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니만큼 한해를 정리하는 기사들이 나오고 있다. 한국일보에서 올해 출판문화상 수상작 발표기사들을 읽다가 문학결산 좌담기사도 생각이 나 옮겨놓는다. 안 그래도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었는데, '무경향의 경향'이 올 문학계의 특징이었다고 한다.

 

 

한국일보(11. 12. 12) 고립된 채 길 잃은 문학… 지속가능성 있나 고민해야"

 

올 한해 한국문학 베스트셀러의 두 톱은 신경숙씨의 <엄마를 부탁해>와 공지영씨의 <도가니>였다. <엄마를 부탁해>는 미국시장 진출에 힘입어 올해만 40만부 가까이 판매돼 상반기를 주름잡았고 <도가니>는 지난 9월 영화 개봉으로 사회적 신드롬까지 낳으며 40만부 이상 나가 하반기를 석권했다. 하지만 두 작품은 각각 2008년과 2009년 출간된 책으로 엄밀히 말해 올해의 성과로 보기는 어렵다.

2, 3년 전부터 일기 시작한 장편소설 활성화로 올해도 많은 장편소설이 쏟아져 나오긴 했으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문학의 위기'는 오히려 깊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대다수 작품들이 1쇄 판매도 넘지 못한 채 사장되고 1만부만 넘겨도 '대박' 소리를 듣는 처지다. 그나마 김애란씨의 첫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과 정유정씨의 <7년의 밤>이 2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선전하고, 황석영 김훈 최인호 최인석 등의 작가들이 잇따라 신작을 내며 활력을 불어 넣은 것이 성과라면 성과다.

중견 평론가 김영찬씨와 신진 평론가 강동호씨가 올 한해 문학계의 흐름을 두고 대담을 벌였다. 이들은 "2010년대 문학은 미학적 쇄신을 보이지 못하고 현실과의 긴장을 잃으면서 길을 잃은 모습"이라며 "'포스트 IMF 시대'가 끝나며 사회적 환경이 급변하고 있는데, 시대를 읽으려는 작가들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무경향이 경향, 미학적 쇄신 안 보여"
▦강동호= 올 한해 문학의 경향에서 별다른 키워드가 잡히지 않는다는 게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2000년대 문학이라면 1990년대 문학의 반작용으로서 탈내면, 무중력, 환상이라는 키워드가 있었던 데에 반해, 2010년대 들어서는 그런 반작용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어떤 유행이나 흐름이 한 곳으로 모이지 않는다. 이를 긍정 혹은 부정적으로 판단하기에 앞서 지금 작가들이 직면해 있는 문학사적 환경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김영찬= 정말 무경향이 경향이랄까, 집단적 흐름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2000년대 문학은 '포스트 IMF 시대의 문학'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한 시장자본주의의 전면화 속에서 발생한 한국 사회의 집단적 무의식이 그 배경이다. 현실을 변화 가능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즉 현실을 운명적인 것으로 보는 무의식 속에서 나오는 우울과 체념이 근저에 깔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2000년대 문학은 세계의 압력을 견디는 방법론으로서 나름의 미학적 쇄신을 이루어왔다. 그런데 지금은 2000년대 문학이 제 사명을 다한 상황에서, 진전된 모습이나 의미있는 미학적 쇄신이 잘 보이지 않는다. 원인을 생각하면 이전까지 존재해 왔던 현실과의 긴장 자체를 어느 순간 놓아 버리지 않았나 하는 판단이다.

▦강= 문학사적 맥락에서 이전 세대와 긴장을 빚거나, 아니면 당대성을 띠면서 현실에 맞서는 과정에서 긴장이 나올 텐데 지금은 둘 다 회의적이다. 장르문학과 접속하는 경향 역시 한국문학의 영역을 확장하고 본격문학의 엄숙함을 타개하기 위한 시도로서 산뜻하고 신선한 면이 있지만, 생각보다 주제의식이 깊지는 않다. 재기 발랄하긴 하지만, 아직은 소재적인 수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가 우려도 된다.

▦김= 장르적 기법을 활용한 모범적 사례가 박민규 작가다. 장르적 기법을 활용할 경우 필연적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다른 작가들에게도 그런 게 있는지 의문이다. 기법적 실험이 중요하지만, 그게 왜 지금 이뤄져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좀더 성숙해져야 한다고 본다.

"장편소설 활성화했지만 세계 인식 빈약"
▦강= 문학이 전반적으로 침체돼 있지만 장편소설은 예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고 있다. 2, 3년 전부터 인터넷서점이나 인터넷 카페, 웹진, 문예지 등이 장편을 연재하면서 장편소설 붐을 조성하고 있는데, 늘어난 양만큼 독자들이 즐거운 체험을 했는지 회의적이다. 사실 장편은 독자를 확 묶어주는 공통의 이야기 체험인데, 지금은 영화나 드라마가 담당하고 있다. 지금 소설이란 장르가 근대문학이 했던 그런 역할을 다시 할 수 있을까.

▦김= 한국 문학이 단편 중심으로 굴러온 것은 단편을 주로 싣는 문예지 시스템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문단 제도가 문학의 가능성을 옥죄어온 면이 있는데, 독자로부터 고립되고 문단 안에서만 통용되는 문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편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 독자와 소통하기 적합한 장르가 장편이다. 특히 지금은 '포스트 IMF 시대'가 끝나면서 대중의 현실감각이 크게 변하고 있는데 '공감'과 '연대'가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장편을 원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작가들이 이런 요구를 절실히 느껴 작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장편을 써야 한다는 요구에 단순히 끌려가는 형국이다. 그러다 보니 길을 잃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강= 개인적 경험에 비춰 보면, '포스트 IMF 시대'에 등단한 젊은 작가들은 시대에 대한 인식 자체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장편은 단순히 이야기가 길어지는 게 아니라, 세계에 대한 구조를 완성해야 하는 장르다. 그래야 인물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소설은 이런 점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건 작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적 체험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나만 해도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어떤 세계와 싸워야하는지 잘 잡히지 않았다. 당면하고 대결해야 할 세계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바 없기에, 장편적 세계관을 구성하기가 어려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장편소설 응모작 중 상당수가 루저나 백수들의 즉물적이고 자족적인 이야기들인 것도 그런 징후로 받아들일 수 있다.

 



"어떤 역할 할지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김= 올해 베스트셀러를 살펴보면, 독자들과 시대적으로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엄마를 부탁해> <도가니> <두근두근 내 인생> 은 독자들이 처한 상황을 환기시키면서 감정적 연대를 불러일으킨다.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를 통해 무한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 돌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죄의식을 건드린다. <도가니>도 교육계 사법계 등 부패한 현실 권력을 고발하며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두근두근 내 인생>은 조로증 아이를 통해서 미래가 막힌 젊은 세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불안과 위기감, 죄의식 등 시대적 정서와 함께 호흡하며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독자들이 위로를 얻은 것도 이 대목에서다.

 

 

중견 작가들의 선전도 봐야 하는데 최인석의 <연애, 하는 날>은 정통적 소설 문법을 가지고도 독자들과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또 하나의 성과는 정유정의 <7년의 밤>이다. 범죄 서스펜스 장르물인데, 무엇보다 재미있고 디테일이 살아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장르소설이 마니아층만 즐기는 상황에서 대중 독자를 많이 확보, 이 시장의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점에서 뜻 깊다. 스티븐 킹 같은 수준 높은 장르작가의 작품을 '중간 소설'이라 부르는데, 중간 소설층이 두텁게 형성돼야 본격문학도 발전한다. 축구에서 미드필드가 승패를 좌우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재미있는 것은 기존 본격문학 작가들이 <7년의 밤>을 철저히 무시한다는 점이다.

▦강= <7년의 밤>은 우리 문단의 분열증적인 상태를 직면하게 해주는 타자다. 이를 중간 영역에 새로운 문학적 양식들이 포진할 수 있는 하나의 시발점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김= 대다수 작품들은 5,000부 판매도 힘든 상황이다. 독자와의 괴리가 커지고 있는 반면 스타 시스템은 심화하고 있다. 고립을 자초하고 문단 제도에 안주했던 문학이 지속 가능한 것인지 심각하게 물어 봐야 하는 시점이 아닐까. 이 가운데서도 '앵그리 영 제너레이션이'라 할 수 있는 작가들, 예컨대 김사과 김이설 안보윤 최진영 같은 이들의 소설은 추상적인 세계에 갇힌 한국소설을 현실로 끌어내리려는 시도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연수 권여선 박민규 김애란 등의 이후 작업도 눈 여겨 봐야 한다. 한국소설의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강= 다소 비관적으로 돌아봤지만 한국문학이 정체돼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 미적 쇄신이나 실험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과돼 왔던 세계에 대한 사유를 밀도 있게 개진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 최근 주목 받는 김성중 박솔뫼 정용준 등의 작품에서 그런 희망의 기미를 확인할 수 있다.

11.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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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북리뷰를 훑어보다가 지난달에 미처 챙기지 못한 기사를 뒤늦게 옮겨놓는다. 한국의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다룬 두 권의 책을 다룬 기사다. 자본주의 비판서와 마르크스주의 설명서가 이주의 책들인 걸 고려하면 요즘의 한 트렌드가 보인다. 지주형의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책세상, 2011)과 문지영의 <지배와 저항 - 한국 자유주의의 두 얼굴>(후마니타스, 2011)도 그런 배경하에서 같이 읽어봄직하다.

 

한겨레(11. 11. 30) 한국판 신자유주의·자유주의의 두 얼굴

 

‘자유주의’가 새삼스럽게 화두다. 역사교과서를 두고서는 ‘자유주의’가 앞에 붙은 자유민주주의가 민주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따져봐야 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두고서는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흘러오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특히 ‘서구로부터 이식된 것’이라는 피상적인 인식을 넘어, 그것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자리잡았는지 적극적으로 풀이해내는 것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때마침 신자유주의와 자유주의라는 개념의 ‘한국적 맥락’을 파헤친 책이 각각 나왔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지주형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가 최근 써낸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책세상 펴냄)은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 정착한 과정을 총체적으로 추적해 정리한 책이다.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는 ‘달러-월스트리트’ 체제와 국제통화기금(IMF)과 같은 지배 블록 등으로 뒷받침되며, ‘금융화’를 그 핵심으로 삼는다고 알려져 있다. 지은이는 이런 밑그림에다 ‘위기 관리의 과두적 지배’라는 한국적 맥락을 연결시켰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이미 1970년대 말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도했던 엘리트 관료들이 있었고, 이들이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정책을 펼치게 됐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한국의 지배적인 자본축적 전략이었던 ‘개발국가’ 모델이 그 생명력을 다해가는 과정에서, 소수의 관료가 주축이 되어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1979년 ‘경제안정화 시책’ 등에서 볼 수 있듯, 당시 강경식 경제기획부 기획차관보, 김재익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김기환 경제기획원 장관 보좌역 등은 물가안정 및 시장개발을 중심에 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구했다. 당시 여러가지 이유로 좌절된 그들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민주화 뒤 ‘전문 관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서서히 부활했고,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주도권을 쥐게 됐다고 한다. 강경식씨는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으로 복귀했고, 김기환씨는 대외경제협력담당 특별대사로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에 핵심적 구실을 했다.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낸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오늘날 ‘한-미 자유무역협정’에까지 이르고 있다.

지은이는 “한국 경제의 모습을 현재와 같이 만들고,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를 심화하고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방해하는 각종 자유무역협정과 동북아 금융허브 정책을 추진한 것은 바로 이들 소수 권위체의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결정과 행위”라고 비판한다.

곧 개발국가의 한계를 넘어서는 대목에서 관료-재벌-초국적 자본으로 이뤄진 ‘과두 권력’이 신자유주의라는 카드만을 내밀고 관철시켰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경제적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독과점 폐지와 민주주의의 확대”라고 강조한다. 현재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 반대 집회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로 봐야 한다는 관점이다.

 



문지영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이 쓴 <지배와 저항-한국 자유주의의 두 얼굴>(후마니타스 펴냄)은 자유주의의 한국적 맥락을 밝힌 책이다. 지은이는 그동안 자유주의를 ‘부르주아 계급 이념’ 정도로만 치부했던 경향을 비판하며, 한국 자유주의에는 ‘지배와 저항’ 양면적 성격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지배층의 공식적인 지배 이념이기도 했지만, 이에 대항하는 ‘저항적 자유주의’로 발전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개화기 때부터 근대국가 수립 등을 목표로 투쟁했던 지식인들의 주체적인 노력들 속에서 한국 자유주의의 흐름을 꿰어본 지은이는 “자유와 권리에 대한 사유가 개인보다는 민족·민중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국가를 중시하고 안보의 가치에 민감한 것 등 서구 자유주의와 구분되는 한국적 자유주의의 특징이 있다”고 정리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정치적 자유주의’와 함께 복지·분배 정의를 요구하는 ‘경제적 민주주의’가 나란히 설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이런 분석에 따르면, 정치적 자유주의를 극단적으로 배제하고 경제적 자유주의만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는 한국적 자유주의의 흐름과 성과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거부하는, ‘맞지 않는 이념’이 된다. “단순한 경제적 자유주의나 서구적 개인주의는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강화가 아니라 변질 내지는 퇴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저항적 자유주의를 반공주의에 기댄 지배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로부터 분리시키고, 앞으로 더욱 발전시켜가야 한다고 주장했다.(최원형 기자)

 

11. 12. 16.

 

P.S. 신자유주의에 대해선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과 같은 글로벌정치경제(GPE) 시리즈로 나온 장석준의 <신자유주의의 탄생>(책세상, 2011)도 읽을 거리다. 데이비드 하비의 <신자유주의>(한울, 2010)은 신자유주의의 간략한 역사를 다루며, <신자유주의 이후의 한국경제>(시대의창, 2009)는 '절망으로 가는 한국경제'에 대한 진단과 전망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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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01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세계 인구` 문제를 주제로 다뤘다. 2011년 세계인구가 70억을 톨파한 해로도 기억되기에 마지막 달력을 넘기며 이 `유례없는 시대`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봄직하다.

 

 

 

책&(11년 12월호) 지구는 늙어 가는가?

 

2011년도 ‘마지막 잎새’ 같은 달력 한 장만을 남겨놓고 있다. 2011년이 갖는 여러 가지 의의가 있겠지만 인구학자들에겐 단연 세계인구 70억을 돌파한 해로 기억됨직하다. 하지만 ‘70억’이 비단 인구학자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수치는 아닐 것이다. 200년 전인 1800년에서 지금까지 세계인구가 약 10억에서 70억으로 늘어났다고 하면 ‘세계인구’ 문제에도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의 발단과 성격, 그리고 전망에 대해 알아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이해도 한 뼘쯤 늘어날 것이다.


이탈리아의 인구학자 마시모 리비-바치의 <세계인구의 역사>(해남)는 ‘간략한 역사’다. 하지만 전문학자의 책답게 인구문제에 대한 이론적‧통계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가령 “오늘날의 인구는 어째서 60억 명이 된 것일까? 왜 1,000억이나 1억 명이 되지 않았는가?”라는 게 그가 묻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이유는 인구증가 경로의 방향이 다양한 원동력과 장애물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들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두 가지 전략을 구분하는데, 곤충과 어류 및 작은 포유류는 불안정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다산(多産) 전략을 취한다. “생명은 복권과 같은 것이고 따라서 복권을 많이 사는 게 의미가 있다”는 게 이러한 전략의 모토다. 반면에 중간 크기 이상의 포유류나 몇몇 조류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서식한다. 생존경쟁을 향한 압력 때문에 새끼를 기르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하고, 이런 투자는 새끼의 수가 적을 때 가능하다. 즉 생존가능성이 높을 경우에는 출산에 승부를 거는 것이 아니라 보호와 양육에 초점을 맞춘다. 인간이란 생물종의 기본전략도 마찬가지다. 원론적으로 인구의 잠재적 증가는 한 여성당 출산의 수, 그리고 출산시의 기대수명이라는 두 가지 변수에 의해 결정된다.


‘라루스 세계지식사전’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카트린 롤레의 <세계의 인구>(현실문화)는 좀더 쉽게 세계인구 문제의 전체적인 윤곽을 잡아준다. 저자에 따르면 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이후로 인구가 갑자기 증가한 시기는 이전에도 몇 차례 있었다. 따라서 위생관념의 발달만으로는 급속한 인구증가를 해명할 수 없다. 또한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한 과도기가 지나면 한동안 안정기를 맞게 된다는 사실도 인구사는 말해준다. 하지만 그 안정기에 도달할 때까지 세계인구는 100억-110억에 이를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전망이다. ‘인구혁명’이란 말까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무엇이 인구 변천을 가져오는가. 인구의 이동은 아니다. 지구인이 다른 행성으로 이주해가지 않는 이상 세계인구의 변화는 출생률과 사망률에 달려 있다. 특히 중요한 요인은 사망률이다. 18세기 인구의 평균수명은 25세였고 오늘날은 67세이다. 18세기에는 25세 이전에 모두 죽었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당시에는 영아사망률이 높아서 인구의 절반 이상이 20세가 되기 전에 사망했다. 영유아 사망률이 본격적으로 감소한 것은 예방접종을 실시하면서부터인데, 200년 전에는 1세 이하의 여아 다섯 명 가운데 하나 꼴로 목숨을 잃었지만 지금은 1,000명에 3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듯 영아 생존율이 낮아지면서, 그리고 피임법이 발달하면서 선진국에서는 출산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게 됐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가난한 후진국, 특히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이남에서 출생률이 높은 것은 에이즈의 확산으로 영아사망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우리는 체감하기 어렵지만 에이즈는 세계인구 전망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변수 가운데 하나다.


20세기 들어서 세계인구 변화와 관련하여 가장 두드러진 추세는 도시화와 고령화이다. 현재 세계인구의 절반가량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으며 2050년에는 10명 중 7명이 도시에 살게 될 전망이고, 인구증가율이 높은 지역 또한 모두 도시권이 될 것이다. 급속하게 진행중인 고령화는 도시화 이상으로 세계의 모습을 바꿔놓고 있는데 ‘고령화, 쇼크인가 축복인가’란 부제를 달고 있는 테드 피시먼의 <회색쇼크>(반비)는 이 문제에 대한 종합보고서이다. 세계 각지의 고령화 현장에 대한 르포와 인터뷰를 전하면서 고령화와 관련한 여러 가지 지식과 정보를 간추려준다. 그에 따르면 고령화는 도시화와 무관하지 않다. 현대화된 도시가 인간의 수명을 늘린 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농촌에서는 누릴 수 없는 서비스를 도시에서는 가난한 사람도 누릴 수 있다는 게 이유다.

 

장수의 요건에 관한 지적이 흥미로운데, 그것은 20세기 이후에 태어나는 것과 가능하다면 부유한 선진국에서 태어나는 것, 두 가지다. “이것에 필적할 만한 다른 요인은 전혀 없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20세기 중반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한 현대의학이 인간의 기대수명을 늘리는 데 공헌했고 선진국은 포괄적인 공중보건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서이다. 덧붙여 과거에 비해 훨씬 많은 의학정보를 접할 수 있게끔 했기 때문에 문자해독율의 상승은 가장 중요한 생명연장 요인 중 하나다. 경제발전 수준과 공중보건 인프라만큼 중요한 요인이 교육이기 때문에 낙후된 지역에 대한 교육지원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음미해볼 만하다.

 

11.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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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매경이코노미(1636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마르틴 부르크하르트의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알마, 2011)를 거리로 삼았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손에 들었지만 의외의 재미를 안겨준 유익한 책이다. 원제는 '위대한 사상의 사소한 역사'이고, '위대한 생각들의 소사전' 정도로 규모에 맞는 제목이다. 독립적인 항목들이 연대기적으로 배열돼 있는데, 쓰다 보니 첫 항목인 'A. B. C. D.' 소개에 그치고 말았다. 그래도 어떤 용도의 책인지는 말해줄 듯싶다.

 

 

 

매경이코노미(11. 12. 21)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꼭 필요한 나만의 철학

 

철학은 어떤 쓸모가 있을까? 프랑스 인기 만화 ‘아스테릭스와 오벨릭스’의 주인공 오벨릭스는 철학이라면 코웃음을 치는 캐릭터다. 로마군과 싸우는 갈리아족의 덩치 큰 장사인 그의 관심사는 맛있는 것 아니면 로마군에게 던질 바위 따위다. 한데 어느 날 연극 무대에 서게 됐다.

 


관객이 놀랄 만한 메시지를 던져보라는 감독 주문에 오벨릭스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생각나는 건 이 한마디뿐이었다. “로마, 이 허튼 개자식들아!” 이것이 말하자면 오벨릭스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고 그의 ‘철학’이다. 보통 사람들이 저마다 갖고 있는 ‘개똥철학’이다. 사실 평소라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요즘 같은 연말에 오벨릭스처럼 갑자기 조명을 받는 자리에 서게 돼 뭔가 의미 있는 말을 해야 한다면, 이마에서 진땀이 흐르고 입술이 바짝 마를 지경이라면 어떨까.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의 저자 마르틴 부르크하르트는 철학이 바로 그럴 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책은 딱 그런 도움을 주기 위한 용도로 읽힌다. 가볍지만은 않은 성찰을 담고 있으면서도 재미있고 유쾌하다. ‘위대한 사상의 사소한 역사’라는 원제가 비밀을 암시해주는 듯싶은데, 저자는 일단 사상가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접어두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위대한 사상’들은 사정이 좀 다르다. 저작권자가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어도 우리 인생을 좌우하는 사상들의 목록을 떠올려볼 수 있다. 그것을 저자는 ‘위대한 사상’이라 부른다. 이 사상들의 ‘사소한 역사’가 비록 ‘쓸모 있는 물건’들과 경쟁이 되진 않겠지만 ‘정신’과 ‘생각’이란 것이 얼마나 괜찮은 것인지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은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기대다.

위대한 사상에 대한 저자의 독창적인 ‘연대기’는 알파벳에서 시작한다. 알파벳이란 말 자체가 첫 두 글자인 알파(α)와 베타(β)에 따라 지어진 점에서 알 수 있듯 알파벳이란 사상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알파벳만큼 인류에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없다. 외계인이 인간에게 선물했다는 설도 있지만 저자가 밝혀주는 ‘사소한 역사’에 따르면, 알파벳의 A는 거꾸로 세워보면 알 수 있듯이 멍에를 쓰고 있는 황소를 그린 글자다. 그리고 B는 여성의 젖가슴을 모방한 글자다. C에 해당하는 감마(γ)는 남성과 여성의 결합, 곧 결혼(가미, Gamie)을 뜻한다. ‘기초’를 뜻하는 ABC는 곧 가정을 꾸미고픈 희망을 나타내는 말이 된다.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8세기경에 알파벳이 널리 퍼졌는데, 그리스인들에게 알파벳 배우기 운동은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화 운동이었다. 24개의 알파벳으로 모든 것을 읽고 쓸 수 있게 됐기에 학식은 더 이상 부유층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었다. 더 나아가 알파벳은 그리스의 자연철학도 가능하게 했다. 몇 개의 철자가 모여 단어를 이루는 것처럼 자연도 더 근본이 되는 요소들로 이뤄져 있다고 보게 된 것이다.

알파벳 원리를 자연에도 적용한 것인데 이것이 말하자면 ‘알파벳의 사상’이다. 서양철학의 기원이 그리스 자연철학에서 비롯됐다면 알파벳은 그런 기원을 가능하게 한 ‘기원의 기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도 알파벳은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 법이 성문화되면서 독재자라도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없게 됐다. 비록 소크라테스 같은 경우는 철자를 맹신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그런 경고조차도 알파벳의 위력을 보여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말도 문장으로 기록되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철자로 고정된 기록으로서 철학은 영원이라는 환상마저 일깨워준다.

대략 이런 것이 알파벳의 ‘사소한 역사’다. ‘동전’과 ‘하느님 아버지’로 이어지는 저자의 성찰 목록이 30여가지의 주제를 탐색한 끝에 의도적으로 ‘DNA’를 마지막에 다루는 것은 ‘ABC(알파벳)’와 절묘한 상응을 이룬다. 저자는 DNA 또한 일종의 사상이며 ‘믿음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이 허튼 개자식들아!”에서 좀 벗어나고픈 독자들의 상상을 한껏 활성화해준다.

 

11.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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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2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2 2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는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를 주제로 장기 강의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시즌1'은 '네트워크와 칵테일로서의 한국 문학사'란 제목으로 다섯 차례의 강의가 준비돼 있는데, 지난 28일 1강이 시작됐고 나도 마지막 주에 한 꼭지를 맡아 참여한다.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바라보는 한국문학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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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11. 11. 30) '민족문학'의 궤도로 서술돼 온 문학사… 억압되거나 저평가된 작품은 없었나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되풀이 교육되는 한국 근현대 문학사는 김현, 김윤식, 조동일 등 4ㆍ19 세대가 정립한 문학사다. 이를 테면 1900년대 애국 계몽의 신소설, 1910년대 이광수와 최남선의 계몽주의를 거쳐 20년대는 동인지를 중심으로 낭만주의 자연주의 상징주의 등 여러 사조가 나오다 20년대 후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등장한다는 식. 해방 이후 50년대는 전쟁 체험에 가위 눌린 실존주의, 60년대는 소시민적 감각, 70, 80년대는 민중적 계급적 지향, 90년대는 개인화 경향 등으로 시대별 특징을 꼽고 각 시기 대표 작품을 정전화한다. 이런 문학사 서술 밑엔 민족의식이 시대적 역경 속에서 꾸준히 발전해왔다는 '자생적 근대화론'이 깔려 있다.

하지만 한국 문학이 민족문학이란 하나의 이름 아래서 필연적 궤도를 밟아 진화해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까. 이 서술 속에서 배제되고 억압되거나 저평가된 작가나 작품은 없을까. 이는 4ㆍ19 세대의 문학사를 극복하려는 소장 학자들이 지난 10여년간 끊임없이 던져 온 질문이다.

푸른역사아카데미가 소장 학자들의 이런 문제 제기를 망라한 한국 근현대 문학사 연속 강좌를 마련했다. 28일 첫 강의를 시작으로 매주 월요일 총 25회 진행되는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다. 권보드래 천정환 권명아 이혜령 소영현 정여울 이현우 임태훈 등 문학계 신진 학자들이 강사로 참여했다. 강좌를 기획한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는 "1990년대 이후 탈 담론의 영향 아래서 문학을 풍속론이나 문화사적으로 접근하는 등 문학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이 지속돼 왔지만, 산발적으로 진행됐던 것도 사실이다"며 "그간의 연구 성과를 한자리에 모아서 새로운 문학과 문학사의 가능성을 탐색하자는 취지다"고 말했다.

28일 오후 서울 필운동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열린 첫 강의에서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과 교수는 새로운 문학사 서술의 문제의식 전반을 짚었다. 그는 기존 문학사 서술에서 1910년대 번안소설에서 시작된 대중소설의 계보, 즉 최독견 김말봉 정비석 최인호 등은 무시되곤 했고, 식민지 시대 한문학이 활발하게 창작 유통되고 고전 소설이 최고의 판매부수를 올린 사실은 외면됐다고 지적했다. 일제 말기의 일본어 작품이나 시ㆍ소설ㆍ희곡 이외의 다양한 글쓰기 역시 배제돼왔다.

권 교수는 특히 1905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개화기 소설 '소경과 앉은뱅이의 문답'이 정말 기존 문학사 서술처럼 애국 의식을 고취시키는 민족주의 텍스트인지, 20년대 초 낭만주의 사조 또는 데카당스(퇴폐주의)가 정말 3ㆍ1운동 실패에 따른 좌절감의 소산인지 등 다양한 물음을 던지며 기존 문학사의 이면을 탐색했다. 그는 "1920년대 초 장발을 한 문학 청년들이 함께 몰려다니며 거나한 술판을 벌이는 낭만적 분위기는 10년대 조선인들의 자족적 성공 모델인 중절모의 '신사'를 거부하려는 의지로 봐야 한다"며 "현실 부정의 퇴폐적 세계로 함몰됐다기보다는 오히려 3ㆍ1운동을 통해서 세계와 맞장을 뜰 수 있다는 의식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4ㆍ19 세대의 문학론ㆍ역사론에 대해 문제제기가 많았으나 그에 비길 만한 문학사와 대안적 역사인식은 나오지 않은 상황"이라며 새로운 문학사 서술이 진행형의 과제임을 강조했다.

이어지는 강좌에서 권명아 동아대 교수는 1990년대 장정일 작가의 작품을 중심으로 '풍기문란의 문학사'를 돌아본다. 또 인터넷 필명 '로쟈'로 잘 알려진 이현우 한림대 연구교수는 지젝이란 프리즘으로 1990년대 한국문학을 탐색하는 등 다양한 담론으로 문학사를 가로지르고 '한국문학사의 저주받은 걸작'이란 이름으로 구체적인 작품도 재발견한다는 계획이다. 문의 070-7539-4822. www.bluehistory.net (송용창기자)

 

11. 12. 11.

 

 

P.S. '지젝이라는 프리즘으로 본 1990년대 한국문학'이란 주제는 주최측의 제안에 따른 것인데,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와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을 다시 읽어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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