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서도 그렇지만 최근에 나온 화제의 번역서는 <이방인>(새움, 2014) 재번역본이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공격적인 카피가 눈길을 끄는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김화영 번역의 <이방인>을 주된 타겟으로 삼고 있는 '교정 번역본'이다. 책의 절반 정도가 이 교정과정을 담은 '역자 노트'로 채워져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김화영판은 민음사판과 책세상판 두 종으로 나와 있으며 근소한 차이가 있다).
몇달 전인가 출판사 카페에 번역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새 번역이 연재되고 있는 걸 알았고 이후에 경향신문에서 번역에 대한 논란이 기사화된 걸 읽기도 했다. 번역 문제에 관심이 많은 편이고 한겨레에는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연재하고 있기도 하므로 나 역시 새 번역 과정에 흥미가 있었지만 일단은 책으로 나오면 판단해볼 생각이었다(아무래도 온라인의 문제제기는 잠정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데다가 출간이 예고돼 있었기 때문이다. 역자는 본명이 아닌 '이정서'라는 필명으로 출간하겠다고 했다).
지지난주에 책을 구해서 일단은 맨앞에 실린 '역자의 말'을 읽었다. 이미 김화영 번역의 몇몇 문제들에 대한 비판에는 공감하기도 해서 이 책이 한 추천인의 말대로 "프랑스어판 정본에 버금가는 권위를 누리고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인용의 준거가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좀 유보하게 됐다. 소설의 맨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한 문장의 해석 때문이다. 역자가 이 대목을 '역자의 말'에서 다루고 있는데, 문제 삼고 있는 대목의 김화영 번역은 이렇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민음사판, 135쪽)
특히 문제가 된 건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라는 문장이다. 불어 원문은 "À ce moment, et à la limite de la nuit, des sirènes ont hurlé."이다. 이에 대해 이정서는 이렇게 비판한다.
보다시피 김화영은 여기서 limite를 '끝'으로, sirènes를 '뱃고동'으로 보고 저렇게 번역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limite는 '경계'를, sirènes는 '사이렌'을 가리킨다. 하여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린" 게 아니라, "한밤의 경계선에서 (감옥의) 사이렌 소리가 울린" 것이다. 여기서 김화영이 다시 이런 기본적인 단어를 오해한 것은 다음 문장, '한 세계로의 출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세계로 떠나가는 '배'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저 말은, 이제 날이 밝으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뫼르소가 자신이 죽은 다음의 이 세계는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앞에서 자신이 한 말을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다.(새움판, 8-9쪽)
이런 판단에서 이정서는 문제의 대목을 이렇게 다시 옮겼다.
그때, 한밤의 경계선에서 사이렌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이제 영원히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새움판)
내가 갖고 있는 불어 실력은 빈약해서 sirène이란 단어가 어떤 뉘앙스의 의미들을 갖는지, 단수와 복수의 차이는 없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한데 이정서의 말처럼 그렇게 단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김화영이 '한 세계로의 출발'이라는 말과의 조응을 고려하여 '사이렌 소리'를 '뱃고동 소리'로 옮긴 것에 견주면 그냥 '사이렌'이라고 한 것은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는 말과의 연결고리를 과소평가했다는 인상을 준다. 한밤의 경계라면 12시를 가리키는가? 감옥에선 12시에 그런 사이렌이 울리는지도 확인해볼 문제이지만, 한밤중에 울리는(게다가 울부짖는!) 감옥의 사이렌 소리가 어째서 '세계로의 출발'과 이어지는지 불분명하다. 그 새로운 세계가 뫼르소가 죽은 다음의 세계를 가리킨다면, 더 적절한 건 한밤의 사이렌이 아니라 새로운 아침을 알리는 새벽 6시의 기상 사이렌 같은 것이다(군대에서처럼 감옥에서도 기상 사이렌이 울린다고 하면). 그리고 limite란 단어도 '경계'라는 뜻도 포함하지만 일차적인 의미는 '끝'이나 '가장자리' 아닌가?
다른 번역본들에서 어떻게 처리했는지 궁금해 찾아봤다. <이방인>의 번역본도 꽤 여러 종 갖고 있는 편인데 다 찾을 수는 없고 눈에 띄는 몇 권만 책장에서 빼왔다(시공사에서 나온 최수철본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주요 번역본을 망라하고 있는 듯한데, 먼저 '원조' 번역본이라고 할 이휘영본(문예출판사)은 이렇게 옮겼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에게는 영원히 관계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는 것이었다.(문예출판사판)
가장 먼저 이루어진 번역본이라 김화영본도 참고한 번역이다. 그러니까 이 대목에서 "그때 밤의 저 끝에서 사이렌이 울렸다"를 좀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한국어 '사이렌'에서는 '뱃고동 소리'를 떠올리기 어렵다. 뫼르소가 아무리 선박회사 직원이라 하더라도) 김화영은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라고 고쳐 옮겼던 것. 또 다른 번역으로 김예령본(열린책들)도 '사이렌파'에 속한다.
그 순간, 밤의 경계선을 타고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소리는 이제 나와는 영원히 무관한 세상을 향해 출발을 고하고 있었다.(열린책들판)
반면에 또다른 카뮈 전공자인 이기언은 <이인>(문학동네판)에서 이렇게 옮겼다(지나는 김에 말하자면 <이방인>이란 제목을 <이인>으로 옮긴 건 역자나 출판사의 패착이며, '二人'과 '異人', 두 가지를 뜻하는 의미에서 <이인>으로 고쳤다는 해명도 설득력 빈곤이다).
그 순간, 밤이 시작되려는 바로 그때, 고동소리들이 울려퍼졌다. 고동소리는 이제 나와는 영원히 무관해져버린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문학동네판)
'밤의 끝'이나 '밤의 경계'로 옮겨진 문구는 '밤이 시작되려는 바로 그때'라고 풀어서 옮겼다. 그리고 이기언은 sirènes가 복수형인 걸 고려해서 '고동소리들'이라고 옮겼다. 부두에서 출항하는 배가 연거푸 내는 소리다(내가 아는 상식으론 군대나 감옥에서 나오는 사이렌 소리는 길게 한번으로 그칠 것 같다). 아무튼 그래서 이기언본은 김화영본과 함께 '뱃고동파'로 분류될 수 있겠다(최수철본은 어디에 속하는지 미확인이다).
영역본들은 어떨까. 역자도 불분명하기에 제대로 된 번역본이라고 할 수 없지만, 영역본도 같이 묶인 베스트트랜스본(더클래식판)에서 찾아보니 이렇게 돼 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는데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는 소리였다.(더클래식판)
이것은 영역본 "Then, just on the edge of daybreak, I heard a steamer's siren."에 대응하는 것이다(이 영역본에 따르면 '막 동틀무렵' 뱃고동소리를 들은 게 된다). 펭귄에서 나온 모던클래식판에서는 "At that point, on the verge of daybreak, there was a scream of sirens. They were announcing a departure to a world towards which I would now be forever indifferent."라고 옮긴 대목이다. 영역본들은 la limite de la nuit를 '새벽' 혹은 '동틀녘'으로 옮기는 모양이다. '밤이 시작되려는 그때'라거나 '한밤의 경계선'과는 해석이 많이 다르다. 사실 limite는 시간적 의미뿐 아니라 공간적 의미도 갖는 단어다(아니 공간적 의미가 더 우선적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la limite de la nuit '어둠의 저 끝' 정도의 뜻으로 새길 수도 있다. 밤의 어둠 저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는 것으로.
정리하자. 새움판 새 번역 <이방인>에서 역자는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는 문장을 근거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라고 '탄핵'했지만, 나는 '사이렌 소리' 대신에 '뱃고동 소리'라고 옮길 만한 근거도 있으며 그렇게 옮긴 번역본도 적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다. 그리고 어느 편이냐를 묻는다면, 적어도 이 대목에서만큼은 '뱃고동파'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번역은 "여기서 limite는 '경계'를, sirènes는 '사이렌'을 가리킨다"고 단언할 만큼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그런 번역이라면 구글이 더 잘할 수 있다). <이방인>의 인용 준거가 되려는 번역이라면, 좀더 많은 걸 살펴야 하지 않을까 싶다...
14. 04. 06.
P.S. 새움판 <이방인> 때문에 촉발된 오역 논쟁에 대해선 한겨레에서 정리기사를 실었다. 영어판, 일어판과도 대조해놓았는데, 전문을 참고해볼 만하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32347.html).
이정서씨의 <이방인>도 숱한 번역본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이씨가 좀더 주목받는 이유는 ‘내 번역이 낫다’는 번역 논쟁에 그치지 않고 ‘권위자 김화영 교수의 번역은 엉터리다’라며 일종의 ‘문학권력 논쟁’으로 나아간 데 있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25년을 속아 온 번역의 비밀, 이제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새움출판사의 마케팅 띠지 문구다. 이씨가 오역의 주체로 지목한 인물은 김화영(73)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명예교수다. 카뮈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카뮈 대표작을 모두 번역해 전집을 낸 한국의 대표적인 프랑스 문학자·번역가다. 여러 권의 산문집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이씨의 익명 논쟁 방식도 논란이다. 이씨는 본명과 과거 문학가로서의 경력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는 이름과 권위가 아니라 문장을 보자는 취지라고 이유를 밝혔다. 정혜용씨는 “창작 비평은 작품을 얼마나 깊이 읽는지를 다루는데 번역 비평은 어떤 번역의 나쁜 점을 지적하는 걸 먼저 한다. 그런 점에서 번역자에겐 늘 자기를 옹호하고 항변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이정서씨가) 이름도 밝히지 않고 김 교수를 비판하는 것이 정당한 번역 비평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한겨레>가 전자우편으로 이씨에게 재차 학벌 등을 제외하고 번역가나 작가로서의 배경을 추가 설명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씨는 적절치 않다며 거절했다.
정혜용씨는 “이씨의 논쟁은 ‘번역도 문학’이라는 점을 독자에게 알린 점에서 재밌는 현상”이라고 긍정적 측면을 짚었다. 번역가들의 노력은 창작에 버금간다. 번역이 지식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도 크다. ‘인권’ ‘사회’ ‘국회’ 등은 모두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이 발명한 번역어였다. 그 번역어로 한국인은 사고하고 말한다. 프랑스어 번역문학계에서 이번 논쟁이 건설적인 번역 논쟁이 되기를 희망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