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정국 속에서도 눈에 띄는 책들이 여럿 출간됐다(*이 글은 2004년 3월 중순에 씌어졌다). 저녁엔 시위에 나서더라도 책 읽을 시간은 충분하므로 여기에 몇 권을 소개한다. 아마도 당분간은 이 연재의 마지막일 듯싶다(*해서, 이 에피소드 시리즈의 마지막 글이다). (30)번을 채우지 못했지만, 사정이 그렇게 돼버렸다. 혹은 여운을 그렇게 남겨두기로 한다. 하긴, 누가 등떠미는 것도 아닌데...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작고한 철학자 박홍규 교수(법학자 박홍규 교수가 아니라)의 전집 3, 4권으로 각각 <형이상학강의2>(민음사)와 <플라톤 후기 철학강의>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이 전집의 1, 2권은 지난 95년에 출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바 있는데, 정말 오랜만에 나머지 책들이 출간된 것이다(‘나오단 만 책들’의 대표적 사례의 하나였다). 10주기를 맞은 고인의 기일이 지난 14일이었다고 하는데, 이후에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를 다룬 강의록이 마저 출간된다면, 하나의 ‘철학사적 기념비’가 세워지는 것이 되리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바이지만, 박교수는 서양철학사 전체가 플라톤과 베르그송, 두 철학자에 의해 집약되는 것으로 보는데, 그의 철학관은 <형이상학강의1>에 실린 ‘고별강연’에 잘 드러나 있다. 고전철학에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에게라도, 그 강연문은 일독을 권할 만하다(*<탐독>의 저자가 구상중인 책에는 <소은 박홍규와 서구 존재론사>도 포함돼 있다. 소은과의 만남에 대해서 한 장을 할애하고 있기도 하므로 박홍규 철학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라면 <탐독>을 슬쩍 참조할 수도 있겠다).

 

 

 


두 번째 책은 한나 아렌트의 <정신의 삶 - 사유>(푸른숲)이다. 원제가 'The Life of Mind'인 이 책은 아렌트 철학을 집약하고 있는 만년의 대표작인데, 그녀는 1권인 ‘사유(Thinking)’와 2권 ‘의지(willing)’까지를 완성하고, 3권 ‘판단(Judging)’은 첫 페이지만을 타자기에 끼워놓은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재작년쯤에 김선욱 교수의 번역으로 (흔히 3권 ‘판단’을 대신하는 것으로 일컬어지는) <칸트 정치철학 강의>(푸른숲)이 소개된바 있는데, 오랜만에 아렌트의 주저가 번역되어 반갑다.

그해에는 김교수의 <한나 아렌트 정치판단이론>(푸른숲)까지 출간되어, 나로 하여금 (월드컵의 해였던) 2002년을 아렌트와 지젝의 해로 기억하게끔 했다. 그 ‘옛날’의 감흥이 약간은 되살아나는 듯하다. 정치의 계절에 20세기 최고의 ‘정치철학자’ 중 한 사람인 아렌트의 주저를 읽어보는 일도 뜻 깊을 듯싶다(*<정신의 삶> 2권이 출간될 때도 되지 않았나? 또다시 월드컵의 해인 만큼).

 

 

 



<정신의 삶>의 역자는 홍원표 교수인데, <아렌트와 하이데거>(교보문고)를 번역한 서유경 박사, 김선욱 교수와 함께 ‘아렌트 3총사’로 불리는 이로서, 레오 스트라우스의 <자연권과 역사>(인간사랑), 로이 보인의 <데리다와 푸코>(인간사랑) 등의 역서를 갖고 있으며(후자는 평이 그다지 좋지 않지만), 주저인 <현대 정치철학의 지형>(인간사랑, 2002)에서도 아렌트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아렌트 전문가의 한 사람이다(*이후에 <혁명론>도 역간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렌트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모든 번역이 다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아렌트 번역의 최악으로 일컬어지는 책은 <폭력의 세기>(이후)이고, <인간의 조건>(한길사)도 평이 좋은 편은 아니다). 이미 국내에서도 여러 권 나와 있는 아렌트 입문서 가운데 (분량으로나 가격 면에서도) 가장 추천할 만한 것은 김선욱의 <진리와 정치>(책세상, 2001)이다. 참고로, 김교수는 작년 지젝 방한시에 통역을 맡기도 했었다.

번역과 관련해서는 지난번에 소개한 비릴리오의 <속도와 정치>도 좋은 평을 얻고 있다. 아직 완독하지 않았지만, 이 책은 “꼼꼼한 번역과 상세한 해설, 인물 소개 등 옮긴이의 성실함이 돋보”이는 번역서이다(그런 점에서 드물게 보는 ‘인문번역서’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앞으론 그런, 역자, 그런 책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여담이지만, 지난주 <한겨레>의 고명섭 기자는 이 책을 소개하면서 “그의 저작 가운데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책”이라고 잘못 소개했는데, 자신의 ‘감’에만 의존하는 건 기자로서 불성실한 일이며, ‘폭탄’맞을 일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정보과학의 폭탄>(울력)이 번역돼 있다.

 

 

 



세 번째 책은 냉전사 연구의 대가라는 역사학자 존 루이스 개디스 교수의 <역사의 풍경>(에코리브르)이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의 등장으로 위기에 몰린 역사학을 바라보는 현대적 해석을 담은 책.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를 위한 변명>과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뒤를 잇는 역사학 입문서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고 소개되는 이 책은,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복잡성이론이나 카오스이론 같은 비선형 과학의 통찰을 역사연구와 적극 접맥하고자 하는 시도 때문에 나의 눈길을 끌었다.

개디스 교수의 강의를 듣기 위해서 대학원을 옮기기까지 한 역자는 그의 세미나에 직접 참석한바 있는데, 첫 학기 내내 쟁쟁한 현역 과학자들로부터 새로운 과학이론 강의를 들어야 했다고(이건 부러운 일이다). 그런 역자의 번역인 만큼 신뢰감이 느껴진다. 개디스 교수의 주저 가운데는 <새로 쓰는 냉전의 역사>(사회평론, 2002)가 이미 번역돼 있는데(역사학쪽이라 나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지만), 680쪽이 넘는 분량이다.

 

 

 



네 번째 책은 개이비 우드의 <살아있는 인형>(이제이북스)이다. 이 책은 영감을 주는 책이라기보다는 정보를 주는 책으로 분류될 만한데, ‘살아있는 인형’을 만들고자 했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호프만의 <모래인간> 때문에 이 주제에 나는 더 흥미를 갖게 됐는데, 인간과 인형(기계)란 주제에 관해서 한번 숙고해 보고자 할 때 아주 요긴한 참고문헌이 되어줄 만한 책이다(그러니까 책을 쓸 때 필요한 책이기도 하다).

 

 

 



다섯 번째는 몰아서 얘기하도록 한다. 버지니아울프학회에서 단편집 <유산>(솔)을 번역 출간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사실 이 번역서나 버지니아울프도 아니라, 이런 작업을 꾸준히 ‘책임감 있게’ 해내고 있는 ‘한국버지니아울프학회’이다. 아마도 가장 단합이 잘되는 학회인 듯싶다. 유사한 사례로 한국카프카학회에서 (역시 솔출판사를 통해서) 카프카전집을 펴내고 있지만, 일부 번역의 수준이 들쭉날쭉이어서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것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버지니아울프전집은 안정감을 준다. 곧 버지니아울프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을 날이 올 것 같다.

그리고, 폴 오스터 입문서로 인터뷰와 그의 작품세계를 다룬 <폴 오스터>(열린책들)가 번역돼 나왔다. 편저자들은 일본의 소장학자들이고, 역자는 고진의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산)의 역자이다. 별다른 이유없이 '감'으로 내가 오스터과로 분류하고 있는 윤대녕의 작품집 <누가 걸어간다>(문학동네)도 이번에 나온 신간이다.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인 <찔레꽃 기념관> 외 5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그러나저러나 오스터과에 속하는 작가/작품들을 내가 당장에 읽을 계획이 없으므로, 이들과의 본격적인 조우는 순전히 미래의 것이다.

 

 

 



끝으로, 정진홍 교수의 <잃어버린 언어들>(당대)을 지난주의 산문집으로 꼽을 만하다. 저자의 말을 잠시 빌면, “삶은 학문보다 큽니다. 잊어 잃어버린 언어들에 대한 회상은 그렇다고 하는 것을 제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새 언어를 낳는 학문하는 자리를 버리거나 그런 삶을 의도적으로 낯가림할 필요는 없습니다. 차디찬 이성으로 그 자리는 그렇게 완성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바탕은 아무래도 잃어버린 언어들에 대한 향수가 낳는 새로운 현실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삶은 학문보다 크며, 당연히 책보다 넓다. 하지만, 그걸 아는 건 책을 통해서이다. 불행히도 나의 경우엔 그렇다. 이건 고질일까, 불운일까? 그 고질을 떨치지 못하고, 그 불운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할 운명이라면(혹은 팔자라면) 나는 (당신이 지겨워하더라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I'll be back!(나는 당신의 등짝이 되겠습니다!)...

2004. 03. 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