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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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1년의 마지막날에 쫓기듯이 책을 읽는다. 이 해가 가기 전에, 그리고 새해를 맞기 위해서. 월드컵의 해라고도 하고, '전쟁의 해'가 되리라고도 한다. 그리고 아마 선거의 해가 되리라. 지난 대선에서의 감격이 5년 동안 하강곡선을 그려왔지만, 새해에 그것이 다시 상승곡선을 그리리란 보장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급하게 책을 읽는다. 박노자가 그린 '한국사회의 초상'을 읽는다. 장담하지만, 이 '초상'은 좀 뒤늦게 등장한 올해의 책으로서 손색이 없다.

러시아인 블라디미르 티호노프에서 현재는 귀화하여 한국인이 된 그의 책을 읽으며(나는 그의 책을 꽤나 고대했었다), 나는 책의 부제가 말해주는 대로, '서로 잡아먹기를 탐내는' 이 전근대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아주 돼먹지 않은 나라, 대한민국에 사는 것이 속상하고 부끄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자랑스럽다. 그가 보기에 남한 사회는 권위주의와 차별의식으로 똘똘 뭉쳐진, 북한보다 그다지 나을 것도 없는 사회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그의 시각이 냉소가 아니라 뜨거운 비판이라는 데 있다. 그것이 뭔가 치부를 들킨 듯한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낯뜨겁게 한다. 하지만, 좀 있으면 목구멍이 뜨끈해진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거대한 뿌리>)라고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난 시인 김수영은 뜨끈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서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고도. 왜? 그것은 그에겐(=우리에겐)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낯선 러시아계(?) 한국인(!)의 책에서 나는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비판' 정신을 본다. 그리고 아직 그런 정신이 우리 사회에 살아있구나 하는 대견함과 안도감에서 나온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그것은 이창동의 영화 <박하사탕>을 몇 번씩 되돌려 보면서 속으로 흐느끼다가도 한편으로 이 감독과 영화가 대견스러워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가령 그의 비판은 이렇다. '대공분실에서 '통닭구이'나 재계에서 돈 뜯어먹기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우리의) 정치인에게 남은 생존방식은 딱 하나다. 바로 '핫바지'나 '우리가 남이가' 같은 '화두'를 들어 '전라도 빨갱이'를 때려잡는 무용담을 나누는 것이다.'(95쪽) 그런 비판이 우리 사회에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이만한 진폭과 열기를 동반한 비판은 드물었다.(택시 운전사 홍세화와 'B급 좌파' 김규항 정도를 떠올릴 수 있을까?) 아마도 그래서 눈에 띄었을 것이다. 몇 년전 한겨레 지면에 낯선 필자의 칼럼이 연재됐을 때부터 나는 그의 글들을 주의깊게 읽어왔다. 한국의 사회와 역사에 대해 나보다 박식한 그에게 주눅들기도 하면서. 이제 그 감동을 여러 사람과 공유할 수 있어서 반갑고 다행스럽다.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읽었으면 싶다. 특히, 남한도 북한도 다 싫지만, 이민갈 생각은 없는 사람들은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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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진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9
김선욱 지음 / 책세상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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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치와 진리'란 제목으로 미루어 매력적이면서도 광범위한 주제들이 다루어질 거란 예측을 하게 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부제를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이라고 했으면 보다 분명했을 듯하다. 하이데거와의 스캔들(?)로도 유명한 금세기의 손꼽히는 유태계 여성 철학자가 한나 아렌트이다.

아렌트의 주저인 <인간의 조건>이 이미 번역돼 있지만(저자가 이 번역을 인용하지 않는 걸로 봐서 그다지 신뢰할 만한 번역은 아닌가 보다.), 또 <폭력의 세기>와 <아렌트와 하이데거> 같은 책들도 이미 소개돼 있지만, 이 중요한 정치철학자가 지명도만큼의 호응은 얻고 있지는 못한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왜 아렌트가 중요한가, 그녀가 얘기하고 있는, 혹은 복권시키고자 하는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요긴한 안내서가 되고 있다.

아렌트에게 있어서 '철학은 확실한 진리의 준거를 가지고 정치 영역으로 들어오지만, 정치는 그러한 준거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79쪽) 만약에 진리의 준거와 기준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복수성(plurality)는 존중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정치의 실종이라는 말로 지적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 복수성의 실종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철인왕(=진리의 인간!)의 통치를 주장했던 플라톤이나 그의 계보를 따르는 정치가/정치철학자들이 실제로 한 것은 '정치의 목조르기'였던 셈이다. 정치란 진리의 영역이 아니기에, 그것은 언제나 떠들썩한 난장이어야 합당하다. 저마다의 의견이 활발하게 개진되고, 공감할 만한 합의점들이 모색되는 장이 바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이 떠들썩한 난장으로서의 정치는 그래서 두 얼굴을 갖는 듯하다. 그것은 '축복'이면서도 동시에 '저주'일 수 있기에. 그러나 정치의 축복이란 건 정치의 저주를 통과해가면서 얻어지는 지혜의 산물은 아닐까? 여기서 지난 60년대초 4.19에 의해 촉발된 정치의 장이 바로 군부(=확신의 인간들!)에 의해 짓밟혔던 사례를 떠올려보게 된다. 그리고 이어진 30여년 간의 정치의 공백을 회고해 보게 된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정치의 두 가지 조건이다. 무엇이 정치를 살아있게 하는가? 첫째는 생활의 여유, 즉 경제력이다.(그리스 민주주의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했다.) 그리고 둘째는 정치를 책임지는 시민들의 활발한 '활동'이다. '정치가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시민의 대표이기 때문이다.'(101쪽)

아렌트는 분명 기존과는 다른 시각에서 정치 현상을 해명하고 또 복원하고자 한다. 다가오는 선거의 계절에 우리가 축복의 공간으로서의 정치를 맞이하기 위해서라도 그러한 시각은 한번쯤 되새겨 봄직하다. 그녀의 또다른 책 <칸트의 정치철학 강의>도 빠른 시일내에 우리말 번역본을 얻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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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2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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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의 일부 교수들이 교육 내용을 하버드의 경제학과와 똑같이 만들자고 주장하는 믿기지 않는 소문이 있다고 한다. 저자가 전하고 있는 소문이다. 저자는 왜 그런 주장이 터무니 없으며 무책임한 주장인지(더불어 무식한 주장인지) 이 책을 통해서 설득력있게 밝혀놓고 있다. 그 일부 교수들에겐 아마도 '다른 경제학'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했던 것이리라.

비교문학과에 재직중인 철학자 로티의 출세작 <철학과 자연의 거울>(왜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이란 어색한 제목을 달고 출간됐는지 모를 일이다)을 읽으며, '철학이 가지 않은 길'에 생각이 미친 일이 있다. 인식론 중심의 철학, 즉 철학을 자연의 거울로 정향시키고자 했던 근대 철학의 기획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전혀 다른 철학이 가능했다면, 그 다른 철학은 어떤 것이었을까라는 생각 말이다. 그 생각은 즐거움과 씁쓸함을 동반한 것이었는데, '이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라는 것이 즐거움의 내용이라면, '근데, 이렇게 되고 말았어!'라는 게 씁쓸함의 내용이었다.

그런 즐거움과 씁쓸함을 신진 경제학도의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담은 이 책을 읽으면서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리고 그 가지 않은 길을 떠올렸다. 이번엔 경제학이 가지 않은 길! 그 길은 어떤 길인가? '경제학의 근본적 재구성'(10쪽)의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은 '경제 발전, 대량 소비, 산업 고도화, 자본 축적 등을 신봉하고 있는 현대의 경제적 패러다임이 주관적, 객관적 한계에 직면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징후가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162쪽)는 진단에서 떠올려지는 길이다. 저자는 그 길의 안내자로서 '경제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내세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면, 인간 욕망의 무한성과 재화의 희소성이라는 현대 경제학의 두 전제는 상대화된다. 즉 전혀 다른 경제학이 가능한 것이다!

그 다른 경제학을 프락시스의 경제학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언가를 생산하는 행위'라고 정의한 포이에시스가 가치합리성이 배제된 목적합리적 행위라면, 프락시스는 '행위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행위'로서 그 자체로 즐거움을 지향하는 행위이다. 즉 행복한 생활을 구성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단적으로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인생은 포이에시스가 아니라 프락시스이다'(112쪽)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포이에시스, 포이에시스적 경제학(=돈벌이 경제학)에 얽매여 살아왔던 것이다(우리는 시적인 삶을 살아왔던가?!). 그것이 저자가 부추기는 반성의 내용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들을 간략하게 거론한다. 거기엔 마르크스와 베블린, 폴라니, 그리고 케인스 등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리고 물론 저자 자신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저자에 대한 기대의 표시이다. 경제사상사의 윤곽이 아닌, 박진감 있는 프락시스 경제학의 그림을 마저 완성할 책임이 그 후예들에게는 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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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도시에 가다
이득재 지음 / 문화과학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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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M 쿳시의 소설 <페테르부르크의 대가>에서도 암시된 바 있지만,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무엇보다도 '페테르부르크'란 도시 공간의 작가이다. 그때의 페테르부르크는 근대 러시아의 모순과 운명을 집약하고 있는 상징적 공간이기도 하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제안하고 있는 것들도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한다. 요컨대 '페테르부르크를 알아야 도스토예프스키를 이해한다'는 것.(저자가 왜 '레닌그라드'란 명칭을 고집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레닌그라드의 현재 명칭은 페테르부르크이고, 도스토예프스키 시대에도 물론 페테르부르크였는데 말이다.)

책에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는 작품은 <죄와 벌>이다. 그리고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저자에 의해서 도시계획가로 변신 혹은 격상된다. 물론 이러한 관점이 작가와 작품에 대한 기존의 이해에 더 보탬이 된다고 주장한다면 별 문제는 없어 보인다. 다만, 거기에 한정하여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새로운 이해가 아닌 새로운 축소주의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할 듯하다.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와 영화를 다룬 4장에서 수많은 영화들을 제쳐놓고, 유독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와 <죄와 벌>을 비교하고,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두 편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두 편만을 대조시키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이왕 브레송 영화를 다룬다면, <백치>에 영감을 받았다는 <당나귀 발타자르>에 대한 분석은 왜 빠졌을까?) 그래서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은 저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그 주제들에 걸맞는 내용이 부피있게 다루어지지 않은 데서 느껴지는 아쉬움이다.

아마도 책을 급하게 준비한 탓인 듯한데, 내용들간의 유기적인 연관성이 부족한 한편으로 오타들도 눈에 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온순한 여인>(147쪽)은 <부드러운 여인>(151쪽)과 혼용되고 있고, '니끼타 미할코프'의 형인 영화감독 '안드레이 곤찰롭스끼'(콘찰롭스키가 맞다)는 그 아들로 잘못 소개되어 있다(122쪽). 타르코프스키의 책 <봉인된 시간>도 굳이 <시간 안에 새기기>(143쪽)란 제목으로 바뀔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어쨌든 '위대한'작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국내 저작이 매우 드문 형편에서 도스토예프스키란 이름만으로도 반가움을 갖게 해주는 책이다. 더구나, 저자는 그 '위대함'이란 꼬리표를 떼어내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보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가 위기에 처한 인문학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저자는 '책머리에'의 끄트머리에다 이렇게 적어 놓는다: '아무쪼록 본서가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단순한 깐죽거림이거나 냉소주의로 비쳐지질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 이 서평도 절대로 깐죽거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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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비평 - 이론과 실제
크리스토퍼 노리스 지음, 이현주 옮김 / H.S MEDIA(한신문화사)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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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크리스토퍼 노리스의 <해체비평 Deconstruction: Theory and Practice>의 증보판(1991)을 번역한 것이다. 1982년에 나온 초판이 해체비평 혹은 해체론에 대한 입문서 역할을 톡톡히 해냈기 때문에 노리스는 비평가로서의 명성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오해도 만만찮아서 저자는 이 증보판에는 특별히 후기를 달아서 그간의 오해에 대한 답변을 시도하고 있기도 하다.

입문서이긴 하지만, 저자의 독자층으로 간주하는 이들은 현대 문학이론의 최신경향에 관심을 가진 대학생/대학원생이거나 대학교수일 듯싶다. 따라서 문학이론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이는 읽어내기가 수월찮다. 게다가 우리말 번역 또한 깔끔한 것은 아니어서 '이게 과연 입문서가 맞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해체비평에 대해 좀 아는 사람에게는 별로 새로운 내용이 없어 보이고, 문외한에게는 불친절해 보인다.

번역의 문제. 가령, '전환사'(혹은 '전이사')로 옮겨지는 야콥슨의 shifter 같은 용어가 '이동장치'(15쪽, 142쪽)로 옮겨진다거나, 바타이유의 '일반경제'가 '보편경제'로 옮겨지고(96쪽), 'answerable style'이 어느 곳에서는 '어울리는 문체'로 또 다른 곳에서는'책임있는 문체'로 표기되고 있다. 프로이트의 위상학 topology(혹은 위상심리학?)이 '지역행동 심리학'(155쪽)으로 번역된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그냥 읽어나간다면, 해체비평의 '실제'에 대항하는 6장(미국의 해체비평)이 그런 대로 읽을 만하다. 주로 예일학파의 비평가들의 실제비평과 데리다와 오스틴/써얼의 논쟁을 다루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책에서 가장 훌륭한 부분은 본문이 아니라 참고문헌이다. 거의 60쪽에 달하는 목록은 해체비평의 현황에 대한 풍족한 눈요기를 제공한다 (메뉴만으로 배가 부르다?). 게다가 원어 그대로를 싣고 있어서 번역의 문제도 제기되지 않는다... 노리스의 책으로는 <데리다>(시공사)도 번역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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