개인적인 얘기지만, 몇 년 전 내가 이 책을 대출했을 때 선행 대출자로 역자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

책은 부제에 걸맞게 학문과 지식의 대통합에 대한 윌슨의 구상을 펼쳐보인다, 고 한다. 이미 <사회생물학>에서 그 구상의 얼개를 내비친바 있지만, 윌슨이 보기에 학문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으로 양분되면서 사회과학은 모두 양극, 특히 생물학과 인문학으로 흡수될 거라는 게 윌슨의 전망이다(생물학은 우리의 물질과 경험을 다루고 인문학은 텍스트를 다룬다). 한 서평에 따르면, 이 책은 윌슨의 여러 책들 가운데 "가장 현란한 지적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그러니 멀미약을 지참하고서라도 한번 읽어봄 직하다. 데리다 같은 '현란한 몽매주의자'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고 하니까 주변적인 구경거리들도 놓치지 말아야겠다.

 

 

 


두번째 책은 크로포트킨의 <만물은 서로 돕는다>(르네상스). 재작년에 자서전이 번역돼 나온 이 러시아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는 지리학자이자 동물학자이기도 하며 자연세계에서 적자생존이 아닌 상호부조의 원리가 진화의 동력이라는 걸 이 책에서 입증하고자 한다. 즉 "상호부조야말로 상호투쟁과 맞먹을 정도로 동물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며 그 이상이다. "상호부조는 어떤 개체가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하면서도 최대한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더라도 상호부조에 대해서만 강조하는 건 자연계의 일면만을 강조하는 게 될 것이다(악어와 악어새는 서로 우호적이지만, 악어와 악어사냥꾼은 서로 적대적이니까).

사실 비슷한 논지의 책이 이미 소개돼 있긴 하다. 10년 전에 나온 <새로운 생물학>(범양사출판부, 1994)은 "자연생태계를 잔인하고 냉담한 사냥터로 보는 다윈의 적자생존론을 부정하고 자연속에서 생물들이 협동과 조화를 통해 살아가고 있음을 밝힌" 새로운 생물학을 소개하고 있다. 또 매트 미들리의 <이타적 유전자>(원제는 <미덕의 기원>)도 시작은 바로 크로포트킨의 탈옥 에피소드이다. 크로포트킨의 삶 자체가 상호부조론의 실례였던 것. 상호부조론 혹은 '이타성'이라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유전적/생물학적 이익과 관련되는바, 그런 이익을 산출하는 알고리듬에 대해서는 이미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에서 과학적 통찰과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게임이론으로 푸는 인간 본성 진화의 수수께끼'라는 부제를 단 최정규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뿌리와이파리, 2004)는 그에 대한 보다 자세한 해설을 담은 국내서이다. 

 

 

 

 

'아나키즘 사상의 생물학적 기초' 라 평가되는 신간은 영역에서 옮긴 듯한데, 말하자면 중역본이 될 테다. 나는 작년에 모스크바에서 크로포트킨의 자서전을 헌책방에서, 그리고 그의 선집인 <아나키야>를 새책방에 구입한바 있다.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는 확인해봐야겠지만, 기억에 이 '상호부조론'도 포함돼 있었던 듯하다. '원전주의자'들에 따르면, 나는 이 책에 대해서 제법 읽고 말할 만한 처지가 된다. 하지만, 그들의 논리에 따라,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을 따르는 아나키스트들은 모두 러시아어를 배워서 러시아어로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인지? 물론 아니다. 원전 형이상학은 현전의 형이상학만큼이나 지지될 수 없는 것이다. 그건 그냥 그럴 듯한 기분에 지나지 않는 것(어떠한 텍스트도 의미가 자명하게 현상하지 않는다. 의미는 번역/결정되는 것이고 해체/재구성되는 것이며, 발견/발명되고 생산/소비되는 것이다). 직접성의 환상에 따라, 기분에 따라 공부하는 이들이 아직도 드물지 않은 건 유감스런 일이다.

 

 

 

 

세번째 책은 카사노바의 자서전 <불멸의 유혹>(휴먼&북스)이다. 그의 자서전은 12권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고 하니까(그러니 나름대로 '숭고한' 책이다! '수학적 숭고' 말이다) 번역서의 분량이 912쪽이라 하더라도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 재작년에 나온 <카사노바의 스페인 기행>(예담, 2002)도 그 자서전의 일부이니까 (겹치지 않는다면) 나란히 구입해놓을 만하다.

물론 내내 "마리나는 체실리아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몸은 더 성숙했다. 그녀는 언니보다 자기가 낫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안달이었다. 그녀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면 그녀 말이 맞는 것 같았다. … 그러다 어느 순간, 자기가 처녀가 아니란 사실을 내가 알고 기분이 나빠질까봐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라는 식의 내용만을 읽게 된다면 약간은 낯이 뜨거워질 수도 있겠지만, 카사노바의 자서전은 나름대로 고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책이다. 그건 내가 이 책을 읽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믿을 만한 작가 츠바이크가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츠바이크의 카사노바론은 <천재와 광기>(예하, 1993)에 실려 있으며, 아주 훌륭한 책이다. 거기에 실린 톨스토이론, 도스토예프스키론, 니체론 등이 모두 일급의 에세이이다.

 

 

 


네번째 책은 쓰지 유미의 <번역과 번역가들>(열린책들). 현직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가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료 번역가들의 육성을 담은 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인터뷰집인 셈. 같은 저자의 <번역사 산책>(궁리, 2001)이 이미 소개된바 있다. 그 책에서 인용되고 있는 한 구절: "번역은 한마디로 '말의 무게를 다는 것’이다. 저울의 한쪽에 저자의 말을 얹고 또 한쪽에는 번역어를 올려놓는다. 그리고 이 둘이 균형을 이룰 때까지 작업을 계속해나간다. 하지만 저울에 올리는 것은 사전에 정의된 말이 아니라 저자의 말이다. ‘저자의 정신이 투입되어 스며들어 있고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이긴 하지만 깊은 수정이 가해진’ 말이다. 그것은 살아서 고동치는 말이며 원문에서 벗어나 있다 하더라도 다리를 뻗어 작품 전체와 긴밀히 얽혀 있다. 저울에는 그 생명의 무게가 얹힌다. 따라서 저울의 또 한편에도 ‘똑같은 생명의 리듬을 타고 움직이는 등가의 무게’가 필요하다."

조금 첨언하자면, 그때 저울에 다는 건 비단 단어만이 아닌 '말'의 여러 수준이다. 문장과 문단과 텍스트 전체가 거기에 올려져야 한다는 얘기. 그리고 궁극적으로 저자 자신을 올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톨스토이는 한국어 톨스토이로, 도스토예프스키는 한국어 도스토예프스키로 다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다섯번째 책은 메를로퐁티의 논문 번역서인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책세상문고)이다. 1952년에 발표된 논문은 나중에 단행본 <기호들>(1962)에 첫 논문으로 수록되었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분량은 짧지만 메를로 퐁티 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몸의 현상학 그리고 회화와 언어의 표현 형식에 대한 탈근대적 이해 등 그의 존재론과 예술론을 집약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책에서 그는 언어와 회화는 개념적 언어가 아닌 침묵으로 표현되며, 철학은 예술의 표현 형식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영역본 <기호들>을 갖고 있으며(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 번역서의 초반부를 좀 읽어보았다.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소쉬르의 언어학과 관련한 대목이 먼저 나오는바, 언어학에 대한 예비적인 지식이 독해에 필수적임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미학 전공인 역자가 다소 미진하게 번역한 대목도 확인할 수 있었다. 원전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이런 건 굳이 불어 원본과 대조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을 포함하여, 메를로퐁티의 텍스트와 벤야민 텍스트의 번역 읽기는 5월중에 시간을 내서 시도해보도록 하겠다. 관심있는 다른 분들이 수고를 덜어준다면 나로선 고마운 일이 될 것이다...

05. 05. 02.

P.S.1. '네바 강의 환각'과 관련한 보충. 지난 토요일 한겨레에는 '김윤식 교수의 문학산책'란이 연재됐는데, '작가의식의 방법적 승리'의 세 가지 사례로 노교수는 (1)최인훈의 <하늘의 다리>(1970)에서의 환각("갠 하늘에 여자의 다리 하나가 오늘도 걸려 있다. 허벅다리 아래가 뚝 잘린 다리다."), (2)현기영의 <순이삼촌>(1978)에서의 환청("조용한 대낮일수록 콩 볶는 듯한 환청은 자주 일어났다."), 그리고 (3)임철우의 <직선과 독가스>(1984)에서의 환후("모두가 그 독가스 탓이죠.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거리에서도 잠자리에서도 그 지독한 놈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으니까요.")를 든다. 이데올로기라는 관념을 먹고 사는 괴물(=터부)에 맞서는 것으로서 온몸, 곧 감각기관이 동원되었고 이것이 걸출한 작가의식의 산물이라는 것. "분단문제, 4.3사건, 5월의 광주란 과연 무엇이었던가. 있지도 않은 허깨비들, 일종의 환각이고 환청이고 환후였던 것. 이 현장성의 휘황함이여. '우리문학 만세!'라고 내가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리는 까닭이오."

이 '환각'으로서의 문학은 이전에도 강조된바 있는 것이기에 새로운 건 아니다(노교수는 자신의 문학론을 반추하고 반복한다). 내게 의미있는 것은 그러한 문학론 자체가 '김윤식스러움'을 내포한 그만의 것이라는 것. 그 '환각'을 그는 다른 말로 '황홀경'이라 불렀던바, 문학이란 그 '환각'의 발명이며 '황홀경의 사상'이다.

P.S.2. 이미 알려진 바대로,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은 루틀리지의 'Critical Thinkers' 시리즈를 옮긴 것인데, 오늘 책의 속표지를 보니까 6권의 책들이 근간으로 예정돼 있다. 스피박, 데리다, 롤랑 바르트, 폴 드 만, 스튜어트 홀, 하이데거가 그것들이다. <지젝>과 <사이드>의 역자들로 봐서는 수유연구실의 사람들이 번역을 책임지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올해 안에 책들이 나온다면, 해당 사상가들에 대한 입문서나 교양서로 자신있게 추천할 만한 책들의 목록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근간 리스트를 보다가 좀 아이러니컬하게 느껴진 것은 이미 출간된 <들뢰즈>가 빠진 것. 짐작대로 수유연구실의 연구진들이 번역해내는 책이라면 '들뢰즈 없는 시리즈'란 앙꼬 없는 찐빵 같은 것이지 않(았)을까? 하여간에 마이어스의 <지젝>에 대해서는 조만간 독후감을 올리도록 하겠다. 지젝을 안 읽어도 되는 이들의 여가시간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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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5-05-02 15:04   좋아요 0 | URL
흐음, 그래도 이번 페이퍼에는 제가 읽어본 책들이 꽤 나와서 퍽 흐뭇하군요(^.^;).

로쟈 2005-05-02 15:32   좋아요 0 | URL
어느새 읽으셨더란 말인가요?..

瑚璉 2005-05-02 16:18   좋아요 0 | URL
잠시 소통장애가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제가 이번에 소개해 주신 책들을 벌써 읽었을 리가 있나요(-.-;). 단지 배경설명으로 말씀해주신 책들 중 몇 권을 읽어보았다는 멘트였습니다.

2005-05-02 1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네바 강의 환각"이란 기행문의 부제는 '라스콜리니코프와 더불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다'이고, 이번에 나온 김윤식 교수의 <김윤식 선집 7 -문학사와 비평>(솔)에 실려 있다(85-113쪽). 읽어 보니, 고희를 앞둔 이 원로 비평가가 작년 8월에 네바강을 보기 위해 러시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것. 일정을 보니, 2004년 8월 21일 인천공항을 떠나서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가 돌아올 때는 모스크바를 거쳐서 2004년 8월 25일 귀국행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었다. 인천공항에는 26일 오전쯤에 떨어졌을 테니까 5박 6일의 패키지 관광이지 않았을까 싶다.

 

 

 

 

올해도 5월부터인가 페테르부르크행 직항로가 다시 열리는데, 이 직항로는 작년 여름에 최초로 개설되었고 때문에 작년 여름엔 러시아, 특히 페테르부르크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았다. 이전에는 보통 모스크바에서 1-2박 정도를 하고 페테르로 가서 3일쯤 관광을 하고 다시 모스크바로 되돌아와서 서울행 비행기를 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하절기에 직항로가 열리면서는 막바로 페테르부르크를 향하게 됐던 것이고, 김윤식 교수 또한 그런 여정을 밟았던 것이라 짐작된다(그리고 글의 내용으로 봐서 지난 페테르부르크 여행은 김 교수에게서 첫번째 경험이었던 듯).

그런 여정이 왜 필요했던 것일까? "네바 강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네바 강을 보고 싶다. 네바 강에 가야 한다. K교를 건너며 저물어가는 태양과 네바 강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오랫동안 별러 왔소."란 시작이 말해주듯이 그것은 네바강이 파리도 아니고 런던도 아닌 페테르부르크에만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죄와 벌> 때문이기도 하다. 'K교를 건너며'란 표현이 말해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결국 필자가 직접 인용하고 있지만, <죄와 벌>(1866)의 시작은 이렇지 않은가? "7월 초순,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날 저녁 무렵, 한 청년이 S골목 뒤의 아파트에 이중으로 세 들어 있는 그의 방에서 바깥 길로 나와 느릿느릿 망설이는 듯한 걸음걸이로 K교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네바강을 노비평가이자 노교수는 보고 싶어한 것. "태양이 저물어가는 네바 강, 한 대학생 청년(라스콜리니코프)의 망상을 해방시킬 수 있는 강 네바. 만일 네바강이 아름답지 않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으리. 이것이 내가 네바강을 보고 싶은 까닭이오." 그러니까 네바강의 환각은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빚어놓은 환각이다. 하지만, 그 환각은 욕망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간접적/매개적인 것이다. 누구에 의한? 노교수는 일본 작가 마사무네 하쿠초와 거물 비평가 고바야시 히데오의 경우를 든다.

고바야시의 <네바강>이란 글의 한 대목: "어쩌다 러시아 여행 얘기가화제로 되었을 때 마사무네 씨는 얘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머리를 돌려 먼데를 보는 표정이 되어 '네바강은 참 좋아. 네바강은 참 좋아'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마사무네 씨의 심중은 물론 알 수가 없었지만 어쩐지 나는 아아, 이 분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일을 생각하고 있구나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모스크바행 시베리아 상공에서 나는 그것을 생각해냈다. 모스크바의 호텔 큰 식당에서 재즈 소음을 들으며 춤추는 남녀를 보면서, 네바강을 보고 싶다라고 문득문득 생각했다." 고바야시가 보고 싶어한 네바강이므로 '나' 또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노교수는 <죄와 벌>을 열번도 넘게 읽었다고 한다. 콘스탄스 가네트 역의 영역본도 같이(가네트 여사는 가장 저명한 러시아문학 번역자의 한 사람이다). 그리고 프랑스 영화와 러시아 영화도 보았다고( "키도 작고 초라한 전당포 노파를 청년이 온 힘을 쏟아 큰 도끼를 번쩍 들어 내리치는" 장면이 나오는 러시아판 <죄와 벌>과 그 주연 배우에 대해서는 '모스크바 통신'에서 언급한바 있다. 예상보다도 '큰 도끼'라는 게 내게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니 페테르부르크행은 벼르고 벼르던 여행이었던 것이고, 이미 정년퇴직하고 고희를 앞둔 노교수는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가방을 챙긴다. 예술이라는 환각에 한번 더 몸을 싣게 된 것.

그리고, 그렇게 해서 도착한 것이 '환각의 도시' 페테르부르크이고 에르미타주 박물관이다(에르미타주는 페테르관광의 제1코스이다). "그렇소. 이 에르미타쥐 박물관의 덩치는 제법 컸소." 에르미타주에 전시된 그림 이야기가 잠깐 나오지만, 노교수의 기행문은 대부분 페테르와 관련한 문화적 기억으로 채워져 있다. 대한제국의 특사 민영환의 페테르 방문기부터, 이태준의 <소련기행>과 앙드레 지드의 <소련기행>, 그리고 루카치의 도스토예프스키론에 이르기까지. 사실 직접 눈으로 본 러시아, 그리고 페테르부르크란 이런 문화적 기억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아름다움 풍광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대단한 무엇으로 격상되는 것은 '환각' 혹은 '위대한 망집'과 함께함으로써이다.

"비행기 속에서 포도주 몇 잔에 내가 곯아떨어졌다고 말하지 마시오. 주체할 수 없는 황당무계한 러시아적 망집의 무게에 짓눌려 내내 숨조차 쉴 수 없었던 것이오. 그렇다면 5박 6일 동안 나는 과연 마법에 걸려 꼼짝 못하고 허우적거리기만 했던가. 네바 강의, <죄와 벌>의 포로이기만 했던가. 내가 숨 쉴 틈은 아무 데도 없었던가."(112쪽) 과연 어느 정도였던가? "2004년 8월 25일 9시 반. 저무는 모스크바 공항을 뒤로 하고 귀국길에 올랐소. 내내 <죄와 벌>에 시달렸소. 크렘린 광장에서도 바실리 성당에서도 아르바트 거리에서도 그러했고 레닌 묘소 앞에서도 그러했소. 심지어 볼쇼이 극장에서 <백조의 호수>를 보면서도 그 <백조의 호수> 너머에 있는 <죄와 벌>이 보였소."(109쪽) 요컨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들린 이가 작년에 작고한 시인 김춘수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것만은 아니어서, 노교수는 러시아적 망집이 아닌 그만의 고유한 환각과 대면할 수 있었다. 그 계기를 만들어준 건 에르미타주에서 마주 친 김흥수 화백의 <승무도>("피카소의 방에서 나와 바야흐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복도에서 문득 마주친 <승무도>".  이 그림이 에르미타주에 걸려 있는 유일한 한국 그림이며, 정말로 '복도'에 걸려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여름궁전'에서 트럼펫 연주로 들은 <고향의 봄>(거리의 악사들이 아르바이트로 관광객들을 위한 레파토리를 연주한다). 이 두 가지가 그를 러시아 여행의 피로와 멀미로부터 구해준 셈이다.  

"내 것인 환각 하나, 내 것인 환청 하나에 가까스로 매달려 있는 나를 깨운 것은 덜커덩 하는 비행기 바퀴 내리는 소리였소. 긴 다섯 개의 낮이었고 짧은 여섯개의 밤이었소. 공항에 내리자 늙은 마누라가 근심스레 기다리고 있었소."(113쪽)

개인적으로 나는 작년 8월 25일 저녁 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모스크바 통신'에서는 그날을 니체의 사망 104주년이 되는 날로 기록하고 있다). 일행과 같이 한국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서 한국 노래들을 부르기도 했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에 한국에서 온 노교수는 모스크바 제2 공항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니 나름대로 인연이라 할 만하다(그날 그 시간에 나는 노교수와 '함께(?)' 모스크바에 있었던 것이다!). 그 인연은 아마도 더 이어질 만하다. 지난 여름 내내 나 또한 <죄와 벌>에 시달렸던바, 새로운 번역이 나온다면 노교수도 한번쯤 읽어줄 듯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너무 멀지 않은 장래이길 바란다...

05. 04. 30.

P.S. 더위를 좀 식히려고 후배들과 칡냉면을 시켜먹고서 배부른 김에 몇 자 적었다. 내가 네바강을 처음 본 건 작년 10월초이며, 나 대로의 기행문은 '모스크바 통신'을 참조하실 수 있다. 평소에 존경하는 노비평가의 여정이 우연히도 '익숙한' 것이서 덩달아 '네바강의 환각'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친구와 함께 걷던 네바강의 주변의 거리들과 다리들.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의 집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뒤지고 다니던 기억들 등등). 비록 나로선 남성적인 네바강보다는 여성스러운 모스크바강에 더 애정을 느끼긴 하지만...

끝으로, 노교수의 글에 들어 있는 몇 가지 오타 및 착오를 적어둔다. 98쪽에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에까지 갔던, 대한제국의 민영환 특사  일행이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는 페트로그라드)에 왔다가 모스크(바)로 되돌아가 이번엔 한참 건설 중인 시베리아 철도로 귀국했소."(98쪽)라고 돼 있는데, 페트로그라드란 명칭은 1차 대전 발발(1914)와 함께 독일식 이름인 페테르부르크를 대신했던 이름이므로 대한제국시절과는 무관하다.

 

 

 

 

그리고, 100쪽, 각주 13)에서 이태준의 책 <소련기행>(깊은샘)이, '졸저'로 돼 있는데, 당연히 오기이다. 그리고 103쪽에서 "범죄 전문가인 예심판사 포로비치의 첩자일지도 모르는 인물 스비드리가이로프"란 표현이 나오는데, '포로비치'는 '포르피리'의 착오인 듯하고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그의 첩자일지 모른다는 것은 처음 듣는 내용이다. 106쪽 등에서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나오는 수학공식이 '1+1=2'로 돼 있는데,  보다 정확하게 하자면 '2+2=4'라고 해야 맞다.

 

 

 

 

더불어, 111쪽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직계 혁명가 레닌"이란 표현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라스콜리니코프의 직계'라고 하면 모를까). 굳이 계보를 찾자면,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1863)의 작가/비평가 체르니셰프스키의 직계이며, 도스토예프스키는 체르니셰프스키 등의 동시대 진보적 인텔리겐치아들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소비에트에서 대단히 폄하되며, 1930년대에는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고리키조차도 그런 비판에 가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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