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들에겐 지옥이 없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전 (4.19~5.1)

어제 접한 가장 좋은 뉴스는 핀란드의 영화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전' 소식이다. 4월 19일부터 5월 1일까지 시네마테크KOFA에서 진행된다고. 내겐 칸느영화제 부럽지 않은 '선물'이다. 비록 몇 편을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이번 기획전에서는 국내에 소개 되었던 <성냥공장소녀>, <과거가 없는 남자>, <황혼의 빛> 외에도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연작, 감독의 보헤미안 정신을 가장 잘 대표하는 <보헤미안의 삶> 등 주요 작품 11편이 상영된다. 단연코 이야기 하건데,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영화를 한편이라도 본다면 그의 이름을 되뇔 수밖에 없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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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없는 남자- The Man without a P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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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공장 소녀- The Match Factory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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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Leningrad Cowboys Go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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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빛- Lights In The Du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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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4-12 13:41   좋아요 0 | URL
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로쟈 2011-04-16 08:34   좋아요 0 | URL
^^

easybird 2011-04-12 23:31   좋아요 0 | URL
소식을 듣고 두달전부터 목이 빠져라 기다렸죠~ 그 얼굴들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얼굴들..

로쟈 2011-04-16 08:35   좋아요 0 | URL
아키 카우리스마키 팬이시군요.^^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카이스트 사태에 대한 소감을 적은 게 돼버렸는데, '대학 주식회사화' 혹은 '대학의 몰락'에 관한 책들을 안 그래도 모아읽으려던 참이었다. 참고로, 지난주 시사IN의 '장정일의 독서일기'도 같은 주제의 책들을 묶어서 다루고 있다. 

  

경향신문(11. 04. 12) [문화와 세상]학생을 자살로 내모는 ‘명문대病’

“미국의 명문대는 자살률이 더 높다.” 서남표 카이스트(KAIST) 총장이 최근 학생과의 개별면담에서 한 말이라고 한다. 네 명의 학생과 한 명의 교수가 연이어 자살함으로써 사회적 충격을 던지고 있는 ‘카이스트 사태’의 원인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한다.

2006년 부임 이후 세계적인 명문대학을 목표로 개혁을 주도하면서 무한경쟁 시스템을 도입한 서 총장에게 학생들의 자살은 경쟁 시스템의 불가피한 부산물이자 ‘나약한 정신력’의 결과로 간주됐을 것이다. 그의 발언에서 자살률조차도 아직 명문대 수준이 못 된다는 인식을 읽는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는 우리 옛말이 있긴 하지만 이 말의 서남표판은 ‘명문대가 된다면 자살이 대수랴’가 될 듯싶어서다. 하지만 그 명문대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명문대일까. 

소위 ‘서남표식 개혁’의 성과는 ‘눈부시다’. 보수언론이 자주 내세우는 지표에 따르면 서남표식 개혁이 추진된 덕분에 ‘더 타임스’ 세계대학평가에서 카이스트의 순위는 쑥쑥 올라갔다. 2006년 198위, 2007년 132위, 2008년 95위, 그리고 2009년에는 69위가 됐으니 50위권 진입도 코앞에 두고 있다. 서울대가 47위라고 하니 카이스트는 한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순위다. 게다가 공학·IT분야로 한정하면 서울대(27위)를 제치고 21위다. 대체 무엇이 평가 기준인지 궁금한데, 매년 세계 200대 대학을 선정해 순위를 매긴다는 이 영국의 일간지는 동료평가(40%), 교수 1인당 논문 인용지수(20%), 교수 대 학생 비율(20%), 국제기업의 대학평가(10%), 외국인 교수 비율(5%), 외국인 학생 비율(5%)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한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동료평가’를 어떻게 산출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기준에 ‘사회 속의 대학’이 갖는 의의는 포함돼 있지 않는 듯하다. 대학 구성원들의 자긍심 또한 평가항목에는 빠져 있는 듯싶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졸업자 취업률도 눈에 띄지 않는다. 국가별 행복지수 같은 것도 예가 되지만 평가항목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순위가 가능한 것이 모든 유(類)의 평가가 갖는 함정이다. 그런 결과가 신앙의 대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흔히 대학들 간의 무한경쟁시대라고 하고, 대학 경영자들은 입만 열면 ‘대학 경쟁력’을 외친다. 미국 시카고신학교의 서보명 교수가 쓴 <대학의 몰락>이란 책을 보면 미국 대학에서조차도 경쟁이란 말이 공공연하게 등장한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이다. 대학별 랭킹을 발표하면서 각 대학을 순위경쟁으로 내몰기 시작한 것이 고작 30년도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대학이 서구 중세의 산물인 걸 감안하면 대학평가의 역사란 퍽 일천하다. 하지만 이 일천한 역사가 대학의 이념까지 바꿔놓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대학의 자유’라는 이념이 ‘대학 간 경쟁’으로 변모했으니 이만한 지각변동을 대학의 역사에서 또 찾을 수 있을까 싶다. 서 교수에 따르면 ‘대학 순위 정하기’를 통한 순위 경쟁의 도입은 레이건 시대 보수주의 혁명의 혁혁한 성과이다. 1960년대 좌파운동의 본산지였던 대학을 자본주의 경쟁체제로 밀어넣음으로써 대학을 기업의 이해관계에 완전히 종속시켰다. 그런 과정에서 교육은 상품이 되고 학생은 소비자가 되었으며 대학은 품질관리와 품질보증의 대상이 됐다. 그리하여 자본과 소비만이 대학을 말해주는 시대가 됐다. 대학의 자유와 비판정신이 이제는 한갓 퇴색한 전통에 불과하다면, 대학은 무엇이어야 할까. 대학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미국 명문대 수준의 자살률을 갖기 전에 다시금 고민해볼 문제다

11. 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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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1-04-12 02:05   좋아요 0 | URL
숙연해지는 글입니다... 과연 미국식 자본주의의 바깥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mirror 2011-04-12 04:14   좋아요 0 | URL
서남표의 방식은 미국 방식이 아닙니다. 어떤 미국 대학이 서남표식으로 하나요? 서남표의 정책은 신자유주의란 것도 아니죠.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미국이나 영국에서 징벌적 등록금제도 본적 있습니까? 부정적인 모든 것을 미국제로 몰려는 몰상식한 짓들좀 그만했으면 좋겠습니다. 미국대학처럼 인문학 교육에 힘쓰는 대학도 없습니다. 도대체 왜 한국의 자칭 진보주의자들은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미국 또는 신자유주의라는 카테고리에 가두려고 합니까?
대학과 학자들의 경쟁은 필연입니다. 사회의 각 영역에서 경쟁이 사라져도 학자들 사이에 탁월함의 구별은 필연입니다. 위대한 업적과 그렇지 않은 업적은 구별되고, 위대한 업적이 대학에서 교육되어야 하기 때문이죠. 이 구별 과정이 경쟁이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 다만, 서남표는 영어강의와 징벌적 등록금제라는 황당무계한 한국식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에 잘못이죠.

mirror 2011-04-12 04:24   좋아요 0 | URL
그리고 미국의 대학 순위가 기업에 대학을 종속시키려는 의도라고 단정짓는 그 근거가 의문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의 한 철학 교수가 각 대학들의 철학과 교수들에게 일일히 편지를 보내 매년 각 분야별로 순위를 업데이트하는 사이트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학생들의 선택을 도우려는 것이죠. 이렇게 많은 학자들의 견해를 물어서 각 분야의 뛰어난 대학들의 순위를 매기는 것이 해서는 안 되는 짓인가요? 이 철학과들의 순위와 기업이 무슨 관련이란 말인가요?
그리고 대학 순위 매기는 것은 독일에서도 열심히 합니다. 그 동안 순위 안 매기고 돈을 그냥 나누어 먹어서 발전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매년 슈피겔 같은 곳에서 순위도 매기고, 한국의 BK 사업과 같은 사업도 해서 예산도 분배합니다.
서남표의 해괴망측한 정책들은 다른 나라들에서 볼 수 없는 지독히도 한국적입니다. 이것을 신자유주의 또는 미국탓으로 돌리는 것은 저급한 한국 지식인들의 몹쓸 습관을 답습하는 것 같습니다.

pjy 2011-04-12 12:28   좋아요 0 | URL
EBS에서 방영했던 정의란 무엇인가의 한토막이 생각납니다.
대리모가 출산후 아이의 양도를 거부했는데 딜은 딜이라고 주장하는 거..
참으로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인데도 부작용은 당연한거고 그게 인생이고 세상이라고 말하는 ㅠ.ㅠ
이런, 되는대로 살거였으면 공부는 뭐하러 하냐고요~ 머리아프게~~
 
인류동물학 읽기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펴내는 월간지 '책&'(393호)에 실은 이번달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주제로 한 책들을 골랐다.  

  

책&(11년 4월호) 동물과 인간의 공존

“한 국가가 얼마나 위대하며 도덕적으로 진보했는지는 동물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자주 인용되는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다. 과연 한국은 얼마나 위대하며 도덕적으로 진보했을까. 우리는 동물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그런 물음이 조금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전례 없는 구제역 사태로 가축 350만 마리를 살처분했고, 게다가 매몰지의 침출수로 인해 또 다른 재앙이 예고돼 있는 것이 우리의 처지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대책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어서, 공장식 밀집사육의 문제점이 다시금 지적되고,  가축의 면역력을 키우는 친환경 축산이 대안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대책은 인간과 동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당장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돼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건 강제할 수 없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다. 다만 동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함께 ‘육식주의’를 반성의 도마 위에 올려놓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때 몇 권의 책이 도움을 줄 수 있겠다.  

멜라니 조이의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는 ‘육식주의를 해부한다’는 부제대로 육식주의를 정면으로 문제 삼는다. ‘육식주의’란 말 자체가 ‘채식주의’에 견주기 위한 저자의 신조어다. 그는 “특정 동물들을 먹는 일이 윤리적이며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신념체계”를 육식주의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런 명명을 통해서 육식주의가 하나의 입장이자 이데올로기이며 동시에 폭력이라는 걸 시사한다. 한국인에게선 큰 차이가 없기는 하지만, 쇠고기와 개고기에 대한 태도가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가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내면화된 육식주의’의 인식이 동물의 대상화와 몰개성화, 이분화를 통해서 작동한다고 말한다. 동물을 생명체가 아닌 ‘살아있는 물건’ 정도로 간주하고 독립된 개체이지만 추상적으로 뭉뚱그려서 그들을 인식하며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눈다. 고기는 즐겨먹어도 송아지 고기를 먹는 건 반대한다거나 개고기를 먹는 건 혐오스럽다고 여기는 태도는 그래서 가능하다. 하지만 똑같이 육식주의를 공유하고 있을 뿐이며 그 결과 미국에서만 한 해에 100억 마리의 동물이 도살당한다. 초당 317마리 꼴이다. 이러한 현실이 바뀔 수 있을까? 저자는 수십억 마리의 동물이 겪는 극심한 고통을 직시하고 공감하고 증언하는 일이 변화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함께 느낌’, 곧 공감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 새로운 관계는 어떤 것일까?   

동물행동학자 마크 베코프는 <동물 권리 선언>에서 ‘온정으로 맺어진 공동의 연대’를 제안한다. 사실 성서의 동물관에 따르면, 동물은 인간보다 열등하며 인간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 당연하게 간주됐다. 서양에서는 그러한 차별이 동물은 이성이 없다는 이유로 정당화돼 왔다. 하지만 오늘날의 과학은 동물의 지각과 감성능력에 관한 놀라운 사실들을 계속 발견해내고 있으며, 저자는 이러한 발견에 근거해 우리의 가치체계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살해당한 해변가의 하니걸을 추모하는 듯 행동한 수컷 바다거북이나 죽은 새끼를 품에 안고 깊은 슬픔에 빠진 어미 고릴라의 모습은 동물에게 인간의 정신적 특성을 부여하는 ‘앤스로포몰피즘’ 혹은 의인관(擬人觀)이 과연 인간의 고안품인가를 되묻게 한다. 그들이 우리처럼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가까운 존재로서 그들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동물과 그렇게 온정적으로 공존함으로써 우리가 보다 나은 인간이 되고 우리의 삶도 더 윤택해질 거라는 것이 저자의 조언이다. 당장에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뭔가 현실 가능한 것 그리고 온정을 베풀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새로운 학문으로서 인류동물학의 권위자인 할 헤르조그는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에서 동물에 대한 우리의 사고와 성찰의 지평을 더 확장시킨다. 그는 15년 동안 채식주의자로서 도덕적 지조를 지켜온 한 인류학 박사가 구운 뇌조고기 맛에 반하면서 단번에 채식주의에 등을 돌린 사연도 들려주고, 자신이 애완용으로 키우는 보아뱀 샘에게 과연 고양이를 먹이로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털어놓는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해서는 흑백논리적 윤리로 재단할 수 없는 ‘괴로운 중간지대’가 있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혐오하며 잡아먹기도 하는 동물에게 우리가 보이는 태도와 행동, 유대감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함을 보여주는 학문이 바로 인류동물학”이란 저자의 결론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사실 삶의 근원적인 복잡함을 사유하는 것이 철학의 몫이라면, 인류동물학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철학이라고 할 만하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이렇게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동물을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11. 04. 10.  

 

P.S. '동물철학'과 관련하여 내가 먼저 떠올리는 책은 데리다의 'The Animal That Therefore I am"이다. 언젠가 동물철학에 관한 책들을 몇권 모으면서 구한 책인데, 분량도 얇기에 번역되면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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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먹을수록 죽는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4-20 18:04 
    육식 혹은 육식주의를 비판한 책들이 여럿 출간된 바 있는데, 결정판이 나왔다. 최소한 제목상으로는 그렇다. <고기, 먹을수록 죽는다>(현암사, 2011)니까. 부제는 '육식에 관한 10가지 논점과채식주의를 향한 선언'이다. 육식 문제가 점점 흡연 문제와 동일시되지 않을까 하는 전망도 불가능하진 않을 듯싶다. 공공장소에서는 육식을 금하는 것 같은. 여하튼 고기를 먹어도 이젠 목숨 걸고 먹어야 하는 듯하다. 영화 <카페 느와르>에서 햄
 
 
푸른바다 2011-04-10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물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 같네요. 그런데 어째 피터 싱어가 완전히 빠졌네요. 모든 사람을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는 동물 철학에서 충분히 중요한 사상가일텐데요...^^

로쟈 2011-04-11 23:40   좋아요 0 | URL
네, 코너가 최근에 나온 책들에 대한 리뷰여서요. 싱어의 <동물해방> 등은 전에 다룬 적이 있어서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기획회의(293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최정우의 <사유의 악보>(자음과모음, 2011)에 대한 독후감을 간단히 적었다. 굉장히 많은 문제를 사유하고 변주하면서 제시하는 이 '악보'에 대해서, 그리고 그걸 머릿속에서 독자 스스로가 연주하고 감상해야 하는 이중의 역할에 대해서, 더 많은 말이 쓰여지고 쓰여져야 할 테지만, 그냥 개인적인 생각 '한 자락'을 펼쳐놓는 데 그쳤다. 

   

기획회의(11. 04. 05) 사유의 불협화음을 연주하다

여기 한 권의 책이 있다. 아니 하나의 악보가 있다(이건 ‘악보’에 대한 서평인가?). <사유의 악보>라고 적혀 있으니까. 실제로 표지에도 악보가 그려져 있고 본문에도 몇 개의 악보가 들어가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악보로만 채워져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것만 믿고 덤벼들었지만 책은 악보만큼이나 유혹적이면서도 동시에 난해하다. 어쩌면 이 책은 독서를 위한 책이 아니라 연주를 위한 책인지도 모르겠다. 서곡과 종곡을 제외하고 13개의 악장과 8개의 변주로 구성된 이 ‘악보’를 제대로 읽는 일은 9번째 변주곡을 쓰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작곡에 재주가 없는 나로선 변죽만 울리는 서평에 만족하려 한다.  

일반적인 독자라면 책장을 열고 서곡부터 ‘들어볼’ 것이다. 저자는 “모두를 위한,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하나의 책”이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를 인용하면서 ‘모두’를 위한 책이 아니라 ‘소수의 단수들을 위한 책’이 되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그리고 이런 엄포도 보탰다. “이 글들은 결코 어떤 설득이나 해명을 위해 작성되지 않았다. 이 글들은 확신을 가진 이들만을 위한 것이며,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한낱 불가해한 종이 뭉치처럼 보일 것이다.” 여기서 ‘확신’은 ‘불가능성’과 함께 하며, ‘불가해’는 ‘불확정성’과 짝을 이룬다는 보충설명이 따른다. 불가능성이냐 불확정성이냐의 선택을 촉구하는 모양새다. 그리고 이것이 저자의 가장 진정한 의도이자 가장 불순한 의도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도인지 어림하기는 쉽지 않다.

저자는 또 이렇게 적었다. “하나의 책은 준비된 자에게만 허락되며, 그렇게 ‘준비’되기 전에 하나의 책은 단순히 휴지 조각들일 뿐이다.” 이런 건 뭐랄까, 사르트르가 랭보의 시구 “흠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에 붙인 주석과 비슷하지 않을까. “오오 계절이여! 오오 성(城 )이여!/ 흠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란 ‘희한한 시구’에 대해서 사르트르는 이렇게 적었다. “여기에서는 누가 질문을 받는 것도 질문을 하는 것도 아니다. 시인은 그 자리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물음은 대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아니 차라리 물음이 그 자체의 대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보통 ‘확신’이나 ‘준비’는 단독으로 쓰이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대상을 수식어로 갖는다. 하지만 저자는 ‘확신을 가진 이들’과 ‘준비된 자’라고만 적었다. 무엇에 대한 확신이고 무엇을 위한 준비인지 밝히지 않았다. 그건 암묵적인 것이다. 책에서 자주 반복되는 ‘저’라는 지시 형용사는 그런 암묵적인 맥락과 공유된 전제들의 지표라 할만하다(저자는 ‘첫 문장’이란 말 대신에 ‘저 첫 문장’이라고 적고, ‘질문에 대한 대답’이란 말 대신에 ‘저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쓴다. 아마도 이 책은 그 ‘저’가 가장 많이 출몰하는 책일 것이다). 누가 공유하는? ‘소수의 단수들’이 공유하는. 저들만의 코드표 혹은 난수표!

물론 맥락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가 ‘절멸’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가 당면한 가장 절실한 문제라는 ‘확신’, 그 확신을 당신도 공유하는가라고 그는 묻는다. “이 절멸의 문제를 마주할 자신이 있는가?”라고. 그렇다면 ‘준비’는? “그렇다면 당신은 ‘혁명’을 사유할 준비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혁명의 준비, 혁명을 사유할 준비이다. 하지만 이 절멸과 혁명에 대한 사유는 어렵고도 어렵다.  

“모든 혁명이 그러하듯, 우리는 그 절멸의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을, 혹은 그보다 더, 절멸의 이전과 이후를, 사유해야 한다. 이것은 이론 이후를 사유하는 것, 그리고 또한 사유 이후를 실천화하는 것, 따라서 실천 이후를 이론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제와 그것이 안고 있는 근본적 아포리아를 한마디로 이론의 ‘불가능성’에 대한 사유라고 저자는 정리한다. ‘사유의 악보’ 그리기는 이 불가능성을 끝까지 밀어붙이려는 시도이다. 그 ‘불가능한’ 시도를 통해서, ‘사유의 불협화음’을 통해서 그는 ‘기형의 맹아’와 ‘잡종의 지식’, 그 ‘난잡한 씨앗’을 흩뿌리고자 한다. 그의 바람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 이상으로 기형적이고 잡종적이며 난잡한 글쓰기가 창궐하는 데에서!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독자’로서 내가 서곡을 들으며 느낀 점이다. 하지만 이 자리는 ‘전문가 리뷰’라는 간판을 걸고 있으니, 전문가 흉내도 좀 내야 하는 처지다. 그래서 결어와 각주의 형식으로 조금 덧붙인다. 저자의 서평관에 대한 주석이다. 사실 ‘인문학 서평을 위한 몇 개의 강령들’(<기획회의>에 수록됐던 글이다)까지 적어놓은 책에 대해 서평을 붙인다는 것은 좀 곤혹스러운 일이다. 기자들이 쓰는 서평은 별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일갈하고서 저자는 ‘전문가들의 서평’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잊지 않는다. 책을 통독하고 정독할 가능성은 높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객관적이지도 그리 문제적이지도 않을 수 있으며 “전문가의 시각은 그 자신의 전공에 대한 치밀한 논리와 정치한 소개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대중의 필요 혹은 대중의 문제의식과 조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다. 따라서 언론이나 전문가를 믿지 말 것이며, 오히려 그들에 반대하고 그들을 전복시키기 위한 서평을 쓰라고 권유한다.

의문이 없는 건 아니다. 서평에만 한정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중의 필요’ 혹은 ‘대중의 문제의식’을 고려한 글쓰기와 소수의 단수들을 위한 글쓰기는 어떻게 접속할 수 있으며 어떻게 양립가능한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글쓰기는 자평대로 “1990년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이 풍미하고 그 이식의 행위들의 횡행했던 남한의 이론적이고 실제적인 풍경의 정중앙을 관통한 이가 쓴 글들의 모음”으로서 최대치를 보여준다. 지식사회학적 의미도 갖겠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다.  

하지만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란 자의식과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란 전략에 비하면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란 고민은 저자에게 덜 중요한 듯싶어서 아쉽다. 가령 ‘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라는 매혹적인 악장에서, 저자는 자진해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야구를 ‘무타무주(無打無走)’의 야구라고 부르고, “무타무주의 야구는 이사만루의 야구가 ‘멸종’해버린 세상에서 만나게 될 하나의 새로운 삶의 미학 또는 미학적 윤리학”이라고 추켜세우는데, 노히트노런은 타자가 아닌 투수의 기록 아닌가. “이사만루라는 절대적인 순간에 과연 무타무주는 ‘가능할’ 것인가?” 같은 ‘불가능한’ 물음이 아직은 재치로만 들린다. 

11. 04. 08.  

P.S.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데리다와 바타유, 알튀세르가 포진하고 있는 처음 세 악장보다는 <아톰의 철학>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하는 4악장부터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란 제목이 붙은 장이다. 많은 각주들을 거느린 '학구적' 스타일의 앞 장들보다 한결 여유로운 스타일의 이런 글이 내가 '유혹적'이라고 부른 글이다. '무타무주의 야구' 같은 주장에 동의할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저자는 그러한 명명이 '순수한 형식적 악취미'의 산물일 수도 있다는 단서를 달아놓긴 했다).   

저자는 각주에서 2009년 지면에 발표된 이 글에 대한 '생산적인 비판의 독해'는 박가분의 <부르주아를 위한 인문학은 없다>(인간사랑, 2010)에서 읽을 수 있다고 적었다. '삐리리 불어봐 해체주의: 이웃 블로거 '람혼' 독서 후기'란 글인데, 제쳐놓았다가 이번에 읽었다. 박가분은 (1)최정우(람혼)가 가라타니 고진의 타자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2)근대성에 대한 그의 문제제기는 데리다주의 혹은 해체주의의 지평에서 나온 것이고, (3)하지만 근대성은 데리다주의 혹은 해체주의의 지평을 초과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의 비판의 타겟은 람혼이라기보다는 데리다이다. <마르크스주의와 해체>에 묶일 만한 명민한 비판이지만 동시에 데리다를 단순화한 비판이기도 하다. "해체주의가 일종의 문화상품으로 소비되는 걸 보고 나서 역으로 데리다는 그동안의 해체를 가능하게 했던 역사적 전통으로 돌아간 것이다"(329쪽) 같은 주장이 단순화의 예이다. 역사적 전통에 대한 '기억과 보존의 책임'은 내가 아는 한 데리다의 해체와 처음부터 같이한다. 그것은 뒤늦은 자각 같은 게 아니라 해체의 조건 자체이다. "말년의 데리다는 해체주의적 실천을 통해 역설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근대적 유럽의 유산을 재발견하게 되었다."는 주장은 따라서 면밀한 검증을 필요로 한다.     

한편, 다시 <사유의 악보>로 돌아오면, 정중앙에 위치한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 같은 악장은 내게 난해하다. 음악이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다면, 나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 악장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가 이끄는 음악집단 '레나타 수이사이드'의 현란한 연주에 견주면, 비평가 최정우는 기타리스트 최정우에 비해 '둔중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가 애착을 갖는 '중독(中毒)'과 '중독(重讀)' 증세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는 모든 말, 개념과 문장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반복하고 되새김질하면서 아주 느리게 이동한다. 그래서 때론 60킬로로 달리는 스포츠카 같다. 내가 기대하는 건 그가 제 속도로 쾌속질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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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11-04-09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책에 대한 로쟈님의 서평이 참 반갑고 소중하며 예리하면서도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제겐 그만큼 큰 기쁨이자 영광이 아닐 수 없는데요, 이에 깊이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60km/h로 달리는 스포츠카'라는 표현에서는 크게 웃었습니다.^^ 말씀하시고 기대해주신 대로, '저' 쾌속 질주의 방법을 제 나름으로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게는, 제가 갈 수 있고 가야 할 길을 비춰주는, 그런 소중한 표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속 깊은 제언과 날카로운 비판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인 생각의 한 자락'이라고 (저를 패러디 하시면서^^)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이 글을 읽으며 저는 다시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었고 몇 가지 지점들에서 개인적인 정리도 할 수 있었습니다.

로쟈님이 지적해주신 부분도 있고, 또 제 나름으로 이런저런 서평들을 보면서 느낀 바도 있고 해서(아직 로쟈님의 글 같은 '본격적인 서평'이 없어서 조금 망설이고 있던 차였는데요), 조만간 제 책에 대해 저자 자신이 직접 제시하는 일종의 '매뉴얼' 혹은 옹호와 첨언의 변들을 작성해볼까 합니다. 아마도 이는 또 다른 '사족'이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겠으나, 서두에서 말씀하신 대로 저 역시나 스스로 이 책에 대해서 더 많은 말들이 쓰여질 수 있고 또 쓰여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만 잠시 덧붙이자면, 저자 중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겠지만, '누구를 위해 쓰는가' 하는 문제는 제게도 개인적으로 대단히 소중하고 예민한 문제입니다. 제가 '서곡'에서 '확신을 가진 준비된 소수'에 대해 말했지만, 저는 그 소수가 수적이나 양적으로(또한 현재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소수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소수의 독자들이란 창조되어야 하며 또한 창조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바로 그 지점에 내기와 희망을 걸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쟈 2011-04-09 08:17   좋아요 0 | URL
<사유의 악보> 매뉴얼을 쓰신다는 거지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소수의 독자'들이 곧 거대한 고래처럼 등장하길 고대하겠습니다.^^

yoonta 2011-04-10 14:07   좋아요 0 | URL
좀 늦었지만 출간 축하드립니다. 람혼님..^^
람혼님 블로그에 이 책출간관련 글이 없어서 인사를 못드리고있었는데 로쟈님 서평을 빌어 축하드리게 되네요.

책은 아직 구입하지 않았지만 목차를 보니 그동안 람혼님 블로그에서 봤던 몇몇 글들이 보이는군요. 그동안 람혼님 글들을 읽으면서 혼자서 놀라움을 금치못했던 기억들이 스쳐지나가네요. 온라인에서 몇몇 블로거들의 글들을 접해보긴 했지만 그중에서도 람혼님의 글들과 위에서 로쟈님이 언급한 박가분의 글들은 온라인에서 접할 수 있었던 최상의 만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이런 풍성한 만찬거리를 즐길수 있었던 '소수의 독자'로서 감사한 마음에 한마디 남겨봤습니다. 앞으로도 더 풍성한 사유의 결과물들을 펼쳐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람혼 2011-04-15 00:50   좋아요 0 | URL
yoonta님, 너무 오랜만입니다. 축하의 말씀,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로쟈님 서재를 무단점거(?)하여 저 또한 감사의 말씀을 남깁니다.^^)

안 그래도 제 블로그/서재에도 책 출간에 관해 '저자의 변'을 남길까 하고 있는데요(혹은 위의 댓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일종의 '사유의 악보 읽기 매뉴얼'을 작성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아직 시간이 없어서 남기지 못했는데, 조만간 써서 올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요즘 녹음 작업 때문에 외부와 연락을 끊고 거의 스튜디오에만 박혀 있습니다).

제 글에 대해 항상 좋은 의견과 날카로운 비판의 글 남겨주셨던 yoonta님이시기에, 남겨주신 그 축하의 말씀과 과분한 상찬의 말씀이 제게는 더욱 소중하고 가슴 짠하게 느껴집니다.

말씀해주신 대로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 풍성한 결실 많이 남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의 본령은 희곡이다. 이번에 그의 대표 희곡 가운데 하나인 <적자색 섬>(지만지, 2011)이 번역된 김에, 희곡들만 따로 모은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소설로는 <젊은 의사의 수기. 모르핀>(을유문화사, 2011)도 새로 나와서 같이 주문해두었다. 그의 희곡들만 모아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불가코프 희곡 읽기와 함께 요즘 나의 독서욕을 자극하는 건 브레히트 희곡 읽기인데, 얼마전에 한국브레히트학회에서 엮은 네 권짜리 선집이 나온 때문이다. 20세기 러시아와 독일의 가장 대표적인 극작가들을 한국어로 비로소 만나보는 일도 제법 흥분되는 일이잖은가!.. 아래는 <적자색 섬>의 등장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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