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주문한 책 가운데 하나는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의 <2013년 이후>(백산서당, 2012)이다. 이전에 그의 칼럼을 몇 차례 옮겨온 바 있어서 관심은 갖고 있었지만 책을 읽은 적은 없다. 인터뷰기사에서 "한국 진보가 2,000만 취약계층의 희망이 되어 집권을 넘보려면 그 고용노동 비전은 '정리해고ㆍ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아니라 '정리해고가 있어도 비정규직이어도 그런 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눈길이 가서 '아주 후진' 책 모양새에도 불구하고 읽어보기로 했다(정책자료집이나 쓰일 법한 표지다. '사회디자인'과 '책디자인'은 무관한 것인가). '문제는 일자리와 공평이다'가 저자의 핵심주장이다.

 

 

한국일보(12. 01. 07) "진보가 2000만 취약계층 희망되려면 비정규직이어도 살만한 세상 만들어야"

 

'좌충우돌'이라는 말이 어울릴 거 같다. 5년여 전 공공정책컨설팅 회사로 출범했다가 사단법인으로 바뀌어 사회정책 싱크탱크가 된 사회디자인연구소의 김대호(49) 소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신간 <2013년 이후>(백산서당 발행)에서 올해 총선, 대선이 위기에 처한 한국사회를 구할 전기라며 보수는 물론 진보를 향해 마치 기관총 속사라도 하듯 비판을 쏟아 붓는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으로 감옥살이까지 했던 그는 전형적인 '운동권 386세대'다. 1990년대 중반 '공생공영'을 기치로 내걸고 대우그룹이 '386세대'를 대거 입사시켰을 때 서울 구로공단에서 벌이던 노동상담 활동을 접고 대우 행을 택했지만, 시대정신의 세례를 받은 그의 영혼까지 다락에 올려놓지는 못했다. 거칠게 말해 '한국사회 개조론'을 담은 책을 이미 서너 권 냈다. 보수에 대한 쓴소리 못지않게 지난해만도 '희망버스' 비판 등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한국의 진보와 보수는 '실체조차 의심스러운 마녀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마녀사냥을 획책하고 있'으며 그 '마녀의 이름은 보수에게는 좌파정권과 친북좌파이고, 진보에게는 신자유주의와 한미 FTA'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새 책 이야기를 6일 들었다.

 



-보수가, 진보가 뭐가 문제인가.

"보수와 진보, 그리고 관료집단에 의해 한국사회의 '공공'이 뒤틀려 있다는 게 문제다. 공공은 '정의' '원칙' '상식'과 동의어인데, 이런 것들이 뒤틀려 있다. 한국 사회의 모순은 진보가 말하듯 시장 논리 과잉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된 시장 원리가 통하지 않아서 잘못된 곳이 대단히 많다. 보수든 진보든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 원리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산업생태계가 대단히 피폐해 있다. 한국의 IT계를 두고 안철수가 '삼성ㆍLG동물원'이라고 한 것처럼 대기업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시장 구조, 고용ㆍ임금체계가 노동의 양과 질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수익성과 조직력에 비례하는 것이 문제다. 스웨덴은 볼보자동차 직원과 하청업체의 처우 수준이 비슷하다. 우리 진보에 이런 개념이 있는가. 한국의 진보는 양극화를 더욱 심화한다. 보수의 그늘 못지않게 진보의 그늘도 크다."

-진보가 집권하면 문제가 해결 될까.

"진보의 한국 사회 진단의 핵심은 신자유주의의 과도한 수용이라는 한심한 것이다. 시장 원리를 시장을 통해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 짓이기는 게 한국 사회다. 공정한 경쟁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뒤집어 엎는다. 이런 상태로 진보가 집권하면 1년도 안 돼 '박살'이 날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위기 상황이다. 보수도 진보도 혁신 경쟁을 해야 하고 환골탈태 해야 한다. 진보는 특히 반대만을 비전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는 책에서 한국 사회의 물질적 재생산구조의 핵심을 '고단한 산업구조'와 '양반ㆍ상놈으로 나누어진 고용구조'라며 이것이 '양극화ㆍ민생불안, 절망과 불신 등을 확대재생산하는 핵심구조'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정리해고ㆍ비정규직 없는 세상'이라는 비전을 타도해야 할 '지적 앙시앵 레짐'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한국 진보가 2,000만 취약계층의 희망이 되어 집권을 넘보려면 그 고용노동 비전은 '정리해고ㆍ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아니라 '정리해고가 있어도 비정규직이어도 그런 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복지 논쟁이 뜨겁다.

"보편ㆍ선별주의라는 이슈가 한심할 따름이다. 복지 정책은 (복지의)두께, 대상, 프로그램의 우선 순위 등 3가지 차원이 있다. 보편ㆍ선별 논쟁은 대상의 문제이다. 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거의 대다수가 10년 안에 국민총생산(GDP)의 20%를 복지에 지출하자고 한다. 이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이다. 하지만 한국은 연금을 안 부은 노인들과 기타 사각지대도 적지 않다. 여기서 뭉텅이로 예산이 떨어져 나가고 나면 보편주의를 하더라도 OECD 평균보다 적은 돈으로 복지시스템을 돌려야 한다. 고용률이나 임금근로자 비율이 낮고 자영업자가 많은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는 그러면 (복지의)두께가 얇아질 수밖에 없다. 두께, 대상, 프로그램 우선순위의 문제를 종합해서 어떤 것은 보편주의, 어떤 것은 두꺼운 선별주의 하는 식으로 다양하게 조정해야 한다."

-'2013 체제'는 무엇인가.

"민주화의 열망이 녹아 형성된 '87 체제'라는 지금까지 가치의 총체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남북관계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겠지만 중요한 것은 강하고 유능한 정치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헌법과 선거법 개정이 필요하다. 5년 대통령 단임제, 소선거구제는 독재 방지를 위해 정치를 무능하게 만들어 놓은 모양새다. 그래서 연임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바꾸고, 국회의원을 500명으로 늘려 정치가 관료 집단을 끌어나가야 한다." (김범수기자)

 

12. 01. 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진 책들'이란 카테고리를 만들어놓고 곧 후회했다. 아니 난감했다. 가끔씩 실종된다면 모르겠지만, 이건 부지기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책도 절판이군', '이 책도 사라졌네', '이것도 곧 절판되겠구만', 속으로 중얼거린다. 가끔씩 쓸 거리가 생기는 게 아니라 매일같이 '청원'에 시달려야 한다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온갖 변명거리를 찾아서(숙달된 일인지라 어렵진 않지만) 왜 당장은 페이퍼를 쓸 수 없는지 해명해야 한다. 대개는 두 종류다. '알잖아, 내가 그럴 기분이 아니거든.', '잊었어? 그럴 처지가 아니란 걸?'

 

 

 

그러다 딱 걸렸다 싶은 책이 조르주 페렉의 <인생사용법>(책세상, 2000)이다. 오늘 아침에 보니 페렉의 신작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문학동네, 2012)이 출간됐고(당일배송이 아니어서 일단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어제 펼친 책 찰스 파스테르나크(생화학자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조카다)의 <호모 쿠아에렌스>(길, 2005)의 서문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기 때문이다.

별개의 과정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복잡하게 상호 작용하고, 전체 유기체가 그 많은 환경이나 마주치는 동종, 이종 생물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또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소설 <삶, 사용자의 매뉴얼(Life, A User's Manual)>(1988)에서 조르주 페렉은 지나치게 환원주의적인 과학의 맹점을 꼬집는 일종의 은유로 조각 그림 맞추기를 언급하고 있다. 퍼즐 한 조각을 아무리 살펴본들 전체 형태에 대한 실마리를 얻지는 못한다. 부분의 역할은 오로지 전체 형체를 알고 난 후에만 인식될 수 있다.

여기서 필시 <삶, 사용자의 매뉴얼>이라고 옮겨진 책(영역된 책)이 <인생사용법>일 터이다. 찾아보니 표지가 멋지다. 2009년에 나온 2판이다.

 

 

그래서 <인생사용법>을 영역본과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급하게 들었다. 사실 <인생사용법>은 소장도서이긴 하지만 읽지 않은 책이어서(두께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아는 체하기도 멋쩍다. 그 멋쩍음을 해소할 좋은 기회이지 싶지만, 문제는 책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른다는 것. '사용'을 좀 해보려고 하니 '인생'이 보이지 않는 격이라고 할까. 알라딘에선 '품절'로 뜨는 이 책이 다시 출간될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애서가들에게 '머스트해브 아이템'이란 사실만은 적시해둔다(읽는 건 나중 문제다).

 

 

조르주 페렉이란 이름을 떠올린 계기는 며칠 전에도 있었다. 최윤의 새 장편소설 <오릭맨스티>(자음과모음, 2011) 때문이다. 제목만 봐서는 번역소설과 분간이 안 되는데, 문장도 그렇다. 작가의 이름을 지우고 책장을 펼친 독자라면 '파리 바케트'풍의 문장들을 만나게 된다.

계산이 맞지 않아 골치를 썩였던 하루의 근무, 퇴근 시간 버스 안의 격투를 치르며 겨우 유지되는 육체의 균형, 이름없는 이 카페까지 걸어오는 동안의 굽 높은 구두의 시련...(12쪽)

작가가 불문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데, 특별히 머릿속에서 호명되는 작가가 페렉이다. 그건 <사물들>(세계사, 1996)이 남긴 인상 때문인데, 읽은 지가 하도 오래 됐으니 주관적으로 각색되었을 수도 있다. 다른 프랑스 작가들을 더 많이 읽었다면 단서도 늘어났겠지만, 페렉만 읽었으니 페렉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뭔가 친근하다는 느낌만은 지울 수 없다. 확인해보려면 새로 번역돼 나온 <사물들>(펭귄클래식코리아, 2011)을 손에 드는 수밖에. 이 <사물들>의 영어판 표지는 이렇다. (펭귄클래식코리아, 2011)과 짝이다.

 

 

페렉의 작품은 그밖에 <임금 인상을 요청하기 위해 과장에게 접근하는 기술과 방법>(열린책들, 2010)이 더 소개돼 있다. 그의 많은 작품이 '실험적인' 것처럼 이 역시 그렇다. 제목에서부터 도발적이다.

 

 

사라진 책 한 권을 빌미로 조르주 페렉을 일람한 기분이 든다. 정리해보자. 당장 손에 든다면 <사물들>, 그리고 좀 티를 내고자 한다면 <인생사용법>이라는 것. 나는 잠시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에 들어가볼 참이다...

 

12. 01. 07.

 

 

 

P.S. 사실 <인생사용법>을 떠올린 계기는 하나 더 있다. 엊그제 데리다의 마지막 인터뷰 <최종적으로 사는 법을 배우기>를 구해서이다. 책을 받아보니 '마지막 인터뷰' 시리즈의 하나인데, 커트 보네커트와 로베르토 볼라뇨의 인터뷰도 나와 있다. 언젠가 '마지막 시간들'이 우리에게도 도래할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가? 우리가 알아야 할 인생사용법이 따로 있는가?..  

 

 

 

P.S.2. <인생 사용법>(문학동네, 2012)이 '인문서가에 꽂힌 작가들' 시리즈의 하나로 재출간됐다. <잠자는 남자>(문학동네, 2013)도 연이어 나왔다. 페렉의 서가도 자못 채워진 느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번역의 이론적 쟁점과 번역비평의 실제를 두루 다룬 책이 출간됐다. 정혜용의 <번역 논쟁>(열린책들, 2012). 국내에서는 드문 번역학 전공자의 저작이라 더욱 눈길이 간다.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ㅌㅇㄹ

경향신문(12. 01. 07) “번역은 원작을 주체적으로 읽고 모국어로 새로 쓰는 작업”

 

‘원문에 없는 말을 조작·날조했다. 번역을 각색 정도로 착각한 듯하다.’ 몇 년 전 유명 번역가에게 쏟아진 비판이다. 한국의 번역 비평 담론 중 98%가 부정적 평가를 담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 비평의 81%는 가독성과 충실성이 기준이라고 한다. 가독성은 의미가 통한다면 원문을 희생하더라도 우리말로 잘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역론에 가깝고, 충실성은 원문을 글자 그대로 옮겨야 한다는 직역론에 가깝다. 최근에 벌어진 스티브 잡스 전기의 오역 논란도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번역논쟁>(열린책들)을 내놓은 정혜용 박사(45·사진)는 이런 이분법적 논의를 거부한다. 그는 “직역이나 의역이 따로 있다기보다 최상의 번역이 존재할 뿐”이라고 말했다. 번역은 원어를 그에 상응하는 다른 언어로 맞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번역가가 자신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주체적으로 텍스트를 읽어내 모국어로 새로 쓰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번역의 대상이 단어나 자구 하나하나가 아니라 ‘텍스트 전체’라는 것은 정 박사가 말하는 핵심이다. “번역자들은 작품 전체를 번역합니다. 미시적인 부분만 평가하면 받아들이기 어렵죠.”

전문번역가인 정 박사는 불문학 전공자로 프랑스에서 번역학 박사를 취득한 흔치 않은 이력을 갖고 있다. 번역의 실천·이론 양면을 경험한 셈이다. 독특한 경험의 소유자인 그는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일률적 기준에서 번역을 평가하는 학계의 정량적 방식이나 ‘원서를 읽는 게 낫다’는 식의 인상평가를 모두 비판한다.

 


문학작품, 그중에서도 속담이나 언어유희의 번역을 보면 정 박사의 논의가 두드러진다. 그는 언어유희의 극한을 만날 수 있는 프랑스 작가 레몽 크노의 <지하철 소녀 쟈지>를 번역한 경험을 예로 든다. 이 작품에는 등장인물이 ‘입다’라는 동사를 쓰다가 프랑스어의 복잡한 어미변화 때문에 헤매는 장면이 나온다. 정 박사는 원문과는 차이가 있지만 언어유희의 효과를 살리기 위해 ‘착복-착의-착수-착란’으로 이를 바꿔 번역한다.

속담 번역도 비슷하다. ‘곰은 잡지도 않고 가죽 먼저 팔 수는 없지’라는 프랑스 속담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 의역의 입장에서는 우리 속담인 ‘김칫국부터 마신다’로 옮기면 이해가 쉽다. 그러나 그 순간 20세기 초의 프랑스 산골이라는 배경은 사라지고 만다. “지나친 의역 또한 강대국의 자국 문화중심주의 산물이죠. 낯섦 그 자체를 즐기는 것도 외국문학을 읽는 이유인데요.”

 

 


두 사례는 직역이니 의역이니 하는 평가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 박사는 번역을 “원작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재창조해내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특히 문학번역은 하나의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문학 작품을 보고 왜 이렇게 썼어 하는 식으로 비평하지 않잖아요. 원작에 대한 이해와 분석을 확실하게 한 뒤 문학성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해야죠.” 정 박사는 “작가와 원작은 경외감을 가지고 대하면서 번역가에게는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 풍토”가 문제라고 말한다. 책에 소개된 프랑스 학자 앙투안 베르만의 번역 논의는 이렇다. “번역 작품을 온전한 문학 작품으로 인정하여 그 번역 시스템을, 번역가의 글쓰기 방식을, 그의 번역관을, 번역 기획을 물으며, 번역 주체가 서 있는 번역 지평을 묻는다.” 정 박사가 ‘골방에 틀어박힌’ 번역가들의 연대를 꿈꾸는 번역·출판기획네트워크 ‘사이에’의 위원으로 활동하는 것도 그 실천의 일환이다.(황경상 기자)

 

12. 01. 07.

 

 

 

P.S. 번역이론과 비평을 다룬 책들은 간간이 출간되고 있는데, <번역 논쟁>의 책갈피에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몇권의 번역 이론서가 소개돼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번역한다는 것>,로렌스 베누티의 <번역의 윤리>, 쓰지 유미의 <번역과 번역가들> 등이다. 번역의 '존재'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같이 참고해볼 만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삶의 의미를 찾는 시지프스의 생각 여행'이란 부제의 책, 이윤의 <굿바이 카뮈>(필로소픽, 2012)에 붙인 해제 글을 옮겨놓는다. 작년 1월에 붙들고 있었던 원고가 줄리언 바지니의 <빅 퀘스천>(필로소픽, 2011) 서문이었는데, 공역자 중 한 사람이 이윤 씨였고, 면식은 없지만 그런 인연으로 이번 책에 해제를 쓰게 됐다. 저자 또한 <빅 퀘스천> 번역을 하게 되면서 젊은 시절 고심했던 '삶의 의미'의 문제, 혹은 카뮈의 질문과 다시 대면하게 됐다고. <굿바이 카뮈>는 'Meaning of Life' 시리즈의 다섯번째 책이다.

 

 

굿바이 카뮈, 굿바이 청춘

 

굿바이 카뮈? 그런 의문과 함께 책을 손에 든 독자도 있을 듯싶다. 사실 카뮈와 작별인사를 하려면 먼저 카뮈와의 만남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떤 카뮈인가? 당신은 카뮈를 만난 적이 있는지? <이방인>의 작가, <시지프 신화>의 저자 알베르 카뮈 말이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었다. 자살이야말로 유일한 철학적 문제라고. 그것은 인생의 의미에 관한 다급한 문제 제기였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철학적 물음이라고 젊은 카뮈는 말했다. 누구에게? 젊은 우리에게!

 

 


돌이켜보면 80년대 중반, 우리는 젊었다. <굿바이 카뮈>의 저자 이윤과는 책으로만 대면했을 뿐이지만, 80년대 중반 대학 철학과에 들어갔었다는 고백으로 보아 비슷한 연배이고 같은 세대다. ‘우리’라고 말해도 무방하다면, 우리의 청춘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최루탄이 터지던 교정과 거리에서 꽃이 피는 듯 마는 듯 지나가버렸다. 스러지기도 하고 밟히기도 했다. 그렇다고 ‘청춘의 고민’마저 생략할 수는 없었다. 왜 사느냐는 것. 요즘에야 알게 됐지만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그런 질문을 세 번쯤 던진다. 갓 스무 살이 될 무렵에, 중년에, 그리고 노년에. 저자 또한 이렇게 말한다. “80년대 중반 내가 철학과를 지망했을 때를 돌이켜보면 인생의 문제에 대한 어떤 해결책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것이 말하자면 ‘제1라운드’이다.


철학 대신에 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긴 했지만 ‘인생의 문제’에 대한 고민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첫 학기에 문학개론과 함께 철학개론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수강과목으로 신청했던 기억이 난다. 철학개론은 나중에 종교학개론으로 변경해서 신청하긴 했다. 이유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해줄 듯싶어서였다. 왜 사는지에 대해서. 고민도 심하면 병이다. 친구에게 “너는 왜 죽지 않니?”라고 물었던 걸 보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병적으로 집착한 게 아닌가 싶다. 어차피 유한한 삶이라면 인생이 허무했다. 아니 허무해보였다. 학생생활연구소에 상담을 받으러 다니며 세계의 ‘원초적 적의’에 대해서 떠들기도 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당신은 혹 이런 문장들에 매혹된 적이 있는가. <시지프 신화>에 나오는 대목이다. “무대장치가 무너지는 수가 있다. 기상, 전차,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의 네 시간, 점심식사, 전차, 네 시간의 근무, 저녁식사, 취침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화․수․목․금․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수월하게 계속된다. 다만 어느 날, ‘왜’라는 의문이 고개를 들며 모든 것은 놀라움을 띤 권태 속에서 시작된다.” 사무실에 다닌 것도, 공장에 다닌 것도 아니었지만, 고작해야 대학 강의실에 출석하는 정도였지만, 내게도 ‘왜’라는 의문은 수시로 고개를 들었다. 그게 아마도 ‘우리’가 인생의 문제와 조우한 첫 번째 장면일 듯싶다. 우리는 카뮈와 그렇게 만났다. 


청춘의 열병을 앓아본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골몰할 수 있다. 하지만 병적인 집착은 다른 문제다. 왜 하필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는 그토록 관심을 갖게 됐을까. 아무래도 그 무렵의 ‘일부’ 고등학생들에게 카뮈나 사르트르가 끼친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맞는 말이다. 그 ‘일부’에 나도 포함됐던 것이고. 우리는 어쩌면 실존주의 세례를 입은 마지막 세대일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시절에 카뮈와 사르트를 읽고, 대학에 다니기 위해 상경할 때 가방에 <시지프 신화>와 함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를 챙기던 세대 말이다. 아무튼 그랬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머릿속에서 ‘존재’ ‘무’ ‘부조리’ ‘구토’ ‘실존’ ‘책임’ 같은 유행어들이 치어들처럼 헤집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한 세월이 지났다. 그 치어들이 이젠 좀 묵직해졌을까. 저자는 학부를 끝으로 철학 공부를 접고 생업에 종사하면서 형이상학적 문제 대신에 현실적인 삶의 문제와 씨름했다고 한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해 계속 문학을 공부하면서 ‘자유’니 ‘의미’니 하는 문제와 씨름했다. 고민했던 문제를 좀더 명료하고 정확하게 정의하기 위해서 스키너를 읽고, 푸코를 읽고, 도킨스를 읽었다. 진화심리학을 읽고 정신분석학을 읽었다. 나는 인간이 어디까지 부자유한가, 그래서 어디서부터 자유로운가를 알고 싶었고, 궁극적으로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 알고 싶었다. 생활의 문제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았고 직업을 가지겠다는 생각은 아주 뒷전이었다. 문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부터가 이런 앎의 욕구 때문이었으니 인생의 문제 주변을 내내 맴돌고 있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다 인연이 닿아 ‘인생의 의미(Meaning of Life)’ 시리즈의 첫 권으로 나온 줄리언 바지니의 <빅 퀘스천>에 해제를 붙였다. 공역자였던 이윤의 ‘옮긴이의 말’을 유심히 읽고, 예사로운 공력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굿바이 카뮈>를 들고 나타났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오랜 갈증과 탐문을 ‘철학함’의 자세로 정리한 책이다.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제쳐놓았다고는 하지만 철학에 대한 녹슬지 않은 관심과 예리한 논리로 무장하고서 ‘삶의 의미를 찾는 시지프스의 생각 여행’을 안내한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중년의 관심을 ‘제2라운드’라고 하면, 이 책은 그 제2라운드의 결과보고서이다. 그가 도달한 ‘만족스런 답변’은 무엇인가. 삶의 의미란 “더 큰 객관적 가치를 향한 자기초월적 과정”이라는 것이다. 조금 더 풀어서 말하면 “삶의 의미는 더 넓은 가치의 연결망 속에서 자기 한계를 초월하는 것이다.”


‘굿바이 카뮈’란 말이 뜻하는 것은 카뮈란 말로 상징되는 철학적 고민과의 작별이다. 바로 삶의 의미,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과의 작별이다. 이 문제를 두고 저자는 영어권 철학자들의 논의를 참고하여 면밀하고 체계적으로 대답하고자 한다. 아마도 이런 스타일은 개념의 명료화를 지향했던 비트겐슈타인과 분석철학의 영향에 힘입은 것인지도 모른다. 비록 분석철학에서는 보통 삶의 의미와 같은 실존주의적 물음을 문제로 성립할 수 없는, 되지도 않는 문제로 기각하지만, 저자는 그들의 논리를 지렛대로 삼아서 삶의 의미라는 바위, 매번 다시 굴러 떨어지던 시지프스의 바위를 산 정상에 올려놓고자 한다. 저자는 성공한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내가 스무 살에 이 정도로 삶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면, 굳이 철학과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핏 <논리-철학논고>를 통해서 모든 철학적 문제를 해소했다고 자부한 비트겐슈타인의 자신감을 떠올리게 한다.


의미를 보는 다른 시각도 물론 가능하다. 가령 삶의 의미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아니 행위이고 운동이며 실천 자체라고 보는 관점이다. 어떤 사람의 행위를 제3자적 시점에서 인식과 평가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행위의 주체가 주관적 시점에서 경험하고 실천하는, 고유한 ‘자유’와 ‘의미’를 정량적이고 범주적인 것으로 환원하여 인식 가능하고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따라서 인식의 대상이 되는 자유와 의미는 파닥파닥 뛰는 ‘생생한’ 자유, ‘살아있는’ 의미가 아니다. ‘유레카!’라는 발견의 기쁨이나 우리가 각자 삶의 어느 순간 체험하는 환희가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되지 않거나 미흡하게만 전달되는 이유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삶의 의미와의 씨름, ‘제2라운드’를 눈여겨본 소감을 적자면, 이 씨름에서 승패는 중요하지 않다. <굿바이 카뮈>의 ‘의미’는 저자가 도달한 결론보다도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 있는 듯싶다. 중요한 것은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이라는 말은 삶의 의미란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일부’이긴 하더라도 저자와 마찬가지로 삶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고 뭔가 정면승부를 해보고 싶었던 독자라면 저자의 ‘생각여행’에 동행하면서 예기치 않은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의문이 다 해소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때가 되면 다시 가방을 싸고 신발끈을 바짝 묶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노년에, 그러니까 ‘제3라운드’에서 한 번 더 조우하게 될지도 모른다. “가슴 속에 새겨지는 별들을 이제 다 세지 못하는 것은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이라고 이제는 적지 못한다. 우리의 청춘은 지나갔다. 굿바이 청춘! 그렇지만 우리의 인생이 다하지 않는 한,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 또한 종결되지 않을 것이다. 카뮈와 작별하고도 인생은 한동안, 어쩌면 오래 더 지속될 테니까 말이다. 

 

12. 01. 05.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hloesong0925 2024-11-20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분이나 이분이나 카뮈 철학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아 안타까운 책이었습니다ㅠㅠㅠㅠ 카뮈야말로 허무주의의 정반대에 위치한 남자인데 말이죠 전하시려는 메세지는 좋았다만 카뮈의 문장을 전후 맥락도 모르고 인용하시는 부분에서 불편한 책이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영화론 <영화 우화>(인간사랑, 2012)기 번역돼 나왔다. 영역본은 진작부터 갖고 있던 책인데, 번역본이 나온 김에 틈틈이 읽어봐야겠다. 영화책들과 같이 묶을 수도 있겠지만 소개된 랑시에르의 책도 얼추 열권은 되기에 한데 모아놓는다. 다시 번역돼 나온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인간사랑, 2011) 독서도 조만간 시도할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가장 먼저 번역됐던 책이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2007)였다. 손에 든 건 2008년 1월, 그러니까 4년 전이다, 이젠...

 


1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영화 우화
자크 랑시에르 지음, 유재홍 옮김 / 인간사랑 / 2012년 1월
17,000원 → 16,150원(5%할인) / 마일리지 490원(3%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12년 01월 04일에 저장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자크 랑시에르 지음, 허경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9월
15,000원 → 14,250원(5%할인) / 마일리지 430원(3% 적립)
2012년 01월 04일에 저장
품절
문학의 정치
자크 랑시에르 지음, 유재홍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5월
15,000원 → 14,250원(5%할인) / 마일리지 430원(3% 적립)
2012년 01월 04일에 저장
품절
역사의 이름들- 지식의 시학에 관한 에세이
자크 랑시에르 지음, 안준범 옮김 / 울력 / 2011년 5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12년 01월 04일에 저장



1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