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신간들 가운데 가장 묵직한 책은 며칠전 소개한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배>(안티쿠스)와 함께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1914-1984) 등이 편집한 <사생활의 역사>(새물결, 2006)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두 권이 마저 나와서 전체 5권이 완간된 이 책은 올해 완간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함께 '사건'이라 할 만한, 새물결출판사의 역작이다.

 

 

 

지난 2002년에 나온 1,3,4권 중에서 나는 한권을 갖고 있는데 당장은 눈길이 닿지 않는다(출판사 할인판매시 30% 할인 가격으로 구입했던 기억이 있다). <아동의 탄생>이나 <죽음 앞의 인간>이 아리에스의 대표작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제안으로 기획됐다는 <사생활의 역사>가 갖는 의의도 간과될 수는 없겠다. 책을 당장 곁에다 둘 형편은 아니어서 리뷰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사회학자 김종엽 교수의 글인데, 나름대로 의미가 없지 않은 건 (내 기억에) 필립 아리에스란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이 그의 <웃음의 해석학, 행복의 정치학>(한나래, 1994)에서였기 때문이다. 그게 어느덧 12년 전 이야기다. 결자해지 차원에서라도 아리에스에 관한 해설은 그의 몫으로 돌리는 게 낫겠다.  

경향신문(06. 12. 09) 公과 私 영역, 분리와 융합의 역사

‘사생활의 역사’는 어린이와 죽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역사학을 혁신한 필립 아리에스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으며, 아날학파의 노장 및 신진 모두의 역량이 투입돼 프랑스에서 1985년에 출간되었다. 모두 다섯 권으로 된 1권(로마제국~11세기)과 3권(르네상스~계몽주의), 4권(프랑스 혁명~1차 세계대전)이 2002년에 먼저 우리말로 번역되었는데, 이때 각종 매체의 서평들은 부부의 침실과 귀족의 일기장과 집안 하녀들의 생활 같은 영역에 대한 핍진한 연구에 경이감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고 의의는 무엇인지를 알리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번에 2권(중세~르네상스)과 5권(1차 세계대전~현대)이 나옴으로써 마침내 완역됐는데, 더 이상 사생활 속으로 역사적 시선을 투과시키는 것의 중요성과 의미를 해설할 필요는 없어진 듯하다. 먼저 번역된 ‘사생활의 역사’가 제법 널리 읽힌 데다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도 이 책과 같은 시도가 이미 꽤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생활의 역사’ 전체에 대한 논평보다는 이번에 새로 번역된 것들을 중심으로 논의하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필자가 보기에 두 책 중 2권보다 5권이 더 적합해 보인다. 2권을 읽으려는 독자는 이미 이전 번역을 읽고 그 결락 부분을 채우려는 독자일 것이고, 그런 독자에게 책의 의의를 논하는 것은 불필요해 보인다. 이에 비해 5권은 이미 ‘사생활의 역사’를 읽어본 독자에게도 새로울 뿐 아니라 읽어본 적이 없는 독자가 ‘사생활의 역사’에 접근해 보려 할 때도 제일 먼저 읽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다. 독서의 쉽고도 좋은 길은 역시 자기가 속한 시대와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5권은 흔히 사생활이라 불릴 만한 것인 섹스와 자신의 육체에 대한 태도나 가족생활뿐 아니라 노동과정의 변화와 제1,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대도시의 형성사가 다뤄진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사생활의 역사가 친밀한 인간관계의 영역, 그리고 개인의 자기관계를 다루는 것 못지않게, 아니 그런 역사를 다루기 위해서도 사생활의 영역을 규정하는 공·사의 분리선과 변동을 그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제1차 세계대전은 규모나 전개 양상 모든 면에서 인류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런 전쟁은 개인의 사생활을 바꿀 뿐 아니라 군인의 참호 생활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사생활을 만들어냈다. 그렇기 때문에 사생활의 역사를 추구하는 한 전쟁에 대한 분석을 피할 수 없다. 같은 논리의 연장선에서 20세기에 대두한 집단수용소는 수용소 안에서의 삶이라는 새로운 사생활을 야기했기에 분석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이렇게 공적 구조의 변화가 사생활의 변화와 적응 그리고 새로운 창출을 야기할 뿐 아니라 사생활의 변화가 공적 구조의 변화와 개입을 유발하기도 한다. 20세기는 이혼과 동거가 폭증하고 임신과 섹스가 역사상 어느 때보다 인간의 의지에 의해 조절된 시대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병원과 법률이라는 공적 장치가 끊임없이 개입해 들어온다. 결국 가족생활의 주도권이 국가와 개인에 의해서 분점되고 개인은 그 여분의 주도권마저 의사와 교사 그리고 양육 전문가와 심리치료사 같은 각종 전문가 집단에 양도해야 한다. 그리하여 가족은 오로지 감정생활이라는 단 하나의 줄에 매달려 나부끼게 된다.

그리하여 제5권은 사적 영역의 역사이자 그 자리에서 바라본 공적 영역의 역사가 되는데, 책장을 계속 넘겨보면 이 책의 저자들이 좀더 야심적임을 알게 된다. 문화적 다양성을 다룬 제3부는 종교와 내면생활의 변화(‘가톨릭 신자들: 상상과 죄’), 정치적 정체성(‘공산주의자 되기?-하나의 존재방식’), 인종적 정체성(‘유대인으로 살아가기’와 ‘이민자로 살아가기’)을 다룸으로써 20세기가 만들어낸 특유한 자아 정체성의 궤적을 범례적으로 다룬다. 그리고 제4부는 미국·스웨덴·이탈리아·독일의 사생활을 분석함으로써 사생활의 비교사회학의 토대를 놓고 있다. 이렇게 해서 ‘사생활의 역사’는 한 권의 훌륭한 20세기 서양사에까지 근접해 간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이 책의 의의는 서구인의 삶 그리고 사생활이라는 소재에 대한 관음증적 호기심을 격조 있게 충족시켜주는 것에 그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은 이유 가운데 두 가지 정도를 꼽고 싶다. 우선 이 책을 읽으면서(특히 제4부) 우리의 사생활이 의외로 서구인의 삶과 가까우면서 또한 다르다는 것을 시종일관 깨닫게 된다. 우리 사생활의 어떤 측면은 미국·프랑스·이탈리아·독일과 닮았고 심지어 스웨덴과도 유사한 데가 있지만 동시에 이 모든 사례와 다르다. 공시성과 역사적·문화적 차이를 매개로 한 공시성의 다양한 조합, 변화에 대한 민감함과 어떤 끈덕진 지속을 모두 실감하게 되는데, 이런 독서 경험을 통해 자기 성찰의 길이 열린다는 점이 소중하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이 책의 독서가 주는 각별한 기쁨의 원천은 사생활이라는 소재에서 오는 재미이기보다는 사유를 촉구하는 힘을 가진 역사학적 통찰을 담은 문장들에서 오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고 싶지만 지면이 허락지 않아 아쉽다. 하지만 우선 읽기 바란다. 읽게 되면 밑줄을 긋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리라 장담할 수 있다.(김종엽|한신대교수·사회학)
 
06. 1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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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존 산본마쓰의 <탈근대 군주론>(갈무리, 2005)을 언급할 일이 있었는데, 내친김에 몇 페이지 읽어보았다. 책장을 들추니까 예전에 저자의 한국어 서문 정도를 읽었군. 나는 작년에 책이 출간되자 마자 서점에 가서 몇 페이지 읽어보고 막바로 도서관에 원서를 주문했었다. '옮긴이 후기'에서 "책을 번역해 내놓을 때마다 항상 변변치 못한 번역 실력을 절감하지만, 이번만큼 번역을 내어놓기 부끄러운 적은 없었다."라고 겸양의 말을 적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의례적인 말이긴 하나 독자로선 한번쯤 주저하게 되지 않나?

여하튼 주문한 원서는 몇 달 후에 들어왔고, 나는 첫 대출자가 되었다. 그리고 복사한 책을 번역서와 나란히 책장에 꽂아두었다. 아마도 작년 겨울에 몇 권의 다른 책들과 함께 읽어볼 생각을 했을 듯한데 대개의 다른 계획들처럼 실행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손에 든 것이다. 그리고 서문을 읽었다. 저자가 책의 윤곽에 대해서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어서 마치 조감도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덧붙이자면 번역은 역자의 엄살과는 달리 잘 읽히며 무난하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서문을 정리해두려 했으나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견적을 필요로 한다. 저자가 다루고 있는 범위가 매우 넓고 또 논쟁적이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모든 종류의 전력작 정치사상을 폭넓게 비판한 이 포스트구조주의 비평가(=푸코)가 급진적 전통에 가장 큰 해악을 끼쳤다고 주장한다."(35쪽) 같은 핵심적인 전언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상단한 분량의 사전정지 작업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러한 악역(푸코)을 물리칠 우리의 영웅으로 저자가 추켜세우는 인물은 그람시이다(그람시란 이름은 책의 헌사에도 들어 있다). 말하자면 책은 '좌파정치학'을 놓고 '탈근대 목장'에서 벌어진 푸코와 그람시의 '결투'를 다룬다. 

하지만 이 페이퍼는 그 결투를 다루지 않는다. 대신에 역사를 많이 거슬러 올라가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를 다룬다. 저자가 보기에 오늘날의 '좌파'가 처해 있는 문제점은 분리되고 분열돼 있다는 것이다. 마치 '바벨탑 이후'처럼. "전 지구적 '좌파'라는 걸 의미있는 범위에 국한해 말하자면, 게슈탈트로스 곧 '형태없는' 상태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실 세계에서 '실체'가 없는 것으로 비치는 운동이라는 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이 땅을 떠돌 운명이다."(27쪽) 그렇다면, 이 '형태 없는' 좌파는 '형편 없는' 좌파이기도 할 것이다. 그걸 타개해보고자 하는 게 책이 기획이다.

"언제나 이런 식은 아니었다. 지난 한 세기 이상, 사회주의는 세계의 좌파 상당수에게 형태 또는 형식을 제공해왔다. 사회주의 힘은 유토피아적 상상력에 있었다. 그건 바벨탑에서 잃어버린 인류의 단결을 되찾자는 고대 종교적 이상과 닿아있다."(강조는 나의 것) 그리고, 흥미롭게도 저자인 산본마쓰는 그러한 사회주의의 비전을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한 대목에서 발견하고 인용한다. 사실 이것이 이 페이퍼를 쓰게 만든 동인이기도 하다.

"사회주의는 단지 노동 문제가 아니다."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화자는 말한다. "그건 무엇보다 미학 문제이고 오늘날 무신론이 취한 형식의 문제이고, 또 신 없이 건설한 바벨탑의 문제,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이 땅에 하늘을 건설하는 문제이다."(28쪽)

참고로, 산본마쓰가 인용하고 있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1949년 Modern Library판의 영역본인데, 짐작엔 저명한 러시아문학 번역자 콘스탄스 가넷 여사의 번역이다. 그 원문은 이렇다: "Socialism is not merely the labour question, it is above all things the atheistic question, the question of the form taken by atheism today, the question of the tower of Babel built without God, not to mount to Heaven from earth but to set up Heaven on earth."

이 대목은 제1부 1편의 5장 '장로들'에 나오는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막내 알료샤의 성장사와 조시마 장로에 대한 소개로 돼 있다. 역자는 한국어판으로 이훈섭 역의 '정음사판(1959) 등 다수'라고 원주에다 병기해놓았지만, 실제로 정음사판을 참조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정음사판은 세계문학전집에 들어 있던 대중적인 판본이긴 하나 최초의 번역본도 아니며 한편으론 중역본이기 때문이다. 번역에 민감한 역자가 굳이 오래전에 절판된 중역본을 표나게 내세운 이유를 나로선 알기 어렵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it is above all things the atheistic question'을 "그건 무엇보다 미학 문제이고"라고 옮긴 건 착오이다. '미학의 문제'가 아니라 '무신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많이 읽히는 무난한 번역이지만 가넷 여사 등의 번역은 원문을 100% 번역하지 않는 단점이 있다. 때문에 가독성은 높지만 충실한 번역은 아니다. 이그나트 압세이가 옮긴 1998년판 옥스포드대학 출판부 번역본에서 문제의 대목은 이렇게 번역됐다.

"[F]or socialism is not only a conditions of labor or of the so-called fourth estate, but rather, for the most part, a question of atheism, a question of today's particular form of atheism; it is a Tower of Babel built specifically without God, not in order to ascend to heaven from earth but in order to bring Heaven down to earth."(33쪽)

단어 선택에 있어서의 차이가 작지 않은데,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역시나 가넷판에서 누락된 'of the so-called fourth estate'를 되살려놓고 있는 점이다. 김학수 선생의 국역본은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라는 것은 단순한 노동 문제라든지, 이른바 제4계급의 문제만이 아니라 주로 무신론의 문제이고, 무신론의 현대적인 구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지상에서 하늘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을 지상으로 끌어내리기 위해서 하느님 없이 쌓고 있는 바벨 탑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제4계급이란 건 프롤레타리아, 곧 노동자계급을 말한다. 중세의 신분적 위계질서 속에서 제1계급은 왕이나 영주를 가리켰고 제2계급은 귀족, 그리고 제3계급은 평민(부르주아)을 뜻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한 제4계급이 노동자였던 것. 김학수 선생의 번역에서도 '제4계급'에 대해 주석을 달아주거나(옥스포드판에는 미주가 달려 있다) '노동자계급의 문제' 정도로 옮겨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정리하면,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는 사회주의란 '신 없이 건설하는 바벨탑', 곧 무신론의 현대판이다(도스토에프스키는 이 무신론을 '니힐리즘'이라고도 부른다). 물론 이 '새로운 무신론'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와 알료샤의 입장은 부정적이다. 산본마쓰의 인용은 본래 작품에서 괄호안에 들어가 있는데 그것이 부연하고 있는 원래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알료샤도 자기 진리의 조속한 성취를 갈망하는 점에서는 다른 청년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으나 다만 그는 모든 다른 사람들과 정반대 되는 길을 택했을 뿐이었다. 그는 진지하게 생각한 끝에 신과 영생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얻자마자 곧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영생을 위해 살고 싶다. 어중간한 타협 같은 건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그가 신과 영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해 버렸다면 그는 곧 무신론자나 사회주의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강조는 나의 것)    

그러니까 알료샤에게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던 것. (1)신과 영생 (2)무신론 혹은 사회주의. 그걸 바벨탑(유토피아) 버전으로 말하자면, '신과의 영생(Immortality with God)' vs '신 없는 바벨탑(Babel without God)' 산본마쓰는 도스토에프스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여기서 두번째 입장을 사회주의의 잃어버린 비전으로 제시한다.

"바벨탑 이야기의 교훈은 이 땅에서 인간의 노력을 통한 단결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우리의 마음속에 품을 수 있는 그 무엇이라도 창조할 수 있다고 상상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창조할 수 있다고 꿈꾸면, 우리의 교만이 우리를 파괴할 것이다. 한마디로 전지구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지역적으로(또는 부족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는 거다."(28-9쪽) 하지만 그렇게 주저앉는다면 '인간'이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하지만 계속 반역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다. 이 땅에서 보편적인 화합을 이룬다는 유토피아적 표상을 후대가 계속 보존해왔다.(...) 기독교 그리고 후에 이슬람교가, 하나가 된 세상이라는 오랜 꿈을 보편적인 정의라는 자신들의 꿈의 밑바탕으로 삼았다. 한참 뒤 계몽사상은 바벨탑의 복원에대한 아브라함의 열망을 세속화했다. 근대 이성의 꿈속에서, 18세기 백과전서파와 자코뱅파로부터 19, 20세기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바벨탑을 재건하고 전체를 복원하려 했다."(29-30, 강조는 나의 것)

이어서 등장한 맑스. "맑스의 생각은 흩어진 노동계급을 단결시키고 역사적 건설 또는 포에이시스라는 공통의 기획의 바탕을 창조할 수 있는 공통의 정치 언어를 향한 탐구를 대표했다." 원문에서 포에이시스(poeisis는 이탤릭체로 돼 있다. 보통은 포이에시스(poiesis)라고 더 많이 음역되는 그리스어인데, 제작/창조(making/creating)란 뜻이고 하이데거는 'bringing forth'란 뜻으로 새겼다. 여기서는 '새로운 역사의 건설과 창조' 정도의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러한 건설/창조에 바탕이 될 '공통의 정치언어'를 맑스는 찾으려고 했다는 것.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주의는, 옛날엔 표면상으로만 달랐지 본질적으론 그렇지 않던 노동게급의 많은 '나라들'을 단결시키는 공통의 언어, 일종의 에스페란토어였을 것이다."(31쪽) 곧, 만국의 노동자를 단결시켜줄 수 있는 공통어(에스페란토어), 그게 사회주의이다. 사진은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광장에 있는 맑스의 동상. 비대에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러시아어로 새겨져 있다.

산본마쓰의 불만은 20세기 말에 이르러 이러한 사회주의의 꿈(=바벨탑)이 거의 포기됐다는 것. 남은 건 '바벨탑 이후'의 분열적인 분파들이다. 평화운동, 동성애운동, 여성주의, 환경운동, 유색인종 운동 다 제각각의 진보를 주창하지만 이게 콩가루다. 게다가 이론과 실천의 새로운 종합에 대해서는 알레르기반응을 보이는 이론들만 대학가에서 득세한다. '연대'가 아니라 '차이'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저자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현상이며, 그에 대한 분석과 비판에 뒤이어 그람시적 제스처를 따르는 새로운 에스페란토어를 제시하고자 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차이의 정치학'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다...

대략 그런 것이 내가 서문에서 읽은 밑그림이다. 책의 나머지 부분들도 흥미를 끌지만 언제 마저 읽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한편 산본마쓰가 서문에서 줄곧 참조하고 있는 책은 조지 스타이너의 <바벨 이후>(1977)이다(리쾨르의 <번역론>에서도 참조된 책이다). 나는 책의 2판인지를 갖고 있는데(젠장, 박스보관도서이다) 찾아보니 지난 1998년에 제3판이 출간됐다. 스타이너의 주저 중 하나인 이 책이 언제쯤 번역돼 나올 수 있을까, 기다리느니 원서를 읽는 게 더 빠를까? 아무튼 '바벨 이후'에 막바로 소통이 안되는 언어들 때문에, 차이들 때문에 고생 만땅이다...

06. 12. 07.

 

 

 

 

P.S. 하니, 영어 공용어론자들이야말로 좌파 사회주의자들 아닌가?(복거일은 가면을 쓴 사회주의자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망상'에 반대하면서 사회주의자는 어떻게 자신의 포지션을 유지할 수 있는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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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shin 2006-12-08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글판 번역과 관련된 언급만이 제 몫일 겁니다. '미학'은 착오에 의한 오역이군요. 바로 뒤에 무신론이 나오는데, 꼼꼼히 챙기지 못했군요.

이훈섭 역을 언급한 이유는 엉뚱한 데 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 검색 결과를 참조했고, 저 책이 첫 번역일 거라고 그냥 짐작했기 때문이지만 더 큰 이유는 절판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번역이 있고 어떤 번역이 신뢰할만한지 모르니 안전하게 아무도 볼 수 없을 옛날 책을 거론한거죠. 독자들은 이상할지 모르지만 번역자로는 그냥 '다수의 번역'이라고 주석에 달 수는 없기에 쓴 겁니다.

sommer 2006-12-08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파트와 바벨탑, 현대한국 사회와 소비에트 시절...이미 엉뚱한 곳에서 바벨탑은 '재건축'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6-12-08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rishin님/ '아무도 볼 수 없을 옛날 책', 이라도 왜 굳이 집어넣으신 건지는 이해되지 않지만, 정황은 짐작해볼 수 있겠네요. 아무도 볼 수 없을!..
suture님/ 표지의 뉘앙스를 알아보시니까 반갑습니다.^^ 곧 짓게 된다는 제2 롯데월드 같은 것도 바벨탑의 유력한 후보가 아닐까 싶네요...
 

두 명의 '퀸'에 대한 평전이 출간됐다. 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이고, 프랑스 루이 14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다른 한 사람이다. 평전류를 즐기는 독자라면 이 걸출한 여성들과 함께 부듯한 연말을 보낼 수 있겠다. 두 책과 관련한 기사와 관련자료들을 모아보기로 한다.

 

 

 

 

 

현재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탁월한 재능을 갖춘 전설적인 미인인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는 진정 불운한 군주였을까?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지은이 캐럴 쉐퍼가 여왕 메리의 출생에서 죽음까지의 과정을 추적하면서, 그녀를 둘러싼 흥미로운 사건들과 인물들을 생생하게 그렸다. 지은이는 여왕 메리의 추종자에 가까운 입장을 견지하며, 그녀를 낭만적이고 인간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그러면서도 세심한 자료 조사를 통해 객관성을 잃지 않으면서, 여왕 메리를 순교자로 되살리고 있다.

잉글랜드의 왕위를 놓고 엘리자베스 1세와 갈등을 빚던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일고 있다.

세번 결혼해 남편들을 모두 비운에 죽게 만든 요부, 신구교간의 갈등을 부추겨 결국 자신도 참수된 비극적인 여인, 불운했지만 훌륭한 군주의 자질을 갖췄던 절세 미인이었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저자는 여왕 메리의 출생에서 죽음까지의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내면서 여왕 메리를 순교자로 되살리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메리는 뛰어난 지도자이자 신앙심 깊은 여인, 시인으로 재탄생한다.

 

 

 

 

 

 

 

 

 

 

 

안토니아 프레이저

역사가이자 소설가이고, 고전기작가로 이다. 현재 극작가인 해롤드 핀터와 결혼하여 런던에서 살고 있다. 1969년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를 발효 한 후에 <크롬웰, 우리의 호민관> <찰스 2세> <나약한 성 : 17세기 영국 여성의 운명> 드의 책을 집필 했으며, 제미마 쇼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일련의 미스터리 소설을 써 왔으며, 이 탐정소설은 1983년 영국 텔레비전 시리즈로 방영되기도 했다.

 

문화일보(06. 11.24) 그녀는 사치의 화신이었나, 佛 격동의 ‘희생양’ 이었나

젊은 만화마니아뿐 아니라 1970년대 초반 학창시절을 보낸 중장 년층 중에도 마리 앙투아네트왕비, 넓게는 프랑스 혹은 프랑스혁명을 주목하게 된 계기로 일본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지 목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프랑스혁명 직전, 프랑스 루이 16세와 결혼한 오스트리아공주를 둘러싼 격동기의 프랑스를 다룬 이 작 품은 만화영화로도 소개되며 18세기 중후반의 유럽 왕녀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과 존재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렸다.

앙투아네트는 서른여덟해의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 무소불위의 권력과 비참한 감옥 등 양극을 경험한 인생 역정의 주인공. 1755년 ‘유럽의 열강’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여왕의 열다섯번째 아이로 태어난 그는 14세때 프랑스 루이16세와 결혼,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1793년 참수됐다. 이같은 연대기 이면에 변혁기 유럽사의 주요 순간을 증언하는 그녀에 대한 세평은 지금도 열성 적인 찬미와 맹렬한 비방이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대중문화를 통해 드라마나 영화 속 비운의 주인공처럼 소개됐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두툼한 전기를 통해 실존했던 역사인물로 생 생하게 되살아난다. 저자는 스코틀랜드 메리여왕, 영국의 헨리 8세와 크롬웰,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14세 전기 등을 집필한 작가.

보통 책의 2, 3배 분량의 이 책은 앙투아네트와 주변 인물의 초 상화부터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참수 직전의 모습까지 다양한 사진을 갖추며, 연대기순으로 826쪽에 걸쳐 왕녀의 인생 을 다룬다. 출생 무렵의 유럽 정세부터, 적대국인 오스트리아 출신 아내를 맞은 프랑스 황태자와 프랑스인의 마음가짐, 탐욕스러운 동성애라는 식의 각종 추문이나 참담한 감옥생활을 비롯, “그 오스트리아 여자의 머리를 내놓으라”는 광분한 군중 앞에서 참 수되기까지.

“세상물정 모르는 앙투아네트가 먹을 빵이 없다는 사람에게 케 이크를 먹으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지만, 과연 그녀는 사치하고 음란한 성욕의 화신이며 프랑스혁명의 결정적 계기였던 인 물인가.

유럽 각국의 왕실자료보관소 등에서 관련 자료를 모으고 왕녀가 나고 자란 곳을 직접 둘러본 작가는 앙투아네트이야기 중 ‘잔인한 신화와 음란한 왜곡’에 대한 반증을 제시한다. 프랑스속 오 스트리아 여자였던 그녀는 결혼뿐 아니라 죽음까지 국가적 전략 과 이해타산에 좌우된 희생자였다는 것. 당시 유럽왕실의 혼인동맹과 프랑스 왕의 외교적 수완에 따라 비정치적이고 여린 그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타락한 마녀, 기품없는 섹스파티의 상징 처럼 악평을 받아왔다는 저자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신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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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12-08 04:04   좋아요 0 | URL
앗, 무려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아내가 쓴 책이로군요. 프랑스혁명 시절의 유럽사는 큰 관심이 없었는데, 읽어보고 싶은 맘이 생깁니다. 아직 진행중이긴 하지만, 로쟈님의 '곁다리-텍스트'를 기대하면서 추천하고 갑니다.

ilbooks 2008-07-23 10:10   좋아요 0 | URL
요새 슈테판 츠바이크 책을 보고 있는데 여기서 <베르사이유의 장미>란 책이 있는 줄 첨 알았네요. 츠바이크 책을 읽고 있으니 이케다 리요코가 그의 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 알겠더군요. 만화 장면이랑 똑같아요! 수소문해서 이케다 책도 보려고 합니다~ 다 보고 나면 프레이저 책도 볼까나..
 

롱테일 경제학에 대한 유익한 반론을 게시하고 있는 블로그에 들렀다가 뜻밖에도 나와 무관하지 않은 글을 읽게 되었다(http://blog.jinbo.net/marishin/?pid=187). 내용에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옮겨놓고 몇 자 덧붙인다. 제목이 '알라딘 서재의 힘(?)'(06. 01. 28), 제목 때문에 자동적으로 클릭하게 된 글이었다(알라디너라면 당연한 일 아닌가?).  

어떤 종류건 일종의 '또래집단'이 생기면 그 가운데서 영향력이나 힘을 발휘하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힘이 외부에도 영향을 끼치게 될 때는 그 힘에 대한 평가가 필요해진다.

나만의 느낌인지 모르겠으나,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있는 '나의 서재'가 책을 사는 이들에게 꽤 영향력이 있는 곳이 아닌가 싶다. 신문이나 잡지의 서평이 워낙 '주례사' 수준인 데다가 요즘은 신문 서평을 올려놓는 게 금지되어서, 독자 서평이 더 중요해졌다. 게다가 상당한 전문 지식을 지닌 '독자'들도 많아졌고, 이들에 대한 신뢰도 높다.

이렇게 쓰면서 의도적으로 피한 단어가 '권력'이다. 권력이라고 하면 마치 대단한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그들이 무슨 권력이겠는가? 이 글은 그 '힘'을 질시해서 쓰는 게 아니다.

여기까지는 일반론이겠다.요컨대, 알라딘의 서재(또래집단!)가 '권력'은 아니더라도 "책을 사는 이들에게 꽤 영향력이 있는 곳"이라는 것. 내 경우 어쩌다 보니 나름대로 '부지런한' 알라디너가 된지라 한달에 적립되는 땡스투 마일리지가 12-13,000원쯤 된다(들쭉날쭉 하지만 15,000을 넘어본 적은 아직 없다). 마일리지가 책값의 1%이니까 내가 '영향력'을 발휘해서 '매출'에 기여하는 바가 100-150만원 정도이겠다(그걸 '기여'라고 한다면).

한데, 아다시피 이 땡스투라는 건 알라딘의 구매자에게도 1%가 적립되기 때문에 여기서의 '기여분'은 얼마간 과장된 것이다(물론 여기서는 책을 사려는 사람의 지갑을 닫게 만드는 네거티브 기여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 사례가 없지는 않지만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는가). 그런 걸 고려하면 대략 한달에 100만원, 70-80권 정도의 도서구매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자화자찬할 수도 있겠다. 따라서, "사실 그들이 무슨 권력이겠는가?"라는 지적은 온당하다. 그저 '약간의 영향력' 정도인 것(한때 나 혼자 구매하는 책들만 한달에 그 정도는 됐었다. 집에서 매우 혼났지만).    

아무튼 내가 자주 가는 어떤 '서재' 주인은 번역서의 오역 문제를 꾸준히 제기한다. 그래서 많은 참고가 된다. 그런데 오역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좀 문제가 있다. 원서를 제외하고 다른나라 번역본과 비교해서 오역이라고 단정하거나 의혹을 제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본래 프랑스어나 독일어로 쓰인 책의 한글 번역본을 영역본, 러시아어본 등과 비교하는 식이다. 이런 비교가 한두번에 그치는 게 아니라면 문제다. 만에 하나 이런 비교 글을 보고 사람들이 번역서를 의심해 책을 사지 않게 될 경우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워낙 엉망으로 번역된 책이 많아서, 나부터도 이런 평이 나오면 일단 꺼려진다.

명시적으로 '어떤 서재의 주인'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알라디너의 상식으론 '로쟈의 서재'를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본래 프랑스어나 독일어로 쓰인 책의 한글 번역본을 영역본, 러시아어본 등과 비교하는" 짓을 누가 또 하는지는 모르겠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해서 필자는 약간의 불만을 갖는 듯한데(이러한 지적은 예전에도 있었고 그에 대해서 답한 적도 있다), 오역의 문제를 학술적으로 제기하는 것도 아니고 한 독자의 입장에서 늘어놓는 코멘트에 '원본'과의 대조를 요구하는 건 나로선 일단 무리라고 본다(다른 언어의 번역본을 읽고 오역을 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필자의 입장이라면 얘기가 길어지지만). 나의 지적이 부당하다면 어째서 그러한가를 입증하면 그만 아닐까(실제로 들뢰즈나, 벤야민, 라이히 등의 번역에 대한 지적 건들에서 나는 생산적인 토론들을 주고받은 바 있다).    

필자의 염려는 "만에 하나 이런 비교 글을 보고 사람들이 번역서를 의심해 책을 사지 않게 될 경우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는 지적이다(이른바 역기능일 텐데, 필자는 순기능과의 대차도 고려한 것일까?). 물론 그럴 수 있다. 누구나 오독/오역에는 개방돼 있으며 나라고 독불장군은 아니다. 다만, 나는 나대로의 의견을 제시할 뿐이고 그에 대한 취사선택은 또 읽는 이들의 몫이다. 이제 당연히 와야 할 내용은 그런 '선의의 피해'에 대한 사례이겠다.  

자신이 일정한 영향을 끼치게 되면 책에 대한 평가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 “번역자에 따르면 철학에 대한 사회학의 복수”라는 촌평이 달린 책을 읽어보니 전혀 말이 안되는 평가였을 때 드는 기분은, '주례사'보다는 덜해도 여전히 씁쓸하다.

내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을까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번역자에 따르면 철학에 대한 사회학의 복수” 운운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언젠가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부르디외의 하이데거론 <나는 철학자다>를 소개하는 대목이다. 나는 이렇게 적었다.

책은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하이데거 읽기인바, 그는 기존의 독해를 모두 거부하면서 자신만의 (적합한)이중적 독해를 제안하고 실행한다. 즉 그는 하이데거에 대한 "(지지자들의) 철학적 독해 대 (비판자들의) 정치적 독해라는 대립구도를 포기하고, 이중적 독해, 곧 정치적이면서 철학적인 독해를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서 하이데거 철학의 고유성이 나치즘과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를 밝혀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의 의의? 역자에 따르면, "하이데거에 대한 부르디외의 비판적 분석은 당대 철학에 의해 억압받아온 사회학의 복수이자, 인문학에 있어서 늘 사회학과 경쟁관계에 있는 철학에 대한 사회학의 우위를 간접적으로 선언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최근에 나온 책들' 등 신간을 소개하는 페이퍼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는 <나는 철학자다>를 읽기 전에 어떤 책이 나왔고 어떤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식의 예비적인 정보를 늘어놓았다(이건 나 자신을 위한 정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이데거에 대한 부르디외의 비판적 분석은 당대 철학에 의해 억압받아온 사회학의 복수이자, 인문학에 있어서 늘 사회학과 경쟁관계에 있는 철학에 대한 사회학의 우위를 간접적으로 선언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도 있다."라는 역자의 말을 옮겨놓은 것이다. "책을 읽어보니 전혀 말이 안되는 평가였을 때 드는 기분"이란 건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왜 이런 멘트는 댓글로 달아주시지 않았을까?)

나는 평가를 제시한 게 아니라(읽기도 전에 무얼 평가하겠는가) 소개의 말을 덧붙였을 뿐이다(역자의 말이야 책을 사면 다 읽어보는 내용 아닌가). 혹 "번역자에 따르면 철학에 대한 사회학의 복수"란 구절이 문제된다면 일차적으론 역자와 독자의 의견이 다른 것이고(내가 주례를 잘못 섰다?). 

'주례사'보다는 덜해도 여전히 씁쓸하다.고 마무리되는 것으로 보아 나는 이 책을 '광고'했고, 필자는 이 책이 그러한 광고에 미치지 못해 실망스러웠다, 정도로 정리될 수 있을 텐데, 번역비판과 관련한 '선의의 피해'와는 좀 무관한 것 아닌가(참고로, 나의 '평가'를 말하자면, 이후에 나는 1/3쯤 책을 읽었던 듯한데 부르디외의 책은 제목도 번역도 그다지 만족스럽게 생각되지 않았다). "전혀 말이 안되는 평가였을 때 드는 기분"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것이다.

이 서재를 통한 '약간의 영향력' 때문에 내가 책임질 몫이 있다면 책임지도록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비판은 구체적이면 좋겠다. 번역서에 대한 불만을 지적할 경우 몇 페이지의 어느 문단이라고 나는 명시해왔다. 그에 대한 반론 또한 명확한 것이면 좋겠다. 그럴 때에야 우리는 '기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  

06. 12. 07.

P.S. 본문에서 땡스 투 마일리지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이 마일리지가 조만간 적립금으로 일원화된다고 한다. 카테고리 자체가 '흡수'되는 셈이다. '땡스 투'에 대해서 미리 작별인사를 해둔다. 땡스, 땡스 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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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12-07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글이 다 있군요. 원 글이 너무 짧아 담아내고 있는 내용이 미흡해서 그다지 뭘 말하려고 하는지, 왜 그런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 듯 해요. 일단 제목은 ㅎㅎ 참 안보고 지나갈 수가 없네요.

로쟈 2006-12-07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도 '인용'이라서 어쩔 수가 없네요(물론 초점은 '힘'이 아니라 '?'에 있는 것이지만요)...

기인 2006-12-07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땡스투 저도 가끔 기여(?)하고 있습니당 ;)

물만두 2006-12-07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가 그런 의미로 생각할 수 있군요^^;;

다크아이즈 2006-12-0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 제겐 '로쟈님의 힘' 이야말로 순기능인데, 저런 생각 하는 사람도 있군요. 로쟈님 이참에 삘 받아서 불어나 독어 원서로도 오역 지적하겠다고 날밤 새는 것 아녜요?^^*

로쟈 2006-12-0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전에 불어, 독어를 익혀야 할 테니까 가능하지 않은 얘기입니다.^^ 단, 우리가 번역, 번역의 번역 속에서 숨쉬고 있는 만큼 어떤 식으로든 거기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데, '원본'을 문제삼는 건 한가하거나 고답적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인용문 필자의 경우에도 여러 책을 번역했는데, 번역 원서 자체가 한 가지 언어로 돼 있는 게 아니고 많은 다른 언어텍스트의 번역/인용들을 포함하고 있거든요(말하자면 중역이 됩니다). 그런 경우에도 모든 1차 텍스트에서 직접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지 의문입니다...

LAYLA 2006-12-07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점잖은 글이네요. 로쟈님의 글이요^^

2006-12-07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2-07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뭐 액면상으로는 그렇습니다. 암튼 자주 들르신다니 감사합니다. 따로 대접해드리진 못하지만...

마태우스 2006-12-07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얘기가 언급되는 건 대부분 기분 씁쓸하죠. 게다가 그 얘기에 동의못하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나저나 로쟈님 땡스투, 대단하십니다. 거의 신의 경지... 그정도의 매출이라면 알라딘서 님한테 잘해야 할 것 같은데요...

로쟈 2006-12-07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의 신들은 참고서의 신들이죠.^^ 저는 아직 말석입니다...

마법천자문 2006-12-07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rishin' 님이 아마 한겨레 신기섭 논설위원일 겁니다.

로쟈 2006-12-07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블로그에 그렇게 소개돼 있더군요.

yoonta 2006-12-07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삐딱하기두 하군요..marishin이란 분...강유원홈피에서 자주 뵙는 분같던데..로쟈님이 이곳에서 일종의 영향력?을 행사하는것에 질투라도 느끼셨나? -_- 로쟈님처럼 정성들여 알라딘 서재를 풍요롭게 해주시는 분들에게 칭찬은 못해줄 망정 저렇게 빈정대고 있으니..그리구 이 서재에 자주들려서 로쟈님 글들을 비교적 꼼꼼히 읽는 한 사람으로서 로쟈님이 비록 원본이 독어본이나 불어본인 책들을 영어본이나 러시아본으로 문제제기 했다손 치더라도 그 지적에 어떤 심각한 결함이나 문제점이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marishin이란 분의 글에 일부분이나마 공감할수있으려면 본인 스스로가 로쟈님의 글중 영어본이나 러시아본을 통해 번역상의 문제를 제기한 글들중 어떤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로쟈 2006-12-07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그 '힘'을 질시해서 쓰는 게 아니다"라고 하셨으니 믿어야지요. 한데, 제가 갖는 불만은 그 '글'이 고작 '두 문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씁쓸함'이라...

퍼그 2006-12-08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씁쓸해' 하진 마세요.^^ 저는 로쟈님이 오역을 지적하실 때 '외국어' 능력보다는 '국어' 실력을 발휘하신다는 생각을 종종 했는데요...

로쟈 2006-12-08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제 외국어 실력보다는 국어 실력이 훨씬 뛰어나죠.^^

수퍼겜보이 2006-12-08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을 질투하시나봐요. ㅋ 그분이 인기없는 서재라도 하나 갖고 계신게 아닐까요? 혹시 이 댓글도 보고 알라딘의 '천민'계급에 대해 한 마디 하실라나? (권력없고 내공없는 ㅠ.ㅜ 불가촉천민)

페일레스 2006-12-08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럴 때 알라딘 서재에 트랙백이 없는 게 좀 불편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편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저 역시 강유원님 홈페이지에서 marishin이라는 아이디를 자주 보았지만, 링크를 타고 건너가서 인용문을 읽어보니 그 분은 '1차 텍스트 중심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번역한다는 분이 왜 로쟈님이 책을 소개한 글은 꼼꼼하게 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요.
그보다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저 인용문에 달린 댓글들입니다. '까이는 대상'이 '번역이 뭔지' 모른다고 단정하는 저 댓글들이란...

2006-12-08 0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2-09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슈퍼겜보이님/ 알라딘 서재라는 '장만'한 게 아니라 임대받은 것인지라, '임대주민'쯤 되는 거겠죠. 요샌 기자들도 '서민'을 자처하는 형편이니 '서민'이란 말도 함부로 못하겠습니다...
페일레스님/ 원전주의에 대해선 이전에 언급한 바 있는데, 1차 텍스트를 다룬다는 게 독서에 유리하다는 것이지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는 않지요. 독서는 언제나 '번역'의 과정이며, "헤겔을 독일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유명한 주장이 갖는 함의도 음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댓글들이야 어디서나...

virtuepeak 2006-12-08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의 단초를 제공한 게 아닌지 죄송스럽습니다. 로쟈님의 서재와 armarius.net을 꾸준히 찾는 저로서는 예전에도 armarius.net에서 로쟈님을 두고 어떠한 이야기가 오갔던 사실을 상기할 때, 많은 분들께서 감정의 앙금(?)을 품으시는 게 아닐까 걱정됩니다. (제 닉네임은 영구혁명을 직접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 뜻으로 읽어 주셔도 본래 의도와 커다란 차이는 없겠습니다.^^)

로쟈 2006-12-08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마다의 감정이야 터치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겠죠. 하지만 의견 일반으로서의 말(로고스)은 논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공적인 영역에서 제가 관심을 갖는 대목도 그 논리일 뿐입니다...

가을산 2006-12-08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서재의 힘은 제가 보기에
번역가들을 긴장케 하는 힘, 독서가들을 자극하는 힘,
그리고 저같은 사람 머리에 쥐나게 하는 힘인 것 같습니다.
이런 좋은 힘은 커도 좋아요.

virtuepeak 2006-12-08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로쟈님께서 '번역자와 편집자'라는 제목의 페이퍼에서 교수신문에 실린 이제이북스 전응주 사장의 글을 인용하신 적이 있었고, 그 때 앤서니 케니의 '서양철학사' 번역에 문제가 있어 구입하지 않았다고 코멘트를 덧붙이셨습니다. 역자 중 한 사람인 김영건 선생이 그 기사와 로쟈님의 페이퍼를 모두 읽은 모양이고, 그 사건에 대한 소회를 쓰셨지요. 그 글은 완소봉춘님이 댓글로 달아주셔서 로쟈님도 읽으셨습니다. 그리고 로쟈님께서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책이 제 값을 하는 지 궁금할 뿐이라는 견해를 남기셨지요.

marishin님께서는 그 사건에 관해서 전응주 사장이 거짓말을 했다고 보는 것 같고, 로쟈님께서 전사장의 견해를 수용하면서 그 책을 평가한 것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여기신 것 같습니다. 김영건씨의 글을 읽지 않고 로쟈님의 페이퍼만 읽은 사람이라면 그 문제에 관한 관점이 한 쪽으로 고정될 가능성이 높았겠지요. 물론 이 사례는 '알라딘 서재의 힘(?)'이 쓰여진 뒤 한참 뒤에 생긴 일이지만, marishin님의 문제 의식이 이러한 지점에 있는 게 아닐까 하여 조심스럽게 언급해 봅니다. marishin님께서 '부실 번역 논란의 진상'이라는 제목으로 코멘트하신 포스트가 있습니다.
http://blog.jinbo.net/marishin/?cid=13&pid=223

로쟈 2006-12-08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마지막 힘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있을 거 같군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평이 그런 쪽이라서.^^;

영혁님/ 저도 그 내용은 읽어봤습니다. 제가 출판동네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책이 나오기까지의 내막을 샅샅이 파악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건 넌센스이죠. 전응주 사장의 글은 공개된 언론에 발표된 것이었고, 저는 번역자와 편집자와의 바람직한 협력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취지에서 옮겨왔던 것이예요(근데, 제가 옮겨온 글은 연초의 것이니까 그와는 무관해 보입니다). 거기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면 왜 직접 해명하지 않고, 뒤에서 딴소리를 하는 건지요. 그리고 이제 보니 "왜 이렇게 거짓말이 하나의 진실로서 난무하고 그것을 마치 사실처럼 믿고 거기에다 의미까지 부여하는 멍청한 놈이 나타나는지 모르겠다"나, "소위 인터넷 <먹물>들의 거짓말과 허풍이 참으로 비지성적이다. 이 꾸민 이야기에 감격하는 그대여, 인터넷 공간에서 사기 치지 말고 공부하라"는 직설적인 멘트의 대상이 딴 사람이 아닌 듯하군요. 보기와는 다르게 먹고살기들 힘든 모양입니다...

biosculp 2006-12-09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 서핑하다보면 이런저런 글 읽다가 전후가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 전응주 사장의 글이 링크된것을 보다 갑자기 헷갈렸습니다. 아고라라고 하는 곳에서 예전에 철학사번역과 관계되어 불편한 애기를 한것을 읽은적이 있어서 서로 안좋은 줄은 알았는데 그게 로쟈님의 서재와 연결되어 있는것을 보고 약간 황당하기까지.
아마 교수신문에인가 난 전응주사장의 글을 링크하려면 아예 교수신문에서 찾아 링크하는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래야 꾸민이야기에 감격하는 그대여 같은 답이 안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요.
펌들때문에 오해만 쌓이는것 같고.

로쟈 2006-12-09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곳에 적기도 했지만, 제 관심은 '인간관계'가 아니라 그냥 '책'입니다. 또 어떤 책에 대한 험담을 막바로 옮겨온 적은 없는데, 이번 경우는 자사에서 출판한 책에 대한 '펴낸이'의 말이었기에 에누리없이 옮겨왔던 것이죠(저는 교수신문에서 그대로 퍼온 글에 약간의 코멘트와 책이미지를 덧붙였을 뿐입니다). 만약에 그의 발언이 무고나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교수신문측에 기사 삭제를 요청할 수도 있었던 것이고. 더불어, 제 글에 바로 댓글을 달아서 시정을 요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뒤에서 '멍청한 놈'이니 '사기꾼'이니 하며 욕하는 게 그 동네의 관행인 것인지 의아할 따름입니다...

마태우스 2006-12-09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쓰시기 전에 여러 문헌을 통해 사실관계를 알아보시는 로쟈님의 태도에 더더욱 경외감을 갖게 되네요...댓글 달린 것들을 읽어보다 느낀 겁니다.

로쟈 2006-12-09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요, 이번 경우는 제가 (서로 주장이 다른) 사실관계를 확인해보지도 않고 칼럼기사 하나를 옮겨왔다는 것이 빌미입니다. 가령 어떤 칼럼/기사를 옮겨올 때 그거 사실인지 아닌지 다 확인해봐야 한다는 것이죠. 가령, 트랜스지방이 몸에 안 좋다는 기사를 옮겨오려면, 실제로 좋은지 안좋은지 (직접) 확인해봐야 한다는...

마태우스 2006-12-09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그렇군요. 그래도 전 존경할래요. 아무도 절 말릴 수 없습니다!
 

아침신문에서 고른 '오늘의 책'은 '일본사상사'들이다. <현대일본사상론>과 <근대 일본사상사>가 동시에 출간됐는데, 일본문학이나 사상을 챙겨둘 만한 여유는 없지만 마루야마 마사오에서 멈춰있는 '교양'을 업그레이드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게 된다. 최근에 한 학술발표회에 참석했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일본에는 일본인이 (즉 일본인의 시각에서)직접 쓴 <한국문학사>가 단 한권도 없었다(몇몇 한국인/재일동포가 쓴 오래 된 문학사들만이 남아있다). 우리의 경우는 사정이 어떠한지(우리 나름의 시각으로 쓴 일본문학사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지만 여하튼 '가까운 이웃'이란 말이 무색한 게 현실이다. 미래적인/전향적인 한일관계에 대해 말들은 많지만 일단은 서로의 전통과 생각에 대해 좀 알아야 되지 않을까 싶다(<한국문학사>의 표지에 욘사마를 쓰는 건 어떨까? <한국문학사>를 읽고 있는 욘사마!). 자꾸만 거꾸로 가는 듯싶은 사상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경향신문(06. 12. 07) ‘근대 일본사상사’ 등 번역출간…日 다시 전체주의로 갈까

일본에 또다시 내셔널리즘이나 전체주의가 부상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는 방법은 그들의 사상의 궤적을 보는 것이다. 그런 연유인지 일본 근·현대 사상사 서적이 최근 잇달아 번역돼 나왔다. ‘근대일본사상사’(소명출판)와 ‘현대일본사상론’(논형)이다.

두 책은 집필 방식이나 사상계를 보는 관점이 다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군국주의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일본 근·현대 사상계의 어제와 오늘을 더 총체적으로 드러내보인다. ‘근대일본사상사’는 지식인들의 사상에, ‘현대일본사상론’은 민중의 사상에 초점을 맞춘다. ‘근대일본사상사’가 막번체제 말기~전후(1950년대 후반)를, ‘현대일본사상론’은 전후~현재를 다루고 있어 시기적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근·현대 사상흐름 비판적 추적교과서 검정제도 위헌소송을 주도한 것으로 유명한 이에나가 사부로 전 도쿄교육대교수가 엮은 ‘근대일본사상사’는 일종의 개론서다. 마루야마 마사오, 다케우치 요시미 등 전후 일본 사상학계를 대표하는 당시로선 소장학자들이 집필에 참여했다. 1959~61년 지쿠마서방(筑摩書房)이 낸 ‘근대일본사상사 강좌’ 시리즈의 제1권 ‘역사적 개관’을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옮겼다.

이 기획은 패전에도 불구, 한국전쟁의 어부지리 등에 힘입어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사회가 “더 이상의 전후(戰後)는 없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전전(戰前)의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보인 것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됐다. 군국주의 패전의 역사를 ‘일부에 의한 실수’로 치부해 버리려는 태도 뒤에는 어떤 정신구조가 있는 것일까.

해답은 일본이 서양문명과 본격적으로 만난 메이지시대 ‘문명개화기’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문명개화론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나라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해 ‘문명개화’라는 수단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해소했다. 국내 민주주의를 강조한 자유민권론자들도 어느덧 하나 둘 정한론에 동조했고 청일전쟁이라는 경험 속에 일본 지식계 내 국내민주주의 주장은 국권의 우월함에 완전히 밀렸다.

저자들이 일본 사상사에서 주목하는 중요한 가치는 가족과 국가이다. 가족과 국가의 위계로 촘촘히 짜여진 도덕 교육은 천황제를 만들어낸 것이기도 했고, 천황제의 결과 더욱 강화된 것이기도 했다. 1910년대 이후 일본 지식계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했던 사회주의자들이 이른바 ‘쇼와 10년대(1930~40년대)’라고 부르는 시기에 대규모 전향해버린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뛰어난 공산주의자로서 단 하나뿐인 어머니에게 심려를 끼칠까봐 걱정했다”는 것이나 “내 안에 자리잡은 국제애의 본능은 내 안의 자기보존 본능과 도저히 맞설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지기 쉽고 빈약하다”는 당시 지식인들의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에 비해 ‘일본현대사상론’은 야스마루 요시오라는 필자가 자신의 사상사 연구를 정리한 것으로 제자인 박진우 숙명여대 교수가 번역한 것이다. 야스마루는 마루야마로 대표되는 근대주의자들과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동시에 비판했다. 그에게 민중은 마루야마 등이 말하는 계몽의 대상이나 몽매한 주체도 아니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강조하는 투쟁하는 인민도 아닌 생활세계에서 지혜를 발휘하는 생활자일 뿐이다.

국가중심주의가 만든 천황제그는 일본사회의 보수화가 현저해지는 70년대 중반 이후에 특히 주목한다. 쇼와 천황이 입원한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동조를 강요한 자숙과 조의의 표현으로 상징되는 권위적 질서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그리고 여기에 대응하는 민중들의 사상은 어떠했는지가 주요 관심사다.

저자는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던 에너지인 민중의 힘은 그들의 가장 일상적 생활규범이었던 근면·검약·정직·효행 등과 같은 ‘통속도덕’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통속도덕의 실천이라는 광범한 민중의 자기단련·자기해방의 노력 과정에서 분출된 비대한 사회적 에너지가 사회질서를 밑에서부터 재건한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속도덕의 진지한 실천에 의해 평온한 생활을 희구하는 민중의 평범한 이상이 현실세계의 난관에 부딪혀 난파하게 됐을 때 민중은 스스로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종교라는 매개를 찾게 됐다. 상징천황제가 파고들 수 있었던 사정이다.

근·현대 일본 지식계와 민중의 정신구조 형성 과정을 비판적으로 추적하는 이 책들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일본 내 다수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학계 내 목소리 역시 약하지 않다. 어쩌면 일본사회의 앞날을 그리 절망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손제민 기자)

06. 12. 07.



 

 

 

P.S. 과문하지만 일본사상사에 관한 책 몇 권을 꼽아본다. 가노 마사나오의 <근대 일본사상 길잡이>(소화, 2004)는 일단 '길잡이'란 말이 눈에 들어온다. 저자는 생소하지만 역자가 일본사상사 전문가라는 점이 믿음을 준다(같은 저자의 <일본의 근대사상>(한울, 2003)과는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분량이 입문서로서는 적격이다). 그리고 물론 일본사상사의 '천황' 마루야마 마사오의 책들이 기본서들이겠다. 여러 권이 번역돼 있지만 가장 얄팍한 <일본의 사상>(한길사, 1998)을 '입문서'로 골라둔다. 그리고 예전에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다룬 바 있는, 히로마쓰 와타루의 <근대초극론>(민음사, 2003). '일본 근대 사상사에 대한 시각'이 부제이고, "이 책은 1942년 잡지 문학계'에서 개최된 '근대의 초극 좌담회'에 대한 해설임과 동시에 넓게는 1920년대부터 1945년 패전할 당시까지의 일본 지성사를 진단하고 있는 책이다." 당대의 키워드이기도 했던 '근대의 초극'론으로 일본의 현대사상을 재구성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해설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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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12-07 09:18   좋아요 0 | URL
마루야마 마사오는 '전후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소리까지 듣지만 요즘 들어 그의 사상에 대해 반기를 드는(!) 목소리가 학계에서 자주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의 저작들이 '기본서'이자 '개론서'라는 데는 이의가 없을 듯 합니다. 물론 균형잡힌 시각을 위해서는 다른 관점의 책들도 훑어봐야겠지만요.

로쟈 2006-12-07 09:43   좋아요 0 | URL
한국의 마루야마나 가라타니가 누구인지 간혹 궁금해집니다...

비로그인 2006-12-07 11:30   좋아요 0 | URL
로쟈님, 한국은 아직 마루야마나 가라타니 정도의 인물이 나올 시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엔 후쿠자와 유키치 급의 인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루야마 마사오 사상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각주(?)에 불과합니다.ㅋ

로쟈 2006-12-07 13:08   좋아요 0 | URL
지폐에 들어가 있는 걸로 하면 저희는 퇴계와 율곡이 있는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