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서도 그렇지만 최근에 나온 화제의 번역서는 <이방인>(새움, 2014) 재번역본이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공격적인 카피가 눈길을 끄는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김화영 번역의 <이방인>을 주된 타겟으로 삼고 있는 '교정 번역본'이다. 책의 절반 정도가 이 교정과정을 담은 '역자 노트'로 채워져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김화영판은 민음사판과 책세상판 두 종으로 나와 있으며 근소한 차이가 있다).

 

 

몇달 전인가 출판사 카페에 번역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새 번역이 연재되고 있는 걸 알았고 이후에 경향신문에서 번역에 대한 논란이 기사화된 걸 읽기도 했다. 번역 문제에 관심이 많은 편이고 한겨레에는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연재하고 있기도 하므로 나 역시 새 번역 과정에 흥미가 있었지만 일단은 책으로 나오면 판단해볼 생각이었다(아무래도 온라인의 문제제기는 잠정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데다가 출간이 예고돼 있었기 때문이다. 역자는 본명이 아닌 '이정서'라는 필명으로 출간하겠다고 했다).

 

지지난주에 책을 구해서 일단은 맨앞에 실린 '역자의 말'을 읽었다. 이미 김화영 번역의 몇몇 문제들에 대한 비판에는 공감하기도 해서 이 책이 한 추천인의 말대로 "프랑스어판 정본에 버금가는 권위를 누리고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인용의 준거가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좀 유보하게 됐다. 소설의 맨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한 문장의 해석 때문이다. 역자가 이 대목을 '역자의 말'에서 다루고 있는데, 문제 삼고 있는 대목의 김화영 번역은 이렇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민음사판, 135쪽)

특히 문제가 된 건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라는 문장이다. 불어 원문은 "À ce moment, et à la limite de la nuit, des sirènes ont hurlé."이다. 이에 대해 이정서는 이렇게 비판한다.

보다시피 김화영은 여기서 limite를 '끝'으로, sirènes를 '뱃고동'으로 보고 저렇게 번역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limite는 '경계'를, sirènes는 '사이렌'을 가리킨다. 하여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린" 게 아니라, "한밤의 경계선에서 (감옥의) 사이렌 소리가 울린" 것이다. 여기서 김화영이 다시 이런 기본적인 단어를 오해한 것은 다음 문장, '한 세계로의 출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세계로 떠나가는 '배'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저 말은, 이제 날이 밝으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뫼르소가 자신이 죽은 다음의 이 세계는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앞에서 자신이 한 말을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다.(새움판, 8-9쪽)

이런 판단에서 이정서는 문제의 대목을 이렇게 다시 옮겼다.

그때, 한밤의 경계선에서 사이렌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이제 영원히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새움판)

내가 갖고 있는 불어 실력은 빈약해서 sirène이란 단어가 어떤 뉘앙스의 의미들을 갖는지, 단수와 복수의 차이는 없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한데 이정서의 말처럼 그렇게 단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김화영이 '한 세계로의 출발'이라는 말과의 조응을 고려하여 '사이렌 소리'를 '뱃고동 소리'로 옮긴 것에 견주면 그냥 '사이렌'이라고 한 것은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는 말과의 연결고리를 과소평가했다는 인상을 준다. 한밤의 경계라면 12시를 가리키는가? 감옥에선 12시에 그런 사이렌이 울리는지도 확인해볼 문제이지만, 한밤중에 울리는(게다가 울부짖는!) 감옥의 사이렌 소리가 어째서 '세계로의 출발'과 이어지는지 불분명하다. 그 새로운 세계가 뫼르소가 죽은 다음의 세계를 가리킨다면, 더 적절한 건 한밤의 사이렌이 아니라 새로운 아침을 알리는 새벽 6시의 기상 사이렌 같은 것이다(군대에서처럼 감옥에서도 기상 사이렌이 울린다고 하면). 그리고 limite란 단어도 '경계'라는 뜻도 포함하지만 일차적인 의미는 '끝'이나 '가장자리' 아닌가?

 

 

 

다른 번역본들에서 어떻게 처리했는지 궁금해 찾아봤다. <이방인>의 번역본도 꽤 여러 종 갖고 있는 편인데 다 찾을 수는 없고 눈에 띄는 몇 권만 책장에서 빼왔다(시공사에서 나온 최수철본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주요 번역본을 망라하고 있는 듯한데, 먼저 '원조' 번역본이라고 할 이휘영본(문예출판사)은 이렇게 옮겼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에게는 영원히 관계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는 것이었다.(문예출판사판)

가장 먼저 이루어진 번역본이라 김화영본도 참고한 번역이다. 그러니까 이 대목에서 "그때 밤의 저 끝에서 사이렌이 울렸다"를 좀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한국어 '사이렌'에서는 '뱃고동 소리'를 떠올리기 어렵다. 뫼르소가 아무리 선박회사 직원이라 하더라도) 김화영은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라고 고쳐 옮겼던 것. 또 다른 번역으로 김예령본(열린책들)도 '사이렌파'에 속한다.

그 순간, 밤의 경계선을 타고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소리는 이제 나와는 영원히 무관한 세상을 향해 출발을 고하고 있었다.(열린책들판)

반면에 또다른 카뮈 전공자인 이기언은 <이인>(문학동네판)에서 이렇게 옮겼다(지나는 김에 말하자면 <이방인>이란 제목을 <이인>으로 옮긴 건 역자나 출판사의 패착이며, '二人'과 '異人', 두 가지를 뜻하는 의미에서 <이인>으로 고쳤다는 해명도 설득력 빈곤이다).

그 순간, 밤이 시작되려는 바로 그때, 고동소리들이 울려퍼졌다. 고동소리는 이제 나와는 영원히 무관해져버린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문학동네판)

'밤의 끝'이나 '밤의 경계'로 옮겨진 문구는 '밤이 시작되려는 바로 그때'라고 풀어서 옮겼다. 그리고 이기언은 sirènes가 복수형인 걸 고려해서 '고동소리들'이라고 옮겼다. 부두에서 출항하는 배가 연거푸 내는 소리다(내가 아는 상식으론 군대나 감옥에서 나오는 사이렌 소리는 길게 한번으로 그칠 것 같다). 아무튼 그래서 이기언본은 김화영본과 함께 '뱃고동파'로 분류될 수 있겠다(최수철본은 어디에 속하는지 미확인이다).

 

 

영역본들은 어떨까. 역자도 불분명하기에 제대로 된 번역본이라고 할 수 없지만, 영역본도 같이 묶인 베스트트랜스본(더클래식판)에서 찾아보니 이렇게 돼 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는데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는 소리였다.(더클래식판)

이것은 영역본 "Then, just on the edge of daybreak, I heard a steamer's siren."에 대응하는 것이다(이 영역본에 따르면 '막 동틀무렵' 뱃고동소리를 들은 게 된다). 펭귄에서 나온 모던클래식판에서는 "At that point, on the verge of daybreak, there was a scream of sirens. They were announcing a departure to a world towards which I would now be forever indifferent."라고 옮긴 대목이다. 영역본들은 la limite de la nuit를 '새벽' 혹은 '동틀녘'으로 옮기는 모양이다. '밤이 시작되려는 그때'라거나 '한밤의 경계선'과는 해석이 많이 다르다. 사실 limite는 시간적 의미뿐 아니라 공간적 의미도 갖는 단어다(아니 공간적 의미가 더 우선적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la limite de la nuit '어둠의 저 끝' 정도의 뜻으로 새길 수도 있다. 밤의 어둠 저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는 것으로.

 

정리하자. 새움판 새 번역 <이방인>에서 역자는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는 문장을 근거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라고 '탄핵'했지만, 나는 '사이렌 소리' 대신에 '뱃고동 소리'라고 옮길 만한 근거도 있으며 그렇게 옮긴 번역본도 적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다. 그리고 어느 편이냐를 묻는다면, 적어도 이 대목에서만큼은 '뱃고동파'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번역은 "여기서 limite는 '경계'를, sirènes는 '사이렌'을 가리킨다"고 단언할 만큼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그런 번역이라면 구글이 더 잘할 수 있다). <이방인>의 인용 준거가 되려는 번역이라면, 좀더 많은 걸 살펴야 하지 않을까 싶다...

 

14. 04. 06.

 

 

 

P.S. 새움판 <이방인> 때문에 촉발된 오역 논쟁에 대해선 한겨레에서 정리기사를 실었다. 영어판, 일어판과도 대조해놓았는데, 전문을 참고해볼 만하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32347.html).

이정서씨의 <이방인>도 숱한 번역본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이씨가 좀더 주목받는 이유는 ‘내 번역이 낫다’는 번역 논쟁에 그치지 않고 ‘권위자 김화영 교수의 번역은 엉터리다’라며 일종의 ‘문학권력 논쟁’으로 나아간 데 있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25년을 속아 온 번역의 비밀, 이제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새움출판사의 마케팅 띠지 문구다. 이씨가 오역의 주체로 지목한 인물은 김화영(73)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명예교수다. 카뮈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카뮈 대표작을 모두 번역해 전집을 낸 한국의 대표적인 프랑스 문학자·번역가다. 여러 권의 산문집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이씨의 익명 논쟁 방식도 논란이다. 이씨는 본명과 과거 문학가로서의 경력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는 이름과 권위가 아니라 문장을 보자는 취지라고 이유를 밝혔다. 정혜용씨는 “창작 비평은 작품을 얼마나 깊이 읽는지를 다루는데 번역 비평은 어떤 번역의 나쁜 점을 지적하는 걸 먼저 한다. 그런 점에서 번역자에겐 늘 자기를 옹호하고 항변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이정서씨가) 이름도 밝히지 않고 김 교수를 비판하는 것이 정당한 번역 비평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한겨레>가 전자우편으로 이씨에게 재차 학벌 등을 제외하고 번역가나 작가로서의 배경을 추가 설명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씨는 적절치 않다며 거절했다.

 

정혜용씨는 “이씨의 논쟁은 ‘번역도 문학’이라는 점을 독자에게 알린 점에서 재밌는 현상”이라고 긍정적 측면을 짚었다. 번역가들의 노력은 창작에 버금간다. 번역이 지식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도 크다. ‘인권’ ‘사회’ ‘국회’ 등은 모두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이 발명한 번역어였다. 그 번역어로 한국인은 사고하고 말한다. 프랑스어 번역문학계에서 이번 논쟁이 건설적인 번역 논쟁이 되기를 희망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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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들' 시리즈의 네번째 책으로 나탈리 레제의 <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워크룸프레스, 2014)이 나왔다. 작가는 생소하지만 베케트에 관한 책이란 점에서 바로 관심을 갖기에(<고도를 기다리며>는 내가 종종 강의하는 작품이다) '오늘의 발견'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나탈리 레제는 누구인가.

 

 

현대 저작물 기록 보관소(IMEC) 부소장, 전시 기획자, 그리고 소설가. 현재 나탈리 레제라는 이름을 설명해낼 수 있는 수식들이다. 1960년생으로 파리 출신인 나탈리 레제는 오랜 시간 고급 문헌을 다뤄온 연구자로, 그간 국내에는 직접적으로 소개된 바가 없다. 그러나 레제가 연구해온 작가들의 이름은 친숙하다. 롤랑 바르트와 사뮈엘 베케트.

 

바르트와 베케트 연구자라면 더 대면할 기회가 주어져도 좋은데, 아직은 불어로만 만날 수 있는 듯하다. <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이 처음 소개되는 책.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저자의 첫번째 책이라고 하므로.

이 책 <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은 수년간 대가들의 이름 뒤에서 작업해온 나탈리 레제의 밀도 높은 작업물로, 그녀의 첫 책이다. 평생 높은 수준의 문서를 다루다 뒤늦게 첫 책을 낸 이의 선택. 베케트의 문서들을 다루고 베케트의 전시를 기획했던 이가 베케트에 대한 글을 쓴 것은 당연해 보인다. 2006년 프랑스 출판사 알리아에서 출간된 레제의 이 책은, 그 제목이 일차적으로 드러내듯, 작가 사뮈엘 베케트의 삶을 다룬 전기이다. 그러나 이 얇은 책은, 그 두께가 상징하듯, 여느 전기와는 확연히 다른 인상이다. 차라리 이렇게 일컬어야 적합할 듯하다. 사뮈엘 베케트라는 한 인간에 대한, 한 편의 산문. 

 

 

그러고 보니 베케트의 삶과 문학세계를 총체적으로 다룬 책이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은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영어로 나온 책을 몇 권 갖고 있는데, 그의 전집과 함께 번역되면 좋겠다. 최근에 동서문화판으로 베케트 작품집이 다시 나왔는데, 절판된 작품들의 리스트를 볼 수 있어서 반갑지만 역시나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는 번역인지는 의문이다(<고도를 기다리며>만 하더라도 첫 장의 번역이 통상의 번역본들과 다르다). 흥미로운 건 바디우의 해설이 붙어 있다는 점.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베케트에 대하여>(민음사, 2013)와 일부 중복되지 않을까 싶다...

 

14.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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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중앙선데이에 실은 '로쟈의 문학을 낳은 문학'을 옮겨놓는다. 아마도 지난 세기 가장 큰 사회적 영향을 미친 희곡의 하나일 입센의 <인형의 집>의 중국 수용에 대해서 다뤘는데, 철학자이자 사상가로서 신문화운동에 관여했던 후스(호적)의 소품 <종신대사>가 그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꼽힌다(중국에서는 최초의 근대극 정전으로 평가된다). 임우경의 <근대 중국의 민족서사와 젠더>(창비, 2014)에서 알게 된 사실이다. 후스의 작품은 <중국 현대 단막극선>(한국학술정보, 2007)에 수록돼 있다. 입센에 대해선 김미혜 교수의 <헨리크 입센>(연극과인간, 2010)도 참고했다.

 

 

 

중앙선데이(14. 04. 06) 노라와 중국판 노라의 차이는 남녀평등 의식

 

“우리 집은 그저 놀이방에 지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지요. 친정에서 아버지의 인형 아기였던 것이나 마찬가지로요. 그리고 아이들은 다시 내 인형들이었죠.”

노라는 남편에게 단호하게 결별을 통보하고 집을 나간다. 『인형의 집』(1879)에서 한 가정의 안주인 노라가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책임에 앞서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가출하는 결말은 당시 많은 관객에게 충격을 주었으며, 이 작품에 ‘최초의 페미니즘 희곡’이라는 평판을 가져다주었다. 그와 함께 주인공 노라는 세계 문학사에서 작가 입센보다도 더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나는 나 자신부터 교육해야 해요. 그런데 당신은 그 일을 도와줄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내가 혼자 해야 해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을 떠날 거예요.” 노라에게 무슨 일이 생겼기에 그녀는 가출을 결심한 것일까? 노라는 사랑하는 남편 헬메르의 귀여운 ‘종달새’이자 ‘다람쥐’로서 그를 거역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남편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었다. 결혼 초에 건강이 나빠진 남편에겐 요양이 필요했지만 남편은 절대 남에게 빚을 지지 않는 성미이기에 노라는 남편 몰래 거액을 빌렸다. 게다가 차용증의 보증인으로 아버지의 서명까지 위조한 것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위법이지만, 노라의 기준으로는 남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제 헬메르는 건강도 회복되고 곧 저축은행의 총재가 될 예정이며 노라도 생활비를 아껴 빚을 잘 갚아 나가고 있는 참이다. 하지만 채권자가 문서 위조로 고소하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뒤늦게 노라의 비밀을 알게 된 남편은 자신의 사회적 위신만을 걱정하며 아내를 맹비난한다. 그제야 남편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 노라는 자신이 얼마나 부당한 결혼생활을 감내해 왔는지 알게 된다.

그런데 채권자가 마음을 고쳐먹고 차용증을 돌려주자, 남편은 태도를 바꿔 노라를 용서하겠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아, 노라, 당신은 남자의 마음을 몰라. 자기 아내를 용서했다는 걸 마음속에 품고 있는 건 남자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하고 만족스러운 일이지. 자기 아내를 전심으로, 거짓 없이 용서했다는 것 말이야. 그럼으로써 여자는 두 배로 그의 소유물이 되니까.” 노라는 자신이 지금까지 집안에서 남편에게 “재주를 부리는 것으로 먹고살아” 왔던 것을 깨닫는다. “갑자기, 지난 8년간 여기서 내가 모르는 사람과 같이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중국에서도 노라는 신여성의 대명사였다. 특히 후스(胡適)는 입센주의의 핵심을 개인주의로 보고 노라의 비타협적인 각성을 높이 평가했다. 여기서 개인주의는 사회에 유용한 사람이 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교육하고 스스로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리킨다. “나는 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에 만족할 수 없고 책에 쓰여 있는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어요. 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설명을 찾아야 해요.”

 

 

후스가 이런 계몽사상을 담아 쓴 희곡이 『종신대사(終身大事)』(1919)인데, 전씨 집안의 딸 아매가 혼처가 생기면서 벌어진 에피소드를 담은 단막극이다. 전씨 부인은 관음보살의 예언과 점쟁이의 점괘가 나쁘게 나오자 딸의 결혼에 반대한다. 아매는 그런 근거 없는 미신을 타파해야 한다고 믿는 아버지 전 선생에게 희망을 걸지만, 그는 또 다른 이유에서 딸의 결혼을 반대한다. 사윗감 진 선생의 진(陳)씨가 원래 전(田)씨와 기원이 같기에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매는 절망하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당신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하오”라는 진 선생의 연락을 전달받고는 과감하게 부모에게 작별을 고하는 쪽지를 남기고 몰래 집을 나간다.

노라의 가출과 아매의 가출은 무엇이 서로 닮았는가? 아버지와 남편에게 의존적인 삶을 살았던 노라는 뒤늦게야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주체가 되려고 한다. 아매 역시 결혼은 부모의 뜻에 따르기보다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구세대와는 다른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남편에게 당당하게 자기 의지를 밝히고 집을 나서는 노라에 비하면, 비록 가출이라는 선택 자체가 당시로선 파격적이라 하더라도 몰래 집을 나서는 아매는 아직 미덥지 못하다. 게다가 아매는 혼자 집을 나가는 게 아니라 밖에서 기다리던 진 선생의 차를 타고 떠난다. 그녀의 행동은 구시대적 가치에 대한 반항을 분명히 드러내지만, 남녀평등에 대한 인식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물론 이러한 차이는 사회 조건의 차이이기도 하다. 『종신대사』는 처음에 여자 배역을 찾지 못해 공연이 무산됐는데, 당시 중국에서는 부모가 반대하는 남자를 따라 가출하는 역할을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9년 ‘신청년’에 발표된 작품이 1923년에 와서야 초연된 이유다. 하지만 근 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도 아직 인형의 집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14.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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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을 골라놓는다. 타이틀북으로 고른 책은 '이주의 발견'으로도 손색이 없는 로널드 드워킨의 <행복의 역습>(아로파, 2014)이다. 부제는 '행복강박증 사회가 어떻게 개인을 병들게 하는가'이고, 원제는 '인공행복'이다. <행복의 배신>이라는 제목도 어울릴 뻔했다.

 

현직 마취과 의사이자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 드워킨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등장과 함께 세 차례에 걸쳐 미국에서 일어난 의료혁명이 인공행복Artificial Happiness의 확산을 가져왔고, 미국을 행복 강박증 사회로 만들었다고 비판을 가하고 있다.

프로작 같은 항우울제가 아직 미국만큼 많이 처방되는 것 같진 않지만 '행복강박증'이라면 우리도 못지 않기에 일독의 의미가 있겠다.

 

두번째 책은 앨런 프랜시스의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사이언스북스, 2014). '한 정신 의학자의 정신병 산업에 대한 경고'가 부제다. <행복의 역습>과는 정반대인 듯싶지만, 주제가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책이다. <닥터 프랑켄슈타인>(텍스트, 2013)을 읽고 내막은 좀 알고 있었는데, 저자는 신질환의 진단과 분류가 얼마나 임의적인지 폭로한다.

저자인 앨런 프랜시스 박사는 30여 년간 의료 현장에서 정신 질환을 앓는 환자들을 진단하고 치료한 정신과 의사인 동시에 모든 정신 의학 관계자들이 정신 장애 진단의 ‘바이블’로 삼는 DSM(정신 장애 진단 통계 편람)의 개정 작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다. 저자는 1980년대 이후로 DSM이라는 정신 의학 진단 매뉴얼이 수차례 개정 작업을 거치면서 일시적이고 일상적인 심리 증상들 다수를 정신 질환으로 규정하고 끌어안은 결과, 정신 장애의 과잉 진단과 의약품 과잉 처방, 주기적인 정신병의 유행이 초래되었음에 주목한다.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은 내부자의 시선으로 현대 정신 의학계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내부 고발서인 동시에, 진단의 기준을 대폭 넓힘으로써 그릇된 정신병의 유행을 일으키는 데 스스로도 일조한 데 대한 일종의 양심선언이다.

 

세번째 책은 폴 길딩의 <대붕괴>(두레, 2014). 제목과 표지, 그리고 '기후 위기는 세계 경제와 우리 삶을 어떻게 파멸시키나?'란 부제가 내용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린피스 인터내셔널의 책임자를 지낸 환경운동가이며, ‘지구의 지속가능성’ 분야의 세계적인 이론가이자 많은 글로벌 기업의 자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폴 길딩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가 쓴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위한 안내서". 최근 영화 <노아>를 본 관객이라면 손길이 갈 만하지 않을까.   

 

말이 나온 김에 인간이란 동물에 대해서 한번 더 관찰해봐도 좋겠다. 단, 신의 눈이 아니라 다윈의 눈으로. 마크 넬리슨의 <인간동물 관찰기>(푸른지식, 2014)가 적당한 분량의 가이드북이다. "국제동물행동학자 위원회 벨기에 대표인 마크 넬리슨이 시니컬하고 유쾌하게 쓴 '인간동물 관찰기'".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마틴 브레이저의 <다윈의 잃어버린 세계>(반니, 2014). '캄브리아기 폭발의 비밀을 찾아서'가 부제다. 간략한 소개로는 "진화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지구에 새겨진 생물들의 흔적을 추적하는 고생물학자들의 분투기. 왜 하필 캄브리아기에 생명이 폭발적으로 등장했을까? 저자 마틴 브레이저는 이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를 ‘다윈의 잃어버린 세계’라 칭한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캄브리아기 폭발’이라고 알고 있는 생명의 빅뱅이 일어난 이유를 마치 추리소설의 범인을 추적하듯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흠, 인류의 역사보다도 훨씬 더 먼 과거의 얘기로군. 물론 그럼에도 이런 책을 쓰고 읽는 동물로는 지구상에서 인간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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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저자'를 고른다. 한 명의 소설가와 두 명의 철학자, 이론가다. 먼저 인도계 미국 작가 줌파 라히리. 그녀의 신작 <저지대>(마음산책, 2014)가 번역돼 나왔다.

 

 

라히리의 책은 <이름 뒤에 숨은 사랑>(마음산책, 2004) 이후 마음산책에서 출간되고 있는데, 표지의 일관성과 안정감이 돋보인다. 라히리는 유난히 상복이 많은 작가인데, 이번 소설에 대해서도 권위 있는 문학상들의 최종심에 오르면서 저력을 과시했다. 간단한 소개는 이렇다.

리처상을 수상한 인도계 미국 작가 줌파 라히리의 2013년 최신작. <축복받은 집>, <이름 뒤에 숨은 사랑>, <그저 좋은 사람>으로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우뚝 선 줌파 라히리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자 통산 네 번째 책이다. 단편집인 전작 <그저 좋은 사람> 이후 5년 만의 신작이다. 정식 출간되기 전부터 사전 검토용 원고만으로 이미 미국 출판계의 권위 소식지인 「버즈북」을 통해 "2013년 최고의 소설"이라는 검증을 받았고, 퓰리처상에 버금가는 미국 최고 문학상인 내셔널북어워드 최종심과 영미권 최고의 공신력을 자랑하는 맨부커상 최종심에 각각 오르며 화제를 모았다.

 

두번째는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 미국의 정치철학이자 비판이론가 낸시 프레이저와의 논쟁을 담은 <분배냐, 인정이냐?>(사월의책, 2014)가 출간됐다. <인정투쟁>(사월의책, 2011)에 이어서 나온 '악셀 호네트 선집'의 두번째 책으로 3권은 <자유의 권리>가 근간으로 예고돼 있다. 공저자인 낸시 프레이저의 책으론 <지구화 시대의 정의>(그린비, 2010)이 출간돼 있다. 악셀과 낸시의 논쟁 쟁점은 무엇인가.

 

독일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와 미국의 저명한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이 책에서 분배와 인정, 나아가 우리 시대의 정의에 관해 치열한 논쟁을 펼친다. 두 철학자는 분배와 인정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여기거나 분배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경제주의적 시각을 잘못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프레이저가 분배와 인정을 밀접히 연관되어 있지만 환원될 수 없는 관계로 보고 이차원적 정의관을 제안하는 데 반해, 호네트는 분배를 인정의 표현으로 보고 불평등한 분배의 심층적 토대인 사회적 인정 질서에 주목한다.

 

 

세번째 저자는 러시아 문화기호학의 태두 유리 로트만. 그의 유작 <문화와 폭발>(아카넷, 2014)이 학술명저번역의 일환으로 번역돼 나왔다. <기호계>(문학과지성사, 2008)에 이어서 로트만 전공자인 김수환 교수의 번역이다. 바흐친과 함께 20세기 러시아 인문학을 대표하는 학자의 저작이 번듯하게 소개돼 반가운데, 조만간 일독해봐야겠다. 로트만 문화기호학의 전반적인 개관은 김 교수의 <사유하는 구조>(문학과지성사, 2011)를 참고할 수 있다. <문화와 폭발>은 어떤 책인가.

사회사상사 연구로 시작하여 1960년대 구조주의와 기호학, 1970년대 문화이론으로 영역을 넓혀가며 독창적 사상을 일구어낸 로트만은 생애 마지막 저작에서 ‘폭발’이라는 개념에 집중하며 새로운 사유의 실마리를 풀어낸다.  폭발은 점진적 과정 중에 발생한 갑작스러운 단절을 가리킨다. 역사의 흐름이 ‘예측불가능성’에 맡겨지는 급격한 단절의 상황이 바로 폭발의 국면이다. 로트만은 폭발을 “기호학적 지층에 뚫린 창문”이라고 규정한다. 그 창문은 몹시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고 창조적이다. 이처럼 폭발의 개념은 문화의 역동성을 위한 본질적 메커니즘이자, 기호학적 생성과 자유를 위한 불가피한 계기로서 재규정된다.

 

참고로 <문화와 폭발>은 영어로도 번역돼 있다. 영어권에서 나온 로트만 관련서로는 <로트만과의 대화>, <로트만과 문화연구> 등이 더 참고해볼 만한 책이다. 아래는 1992년에 나온 러시아어판의 표지다...

 

 

14. 04.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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