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니콜라이 고골을 다룬 '갑론을박' 꼭지다. 당초엔 이번 봄에 <외투>에 대한 논문도 쓰려고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을 실현되지 못해 아쉽다. 탄생 200주년을 맞은 작가를 위해서 뭔가 더 할일을 찾아봐야겠다...  

고교 독서평설(09년 6월호) 보이는 웃음을 통해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다

러시아 근대 문학의 토대를 닦은 작가, 고골
“날 좀 내버려 둬요, 왜 그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 거요?”
이 한 대목만 가지고 작가와 작품을 떠올리기는 어렵겠지만,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1809~1852)의 걸작 단편 「외투」(1842)를 읽고 난 다음이라면 이 대목을 잊기도 어렵다. 이번 달에는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작가로 불리는 고골의 문학 세계를, 그의 대표작 「외투」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 동기는 충분하다. 올해는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과 함께 러시아 근대 문학의 토대를 닦은 고골이 태어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고골은 과연 러시아 문학사, 더 나아가 세계 문학사에 어떤 족적을 남겨 놓았을까? 그의 문학은 어째서 아직도 많은 수수께끼를 남기고 있는 것일까?   



‘웃음’과 ‘공포’의 환상적인 조화
고골은 1809년 4월 1일에 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었던 우크라이나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말하자면 그 당시엔 ‘소러시아’라고 불린 우크라이나가 그의 출신지이고 고향이다. 그가 처음 문학적 명성을 얻게 된 작품집이 그곳 민담들을 소재로 한 <지칸카 근촌 야화(夜話)>(1831)인 것은 그런 배경을 갖고 있다. 고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지역의 소지주 출신이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고골을 낳기 전 두 차례나 사산(死産)을 경험한 어머니는 자신의 불행을 다독이기 위해 더욱 독실한 정교회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어렵게 얻은 맏아들의 이름을 교회 이름을 따서 ‘니콜라이’라고 지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늘 기도를 드리던 어머니의 신앙은 미신적인 성향이 강했다. 아들을 각별히 사랑하면서도 그녀가 어린 고골에게 입버릇처럼 들려준 이야기는 주로 최후의 심판과 지옥의 고통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미신적이고 광신적인 신앙을 물려준 어머니와 달리, 아마추어 극작가이자 연극 애호가였던 아버지 바실리 고골은 아들에게 어릴 때부터 문학과 연극에 대한 열정을 심어 주었다.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고 배우로 무대에 서기까지 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고골은 연극에 대한 관심과 문학적 감수성을 키워 나갔다.  

이렇듯 다소 이질적인 부모의 영향은 이후 작가 고골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러시아 사회의 속물성과 관료주의적 폐해를 풍자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묘사함으로써, 고골은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재능이 진지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통받았다. 덕분에 우리가 얻게 된 것은 ‘너무도 경쾌하고 코믹한 고골’과 ‘너무도 진지하고 우울한 고골’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작가의 이미지다. 그는 자신의 재능과는 잘 맞지 않는 과제, 혹은 사명을 스스로에게 부과함으로써 고통을 자초한 것은 아니었을까.    

가령 고골 창작의 전환점이 된 희곡 <검찰관>(1836)을 들여다보자. 이 작품은 지방 여행 중에 돈이 떨어져 여관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한 하급 관리 흘레스타코프가,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온 검찰관으로 오인되는 바람에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을 그린 5막 희극이다. 흘레스타코프가 떠나고 난 뒤에야 자신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장과 지역 유지들은 분통을 터뜨리는데, 바로 그때 진짜 검찰관이 도착했다는 전갈을 듣는다. 무대 위의 모든 인물들이 경악과 함께 몸이 화석처럼 굳어져 버리고 관객은 폭소를 터뜨리는 것으로 이 작품은 막을 내린다. 한데, 고골은 지문에서 이 마지막 장면을 모든 배역이 거의 1분 30초가량 굳어 버린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정지 장면’으로 처리하도록 요구했다. 그리고 실제 공연에서 이 요구가 잘 지켜지지 않자 화를 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떤 효과를 거두기 위해 그토록 이 장면을 강조한 것일까? 

<검찰관>에는 “제 낯짝 비뚤어진 줄 모르고 거울만 탓한다.”라는 러시아 속담이 제사로 쓰였다. 고골은 자신의 작품을 일종의 ‘거울’로 간주했다.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우스꽝스러운 소동을 보면서 마음껏 웃음과 조롱을 퍼붓는 동시에, 마치 거울처럼 관객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정지 장면에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 고골은 관객이 그런 깨달음을 얻기를 기대했고, 그 깨달음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이 1분 30초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이 장면은 처음엔 웃음을 유발하지만, 차츰 그 웃음은 자신도 무대의 속악한 인물들과 다를 바 없다는 깨달음과 더불어 공포로 바뀐다. 고골의 의도는 그 공포와 함께 관객들을 도덕적인 정화(淨化)와 참회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었다. 얼핏 상반되어 보이지만, ‘웃음’과 ‘공포’는 그런 점에서 고골 문학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다. 곧 그의 이야기들은 기본적으로 우스운 이야기면서 동시에 무서운 이야기다

충동의 인간에서 욕망의 인간으로 - 「외투」
머리가 벗겨진 중년 9급 관리의 불행한 이야기를 다룬 「외투」의 경우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일단 작품은 기본적으로 코믹하며 언어유희적이다. 주인공의 이름부터가 그런데,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그의 이름과 부칭이고, ‘바슈마크(구두)’라는 말에서 유래한 ‘바슈마치킨’이 성(性)이다. ‘아카키예비치’가 부칭이라는 사실은 아버지의 이름도 ‘아카키’였다는 걸 뜻한다. 곧 아버지도 아카키고 아들도 아카키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 후보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자 그의 어머니는 그냥 남편의 이름을 아이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란 이름에서 반복되는 ‘카카(kaka)’란 말이 러시아 어에서는 ‘똥’이나 ‘응가’를 뜻하는 유아어이기도 해서, 주인공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러시아 독자들은 묘한 재미를 느끼게 된다. 이 가련한 주인공은 동시에 가장 우스꽝스런 주인공이기도 한 셈이다. “세례를 받을 때 아기는 울어 버렸고, 마치 9급 관리가 될 것을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러시아 관료제는 18세기 초반 표트르 대제(1672~1725) 시대에 관료제 개혁 이후 14등관제로 개편되었으며, 9등관(9급)은 가장 대표적인 하급 관리에 속했다. 서류를 정서하는 일이 주된 업무인 아카키 아카키예비치 역시 9급 관리였다. 그는 사무실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존재이며, 경비조차도 그가 지나갈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저 파리 한 마리가 지나가는 정도로 여겼다. 같이 근무하는 동료들은 그를 조롱하거나 짓궂게 놀려 댔다. 아카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팔까지 건드리며 정서를 방해할 때는 “날 좀 내버려 둬요, 왜 그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 거요?”라고 애처롭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얼떨결에 남들을 따라서 아카키를 조롱하던 젊은 직원은 이 말을 듣고서 뭔가에 찔린 듯이 움찔했다. 거기엔 “나도 당신들의 형제요.”란 소리도 반향으로 묻어났다. 그 뒤 이 젊은이는 평생 동안 인간의 잔인함에 몸서리를 쳤다고 이야기의 화자는 전해 준다.     

사실 고골의 「외투」는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단편이면서, 또 가장 많이 오해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박애주의를 표방한 것으로 이해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러한 시각에서는 작가 고골이 이 소설에서 아카키 아카키예비치 같은 ‘작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근거로 “나도 당신들의 형제요.”라는 구절을 자주 인용한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주인공이 자신의 일에서 발견하고 있는 지극한 즐거움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에게 정서는 단순한 직무가 아니라 어떤 사랑의 대상이었고, 자족적인 즐거움의 세계였다.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처럼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단순히 열성적으로 일한다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니, 그는 애정을 갖고 근무했다. 이 정서하는 일에서 그는 다양하고 즐거운 자신만의 어떤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아카키는 이러한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정서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서, 옷차림 따위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거리를 걸으면서도 오로지 자신의 필체로 쓴 글씨들만을 떠올렸다. 근무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는 수프와 양파를 곁들인 쇠고기 요리에 파리가 붙었거나 말거나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간단히 요기만 하고는 다시 정서를 시작했다. 서류를 정서하기도 하고 취미로 필사본을 만들어 두기도 했다. 일에 대한 열정만을 가지고 본다면 아카키는 5급 직책을 하사받을 만도 한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아카키에게는 두 가지 모습이 있었다. 혹은 두 명의 아카키가 있었다. 평소의 9급 관리 아카키와 5급 관리의 열정을 갖고 정서할 때의 아카키. 정서하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글자들이 나오면 너무 기뻐하는 모습은 마치 딴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렇듯 “즐거운 자신만의 어떤 세계”를 갖고 있는 인물이 동정의 대상이 된다면 좀 이상하지 않을까? 

정신 분석학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정서하는 일에서 지극한 만족감을 얻는 아카키는 ‘충동’에 의해 지배되는 인물이다. 충동(drive)은 어떤 대상을 끊임없이 손에 넣으려고 애쓰는 욕망(desire)과는 달리 어떤 대상의 주위를 맴도는 데서 만족을 얻는다. 곧 충동의 목적은 주체와 대상 간의 순환적인 경로를 반복하는 것이다. 아카키가 정서하는 일에서 느끼는 만족은 바로 이러한 충동에서의 만족이다. 이런 성격의 만족에는 외부적 현실이 필요하지 않으며, 따로 방해자만 없다면 언제까지라도 지속될 수 있다. “400루블의 급료로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며 살아가던 한 인간의 평화로운 삶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고 아마 또 그렇게 순조롭게 말년을 맞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카키의 사회적 고립과 소외는 결코 불운하거나 불행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보는 시각은 단지 외부적 시점을 투사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날 좀 내버려 둬요, 왜 그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 거요?”란 아카키의 항의는 그에 대한 조롱뿐만 아니라 동정에도 적용될 수 있을 듯싶다. 그리고 그 항의의 또 다른 대상이 될 만한 것이 있으니 바로 페테르부르크의 겨울에 사납게 휘몰아치는 북풍이며, 이것이 그의 가장 강력한 적이기도 하다. 고골 스스로가 처음 페테르부르크에 상경했을 때 추위 때문에 크게 고생한 경험이 있으므로 남의 일만도 아니라고 해야겠다. 불행하게도 아카키의 낡은 외투는 더 이상 바람막이가 되어 줄 수 없어서, 그는 재봉사 페트로비치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새 외투를 장만하는 데 몰두한다. 곧 페테르부르크의 겨울 추위는 아무런 결핍도 없이 자기만의 세계에 만족해 있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를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외투 없는 존재’로 새롭게 규정한다.  

새 외투를 욕망하게 되면서 아카키는 전혀 다른 인물로 변모한다. 그는 외투 값을 장만하기 위해서 지독한 내핍 생활을 감수하며 습관처럼 저녁을 굶는다. 요컨대,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그는 현재의 만족을 기꺼이 포기하고 유예한다. “그 대신에 미래의 외투에 대한 끝없는 이상을 머릿속에 그려 보며 정신적인 포만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결여된 상태에서만 작동하기 시작하는 욕망은 근원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충족될 수 없다. 새 외투를 장만하여 행복해한 것도 잠시, 아카키가 곧 불량배들에게 자신의 외투를 강탈당한 것은 이러한 욕망의 메커니즘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파출소장과 고위층 인사를 찾아다니며 외투를 되찾기 위해 애를 쓰지만, 관료제 사회의 몰인간적이고 사무적인 습성에 젖은 인물들에게 차별 대우만을 받고서 앓아누웠다가 결국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료제 사회의 사무적인 무관심이 아카키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자면, 아카키가 충동의 인간에서 욕망의 인간으로 변신한 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 변신의 원인은 ‘페테르부르크의 추위’였다. 



피할 수 없는 욕망에 대한 공포
고골은 욕망을 가진 인물들, 곧 자신의 신분과 직분을 벗어나서 더 높은 사회적 지위와 숭고한 가치를 갈망했던 인물들이 파멸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이러한 욕망이 두려운 이유는 그것이 그 주체를 떠나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어도 욕망은 죽지 않는다고나 할까. 「외투」는 죽은 아카키의 유령이 자신의 외투를 찾기 위해 배회하다가 고위층 인사의 외투를 강탈해 간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그런 점에서 「외투」는 욕망의 섬뜩한 공포까지도 되새기게 해 주는 작품이다.  

결코 충족되지 않는 것이 욕망인 만큼 욕망의 세계에서 구원이란 없다. 때문에 고골의 세계에서는 욕망에 빠진 인간에게 구원의 계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고골은 자신의 문학적 재능 안에서는 그러한 계기를 찾을 수 없었다. 고골 또한 자신의 ‘외투’(창작의 의미)를 강탈당한 ‘불운한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아니었을까. 

09. 0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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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골의 '외투'가 말해주는 것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2-19 10:26 
    이번주 주간학구의 '지식인의 서고' 꼭지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짧은 분량의 글이어서 고골의 대표작 <외투>에 대해 간단히 적었다(고교 독서평설에서 한번 다룬 적이 있다는 걸 지금 깨달았다!).    주간한국(09. 12. 17) 우리가 욕망 없이 살 수 없다면…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강의하기 때문에 매학기 고정적으로 읽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러시아 명작’들입니
 
 
반딧불이 2009-06-20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외투>를 하급관리를 통해 관료제를 비판하는 것으로만 이해했었는데, 욕망과 관련지으니 또 다른 이야기가 되는 것 같아요.

로쟈 2009-06-20 08:36   좋아요 0 | URL
네, 그게 제 요점이에요.^^

목동 2009-07-14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을 낭독해주는 성우의 목소리를 통해 읽었습니다. 낭독자의 생생한 목소리에 매료된 경우라지만, 하급관리로서 그의 소통방법은 정서입니다. 그에게 유일한 위안입니다. 같은 형제의 꿈이 공익성이 없다고 강탈당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고골의 <외투>에서 태어났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틀에 안주한 하급관리지만 그것이 무너지면 자신을 잃게 되던데요.

로쟈 2009-06-21 10:31   좋아요 0 | URL
언제 낭독까지 나왔었나 보군요.^^

돈케빈 2009-06-21 0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와의 서신교환선>을 읽고.. 고골을 러시아 문학의 김구라로 임명하기로 했습니다. ^^;

로쟈 2009-06-21 10:30   좋아요 0 | URL
'김구'로 읽을 뻔했네요.^^;

지별 2009-06-22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골의 3부작 이런식으로 연극을 통해서 그를 만났는데...연출도 독특하고 때론 홀리거나 졸리거나~ 그래도 (뜬금없이) 체홉이 좋아요~

로쟈 2009-06-23 22:29   좋아요 0 | URL
변변찮은 인물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고골과 체홉이 상통하는 면도 있습니다.^^
 

'로쟈와의 인문학 토크'(http://blog.aladin.co.kr/culture/2878079)가 예정돼 있는 날이다. 저녁시간인데, 오후에는 무슨 '토크'를 해야할지 궁리를 잠시라도 해봐야겠다(질문에만 답하면 되는 것인지?) 생각해보니 오늘로써 책이 나온 지(책을 받아본 지) 딱 한 달이 되었다. 이미 '적응'이 되어서 '새로 나온 책'이라기보다는 '원래부터 있던 책'이란 인상마저 든다. 아직 많은 리뷰를 접해보지는 못했지만, 반응 또한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책은 좀 어렵다는 평과 생각만큼 어렵진 않다는 평 사이에 있다). 어떤 눈높이에서 독자를 만날 수 있는지 확인해보는 계기랄까. 눈에 띄는 언론리뷰들을 대충 스크랩해놓았는데, 하나 빠진 것이 있어서 마저 옮겨놓는다. 기사의 경쾌한 속도감이 마음에 든다.  

  

대학내일(09. 05. 29) 로쟈는 읽는다, 고로 로쟈는 존재한다 

인문학 책을 왜 읽어야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사람 잡지 않기 위해서.” 문학 책을, 경제학 책을, 사회과학 책을, 실용서를 왜 읽어야 하느냐고 물으신대도 답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사고가 빈약할수록 주워듣거나 알고 있는 일부 사실만으로 섣불리 판단할 수 있으므로. 몸의 건강을 위해서 고른 영양소를 섭취하듯 정신의 건강을 위해서 책도 골고루 읽을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문학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하나 더 꼽는다면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기 때문이 아닐까. 매주 소개하는 책들 중에는 개인적 취향이 담긴 것들도 있지만, 더러는 필요에 의해서 읽는 책들도 있다. 두툼하고, 각주의 압박에 한숨이 절로 나오고, 데리다·푸코 등의 철학자 이름이 친구라도 되는 양 자주 등장하는 책. 주로 인문서나 사회과학 책들의 특징인데, 그런 책들도 여러 권 읽다 보니 어느덧 ‘생각의 결’과 ‘생각의 망’이 촘촘해진 느낌이 든다.  

이번 주에는 한 인문학자의 서재를 들여다본다. 생각의 결과 망뿐만 아니라 폭까지 넓힐 수 있는, 세상을 저공비행하며 인문학적 지식으로 읽고, 보고, 담아내는 일명 ‘겉다리 인문학자’의 서재로 첫 걸음은 가볍게 Go!   

멀미 날 만큼 풍성한 호모 사피엔자의 서재 
로쟈는 누구인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는 한 인터넷 서점에서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이름의 블로그로 널리 알려진 ‘인터넷 서평꾼’이자, 대표적인 ‘인문학 블로거’이다. ‘로쟈’라는 이름을 듣고 흔히들 철학자 ‘로자 룩셈부르크’를 떠올린다는데,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로쟈’는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이라고 한다. 이 책은 로쟈라는 ID(필명)로 더 많이 알려진 저자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엮은 블룩(blook, blog+book의 합성어)으로, 1997년부터 2009년까지 쓴 글을 간추려 실은 것이다. 다시 로쟈의 말을 빌리자면, “너무 쉽거나 어렵지 않은 글, 너무 말랑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글”을 골랐다는데 인문학과 예술, 영화 등 장르를 넘나들며 펼쳐 보이는 로쟈의 박학다식함에 누군가는 “너무 어렵고, 딱딱하게”읽을 수도 있겠다.  

책은 다섯 개의 서재(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다. 첫 번째 서재 ‘걷어차야지만 자리에서 일어난다’에서는 로쟈가 들려주는 문학 이야기를, 두 번째 서재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에서는 로쟈의 예술 리뷰를, 세 번째 서재 ‘아, 이 겸손한 느릅나무들’에서는 로쟈의 철학 읽기를, 네 번째 서재 ‘내 머리는 불타고 있어요’에서는 로쟈의 지젝 읽기를, 마지막 서재 ‘내 울부짖은들 누가 들어주랴’에서는 로쟈의 번역 비평을 담고 있다. 각 서재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을 보면 알겠지만, ‘호모 사피엔자(Homo Sapienza)’라는 그의 별칭이 절로 떠오를 만큼 로쟈의 관심사는 무궁무진하고, 독서량 또한 엄청나다. 가볍게 첫 걸음을 내딛었다 서재 입구에서 입을 떡 벌리고 주저앉기 십상이다. 지식이 또 다른 지식으로 이어지고, 한 권의  책 이야기가 관련 분야의 여러 권의 책으로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에 보면 지리학자가 사는 별이 나오는데, 그는 여행자들이 보고 온 내용을 책에 기록하기만 한다. 즉 그가 하는 건 편력이 아니라 기록이다. 나는 책들의 성좌, 문학과 사상의 ‘지도’를 작성하는 데 취미가 있다.”     

현상의 본질과 이면을 파고드는 인문학의 근성 때문인지 로쟈는 단어와 문장을 꾹꾹 짚어보며 글을 전개해 나간다. 그리고 거기에 시를 즐겨 읽는다는 ‘촉촉한’ 마음이 더해진다. 블로그를 통해 로쟈를 알게 되었다면 책으로도 한번 읽어보자. 그는 “스냅사진으로 찍은 걸 증명사진으로 내놓은 격”이라고 말하지만, 종이 책에는 천천히 음미하며 읽을 수 있는 행간의 매력이 있으니. 마지막으로, 로쟈에게 책은 무엇일까?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나의 지옥이자 연옥이자 천국이며, 나의 연인이자 친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나의 무덤.”   

09. 06. 19. 

P.S. 로쟈에 대한 가장 흔한 선입견 중 하나는 '엄청난 독서량'이다. 가장 자주 듣는 질문도 "그 많은 책을 언제 다 읽으세요?"이니까 이게 꽤 단단한 선입견이다. 책에 실은 '독서문답'에서도 사정을 밝혀놓았지만 사실 집중해서 책을 읽을 시간이 별로 없고, 그게 개인적으로는 가장 큰 스트레스 가운데 하나이다(그러니까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에 견주면 로쟈는 '가끔'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잘 믿어주지도 않는다(간혹 실망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러니 그냥 "틈나는 대로 읽지요"라고 답하는 게 나을 듯싶다. 하긴 "읽고 쓰고 떠드는 일"로 치자면 대한민국 0.001%쯤은 될 듯하니 너무 빼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다. 단, 읽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 중요한 건 즐겁게, 악착같이 즐겁게 읽는 것이고, 또 그렇게 읽기 위해선 쓰고 떠들 필요가 있다는 것. 그런 걸 나름대로 널리 알린 '공로'가 있지 않은가 한다. '곁다리 책상물림' 로쟈에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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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9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9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9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20 0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qui 2009-06-22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외의 고차원적 시크 개그센스를 발휘하셨던 로쟈님..뵈어서 반가웠어요!

로쟈 2009-06-22 10:46   좋아요 0 | URL
참석하신 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해 좀 아쉬웠습니다. 나중에 어디서 뵈면 아는 체해주세요.^^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실었던 글을 옮겨놓는다. 내가 청탁받은 내용은 글의 서두에 적었다. 인터넷상의 인문학활동에 대한 소략한 '보고'라고 볼 수 있겠다. 책이 눈에 띄지 않아서 최종원고를 긁어왔는데, 지면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고유명사 표기 등은 창비식 표기로 돼 있다.  

 

창작과비평(2009년 여름호) 인터넷은 인문학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내게 주어진 일차적인 과제는 인터넷 공간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인문학적 활동의 의의와 문제점을 짚어보는 것이다. 인터넷 (우주)공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활동을 조감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이런 과제를 떠안게 된 것은 주로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활동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래봐야 인터넷상에 블로그(서재)를 갖고 있고, 한 인터넷 카페에 자주 글을 올린다는 것이 내세울 만한 활동 이력의 전부다. 치명적인 건 활동반경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두루 알지는 못한다는 것. 시간적인 제약과 능력상의 한계 때문이지만, 사실 두루 안다는 것 자체가 과연 가능하며 또 바람직한 것일까도 의문이다.   

학문의 전문화와 함께 인문학에서조차도 자신의 전공분야에 정통하다는 것의 이면은 흔히 타 분야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무지는 오히려 권장된다. 거꾸로 모든 분야에 두루 식견이 있다는 것이 ‘얄팍한 박식’과 동일시된다. ‘국가적인’ 석학이 아닌 다음에야 깊으면 넓지 못하고 넓으면 깊지 않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통념 아닌가. 새로운 조어를 쓰자면 ‘인터넷 인문학’에 대한 시각도 그러한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싶다. 세계적인 석학 움베르또 에꼬(Umberto Eco)도 이렇게 말했다지 않은가. “인터넷에는 내게 필요한 정보가 없다.” 

물론 그렇게 말한 에꼬의 경우에도 잘 꾸며진 온라인 홈피를 갖고 있고, 일반 독자들은 그에 대한 다수의 정보와 지식을 인터넷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인터넷은 단편적인 지식과 기계적인 정보의 대명사이자 표피적인 앎의 상징물이다. 가령, ‘신지식인’ 이후 지식인 사회에 당혹감을 안겨줌과 동시에 새로운 ‘놀림감’이 된 ‘네이버 지식인’을 도마에 올려놓을 수 있다. “다크써클 없애는 데 브로콜리가 효과적인가요?”나 “‘카노사의 굴욕’에서 카노사가 도대체 뭐죠?”등의 질문에 네이버 지식인은 신속하고도 유익한 답변을 제공해주지만, ‘그’는 아직까지 움베르또 에꼬 기호학의 특징과 의의에 대해서는 질문하지도 답해주지도 않는다. 물론 이런 질문은 올라와 있다. “움베르또 에꼬 지금 살아 있나요? 현존인물이에요?”   

하지만 이런 표피성이 과연 인터넷 공간 자체의 본질과 연관된 것일까? 그것이 ‘사용 공간’인 한에서 문제는 그 사용자들의 의지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닐까? 알다시피, 오늘날 대부분의 편지(메일)를 대신하고 있는 건 이메일이다. 전달의 신속성과 편이성에서 편지는 이메일을 따라잡을 수 없다. 물론 이메일 또한 ‘표피적’이며 보내는 이의 정서와 체온을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메일 사용자들은 그러한 한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상쇄하거나 극복하려고 하지 다시금 예전의 편지로 돌아가려고 하지는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메일의 단점보다는 장점과 효용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학술 공간’으로서의 인터넷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인터넷 공간은 학술활동의 ‘변방’이 결코 아니다. 대부분의 학술행사 소식과 관련 정보들을 우리는 인터넷으로 접하고 또 공유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술저널이 온라인화됨에 따라 우리는 굳이 도서관에까지 찾아가는 발품을 팔지 않고도 집에 앉아서 관심 있는 주제의 논문들을 읽어볼 수 있다. 그러한 개방성과 공유성이, 말하자면 인터넷 공간의 최대 강점일 것이다. 비록 그것이 아직까지 원하는 만큼의 ‘깊이’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면, 문제는 인터넷에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인터넷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온라인 인문학’과 ‘오프라인 인문학’의 대립은 임의적인 유사 대립이다.  

알려진 것처럼 국내에서도 각 대학마다 온라인 강좌 혹은 사이버 강좌가 상당수 개설돼 있다. 수강생이 강의 동영상을 보고 필요한 내용을 숙지한 후 온라인을 통해서 과제를 제출하고 평가받는 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온라인 강좌는 공익을 위해서 선용될 수도 있다. 예컨대, 미국 MIT에서 시작된 강의자료 공개가 점차 확산되고 있고, 유튜브는 하바드대학을 포함한 100여개 대학의 강의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비록 영어권 얘기이긴 하나, 학점만 인정받을 수 없을 뿐 누구나 온라인상에서 이름난 교수들의 강의를 들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국내에서도 현재 몇개 대학이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서 강의 동영상을 시범적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본다면, 학술활동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구분이 과연 유효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둘은 분명 성격이 좀 다르지만 서로 모순적이라거나 대립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 아닐까. 각각의 장단점을 갖고서 서로를 보완해준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한걸음 더 나아가보면, 이러한 온라인 강의가 대학보다도 더 활성화돼 있는 쪽은 오히려 대학 바깥의 ‘재야’ 학술공간들이다. 철학아카데미나 연구공간 수유+너머, 문지문화원 사이 등에서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인문강좌를 오프라인에서 운영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대학생이 아닌 직장인과 주부들이 보다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는 형식은 온라인 강좌다. 가장 대표적인 온라인 인문학강좌 사이트인 아트앤드스터디(www.artnstudy.com)의 경우에, 유료강의를 듣는 회원만 현재 3만여명에 이른다고 하며, 이는 2001년 6월 서비스를 처음 시작했을 때 300여명과 비교하면 100배 이상 증가한 수치이다. 특이한 것은 대학에서는 폐강되기 일쑤인 철학강좌들이 이곳에서는 최고 인기강좌라는 점이다. 한겨레교육문화쎈터가 운영하는 한겨레e한터(e-hanter21.co.kr)도 300여 강좌에 이르는 인문학 관련 온라인 강좌를 제공한다. 전문 강사들 외에 대학의 현직 교수들도 다수 강의에 참여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인터넷은 이렇듯 다양한 인문학 강좌를 통해 누구나 인문교양과 지식을 쌓을 수 있는 통로이면서 또한 직접적으로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흔히 ‘대중 지성’의 공간으로 지칭되는 온라인 커뮤니티들이 그러한 장으로서 활용되는데,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곳으로는 다음까페 비평고원(http://cafe.daum.net/9876)을 들 수 있다. 8000명이 넘는 회원을 거느리고 있는 ‘비평고원’에서 주로 활동하는 회원들은 국내외의 인문학 전공 대학강사나 대학원생들이지만 약사·회사원·군인 등 ‘비전공자’도 적잖게 참여하여 익명적 공간에서 인문학 전반에 걸친 비평과 담론들을 쏟아낸다.  

가령, 창비주간논평을 본딴 ‘화요논평’ 코너에 ‘언어현상학과 시차적 관점’에 관한 철학적 입론이 제시되는가 하면,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은 노무현 전(前)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의 반열에 올랐다”라는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시사적 발언이 어떤 함축적 의미를 갖는지 정밀하게 분석된다. ‘비평공간’ 같은 코너에서는 또 신간도서에 대한 소개와 서평이 올라오고, 하이네의 시가 가곡과 함께 자세하게 음미되기도 하며 베를린의 노동절 행사에 대한 현장르뽀가 ‘해외통신’이란 말머리를 달고서 당일에 게시된다. 이런 것이 ‘인터넷 인문학’이 강점으로 내세울 수 있는 현장성과 순발력이다. 모두 저널리즘이나 학술지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종의 ‘중간지대’의 담론이라 할 만하다.  

물론 전체 회원수에 비해 자발적인 글쓰기에 참여하고 있는 회원들의 수가 여전히 소수라는 점은 극복해야 할 문제이고, 인문교양과 학술담론의 대중화에 일조하고는 있지만 과연 새로운 학술담론을 창출할 수 있는 지적 ‘프론티어’의 공간도 될 수 있는가는 의문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러한 현재적 한계를 본질적인 한계로 간주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 아닐까. 인터넷은 인문학 활동의 새로운 가능공간이지 미리 앞질러 그 한계를 예단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학에서는 점점 홀대받고 있는 인문교양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아직도 적지 않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오프라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긴 하나 노숙자 인문학과 CEO 인문학 ‘열풍’도 바로 떠올릴 수 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인터넷에는 내게 필요한 정보가 없다”고 말하기 전에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와 지식을 인터넷 공간을 통해서 기꺼이 다수와 주고받고 공유하려는 ‘의지’를 우리가 갖고 있는지 자문하는 것이겠다. 한데, 그러한 의지를 만약 ‘제도권 인문학’ 혹은 ‘대학 인문학’ 종사자들이 갖고 있지 않다면 그건 혹시 그런 의지를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 왜 필요가 없는가? 개인적으론 두 가지 원인을 지목하고 싶다. 하나는 소위 제도권 인문학이 근거하고 있는 물적 토대와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그리고 있는 인문학의 상(象)과 관련된다.   

비록 전세계적인 현상이긴 하나 수년 전부터 제기된 한국사회 ‘인문학 위기’의 특수한 원인에 대하여는 모두가 어림짐작하고 있는 바가 있다. 서울대 철학과 백종현(白琮鉉) 교수의 지적대로(백종현, "한국 인문학 진흥의 길", 한국학술협의회 편 <인문정신과 인문학>, 아카넷 2007, 136면.), 1980년대 초반 대학의 입학 정원이 대폭적으로 늘어나면서 사회적 수요와 무관하게 인문학 계열 학과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이에 따라 인문계열 졸업자들이 대량으로 양산된 점이 그것이다. 그로써 대학 졸업자들로 하여금 ‘인문학을 쓸모없는 것’이란 인식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직접적인 위기의 원인은 대학이 아닌 대학원 졸업자의 초과 배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시 학과가 늘어남에 따라 교수 요원의 충원이 필요했고, 이는 학문후속세대에 대한 가수요를 낳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문학 전공 박사의 수는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대학은 재정을 이유로 교수 충원비율을 최소화했다. 인문학이 ‘배고픈 학문’이란 이미지는 그렇게 해서 굳어진 것이 아닌지. 게다가 그러한 ‘배고픔’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인문학 전공자들은 비록 공공성을 위해서 국가가 지원하고 육성해야 할 학문분야도 있지만,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대신에 국가에 손을 내미는 ‘손쉬운’ 방법에 의존했다. 대학의 정규직 교수들은 강의에 정성을 쏟기보다는 논문 편수로 평가되는 연구업적에 더 공을 들였고, 비정규직 교수들은 자세를 한층 더 낮추어 대학 주변에 남는 일에 자족하거나 절망했다. 모두가 ‘지속가능한 인문학’의 새로운 물적 토대를 마련하는 일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것은 아닐까? 여전히 읽을 만한 국내 인문서가 부족하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국외의 고전이나 교양서가 적지 않은 현실은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거기에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인문학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백종현 교수는 “교양과목으로서 인문학은 모든 시민이 익혀야 하지만, 한 사회에 인문학 전공자는 매우 탁월한 소수이면 족하다. 그리고 그 탁월한 소수는 사회에서 우대되어야 한다.”(146면)고 말하면서 ‘인적자원 관리에 있어서 공정성과 수월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대로 따르자면 탁월한 국가석학 몇명의 인문강좌를 TV나 온라인 동영상을 통해서 접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인문교육 방안이 될 성싶다. 하지만, 인문학을 하는 원동력이 ‘자유 만끽’과 ‘자기만족’이며(145면), 결국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평범한 다수’의 인문학에 대한 욕구도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지 않을까. 인문(人文)이란 말이 ‘사람의 무늬’를 뜻하기도 한다면, 인문학의 목적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무늬만 사람’인 동물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이다. 대중적/다중적 매체로서의 인터넷을 그러한 ‘과업’에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문제는 우리의 의지다. 

09. 0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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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도권 밖 인문학의 양상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9-16 21:31 
    이번주 대학신문에서 '제도권 밖 인문학' 동향에 관해 짚어주고 있는 기사를 옮겨놓는다. <창작과 비평>(여름호)에 내가 실었던 글도 참조하고 있어서 먼댓글로 링크해놓는다.    대학신문(09. 09. 12) 제도권 밖 인문학, 지금 만나러 갑니다 독재정권 시절. 청년들은 소위 말하는 ‘불온서적’을 들고 자발적으로 한데 모여들었다.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의 시작이었다. 지식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완화된 지금,
 
 
2009-06-18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18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기 자신의 이름이나 닉네임을 온라인상에서 검색해보는 걸 '허영검색'이라고 한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의 출간 이후에 그 허영검색이란 걸 종종 해본다. 책과 관련하여 나도 모르는 기사나 리뷰가 뜨기 때문이다(자주는 아니지만 의외의 리뷰를 만나면 반갑다). 어제는 '뉴스' 쪽에서도 관련기사를 읽을 수 있었는데, 블룩(blook)과 출판권력의 구조 재편을 다룬 주간한국의 기사였다. 그냥 읽고 지나치면 말 일이지만, "하루 70여만 명이 방문하는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이라고 엉뚱하게 소개돼 있어서 스크랩해놓는다. 최근 80만명이 넘어섰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총방문자수이다. '하루 70여만명'쯤 방문해야 '파워블로거'가 되는 거라면, 나는 아직 멀었다!..  

주간한국(09. 06. 17) 블룩(blook), 출판 권력 재편하나 

주부 김향숙(41ㆍ여) 씨는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를 삶의 통찰과 연결짓는 에세이를 써왔다. 글을 쓰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생각도 정리되는 치유의 감정을 느꼈다. 자신이 쓴 글을 세상에 내보이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방법을 잘 알 수 없었다. 기성작가도 아닌 일반인이 출판사 문을 두드리는 용기를 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모인 온라인 글쓰기 클럽을 발견한 것이다. 그도 고부간의 갈등을 비롯한 자신의 가족에 대한 고백적인 글을 나누기가 처음에는 어려웠다. 하지만 정기적으로 모여 글쓰기 정보를 공유하고 비평하며 내공을 길렀다. 이들은 결국 공동저작의 책을 내기로 뜻을 모았다. 수익금도 ‘어린이 재단’의 결식 아동 돕기에 기부하는 방식으로 ‘공유’하기로 했다. 이들은 출판사에 찾아가 자신의 글을 부탁하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한 가지 주제로 기획하고 쓴 글을 모아 출판사를 선택했다.  

지난달 4일 ‘지식노마드’에서 나온 ‘사랑하지만 한 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가 그 결정체. 이 책은 김 씨를 비롯해 온라인에서 만난 글쓰기 블로그 회원 10명이 자신의 가족이야기를 모아 엮은 것이다. 김 씨는 “책 출간이라는 꿈을 이뤄서 너무 기쁘다”며 “저술부터 출간까지 클럽 회원들 스스로의 힘으로 해 힘들기도 했지만 고생한 만큼 보람됐다”고 말했다.

블로그의 내용을 책으로 만든 ‘블룩(blook)’이 출판 권력의 지형을 재편하고 있다. 출판의 중심이 제작자에서 소비자로 급속히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작가와 일반인으로 나뉘는 출판 주체의 경계마저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블룩이란 ‘책(book)’과 ‘블로그(blog)’의 합성어로 블로그에 올라왔던 글을 묶어 낸 책을 일컫는 신조어다.

출판 순서의 변화가 가장 두드러진다. 출판사가 작가의 글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네티즌이 블로그의 글을 먼저 선택한다. 경우에 따라 블로거가 출판사를 직접 선택해 출판하는 경우도 있다. ‘출판사-저자-독자’에서 ‘저자/독자-출판사-독자’의 구조로 제작과 유통의 순서가 뒤바뀌는 것이다. 자연히 출판 권력의 방향 역시 변화한다. 출판의 무게 중심이 출판사에서 저자, 독자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중태 IT문화원 원장은 “옛날 같으면 책을 한 권 내려면 출판사의 간택을 받으려 노력해야 했지만 블룩의 출현으로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며 “이 같은 변화는 창작의 주체로서 전업작가의 권위마저 위태롭게 할 정도”라고 말했다.

블룩, 출판의 중심을 출판사에서 일반인으로
출판사가 저자를 고르고 선택하며 중심에 서는 출판 관행이 블룩을 통해 변화하고 있다. 전문적 작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모여 글과 글 쓰기 방법을 공유하며 공동저작으로 책을 내는 일이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지만 한 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가 처음이 아니다. 지난 2월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SNS)에서 만난 29명의 블로거들이 다양한 온라인 툴을 활용해 직접 만들어 낸 ‘2009년 블로그로 살아남다’가 대표적인 예. 이들은 출판사의 도움 없이 기획부터 집필, 디자인, 인쇄, 유통까지 출판의 전 과정을 자신들의 힘으로 해내는 기염을 토했다. 저자의 직업은 기업가, 마술사, 프로그래머, 응원단장, 마케터, 디자이너, 컨설턴트 등 다양하다.

제작부터 출판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한 달. 블로거 클럽의 한 회원이 블로그에 대한 글을 함께 쓰자는 글을 올린 뒤 많은 댓글과 토론글이 올라왔다. 50명의 회원이 주제별로 글을 써서 원고에 응모했다. 2번의 준비모임과 작업 끝에 책이 나왔다. 제작 과정의 중심 역시 출판사가 아닌 블로거였다. 출판할 글은 각자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뒤 트랙백을 걸어 서로 연결했다. 디자이너가 MS오피스 퍼블리셔로 만든 표준 편집기로 각자가 글을 편집했다. 퍼블리셔 프로그램 사용법은 웹 카메라와 동영상 강의를 사용했다. 책의 표지나 표지시안은 구글 앱스(Apps)의 양식생성 기능을 썼다.  

생활ㆍ문화ㆍ시사, 담론의 주체 바꾸는 ‘블룩’
블룩의 출현은 출판권력과 저자의 변화를 통해 생활ㆍ문화ㆍ시사 담론의 주체를 전문가에서 일반인으로 역전시키고 있다. 일반인이 예술관련 비평이나 담론을 쉽게 꺼낼 수 없었던 분위기를 바꾼 것이다. 김홍기의 블로그, 문화의 제국(blog.daum.net/film-art)에 연재됐던 ‘하하 미술관(2009)’, ‘샤넬 미술관에 가다(2008)’ 등은 책으로 나와 더 인기를 끌었다. ‘샤넬 미술관에 가다’는 미술을 통해 보는 패션의 숨은 이야기다. ‘하하 미술관’은 미술 심리 치유 에세이다. 이철우의 심리학 책인 '인관관계가 행복해지는 나를 위한 심리학(2007)' 역시 블로그 연재를 먼저 한 블룩이다. 



블룩의 유행은 정치비평 등을 통한 시사담론을 이끄는 오피니언 리더를 교수, 언론인 등 일부계층에서 일반인까지 확대시키고 있다. 하루 70여만 명이 방문하는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http://blog.aladin.co.kr/mramor)’의 주인 이현우(42) 씨는 문화 에세이 ‘로자의 인문학 서재(2009)’를 펴내 인기를 끌고 있다. 그는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다.
  

블로거 ‘MP4/13’과 김용민 시사평론가가 공동 집필한 책인 ‘블로거, 명박을 쏘다(2008)’도 화제를 일으켰다. ‘MP4/13’는 ‘고소영’ 라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유명 블로거다. 그는 지난 2007년 2월 자신의 블로그에 ‘이명박 정부 고소영 라인이 뜬다’는 제목의 글을 써 하루 22만여 명의 방문자가 그의 블로그를 찾기도 했다. 의사인 박경철의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2008)' 역시 블로그 글의 모음이다.  



특히 요리 관련 블로그 글의 출간은 블룩의 활성화를 견인했다. 김용환 씨가 자신의 블로그에 쓴 요리법을 책으로 옮긴 ‘2000원으로 밥상차리기’는 지난 2003년 출간해 현재까지 70만여 부가 팔렸다. 이 책은 간단한 조리방법과 완성 사진으로 구성된 일반적인 요리책과 달리 사진으로 조리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해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요리책인 ‘혜나네 집에 100만 명이 다녀간 까닭은(2006)’도 인기를 끌었다. 



여행ㆍ생활 부문에서도 블룩은 베스트 셀러의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해왔다. 오영욱의 ‘오기사 여행을 스케치하다’(2008),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2006), ‘깜삐돌리오 언덕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2005)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박성빈의 여행책 ‘그리우면 떠나라-Nova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별스크랩(2006)’도 있다. ‘황혜경의 ‘반나절이면 집이 확 바뀌는 레테의 5만원 인테리어(2006)’, 송민경의 ‘명품 다이어트 & 셀프 휘트니스(2005)' 등도 온라인에서 인기를 끈 글이 오프라인 책으로 나와 히트한 블룩 성공사례다.

전문 작가들도 변화에 발맞추기 시작, 외국에서는 이미 대세
전업작가들도 일부지만 이런 변화에 발맞춰 블룩의 대열에 동참을 시도하고 있다. 블로그에 글을 먼저 올리고 책 출간을 나중에 하는 식으로 변화에 발맞추고 있는 것이다. 출판권력의 변화는 일부 출판사의 전횡에 시달리던 문단이 더 바라던 바일 수도 있다. 정도상 소설가는 신작 장편소설 ‘낙타’를 8일부터 문학동네 인터넷 커뮤니티(http://cafe.naver.com/mhdn)에 일일 연재하기 시작했다. 황석영은 ‘개밥바라기 별(2008)’을 블로그에 출간보다 먼저 연재한 바 있다. 박범신도 블로그에 ‘촐라체(2008)’를 연재했다.

아마존 (www.amazon.com)에서는 블룩이 베스트셀러가 되는게 더 이상 이변이 아니다. 블로거가 책 창작과 유통의 중심이 돼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비즈니스 위크’에 따르면 블룩은 2005년 미국 출판계 베스트 셀러의 20%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MS 프로그램 관리자 출신의 미국인 조엘 스폴스키는 경영에 관한 자신의 블로그(www.joelonsoftware.com) 글을 묶어 ‘조엘 온 소프트웨어(2005)’를 펴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독일인 필립 렌센은 자신의 블로그인 ‘구글 블로코프(blog.outer-court.com)’에 올린 글을 모아 ‘구글을 재밌게 사용하는 55가지 방법(2006)’을 내놓기도 했다. ‘블룩’이라는 출판의 방법이 구글을 즐겨 쓰는 평범한 사람을 화제작의 저자로 바꿔놓은 것이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도 언제든 출판계의 강자로 떠오를 수 있는 세상이다.(김청환기자) 

09. 0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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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블룩의 시대와 출판의 향방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1-12 12:29 
    올 한해 출판계를 결산하는 한국일보의 연재기사에서 '블룩(blook)'을 다룬 꼭지를 옮겨놓는다. 블록에 대해서는 나도 한 발을 담그고 있기 때문인데, 기사에서도 언급이 되고 있다. 더불어, 자세히 보니 관련이미지가 '로쟈의 저공비행'이기도 하다. 다시금 바닥이 좁구나란 생각이 드는데, 내년에는 더 많은 블로거들의 더 풍성한 '블룩'이 햇빛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흠, 나부터도 어서 2, 3탄을 준비해야 할까...   한국일보(09. 11
 
 
드팀전 2009-06-18 12:19   좋아요 0 | URL
최근에 제가 좋아하고, 자주 펴보는 블룩이...'산타벨라'분의 책입니다.ㅋㅋ
워터코인을 토양 위에 하는 수경재배로 완전히 성공시켰다는...이 만족감.
하나는 뚝배기에 하나는 못쓰는 법랑 주전자에...

로쟈 2009-06-18 14:07   좋아요 0 | URL
대단한 블로거들이 참 많은 듯해요.^^ 블룩 판매량이 의외일 정도로...

2009-06-18 16: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21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게으름뱅이_톰 2009-06-22 18:22   좋아요 0 | URL
출판까지 한달! 놀라워요. 글쓰는 블로거들의 로망이 아닐까요? 블룩. ^^

로쟈 2009-06-22 23:11   좋아요 0 | URL
'로망'이라고 하기엔 너무 쉬워진 듯해요.^^
 

이번주 교수신문에 실은 서평칼럼을 옮겨놓는다. 가와이 쇼이치로의 <햄릿의 수수께끼를 풀다>를 읽은 소감을 현 시국과 연관지어 적은 글이다.  

교수신문(09. 06. 15) 헤라클레스 되기를 포기한 햄릿의 운명에서 ‘고귀함’을 보다  

가와이 쇼이치로의 『햄릿의 수수께끼를 풀다』(시그마북스, 2009)를 흥미롭게 읽었다. 셰익스피어만큼 유명한 작가가 없고, 또 『햄릿』만큼 유명한 작품이 없는데 ‘무슨 수수께끼란 말인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이 작품이 품고 있는 수수께끼가 아직 다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독자나 관객을 매혹시키는 게 아닐까. 

저자는 ‘우유부단하고 허약한 철학청년’이라는 햄릿에 대한 고정관념을 ‘허상’으로 치부하면서 그를 헤라클레스 신화와 연관지어 새롭게 해석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헤라클레스란 키워드가 없다면 『햄릿』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해석은 일본뿐만 아니라 국제 셰익스피어학계에서도 제출된 적이 없는 독창적인 견해라 한다.  

사실 단서가 없지는 않았다. 1막 2장에 나오는 독백에서 햄릿은 숙부이자 계부인 클로디어스를 평하면서 “내 아버지의 동생. 그러나 아버지와는 너무도 다르다. 나와 헤라클레스의 차이만큼이나”라고 말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을 근거로 흔히 햄릿을 헤라클레스와는 대척점에 놓인 인물로 인지하게 되지만 저자는 뒤집어서 읽는다. 애초에 ‘나는 헤라클레스와 다르다’고 시인한 햄릿이지만 차츰 헤라클레스처럼 행동해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 작품에서 햄릿은 숙부의 범죄를 알게 된 이후에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이 되고자 하며, 그에 따라 변신하게 된다.     

하지만 어째서 그의 결심은 자꾸 유예됐는가. 사실 햄릿은 격정의 인간이기도 하다. 3막 4장에서 왕비인 어머니의 침소 휘장 뒤에 숨어 있던 폴로니어스를 “어, 이건 뭐야? 쥐새끼냐?”라고 외치며 칼로 찔러 죽이는 장면은 그의 제어되지 않은 격정이 표출된 사례다. 햄릿은 그러한 격정이 잘못된 상상과 판단, 그리고 행위를 낳을까 염려한다. 그래서 이성에 따라 참을 것인가(To be), 격정에 따라 행동할 것인가(not to be)를 고민한다. 유령의 정체에 대한 의구심도 거기에서 비롯한다. 때문에 그가 진정한 행동으로 나서는 데는 또 한번의 변신이 요구된다. 그 변신은 그가 헤라클레스와 같은 행동을 포기하고 모든 일을 신의 뜻에 맡기고자 할 때 달성된다. 그것을 잘 말해주는 것이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데에도 하느님의 섭리가 있는 법”이라는 햄릿의 대사다.  

그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햄릿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신의 채찍’이 돼 천벌을 내리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만약에 이 작품이 진정한 복수극이라면 마지막 장면에서 한번 더 유령이 등장하는 것이 합당할 테지만, 셰익스피어는 그렇게 처리하지 않았다. 햄릿은 헤라클레스가 되려는 시도를 포기하며 모든 것을 다만 순리에 맡기고자 한다(Let be). 이러한 변신에 따라 ‘To be, or not to be’라는 햄릿의 고민은 ‘Let be’라는 깨달음으로 바뀐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셰익스피어가 말하는 진정한 ‘고귀함’은 인간이 가진 한계를 아는 데, 그리고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에서 자세히 분석하고 있는 햄릿의 저 유명한 대사 “The time is out of joint.”를 다시금 환기하자면, 우리는 시간이 경첩에서 빠진 시대, 이음새에서 풀려난 시대, 그래서 제멋대로 가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한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가와이 쇼이치로의 새로운 해석에 기대면, 그렇다고 우리에게 헤라클레스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순리에 따라 행동하면 될 따름. 그리고 “나머지는 침묵.” 

09. 0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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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9-06-16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쥐'만 나오면 그 분이 생각나서...폴로니어스마저도...지난 번 소개로 저 책을 가지고 있는데 아직 읽지는 못했습니다. '신의 채찍'으로의 '자기 변용'에 약간의 두려움이 생기긴합니다.슈바니츠의 <햄릿> 역시 기다리고만 있구..쯥

로쟈 2009-06-16 13:28   좋아요 0 | URL
네, 셰익스피어는 모든 걸 다 써놓았죠.^^ 장문의 리뷰 잘 읽었습니다. 그렇게까지 근접조우했었는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꼬마요정 2009-06-18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만 존 에버릿 밀레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죠. 저 책의 표지에 있는 녹색 수초에 쌓인 처연한 여인 오필리어요.. 제 노트북 배경도 이 그림이랍니다. 사람들이 보더니 저더러 미쳤다고 하죠..^^;;

로쟈 2009-06-20 08:34   좋아요 0 | URL
네, 속으로만 맘에 드셨다고 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