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오늘 낮까지도 감기 때문에 썩 좋은 컨디션이 아니어서 오후 늦게 고육지책으로 보낸 원고이다. 읽고 있는 책 중의 하나인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궁리, 2012)에서 칼럼의 꼬투리를 잡았다.

 

 

 

경향신문(12. 03. 15) [문화와 세상]독서가 기본과 상식인 사회로

 

2012년은 정부가 정한 ‘독서의 해’이다. 책을 읽고 평하거나 책에 대해 강의하는 일이 주업이기에 나로선 환영해야 마땅하지만 ‘독서의 해’란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은 묘했다. ‘선의’야 명확하다. 오죽하면 정부가 나서서 책을 읽자는 캠페인까지 벌이겠는가. 그럴 만큼 한국인은 책을 안 읽기로 유명하다. 지난 2010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세계 30개국 가운데 꼴찌였다. 한국인의 독서량은 한 달 평균 1권 정도인데, 그것도 학생들의 독서량이 성인 독서량을 보충해주어서 그렇다. 성인만 기준으로 하자면 한 달에 책 한권도 읽지 않는 게 우리의 독서문화다.

지난주에 나온 책 가운데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읽다 보니 한 사회의 윤리적 수준을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그것을 측정하는 척도 문제다. 지젝은 성문화될 필요도 없는 원칙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인가 아닌가를 척도로 들었다. 예컨대 중국의 식당에는 “바닥에 침을 뱉지 마시오. 음식을 버리지 마시오”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유럽의 식당에는 그런 게 없다.

 

어떤 차이인가? 그런 정도의 기본 에티켓은 따로 강조할 필요가 없는 사회가 한쪽에 있다면, 다른 쪽에는 비록 상식일지라도 끊임없이 주의를 환기시켜야 하는 사회가 있다. 당연히 지켜지는 상식이라면 강요받을 필요가 없으며 굳이 덕목으로 치켜세울 이유도 없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 한 사회의 ‘윤리적 표준’이다.

 

모든 사회는 각자의 윤리적 표준을 갖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수준이다. 지젝은 ‘정상적인 사회’의 수준을 이렇게 말한다. 만약에 누군가가 “강간을 하고 싶어”라고 말했을 때 그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사회가 아니라 “정신 나갔어?”라며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는 사회라고. 예의를 차려서 대응할 가치가 없는 일에 대해서는 대꾸하지 않는 것이 수준을 깎아내리지 않는 행동이고 품위를 지키는 처신이다. 물론 식당 바닥에 침을 뱉지 않는다고 해서, 강간범과는 상종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곧바로 높은 수준의 윤리적 표준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정치의 윤리적 표준은 무엇일까. 총선을 앞둔 각 정당의 후보자 공천작업이 마무리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가운데, 새누리당의 공천취소 사례가 눈길을 끈다. 강남갑과 강남을에 내정됐던 박상일, 이영조 후보의 공천이 두 사람의 역사관이 구설에 오르면서 전격적으로 취소됐기 때문이다. 이영조 후보는 2010년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시절 발표한 영어논문에서 제주 4·3사건과 5·18민주화운동을 ‘폭동’과 ‘반란’이라고 표현한 게 문제가 됐고, 박상일 후보는 자신의 책에서 항일독립군을 ‘소규모 테러단체’라고 기술한 게 문제가 됐다.

잠시나마 놀라운 것은 이런 공천취소 사유가 현 이명박 정부에서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사안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현 정부에 들어서 우리 사회의 윤리적 표준은 추락할 대로 추락한 상태다. 여론과 민심에는 귀를 틀어막고 ‘고소영’ 인사와 회전문 인사로 시종일관했던 ‘가카’의 스타일과 매번 위법과 탈법 시비로 얼룩졌던 지난 4년간의 인사청문회 장면을 돌이켜보면 격세지감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독서의 해’를 선정하는 사회보다 더 나은 사회는 독서가 기본과 상식인 사회, 그래서 굳이 “제발 책을 좀 읽으시오”라고 광고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다. 마찬가지로 논쟁거리도 되지 않을 일이 논쟁이 되는 사회보다는 그런 일이 아예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 사회가 더 낫다. 우리 사회의 표준을 좀 더 높여보는 것은 어떨까.

12. 03. 15.

 

 

P.S. 아직 완독한 건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북한에 관한 대목이다. 북한 영화에 대한 지식과 북한 관련서에 대한 지젝의 독서가 놀라운데, 그는 <불가사리>(1985)와 <한 녀학생의 일기>(2006) 같은 영화 외에도 김정일의 영화론 <영화의 기술에 대하여>(2001)까지 참조한다(북한에 대해서 정작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무슨 책인가 싶어 찾아봤더니 알라딘에선 뜨지 않는다. 이 책에 대한 지젝의 평은 이렇다.

저는 김정일이 쓴 <영화의 기술에 대하여>란 책을 갖고 있기도 한데요. 이는 정치적인 구호들을 상투적인 일상어들과 혼용하여 아주 훌륭하게 기술한 책입니다. 그의 아버지 김일성이 얼마나 큰 영감을 주었는지, 혹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 등과 같은 정치적인 맥락에서 글을 쓰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지극히 상식적으로 실질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지요. 영화를 제작하기 전, 시간 낭비를 방지하기 위해 배우들을 잘 훈련시켜야 한다는 등의 정보도 함께 있어요. 아주 재미있습니다. 저는 정치적인 구호들을 통상적인 말들과 섞어놓은 책을 좋아하거든요.(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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