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핑크의 <에크리 읽기>가 출간된 김에 '라캉 읽기' 문헌을 몇 권 꼽아둔다.


17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에크리 읽기- 문자 그대로의 라캉
브루스 핑크 지음, 김서영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7년 8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07년 08월 19일에 저장

에크리-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
김석 지음 / 살림 / 2007년 11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07년 12월 08일에 저장

라캉과 정신의학- 라캉 이론과 임상 분석
브루스 핑크 지음, 맹정현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07년 08월 19일에 저장

성관계는 없다- 성적 차이에 관한 라캉주의적 탐구
브루스 핑크 외 지음, 신형철 외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5년 3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07년 08월 19일에 저장



17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작가 백가흠의 두번째 소설집이 출간됐다. 데뷔작 <귀뚜라미가 온다>보다는 덩치가 좀 커졌는데, 그가 이번에 내놓은 건 <조대리의 트렁크>(창비, 2007)이다. 표제작 등을 읽어본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친근함마저 느껴진다. 비록 작년 여름에 읽은 작품들의 기억이 아득하지만. "광적이고 파렴치한 폭력의 세계를 날것으로 묘사해 독자에게 불편한 충격"을 주는 소설로 소개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불편한 충격'까지는 경험해보지 못했고 다만 흥미는 느꼈다('소설적인 폭력'이 오히려 현실에 미달하는 게 요즘 추세 아닌가?). '문단의 정석'대로라면 이제 장편소설이 나와야 할 터인데 기사를 읽어보니 '히피'에 대한 것이라고. 단편에서의 장기들이 그대로 살아있는 멋진 장편이 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한국일보(07. 08. 18) 두번째 소설집 '조대리의 트렁크' 낸 백가흠

“저도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지만, 우리 사회는 종교적 억압이 심하죠. 도덕적, 윤리적 외양을 내세우면서 치부를 감추는데 급급합니다. 우리 사회의 번드르르한 겉모습 뒤에서 무수히 벌어지는 반이성적 작태 중 폭력의 문제를 천착하는 것이 제 소설입니다.” 광적이고 파렴치한 폭력의 세계를 날것으로 묘사해 독자에게 불편한 충격을 주고 있는 소설가 백가흠(33)씨. 그가 두번째 소설집 <조대리의 트렁크>(창비 발행)를 냈다. 첫 소설집 <귀뚜라미가 온다> 이후 2년 만으로, 그동안 써온 단편 9편을 묶었다.

폭력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번 작품집에도 선연하다. 기형아를 유기하는 젊은 부부(‘웰컴, 베이비!’), 거둬준 노인을 상대로 위장 강도짓을 벌이는 부랑아들(‘매일 기다려’), 떠나려는 애인을 둘씩이나 감금하고 성폭행 동영상으로 협박하는 남자(‘굿바이 투 로맨스’) 등 교정불가의 ‘나쁜 놈’들이 득시글거린다.

변화도 감지된다. 작가가 그동안 잠재적 폭력성이나 뒤틀린 성의식을 가진 남성이 표출하는 폭력을 주로 다뤘다면, 이번 창작집에서는 노인, 아동 등 사회적 약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주목했다.
폭력의 근원에 대한 탐구가 개인적 성향에서 사회적 맥락으로 확장됐음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는 작가의 문학적 전략이기도 하다. 백씨는 “예전엔 서정적 문체를 동원해 폭력의 양상을 세밀하게 표현했는데, 인물 설정을 바꿈으로써 묘사에 기대지 않고도 극악함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말한다.

피해자에게도 온정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 중립적이고 냉정한 작가적 시선은 여전하다. ‘매일 기다려’의 노인이 아이들의 기식과 패악을 견뎌내는 힘은 가족을 꾸리고 싶은 욕망이다. 평생을 홀로 살아오다 정 붙일 상대를 만난 노인은 자기 재산을 강탈한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떠나는 모습에 “서운하고 아쉬워서 주책없이 흐르려는 눈물을 참고 또 참는다.”(127쪽) 백씨는 “노인은 모든 것을 다 뺏기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아이들보다 더 큰 것을 얻은 것일지도 모른다”며 “동정의 시선은 필요치 않다”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화해는 없다. 표제작을 비롯한 몇몇 작품은 이전에 비해 어느 정도 가능성을 열어둔 결론을 맺었지만, 독자가 출구없는 폭력의 세계를 목격하며 느끼는 답답함이 크게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작가 역시 “작품을 쓰며 늘 화해를 바라지만 결국 작중 인물들은 소통하지 못한 채 불화하고 파국을 맞는다”며 “가끔 내가 (정신적) 미숙아 같기도 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온존하는 폭력을, 그저 자신의 평온을 확인하는 가십이나 위로로 삼는 우리가 어찌 백가흠 소설을 불편하고 답답할 뿐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는가. 원주 토지문학관에 기거하고 있는 백씨는 다음 작품으로 히피를 소재로 한 장편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이훈성 기자)

세계일보(07. 08. 18) 백가흠 두번째 소설 출간…"폭력 난무하는 세상, 희망 찾고 싶어"

소설가 백가흠(33)씨가 2년 만에 두 번째 소설집 ‘조대리의 트렁크’(창비)를 펴냈다. 전작 ‘귀뚜라미가 온다’는 어머니에게 주먹질하는 패륜아, 유부녀 성폭행범, 파렴치한 목사 등이 활개치는 ‘배덕자의 천국’이었다. 두 번째 소설집에서도 무법자들의 구타와 악다구니는 여전하다. 하지만, 예전처럼 ‘희생자 전원 몰살’ 식의 파국으로 치닫지 않는다. 이제 작가는 가느다랗고 희미한 구원의 빛을 던진다.

표제작 ‘조대리의 트렁크’에선 작풍의 변화가 명확히 보인다. 충청도 토박이 조대리는 대리운전 기사다. 기저귀를 차고 병석에 누운 노모와 더불어 산다. 비가 쏟아지던 밤, 조대리는 말끔한 신사 장영수의 세단을 대신 몬다. 사업 실패에 자포자기한 영수는 자살하기 전, 살아있는 노모를 저수지에 수장하려 한다. “다, 죽여버리고 싶다. 정말. 가족이고 뭐고.”(153쪽)

영수는 대리기사 조대리를 멸시하면서도 저수지까지 동행할 것을 재촉한다. 저수지에서 돌아온 그는 이튿날 여관에서 변사체로 발견된다. 세단 트렁크엔 뇌출혈에 걸린 영수의 노모가 웅크리고 있다. 조대리는 트렁크 속 노인을 거둔다. “조대리는 노인을 업고 집으로 뛰기 시작한다. 뛰면서 자기 엄마보다도 더 가벼운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진다.”(162쪽)

초기작들의 암담한 결말과 다르다. 몰살과 자학 대신 꺼져가는 불꽃을 되살리려는 안간힘이 있다. 백씨는 “등단 무렵엔 철저히 객관화된 소설을 써야 된다는 강박에 일부러 탈출구를 막았다”며 “현재는 화해와 희망에도 눈 돌리고 있다”고 변화된 작품관을 설명했다.

‘루시의 연인’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준호는 군복무 시절 불구가 됐다. 태권도 승단시험 연습 중 무지막지한 고참들이 가랑이를 무리하게 찢어 신경을 심하게 다쳤다. 은둔 생활을 하는 준호는 책을 빌리러 가는 일 외엔 외출하지 않는다. 그는 책 대여점 여주인 정원에게 끌리지만, 속내를 털어놓지 못한다. 좌절된 사랑을 그는 ‘루시’에게서 찾는다. 루시는 남성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실리콘 인형이다.

준호의 어머니는 아들을 장애인 미순과 결혼시키려고 하지만, 준호는 다리를 못 쓰는 미순을 거부한다. 어느 날, 준호가 연모하던 정원이 꽃뱀으로 밝혀지고, 그녀는 잠적한다. 갈 곳이 없어진 준호는 “거실로 나가 반갑게 미순을 맞는다.”

미순을 맞아들이는 것 역시 초기작에 없던 화해의 제스처다. 근작일수록 변화의 흔적이 또렷하다. 올해 상반기에 발표한 ‘사랑의 후방 낙법’에선 노골적인 폭력이 스포츠 선수의 땀방울로 대체된다. 그 밖에 가난한 노인이 10대 불량아에게 학대·갈취당하면서도 가족의 정을 구하는 ‘매일 기다려’, 영아 매매와 영아 유기 사건을 교차시켜 비극성을 증폭시키는 ‘웰컴, 마미!’ 등 9편의 단편이 실렸다.

백씨는 자신의 단편을 “독자와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라고 말한다. 적나라한 폭력과 인간의 추악성을 부각하는 건 ‘낭만’으로 왜곡된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장치다. 그는 “내가 쓴 소설을 스스로 들여다보면, 사물이 철저하게 객관화된다”고 말한다. 소설 속 가해자를 증오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 “독자들은 불편한 소설을 쓰는 이유를 묻습니다. 저도 답을 알지 못합니다. 아직까진 악행으로 가득한 세계를 일말의 희망을 암시하면서 숨김 없이 보여주는 일밖에 할 수 없어요. 그게 소설가의 일이잖아요.”(글·사진 심재천 기자)

07. 08. 18-19.

P.S. 참고로 '작가와 문학사이'란의 소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319697 참조.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Joule 2007-08-18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저도 한때 조 대리였어요. 어느 날 아침 회사에 출근했다가 기어이 쌓인 울화통이 폭발하여서 책상 정리하고 가방 들고 신발 꿰어 신고 있는데 상사가 그러더라구요.

"야, 조 대리, 어디 가?"

"저, 이제부터 조 대리 아니거든요. 안녕히 계세요."

로쟈 2007-08-18 09:14   좋아요 0 | URL
소설에서 '조대리'의 '대리'는 '대리운전자'를 가리키지만, 인연이 없지는 않은 책이군요.^^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8-18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작가, 하기에 백민석인 줄 알고 깜짝 놀라서 와봤는데 아니군요 ㅎㅎ
역시, 절필선언을 되돌릴 생각은 없나보네요 흠

로쟈 2007-08-19 19:12   좋아요 0 | URL
깜짝 놀라셨다기에 페이퍼 제목을 바꿨습니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읽게 되는 북리뷰들 가운데 눈에 띄는 책을 몇 권씩 골라보는 게 나의 '취미'이다(적어도 한두 권은 구입하게 된다). 이번주의 첫번째 후보작은 스티븐 하우의 <제국>(뿌리와이파리, 2007)이다. '제국'에 관한 책들이 그간에 적잖게 나왔기 때문에 또 무슨 '제국'이냐 싶은데, 별로 부담스러운 분량은 아니어서 독서목록에 넣어둔다. 아직 읽지 않은 책들과 아직 구입하지 않은 '제국' 책들의 이미지들도 몇 권 띄워놓는다.

서울신문(07. 08. 17) '제국 아닌 제국’ 美國

영화로 더욱 유명해진 소설 ‘반지의 제왕’에서 제국을 통제하는 ‘악의 축’ 사우론은 ‘절대반지’를 빼앗아 세계를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반면 사우론에 대항하는 난쟁이 호빗족은 평화롭고 작은 공화국 샤이어에 살고 있는데, 샤이어는 뜻밖에 잉글랜드를 암시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소설을 쓴 영국작가 존 로널드 로웰 톨킨(1892∼1973)의 청년 시절 대중매체와 문화예술 속 제국의 이미지는 오늘날과는 사뭇 달랐다고 한다. 제국을 건설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모험가, 영웅,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얼토당토않아 보이지만, 샤이어가 ‘대영제국’을 암시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제국’이나 ‘제국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혐오스러운 존재가 돼버린 것이 사실이다. ‘제국’(스티븐 하우 지음, 강유원·한동희 옮김, 뿌리와 이파리 펴냄)은 이처럼 ‘제국’이라는 단어가 혼란스러운 개념을 갖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지은이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정치학과 교수. 그는 20세기 후반 ‘제국’이나 ‘제국주의자’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이들만이 경멸적으로 쓰는 용어였지만, 최근에는 ‘미국 제국’이라는 개념이 대단히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제국´ 옹호하는 수정주의의 범람
물론 제국주의와 관련된 현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지만, 미국이 제국 건설자의 역할을 떠맡는 것이 미국 자신을 위해서나 세계를 위해 좋은 일이라며 호감을 갖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점은 놀랍다는 것이다. 그는 영국식 세계 지배와 미국식 세계 지배는 대비되는 점이나 비교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면밀하게 살펴보면 실은 그리 많이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미국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미국의 지배와 통치의 확장이 공격성이나 부와 세계 제패에 대한 열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측하지 못한 위기에 대한 방어이거나 혼란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고자 마지못해 수행하는 의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하지만 21세기 미국의 ‘좋은 의도’와 ‘피할 수 없는 반응’이 대개 오해와 원망을 사고 있다는 것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영국 제국에 대한 묘사에도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또 미국은 자신들의 통제나 영향력은 지역의 정치체제를 통해 수행되고, 통제수단도 경제적·외교적·문화적이어서 사실상 ‘형식적인 식민주의’가 아니라 ‘비형식적인 제국’으로 작용해 왔다고 내세운다. 하지만 이 또한 영국 제국도 힘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형식적 지배 못지않게 상당 부분은 비형식적 지배를 수행하고 있었다고 반박한다.

영국의 비형식적 자유무역 제국은 라틴아메리카와 중동, 동아시아에서 아주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으며, 형식적 제국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내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영국의 정치인들도 비형식적 통치를 선호했으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만 형식적 정복에 들어가는 비용지출과 위험을 감수했다. 과거의 제국과 오늘날 새로운 제국 사이에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미제국, 대영제국과 다를 바 없다”
이 책이 미국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국과 식민주의 시대의 역사에 대한 개괄서라는 형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제국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오늘날 국제사회에 미치는 미국의 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라는 과제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분명 ‘미국 제국’에 대한 이해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

지은이는 “군사적 관점에서 미국의 강력함을 강조하는 이들은 미국의 취약함을 희석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더구나 과거의 제국과 달리 형식적 지배가 없는 상황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훨씬 복잡하고 위태로운 만큼 미국이 가진 힘의 본질을 이해하고 전망하는 데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충고한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07. 08. 17.

P.S. 번역서는 두 가지가 눈에 띈다. 먼저, 강유원씨가 공역자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 덕분에 번역에 신뢰감을 갖게 된다. 한가지 궁금한 건 그가 서평에서처럼 번역에서도 '미국'을 '유에스'라고 표기하는지 여부이다(일본을 '저팬'이나 '니폰'이라고 부르는 격인데, 그는 '유에스'란 표기에서 무슨 향락을 누리는 걸까? 그저 '미국'에 대한 혐오인가?). 그럴 리야 또 없겠지만.

그리고 두번째는 옥스포드대학출판부에서 나오는 '아주 간명한 입문(A Very Short Intoduction)' 시리즈의 한권이라는 것. 이 시리즈의 책들이 탐이 나서 나도 한 출판사에 번역출판을 제안한 적이 있지만 무산됐었다. 현재 170여 권의 타이틀이 나와 있다(목록은 http://www.oup.co.uk/general/vsi/titles/). 간명하다고는 하지만 우리 분량으로 '짧은' 책들은 아니다. 원서가 비록 문고본 판형에 백 몇 십쪽 분량들이지만 <제국>에서 보듯이 우리말로 옮기면 200쪽은 그냥 넘어가기 때문이다. 내 식으로 분류하면 시리즈 자체는 아주 '교양 있는' 백과사전으로 읽힌다. 이 정도가 '교양상식'으로 통용될 수 있는 날을 고대해본다...

P.S.2. 알고 보니 최근에 출간된 <러시아혁명>(박종철출판사, 2007)도 '아주 간단한 입문' 시리즈의 한권이다. 이거 '숨은 있는 책' 찾기도 아니고 이미 번역된 책들을 다 불러모으는 건 간단하지 않은 일 같다...

P.S.3. '제국' 얘기가 나온 김에 좀 늦게 입고된 듯한 책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휴머니스트, 2007)도 눈길이 가는 책이다. 이 만만찮은 분량의 저자는 앙드레 슈미드 교수이고 역자는 문학평론가로도 활동중인 정여울씨. 하버드대 역사학과의 카터 에커트 교수의 평에 따르면, "이 책은 한국 근대 지성사의 근원적 해체이자 분과학문의 경계를 뛰어넘는 역작이다." 정말 그런가는 확인해보면 되겠다. 한국 학계의 수준과 비교해볼 수도 있겠고...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biosculp 2007-08-18 12:04   좋아요 0 | URL
이 시리즈중의 하나인 러시아혁명도 번역되었더군요.
동문선에서 한 10권넘게 번역되었던에 전체 판권을 산것은 아닌것 같기도 하고요.
여기 저기 산재해서 번역되는것을 보면.
저는 이책시리즈 모으고 있거든요.이뻐서요.

로쟈 2007-08-18 16:5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동문선에선 하도 여러 종의 시리즈를 내놓고 있는지라 미처 이 시리즈에는 주목하지 않았었는데, 알려주신 덕분에 살펴봐야겠습니다.^^

2007-08-19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9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9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9 1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은 하버마스의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나남, 2003)이다. 책은 2003년 정초에 나온 걸로 돼 있지만 그 전 주에 이미 서평이 나온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2002년 연말에 나온 듯하다. 분량에 비해 너무 비싸다는 판단에서 구입하지 않았던 책인데 문득 읽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사실 하버마스의 논지에 대한 지젝의 비판을 나는 예전에 읽었었다). 하버마스 '전문가'인 이진우 교수의 서평을 미리 읽어둔다.

동아일보(02. 12. 28) [인문사회]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해질녘에야 비상하는 것처럼, 철학은 어떤 문제가더 이상 문제로 인식되지 않을 정도로 보편화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을 문제삼는 것 같다. 생명공학이 바로 그런 문제이다.
생명공학은 우리들에게 자신과 후손, 세계의 비전을 만들고 영향력을 행사할 힘을 주는 ‘꿈의 기술’로 인식되고 있다. 이제까지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렀던 인간복제를 현실화시킨 생명공학이 정말 꿈의 기술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유전학만큼 우리를 흥분시킨 자연과학도없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유전학이 생명의 신비를 해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생명을 생산적으로 다룰 수 있는 생명공학으로 발전함으로써 ‘생명’은 이제 이 시대의 핵심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생명공학의 문제는 이성적으로 논의되기는커녕 ‘축복’과 ‘재앙’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극단적 이원론의 덫에 걸려 있다. 한편에는 생명공학의 출현으로 모든 것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긍정적 예측이 있으며, 다른 한편에는 인간이 생명공학을 통해 창조주인 신(神)의 기능을 탈취함으로써 결국에는 인간 존엄성을 파괴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이원론은 어쩌면 실제의 생명과학적 인식과 그것이 적용될 때 나타날 수 있는 기술적 결과들과는 별로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출간된 하버마스의 이 책은 특히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한편으로, 이 책은 생명공학의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인간본성’의 관점에서 생명공학에 도덕적 한계를 설정하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철학은 무조건 생명공학을 반대한다는 인식이 팽배한 우리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다. 다른 한편으로 하버마스는 일련의 포스트휴머니스트들처럼 기존의 인간 이해를 포기하지 않고서도 생명공학의 문제를 도덕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진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을 이제 진화의 주체로 올려놓음으로써 생명공학은 어떤 윤리적 문제를 낳는가? 하버마스는 이 문제를 대체로 세 가지 관점에서 접근한다.

첫째,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윤리적 불확실성은 근본적으로 자연스럽게‘태어난 것’과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진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인간의 체외수정을 허용한다면, 왜 우리는 인간의배아 연구를 금지해야 하는가? 생명공학에 대한 도덕적 과잉반응을 비판하는 과학자들은 지금 인간복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25년전 체외수정도 반대했다고 꼬집는다. 생명공학의 발전을 막을 도덕적 댐은 이미 붕괴된 것이다.

둘째, 하버마스는 태아의 도덕적 지위에 관해 모든 시민들이 수용할 수있는 중립적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수정란에도 도덕적 주체에 주어지는 인격과 인간의 존엄성을 부여한다면, 생명공학 자체는 어떤 이유에서도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없을 것이다. 하버마스가 절대적 생명권을 주장하지 않고서도 생명공학의 도덕적 한계를 설정할 수 있는 근거를 찾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셋째, 하버마스는 생명의 존엄과는 다른 ‘인간다운 삶의 존엄’을 도입함으로써 “우리는 생명공학 시대에도 ‘자신의 삶의 창조적 주체’로서 실존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만약 우리가 생명공학 시대에도 서로를 자율적으로 행위하는 인격으로 인정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전제조건을 침해하는 기술행위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버마스는 치료의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소극적 우생학’과 치료의 논리를 넘어서 유전자의 특성을 변형시키는 ‘적극적 우생학’을 구별하면서, 소극적 우생학은 허용될 수 있지만 유전자 조작에 바탕을 둔 적극적 우생학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물론, 하버마스의 이러한 시도가 우리의 불안을 말끔하게 씻어주지는 못하겠지만, 그의 철학적 성찰이 다음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게 만든다면 그것으로충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존재이기를 원하는가? 우리는 태어나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만들어지기를 바라는가?”(이진우 계명대교수·철학)

07. 08. 16.

P.S. 국역본의 제목이 <인간 본성의 미래> 대신에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가 된 것은 읽기에 좀 거북하다(영역본의 제목은 'The Future of Human Nature'). 'Human Nature'를 일부러 '인간적 자연'이라고 옮기는 철학자들도 있지만 본인들 생각만큼 의미심장한 건 아니며 오히려 이해를 방해한다. '인간이라는 자연'이라고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식이라면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는 <인간 자연에 대하여>가 될 터인데 이게 얼마나 어색한 번역인지 객관적으로 판단해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런, 본문을 보니 '인간 자연의 도덕화' '인간 자연의 기술화'가 난무하는군. 그냥 자연스럽게 '본성'이라고 해두면 편할 텐데...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7-08-17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7 1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7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8-18 01:15   좋아요 0 | URL
'업자'들은 다 아는 얘기지만 역시나 고유명사가 문젭니다.^^; 제가 알량하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즐거운 일이지요.^^
 

프랑스의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1915-1980)의 '데뷔작' <글쓰기의 영도>(동문선, 2007)가 번역/출간됐다(바르트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880102 참조). 예전에 한번 <영도의 에크리뛰르>(동인, 1994)라고 <기호학의 원리>과 합본으로 번역된 바 있는데, '무참한' 번역으로 기억된다(다행히/당연히 절판됐다). 이번에 나온 책은 본문 215쪽으로 생각보다는 두꺼운데, '역자후기'를 보니 1961년부터 1972년 사이에 씌어진 여덟 편의 비평문이 제3부로 묶여서 원래의 1953년판에 추가됐다. 판권란에는 1953년판이 기재돼 있지만 실상은 1972년 개정판을 옮긴 것이다.

내가 책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아마도 김현의 <프랑스 비평사>(현대편)에서였을 듯한데, 김현은 롤랑 바르트에 관한 장에서 <잠재태의 기술>이라고 옮겼었다. 수잔 손택의 서문이 붙어 있는 112쪽의 얇은 영역본(3부가 들어 있던가?)을 읽은 건 대학원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그로부터 이제 거의 15년만에 제대로 된 한국어본을 읽게 된다니 감회가 없지 않다(동문선의 책들이 그래도 외양은 아주 번듯하지 않은가?). 

알라딘에는 아직 입고되지 않은 듯한 <글쓰기의 영도>는 "바르트가 내놓은 최초의 평론집으로 그의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알리는 신호탄"(217쪽)이다. 관련리뷰가 혹 있나 싶어 검색해 보다가 발견한 건 안 그래도 요즘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진중권의 '아듀' 칼럼이다. <씨네21>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연재를 끝마치면서 쓴 것인데 나도 읽은 기억이 난다. 거의 폐허처럼도 보이는 작업실의 프란시스 베이컨 사진과 함께 다시 읽어본다. 칼럼에서 그가 말하는 '글쓰기의 영도'가 바로 바르트의 표현을 빌어온 것이다(바르트와는 다른 의미로 쓰고 있지만).

 씨네21(06. 06. 09)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글쓰기의 영도(零度)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 중에 입을 통해서 모든 것을 쏟아내다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사내의 그림이 있다. 뱃멀미를 하는 사람들이 토하고 토하다가 더 토해낼 게 없어 괴로워하는 것처럼, 글쟁이도 요동하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현기증과 역겨움에 글을 토하고 토하다가 더 토해낼 게 없어 괴로울 때가 있다. 그때는 입으로 신체 안의 모든 기관을 다 토해내고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싶어진다.

본의 아니게 논객 노릇을 한 지도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우연한 계기에 시작한 일인데, 이제는 그게 아예 정체성이 되어버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토해놓을 지면을 갖고 있다는 게 어찌보면 특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지면을 채우려면 세상의 거의 모든 일에 ‘견해’를 가져야 한다. 그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다. 때로는 아무 견해없이 그냥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살고 싶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언급하다보면 나중에는 아직 언급하지 않은 주제를 찾기 힘들어진다. 똑같은 글을 소재만 바꿔 고쳐 쓰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언젠가는 동일한 글쓰기가 반복되는 지루한 동일자의 무한증식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세상이 제아무리 다양하다 하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솔로몬의 격언처럼 세상이라는 것만큼 동일한 일이 지겹게 반복되는 지루한 드라마도 없다.

하루라도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이도 있다고 하나, 사실 미디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게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피부의 두께가 다르듯이, 사람마다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노출의 적정량이 있다. 자외선에 과도하게 노출되면 피부가 상하고 마는 것처럼, 견딜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미디어에 노출될 때 존재 역시 화상을 입어 상처에 물파스를 바른 듯한 고통을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논객은 글을 칼처럼 사용한다. 그러다보면 온몸으로 적대자들이 휘두르는 보복의 칼집을 받아야 한다. 비난도 적당히 받으면 기분이 나쁘지만, 과도하게 받으면 무감해지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 비난을 받는 것 자체가 쾌감으로 바뀌어버린다. “내가 비난을 받는 것은 뭔가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말했다는 증거다.” 증상이 이쯤 되면 하루라도 욕을 안 먹으면 혀에 가시가 돋는 변태가 된다.

논객의 발언은 기술적(descriptive)이 아니라 규범적(normative)이다. 윤리학에 ‘공약의 부담’이라는 게 있어, 규범적 발언을 하는 이는 그 말을 지킬 책임을 먼저 자신에게 지워야 한다. “약속을 적게 할수록 더 많이 지킬 수 있다”는 과학의 윤리는 동시에 논객의 윤리. 하지만 논객은 과학자보다 불행하여 글을 쓸 때마다 약속을 해야 한다. 말과 글을 쏟아낼수록 글쟁이는 제 말로 제 몸을 옭아매게 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숨이 막히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흔히 독자는 글을 보고 필자의 인격을 추정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인간과 삶을 사는 인간은 다르다. 글쓸 때의 인간은 ‘이상적 주체’가 되지만, 원고료를 챙기는 글쟁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주체’다(종종 글쓴이를 직접 보고 나서 독자들이 글에서 얻은 아우라가 무너지는 체험을 하는 건 이 때문이다).

글쟁이는 자신의 비루한 현실과 글을 쓸 때에 연기하는 이상의 괴리에 역겨움을 느끼다가 결국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 바로 이때가 더이상 글을 쓰는 게 불가능해지는 글쓰기의 영도(零度). 지금 그 제로 디그리에 와 있다. 그동안 이곳저곳에 셀 수 없이 많은 말과 글을 뿌리며 살아왔다. 할 수 있는 모든 말들을 다 토해놓고, 더 토할 게 없어 위산까지 토해놓고, 그것도 모자라 몸 안의 기관을 증발시켜 스프레이처럼 입으로 뿜어내어 마침내 존재를 허공으로 날려버린 느낌이다.

이것이 내가 이 지면을 개인적 넋두리로 장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씨네21>의 독자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이제는 규점을 말하고 지키는 논객이 아니라, 그냥 사실을 기술하는 기록자나 허구를 늘어놓는 이야기꾼이고 싶다.(진중권/ 문화평론가)

07. 08. 16.

P.S. 1년만에 다시 논객의 자리로 돌아온 걸 보면 "사실을 기술하는 기록자나 허구를 늘어놓는 이야기꾼"의 자리를 지키는 게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곁가지 이야기이고 바르트의 책들이나 한데 모아놓고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의 표현을 빌자면 '텍스트의 즐거움'에 스스로를 온전히 내맡기면서 말이다. 실상은 그런 게 책읽기/글쓰기의 유토피아이다. 유-토피아, 이 세상엔 없는...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7-08-16 20:38   좋아요 0 | URL
제목보고 진중권의 칼럼을 가져오셨구나 했습니다. :) 저도 이 칼럼 읽었죠. 덕분에 저 책까지 관심이 가는군요.

로쟈 2007-08-16 20:45   좋아요 0 | URL
바르트의 책과는 무관한 칼럼이지만, '낚시'는 되겠군요.^^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8-18 11:23   좋아요 0 | URL
역시 동문선인가 싶기도 하고, 왜 하필 동문선인가 싶기도 하네요.
번역은 누가했을려나... 이 책 번역은 마음에 들길 바라야겠네요.

로쟈 2007-08-19 16:58   좋아요 0 | URL
바르트는 동문선에서 전담하고 있고, 번역 또한 김웅권씨 전담입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예전에 이대대학원생들이 번역한 거에 비하면 양반인 면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