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은 남들보다 예민한 사람들이기에 소설가들이 이상한 징크스와 이색적인 집필 습관을 갖고 있다는 건 전혀 놀랄 만한 소식이 아니겠다. 그럼에도 그들이 잠깐 털어놓는 이야기는 흥미를 끈다. 소설가들의 집필 습관를 소개하는 기사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백가흠◇천운영◇이기호◇은희경◇박상우◇윤대녕◇김숨◇손홍규(시계방향)
세계일보(07. 09. 17) 소설가 8인에게 들어본 '나만의 집필 습관'
“흰 러닝셔츠를 입지 않으면 소설이 안 써집니다.”(소설가 백가흠) 소설가에게는 저마다 독특한 집필 습관이 있다. 편하게 러닝셔츠, 축구 유니폼을 걸치거나 긴장감을 돋우려고 외출복을 입기도 한다. 애완견을 곁에 둬야 손이 풀린다는 작가도 있고, 집필실 대청소로 심기일전하는 작가도 있다. 내재한 감수성과 창의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소설가들의 노력은 기발하고, 독특하다. 현재 활발히 작품활동을 하는 소설가 8인에게 그들만의 집필 습관을 물었다.

#1 헐렁한 마음가짐
‘난닝구’와 ‘깔깔이’는 백가흠씨의 집필 스트레스를 덜어준다. 최근 소설집 ‘조대리의 트렁크’를 펴낸 그는 흰색 러닝셔츠 없이 집필을 할 수가 없다. 평소에는 러닝셔츠를 챙겨 입지 않지만, 유독 글을 쓸 때 간절해진다. 그는 “헐렁한 러닝셔츠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뭔가가 있다”고 말한다. 겨울에는 군대 방한복 ‘깔깔이’가 러닝셔츠를 대신한다.

‘잘가라, 서커스’의 천운영씨는 여자임에도 남성용 트렁크 팬티와 ‘아버지 메리야스’를 애용한다. 헐거운 복장은 마음을 편하게 하고, 작업 능률도 올린다. 그는 “예전엔 평범한 체크무늬를 입었는데, 요즘은 양과 구름 무늬 트렁크를 즐겨 입는다”고 말한다. 그의 어머니가 결혼하지 않은 딸의 옷장 속에서 트렁크 팬티 ‘컬렉션’을 발견하고 기겁한 적도 있다.
‘최순덕 성령충만기’의 이기호씨는 축구 유니폼을 입고 글을 쓴다. 소설 진척 정도에 따라 유니폼 등번호가 바뀐다. 소설 중간쯤 쓸 땐 미드필더 번호인 7번을, 결말 무렵엔 공격수 등번호 11번을 입는다.

#2 옷깃을 여미고
의관을 정제하고 책상 앞에 앉는 작가도 있다. 올해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를 출간한 은희경씨는 글을 쓸 때 일부러 편한 옷을 입지 않는다. 집에서도 외출복 차림에 양말까지 챙겨 신고, 스스로 ‘출퇴근’ 시간도 정해놓는다. “긴장감을 늦추지 않기 위해서 직장생활 하듯 글을 써요. 영감이 아닌 직업정신으로 밀고 나갑니다.”
‘내 마음의 옥탑방’을 쓴 박상우씨는 새 작품을 쓰기 전, 대청소를 한다. 마음을 다잡는 동시에 새 작품에 전작의 잔상이 끼어들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다. 어지러운 책상을 정돈하는 것은 물론 방 구조까지 바꾸기도 한다. 그는 “발동이 걸려 펜이 술술 나가려면, 대청소로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설가 윤대녕씨의 경우 “소설에 대한 일관된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한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 식단을 최대한 단순하게 한다”고 그의 문단 동료가 전한다.

#3 나만의 분위기 조성
“사람은 집필에 방해가 되지만, 강아지는 그렇지 않아요. 정적으로 꽉 차 불안한 방에 발랄한 기운을 퍼뜨립니다.” 최근 소설집 ‘침대’를 펴낸 김숨씨는 집필실에 애완견 ‘포그’ ‘포아’를 풀어놓는다. 두 요크셔테리어는 고독한 작업에 시달리는 작가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사람의 신화’의 손홍규씨는 글이 막히면, 옷을 다 벗고 5∼10분간 춤을 춘다. ‘나체 막춤’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데 효과적이다. 흡족한 단편소설을 내놓기 위해 보통 1∼2번 그만의 ‘의식’이 필요하다. 문학평론가 김미현씨는 “집필습관은 작가의 창작욕과 연결된다”면서 “글쓰기를 노동으로 받아들이거나, 그 반대로 일상을 벗어난 특별한 작업으로 여기려는 마음가짐은 모두 작가 자신의 잠재력을 끌어내려는 안간힘이자 ‘실존적 선택’”이라고 말한다.(심재천 기자)
07. 09. 25.
P.S. 겸사겸사 같은 지면에서 최근 소설집을 낸 소설가 천명관씨의 인터뷰의 기사를 옮겨놓는다. 이건 '집필 습관'이 아니라 '집필 성향'관 관련된 것이다. 나는 언젠가 접해본 그의 '국적 없는' 괴이한 소설이 넌센스라고 생각했었는데, 기사를 읽어보니 작가로선 이유가 없지 않았다. “한마디로 ‘격이 떨어지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재미있게 쓰자’는 거지요.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이 웃을 수 있도록." 그의 소설을 읽고 유쾌할 수 없었던 나는 그가 고려하는 '전 세계 3000명'에는 포함되지 않는 듯하다.

세계일보(07. 09. 22) "문학상 받은 소설들 답답해"
“전통이 잘 지켜진 소설, 문학상 받은 소설이 답답해요.” 서사 중심의 환상적인 플롯으로 화제를 모았던 ‘고래’의 작가 천명관(43)씨가 첫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문학동네)를 펴냈다. 등단작부터 최근작까지 11편의 중·단편엔 장차 세계 독자와 소통할 ‘호환성’이 있다.

천씨는 “이것저것 자질구레하게 묶은 글 무더기들”이라면서도 “모아놓고 보니 내가 아프리카인 유럽인 남미인 등 전 세계인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보편성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겠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한곳에서 10만명에게 읽히는 것보다 전 세계 3000명에게 읽히길 원한다.
그는 ‘외국배우’를 즐겨 기용하고, 이국 풍경을 무대에 자주 올리는 연출가다. 표제작 ‘유쾌한 하녀 마리사’엔 그의 세계화 성향이 잘 드러난다. 김치 냄새를 싹 뺀 단편은 등장인물부터 탈한국적이다. 한국 소설에 자주 쓰이는 내면 묘사, 관념적 표현을 일절 배제하고, 이야기에 치중한다.
등장인물은 독일인 소설가 토마스와 그의 아내 요한나, 처제 나디아, 포르투갈인 가정부 마리아다. 토마스는 처제 나디아와 바람을 피운다. 극심한 배신감에 치를 떤 요한나는 자살을 결심한다. 소설은 요한나가 남편의 변심을 탓하며 남긴 유서 형식이다. 낭만적인 최후를 위해 요한나는 샴페인 ‘동 페리뇽’을 두 병 마련한다. 자신이 마실 샴페인엔 치명적인 독을 풀었다. 남편이 불륜여행에서 돌아올 시간에 맞춰 요한나는 욕조에서 독이 든 샴페인을 들이켠다. 토마스는 거실에서 아내가 준비한 샴페인을 홀짝이며 유서를 읽는다. 피를 토하는 쪽은 토마스다. 하녀 마리사가 집 안 정돈을 하다 샴페인 병을 바꿨고, 얄궂게도 두 사람의 운명마저 바꿔놨다.
“제 주변 상황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한국의 역사나 현실을 담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작가가 그렇게 쓸 필요는 없지요. 한국문학의 격식과도 같은 진지한 정서, 묵직한 주제 등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또, 될 수 있는 대로 직접적이고 간결한 구어체 문장을 써요. 고상하고 문학적인 단어를 멀리하는 편이 내용전달에 효과적이에요.”
등단작 ‘프랭크와 나’ 역시 그의 소설관을 반영한다. 순박한 한국 남자가 캐나다에서 랍스터를 수입하는 사업을 벌이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다. 랍스터 공급책 사촌형 프랭크가 동거녀와 헤어지면서 일이 꼬인다. 실의에 빠진 프랭크는 술김에 흑인 깡패를 폭행하고, 갱단 두목에게 쫓긴다. 토론토에서 살벌한 보복극에 휘말린 남자는 랍스터 구경도 못한 채 우왕좌왕한다.
‘세일링’은 한국이 배경이다. 대서는 성묘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느닷없이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 숙영과 다툰다. 아내에겐 매일 다정하게 통화하는 남자가 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에 답답해 하는 대서는 고속도로에서 비현실적인 거대한 배와 맞닥뜨린다. 배는 일순 일상의 비루함을 잊고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을 마이클과 제인, 장소를 한갓진 미국 시애틀 농촌으로 바꿔도 전혀 무리가 없다. 작가는 국적에 구애받지 않는 소설을 쓰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격이 떨어지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재미있게 쓰자’는 거지요.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이 웃을 수 있도록.” (심재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