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으러 갈 시간인데, 막간 창고 정리를 한다. 이미 모스크바 통신에 '언어는 무의식적으로 탈구조화되어 있다'란 제목으로 올렸던 글에서 김훈의 <현의 노래>에 관한 대목만을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2004년 7월초에 씌어진 그 글은 '김훈-김규항-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업그레이드 버전은 '양파, 혹은 문체에 대하여')에 대한 보론의 성격을 겸하고 있었다(때문에 이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이라면 먼저 문체에 대한 글을 참조하시는 편이 좋겠다). 나머지는 나의 수다이다(단, 이 '수다'는 18세 이상만 접근가능한 이미지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유의하시길).  

 

 

 

 

갑작스레 ‘정치론’을 꺼내들기 전에(*이 '정치론'에 대해서는 나중에 정리하겠다) 내가 몇 마디 거들었던 소설은 김훈의 <현의 노래>였다. 나는 김훈의 문체를 얘기하면서 그의 ‘허무주의’를 지적했고, 보다 구체적으론 그의 허무주의가 ‘가장(家長)의 허무주의’라는 걸 주장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이 질퍽거리는 구멍은 대체 무엇인가? 이 빨아당기는 속살이 어째서 왕의 무덤 속에 들어가 쇠와 함께 썩어야 하는가. 야로는 식은 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였다.”란 구절을 제시하면서 ‘질퍽거리는 구멍’을 김훈 문학행위의 핵심으로, 라캉의 용어를 쓰자면 ‘아갈마’(=숨겨진 보물)로 규정했다. 지젝을 흉내내어 말하자면, 그의 문학행위는 그 ‘질퍽거리는 구멍’을 중심으로 순회한다.

이에 대해서 ***님은 (어제 읽어보니까) 이 ‘질퍽거리는 구멍’이 ‘여성의 성기’를 가리킬 뿐이라고 반박하는 답글을 달아놓았는데, 좀 의외의 답글이다. 내가 제시한 건 그것의 ‘지시적 의미’가 아니라 ‘해석’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그 ‘질퍽거리는 구멍’의 주인은 “왕의 죽어 썩어가는 육체를 피해 도망친” ‘아라’이다. 나는 인용한 구절에서 “‘야로’는 김훈 자신이며, ‘이 질퍽거리는 구멍’이야말로 그의 ‘허무주의’의 근거이고, 그의 표현을 빌자면, 풍경의 ‘적막’이다.”라고 했다. 즉, ‘야로=김훈’이며, ‘질퍽거리는 구멍=허무주의의 근거’라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하면, ‘질퍽거리는 구멍’은 ‘아라의 성기’일 뿐이라는 ***님의 지적은 ‘야로’는 ‘김훈이 아니라 야로일 뿐’이라는 얘기인데, 이게 ‘반박’으로서 성립하는 것인지? 혹은 ***님은 그것이 ‘반박’이라고 정말로 진지하게 믿고 있는 것인지? 이건 메타언어로서의 비평 원론에 관한 것인데, 나는 그냥 농담으로 간주하겠다(혹 진담이라고 밝혀주신다면, 다음 번에 제법 진지하게 ‘반박’하도록 하겠다).

김훈의 에세이들을 얼마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의 ‘형이상학적’ 상상력 혹은 묘사는 음(陰)과 양(陽), 즉 암컷-수컷의 대립과 교접을 근간으로 구축돼 있다(‘여자-남자’라고 말하는 건 김훈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는 ‘암컷-수컷’이라고 말한다).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라는 시리즈의 제목 자체가 이미 그러하다. ‘질퍽거리는 구멍’이라는 음(陰)과 암컷(성)이야말로 (야로가 아니라) 작가 김훈이 “식은 땀을 흘리며 기진맥진” 채워 넣어야 할 구멍이고, 먹여 살려야 할 구멍이며, 궁극적인 미스터리이자 ‘적막’이다. 나는 이 또한 김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아래는 구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The Origin of the World'(1866).

내가 개진한 것은 그러한 상식을 좀더 보충하는 의미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보충하는 김에 더 확장하자면, ‘질퍽거리는 구멍’ 즉 바기나(vagina)는 ‘주인-기표(Master-signifier)’로서의 팔루스(phallus)에 대응하는 ‘여주인-기표(Mistress-signifier)’라 할 만하다. 라캉에게서 팔루스가 생식기관으로서의 남근, 즉 페니스(penis)와 구별되듯이, 바기나는 생식기관으로서의 음문(陰門), 즉 불바(vulva)와 구별된다. 프로이트에서 라캉으로의 이행, 혹은 정신분석학의 언어학적 전회가 <‘아버지’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페니스’에서 ‘팔루스’로>란 표어로 정리될 수 있다면(그리고 <‘징후’에서 ‘징환’으로> 또한 주요한 표어이다), 우리는 거기에 <‘불바’에서 ‘바기나’로>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주인-기표’의 짝으로 ‘여주인-기표’를 덧붙이면서 말이다.


 

 

 

라캉 정신분석은 ‘프로이트+소쉬르/야콥슨’으로 정식화될 수 있는바, “무의식은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것이 ‘구조주의자’ 라캉의 맥심이다. 실제로, 라캉은 야콥슨과 깊은 교우를 가졌는데, 레비-스트로스의 소개로 그는 미국으로 망명해 있던 러시아의 언어학자 야콥슨을 알게 되며, 야콥슨은 프랑스에 갈 때마다 라캉의 집에 머물곤 했었다(레비 스트로스의 회고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참조). 유의할 것은 여기서의 전회가 이중적이라는 점이다.

즉, 라캉은 정신분석학을 언어학적으로 전회시킴과 동시에, 언어학을 정신분석학으로 전회시킨다. 그 전회는 <‘랑그’에서 ‘랭귀스테리’로>란 표어로 정리될 수 있는바, 알다시피 ‘랭귀스테리’란 ‘랭귀지(언어)+히스테리’이다. 여기서 ‘탈구조주의자’ 라캉의 ‘또 다른’ 맥심이 나올 수 있는바, “언어는 무의식적으로 탈구조화되어 있다”가 그것이다(물론 이건 그가 직접 언명한 것이 아니라 내가 정리한 것이다.)

단순하게 대비시켜 말하자면, <에크리>(1966)의 저자로서 구조주의자 라캉이 ‘무의식의 언어’에 관심을 집중한 데 반해서(그의 주된 관심은 ‘상징계’였다), 흔히 ‘후기 라캉’이라 불리는 탈구조주의자 라캉은 ‘언어의 무의식’에도 관심을 돌린다(그의 주된 관심은 ‘실재’였다). 조이스에 대한 그의 관심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사실, 이 ‘언어의 무의식’에 관해서라면, 이리가레와 함께 라캉의 ‘나쁜 딸들’의 하나인 크리스테바의 기여를 빼놓을 수 없는바, 그녀의 <시적 언어의 혁명>(1973)은 그 대표적인 저작이다(그녀의 국가박사학위논문이기도 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불가리아 출신의 이 여성 ‘사무라이’가 일약 프랑스 지성계의 히로인으로 떠오르게 되는 건 <바흐친, 말, 대화 그리고 소설>(1967)을 발표함으로써이다(그녀가 26세 때의 일이다). 이 논문은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만, 일부 오역들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안 그래도 상당히 난해한 논문이지만). 해서 요컨대, 라캉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야콥슨에 대한 참조는 기본적이며, 크리스테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바흐친에 대한 참조는 필수적이다.

 

 

 



다시 ‘질퍽거리는 구멍’, 즉 바기나. 해부학적으로 ‘팔루스’란 단어는 원래 (남성의) 음경과 (여성의) 음핵, 즉 클리토리스를 가리키지만, 라캉 정신분석학에서는 “결여 혹은 상실의 기표”를 뜻한다(욕망은 언제나 이러한 결여와 관련된다). 그것이 ‘기표’라는 점에서, 음경과 무관하지만 한편으로 ‘결여/상실’의 기표라는 점에서는 음핵과 무관하지 않다.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여성의 음핵은 결여한/상실한 남성적 음경의 흔적이었기 때문이다(해서 팔루스는 페니스, 즉 남근이 아니지만 ‘남근적’이라는 이유에서, 라캉 정신분석학이 페미니스트들로부터 공격 받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반면에 바기나는? 해부학적 기관이 아닌 상징 혹은 기표로서의 그것은 ‘결여의 결여’, ‘상실의 상실’의 기표이며, 미스터리의 기표이고 ‘여주인-기표’이다. 즉, 남성에겐 미스터리가 없다는 의미에서(‘남성’은 다 드러나 있다!), 남성에게는 결여가 결여돼 있으며, 상실이 상실돼 있다. 카트린 브레이야의 표현을 가져오자면, 바기나는 ‘지옥’의 기표이며, 팔루스가 결여/상실하고 있는 것은 그 ‘지옥’이다.

라캉은 욕망을 ‘결여’하고만 관련짓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욕망의 반쪽이다. 나머지 반쪽은 바로 ‘결여의 결여’와 관련된 욕망이다. ‘무엇인가를 갖고 있는 자’는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지 않은 자’이며,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는 자’가 무엇인가를 갖고자 욕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지 않은 자’는 무엇인가를 안 갖고자 욕망한다(즉 소유에 대한 욕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소유에 대한 욕망도 있다). 주인-기표가 무엇인가를 갖고 있음으로써, 혹은 갖고 있다고 가정됨으로써 ‘주인’ 행세를 한다면, 여주인-기표는 무엇인가를 안 갖고 있음으로써, 혹은 안 갖고 있다고 가정됨으로써 ‘여주인’ 행세를 한다. 즉 칼이 아니라 칼집이 주인이며, 마개가 아니라 구멍이 주인인 것이다. 즉, 여주인.



다시, 야로의 말, 김훈의 말을 보자. “이 질퍽거리는 구멍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결여/상실이며, 부재이고 적막이다. “이 빨아당기는 속살” 앞에서, “야로는 식은 땀을 흘리며 기진맥진”이다. 속수무책이다. 왜인가? 그는 구멍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그는 결여의 결여이고, 상실의 상실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주인-기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편으로 그는 여주인-기표를 욕망하며, 상실이고자 결여이고자 한다.

나는 게이에의 욕망, 팔루스를 제거함으로써 상상에서건, 실제에서건 ‘여성’(=암컷)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이 구멍(=바기나)에 대한 욕망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들은 ‘주인’이 아니라, ‘주인’을 지배하는 ‘여주인’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자신의 구멍으로, 부재로, 결여로, 상실로, 적막으로, 미스터리로, 지옥으로 여주인은 주인을 할딱이게 하며 지배한다(천문학에서의 反물질 혹은 ‘암흑물질’은 이 여주인-기표의 천문학 버전이라 할 만하다). 혹 이런 것이 라캉 정신분석학의 페미니즘 버전이 될 수 있을까? 혹은 거울상?

레비-스트로스가 <친족의 기본구조>(그의 국가박사학위논문이다)를 구성하면서 여성을 교환의 대상으로 한 것에 대하여 남성중심적인 시각이 아닌가란 질문을 받자, 그는 그것이 편의적인 것이었을 뿐이라고 답한다(즉, 남성을 교환의 대상으로 한 ‘친족의 체계’도 이론적으론 가능한 것이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보다 많은 건 사실이고 따라서 더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그것이 오른손잡이에 대한 ‘필연성’을 보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어쩌다 보니 그러기가 쉬웠을 뿐인 것. 라캉의 욕망이론이나 ‘팔루스’론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라는 게 나의 짐작이다.

그렇다면, 유표적 언명으로서 “여성은 없다”란 그의 테제의 거울상 버전은 “남성은 없지 않다”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뒤집어서 얘기하면, 이상한 것은, 즉 유표적인 것은 ‘여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없지 않은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남자가 없지 않다고 상상해봐?”). 오, 없지 않아서 불행한 것들이여! 무덤 속에 들어가 썩을 것들이여!..

06. 0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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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5-23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에 모, 못볼 걸 봐서..........황급히 스크롤을 내려버리게 됩니다....

로쟈 2006-05-23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리, '경고'해두지 않아서 죄송합니다(한데, 사진이 아니라 '누드화'일 뿐인데요)...
 

이전에 29회까지 연재했던 ‘최근에 나온 책들’의 30회를 쓰기로 한다(*이 글은 2004년 8월에 모스크바에서 씌어졌고, 모스크바통신에도 나누어서 올린 적이 있다. '에피소드' 시리즈의 '에필로그'로서 구색을 맞추기 위해 다시 올려놓는다. 31회부터는 '로쟈의 노트2'에 연재돼 있다).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어제 한국식당에 갔다가 지난 토요일자 동아일보의 복사본 한 부 들고 왔기 때문이다. 토요일자에는 물론 북리뷰(‘책의 향기’)란이 실려 있다(동아일보는 아직 타블로이드판 북리뷰를 내지는 않는 모양이다). ‘책의 향기’에 소개된 신간들 가운데, 나의 눈길을 끄는 책 5권 꼽아보았다. 물론 이 선택은 나의 주관적인 취향이 반영된 것이다.

 

 

 



사실, 최근에 나온 책들에 반드시 꼽혀야 하는 것들로는 지젝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원제는 'For they know not what they do'), 데리다의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가라타니 고진의 <언어와 비극>(도서출판b) 등이 있고, 메를로-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동문선)도 슬그머니 출간됐지만, 지난주 북리뷰에는 빠진 걸로 봐서 이미 그 전 주에 다 ‘소화’되었던 모양이다. 언급한 저자들은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신뢰하는 이들이며(번역자들 또한 어느 정도 수준급이다), 그 책들은 모두 일독의 가치가 충분하리라고 본다. 서울에 있었다면, 벌써 각 권의 몇 페이지씩은 읽어 넘겼을 테지만, ‘현지사정상’ 나는 이 책들을 인터넷서점의 ‘보관함’에 넣어두는 걸로 일단은 만족한다.

 

 

 


그럼,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첫손가락에 꼽고 싶은 책은 무엇이냐? 그건 학술면에서 가장 크게 다루고 있는, 리차드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이다. 원제가 'The Extended Phenotype'인 이 책의 2판이 1999년에 나왔는데, 국역본은 이 2판을 옮긴 듯하다(2판에는 다니엘 데넷의 후기가 들어가 있다). 알다시피, 도킨스의 출세작은 <이기적 유전자>이며, 이 책 역시 1판과 2판(개정판)이 있는바, 우리말로는 둘 다 번역돼 있다. 1판은 이용철 번역으로 동아출판사에서 나왔었고(현재는 품절된 걸로 보인다), 2판은 홍영남 번역으로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됐다(현재도 잘 나가고 있다). 이번에 나온 <확장된 표현형>은 그 후속작인데, 도킨스 자신이 (자신있게!) 대표작으로 꼽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유전자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개체들마저도 자신의 운반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고, 아마도 책은 그 사례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예컨대, “거미줄, 흰개미집, 새의 둥지와 같이 동물이 만들어낸 인공물들도 모두 자신의 유전자를 더 효율적으로 퍼뜨리기 위한 확장된 표현형인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논리를 인간에까지 적용해 보면 우리의 문화와 문명도 결국 유전자의 확장된 표현형일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한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은, 그러한 유전자의 전략과 그 결과로서의 ‘확장된 표현형’뿐만 아니라, 그 부작용(side-effect)이나 오작동(malfunction)이다. ‘눈먼 유전자’들의 전략은 언제나 직접적으로 정확하게 목표한 타깃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Not in our genes)!”라는 반박도 충분히 가능하다(하지만, 그런 반박의 타깃은 나이브한 ‘유전자 결정론’일 뿐이다). 즉, 진화는 적응(adaptation)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스티븐 제이 굴드의 표현을 빌면) 외적응/굴절적응(ex-adaptation 혹은 exaptation)의 산물이기도 하다(지젝, <이라크>, 83쪽). 좀더 쉽게 말하면, 진화는 ‘의도한 적응’과 ‘의도하지 않은 적응’의 복합적 산물이다(가령, ‘의도하지 않은 아이’ 때문에 ‘할 수 없이’ 결혼하는 커플들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뒤집어 말하면, “우리 안에 없다!”는 것조차도 ‘조물주-유전자’의 확장된 손(=섭리)이 만들어낸 ‘효과’일 뿐이며, 유전자의 메시지(=편지)는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한다(다만 상상계-상징계-실재라는 프리즘을 관통하면서 굴절될 따름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진화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이 접합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혹은 그 분리 자체가 ‘진리’일는지도 모른다), 이 두 ‘문턱’에 대한 참조 없이 우리의 마음과 문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앞으로 점점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해본다(물론 언제나 그렇지만, ‘수다’는 어느 때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말은 이런 책들을 읽으시라는 것이다. 그것도 진지하게 말이다.

 

 

 

 

오래 전 얘기지만, 한 대학 신입생이 당시에 과 조교였던 나에게 추천도서를 물어왔다. 내가 골라준 책 세 권은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였다(*한권을 덧붙인다면, <장자>를 집어넣고 싶다). 물론 그 신입생이 이후에 이 책들을 다 읽었을 거 같지는 않지만, 만약에 다 읽었다면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조개삿갓이나 말미잘, 수달 등과 다른 점은 그런 책들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고, 그런 읽기를 통해서 자신의 ‘정신’을 성장시켜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우리의 게으른 정신은 저 혼자 알아서 크지 않으며 끊임없는 자양분과 닦달을 필요로 한다). 물론 ‘수달의 친구들’은 그런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없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얘기하자면, 도킨스는 다윈-예수의 바울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그는 라캉-예수의 바울인 지젝과 유사한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형>과 지젝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또한 유사한 운명을 겪은 책들이다. 각각 <이기적 유전자>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어제 이 책의 러시아어본을 구했다. *위의 이미지)이라는 ‘처녀작’으로 (본인들도 놀랄 만한)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정작 도킨스나 지젝이 자신들의 대표작으로 꼽고 있는 것은, 그리고 보다 ‘대담하게’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는 것은 그 후속작들인 <확장된 표현형>과 <그들은…>이다. 하지만, 이 책들은 상대적으로, 그리고 기이하게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점은 두 저자 모두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이기도 하다.

내가 도킨스를 처음 읽은 것은 11-2년쯤 전이다. <도덕적 동물>의 저자 로버트 라이트의 <3인의 과학자의 그들의 神>(정신세계사)를 읽고, 그 3인의 과학자 중 한명인 에드워드 윌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동시에 진화생물학과 사회생물학에 눈뜨게 됐다. 그리고 이어서 읽은 게 <이기적 유전자>(동아출판사)의 1판이었다(을유문화사의 개정판은 몇 년 뒤에 나왔다). 당시에 (적어도 국내에서는) 거의 주목 받지 않은 책이었는데,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하고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이미 제목만으로도 책은 나에게 숨통을 터 주었다. 이후에는 물론 ‘도킨스의 모든 책’이다(그러면서 알게 된 이가 <다윈 이후>의 저자 스티븐 제이 굴드이다).

나는 작년에 <확장된 표현형>의 원서(2판) 또한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장서용’으로 사서 서가에 꽂아 두었다(아직 번역되지 않은 그의 책들도 몇 권 더 갖고 있다). 번역본이 나온다면 <이기적 유전자>와 마찬가지로 굳이 원서를 살 필요는 없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 번역본에 이제야 나와서 다소간 ‘유감’이지만, 그 유감은 ‘반가움’에 비하면 아주 사소하다.

 

 

 



두번째 책은 거의 모든 언론의 북리뷰에서 톱으로 다룬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김영사) 원저(Who are we?)가 올해 나온 걸로 돼 있으니까, 아마도 곧장 국역본이 나온 듯하다. <문명의 충돌>도 나는 읽지 않았지만(하도 떠들어대기 때문에 안 읽어도 내용을 아는 것 같은 책들이 있다), ‘미국의 정체성’이란 제목이 더 걸맞은 이 책 또한 굳이 읽게 될 것 같지는 않다(적어도 돈 주고 사서는). 하지만, 읽을 ‘필요’는 있는 책이다. 왜냐하면, “미국의 세계관보다는 미국의 외교정책이나 한미관계에만 관심을 집중해 온 우리에게는 오히려 이 책이야말로 평균적인 백인 사회의 세계관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인의 절반은 이라크 침공의 명분 상실에도 불구하고 올 11월의 미 대선에서 부시 대통령을 여전히 테러라는 적을 응징할 선봉장으로 지지”하고 있지 않은가. 전혀 신비롭지 않지만, 여전히 ‘미스터리’인 이러한 현 정세를 ‘돌파’하기 위해서라도 ‘앵글로 프로테스탄트’들의 생각을, 그 이데올로기를 알 건 알고 직시할 건 직시해야겠다. 더불어 헌팅턴의 두 가지 예언, 즉 ‘문명의 충돌’과 (히스패닉으로 인한) ‘미국의 붕괴’ 중 한 가지만은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물론 후자 말이다(그것만으로도 그는 정치학자로서는 별볼일 없더라도 예언가로서, ‘선지자’로서는 후세에 이름이 남을 것이다).

 

 

 



세번째 책은 레너드 쉴레인의 <알파벳과 여신>(파스칼북스)이다. 저자는 생소하지만(*2005년엔 그녀의 책으로 <자연의 선택, 지나 사피엔스>도 출간됐다), 640쪽이란 분량이 마음에 들었다(가격도 만만찮지만. 3만 4천원이면 그 정도 두께의 러시아 책을 최소한 5권은 살 수 있다). 원제는 “The Alphabet versus the Goddess”(1998)이다. 그러니까 우리말 제목의 ‘과’가 은폐하고 있는 것은 이 둘의 대립적/적대적 관계이다(즉 ‘알파벳 대 여신’).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 외과 교수인 저자에 따르면 문자 언어, 특히 알파벳은 선형적, 추상적, 남성적으로 특징되는 좌뇌적 사고를 강화하고 종합적, 시각적, 여성적 우뇌의 기능을 퇴보시켰다. 우뇌적 가치에 대한 좌뇌적 가치의 승리는 여신을 죽이고 가부장제와 여성 천시 사상을 가져왔다.”

물론 ‘가설적인’ 주장이지만(이러한 주장이 입증되려면, 비문자 사회, 즉 원주민 사회에는 가부장제나 여성 천시 사상이 생소한 것이어야 하지만, 내 생각엔 그럴 거 같지 않다), 그걸 이 만한 분량으로 밀어붙인 노고에 대해서는 치하할 만하다. 아무튼 저자는 “이미지로의 회귀 현상을 의미 있게 보고, 앞으로 좌뇌와 우뇌, 남성과 여성의 가치, 문자와 이미지가 균형을 찾고 공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잠깐 든 생각은 요새 한글(=알파벳)을 조금씩 배우고 있는 딸아이가 점차 문자에 익숙해지는 것이 그 아이의 행복과 무관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다. 기우(杞憂)이기를 바란다...

 

 

 



네번째 책은 얇은 프랑스 소설이다. 에릭 오르세나의 <두 해 여름>(열린책들). 제목만으로는 이 책을 고르기 힘들었을 것이다(*책은 1998년에 나왔던 것이 재출간된 형태이고, 오르세나의 소설들은 <새들이 전해준 소식>을 포함해 여러 권이 출간돼 있다). 알고 보니 제목의 ‘두 해 여름’은 번역가인 소설의 주인공이 “독자로서 경탄하고 번역자로서 낙담했다”고 한 나보코프의 소설 <아다>(‘에이다 혹은 아더’)를 번역하면서, 진탕 고생하면서, 보낸 기간을 의미하는 듯하다. 실제의 번역자를 모델로 했다는 이 소설에는 기껏 번역을 해놓으니까 “내 걸작을 망쳐놓았다”고 타박하는 작가 나보코프도 등장하는바, 이 또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어쨌든 번역에 대한 한바탕 소동을 다루면서 저자는 번역가에 대한 예찬으로 소설을 마무리짓고 있는 듯하다. “내가 서가에 꽂힌 책의 반은 번역가들 덕분에 내게로 온 것이다. 나는 번역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번역가는 우리로 하여금 언어의 바다를 건너 신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 하니, ‘한 해의 겨울과 또 다른 해의 여름’을 번역에 바치고 있는 나로서는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 책의 작가/번역자는 고작 200쪽짜리를 쓰고/옮긴 것이니 번역의 괴로움을 말하기에는 뭐하다(내가 옮기고 있는 원서는 640쪽 가량이다). 물론 소설 속의 주인공이 옮기고 있는 <아다>라면 사정이 좀 다를 테지만(나보코프의 이 소설은 ‘신기하게도’ 우리말 번역본이 있다. 물론 지금은 구하기 힘들 테지만).

나보코프 또한 번역일에 낯설지 않은데, 그는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러시아어로 옮긴바 있고,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방대한 주석을 달아서 영어로 옮겼으며, 그의 아들 드미트리와는 러시아어와 영어로 씌어진 대부분의 그의 작품들을 영어로, 러시아어로 다시 옮겼다. 참고로, 그의 외아들 드미트리 나보코프는 아버지 나보코프의 영어본/러시아본 전 작품의 저작권을 갖고 있으며 가장 엄격하게 저작권을 관리/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국내에 나보코프의 책들이 잘 번역돼 나오지 않는 것은 그런 사정과 관련이 있다).

 

 

 



너무 시간을 끌고 있다. 빨리 끝내도록 해야겠다. 마지막 책은, 복간된 김훈의 <내가 읽은 책과 세상>(푸른숲>이다. 이 책은 1989년에 나왔다가 절판된 책인데, 이번에 개정판이 다시 나온 것. 서문에서 김훈은 “여기에 모이는 글 부스러기들은 대부분 밥을 벌기 위해 허둥지둥 쓴 글들”이라면 “그걸로 밥을 먹었다니, 부끄러운 일”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그건 김훈답지 않다. “그걸로 법을 먹게 해준 만큼” 그 글 부스러기들은 위대하지는 않을지언정 부끄러울 이유도 없다(밥벌이가 부끄러운 게 아닌 이상 말이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의 글들은 내가 이미 15년 전에 읽었던 것일 듯하다. 하지만, 저자가 조금씩 교정을 보기도 했고, 새로 들어간 글도 있고, 새로이 시인 이문재의 발문도 챙겨 넣은 모양이니까 여기서 소개해도 부끄럽지는 않겠다…

2004. 0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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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7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6-27 13:19   좋아요 0 | URL
**님/ 서재주인에게만 생색을 내시나요?^^
 

 

 

 

 

리안 감독의 화제작 <브로크백 마운틴>을 비디오로 빌려다 보고 오늘 반납했다. 지난주에 빌렸으니까 며칠 연체했다. 그건 내가 풀타임으로 영화를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이 띄엄띄엄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만났던 것처럼 나는 영화를 띄엄띄엄 며칠에 걸쳐서 보았다. 그건, 영화속 에니스의 대사처럼, 내가 마음놓고 영화를 볼 만큼 여유로운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해서, 나는 카우보이처럼 건성건성으로 영화를 보았다. 영화의 디테일들을 꼼꼼하게 챙기는 건 다음 기회로 넘기면서).

역시나 영화는 대형 스크린으로 보았어야 했다는 뒤늦은 감상과 함께 내게 남겨진 건 (아마도) 로키 산맥의 아름다운 풍광과 20년간 서로를 그리워한 두 남자의 과묵하고 절제된 감정이다. 이 영화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건 그러한 절제에 부합하지 않는 듯하여 나는 영화를 본 후에 찾아본 몇 가지 리뷰들 가운데 한 편 정도를 옮겨오는 데 만족하기로 한다.  

미국의 영화평론가 짐 호버만은 "몽롱하게 펼쳐지는 오프닝 장면에서 궁극적인 아픔이 느껴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리안은 이야기를 범우주적인 로맨스로 만들어낸다. 하긴 <타이타닉> 이후 할리우드영화 가운데 <브로크백 마운틴>이 가장 정통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닐까."라고 쓰는데, '가장 정통적인 사랑 이야기'라는 평이 정곡을 찌른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한편으론 바로 그런 점이 내겐 좀 불만스럽게 느껴졌다. 아무리 '위대한' 사랑 이야기라 하더라도 '고작 사랑 이야기'인가, 라는 푸념을 모두 떨쳐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성애이든 동성애이든 마찬가지이다(나는 <타이타닉>을 아직도 보지 않았다).

몇 개 읽어보지 않은 영화평들 가운데, 여기에 옮겨놓는 것은 씨네21(06. 03. 15)에 게재됐던 김소영 교수의 '가족을 지키려는 카우보이의 다짐, <브로크백 마운틴>'이다(이 칼럼을 고른 건 '고작 사랑 이야기' 범주를 약간은 벗어난 관점에서 영화를 독해하고 있어서이다).

-1963년 여름 그들은 양치기로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간다. 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길렌홀)이다. 8월에도 산은 춥기만 하고, 먹을 것은 콩 통조림뿐이지만, 돌보아야 할 양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양치기인 이들은 피 끓는 젊은 시절을 보내는 중인지라 양치는 일보다 다른 데 관심이 많다. 과묵하다기보다는 말을 요령있게 못하는 에니스와 촉촉하고 정감어린 시선을 가진 잭은 양을 잡아먹어볼까 하는 궁리도 나누고 그러다 사냥을 해(여전히 큰 동물이 총을 맞고 비틀거리는 것을 보는 것은 괴로운 영화 관람이나) 상당한 양의 육포를 말리기도 한다. 와중에 에니스는 성장기 자신의 가족사의 고통을 잭에게 털어놓는다.

-그러다 게이 카우보이 무비로 알려진 것처럼 둘은 섹스를 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날 이들의 허심탄회한 섹스 후일담은 모두 난 원래 퀴어가 아니거든! 이다. 그렇게 육체의 고백과는 다른 언어적 고백을 털어놓고 나서도 이들은 남자친구로서의 가까움만이 아니라 게이로서의 성적 친밀성을 나눈다. 그 뒤로도 20년간이나. 와중에 하늘 아래 낮고 융성하게 깔린 와이오밍(실제로는 캐나다 로키)의 흰 구름과 푸른 산, 녹색 풀 그리고 은회색의 양떼들은 미니멀한 그러나 존재적 무게감을 가지고 프레임을 채울 듯이 비운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프레임 안의 프레임을 만들곤 하는 촬영감독 로드리고 프리에토는 사랑 때문에 어떤 비극성에 갇혀버리게 되는 인물을 숏의 프레임 안에서 다시 건축물로 구성된 프레임으로 가두고는 그 뒤쪽으로 구름이 흐르게 한다.

-에니스는 같은 성, 동성간의 사랑 때문에 사회적 터부가 만들어놓은 운명에 갇히나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생의 다른 흐름을 느끼고 타게 되는 인물이다. 에니스가 산에서 내려와 잭과 헤어진 뒤 길을 걸어가다 배를 움켜쥐고 구토를 하는 장면은 양쪽으로 기둥이 막아서 있고, 프레임은 다시 협소하게 재프레이밍한다. 이때 한 남자가 다가와 시선을 보내자, 에니스가 뭘 보냐며 소리를 지른다. 프레이밍에 갇힌 사회화된 운명의 잔혹성이 의미화되는 이미지다. 동시에 주저앉은 에니스의 머리 위로 낮게 깔려 있는 저 들판의 구름 그리고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기울어진 나무는, 그럼에도 어떤 움직이는 아름다움을 내포한 관계를 선명하게 예시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산에서 막 내려온 에니스가 두려워하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프레임 안에 각인된다. 징후적이고 예시적이며 여러 감각을 건드리는 완벽에 가까운 장면이다.

-이 장면과 대위점을 이루는 것이 마지막 숏이다. 자신의 딸(아내의 이름을 따라 알마 주니어다)이 결혼을 알리고 다녀간 뒤 에니스는 알마 주니어가 블루진 재킷을 두고 갔음을 발견한다. 건네주려고 하나 딸은 빌려 타고온 남자친구의 차를 타고 떠나가버린 뒤다. 에니스는 옷장을 열어 딸의 옷을 넣으면서 자신과 잭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담은 블루진과 셔츠 그리고 브로크백의 이미지가 담긴 엽서를 본다. 그리고 청재킷의 단추를 잠그고, 예의 그 말을 뱉는다기보다는 삼켜버리는 어투로 “내가 맹세한 것처럼” 중얼거린다. 그러면서 그가 옷장을 급히 닫기 때문에 마치 갑자기 브로크백 마운틴 엽서쪽으로 줌인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문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착시 효과다. 옷장 문이 닫히고 난 뒤 창문의 프레임 밖으로 밭이 보인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 풀들이 흔들리고 있다. 전반, 흘러가는 구름에 대한 제한된 응답이다.

-영화는 대부분 워낙 미세하게 의미를 만들고, 그것을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에 굳이 구구하게 설명을 붙이자면 이 마지막 장면에서 에니스의 옷장 속에 보관되는 세벌의 옷, 잭, 딸 주니어 그리고 자신의 옷이 이 영화에서 가장 친밀하고 중요한 의미의 친족관계를 이루는 연쇄들이다. 그리고 이 연쇄가 때로는 족쇄가 되고 혹은 자유와 사랑, 웃음이 되어 이들의 생애에 굴곡과 흠집을 만들어낸다. 에니스에게 중요했던 것은 잭에 대한 그리움만이 아니라 딸들에 대한 책임감이다.

-바로 이 분열된 사랑과 책임감이 잭과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상처내긴 하지만 영화의 초반 에니스에 의해 그의 성장기가 이야기됨으로써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잭이 알마 주니어와 이야기하는 순간만은 그의 언어가 그나마 부분적이나마 소통적 언어로 기능한다. 에니스는 아내 알마에게만 아니라 이혼 뒤 잠시 상냥한 여자친구로 등장하는 팻시에게도 말이전혀 안 통하는 고집불통처럼 군다. 특히 이미 딸 둘을 둔 뒤라 아내 알마가 조심하자고 잠자리에서 말하는데도, 내 아이를 갖기 싫으면 떠나버리라고 말하는 장면은 말이 아니라 폭언이다. 또 참고 참던 알마가 이혼한 뒤 에니스에게 낚시하러 며칠씩 외출하고서도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송어 한 마리 들고 온 적이 없다며 ‘퀴어 케이스’를 추궁하자, 자신과 잭의 관계를 모르면서 떠들지 말라고 주먹질 일보직전이다.

-착하기 그지없는 웨이트리스 팻시가 울면서 “에니스 델 마, 난 정말 당신을 이해 못해!”라고 털어놓자 “괜찮아. 뭐”라고 말을 흘리는 장면은 팻시의 반응 숏이 암시하는 것처럼 ‘차라리 목석도 너보다는 나을 거야’(실제 대사는 다르다)다. 영화에서는 잭이 좀더 분명한 동성애 커플 관계를 요구하는 것 같으나, 결혼뿐만 아니라 여자와의 이성애 관계가 불가능한 사람은 에니스다. 그러한 에니스를 사로잡고 있는 아버지의 교훈은 절대 동성애 커플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9살인 에니스의 손을 잡고 가 황망하게 버려져 있는 게이의 주검을 보여주었다. 영화에서 그 장면은 플래시백으로 급격하게 처리된다. 또 잭이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경과를 잭의 아내 로린에게 들으면서 에니스는 로린의 교통사고라는 설명과는 달리 잭이 남자들에게 맞아 죽는 끔찍한 린치 장면을 떠올린다.

-영화의 미묘한 톤에 견주어서 생각해보면 이 플래시백이나 자의적 구성으로 보이는 판타즘 장면은 과격하고 충격적이다. 이와 비견되는 것이 영화의 편집 방식이다. 역시 두번의 파격적 몽타주가 나온다. 첫 번째는 에니스가 알마에게 애널 섹스를 시도하고 알마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뒤 잭이 소를 타고 로데오를 하다가 떨어지는 장면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 연결은 자명하긴 하지만 너무 자명하기 때문에 영화의 전반부에 흐르는 수려한 과묵함이라는 스타일과 세팅 속에서 강한 성적 충격을 만들어낸다.

-두 번째는 에니스의 이혼 소식을 듣고 이후 함께 살 것이라는 기대로 열몇 시간을 차를 몰아 달려온 잭을 에니스가 딸들을 돌보아야 한다며 돌려보내고 나서 일어난다. 잭은 멕시코로 가 성매매 거리에서 게이를 발견하고, 함께 골목으로 사라진다. 바로 거기에 연이어 나오는 장면이 잭 가족이 함께 먹을 홀리데이용 칠면조가 서빙되는 것이다. 앞서 부부간의 애널 섹스와 퀴어 로데오의 연쇄 그리고 게이간의 성매매와 가족 파티용 칠면조의 연결, 잭이 당한 교통사고를 게이를 대상으로 하는 혐오 범죄, 린치로 치환시키는 판타즘 장면들은 스타일적으로는 과묵한 이 영화의 깊은 성적 불안과 한 인간과 그 주변을 비극에 이르게 하는 소란한 오인과 오판을 드러낸다.

-그러나 영화는 바로 위의 부분들을 영화에서 다소 예외적인 장면으로 장치화해 그 충격들을 일정하게 거둬들이고 있다. 개방적인 게이 커플 관계, 반려의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잭보다 그 선택을 끝까지 거부하는 에니스가 주인공이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자신의 동성 파트너가 있으나, 딸들의 양육비를 자신의 노동으로 벌어 적어도 큰딸이 결혼할 때까지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아버지 에니스의 모습은 (게이지만) 그나마 책임감있는 미국 서부 카우보이의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다.

-이 영화는 커플로, 반려로 살 수 없어 불행했던 게이 연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혼으로 해체된 가족이 더이상 부서지지 않도록 애쓰는 영화이기도 하다.(*사랑 이야기'에만 주목한 평자들이 주의하지 않는 대목이다. 그래서 이 칼럼을 옮겨온 것이기도 하고.) 딸 알마 주니어가 아빠와 함께 살겠다고 하자, 에니스는 엄마와의 가족관계를 지키라며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 영화는 물론 관계의 비지속성에 관한 비극적 이야기지만, 또 망가진 것을 다듬어 어떻게 생존시킬 것인가에 대한 (일부 해체되었으나 여전한) 가족드라마이기도 하다. 가족과 관련해선 리안의 전작 <결혼 피로연>과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크리스 베리가 한국영화 <내일로 흐르는 강>과 미국 게이영화들의 비교를 통해 지적했듯이, 동성애를 다루는 미국영화들이 너무 일찍 가족이 야기시키는 문제를 버렸다면, 리안은 버리고 떠나간 부분을 다시 정성스레 들여다본다. 그러나 그 시야가 향하는 곳이 이성애 부부와 아이들로 이루어진 가족을 이상적 모델로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고루하지는 않다.

-끝으로 나는 이 영화가 이런저런 문제들에 사려깊고 책임감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으나 정감이나 열정 그리고 연륜은 좀 떨어지는 약간의 어중간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절제된 형식미의 이면이 이런 어중간함이 아닌가 싶다.)  배우로서의 에니스는 앞서 말했던 웨이트리스 팻시와 춤을 추면서 두손을 호주머니에 어중간하게 넣고 몸동작을 굼뜨고 어색하게 할 때 가능성이 많은 배우처럼 보인다. 그러나 카우보이와 상처받은 게이 역할을 잘 오가는 것 같지는 않다.

-가장 문제는 영화 내내 수염을 기르건 약간의 주름을 그려넣건 간에 나이가 전혀 들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10대 후반에서 39살까지의 나이 먹음의 낌새가 별로 느껴지지 않으면서 세월과 함께 올 법한 체념과 지혜도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들은 나이 먹지 않고 계속 청춘 게이로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이 브로크백 마운틴이 준 선물일까? 아니면 게이 하위문화로의 호소일까?

06. 0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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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정국 속에서도 눈에 띄는 책들이 여럿 출간됐다(*이 글은 2004년 3월 중순에 씌어졌다). 저녁엔 시위에 나서더라도 책 읽을 시간은 충분하므로 여기에 몇 권을 소개한다. 아마도 당분간은 이 연재의 마지막일 듯싶다(*해서, 이 에피소드 시리즈의 마지막 글이다). (30)번을 채우지 못했지만, 사정이 그렇게 돼버렸다. 혹은 여운을 그렇게 남겨두기로 한다. 하긴, 누가 등떠미는 것도 아닌데...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작고한 철학자 박홍규 교수(법학자 박홍규 교수가 아니라)의 전집 3, 4권으로 각각 <형이상학강의2>(민음사)와 <플라톤 후기 철학강의>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이 전집의 1, 2권은 지난 95년에 출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바 있는데, 정말 오랜만에 나머지 책들이 출간된 것이다(‘나오단 만 책들’의 대표적 사례의 하나였다). 10주기를 맞은 고인의 기일이 지난 14일이었다고 하는데, 이후에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를 다룬 강의록이 마저 출간된다면, 하나의 ‘철학사적 기념비’가 세워지는 것이 되리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바이지만, 박교수는 서양철학사 전체가 플라톤과 베르그송, 두 철학자에 의해 집약되는 것으로 보는데, 그의 철학관은 <형이상학강의1>에 실린 ‘고별강연’에 잘 드러나 있다. 고전철학에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에게라도, 그 강연문은 일독을 권할 만하다(*<탐독>의 저자가 구상중인 책에는 <소은 박홍규와 서구 존재론사>도 포함돼 있다. 소은과의 만남에 대해서 한 장을 할애하고 있기도 하므로 박홍규 철학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라면 <탐독>을 슬쩍 참조할 수도 있겠다).

 

 

 


두 번째 책은 한나 아렌트의 <정신의 삶 - 사유>(푸른숲)이다. 원제가 'The Life of Mind'인 이 책은 아렌트 철학을 집약하고 있는 만년의 대표작인데, 그녀는 1권인 ‘사유(Thinking)’와 2권 ‘의지(willing)’까지를 완성하고, 3권 ‘판단(Judging)’은 첫 페이지만을 타자기에 끼워놓은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재작년쯤에 김선욱 교수의 번역으로 (흔히 3권 ‘판단’을 대신하는 것으로 일컬어지는) <칸트 정치철학 강의>(푸른숲)이 소개된바 있는데, 오랜만에 아렌트의 주저가 번역되어 반갑다.

그해에는 김교수의 <한나 아렌트 정치판단이론>(푸른숲)까지 출간되어, 나로 하여금 (월드컵의 해였던) 2002년을 아렌트와 지젝의 해로 기억하게끔 했다. 그 ‘옛날’의 감흥이 약간은 되살아나는 듯하다. 정치의 계절에 20세기 최고의 ‘정치철학자’ 중 한 사람인 아렌트의 주저를 읽어보는 일도 뜻 깊을 듯싶다(*<정신의 삶> 2권이 출간될 때도 되지 않았나? 또다시 월드컵의 해인 만큼).

 

 

 



<정신의 삶>의 역자는 홍원표 교수인데, <아렌트와 하이데거>(교보문고)를 번역한 서유경 박사, 김선욱 교수와 함께 ‘아렌트 3총사’로 불리는 이로서, 레오 스트라우스의 <자연권과 역사>(인간사랑), 로이 보인의 <데리다와 푸코>(인간사랑) 등의 역서를 갖고 있으며(후자는 평이 그다지 좋지 않지만), 주저인 <현대 정치철학의 지형>(인간사랑, 2002)에서도 아렌트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아렌트 전문가의 한 사람이다(*이후에 <혁명론>도 역간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렌트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모든 번역이 다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아렌트 번역의 최악으로 일컬어지는 책은 <폭력의 세기>(이후)이고, <인간의 조건>(한길사)도 평이 좋은 편은 아니다). 이미 국내에서도 여러 권 나와 있는 아렌트 입문서 가운데 (분량으로나 가격 면에서도) 가장 추천할 만한 것은 김선욱의 <진리와 정치>(책세상, 2001)이다. 참고로, 김교수는 작년 지젝 방한시에 통역을 맡기도 했었다.

번역과 관련해서는 지난번에 소개한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도 좋은 평을 얻고 있다. 아직 완독하지 않았지만, 이 책은 “꼼꼼한 번역과 상세한 해설, 인물 소개 등 옮긴이의 성실함이 돋보”이는 번역서이다(그런 점에서 드물게 보는 ‘인문번역서’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앞으론 그런, 역자, 그런 책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여담이지만, 지난주 <한겨레>의 고명섭 기자는 이 책을 소개하면서 “그의 저작 가운데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책”이라고 잘못 소개했는데, 자신의 ‘감’에만 의존하는 건 기자로서 불성실한 일이며, ‘폭탄’맞을 일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정보과학의 폭탄>(울력)이 번역돼 있다.

 

 

 



세 번째 책은 냉전사 연구의 대가라는 역사학자 존 루이스 개디스 교수의 <역사의 풍경>(에코리브르)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의 등장으로 위기에 몰린 역사학을 바라보는 현대적 해석을 담은 책.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과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뒤를 잇는 역사학 입문서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고 소개되는 이 책은,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복잡성이론이나 카오스이론 같은 비선형 과학의 통찰을 역사연구와 적극 접맥하고자 하는 시도 때문에 나의 눈길을 끌었다.

개디스 교수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 대학원을 옮기기까지 한 역자는 그의 세미나에 직접 참석한바 있는데, 첫 학기 내내 쟁쟁한 현역 과학자들로부터 새로운 과학이론 강의를 들어야 했다고(이건 부러운 일이다). 그런 역자의 번역인 만큼 신뢰감이 느껴진다. 개디스 교수의 주저 가운데는 <새로 쓰는 냉전의 역사>(사회평론, 2002)가 이미 번역돼 있는데(역사학쪽이라 나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지만), 680쪽이 넘는 분량이다.

 

 

 



네 번째 책은 개이비 우드의 <살아있는 인형>(이제이북스)이다. 이 책은 영감을 주는 책이라기보다는 정보를 주는 책으로 분류될 만한데, ‘살아있는 인형’을 만들고자 했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호프만의 <모래인간> 때문에 이 주제에 나는 더 흥미를 갖게 됐는데, 인간과 인형(기계)란 주제에 관해서 한번 숙고해 보고자 할 때 아주 요긴한 참고문헌이 되어줄 만한 책이다(그러니까 책을 쓸 때 필요한 책이기도 하다).

 

 

 



다섯 번째는 몰아서 얘기하도록 한다. 버지니아울프학회에서 단편집 <유산>(솔)을 번역 출간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사실 이 번역서나 버지니아울프도 아니라, 이런 작업을 꾸준히 ‘책임감 있게’ 해내고 있는 ‘한국버지니아울프학회’이다. 아마도 가장 단합이 잘되는 학회인 듯싶다. 유사한 사례로 한국카프카학회에서 (역시 솔출판사를 통해서) 카프카전집을 펴내고 있지만, 일부 번역의 수준이 들쭉날쭉이어서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것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버지니아울프전집은 안정감을 준다. 곧 버지니아울프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을 날이 올 것 같다.

그리고, 폴 오스터 입문서로 인터뷰와 그의 작품세계를 다룬 <폴 오스터>(열린책들)가 번역돼 나왔다. 편저자들은 일본의 소장학자들이고, 역자는 고진의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산)의 역자이다. 별다른 이유없이 '감'으로 내가 오스터과로 분류하고 있는 윤대녕의 작품집 <누가 걸어간다>(문학동네)도 이번에 나온 신간이다.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인 <찔레꽃 기념관> 외 5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그러나저러나 오스터과에 속하는 작가/작품들을 내가 당장에 읽을 계획이 없으므로, 이들과의 본격적인 조우는 순전히 미래의 것이다.

 

 

 



끝으로, 정진홍 교수의 <잃어버린 언어들>(당대)을 지난주의 산문집으로 꼽을 만하다. 저자의 말을 잠시 빌면, “삶은 학문보다 큽니다. 잊어 잃어버린 언어들에 대한 회상은 그렇다고 하는 것을 제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새 언어를 낳는 학문하는 자리를 버리거나 그런 삶을 의도적으로 낯가림할 필요는 없습니다. 차디찬 이성으로 그 자리는 그렇게 완성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바탕은 아무래도 잃어버린 언어들에 대한 향수가 낳는 새로운 현실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삶은 학문보다 크며, 당연히 책보다 넓다. 하지만, 그걸 아는 건 책을 통해서이다. 불행히도 나의 경우엔 그렇다. 이건 고질일까, 불운일까? 그 고질을 떨치지 못하고, 그 불운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할 운명이라면(혹은 팔자라면) 나는 (당신이 지겨워하더라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I'll be back!(나는 당신의 등짝이 되겠습니다!)...

2004. 0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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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들에 치이다보니, 새로 나온 책들을 몇 권 사두고도 눈길 한번 주기 어렵다(*이 글은 2004년 3월 초순에 씌어졌다). 계획상으론 이 연재도 3번을 마저 채워야 하는데(*나는 러시아로 떠나기 전에 30회를 채우고자 했었다), 이래저래 더 바쁘게 됐다. 막간을 이용하여, 몇 권의 책을 소개하기로 한다.

 

 

 



지난주간에 나온 책들 가운데, 내가 가장 읽고 싶은 책은, 그리고 아마도 당분간은 읽기 힘든 책은, 조지 존슨의 <스트레인지 뷰티>(승산)이다. 물리학자 ‘머리 겔만과 20세기 물리학 혁명’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은 간단히 말해서, 겔만의 전기이다. 지난 주말 이전에 나는 이 책을 첫손에 꼽을 작정이었지만, 이미 여러 지면에 크게 소개되었기 때문에 때를 좀 놓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이 책을 언급하는 것은 이런 류의 책이 나에겐 ‘휴식’ 같기 때문이다.

같은 출판사에선 나온 <뷰티풀 마인드>(2002)와 마치 시리즈처럼 보이는 이 책은 칼텍(캘리포니아공대)의 동료이자 ‘적대자’ 리처드 파인만의 인기 덕에 좀더 빨리 소개된 감이 없지 않다. 이미 여러 권의 물리학 강의가 번역돼 있는 파인만이 ‘유쾌한 천재’의 전형이라면, ‘쿼크’(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에서 따온 말)의 '아버지' 겔만은 ‘괴팍한 천재’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사실 겔만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복잡성 과학을 소개하는 책들에서였다. 거기서 그는 복잡성 연구의 메카인 산타페 연구소의 ‘대부’로 자주 소개되었다(‘머레이 겔만’이라고 보통 표기되었다). 이 연구소와 관련된 내용도 신간의 마지막 부분에는 실려 있다. 바로 그 겔만이 어떤 인물이었고, 무슨 일을 한 것인지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라 할 만하다. 물론 부제처럼 ‘20세기 물리학’의 현장을 둘러보는 재미도 겸할 수 있겠고. 내가 ‘휴식 같은 책’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문학이나 철학쪽 책들을 읽는 게 내겐 ‘일’이라면, 교양과학서나 과학자들의 전기를 읽는 건 ‘휴식’이다. 여름에 휴양지에서 읽으면 더더욱 제 맛인!...

 

 

 



두 번째 책은 다른 지면들에선 아직 소개되지 않은(아마도 이번 주말 리뷰들에선 다루어질)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그린비)이다. 그간에 <정보과학의 폭탄>(울력, 2002)이 소개된바 있지만, 이번에 나온 신간을 통해서 이 ‘신형’ 사상가 비릴리오는 비로소 그 이름을 우리에게 각인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언젠가 잡지 <문화과학>에 비릴리오를 소개하는 글이 실린 적이 있다).

알라딘의 소개글에 의하면, “비릴리오는 속도가 전쟁과 권력, 정치와 문화에 끼친 변화를 면밀히 추적했다. 여기에는 속도의 가속화에 의한 변질 과정과 권력과의 상관관계도 포함된다. 인류는 속도를 통해 그들의 존재의의를 높여왔다. 그리고 서구인들은 생체속도(달리기, 돌격)와 동물적 속도(말, 코끼리, 연락용 비둘기)를 거쳐 기계적 속도(함대, 자동차, 탱크)를 선점함으로써 동양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속도는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서구의 악몽이 됐다.” 등등의 내용이 다루어진다고(*그의 인터뷰집 등이 먼저 소개된다면 그의 책을 읽는 어려움이 좀 덜어지지 않을까?).

얼핏, 보드리야르를 연상케 하는데(키워드가 ‘시뮬라크르’에서 ‘속도’로 달라졌을 뿐?), <정보과학의 폭탄>의 역자가 보드리야르 전문 번역자인 배영달 교수인 것도 그러 심증을 갖게 한다. 다행스러운 건 이번 신간의 역자가 배영달 교수가 아니라, 수잔 손택 전문 번역자로 나서고 있는 이재원씨인 것. 자신의 출판사 ‘이후’에서 책을 내지 않은 것은 ‘판권’ 때문으로 보이지만, 기간된 번역서들을 볼 때, 비릴리오로선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대개의 저자들은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이런 ‘운’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세 번째 책은 서정남 교수의 <영화서사학>(생각의 나무). 저자는 '영화 제임스 본드 007 시리즈의 서사체계 연구'란 논문으로 프랑스에서 학위를 한 ‘정통’ 영화서사학자이다. 이번에 두툼하게 나온 신간은 이미 예고돼 있었기 때문에 언제쯤 나오는지 궁금했었는데, 생각보단 빨리 출간됐다. 덕분에, 이 분야에 관심있는 독자들의 수고가 많이 덜어지게 됐다.

이 책은 그동안에 나온 이 분야의 역서들, <영화와 소설의 서사구조>(민음사, 1999),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동국대출판부, 2001), <영화서술학>(동문선, 2001), <영화와 문학의 서술학>(동문선, 2003) 등이 갖는 불편함을 한꺼번에 해소시켜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특히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은 믿기지 않는 오역들이 수시로 출몰하기에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말’ 입문서의 강점일 텐데, 다루어지는 내용도 기대보다 충실해 보인다.

영화이론 분야에서 국내 필자의 저작으로 내가 기억하는 건, 김용수, <영화에서의 몽타주이론>(열화당, 1996) 이후 처음이 아닐까 싶다. 박성수의 <디지털 영화의 미학>(문화과학사, 2001) 정도까지 더 끼워줄 수 있을까? 한국의 영화학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네 번째 책은 보조비치의 <암흑지점>(도서출판b)이다. 살레츨(살레클)의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에 이어서 ‘슬로베이나학파 총서2’로 나온 이 책은 거의 ‘번역-기계’를 자처하는 역자의 땀과 자부심이 배어 있는 듯한 책이다. 신간은 살레클의 책보다 더 매끈하게 번역돼 있기 때문에, 역자 특유의 ‘기계적인’ 번역(모든 universe는 ‘우주’로, articulate는 무조건 ‘조음하다’로 등등)과 몇 개 번역어에 대한 ‘습관’ 혹은 ‘고집’을 감안하면서 읽는다면(predemocratic을 ‘선-민주주의적’이라고 옮기는 식), 쉽게 보조비치의 통찰과 통할 수 있다.
내가 모든 번역서를 꼼꼼하게 읽는 건 아니지만(<스트레인지 뷰티> 같이 ‘휴식 같은 책’들은 발장난 치면서 읽는다), ‘일’로 읽는 책들은 ‘시’처럼 느리게 음미하면서 읽는다. (하도 얘기를 들어서인지) 이미 읽은 걸 또 읽는 듯한 기분으로 나는 지젝이 서문과, 벤담(벤섬)의 판옵티콘론을 다루고 있으면서 표제가 된 6장 ‘암흑지점’을 읽었는데, 옥의 티처럼 눈에 띈 오역/오타 두 가지를 지적해둔다.

(1)7쪽에서 ‘(절제되지 않은) 나체의 이와 같은 외양’ ‘이와 같은 나체의 외양’은 ‘this appearance of the (unmutilated) naked body’를 옮긴 것으로 ‘나체의 이 같은 출현’의 오역이다. 이미 6쪽에서 “‘자연적인’ 그 나체가 오로지 데카르트적 근대성의 공간 내부에서 출현했다”고 지젝은 지적하며, 그것을 부연하는 내용에서 나오는 부분인데, 역자는 ‘외양’에만 너무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2)190쪽, 중간에 ‘지각가능한 실재적 신체들’은 ‘perceptible real entities’를 옮긴 것인데, ‘지각가능한 실재적 실체들’로 옮기든가 (앞에서 entity를 ‘존재자’로 옮겼으므로) ‘지각가능한 실재적 존재자들’로 옮겨야 한다. 아마도 오타인 듯싶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이건 궁금한 것이기도 해서) 6쪽의 3행에서 역자가 “유사-여성주의적 주장을 때마침 생각해볼 때”라고 옮긴 대목에서 ‘때마침’은 (지젝이 즐겨쓰는) apropos of의 apropos를 옮긴 것인데, 이건 굳이 옮기지 않아도 되는 단어이다. 이후에 나오는 apropos를 역자가 굳이 옮기지 않은 것처럼. 유독 이 대목만 ‘때마침’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본 것일까?

또, 188쪽. “행동이 사고를 따르는 속도라고 해도, 여기서 실행이 명령을 따르도록 되어 있는 속도에 비해 가까스로 더 빠를까말까 하다”라는 벤섬 인용문은 “action scarcely follows thought quicker than execution might here be made to follow command.”를 옮긴 것인데, 일반적으로 scarcely나 hardly 같은 부정 부사어는 ‘거의 -않다’나 ‘결코 -않다’란 뜻이다(물론 ‘가까스로 -하다’란 뜻도 있다). 내 짐작에 이 문장이 번역과제로 주어진다면, 열에 아홉은 “사고에 뒤따르는 행동이라도 여기서 명령에 따르는 실행의 속도보다 결코 빠르지 않다.”라는 식으로 옮길 것 같다. 역자의 유머일까?

유머라고 하기엔 좀 썰렁한 대목도 있다. 160쪽에서, “벤섬이 ‘철학의 위대한 개혁가’였음을, 하지만 밀(J. S. Mill)의 견해와는 달리 ‘위대한 철학자’이기도 했음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판옵티콘과 허구이론이다.” 우리말로도 어색한데, 그건 ‘하지만’이란 접속사 때문이다. 원문은 “It is the panopticon and the theory of fictions that prove Bentham was not only 'a great reformer in philosophy' but, contrary to the opinion of J. S. Mill, also 'a great philosopher'."이다. 말 그대로 not only A but (also) B("A뿐만 아니라 B이다”) 구문인데, 거기서 but을 ‘하지만’이라고 굳이 번역하는 건 상당히 특이하다. 단순한 실수일까 싶었는데, 내가 읽은 대목 중 다른 한 곳에서도 이런 번역이 나오기 때문에, 나름대로 역자의 ‘지론’ 혹은 ‘노하우’인 것인지 궁금하다...

 

 

 

 
다섯 번째 책은 지난 연말에 나왔지만, 최근에 눈에 띈 이정호 교수의 <텍스트의 욕망>(서울대출판부, 2003)이다. 제목이 암시하는 바대로, 텍스트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읽기’를 표방하는데, 주로 영문학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여, 저자 나름의 정신분석학적 독해를 시도하고 있다. 편저를 포함해 10여권 남짓한 저자의 책들이 대부분 대학출판부에서 나온 데서 알 수 있듯이(대학출판부 ‘단골저자’이다), 신간은 교양서라기보다는 교양학술서로 분류됨 직하다. 문학을 전공하는 학부 3.4학년이나 대학원생들에게 적합하다는 뜻이다. 저자의 책들을 여러 권 갖고는 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읽지는 못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은 읽기에의 동기를 충분히 자극한다.

 

 

 



그밖에 미술 관련서들이 최근 1-2년 사이에 강세를 보이면서 국내 필자들의 수준있는 교양(학술)서들이 계속 나오고 있으나, 나의 안목은 첫눈에 그 질을 판가름할 만한 수준에 있지 않다. 최근에 신준형의 <파노프스키와 뒤러>(시공사)를 구입했는데, 전재국(전두환의 장남)이 운영하는 시공사의 책들도 요즘은 간간이 사는 걸 보면 책에 대한 욕심은 나의 정치의식을 능가한다(한동안 나는 시공 디스커버리 시리즈도 사지 않았었다). 존 쿳시의 신간 <철의 시대>(들녘)를 비롯하여 문학 신간들도 여럿 나왔지만, 현재로선 내가 카바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쿳시의 책은 왕은철 교수의 번역으로 이후에도 여러 권이 더 출간됐다. 그의 최신간은 얼마전에 나온 <어둠의 땅>이다).

 

 

 

 

한국소설로는 김종호의 <검은 소설이 보내다>(열림원)에 대해서도 아직 할말이 없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저 인상만을 적자면, 김종호는 ‘베게트과’에 속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영문과 경쟁하고 이인성과 경쟁한다. 그러니까 그의 이름 혹은 개성이 남기 위해서는, 정영문보다, 그리고 이인성보다 잘 써야 하며, 더 멀리가야 한다. 내 관심은 그것이다. 과연, 그는 어디쯤 가고 있는가, 라는 것(누군가 읽으신 분이 답해주시면 좋겠다). 그나저나, 다들 어디쯤 가고 계시는 걸까?..

2004.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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