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2006년의 영화책'으로 <트뢰포>(을유문화사, 2006)와 함께 꼽았던 책이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을유문화사, 2006)였다. 우연찮게도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됐는데, 이 책에 대한 서평으로 연초에 읽어두었던 것을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지난 2003년에 반쪽짜리 책이 나왔을 때 추천사를 쓰기도 했던 영화평론가 김영진씨의 칼럼이다. 저널리즘의 현장에서 씌어진 '적임자'의 서평이다. 더불어 기대하게 되는 것은 한국 영화비평에서의 '로저 에버트들'이다. '들뢰즈들'이나 '지젝들' 말고.

필름2.0(07. 01. 05)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에 대한 서평

얼마 전 모 신문사의 신춘문예 영화평론 심사를 맡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래의 평론가를 꿈꾸며 보내온 글들을 숙독했다. 장년층의 필자들도 상당수 있었던 것이 특기할 만했으며 글에 인용되는 지식의 범주가 꽤 광범위해서 은근히 놀랐다.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똑똑한 글들이 많은데 인상적인 글이 적다는 것도 신기했다. 대다수의 글들이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는 주인 입장이 되어 평론 대상이 되는 영화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었다. 이렇게 위압적이며 수직적으로 어떤 특정지식에 의지해 영화를 내려다보며 훑는 글은 매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똑똑한 티가 나긴 하지만 글을 읽고 나면 거기 분석된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다. 영화와는 상관없는 성실한 대학원생의 리포트를 읽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좋은 평론은 언제나 작품과 수평적으로 대화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평론이, 평론이 아니라 이론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1960년대의 구조주의 열풍 이후 한때 영화학계의 신념이 됐다. 검증될 수 없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며 영화가 좋다,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삼류 저널리즘의 인상비평에서나 할 짓이라는 통념은 오늘날에도 완강하게 통용되고 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런 글들에서는 대개 열정과 공감이 사라진 것을 보게 되는 대신 평자들이 표현자와 맞먹으려 들며 과시하려 드는 자기도취의 흔적을 보게 된다. 평자가 표현자의 위치에 오르려는 것은 자연스런 욕망이며 그게 결핍의 표현으로써 시지푸스의 운명처럼 거듭된 성실성으로 나타날 때 위대한 평론이 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와 반대로 평자가 이미 표현자의 자의식을 갖고 대상이 되는 작품을 제멋대로 갖고 놀며 군림하려 들 때 그 평론은 추악해지기 쉽다. 영화보다 평론가의 자의식과 지식이 더 돋보이는 대다수의 평론은 그래서 불편하다. 이게 동시대의 대중뿐만 아니라 동업자들끼리도 평론을 잘 읽지 않는 이유다.



그런 심정으로 나름대로 반성하고 있는데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 1권의 개정판과 <위대한 영화> 2권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1권의 추천사를 쓴 사람의 입장에서 그 뉴스는 기분 좋은 것이었다. 미국의 스타 평론가의 글을 묶은 두툼한 분량의 책이 상당량 팔려나갔다는 것은 여하튼 이곳에 평론을 읽는 독자들이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필자는 사실 <위대한 영화> 역서를 읽기 전에는 에버트의 평론집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시카고 선타임스’에서 수십 년 동안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름을 건 텔레비전 비평쇼를 진행하는 이 할아버지 평론가는 지금도 엄청나게 많은 양의 평론을 쓰고 있지만 그가 텔레비전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거나 내리거나에 따라 때로 영화의 흥행 성적이 갈라지는 그 위대한 영향력 말고 대체 취할 것이 뭐가 있겠느냐 싶었다.
이런 선입견은 인정에 끌려 추천사를 써줘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정식 출판되기 전의 역서를 읽은 후 손쉽게 무너졌다. 영화평론가로서는 미국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에버트의 경력이 괜한 허명은 아니었다는 자책이 생겼다.

기자로 시작해 평론가로 자리 잡은 에버트의 글은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도 읽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명료하고 쉽다. 사람들은 그의 글을 읽고 영화를 볼까 말까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토록 폭력적인 저널리즘 독서 환경에서 단련된 에버트의 문장은 담담하면서도 신중하고 때로 신랄하며 종종 열정적이다. 그는 개봉영화들을 따라가는 집필활동 틈틈이 고금의 명작들을 소개하는 칼럼을 쓰고 그 영화들을 스크린으로 상영하는 영화제를 개최하며 관객들과 일주일 동안 특정 영화를 숏 바이 숏으로 분석하는 세미나를 열기도 한다. <위대한 영화>는 그런 에버트의 과외활동의 산물인데,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에버트가 점점 더 많이 영화를 알아가는 사랑의 방식이 독자에게도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는 솔직하게 예전 기자 시절에 썼던 영화평의 태도를 스스로 비판하기도 하고, 접하지 않아 일정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독자들에게 강요하지 않고도 명작들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준다.

에버트의 책 초고를 읽으며 근사한 문장이 나올 때마다 옮겨 적던 필자는 그게 10쪽을 넘어가자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영화의 이미지가 주는 매력을 활자로 따라잡는 불가능한 임무를 때로 해내는 에버트의 손이 행한 기적에 부러움을 느꼈다. 이를테면 그는 니콜라스 뢰그의 매혹적이지만 플롯이 헝클어진 영화 <쳐다보지 마라>를 옹호하면서 이렇게 쓴다.

“유령이 출몰하는 도시 베니스가 〈쳐다보지 마라〉에서보다 더 우울한 모습을 보였던 적은 결코 없었다. 도시는 광대한 공동묘지처럼 보이고 돌덩이들은 축축하고 연약하며 운하에는 쥐떼가 우글거린다. 앤소니 B. 리치몬드와, 크레딧에는 오르지 않은 뢰그가 담당한 촬영은 베니스에서 사람들을 제거해버린다. 북적거리는 길거리나 대운하 인근에서처럼 베니스 거주자나 관광객들을 볼 수 있는 몇 가지 장면이 있지만, 존과 로라가 (처음에는 함께, 나중에는 별도로) 길을 잃는 한결같은 두 장면에서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거리와 다리와 운하와 막다른 골목과 잘못된 모퉁이는 그것들끼리 서로서로 포개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에버트는 이런 유형의 영화들이 ‘플롯에서 자유롭고, 어떤 최종적인 설명도 제시하지 않는, 하나의 체험으로만 존재하는 영화’이며 관객인 우리는 ‘소풍을 따라 나섰다가 안전하게 돌아온 소녀들과 비슷하다’고 본다. 이것은 결국 우리 시대에 점점 사라져가는 영화보기의 매혹과 미덕에 관한 장 뤽 고다르의 다음과 같은 잠언을 인용하는 것과 연결된다. “영화는 역이 아니다. 영화는 기차다”라는 고다르의 말을 언급하며 에버트는 자크 타티의 <윌로씨의 휴가>를 보기 전까지는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전혀 몰랐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영화를 ‘역’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기차’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차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대신 빨리 목적지인 종착역에 도착하려 안달하는 어린애와 같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팜므 파탈>과 같은 영화가 대중의 적대감을 사는 것에 대해서도 에버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작품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요즘 관객들의 조바심을 고발하는 고발장이라 할 수 있다. 요즘 관객들은 괴롭힘 당하기를 원하지, 유혹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에버트에 따르면 “대부분의 영화는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영화의 플롯에 의해 규정되거나 제한된다는 암묵적인 가정에 따라 만들어진다. 그러나 인생은 이야기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야기가 인생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와 어른들을 위한 영화의 차이점이다.” 이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를 분석하면서 에버트가 정의하는 영화의 꼴인데, 이런 방식으로 에버트가 끌어내는 영화의 매력의 범주는 넓게 뻗어간다.

그는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들>을 찬양하면서 빠른 글 호흡으로 그 영화의 비범한 시각적 특질을 따라잡는다. “레오네는 롱 숏으로 화면을 시작해 권총, 얼굴, 눈동자, 그리고 비지땀과 파리들을 클로즈업으로 작업해 들어가면서 이 장면을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길게 끌고 나간다. 자신이 서스펜스를 얼마나 길게 유지할 수 있을지를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시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게 진짜 서스펜스이기는 한 걸까? 전적으로 스타일의 시험이었고, 장면 자체에 주의를 끌려는 의도에서 비롯한 감독의 고의적인 조작이었을 것이다. 레오네가 장난을 치곤 했던 패러디의 자유를 여러분이 맛봤다면, 여러분은 그의 방법을 이해할 것이다. 이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대담한 제스처를 향한 찬양이다.”

‘대담한 제스처를 향한 찬양’, 이런 식의 표현은 멋지다. 에게, 겨우 그것 같고 그러냐고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렇다. 우리가 거대한 틀에 갇혀 영화를 보는 고정관념을 에버트는 쉽게 넘어선다. 그가 영화의 시각적 스타일 못지않게 상세하게 접근하는 배우들의 매력을 서술할 때도 마찬가지다. <스카페이스>에서의 알 파치노의 연기를 칭찬하면서 그는 파치노가 토니 몬타나라는 인물을 ‘오페라 같은 규모로 연기해낸다’고 쓴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그는 책상 위에 코카인을 쌓아놓고는 삶 그 자체를 흡입하려고 기를 쓰는 것처럼 그 속에다 코를 처박는다. 파치노는 코에다 흰색 분말을 묻힌 채로 그 장면을 연기했다. 종종 패러디되는 디테일이지만, 이것은 자신의 욕망을 제외하고는 만사에 무관심한 사람으로 변해버린 남자를 보여주기 위한 적절한 선택이었다. 파치노가 <스카페이스>에서 한도를 넘어선 연기를 했다면, 그것은 캐릭터가 그를 그곳으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한계를 넘어선 세상, 그곳이 바로 토니 몬타나가 사는 곳이다.” 이런 문장은 쉬워 보이지만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로 영화를 따라잡는 경지의 출발점은 자기도취가 아니라 영화대상과의 일체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의 평론은 보여준다.

07. 0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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