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읽기를 위한 몇 권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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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발견 : 서구적 사유의 그리스적 기원
브루노 스넬 지음, 김재홍 옮김 / 까치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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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스 사상의 심층
박종현 지음 / 서광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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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의 신화와 사유
장 피에르 베르낭 지음, 박희영 옮김 / 아카넷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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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사유의 기원
장 피에르 베르낭 지음, 김재홍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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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의 '글로벌 책읽기' 코너에 <뉴로맨서>의 작가(이자 <코드명 J>의 원작자) 윌리엄 깁슨의 신작 소설이 소개돼 있기에 옮겨놓는다(찾아보니 지난 8월에 나온 최신작이다). '세계의 책'에 올려놓지만 조만간 번역돼 나오지 않을까 싶다.

중앙일보(07. 09. 22) [글로벌책읽기] 테러 공포·미래 불안 … 미국은 `유령의 나라'

미국은 현재 유령의 나라다. 사이버스페이스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윌리엄 깁슨의 신작 소설에 의하면 그렇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고 선언한 그는 과학소설이야말로 문학이 가진 전복적 힘을 잃지 않고 있다고 믿는다. 그는 말한다. “나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현재를 그리려고 한다. 과학소설이 쓸모가 있다면 그것은 인류가 나아갈 미래의 방향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탐사하는 것이다. 지구는 이미 외계 행성이다.”



공상과학소설가인 저자가 공상적 미래가 아닌 2006년의 미국을 배경으로 쓴 이 소설은 미국이 처한 방향 상실과 정체성 혼란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중심적 인물 없이 세 겹의 스토리라인이 서로 뒤엉키고 결말조차 열려있어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주요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홀리스는 전직 인디 락 밴드의 가수였지만 현재는 창간되지도 않은 잡지 ‘노드’의 프리랜서 기자다. 그녀에게 오밤중에 떨어진 취재 목표는 새로이 등장한 ‘위치예술’이다. 하지만 나중에 드러나는 실제 취재 목표는 뱅쿠버에 도착하는 정체불명의 화물 콘테이너의 위치다. 취재를 명한 막후 인물은 광고 재벌 빅 엔드로서 현재의 미국을 움직이는 유령같은 권력을 상징한다. 비정규직 기자가 존재조차 불확실한 잡지를 위해 아리송한 대상의 취재에 나서는 것이다.

두 번째 스토리 라인은 CIA 요원으로 간주되는 브라운과 그에게 인질로 사로잡힌 마약중독자 해커 밀그림이 만들어간다. 브라운은 마약과 위협으로 밀그림을 조종해 그가 가진 KGB의 암호화된 인터넷 기술로 쿠바와 러시아 커넥션을 감시하며 콘테이너를 추적한다.

한편 러시아에서 첩자 훈련을 받고 현재 미국에서 암약중인 쿠바-중국 정보마피아의 일원인 티토는 스파이 세계의 현란한 기술적 판타지를 보여준다. 아프리카 토착 종교의 믿음을 간직하고 있지만 카톨릭을 가장하고 있는 그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자유를 향한 인간의 탐구를 대변한다.

이 세 가닥의 이야기를 얽어매는 것은 온갖 종류의 최첨단 과학 용어들과 장비들을 현란하게 운용하면서 벌이는 추격전이다. 거기다 로스엔젤레스·뉴욕·뱅쿠버를 왕복하는 공간 이동을 통해 미국 전체의 문화적 지도를 정치지리학적으로 그려낸다. 첨단 정보기술에 관한 세부 묘사는 과학기술의 진보가 세상을 바꾸는 힘임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하지만 깁슨이 이러한 힘의 세계와 의미심장하게 대비시키는 것은 ‘위치 예술’이다. 위치 예술이란 특정 장소에서 특정 안경을 써야만 작품이 보이는 예술을 말한다. 사이버스페이스가 공간과 시간의 차이를 무화시켰다고 해서 주체적 시점의 고유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깁슨은 지구적 시장단일화가 세계관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는 사이버스페이스의 일원화에 반대해 지리적 고유성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매트릭스’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합친 듯한 이 소설은 현재의 미국 문명에 대한 준엄한 비판으로 읽힌다. 테러 공포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방향 감각을 상실한 미국인들은 현재 출구 없는 미로 속에 갇혀 있고 유령들만이 활개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의 원제 ‘유령의 나라(Spook Country)’에서 Spook는 유령이란 뜻이지만 스파이를 의미하는 속어이기도 하다.(이영준/ 문학평론가)

07. 0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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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9-25 03:25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윌리엄 깁슨의 신작 소식을 접하고 이곳 로쟈 님의 서재에서 그에 관한 소식을 다시 접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던 터입니다.^^ 기사 감사합니다. 풍성한 한가위 되시길~!

로쟈 2007-09-25 10:10   좋아요 0 | URL
제가 그 정도로 발이 빠른 건 아니고 우연히 소개기사를 읽었을 뿐입니다.^^; 람혼님도 편안한 연휴가 되시길...
 

이번주 한겨레에 게재된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옮겨온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7/09/021162000200709200678067.html). 이번이 세번째 연재인데, 매번 '초읽기'에 내몰려 쓰는 바람에 한두 가지씩 아쉬움을 갖게 되지만 그만하면 선방('선빵'이 아니라)이라고 자위하는 편이다. 이 글도 미처 주문했던 원서가 도착하기 전에 씌어진 것이다(책은 원고를 보내고 수시간 뒤에 받았다). 그런 식으로 글은 자신의 운명을 갖는다. 아무리 짧은 글이더라도.

한겨레21(07. 09. 20) 부시 안에 빈라덴이 있다

20세기가 10월 혁명과 함께 시작했다면 21세기는 9월 테러와 함께 막이 올랐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났다. 이 스펙터클 어드벤처 뺨치는 테러사건과 그에 뒤이은 반테러 전쟁 때문에 현생 인류가 평온하게 지내기는 이번 세기도 이미 글러먹은 듯하다. 6주기를 맞이하여 백악관은 이렇게 말했다. “테러와의 전쟁은 군사적인 대결을 능가하는 것으로, 21세기의 중대한 이념투쟁이다.” 그리고 영국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는 이렇게 보고했다.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를 완전 소탕하려면 앞으로도 수십 년이 필요하다.” 종합하면, 21세기의 이 중대한 ‘이념투쟁’은 우리의 생전에 끝나지 않을 것이다!

과연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당장은 ‘그라운드 제로’에서 생각의 골을 더 깊게 파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영국의 문학평론가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생각의나무 펴냄)가 보여주고 있는 것도 그 ‘깊게 파기’이다. 저자는 ‘서구 문명사에 스며 있는 테러의 계보학에 대한 고찰’로 우리를 초대한다.

‘테러리즘의 의미’를 묻기 위해서 그가 먼저 확인해두는 것은 테러리즘이란 말이 요즘의 용례보다 훨씬 복잡하면서도 넓은 의미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때의 테러리즘은 인류의 기원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며 축복과 저주, 성과 속을 모두 의미할 만큼 오지랖이 넓다. 그에 따르면 “고대 문명에는 창조적인 테러와 파괴적인 테러, 생명을 부여하는 테러와 죽음을 불러오는 테러가 동시에 존재”했다. 이러한 테러의 양가성은 곧 신성(the sacred) 자체의 양가성이기도 하다.

<성스러운 테러>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그 양가성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이글턴이 제시하고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쿠스> 읽기다. 이 드라마는 ‘바쿠스’ 곧 디오니소스에 관한 이야기다. 이글턴이 ‘최초의 테러리스트 지도자 중 하나’로 지목하는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는 알다시피 “포도주와 가무, 환희와 연극, 풍요와 과잉, 영감의 신”이지만 동시에 “탐욕적이고 폭력적이며 차이를 적대하는 획일성의 지지자”이다. 그의 이 양면적인 성격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대저 이 디오니소스를 어찌할 것인가?

<바쿠스>에 등장하는 테베(테바이)의 지도자 펜테우스는, 자기 어머니의 고향인 테베를 찾아와 여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흥청망청 숭배하도록 한 디오니소스에게 적개심을 품고서 상식 밖의 폭력으로 대응한다. 그는 주신의 머리를 베고 쇠지레로 그의 성소를 부숴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심지어 무질서의 신 디오니소스가 화해를 제안했을 때조차도 이를 경멸하듯 거절하며 아예 신을 감옥에 가두어버린다. 화가 난 디오니소스가 지진을 일으켜 감옥을 나온 뒤에 무자비한 복수를 감행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에우리피데스의 극에서 이렇듯 서로 충돌하고 있는 디오니소스와 펜테우스 가운데 누가 테러리스트인지 판가름하기는 쉽지 않다. 펜테우스 또한 디오니소스와 똑같은 논리 및 감수성으로 전투에 나서면서 디오니소스 못지않은 광적 행태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바쿠스>가 “분명 테러리즘과 부당한 정치적 대응 사이의 결정적 유사성을 강조하는 작품”이라는 이글턴의 평가에 공감하게 된다. 이 그리스 고전 비극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에우리피데스의 위대한 극은 디오니소스를 신으로 인정하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에게 정당한 대응을 하느냐의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그 정당한 대응이란 바로 ‘경외심’(reverence)이다. 경외심이란 맹목적인 억압의 반대말이면서 디오니소스가 펜테우스의 타자가 아니라 펜테우스 안에 잠복한, 자아의 또 다른 중심이라는 걸 인정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즉, “내 안에 너 있다”라고 말하는 태도다. ‘테러 시대’의 예지는 먼 곳에 있지 않은 것이다.

07. 09. 22.

 

 

 

 

P.S. 칼럼에서 언급되고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바쿠스>는 두 가지 번역본으로 국내에 소개돼 있다. 하나는 희랍어 원전 번역 <에우리피데스 비극>(단국대출판부, 1999)의 '박코스의 여신도들'이고, 다른 하나는 영역본을 옮긴 <그리스 비극>(현암사, 2006)의 '바코스의 여신도들'이다. '바쿠스'는 물론 '디오니소스'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다. 거기에 덧붙여, 천병희의 <그리스 비극의 이해>(문예출판사, 2002), 김상봉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한길사, 2003), 그리고 사이먼 골드힐의 <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예경, 2006)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참고문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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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2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부시 사진 미치겠다.

흥미로운 내용이예요 로쟈님, 감사합니다 :)

로쟈 2007-09-22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흥미로운 책입니다.^^
 

지난주에 출간된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도서출판b, 2007)에 대한 한 서평을 옮겨놓는다. 책은 만만찮은 두께 때문에 얼른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지만 부분적으로 몇 개 장 정도를 읽어보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도 싶다. 그런 로드맵을 짜는 데 미리 참고해둘 만한 서평이다.

경향신문(07. 09. 22) 폭력을 넘어서는 법 ‘시민인륜’

아포리아(aporia)는 논리적 궁지를 뜻한다. ‘대중들의 공포’를 읽을 때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용어들 가운데 하나가 아포리아이다. 발리바르의 친구이자 스피노자 전문가인 마트롱은 언젠가 발리바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매년 새로운 아포리아를 발견하려 한다. 스피노자의 대중들 개념에는 아포리아가 있다, 민주주의에는 아포리아가 있다, 이런 식으로. 그건 미친 짓이다.”

이 에피소드는 역설적으로 발리바르의 철학하는 핵심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체계적인 통일성과 정합성을 전제하거나 새롭게 구축하려 하지 않고, 통일적인 체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아포리아를 찾아낸다.

아포리아를 찾는 과정은 사유가 어디까지 근본적일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도정이다. 먼저 어떤 사유가 닦아놓은 논리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야 하고, 그 논리의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막다른 골목의 정체를 확인해야 하며, 또한 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게 된 근본 전제와 가설을 복기해야 한다. 여기에 이를 때 비로소 아포리아 너머에 있는 새로운 사유의 길이 열릴 수 있다. ‘대중들의 공포’는 이 고통스럽고 지난한 근본적인 사유의 도정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탁월한 성과물이다.

이 책의 문제 틀은 ‘대중들의 공포’라는 말 속에 녹아 있다. 발리바르가 고민하는 철학의 대상은 계급이 아니라 대중들이다. 이는 경제주의적 계급론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대중들이 역사를 만든다’는 마르크스의 언급을 구체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이다.

또한 대중들은 과학적인 적합한 인식이 아니라 진리와 허구가 혼재되어 있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현실의 갈등을 인식하고 실천한다는 점에서, 이런 문제 틀은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탐구를 함축한다. 여기서 ‘대중(mass)’이 아니라 ‘대중들(masses)’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하는데, 이는 대중들이 단일한 주체(단수)가 아니라 복합적인 양면성(복수)을 담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중들의 양면성을 표현하는 말이 ‘대중들의 공포’이다. 스피노자에서 유래하는 이 용어는 대중들이 느끼는, 그리고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가리킨다. 이는 1차적으로는 민중의 능동성과 진보성을 신화화했던 과거 민중론이 지닌 한계와 유사하게 대중들의 일면적인 봉기성만을 특권화하는 논의에 대한 비판이다. 대중들은 능동적인 만큼 수동적이고, 진보적인 만큼 보수적인 양면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함의는 대중들의 역량이 갖는 잠재적 폭력성에 관한 것이다. 대중들의 힘은 때로 폭력과 구별하기 어려운 형태로 나타난다.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공포에 느끼고 이를 제거하려는 대중들은 오히려 대항폭력을 통해 대중들에 대한 가공할 공포를 초래하여 사회의 변화가 아니라 붕괴로 나아갈 수도 있다.

발리바르가 이런 양면적인 긴장을 전환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 반폭력 정치이다. 반폭력 정치에 대한 사고는 이 책의 가장 독창적인 대목이라고 할 수도 있는 시민인륜(civilite) 개념으로 정교해진다. 시민인륜은 ‘시민권’과 ‘사적이고 공적인 윤리’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결합한 신조어이다. 이 개념은 대중들의 폭력이 동일성(identity)과 결부되어 있으며, 따라서 공동체(국가) 내부에서 증오와 잔혹으로 나아가는 동일성들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한에서 해방의 정치나 변혁의 정치가 가능해질 수 있다는 문제 의식을 담고 있다.

물론 이상의 간략한 정리는 전체적인 문제 틀에 불과하며, 이 책에는 훨씬 풍부한 논의들이 담겨 있다. 그것은 근본적인 사유가 갖는 전복적인 힘을 예증한다. ‘대중들의 공포’는 구태의연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도전이고, 최근 주목 받고 있는 네그리, 푸코, 들뢰즈 등의 철학과 쟁점을 형성하면서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시도이며, 무엇보다 빈곤과 잔혹이 공존하는 오늘날의 정세를 돌파하려는 이론적 실천이다. 이 두툼한 책이 옮긴 이들(최원·서관모)의 오랜 정성과 노력으로 우리 앞에 당도했다.(김정한|서강정치철학연구회 회원)

07. 0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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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e 2007-09-22 22:58   좋아요 0 | URL
그 밥에 그 나물인 (것 같은) 김정한 씨가 서평을 써서인지 좋은 말만 해났네요.

로쟈 2007-09-23 00:06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책을 미리 읽어본 독자가 많지는 않을 테니까요...
 

시간만 된다면 매일같이 한 명의 새로운 저자와 그의 책들에 대해서 메모해놓을 수 있지만 (김갑수의 <나의 레종 데트르>의 표현을 빌면) 그런 일이 "밥 먹여주는 세상"이 아니어서 대개의 아이템들을 나는 참아두거나 무시해둔다. 다행히 추석 연휴를 맞아 잔뜩 '밀린 빨래들'처럼 해야 할 일들을 쌓아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투리 시간도 '풍족'한지라 건수를 몇 개 올릴 수는 있겠다.

 

 

 

 

아무 책이나 펼쳐도 책으로 가는 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이어져 있지만 오늘 고른 건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의 한 대목이다(이 책 또한 제대로 읽자면 부록까지 포함해 12번의 강의는 필요하다). 1장 '동이 서를 만날 때'에서 지젝은 '사랑의 역설'을 말하면서 기독교와 불교 사이의 흥미로운 대비를 제시하고 있는데, 주로 선불교에 초점이 맞춰진 그의 불교론은 이전에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 2004)에서도 읽어볼 수 있었다. 그걸 자세하게 '브리핑'하는 일도 의미있어 보이지만 역시나 "원고료로 살 수 없는 세상"이니만큼 당장은 참아두기로 한다. 대신에 읽을 건 말미에 등장하는 '사랑의 폭력' 혹은 '폭력적 사랑'에 관한 한 문단이다. 시작은 이렇다.

"사랑이 폭력이라는 말이 발칸의 저속한 속담 - "나를 때리지 않는 남자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다" -과 관련되는 것(만)은 아니다.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인데, 그것은 폭력이 사랑의 대상을 맥락에서 떼어내어 대상(Thing)의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이다."(57쪽)

Antonio Banderas and Victoria Abril in Tie Me Up! Tie Me Down!

인용된 발칸의 속담은 영어로 "If he doesn't beat me, he doesn't love me!"이다(요즘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했다가는 공인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하여 얼른 떠오르는 영화는 발칸의 영화가 아니라 스페인 영화이다. 페도로 알모도바르의 도발적인 영화 <욕망의 낮과 밤>(1990)이 그것(원제목은 'Átame!'이고 영어제목은 'Tie Me Up! Tie Me Down!'). 그리고 물론 한국영화로는 장선우의 <거짓말>(1999)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한국영화로서는 '사랑의 폭력'을 다룬 드문 영화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원문은 이렇다: "Love is violence not (only) in the vulger sense of... violence is already the love choice as such, which tears its object out of its context, elevating it to the Thing"(33쪽) 

내용은 "사랑은 이러이러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저러저러한 의미에서 폭력이다"는 것이다. 국역본은 이 대목을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인데, 그것은 폭력이 사랑의 대상을 맥락에서 떼어내어 대상(Thing)의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이다"라고 잘못 옮겼는데, 관계사 which의 선행사는 '폭력'이 아니라 '사랑'이다. 그리고 나는 이 문장을 도치구문으로 본다. 즉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이 아니라 "사랑의 선택 자체가 이미 폭력이다"로 보는 것이다. 결국에 '사랑=폭력'이라는 것이니까 대차는 아니지만 두 경우에 초점은 달라진다. 지젝의 말은 '폭력이 곧 사랑'이라는 게 아니라 '사랑이 곧 폭력'이라는 것이니까.

전체를 다시 옮기면 "사랑의 선택은 그 자체로 이미 폭력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대상을 원래의 맥락에서 떼어내어 '숭고한 대상'으로까지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랑의 폭력'이란 말이 뜻하는 바이다. 가령, 추석맞이로 이번주에 개봉한 곽경택 감독의 영화 <사랑>에서 주진모(채인호)의 경우를 보자. 신윤동욱 기자의 리뷰(http://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7/09/021015000200709200678012.html)를 잠시 따라가보면 영화는 이런 구도이다.

태초에 한 남자가 있었다. 소년 채인호(주진모)는 첫눈에 소녀 정미주(박시연)에게 반한다. 그리고 끝까지 이야기는 통속성의 공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소녀는 예쁘고 소녀의 집은 부자다. 산동네 소년은 괜스레 소녀를 괴롭히는 또 다른 소년과 싸운다. 소녀는 소년을 생일에 초대하지만, 하필이면 소녀의 집은 그날 망한다. 그리고 첫 번째 이별. 고등학생 인호는 또 싸운다. 하필이면 싸우다가 인호를 병으로 찌르는 본드쟁이 복학생은 미주의 오빠다. 그렇게 남자는 인호와 미주의 끊어진 인연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우연의 우연, ‘지나친’ 정공법이요 통속성의 기본이다. 미주의 본드쟁이 오빠는 노름쟁이 엄마를 껴안고 불살라버린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의 사랑의 맹세. “니가 내 지키도. 나도 니 지키주께.” 인호와 미주는 서로에게 사랑을 맹세한다.

여기서 순수한 사랑, 곧 순수한 폭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맥락(학교와 가족사)에서 박시연(정미주)을 떼어내어 대문자 사물(Thing), 곧 '숭고한 대상'(이건 '괴물'이기도 하다)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아래 스틸사진들에서 시연을 바라보는 진모의 시선(위)이 건달을 향하는 진모의 주먹(아래)에 앞서는 보다 근원적인 '폭력'이다. 영화 <사랑>은 그 맹목적인 사랑의 끝을 향해서 단순무식하게 돌진해나가는 '순정'영화이다(예고편과 리뷰들을 보아하니 그러하다).

다시 지젝으로 돌아와, 이어지는 내용: "몬테네그로의 민담에서 악의 근원은 아름다운 여성이다. 아름다운 여성은 주위의 남자들이 균형을 잃게 만들고, 우주에 그야말로 불안정을 초래하며, 모든 것에 편파성의 색조를 입힌다."(57쪽) 원문은 "In Motenegrin folklore, the origin of Evil is a beautiful woman: she makes the men around her lose their balance, she literally destabilizes the universe, colors all things with a tone of partiality."이다.

여기서도 떠오르는 영화는 몬테네그로 영화가 아니라 이탈리아 영화 <말레나>(2000)이다(http://www.youtube.com/watch?v=IPwX6PPSfPM). '세기의 미녀'라는 모니카 벨루치 주연의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말레나는 마을에서 모든 남성의 시선 끌어모으는, 그럼으로써 "주위의 남자들이 균형을 잃게 만들고, 우주에 그야말로 불안정을 초래하"는 여인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2차 대전이 한창인, 햇빛 찬란한 지중해의 작은 마을. 매혹적인 말레나. 걸어갈 때면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그녀를 훑어내린다. 여자들은 시기하여 쑥덕거리기 시작하고 곁에는 그녀를 연모하는 열세살 순수한 소년- 레나토가 있다. 남편의 전사소식과 함께 욕망과 질투, 분노의 대상이 된 말레나. 남자들은 아내를 두려워해 일자리를 주지 않고, 여자들은 질투에 눈이 멀어 그녀를 모함하기 시작한다. 결국 사람들은 독일군에게까지 웃음을 팔아야 했던 말레나를 단죄하고 급기야 그녀는 늦은 밤 쫓기듯 어딘가로 떠나게된다. 소년- 레나토만이 진실을 간직한 채 마지막 모습을 애처롭게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1년 후...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 갈때쯤 말레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난다. 그녀의 곁엔 죽은줄 알았던 남편이 불구가 되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도 근원적인 폭력은 말레나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폭력 이전에 말레나를 무자비하게 탈맥락화함으로써 '숭고한 대상'의 지위로까지 고양시키는, 소년-레나토의 순수한 연모의 시선에 자리한다. "이러한 테마는 1920년대 이래로 소비에트 교수법의 변치 않는 요소 중 하나였다.""섹슈얼티니는 본래부터 병리적인(patho-logical) 것으로서, 냉정하고 균형 잡힌 논리를 특수한 파토스로 오염시킨다, 성적 자극은 부르주아의 부패와 연결된 귀찮은 방해꾼이다, 라고 소비에트는 인민들을 교육했다."(57쪽) 

다시 말해서 소비에트 사회는 섹슈얼리티에 가장 적대적인, 그래서 가장 금욕적이며 무성적인 사회였다(라이히나 마르쿠제의 기대와는 달리 사회주의 유토피아가 성애적/향락적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관대한 성관념은 과연 진보적인가?). "실제로 1920년대에 소련에서는 성적 자극이 병리적 상태임을 심리-생리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수많은 '유물론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사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위생지상주의적 관용에 비하면, 반페미니즘 성향의 소비에트의 연구 성과가 진리에 훨씬 가까운 것이다."

인용문에서 '성적 자극'은 'sexual arousal'의 번역인데, '성적 흥분'이 보다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병리적 상태'에 해당하는 것은 '성적 자극'이라기보다는 '성적 흥분'이어야 하겠기에(이른바 성적 '각성 상태'를 말하는 것이겠다). 그리고 그걸 입증하기 위해 많은 소비에트 연구자들이 유물론적 연구를 시도했다는 것인데, 그 성과와 관련하여 지젝이 참고하고 있는 책이 각주32)에 소개되고 있는 에릭 나이만(1958- )의 <공적인 성(Sex in Public: The Incarnation of Early Soviet Ideology)>(1997)이다(전공과도 무관하지 않은 책이어서 책의 소재는 바로 탐지해두었다).  

이상이 '오늘의 책'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었다. 이 주제와 관련한 여타 참고문헌은 '비밀'로 해둔다(성은 비밀스러워야 한다). 다만 러시아에서 이 분야의 대표적인 연구자가 '이고리 콘'이라는 것 정도만 밝혀둔다...

07. 09. 21.

P.S. 페이퍼를 적으며 드는 생각은 사랑=폭력=악의 기원으로서의 '아름다운 여성' 문제에 대해서 좌파정치학이 너무 무관심한 건 아닌가 하는 점. 가령 "정치적 관습으로 어떤 세력가가 국가의 안정을 위협할 때 그를 고발하지 않고도 추방할 수 있게 만든 제도"로서 그리스의 도편추방법을 상기해본다면, 공동체의 질서유지에 위협적인 요소가 되는 '과도한 아름다움'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어림짐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니 잠자는 미녀들을 공연히 깨우지 말지어다. 물론 우파정치학에서라면 남성들의 경쟁 유발요인으로서 아름다움은 적극 장려해야 마땅한 것이겠지만...

P.S.2. 단수 높은 독자라면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었겠지만, 이 페이퍼는 추석 연휴를 맞아 서재 방문객들에게 드리는 나대로의 인사이고 선물이다. 개인적으론 다음주 금요일에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에 나로서도 일주일간 휴가이다(별로 즐거운 일이 없을 뿐더러 할일도 많다는 건 내일부터 생각하기로 하자). 편안하고 즐거운 휴식과 감사의 시간들이 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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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세곰 2008-05-29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작성시점으로부터도 반년을 훌쩍 넘긴 이 시점에. 곧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강의가 있는데 접점을 찾을 여지가 꽤 보이네요. 다운만 받아놓은 말레나를 봐야겠다는 압박도 느끼구요. 좋은 "추석"선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