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주목받지 않은 지난주의 신간 가운데 하나는 영국의 좌파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의 문화정치>(한나래, 2008)이다. <스튜어트 홀의 문화이론>(한나래, 1999)이라는 논문모음집과 몇 권의 교재용 공저가 출간된 적은 있지만 그의 단행본 저작이 소개되는 건 이번에 처음인 듯하다(두 책은 역자가 같다). 두툼한 고가의 책이지만, 그리고 20년전 저작이지만, 손에 들어볼 마음이 생기게 하는 건(사정상 도서관에 들어오길 기다려봐야겠지만) 역시나 이명박 정부의 출범이라는 한국적 정세와 관련이 있다. 관련기사의 초점도 거기에 맞춰지고 있다.

한국일보(08. 02. 05) 노동자·농민·88만원 세대는 왜 좌파를 등졌을까

중소자영업자, 노동자와 농민, 88만원 세대들…. 좌파진영에 표를 던져야 할 이들은 왜 보수정권의 등장을 염원했을까? 이명박 후보의 압승으로 귀결된 지난 대선은 좌파진영에 심각한 과제를 던져주었다. 성별, 지역, 세대를 가리지 않고 계급적 정체성을 배반하는 투표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등장한 이명박 정권은 1970년대 노동당 정권의 경제실정을 비판하며 장기집권(1979~1990)에 성공한 마거릿 대처의 출현을 연상하게 한다. 대처의 성공은 오로지 신자유주의 경제드라이브의 성공 때문이었을까?

최근 발간된 영국의 좌파 문화 이론가인 스튜어트 홀의 대처리즘 분석서 <대처리즘의 문화정치>(한나래 발행)는 문화정치의 관점에서 대처리즘의 성공요인을 들여다본다. 경제정책의 성공 뿐 아니라 대중의 도덕적 복고주의를 자극함으로써 정치적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전통적 계급장벽을 뛰어넘은 이 같은 성공을 저자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예컨대 대처는 탈학교화, 관용적 교육 등이 떠받들여지던 학교현장에 높은 교육수준의 회복과 권위의 수호 같은 이데올로기를 전파했고, 권위와 사회적 가치의 위기를 강조함으로써 필요하다면 도덕적, 법적 무력을 정상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부과해도 좋다는 가치관을 대중들에게 전파시켰다.

좌파의 복지정책에 대해서는 “씀씀이가 헤픈 국가가 벌지도 못하는 부를 함부로 써버리고 일반인들의 자립을 해친다”는 담론으로 대항했다. 또한 복지정책의 수혜자를 사회가 주는 혜택으로 살아가며 제 몫의 일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로 규정하고, 이들을 자신들과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다른 문화권 출신의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치환해 인종주의를 자극하기까지 했다.

결국 이런 도덕적 리더십을 포기한 좌파정당은 정책의 유효성과는 별개로 대중들로부터 외면 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더 타임스> <선> <이코노미스트> 같은 대중매체들의 도덕주의 전파도 대처리즘의 성공에 한몫을 했다. 그렇다면 좌파들이 대처리즘의 성공에서 배워야 할 점은 분명하다. 전통적인 계급정치에서 탈피해 문화적 주제에 주목해 대중을 블록화하는 방식으로 지지를 결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역자인 임영호 부산대 교수는 “홀은 1980년대의 영국사회라는 특수한 사례를 다루고 있지만, 그의 분석은 시공간차이를 넘어서 문화의 정치성을 주목하게 한다”며 “진보 역시 전통적 지지자를 결집하기 보다는 이른바 전통적인 진보세력 속에 내재한 보수적 요소(인종주의, 가부장주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성찰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진보의 정체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이왕구기자)

08. 02. 07.

P.S. 대처리즘 이후를 장식한 건 18년만에 정권을 탈환한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정부이다. 알다시피 그가 기치로 내건 건 '제3의 길'(기든스)이다. 홉스봄과 스튜어트 홀의 제3의 길'에 대한 비판은 <제3의 길은 없다>(당대, 1999)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책은 블레어 정권의 1년 6개월간의 공고에 대한 세밀한 분석으로, 그가 드러내고 있는 다양한 문제점에 대해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비판과 지지라는 서로 다른 목소리를 대비시키고 있다. 특히 영국의 대표적 사학자 홉스봄과 문화이론가 홀은 서로 다른 시각에서 제3의 길이 허구임을 비판한다." 지난 30년간의 영국 정치사가 우리의 반면교사가 되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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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한알 2008-02-07 21:39   좋아요 0 | URL
우연히 이 블로그를 알게 되어 작년말부터 찾아오고 있습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아니나, 나이 40이 넘어 직업과 관계없이 공부를 제대로 한 번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다만, 책 값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서....
제가 이 블로그 이야기를 했더니 제 처가 로쟈선생님께 몇 달 전 미학 강의를 한 동안 들은 적이 있다 하더군요.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로쟈 2008-02-07 21:44   좋아요 0 | URL
앗, 한 다리 건너면 '2촌관계'쯤 되는 건가요?^^ 책값 때문에 애를 먹는 건 저도 마찬가지고요(거기에 '공간' 문제도 심각합니다).--; '제3의 길'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입니다.^^; MEME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좋은 책들과 자주 만나는 한해가 되시길...

박균호 2008-02-08 08:47   좋아요 0 | URL
MEME님..방갑습니다. 저도 40넘은 나이에 공부를 해보겠다고 이곳 저곳 알아보고 있는 처지라서 더욱 방갑네요. 로쟈님의 리뷰보러 자주 들립니다만 여기에 흔적을 남기는 것은 처음이네요. 저는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교육대학원을 이미 졸업해서 무슨 대학원을 또 갈까 고민중입니다. 경북지역에 거주하고 있어서 제약도 많고요. 저도 물론 직업과는 상관없는 공부를 하고 싶기도 하고요. 로쟈님이 혹시 이 글을 본다면 괜찮은 분야를 소개해주시면 더욱 감사하겠고요. 여튼 복많이들 받으세요.

로쟈 2008-02-08 10:42   좋아요 0 | URL
인문학은 누굴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40넘은 나이에' 할 만한 공부라면 삶을 이해하고 향유하기 위한 공부여야 하지 않을까 싶고요, 제가 아는 분야야 한정돼 있기 때문에 역사나 고전학 분야를 말씀드릴 수밖에 없네요.^^; 관심사에 따르시면 되지 않을까요...

모래한알 2008-02-08 09:02   좋아요 0 | URL
파크님, 말씀 감사합니다. 새해에는 뜻에 맞는 공부의 길을 찾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저도 정진하겠습니다.
 

어제 제임스의 <실용주의>(아카넷, 2008) 등을 구입하러 교보에 나갔다가 덩달에 손에 든 책은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2008)이다. 근간예정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출간됐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그의 책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2007)가 워낙에 조야한 수준의 번역을 선보인 터라 불만스러웠는데(내가 올려놓은 40자평이 상품 페이지에서 지워졌다) <감성의 분할>은 일견 깔끔해보인다. 영역된 그의 책들을 대부분 모아두었던 터라 개인적으로 반갑다.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해도 될 듯하다. 몇 차례 관련기사들을 옮겨놓은 적이 있는데, 랑시에르와 함께 아감벤의 책들이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들리는 바로는 국내 인문출판사들이 두 사람의 저작 판권을 앞다투어 사들였다. 지젝의 경우와는 달리 조잡하지 않은, 제대로 된 책들이 번역/소개되면 좋겠다. 이왕에 수입하는 철학이라면. 가장 최근의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동아일보(08. 01. 28) "민주주의가 사회적 소수자 배척한다”

프랑스의 자크 랑시에르(68), 이탈리아의 조르조 아감벤(66). 올해 국내 철학계에 이 두 철학자의 바람이 예고되고 있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두 학자의 책이 잇따라 번역 출간되고 초청강연회가 열리는 등 집중 소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두 학자는 2000년대 들어 서구 사상계에서 자리를 굳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랑시에르는 자크 데리다와 질 들뢰즈를 넘어, 아감벤은 미셸 푸코를 넘어 ‘새로운 사유’를 구축해 가고 있는 학자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세계 주요 학술 행사의 초청 1순위를 다투고 있다. 국내에서도 이들의 바람은 이미 일어난 상황. 원서로 두 철학자를 접한 사람들이 블로그를 통해 이들의 철학을 알려왔으며 “이 같은 학자들이 왜 여태껏 소개되지 않고 있는가”라며 번역서 출간을 기다리는 사람도 많다.》



랑시에르는 이달 초 저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가 번역 출간되면서 한국 독자들과 인연을 맺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평등’의 실체와 의미를 조명한 책이다. 이어 그의 대표작 ‘미학의 정치’가 ‘감성의 분할-미학과 정치’(도서출판 b)라는 제목으로 다음 주 출간된다. ‘정치의 가장자리에서’(길), ‘불화’(〃), ‘무지의 스승’(궁리) 등도 현재 번역 중이다. 랑시에르는 올해 말경 한국을 찾아 강연회를 열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감벤의 철학은 2월 초 국내에 본격 소개된다. 새물결 출판사는 대표작 ‘호모 사케르(Homo Sacer)’의 5권 연작 출간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1권을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부제로 2월 초 발간할 예정이다. 또 다른 대표작 ‘열림: 인간과 동물’, ‘남겨진 시간’ 등도 번역 중이다.

 

랑시에르의 사상적 특징은 어떤 학문적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 그는 좌파 철학자 루이 알튀세의 제자였지만 1974년 ‘알튀세의 교훈’이라는 비판서를 통해 사상적 결별을 선언한 뒤 철학 사회학 역사학 미학을 넘나들며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감성의 분할-미학과 정치’를 번역한 오윤성 씨는 “선배 철학자들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 때문에 ‘반목의 철학자’로 불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랑시에르는 ‘평등’이라는 개념으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타자()에 대해 얘기한다. 그는 “현대 사회에는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애초에 차단된 이들이 있는데 민주주의는 이를 고려하지 않고 평등을 주장해 왔다”고 지적한다. 인도의 수드라(카스트제도의 최하위 계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들을 비롯해 일본의 최하층민인 부라쿠민() 등이 이에 해당한다. 랑시에르는 철학마저도 소외된 이들을 외면해 왔다고 비판한다.

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

아감벤도 배제되고 소외당한 이들을 주목한다. 대표작 ‘호모 사케르’의 제목은 ‘벌거벗은 생명’으로도 해석되며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인간을 의미한다. 여기에 아감벤은 ‘예외 상황’이라는 개념을 덧붙여 권력이 유발하는 소외 문제를 지적한다. 위기가 닥치면 정부를 비롯한 권력자는 ‘예외 상황’임을 들어 시민들의 권리를 축소한다는 것이다. 나치의 지배를 대표적인 사례로 들고 있다.

Remnants of Auschwitz: The Witness and the Archive

사회철학자인 이들은 학문적 사상적 특징 외에도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랑시에르는 2007년 프랑스 대선 때 세골렌 루아얄 사회당 후보가 “랑시에르의 이론을 바탕으로 정책을 만들었다”고 말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아감벤도 미국의 강연 요청이 잇따르고 있지만 지문 등 생체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미국의 입국 제도가 있는 한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금동근 기자)

08. 02. 06.

P.S. 참고로 랑시에르와 아감벤의 영역본 대부분은 알라딘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오늘에야 안 사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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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2-06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굉장히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랑시에르의 새 번역본은 빨리 입수해서 살펴봐야겠군요.

로쟈 2008-02-06 22:23   좋아요 0 | URL
람혼님의 페이퍼가 좀 늘어나겠군요.^^

테렌티우스 2008-02-07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La haine de la democratie인데 haine가 haime으로 되어 있네요, 그것도 표지인데 좀 어이 없군요...

로쟈 2008-02-07 23:07   좋아요 0 | URL
일종의 징후이구요, 번역은 더 가관입니다...

주니다 2008-02-10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은 무사히 보내셨는지? 전 본가에 가서 잠깐 의무방어만 하고 후딱 내려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살던 집도 불편해서요 ㅎㅎㅎ 어제 시내 나간 길에 '감성의 분할'을 사들고 들어와서 조금 읽어봤는데, 매끄럽게 읽히는 번역은 아니더군요. 머리에서 쥐가 나면서 감성이 분열되는 느낌을..^^ 로쟈님께서 빨리 길 안내를 좀 해주셔야 할 듯 합니다...

로쟈 2008-02-10 14:40   좋아요 0 | URL
위험한 데 간 건 아니어서 '무사히' 보냈습니다. 밀린 일들이 암담하지만.^^; <감성의 분할>은 영어본을 학교에 둔 것 같아서 번역을 확인해보는 건 며칠 뒤로 미뤄질 거 같습니다. 저도 번역본을 몇 쪽 봤는데 머리에 싹 들어오진 않더군요...
 

미디어오늘에서 '강유원의 Book소리'를 옮겨온다(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5255). 이달의 책으로 올려놓은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안티쿠스, 2008)를 다루고 있어서다(오늘 교보에 나갔었지만 책은 구경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한권도 비치돼 있지 않은 것인지?). 겸사겸사 요즘 문제가 된 '영어몰입' 교육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이고 있는데, 십분 동감한다.

미디어오늘(08. 02. 05) 번역·일본·단테의 신곡

요즘 대통령직 인수(引受)위원회인지 국민에게 인내심을 닦게 하는 인수(忍修)위원회인지 때문에 날이면 날마다 시끄럽다. 시끄럽다가 드디어 아주 기발한 발상을 내놓았다. 누구나 알고 있는 영어 교육에 관한 것이다. 많은 분들이 정확한 이야기를 했으니 그것에 대해 한마디 보탤 마음은 없다. 나는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라는 책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



알려져 있듯이 일본은 번역이 앞선 나라다. 그러면 왜 이렇게 번역을 열심히 하는 걸까? 이 책에서 본 내용을 말해보겠다. 1800년대 후반 일본에서 모리 아리노리라는 사람이 ‘영어를 국어로 삼자’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대해 바바 다쓰이라는 사람은 “일본에서 영어를 채용한다면 어찌될 것인가, 상류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에 말이 전혀 통하지 않게 되고 말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이런 주장이 점차 힘을 얻어 일본은 ‘번역주의’라는 입장을 택하게 되고 이것이 오늘날 뭐든지 번역되어 나오는 일본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번역을 하면 뭐가 좋은가. 자기네 나라말로 편하게 읽으니까 좋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번역이 습관되면 그것은 단순히 문헌번역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의 문물 전반을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것으로 ‘번역’하게 된다. 일본의 이러한 번역주의는 세월의 두께를 얻으면서 서구의 근대를 나름대로 소화하여 독자적인 근대를 이룰 수 있게 한 정신적 바탕이 된다. 이것이 사실 오늘날 일본을 선진국으로 만든 힘일 것이다.



이런 번역의 성과가 잘 드러난 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이다. 우선 이 책 뒤에는 1910년대 이후 일본에서 출간된 ‘신곡’ 완역본 목록이 나와있는데 15종이 넘는다. 이 책은 15회에 걸친 이마미치 교수의 강연을 책으로 묶어낸 것이다. 

엔젤 재단이 개최한 이 강연은 끝난 후 매회 바이올린 연주와 다과회를 함께 열었으며, 단테와 관련있는 이탈리아 포도주도 마셨다고 한다. 청중석에는 학계의 인사나 젊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쇼와 전공 주식회사 최고고문과 같은 이도 참여했다. 비디오 촬영과 강의 녹음은 후지제록스 종합연구소가 담당했으며, 그것에 후지제록스의 회장과 사장이 직접 관여했다고 한다. 책이 출간된 경위를 적은 저자 후기를 읽다보면 부럽다못해 화가 날 지경이다.

이마미치 교수의 이 강연은 일본이 학문에 있어서도 이미 선진국에 올라섰음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는 고대 희랍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 서구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청강자들은 알아듣는 외국어가 있으면 더 좋겠지만 다양한 종류의 일본어 번역본들을 놓고 필요에 따라 골라가며 읽는다.

전문 학자들이 대중을 위해 많은 일을 해놓은 덕을 보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그들은 외국인과 만나서 이야기할 때 주고받을 수 있는 고급스러운 ‘콘텐츠’를 흥미진진하게 습득한다. 2007년에 한국에서 클래식음악 돌풍을 불러일으킨 ‘노다메 칸타빌레’라는, 만화를 드라마로 만든 것은 또 어떤가. 이런 게 되어야 선진국인 것이다.

30대 후반의 새파란 나이에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을 거쳐 민주정의당 전국구 의원까지 역임한 이경숙 위원장은 orange juice(나는 영어 발음이 엉망이니 그냥 로마자로 적겠다)를 앞에 두고 서양인과 무슨 말을 나누었는가.

혹시 ‘신곡’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 영어번역본으로라도 읽어본 적이 있는가. 대학의 총장이면 이 정도는 자연스럽게 떠들어줘야 기본을 갖춘 것이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 그것이 기본이라고 스승에게 배운 적이 있는가. 발음이 엉망이어서 선진국 못된다는 그 발상, 한마디로 상스럽다.(강유원_철학자)

08. 02. 05.

P.S. 이마미치 교수의 책으론 <동양의 미학>(다할미디어, 2005)이 더 번역돼 있다(중국과 일본의 전통미학을 다루고 있는데, 와병으로 한국에 관한 장은 마저 채우지 못했다고). 간단히 소개된 약력으로 보면 그는 "1922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1948년 도쿄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을 거쳐 파리대학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강사로 근무했다. 1962년부터 동경대학 문학부 교수를 지내고, 1982년에 정년 퇴직했다. 1996~1999년 파리대학 국제연구소 소장, 국제 형이상학회 회장, 국제 미학회 명예회장, 국제 에코에티카 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기억에는 박이문, 정명환 교수 등의 책에서 이름을 본 듯하다. 우리의 학술원 회원들께서도 말년에 이런 정도의 책들은 써주셨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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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8-02-06 00:09   좋아요 0 | URL
이마미치 교수의 신곡은 지난주에 주문하고서 미리 볼겸 교보에 갔을 때도 품절 상태여서 실망스러웠는데, 아직도 갖춰지지 않은 모양이네요. 실제로 책을 받아보니, 알라딘 미리보기에서와는 달리 단테의 옆얼굴 초상이 들어간 부분은 책 표지가 아니라, 책의 케이스라서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실은 신곡강의에 단테 초상이라는 디자인이 너무 뻔하고 상투적이라서 재미없다 싶었거든요. 실제 책 표지는 좋은 질감의 깔끔한 백색이라서 공들인 책이라는 느낌이 제법 들더라구요. 신곡은 사놓은지는 오래인데 아직도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언제 이 책을 읽을지 알수는 없습니다만, 머리맡에 두고 있는 것만으로 뭔가 새로운 세계의 열쇠를 쥔 기분이었습니다. 발간소식을 듣고서부터 워낙 기대했던 책인 덕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로쟈님께서 학술원 회원님들께 원하시는 저작은 '신곡 강의' 같은 책인가요? 아니면 '동양의 미학'같은 책인가요? 두 책의 차이도 잘 모르지만, 괜한 궁금증이 들어서요. 제 생각엔 신곡강의가 그 난이도와 무관하게 대중에게 열려있다면, 동양의 미학은 역시 그 수준과 상관없이 비교적 학자들 사이의 저작이라는 느낌입니다.

로쟈 2008-02-06 00:17   좋아요 0 | URL
저는 연휴가 끝나야 구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말미에 덧붙인 건 <단테 신곡 강의>를 염두에 둔 것이긴 한데 <동양의 미학>도 상관은 없겠다 싶습니다. 학술적이긴 하나 '교양서'로도 읽을 수 있겠다 싶어서요...

드팀전 2008-02-06 00:23   좋아요 0 | URL
로쟈님..새해에 드린 복이 조금 부족했다면 설날 다시 담아서 보냅니다.
지젝이 저를 즐거움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미로에 빠지게도 하는군요.켁켁...
명절 연휴에 서울 본가에 가고 또 처가에 가고 바쁩니다.아기가 자는 시간에는 잠깐 책이나 볼 수 있을까 싶군요...읽던 지젝은 명절과 어울리지 않아서 데려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치프킨의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에 달린 수잔 손택의 서문을 화장실에서 봤는데...대단한 펌핑이군요.

설 연휴 평화롭게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로쟈 2008-02-06 00:42   좋아요 0 | URL
네, 드팀전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명절과 어울릴 만한 책은 저도 찾기가 어렵네요.^^; 손택의 서문에 대해서는 페이퍼를 쓰려고 했다가 몇 주째 미뤄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나온 <문학은 자유다>에도 수록돼 있는데 비교해서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람혼 2008-02-06 00:56   좋아요 0 | URL
"우리의 학술원 회원들께서도 말년에 이런 정도의 책들은 써주셨으면 싶다." 이 말을 오늘의 명문(明文)으로 꼽고 싶군요.^^

로쟈 2008-02-06 11:55   좋아요 0 | URL
요즘은 40대만 돼도 그냥 서열로 '원로급'이 되는 분들이 많아져서요. 학자는 '학식'과 '업적'으로 원로가 되어야 하는데...

수유 2008-02-06 11:10   좋아요 0 | URL
저도 교보에 갔다가 없어서 영풍에서 구입했습니다. 딱 2권 있더군요...

로쟈 2008-02-06 11:53   좋아요 0 | URL
동네서점도 아니고 교보에도 없기에 좀 어이없었습니다...

이름없는괴물 2008-02-06 11:24   좋아요 0 | URL
얼마전 일본 가서 정말 놀랬습니다. 일본의 교보문고라는 기노쿠니야에 갔더니 정말 놀랄 노자더군요. 우리나라엔 기껏해야 주저만 근근히 번역된 철학자들의 전집이 없는 게 없더라구요. 칸트 전집, 헤겔전집, 플라톤 전집, 하이데거 전집, 라이프니츠 전집, 자본론 2종, 중세 철학 전집, 키케로 전집 등등등... 정말 일본어가 배우고 싶은 순간이었고, 우리나라와 격차를 실감했습니다.

로쟈 2008-02-06 11:52   좋아요 0 | URL
'학문어로서의 한국어'에 대해서 좀 회의하게 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오륀지'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바벨의도서관 2008-02-06 11:36   좋아요 0 | URL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저작 중에 [에코에티카](솔출판사)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재밌게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국어판 서문도 있습니다.

로쟈 2008-02-06 11:5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기억이 나네요. 얇은 책이었는데. 한국 학자들과도 교분이 많은 분이죠...

biosculp 2008-02-06 12:09   좋아요 0 | URL
요즘 인수위에서 시작된 영어논란의 편차가 너무커서 종잡을수가 없네요.
십몇년전 부터 영어학하시는 분들은 실용영어를 주장하셨는데, 그정도 영어 배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것이고요. 더불이 시험제도자체를 바꾸어야 되는것도 애기를 하구요.
그렇다고 영어애기 나오기 전에 한국번역상황이 뭐 좋은것도 아니고, 앞으로 좋아질것 같은 희망이 크게 보이지도 않고요.
인수위 얘기가 워낙 우좡좌왕이지만 비즈니스나 실용영어 애기하는데 단테의 신곡번역얘기하는것이 뭔가 어긋나는것 같기도 하고요. 종잡을수가 없네요.
아예 영어 애기에 공무원시험에 영어 없애도 되지 않냐 이런 애기가 더 맞는것 아닌가도 생각이 되고요.
민추가 국가기관이 된것도 작년이고 대학에서 번역으로 학위준다고 신문에서 본것이 작년인것 같은데.

로쟈 2008-02-06 22:22   좋아요 0 | URL
영어를 잘할 수 있게 하겠다는 건 좋은데, 그게 가능한지 그리고 '잘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선 의견들이 다른 것이죠('1000단어 회화'를 말하는 게 아니라면 한 언어를 잘 구사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심지어 모국어라 할지라도). '오렌지' 건에서 단적으로 보여지는 건 요즘 힘깨나 쓰는 발언자들의 비상식적인(천박한) 문제의식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군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고 오늘 뉴스를 보니 '고1학생'도 잘 지적을 했더군요. 저는 도구적인 언어관 자체부터가 지극히 '비즈니스-후렌들리'한 상(商)스러운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연휴에 뒤적거려보려고 하는 한 가지 주제는 혁명에 관한 것이다. 혁명이냐 개혁이냐(중국어로는 '개량'이냐). 실용이성과 실용주의 등. 어제 <판란드역으로>의 영어본을 배송받고 리쩌허우와 류짜이푸의 <고별혁명>은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거기에 몇 권을 더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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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역으로- 역사를 쓴 사람들, 역사를 실천한 사람들에 관한 탐구
에드먼드 윌슨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매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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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혁명
레이먼드 윌리엄스 지음, 성은애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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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고별혁명- 리저허우와 류짜이푸의 대화, 위즈북 시리즈 1
리저허우 외 지음, 김태성 옮김 / 북로드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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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혁명이 다가온다-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서원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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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읽기의 계속이다. 얼마나 더 이어질지는 모르겠는데, 시간을 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싶다. 다루어야 할, 혹은 다루고 싶은 아이템들이 많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뤄지다보면 대부분 사장되고 만다(하루에도 서너 가지의 아이템들이 떠오르는 것이니 어차피 모두 살리는 건 불가능하다). 연휴가 지나면 사정이 더욱 나빠질 것 같아서 익사 직전의 아이템 몇 가지는 건져놓으려고 한다. 두 주 정도 미뤄진 이 페이퍼도 그 중 한 가지다.  

 

 

 

 

읽고자 하는 대목은 11장의 서두 부분이다. 일견 평이해보이지만 개인적으론 가장 '난해하게' 읽은 대목이다. 그건 국역본들의 번역이 중구난방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그러니까 나만 애를 먹은 건 아니겠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자면 상식적인 발언들인데 벤야민의 원문 자체가 약간 꼬여 있는 듯하다. 어제 차봉희 편역의 <현대사회와 예술>(문학과지성사, 1980)도 눈에 띄기에 학교에서 들고 왔는데, 첫 대목을 네 가지 국역본 버전으로 옮겨보면 이렇다.   

"영화촬영, 특히 유성영화의 촬영 장면을 보면 이전에는 결코 어디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을 볼 수 있다. 영화촬영은 연기 과정 자체에 속하지 않는 촬영장치, 조명장치, 촬영 스태프 등이 보는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어떤 입지점을 상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과정이다(물론 보는 사람의 눈동자가 촬영장치의 시점과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최성만, 131쪽)

"영화, 특히 유성영화의 촬영은 지금까지 그 어느 곳 어느 시기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을 보여 주고 있다. 그 광경은 어떤 사건의 진행과정의 묘사인데, 여기에서는 영화진행에 속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스탭들이 보는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게 마련이다.(비록 보는 사람의 시야가 카메라의 시점과 일치하는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반성완, 219쪽)

"영화촬영 특히 유성영화는 예전엔 도저히 생각조차 해 볼 수 없었던 것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영화촬영은 어떤 입장에도 해당될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이 입장에서 볼 때 연출 과정 그 자체에는 소속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보조 제작진 등은 구경꾼의 시야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비록 구경꾼의 시점이 촬영기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다 할지라도)."(차봉희, 72쪽)

"영화, 그리고 특히 유성영화촬영은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그리고 어느 시기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을 보여준다. 영화는 더이상 어떤 입각점도 속해있지 않은 과정을 표현하는데, 그것으로부터 보면 연기과정 자체에 속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조력자 등은 관객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관객의 눈의 위치가 촬영기구의 위치와 일치하지 않으면.)"(강유원, 13쪽)

이 첫대목에서 얘기되고 있는 것은 영화촬영 장면의 독특성인데, 간단히 말하면 연기 과정에 속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스탭들이 보는 사람(구경꾼)의 시야에 모두 다 들어오게 마련인 것이 그 독특성이다. 그렇잖은가? 촬영현장에는 연기를 하는 배우들뿐만 아니라 감독과 촬영, 조명 등의 스태프들, 그리고 갖가지 기구들이 잔뜩 모여있는 것이니 말이다. 곧이어 언급이 되지만 이러한 '광경'이 깔끔한 연극무대와는 전혀 다른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이다.

반성완본에서 '영화진행에 속하지 않는'은 '연기진행에 속하지 않는' 정도로 교정되어야 한다(현장에서 영화진행에 속하지 않는 게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하면 이해하기엔 가장 편안한 문장이 되는데, 벤야민의 원문은 좀 꼬여 있고 이것을 그대로 옮긴 것인 최성만본이다. "영화촬영은 연기 과정 자체에 속하지 않는 촬영장치, 조명장치, 촬영 스태프 등이 보는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어떤 입지점을 상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과정이다." 

이해가 되시는지? 오역은 아니다. 다만 아주 여러번 읽어야 한다('보는 사람'을 '구경꾼'으로 읽으면 조금 이해가 용이하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는 촬영현장을 '보는 사람'이니까). 요는 "촬영장치, 조명장치, 촬영 스태프 등이 보는 사람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즉, 그런 걸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차봉희본은 "영화촬영은 어떤 입장에도 해당될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 이 입장에서 볼 때 연출 과정 그 자체에는 소속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보조 제작진 등은 구경꾼의 시야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라고 옮겼는데 전혀 엉뚱한 요령부득의 번역이다. 80년대에나 통용됐을 법한. 강유원본은 "영화는 더이상 어떤 입각점도 속해있지 않은 과정을 표현하는데, 그것으로부터 보면 연기과정 자체에 속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조력자 등은 관객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라고 옮겼는데, 논리적으론 오역이 아니지만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하기 어렵다. 가령 "영화는 연기과정 자체에 속하지 않는 촬영기구, 조명장치, 조력자 등이 관객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어떠한 입각점도 속해있지 않은 과정을 표현한다."라고 재구성해놓으면 '직역'한 꼴은 되지만 우리말 문장은 아닌 것이다.

괄호안에 덧붙여진 내용도 최성만본을 제외하면 모두 오역이다. 반성완본에서 "비록 보는 사람의 시야가 카메라의 시점과 일치하는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는 거꾸로 옮긴 것이다. "물론 보는 사람의 시야가 카메라의 시점과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이라고 옮겨야 한다. 카메라와 동일한 시점에서 연기 장면을 본다면 촬영이나 조명장치, 스태프 등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만약에 보인다면 NG인 것이고). 차봉희본과 강유원본도 말뜻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다만 최성만본의 "물론 보는 사람의 눈동자가 촬영장치의 시점과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다"에서도 '눈동자'는 오독을 유발하기 쉽다. 대개는 "보는 사람의 눈동자와 촬영장치의 시점이 일치하는 경우"를 둘이 마주치는 경우로 이해할 터이기 때문이다(나부터도 그랬다). '시점'이라고 해야 가장 명료해지는 게 아닌가 한다. 이제 이어지는 대목이다.

"다른 어떤 상황도 아닌 바로 이런 상황이 영화제작소에서의 장면과 연극무대 위에서의 장면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피상적이고 하찮은 유사성으로 만든다. 연극에는 원칙적으로 무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함부로 환영적인 것으로서 꿰뚫어볼 수 없는 지점이 있다. 영화의 촬영 장면의 경우에는 이러한 지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영화의 환영적 성격은 2차적 성격이다. 즉, 그것은 편집의 결과이다."(최성만)

"바로 이러한 면이 그 어떠한 다른 면보다도 영화제작소에서의 한 장면과 무대 위에서의 한 장면 사이의 유사성을 피상적이고 지엽적인 것으로 만든다. 연극무대의 경우, 우리는 무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곧 바로 환상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영화장면에서는 이러한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보이는 환상적인 성격은 이차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은 편집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반성완)

"그 다른 무엇보다도 이러한 상황이, 영화촬영소에서의 한 장면과 무대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유사성을 피상적이며 중요치 않은 것으로 만든다. 연극에서는 원칙적으로, 무대 위의 사건을 별 어려움 없이 그냥 환상적인 것이라고 여길 수 있게 하는 대목들이 있다. 그러나 영화의 촬영장면에서는 이러한 부분들이 없다. 영화가 지닌 환상적인 성격은 제 2단계의 것이다. 즉 그것은 편집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차봉희) 

"이러한 상황은 어떤 다른 상황보다도 영화제작소에서의 한 장면과 무대 위에서의 장면 사이에 성립하는 이른바 유사성을 피상적이고 지엽적인 것으로 만든다. [연극]무대는 원칙적으로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이 즉시 허상으로 간파될 수 없는 장소임을 알고 있다. 이에 반해서 영화에서의 촬영장면에는 이러한 장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허상적인 본질은 2차적 [후속 작업에서 생겨난] 본질이다; 그것은 편집의 산물이다."(강유원)

첫문장의 요점은 앞에서 묘사한 영화촬영장(스튜디오)의 특징이 연극무대와의 큰 차이점이라는 것. 그에 비하면 같은 '연기 장면'이라는 공통점(유사성)은 피상적이며 사소하다. 문제는 그 다음 문장. '연극적 환상'과 '영화적 환상'을 대비하고 있는 대목인데, 이때 '환상'이란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을 '현실'로서 인지하는 걸 말한다(이런 장면들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거나 흥분한다거나 하는 모든 정서적 반응은 그러한 환영적 효과의 산물인 것이고). 때문에 번역문들을 유의해서 읽어야 한다.

벤야민의 논점은 연극무대에서는 원칙적으로 그러한 '환상'이 유지될 수 있음에 반해서 영화촬영 장면에서는 전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영화촬영을 '보는 사람'은 카메라와 배우를 동시에 보게 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배우와 상황에 대한 전적인 몰입이 불가능하다). 요컨대, 연극무대에는 (현실이라는) 환상이 있고 영화촬영에는 (현실이라는) 환상이 없다(물론 연극적 환상을 폭로하는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예외이겠다). 영화적 환상은 편집의 결과로서 얻게 되는 이차적 성격의 산물이다. 번역은 이러한 요점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될 것이다(통상적인 환상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대목의 '환상'은 '현실이라는 환상'으로 풀어서 이해하는 게 좋겠다). '영화의 환영적 성격'이란 "영화속 이미지들을 정말로 현실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주는 성격"을 가리킨다...

08. 0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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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8-02-10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해설을 읽어보니 사실 별것 아닌 내용인데..번역문만 놓고 본다면 오해의 소지가 많았을 만한 내용이네요. 덕분에 벤야민 글 독해에 도움되는 유용한 팁 하나를 더 얻어갑니다. ^^

로쟈 2008-02-10 19:52   좋아요 0 | URL
뒷부분에도 복병들이 나오더군요. 요약정리는 간단하지만 읽기는 난감한 텍스트입니다.--;

느림보 2009-06-16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 번역된 영화 관련 이론서적들을 읽다보면, 특히 동문선 책들이 그런 경우인데, 심하게 말하자면 그냥 번역기에 돌린걸 문맥 파악도 하지 않고 책으로 내 버린건 아닌가 싶은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영화 이론 서는 관련 지식도 좀 있고 현장이 기본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번역하는것이 좋겠지만, 또 그렇게 모두를 아우르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 번역까지 가능한 경우는 희귀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감수자를 통해서 내용을 점검하던가 하는 절차도 필요할 텐데, 그런식으로 책임있는 책만들기가 진행된 경우는 별로 찾아보기 힘들더군요. 괜히 짧은 영어 실력에 원서를 읽어 볼까 생각이 드는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로쟈님께서 친절히 지적해주신 부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