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러시아 인터넷서점을 둘러보다가 지난주에 나온 아감벤의 책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새물결, 2012) 러시아본이 출간됐기에 주문했다. '호모 사케르 시리즈'로는 <호모 사케르>, <예외상태>에 이어 세번째로 나온 책이다. 우리와 번역되는 속도가 비슷하다고 할까.
아감벤의 책과 함께 폴 리쾨르의 책 러시아어본도 두 권 주문했는데, 그중 하나는 주저인 <해석의 갈등>이다. 원래 갖고 있던 책이 오래전에 나온 발췌본이어서 이번에는 완역본으로 구비해놓으려는 생각에서다. 계기는 물론 지난주에 개정판이 나온 <해석의 갈등>(한길사, 2012)이다. 아카넷에서 나왔던 것이 이번에 출판사를 옮겨 출간됐다. 원래는 '대우학술총서' 500권째 책이어서 기념적인 의미가 있는 타이틀인데 다른 곳으로 옮겨갔으니 '대우학술총서'는 이제 사업을 접는 모양이다.
지난 2005년에 리쾨르 전공자인 윤성우 교수의 해설서 <해석의 갈등>(살림)이 출간된 걸 계기로 몇마디 적은 게 있는데, 이제 보니 그해에 리쾨르가 세상을 떠났다. 상기하는 의미에서 그때 적은 걸 다시 발췌해 읽어본다.
올해(2005년) 타계한 철학계의 최고 거물이 폴 리쾨르(1913-2005)인바, 해석학의 권위자로서 그의 주저라 할 만한 <해석의 갈등>(아카넷, 2001)의 해설서가 출간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해석의 갈등'은 '해석들 사이의 갈등과 충돌'이란 뜻이다). 리쾨르 전공자인 저자는 리쾨르의 삶과 <해석의 갈등> 전후 시기의 철학을 정리줌으로써 리쾨르 입문서를 겸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리쾨르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의 제자이기도 한 프랑수아 도스의 <폴 리쾨르>(동문선, 2005)를 참조할 수 있다. 윤교수에 따르면, "번역상의 몇몇 혼란이 옥의 티로 남았지만 리쾨르의 자전적 삶과 학문적 삶에 대한 연구서로는 더 이상의 책은 기대하지 않아도 좋을" 책이다. 이와 함께 읽어볼 만한 입문서로는 윤교수의 <폴 리쾨르의 철학>(철학과현실사, 2004)가 있다고.
도스의 <폴 리쾨르> 이후에 출간된 책으론 리쾨르 자신의 <타자로서 자기 자신>(동문선, 2006)과 칼 심스의 리쾨르 소개서 <해석의 영혼 폴 리쾨르>(앨피, 2009)가 있다. 나는 이렇게 더 적었다.
리쾨르의 <해석의 갈등>(1969)은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1960)과 함께 현대 해석학의 최고 업적으로 간주되는 고전이다(비록 논문집이긴 하지만). 이럴 때마다 아쉬운 건 <진리와 방법>이 아직 우리말로 완역되지 않은 사실이다(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거지만, <진리와 방법>의 불어본 출간을 주도한 사람이 리쾨르이다. 불역본도 완역본은1996년에야 나왔다고 하니까 한국어본이 지체되는 건 얼마간 이해가능하다. 참고로, 영역본은 두 차례 나왔다). 거기에 비하면 10권 가까이 번역돼 있는 리쾨르의 경우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교수의 번역 용례에 따라) <생생한 은유>나 마지막 주저 <기억, 역사, 망각>(2000) 등은 곧 번역되었으면 싶다. <기억, 역사, 망각>의 러시아어 완역본은 2004년에 출간됐다.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1>(문학동네, 2000)은 10년 넘게 후속편이 나오지 않은 책이다. 대략 2/3 가량이 더 남아 있는 상태인데, 다행히 문학동네의 '인문 라이브러리' 시리즈의 근간으로 <진리와 방법2>가 예고돼 있다. 어쩌면 올해 안에 <진리와 방법>도 완역본의 출현을 보게 될지 모르겠다. 가다머만을 다룬 소개서도 빈곤한 편인데, 카이 하머마이스터의 <한스-게오르그 가다머>(한양대출판부, 2001)와 조지아 원키의 <가다머>(민음사, 1999) 정도다. 전자는 상당히 얇은 책이다. 내가 덧붙였던 여담 한마디.
작년에(2004년) 타계한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는 1960년대 초반 소르본 대학 철학과에서 리쾨르의 강의 조교를 했었다(윤성우 교수의 책에는 데리다의 생년이 1925년으로 잘못 표기돼 있다). "리쾨르보다 일 년 먼저 세상을 떠난 데리다는 고등사범학교 학생이던 1953년에 <에스프리>지가 주관하던 세미나에서 리쾨르를 처음 만났다. 데리다의 회고에 따르면, 이 세미나에서 '역사와 진실'이라는 주제로 리쾨르의 발표가 있었는데, '명확하고 우아하고 논증력이 있고 권위적이지 않으면서도 권위가 있었으며,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사유의 참여를 보여주는' 발표였다고 한다."(69쪽) 데리다의 '제자' 박이문 선생의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미다스북스, 2005)에는 이 시절 '강의조교' 데리다의 지도를 받던 시절의 에피소드가 '나의 스승 데리다'란 추모의 글에 실려 있다. 영어권에서 나온 연구서들 가운데는 두 사람의 철학을 비교한 <상상력과 우연: 리쾨르와 데리다 철학 간의 차이>(1992)도 출간돼 있다.
리쾨르의 주저 가운데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은 책으로 <생생한 은유>라고 적은 <살아있는 은유>(영역본 제목은 <은유의 규칙>)와 <기억, 역사, 망각> 등이 있다. 물론 리쾨르는 다작인 편이어서 많이 소개된 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소개되지 않은 책들이 많다. 초기 저작인 <프로이트와 철학> 같은 경우도 그렇다. 비록 라캉에게선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는 책이지만.
제목에서 세 사람을 함께 적으니 아감벤과 리쾨르/가다머 사이가 좀 멀어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아감벤 또한 하이데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철학자니까 하이데거의 수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다머와 어색한 관계는 아니다. 특히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코나투스, 2008)은 아감벤식 해석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 책은 빈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 야콥 타우베스(1923-1987)의 <바울의 정치신학>(그린비, 2012)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마침 지난주에 나온 책이다. 리쾨르의 성서해석학에 대해선 <악의 상징>(문학과지성사) 같은 책도 있지만 앙드레 라콕과의 공저 <성서의 새로운 이해>(살림, 2006)를 참고할 수 있다...
12. 02. 19.
P.S. 아래가 러시아어판 <해석의 갈등> 표지다. 러시아어로는 '폴 리쿄르'라고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