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출간된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도서출판b, 2007)에 대한 한 서평을 옮겨놓는다. 책은 만만찮은 두께 때문에 얼른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지만 부분적으로 몇 개 장 정도를 읽어보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도 싶다. 그런 로드맵을 짜는 데 미리 참고해둘 만한 서평이다.

경향신문(07. 09. 22) 폭력을 넘어서는 법 ‘시민인륜’

아포리아(aporia)는 논리적 궁지를 뜻한다. ‘대중들의 공포’를 읽을 때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용어들 가운데 하나가 아포리아이다. 발리바르의 친구이자 스피노자 전문가인 마트롱은 언젠가 발리바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매년 새로운 아포리아를 발견하려 한다. 스피노자의 대중들 개념에는 아포리아가 있다, 민주주의에는 아포리아가 있다, 이런 식으로. 그건 미친 짓이다.”

이 에피소드는 역설적으로 발리바르의 철학하는 핵심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체계적인 통일성과 정합성을 전제하거나 새롭게 구축하려 하지 않고, 통일적인 체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아포리아를 찾아낸다.

아포리아를 찾는 과정은 사유가 어디까지 근본적일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도정이다. 먼저 어떤 사유가 닦아놓은 논리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야 하고, 그 논리의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막다른 골목의 정체를 확인해야 하며, 또한 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게 된 근본 전제와 가설을 복기해야 한다. 여기에 이를 때 비로소 아포리아 너머에 있는 새로운 사유의 길이 열릴 수 있다. ‘대중들의 공포’는 이 고통스럽고 지난한 근본적인 사유의 도정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탁월한 성과물이다.

이 책의 문제 틀은 ‘대중들의 공포’라는 말 속에 녹아 있다. 발리바르가 고민하는 철학의 대상은 계급이 아니라 대중들이다. 이는 경제주의적 계급론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대중들이 역사를 만든다’는 마르크스의 언급을 구체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이다.

또한 대중들은 과학적인 적합한 인식이 아니라 진리와 허구가 혼재되어 있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현실의 갈등을 인식하고 실천한다는 점에서, 이런 문제 틀은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탐구를 함축한다. 여기서 ‘대중(mass)’이 아니라 ‘대중들(masses)’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하는데, 이는 대중들이 단일한 주체(단수)가 아니라 복합적인 양면성(복수)을 담지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중들의 양면성을 표현하는 말이 ‘대중들의 공포’이다. 스피노자에서 유래하는 이 용어는 대중들이 느끼는, 그리고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가리킨다. 이는 1차적으로는 민중의 능동성과 진보성을 신화화했던 과거 민중론이 지닌 한계와 유사하게 대중들의 일면적인 봉기성만을 특권화하는 논의에 대한 비판이다. 대중들은 능동적인 만큼 수동적이고, 진보적인 만큼 보수적인 양면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함의는 대중들의 역량이 갖는 잠재적 폭력성에 관한 것이다. 대중들의 힘은 때로 폭력과 구별하기 어려운 형태로 나타난다.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공포에 느끼고 이를 제거하려는 대중들은 오히려 대항폭력을 통해 대중들에 대한 가공할 공포를 초래하여 사회의 변화가 아니라 붕괴로 나아갈 수도 있다.

발리바르가 이런 양면적인 긴장을 전환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 반폭력 정치이다. 반폭력 정치에 대한 사고는 이 책의 가장 독창적인 대목이라고 할 수도 있는 시민인륜(civilite) 개념으로 정교해진다. 시민인륜은 ‘시민권’과 ‘사적이고 공적인 윤리’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결합한 신조어이다. 이 개념은 대중들의 폭력이 동일성(identity)과 결부되어 있으며, 따라서 공동체(국가) 내부에서 증오와 잔혹으로 나아가는 동일성들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한에서 해방의 정치나 변혁의 정치가 가능해질 수 있다는 문제 의식을 담고 있다.

물론 이상의 간략한 정리는 전체적인 문제 틀에 불과하며, 이 책에는 훨씬 풍부한 논의들이 담겨 있다. 그것은 근본적인 사유가 갖는 전복적인 힘을 예증한다. ‘대중들의 공포’는 구태의연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도전이고, 최근 주목 받고 있는 네그리, 푸코, 들뢰즈 등의 철학과 쟁점을 형성하면서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시도이며, 무엇보다 빈곤과 잔혹이 공존하는 오늘날의 정세를 돌파하려는 이론적 실천이다. 이 두툼한 책이 옮긴 이들(최원·서관모)의 오랜 정성과 노력으로 우리 앞에 당도했다.(김정한|서강정치철학연구회 회원)

07. 0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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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e 2007-09-22 22:58   좋아요 0 | URL
그 밥에 그 나물인 (것 같은) 김정한 씨가 서평을 써서인지 좋은 말만 해났네요.

로쟈 2007-09-23 00:06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책을 미리 읽어본 독자가 많지는 않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