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교외강좌에서 3주 연속으로 한국 현대시에 대한 강의를 맡게 됐다. 오늘이 첫날이었는데,  대략 '한국 현대시 개관'이란 제하의 강의였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좌이기 때문에(모두 여성이고 대부분이 주부) 가급적 평이해야 한다는 게 제1원칙이고, 웬만큼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게 제2원칙이다(요즘은 대학강의에서도 이런 원칙들이 요구되는 듯해서 유감스럽지만). 모두가 경청해주신 건 아니지만 고개를 끄덕이시는 분들이 더러 계셔서 보람이 없지는 않았다(요즘은 대학에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은 드물게 만난다).

강의자료로 쓴 것 중 일부는 이미 6년전에 써두고 강의했던 것이어서 이번이 말하자면 '재탕'이었는데, 그간에 늘어난 건 시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이래저래 순발력을 발휘하는 '능청'이 아닌가 싶다. 이전에 '기형도 시에 대한 편집증적 읽기, 분열증적 읽기'에 포함돼 있었던 간략한 현대시사를 조금 보충해가며 다시 올려놓는다. 이 또한 '재탕'일 텐데, '이미지-버전'이란 핑계가 없지는 않다(능청과 핑계가 어쩌면 나의 왼팔과 오른팔인가?). 읽기에/보기에 편하면 좋은 것 아니겠는가? 대신에 군더더기말들을 더러 집어넣었다.

강의는 시 일반론에 대한 얘기로 시작해서 20세기 초반부터 최근에 이르는 한국시의 대표적 시인들을 거명하는 식이었는데, 여기서는 20세기 시사에 대한 간략한 리뷰만을 정리해둔다.

 

 

 

 

<황무지>(1922)의 시인이자, 아마도 가장 유명한 20세기 시인, T. S. 엘리엇은 시뿐만 아니라 시론에서도 정력적이었는데, 그가 유달리 강조한 것은 전통과 역사의식이었다(러시아에서 '토마스 엘리어트'의 두툼한 비평적 에세이 선집이 작년에 나왔었는데, 나는 그가 '티. 에스. 엘리엇'이란 걸 뒤늦게야 알았다. '토마스'란 이름이 너무 낯설었기에! 거기에 러시아어로 번역된 평문 '전통과 개인의 재능' 등이 포함돼 있었을 터인데, 애석하게도 책을 구입할 여유가 내겐 없었다. 참고로, 엘리엇은 우리 시단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외국 시인의 한 사람이다. 비록 요즘은 '4월은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est month)'이란 <황무지>의 시구를 읊조리는 중고생들을 만나기가 아주 힘들 뿐더러 젊은 시인들조차도 '열심히' 읽는 것 같지 않지만).

 

 

 

 

모름지기 25세 이후에도 시를 쓰려는 자는 역사에 대한 '감'을 먼저 연마해야 한다는 것. 그가 말하는 역사는 단순한 시사(詩史)를 넘어서 종교사, 종교적/상징적 상상력의 역사에 걸쳐 있지만, 하여간에 시란 것이 젊은 날의 겉멋이나 치기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줄곧 강조하였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김춘수는 (25세 이후에도?) 시론(詩論)을 갖고 있지 않은 시인은 천재이거나 아마추어라고 평했는데(<시의 위상>), 시에 대한 자신만의 주관, 혹은 관념(idea)이 없다면 일찌감치 시는 그만두는 것이 좋다는 뜻을 그의 주장은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참고로, 시작법이 아니라 작시법이 거의 부재하는 한국 현대시에서 '천재'가 나오기는 매우 힘들다. 그것이 우리의 '언어적 조건'이다. 그러니 '치기'나 '도취'로 시를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시론은 필수적이다. 새삼 확인해두자면, '시론'이란 시에 대한 로고스, 즉 논리를 갖추는 걸 말한다).

그런데, 시론이란 것이 모국어에 대한 감각과 시사(詩史)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없이 가능하지 않다고 할 때,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시의 전통과 역사적 전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에 대한 부단한 의식 속에서, 그것과 맞서며 아주 조금씩 전진해나갈 따름이다. 시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편집증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시인은 그 이전에 씌어진 모든 시를 다 읽고 나서야 거기에 한 문장, 혹은 한 글자 덧붙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한 시의 역사를 재구성할 때, 20세기 한국시란 무엇이었나?(한국 현대시의 세 가지 원천으로 나는 민요, 한시, 그리고 번역시를 꼽는다. 김소월과 이육사는 각각 민요적 전통과 한시적 전통의 핵심에 놓여 있는 시인들이다. 이상은 많이 밝혀진 바이지만, '한국어'라는 자연어가 아닌 '기호'로 시를 썼던, 보다 정확하게는 문학행위를 했던 시인/작가이다) 20세기 초에 한국시의 기초를 이룬 시인들의 이름으로 김소월(혼의 시), 이육사(정신의 시), 이상(기교의 시) 등등의 계보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김윤식의 분류이다). 

 

 

 

 

 

 

 

 

 

하지만, 20세기를 통틀어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시인을 꼽으라면, 단연 시업(詩業) 60년을 넘긴 미당 서정주를 들 것이다(물론 미당에 버금가는 시인으로 백석을 꼽을 수 있겠지만, 그의 시업은 상대적으로 너무 짧았다. 때문에 백석은 '제도로서의 문학'과는 거의 무관한 시인이다. 물론 그의 계보를 따르는 시인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가령, <외롭고 높고 쓸쓸한>의 시인 안도현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의 정치적 과오 때문에 폄하되기도 하지만 그가 우리 부족시의 족장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이 '부족시'는 상대적으로 '국가'나 '민족'과는 무관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현역’을 자임하던 그의 시를 보라.

 

 

 

 

 

 

 

 

내 나이 80이 넘었으니/ 시를 못쓰는 날은

늙은 내 할망구의 손톱이나 깎어주자./ 발톱도 또 이쁘게 깎어주자.

훈장 여편네로 고생살이 하기에/ 거칠대로 거칠어진 아내 손발의

손톱 발톱이나 이뿌게 깎어주자.

내 시에 나오는 초승달같이/ 아내 손톱밑에 아직도 떠오르는

초사흘 달 바래보며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시를 못쓰날에 할망구 손톱 발톱 깎어주며 마음 달래는 일도 '이뿌게' 시로 만드는 그의 솜씨는 대가급이다. 그러나 서정주의 시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 있는, 체념적 달관 혹은 달관적 체념의 세계(비평가 김현은 서정주의 정신주의에 대해서 “그의 정신주의는 그가 그의 삶을 정면에서 바라보지 않는 데서 기인하는 태도의 희극”이라고 적은 바 있다. 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 참조)는 이념(idea), 혹은 형이상(形而上)을 배제한 세계이다(“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추천사(鞦韆詞)>는 구절에는 그의 체념적 달관이 집약되어 있다(참고로, 요즘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친일파' 미당의 시들이 거의 빠져 있다고 한다. 문학 교과서에서 경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라고. 대개 학생들은 교과서에 실린 시들을 '부정적으로' 인지하곤 하므로, 역설적이지만 미당 시의 독자들에겐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겠다. 학생들에게 미당의 시를 안 읽히는 방법은 교과서에서 빼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 '물리도록' 혹은 '신물이 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이념-이후에 그는 “가난이란 한낱 襤樓에 지나지 않는다/.../ 靑山이 그 무릎 아래 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無等을 부며>)는 사실에 만족한다. 그것이 또한 달관적 체념의 세계이다). 참고로, 한국시에 형이상학적 깊이가 결여돼 있다는 비판은 김우창 교수의 평문 '한국시와 형이상'을 참조할 수 있다(<궁핍한 시대의 시인> 혹은 <김우창 전집1> 참조. 나는 이 절판된 전집에 재출간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기이하며 유감스럽다. 더불어 유감스러운 건 김화영 교수의 <미당 서정주의 시에 대하여>(민음사, 1984)도 절판된 채로 다시 구해보기 어렵게 된 것. 본격적인 시인론이자 시분석론인데 당시로서는 드문 시도였다).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같이 활동했던('부락'은 일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천민집단'을 뜻하는 걸로 안다) 청마 유치환은 서정주와 달리 이념적 ‘깃발’을 표나게 내세운 바 있으나, 언어적 조탁에 있어서 그에 미치지 못했고, 한자어투로 이루어진 그의 남성적 어조는 계보를 얻지 못했다(청마를 가까이 한 이에 김춘수가 있지만, 김춘수의 여성적 세계는 유치환의 남성적 세계와 대조적이다. 김춘수 자신이 시인하는 바이지만, 그의 초기시는 서정주의 계보에 속한다). 그리고 그의 시업(詩業) 또한 너무 일찍 한국시사에서 단절되었다. 그리하여 멀리는 40년대부터, 한국시단은 미당과 그 일가(一家)에 의해 접수된다(이른바, '미당스 패밀리' 되시겠다. 문단 용어로는 '미당 사관학교'라 하고).

 

 

 

 

 

 

 

 

한편으로, 한국시사에서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사례인 ‘청록파’의 경우, 박두진의 몇몇 시편들을 제외하면 비이념적 정관적(靜觀的) 세계관에 침윤되어 있다. 박목월의 경우가 대표적이지만, “구름에 달가듯”한 세계엔 이념이 틈입할 여지가 없다. 그림(=풍경)만 남고 목소리가 빠진 시는 왜소하다(지난주 고종석도 자신의 연재 '시인공화국의 풍경들'에서 지적한 것이지만, 이러한 '과대평가'에 한몫한 것은 이 세 시인이 모두 훌륭한 인격으로 후배 시인들이나 학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이들과 다른 경향의 시(인)들이 문학사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하여 여기에 유사-오디푸스 콤플렉스가 개입한다. 미당 이후의 시인은 하여간에 시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미당과 싸워야 했다(김현의 어투이다). 그를 넘어서거나 그와 다른 세계로 질주해야만 했던 것이다. 5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이 잠시 시림(詩林)을 떠들썩하게 했지만(박인환, 김수영 등이 참여한 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곧 빈수레였다는 것이 들통난다. 그들은 木馬를 타고간 소녀의 옷자락 얘기만 잠시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언어(말부림)’를 가지고 미당에 맞서 그보다 윗길로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고은 정도가 서정주의 어법을 가지고도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남은 희귀한 사례이다. 그의 시업이 60년을 넘길 수 있을는지? 한편, 미당학교의 '장학생'이었던 박재삼 등도 거명할 수 있을 것이다). 

 

 

 

 

 

미당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한 대안이라는 것은 미당의 이념적 ‘퇴행’을 걸고 넘어질 수 있는 이념이어야 했다. 60년대 김수영과 김춘수는 이 점에서 제각각의 방식이긴 하지만, 뚜렷하다. 60년대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이념적 화두가 ‘자유’였다는 점에서 김수영은 6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손색이 없다. “달나라의 장난” 같은 그의 시가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노래, 아니 절규한 것이 바로 자유였기 때문이다. 산문적인 그의 시의 어법 또한 미당과는 전혀 종류를 달리하였다. 4.19 이후에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그 방을 생각하며>)고 그는 적고 있는데, 조금 다른 맥락에서, 김수영은 미당의 그늘 아래 놓인 해방 이후 한국시사에서 자신의 ‘방’을 마련한 드문 예에 속한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김춘수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미당의 빈 자리를 물고 늘어진다. 그는 언어의 이념(이라기보다는 관념)을 자신의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이 또한 의미(=역사)로부터의 도피, 혹은 퇴행이라는 혐의를 지우기 힘든 경우지만, 어쨌거나 언어의 가지 끝에 매달리는 데는 성공한다. 이념의 부재로 미당의 시를 특징지울 수 있다면, 김춘수의 시는 한술 더 떠서 의미의 부재를 지향한다. 언어적 자의식을 대표하는 그에게 시는 “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고 “얼굴을 가리운 나의 新婦”이다. 그것은 말부림의 세계가 아니라, 말 비우기의 세계, 의미의 빈 그릇의 세계이다. 그리하여 어쨌거나 김수영과 김춘수에 와서 한국시는 미당시에서 탈색된 근대성(=시대성)을 다시 획득한다. 그러나 그것은 김수영의 이른 죽음을 대가로 치른 것이었다. 그리고 맞은 70년대에도 미당시는 여전히 도전/극복의 대상이다.

 


 

 

 

 

 

 

젊은 전사들의 이름으로 평론가 김현은 황동규, 정현종, 오규원 등을 지목하고 있는데,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즐거운 편지>)의 황동규는 “물 빛 라일락의 빛과 香”을 가진 미당의 '永遠' 대신에 비극적 세계인식의 '자세'를 대립시키고,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병신 같은 女子, 시집 같은 女子...”(<한 잎의 女子>)의 오규원은 대상과 언어와의 관계를 의혹이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연기(緣起)론 세계인식에 딴지를 건다. 거기에 “나는 별아저씨, 바람 남편이지”의 시인 정현종의 '숨통'과 '걸음걸이'가 미당의 행보를 뒤쫓는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70년대를 증언할 수 있는 시인은 70년대의 포문을 연 <오적(五賊)>(1970)의 김지하이다. 그는 대뜸 이렇게 시작하지 않았던가. “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이 황토(黃土)의 땅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는 일에 비하면, 조곤조곤한 시들은 좀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가 70년대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것 또한 그의 ‘대표성’을 수긍하게 한다. 시 또한 감옥에 들어가 있어야 마땅했을 시기가 아니었던가.

 

 

 

 

 

 

 

 

 

80년대 한국시는 80년 광주에서 시작된다. 그보다 조금 먼저 등단한 이성복은 이 “정든 유곽”의 땅에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진단서를 제출한 바 있지만, 가장 명료하게 80년대를 규정한 이는 황지우이다. “여기는 초토입니다/ 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에프킬라를 뿌리며>) 여기서 황지우의 '초토'는 김지하의 '황토'에 견줄 만하다. 80년대는 죽음의 연대였고, 시인들은 네크로필리야(necrophilia)에 들린 파리떼처럼 몰려들어 그 죽음을 파헤치고 음미하였다. 죽음에 분노하였고, 그 부채의식에 통곡하였다. 간혹 미치기도 하였다. “아싸라비야, 도로아미타불”이나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찍이 나는>)고 한 최승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성복의 어법을 빌리자면, “모두 죽었는데, 아무도 죽은 줄 몰랐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죽음의 기운이 조금씩 떨쳐지는 것은 87년 이후이다. 그 이후 한국사회는 개량적․형식적 민주화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이어진 90년대에 80년대는 이미 '과거'가 돼 버리고, '후일담'이 횡행한다(한국사회는 가끔 (나쁜 쪽으로) 정신분열증적이다. 과거-망각(청산이 아니다!)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듯하다. 정신분열증적인 포스트-모던사회에서의 선전을 기대해볼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우울'을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을까?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 돼지들아!"

 

 

 

 

 

 

 

90년대적인 시(현상)으로 장정일과 유하의 경우를 들고 싶다(비록 그들이 등장한 건 80년대 말이지만).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의 장정일과 <무림일기>(1989),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유하는 키치적인 상상력과 패러디적인 기법으로 무장하고 “진지한 시”의 전통에 냉소를 퍼붓는다(이미지가 지원되지 않는군. 이게 언제적 유하인가?).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곱게 다졌으면,/ 이번에는 양파 1개를 곱게 다져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넣고/ 노릇노릇할 때까지 식혀놓는다/ 소리내며 튀는 기름과 기분 좋은 양파 향기는/ 가벼운 흥분으로 당신의 맥박을 빠르게 할 것이다...”; “그 무렵 하남 땅에서 민초들의 항쟁이 있었다/ 아, 이름하여 하남의 대혈겁(大血劫)/ 광두일귀는 공수무극파천장(空輸無極破天掌)을 퍼부어 무림잡배의 폭동을/ 무사히 제압했다고 공표, 무림의 안녕을 거듭 확인했다”

 

 

이들의 “가벼운 흥분”과 재미의 세계는 80년대적인 무거움과 극적이면서 단호하게 결별한다. 이는 새로운 시이면서, 시의 끝(=종말)이다. 근황? 장정일은 일찍이 시를 그만 두었고(소설을 쓰다가 급기야는 <삼국지>까지 옮기고 방송진행자까지 되었다. 오래 살고 볼일이다!), 유하는 영화계 주변을 맴돌다가 다시 시의 초심(初心)으로 되돌가겠다며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를 발표하고 욕을 먹는다. 하지만, 다시 영화를 만들고 이번엔 성공한다. 영화를 만든다는 건 생각만큼 미친짓은 아니다. 특히 요즘은.

 

 

 

 

 

 

 

 

 

그리고 기형도. 그의 시가 자리하는 건 80년대 말이다. 이 글은 전체가 사실 기형도론의 서론으로 씌어진 것이기도 했다. 물론 100년의 한국시사가 두 쪽 분량으로 요약될 리는 만무하지만, 적어도 (편집증적인 시읽기에 있어서) 시의 전사(前史)를 모르고 한 시인에 대해 말한다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전공작이 필요하다고 당시엔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시에 대해선 얼마전에도 몇 자 적어둔 바 있다. 언젠가 제대로 된 규모의 글을 쓴다면, 아마도 이 전사(前史) 또한 제대로 된 규모로 재구성되어야 하리라. 제대로 읽는다는 건 제대로 사는 것만큼이나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05. 12. 28.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8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woshot 2005-12-28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공들인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poptrash 2005-12-29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학기에 미당의 제자이신 노교수님께 한국 문학사를 배웠어요. 비록 달리고 달려도 해방직전까지 겨우 배울 수 있었을 뿐이었지만. 좋은 글 잘봤습니다.

jiwok 2005-12-29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십니까? 로쟈님.
잘 읽었습니다.
저는 2차대전 러시아 사회에 대해 관심이 있는 회사원 입니다. 실례되는 것은 알지만 마땅한 자료를 구하지 못해서요. 궁금한 것은 한국에 번역된 서적 중 1940년대 독-소 전쟁 시기에 대한 경험담/개인적인 회고록/소설/ 역사서 등이 있는지요? "여기 들어오는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은 읽었습니다만 자주 인용되는 서적 중에 Vasilli grossman의 "Life & Fate"가 있던데 매우 궁금했습니다만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로쟈 2005-12-29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을 검색해보니까, 그로스만의 책은 8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고 불역본이 들어와 있네요(원저는 물론 러시아어본입니다). 말씀대로라면 영역본도 있겠습니다. 스탈린시대에 관한 회고록 등은 차고 넘치치 않을까 싶습니다. 최근에 그와 관련한 국내 논문들을 교정할 일이 있었는데, 요즘은 학술논문들이 원문 서비스가 되므로 그쪽을 검색해보셔도 되겠습니다. 톰슨의 20세기 러시아사 책도 참고할 만하겠고, 역자가 전문가이므로 저보다는 더 확실한 답변을 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한번 문의해보시길...

jiwok 2005-12-2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1.
스탈린 시대에 관한 회고록 등이 차고 넘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모두 학술논문인가요?

2. 저의 구체적인 관심사는 독-소 전쟁 시기의 전쟁을 경험한(전선 또는 후방에서) 사람들의 이야기 입니다. 전투 그 자체에 대한 자료들은 많이 보유하고 있거든요.

건강하십시오.

추신) 로쟈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직업적 연관성이 높다해도 이다지도 분야의 포괄성과 깊이를 모두 안고 갈 수 있다는데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로쟈 2005-12-29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고록'들을 다룬 논문들도 많이 씌어지고 있고, 당연히 그 재료가 되는 회고록들은 넘쳐날 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올해가 러시아에서는 승전 60주년이었기에 이에 대한 관련서들이 쏟아져나왔을 거라는 짐작도 보태보고요. 개인적으론 스탈린주의와 그 시대 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회고록' 같은 1차 자료는 문학도들보다는 역사학도들의 관심대상입니다. 때문에, 제가 자세한 도움의 말씀을 드리지는 못합니다. 혹 관련서 집필 계획을 갖고 계신 건가요?

니브리티 2005-12-30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iwok님/2번 항목의 독-소 전쟁 경험과 관련한 소설이라면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이별없는 세대>가 잘 알려져 있는 거 같아요.(꽤 유명한 소설임)

니브리티 2005-12-30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전에 말씀드렸던 공간 오픈겸 해서 사람들을 오늘 30일 저녁 7시에 초대했거든요. 너무 늦게 말씀드리는 것 같은데,,;;;; 혹시 관심있으시면 나중에라도 한번 들러주시면 고맙겠습니다....www.800.or.kr (800은 서지분류상 문학 항목...--;;)

로쟈 2005-12-30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브리티님/ 저는 아이와 함께 지금 코엑스몰에 와 있습니다. 초대에 응하지 못해서 죄송하지만, 좋은 시간, 공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로쟈 2005-12-31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햇빛비둘기님/ 새해 인사에 감사드립니다. '내년에도' 열씸히 쓰겠습니다(생계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한도에서). 열씸히 읽어주시고 가끔은 코멘트도 해주시길. 물론 생계에 지장을 받으시지 않는 한도 내에서...
 

 

 

 

 

"문학은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에 이어지는 브리핑이다. 멀리 가진 못해서 <세계의 문학>((2000 봄호), 247쪽, 그리고 <비평과 진단>(인간사랑, 2000), 17쪽부터가 이 글에서 다루어질 범위이다. 두 국역본이 부분적인 차이가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한데, 이어지는 내용을 비교하여 읽어보면 이렇다.

(1)하지만 부정관사는 자신이 생성시키는 용어가 정관사, 'le', 'la'를 말하게 하는 형식적 성격을 상실한 경우에만 그 힘을 발휘한다. 르 클레지오가 인디언이 될 때, 그는 항상 미완의 인디언, 즉 "옥수수를 재배할 줄도 나무를 잘라 카누 한 척 만들 줄도" 모르는 인디언인 것이다. 그는 형식적 성격들을 획득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인접지역으로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카프카에 따르면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수영 챔피언이 생성되는 것이다. 모든 글쓰기는 운동경기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런 운동경기는 결코 문학을 스포츠와 조화시킨다거나 글쓰기를 올림픽 게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도피와 탈퇴 속에서 실행된다. 앙리 미쇼는 '침대에 누워있는 운동선수'라는 말을 곧잘 쓰곤 했다."(<세계의 문학>, 247-8쪽) 

(2)하지만 부정관사는 자신이 생성시키는 용어가 정관사 'le', 'la'를 나타내게 하는 형태적 문자기호들을 빼앗길 때에만 그 힘을 발휘한다. 르 클레지오가 인디언이 될 때 그는 항상 미완의 인디언, 즉 "옥수수를 재배할 줄도 나무를 잘라 카누 한 척도 만들 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형태적 문자기호들을 얻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이웃관계의 지대로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카프카에 따르면 일류 수영선수도 예전에는 헤엄칠 줄 몰랐다. 어떠한 글을 막론하고 운동경기 같은 것을 내포하고 있지만, 문학과 스포츠를 조화시킨다거나 글로 올림픽게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운동경기는 도피와 유기적 탈퇴에까지 미친다. 앙리 미쇼는 '침대에 누워있는 운동선수'라는 말을 곧잘 쓰곤 했다.(<비평과 진단>, 16-7쪽)

(3)But the power of the indefinite article is effected only if the term in becoming is stripped of the formal characteristics that make it say the. When Le Clezio becomes-Indian, it is always as an incomplete Indian who does not know "how to cultivate corn or carve a dugout canoe"; rather than acquiring formal characteristics, he enters a zone of proximity. It is the same, im Kafka with the swimming champion who does not know how to swim. All writing involves an athleticism, but far from reconciling literature with sports or turning writing into an Olympic event, this athleticlsm is exercised in flight and in the breakdown of the organic body - an athlete in bed, as Michaux put it.(영역본, 2쪽) 

 

 

 

 

먼저 첫문장. 상식적으로 알아둘 일이지만, 들뢰즈가 예찬하는 것은 정관사(le/la; the)가 아닌 부정관사(un/une; a/an)의 세계이다. 익명적 혹은 비인칭적 세계(그걸 '다중'적 세계라고 애써 해석하게 되면 들뢰즈와 네그리의 접점이 마련된다). (2)의 번역이 (1)을 베꼈다는 건 이 첫문장에서도 확인된다. 대략, '형식적 성격'을 '형태적 문자기호들'로 대체했을 뿐이다. 물론 이 대체는 엉뚱한 것이다. 불어의 caracteres가 영어 character와 마찬가지로 '문자'나 '부호'로 뜻도 갖고 있(겠)지만, 여기서는 부정관사 대신에 정관사를 말하게 하는 특성들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어떤 걸 말하는가? 시 한편을 예로 들어보자. 이성복의 '남해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여기서 1행의 '한 여자(a girl)'가 어떻게 2행에서 '그 여자(the girl)'로 한정되는가? '돌 속에 묻혀 있었던 한 여자'라고 구체화/인칭화됨으로써이다. 그때 '돌 속에 묻혀 있었던'이란 한정어구가 들뢰즈가 말하는 '형식적 특성들'이다. 그러한 특성들/한정들에 의해서 '한 여자'는 비인칭성(4인칭)의 평면에서 인칭화된 공간으로 이동한다. 번역에서 '자신이 생성시키는 용어'라는 건 좀 불친절한데, 가령 '여성-되기'에서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거시기-되기'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거시기'가 아무런 한정을 받지 않아야 하며, 따라서 정관사를 수반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언제나 '어떤 거시기-되기'인 것이다.

이로써 유추할 수 있는 것이지만, '베컴-되기'나 '박지성-되기' 등의 고유명사-되기는 유사-생성의 사례들이다. 진정한 생성(되기)은 거꾸로 침대에 누워 있는 운동선수(an athlete in bed)' 되기이다. (르 클레지오에 따르면) 그것은  미완의, 되다 만 인디언, 즉 옥수수를 재배할 줄도 나무를 잘라 카누 한 척 만들 줄도 모르는 인디언-되기이고, (카프카에 따르면)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수영 챔피언-되기이다(<비평과 진단>에서 "마찬가지로 카프카에 따르면 일류 수영선수도 예전에는 헤엄칠 줄 몰랐다."라고 옮긴 건 문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소치이다).

정리하자면, "글쓰기는 운동경기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런 운동경기는 결코 문학을 스포츠와 조화시킨다거나 글쓰기를 올림픽 게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도피와 탈퇴 속에서 실행된다."

'도피'란 건 흔히 '도주'나 '탈주'로 옮겨지는 걸 말한다. 보지는 못했지만, 빔 벤더스의 영화 중에 <페널티 킥을 맞은 골키퍼의 불안>(1971)이 있는데, 그의 이 장편 데뷔작은 페터 한트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그는 <베를린 천사의 시>도 각본 작업에도 참여했다). 참고로, 한트케의 최신작은 작년에 발표된 <돈후안>(이며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작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오스트리아의 여성 작가 옐리네크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노벨 문학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페터 한트케다. 내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건 여자였기 때문이다." 하여간에 그 영화는 주인공인 골키퍼 브루노가 페널티 킥을 맞은 불안 때문에 경기장을 빠져나가 배회하는 걸 줄거리로 하고 있고 있다. 그런 게 '도주'이다('탈주'는 좀 낭만화된 표현이다).

 

 

 

 

그리고 국역본들에서 '유기적 탈퇴'라는 건 좀 부정확해 보이는데, 그냥 몸(유기체)이 고장나거나 부상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운동선수이지만, '침대에 누워 있는 운동선수'라는 것. 해서 '슈팅 라이크 베컴'이 아니라 '브레이크다운 라이크 베컴'이다(베컴에 언제 누워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문장만 더 읽어보자: "사람들은 동물이 죽는 만큼 더욱 동물이 된다. 정신주의적 편견과는 정반대로 제대로 죽을 줄 알며, 죽음을 느끼거나 예감하는 것은 바로 동물이다. 문학은 로렌스에 따르면, 고슴도치의 죽음과 더불어, 카프카에 따르면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 '부드러운 연민의 몸짓으로 내밀어진 우리의 붉고 작은 발들.' 죽어가는 송아지를 위해 글을 쓴다고 모리츠는 말하곤 했다."

 

 

 

 

D. H. 로렌스(1885-1930)는 자타가 공인하는 20세기 영문학 최대 작가 중 한 사람이지만, 내가 별로 읽은 바가 없는 탓에 '고슴도치의 죽음'이 어느 작품(혹은 에세이)에 나오는 얘기인지는 모르겠다(캥거루라면 몰라도). 그의 작품들은 주요 장편들을 포함해 대부분 번역/소개된 걸로 알지만.   

 

 

 

 

그리고 문학은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카프카. 그의 작품들 또한 전집 규모로 소개돼 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없을 듯하고 남은 건 그냥 읽어주는 것이겠다. 또한 아마도 들뢰즈의 카프카론에 대해서는 물론 책 한 권 분량을 써도 모자랄 테니까 여기선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참고로 올해 나온 카프카 책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빌헬름 엠리히의 <카프카를 읽다(전2권)>(유로서적). 카프카 연구자 빌헬름 엠리히가 1958년에 발표한 <프란츠 카프카. 그의 문학의 구성 법칙, 허무주의와 전통을 넘어선 성숙한 인간>을 번역하여, 총2권에 나누어 담은 책인데, "막스 브로트의 카프카 해석이 지배적인 시점에서, 막스 브로트와 다른 견해로 카프카를 해석한 작품으로, 오늘날의 카프카의 작품해석에 다양성을 부여했다고 평가받는"단다. 카프카 애독자들의 즐거움이겠다. 전집판으로 <소송>(솔출판사)이 얼마전 출간된 것도 기록해둘 만하다.   

그리고 모리츠. 칼 필립 모리츠(K. P. Moritz)를 말하는데, 그의 작품 중 <안톤 라이저>(문학과지성사, 2003)가 번역돼 있다. "괴테가 당대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 바 있는 칼 필립 모리츠의 심리소설"로서 "'안톤 라이저'라는 한 소년의 유년시절과 성장과정을 성인이 된 화자의 시점에서 그리고 있다"는데, 소개에는 "보잘것 없는 신분, 가난한 집 자식으로 태어난 소년의 성장사는 사회의 무시와 멸시, 냉대로 얼룩져 있다. 주인공은 진정한 배웅과 교양에 목말라하지만,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영혼의 훼손과 마음의 상처는 더해만 간다. 야비한 세상에 주눅든 안톤은 자폐와 분열, 감정의 과잉 상태에 빠져든다. 경건주의 신앙의 실상과 그 이면, 허영과 위선으로 가득찬 중간계급의 행태에 대한 비판적 묘사는, 18세기 독일의 사회사라 볼 수 있다."고 돼 있다.

모리츠는 "1756년 독일 북부 소도시 하멜른의 궁핍한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나 모자 제조 기술을 익히는 견습생 생활을 했다. 에어푸르트 대학과 비텐베르크 대학을 다니며 신학을 전공하고 교사로 일하다가 1786년 이탈리아 여행길에 괴테를 만나 2년간 교류했다. 독일로 돌아온 뒤 1789년 바이마르 공국의 칼 아우구스트 공의 중재로 베를린 대학의 문학이론 및 고전문헌학 담당 교수가 되었다. 1793년 6월 26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그의 <안톤 라이저> 역자해설이 "'고통의 역사(Pathographie)와 소설의 형식"이란 제목을 갖고 있는 걸 보면, 사회사의 이면에서 '고통'이란 주제에 민감했던 작가로 보인다. "죽어가는 송아지를 위해 글을 쓴다"는 인용이 이해가 갈 만큼.

이해하기 까다로운 건 인용문의 첫문장인데, "사람들은 동물이 죽는 만큼 더욱 동물이 된다"(<세계의 문학>)나 "동물은 죽는 존재이기에 사람들은 더더욱 동물적이 된다."(<비평과 진단>) 같은 번역문들은 그 까다로움을 풀어주지 못한다. 영역본엔 "One becomes animal all the more when the animal dies."로 돼 있다(불어 원문은 "On devient d'autant plus animal que l'animal meurt."). 러시아어본은 "동물-되기는 동물이 죽을 때 더욱 확실해진다" 정도로 옮기고 있다.

 

 

 

 

문맥상, 그러니까 바로 앞에 나왔던 정관사/부정관사 문제와 연계시켜보자면, 여기서도 주목해야 할 것은 'the animal(l'animal)'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동물이 된다는 것은 특정한 동물이 되는 게 아니라 불특정의 동물이 되는 것이며, 죽음은 '그 동물'이라는 특정성으로부터 도주하는 것이자 해방되는 것이다. '남해금산'의 표현을 가져오자면, 죽음은 '그 여자'를 '한 여자'로 해소하고 다시 환원한다. 다시 '한 잎의 여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女子

이 시의 결론에서 "그러나 구누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라고 규정되는 것은 '한 여자'(=한 잎의 여자)가 결코 '그 여자'로 특칭되지 않는 것과 관련돼 있을 것이다(이 사랑은 '방법적 사랑'일까, '소유하지 않는 사랑'일까?). '여성-되기'라고 할 때 그 '여성'은 그러한 '한 여자'이면서 '한 잎의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여자'이다. '동물-되기'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죽어가는 동물이 될 때(동물들은 각자의/고유한 죽음을 죽지 않는다), 비로소 제대로 동물-되기에 이르며, 문학은 그때 거기서 시작된다. 이것이 들뢰즈 문학론의 핵심을 이룬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여간에 시간관계상 오늘은 여기까지 읽도록 하겠다(이런 진도라면 올해 안에 끝내긴 글렀다)... 

05. 12. 27-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번 "오늘도 나는 광야를 달려간다"에 이어지는 브리핑이다. 들뢰즈의 <비평과 진단>에 실린 에세이 '문학과 삶'  읽기인데, 지난번 브리핑에서 다룬 건 <비평과 진단>의 서문이었다. 텍스트 '문학과 삶'의 국역본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내가 지속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번역서 <비평과 진단>(인간사랑, 2000)에 실린 것이고(15-24쪽), 다른 하나는 계간 <세계의 문학>(2000년 봄호)에 실린 것이다(246-253쪽). 이 후자에 붙여진 제목이 "문학은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이다.

발행년도는 갖지만 후자가 먼저 출간되었는데, 가독성이 앞엣것보다는 낫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예비적인 정보 없이 두 텍스트를 읽어본다면, 후자가 전자를 교정한 번역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데, 문장이나 문투가 유사한 대목이 많다. 나는 <비평과 진단>의 번역이 <세계의 문학>의 번역을 베꼈을 거라는 의혹을 갖고 있다. 동일한 오역이 발견되는 대목도 있기 때문이다(나는 년도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세계의 문학> 번역이 <비평과 진단>을 베끼면서 교정한 것인 줄 알았다). 한데, 흔히 공부 못하는 학생이 컨닝하는 식의 번역이어서 베끼면서도 더 알아먹을 수 없도록 개악한 형국(그러기도 쉽지 않을 터인데).

아무려나 들뢰즈의 문학론을 집약하고 있는 텍스트를 정리해보도록 한다. 내가 주로 인용하는 것은 <세계의 문학>의 번역이며, <비평과 진단>은 필요할 경우에 대조하는 방식으로 글은 전개될 것이다. 처음 몇 문장은 이렇다.

  

 

 

 

"확실히 글쓰기는 체험한 재료에 표현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은 곰브로비치(Gombrowicz)의 말과 행동처럼 오히려 비정형이나 미완성을 향한다. 글쓰기는 늘 미완성으로 끝나는, 늘 일어나고 있는 생선/변화의 문제이다. 그것은 체험할 수 있거나 체험된 모든 재료를 벗어난다."(246쪽) 맨마지막 문장만 <비평과 진단>에는 "살기에 편하거나 체험된 모든 재료를 벗어난다"로 옮겨져 있을 뿐 두 번역본이 동일하다. '체험할 수 있거나/살기에 편하거나'는 불어의 le vivable(영어의 the livable)의 번역인데, 나는 언젠가 (<세계의 문학>에 대한 참조 없이도) '살기에 편하거나'란 번역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가능한 삶'이란 함축을 갖는 '체험할 수 있거나'가 내가 보기엔 더 정확한 번역이다.

Gombrowicz photo

 

 

 

 

 

 

폴란드 작가 비톨트 곰브로비치(1904-1969)의 작품은  <페르디두르케>(민음사, 2004)와 <포르노그라피아>(민음사, 2004)가 거의 동시에 출간됨으로써 국내에 소개되었다(<비평과 진단>에는 생몰년대가 '1905- '로 역주에 표기돼 있는데 무얼 참조한 것인지 모르겠다). 알라딘에 소개돼 있는 간단한 약력은 다음과 같다.

"1904년 폴란드 남부의 말로시체에서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뜻에 따라 귀족적인 가톨릭 학교를 거쳐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법학에 흥미가 없던 차에 대학 졸업 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철학과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곧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중단하고 귀국했다. 변호사 개업을 준비하는 틈틈이 작품을 쓰기 시작해서 1933년 첫 작품집 <미성숙한 시절의 회고록>을 출간했다. 평단의 비난과 대중의 지지를 동시에 받으며 작가의 길을 결심하고 희곡 <부르고뉴의 공주 이본>과 첫 장편 <페르디두르케>를 발표했다. 1939년 아르헨티나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다음 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소식을 듣고 귀국을 포기했다. 그 후 그의 작품은 나치에 의해 긴 판금에 들어갔다. 지방 신문사와 은행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리면서 두 번째 장편 <대서양 횡단선>을 완성했다. 1933년부터 잡지 <쿨투라>에 관여하면서 경제적 사정이 나아지자 다시 전업 작가로 돌아섰다. 1957년 폴란드 자유화 운동의 결과 일시적으로 검열이 약화되면서 몇몇 작품들이 출간되었지만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다시 금서로 묶여 1960년대 중반까지 판금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고국 폴란드에서와는 달리 30개 언어로 번역, 소개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세 번째 장편 <포르노그라피아>를 발표한 후 1963년 포드 재단의 기금을 받아 아르헨티나를 떠나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네 번째 장편 <코스모스>를 발표하고, 1968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1969년 프랑스 방스에서 별세했다."

그러니까 네 편의 장편소설이 그의 주저인 듯한데, 작년에 출간된 이 번역본들을 나는 아직 안 읽어봤기 때문에 논평할 처지는 못된다. 하지만 작년 모스크바 체류시에 러시아어로도 번역본들이 나와 있는 걸 확인했었다(기억에 구입하지는 않았지만). 참고로, 최근에 폴란드 문학의 거장 헨릭 시엔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 1846-1916)의 노벨문학상 수상작(1905) <쿠오바디스>(민음사)가 수상 100주년 기념으로 출간됐다(폴란드어 완역본은 최초가 아닐까 싶다). 라틴어 'Quo Vadis?'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란 뜻이다. 오래전 내가 본 영화에서는 라스트 신에서 베드로의 대사였다.

1905년이면 곰브로비치가 한 살 때이고, 프랑스에선 사르트르가 태어나던 해이다. 미하일 바흐친은 10살이었고, 그해 러시아에서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닥터 지바고>의 초반부에 묘사된다). 아래는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벌어진 차르 군대에 의한 시민 학살 장면이다(올해가 가기 전에 기억해 두도록 한다).  

Bloody Sunday Attack

아무려나 그해 가을 러시아와는 역사적으로 앙숙인 나라 폴란드의 작가 시엔키에비치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도 건너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것. 그리고 곰브로비치는 그 폴란드 문학의 또다른 거장이라는 것. 다시 들뢰즈로 돌아오면 첫문단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것은[글쓰기는] 과정, 다시 말해서 체험할 수 있거나 체험된 것을 가로지르는 삶의 이행이다. 글쓰기는 생성/변화와 불가분의 것이다. 우리는 글을 쓰면서 여성이 되거나 동물이 되거나 식물이 되기도 한다. 또한 미립자가 되어 지각 불가능한 것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여성-되기, 동물-되기, 식물-되기, 지각불가능한 것-되기 등은 들뢰즈 문학론의 '표지' 같은 것이어서 요즘은 우리 주변의 비평이나 논문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구호들'이다(가장 쉬운 안내는 콜브룩의 <질 들뢰즈>를 참조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작품론에의 적용은 <들뢰즈와 문학-기계>에 실린 글들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되기'의 사례들로 최근 시의 경향들을 분석해 보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과제 중 하나인데, 가령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안, 2005)가 여자-되기 혹은 여장남자-되기의 사례라면 김민정의 <날으는 고슴도치아가씨>는 동물-되기(보다 구체적으론 고슴도치-되기)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만한다(이에 대한 '읽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당장 돈이 되는 일도 아니므로).

들뢰즈의 이어지는 문단: "이러한 생성/변화들은 르 클레지오의 한 소설 작품에서처럼 특정한 선을 따라 서로 연계되어 있거나 아니면 러브크래프트의 힘찬 작품에서처럼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문, 문지방, 지역 등에 따라 모든 층위들에서 공존한다. 생성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남자가 모든 재료에 강요되는 지배적 표현형식으로 제시되는 한 남자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거들먹거리는 남자들은 들뢰즈적 생성(되기)에서 열외라는 얘기겠다(하긴 그들은 필연코 뭐가 돼야 할 만큼 뭐가 아쉬울 리 없을 테니까).  

<비평과 진단>에서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따라서 인간은 모든 재료에 강요된다고 주장하는 지배적 표현형식으로 표상되는 한, 사람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다."(16쪽)라고 돼 있다. 전혀 감을 잡고 있지 못한 번역이라는 걸 알 수 있다(클브룩의 <질 들뢰즈>에서도 역자는 '남자/남성'이라고 옮겨져야 더 적합한 대목들에서 'man'을 '인간'이라고 옮기고 있다). "사람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다"라니?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1940- )의 책들은 데뷔작인 <조서>(세계사, 1989; 민음사, 2001)를 필두로 해서 이래저래 20여 권 가까이 번역/소개돼 있다(그는 지난번 서울 국제문학포럼에 참석차 내한한 바 있으며 작가 황석영과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2001년인가에도 방한한 적이 있으니까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 내가 읽은 건 <조서>뿐이어서(그것도 15년쯤 전에 읽은!) "특정한 선을 따라 서로 연계되어 있"다는 르 클레지오의 작품(들)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 라고 쓰려는데, 들뢰즈의 각주에 따르면 "작품 <조서>에서 르 클레지오는 여자로의 생성, 쥐로의 생성, 그리고 지작할 수 없는 생성 속에 소멸해 가는 한 인물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로선 계속 도망다니는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H. P. 러브크래프트(1890-1937)는 내게 생소한 작가인데, '미국 출신의 호러 작가'라니까 그럴 만하다(호러는 소설이건 영화건 잘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 소개를 잠시 옮겨오면 "미국 로드 아일랜드주에서 태어났다.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가 8살 때 사망한 아버지, 신경질적인 어머니 아래서 악몽에 시달리는 유년기를 보냈다. 그 자신 18세에 정신쇠약으로 학교공부를 포기하고 독서광으로 지냈다. <위어드 테일즈> 등의 잡지의 인기작가였던 그는 생전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으나 현재는 진정한 '미국적 판타지의 창조자'로 평가받고 있다. 암으로 사망했다."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고 47살에 사망했으니까 애드가 앨런 포우만큼이나 불우한 작가의 계보에 속하는 모양이다. 국내에는 1992년부터 띄엄띄엄 소개된 걸로 나오는데, 올해 <러브크래프트 코드(전5권)>(책세상)이 한꺼번에 나왔으니까 그의 독자들에겐 '기념비적인' 해가 될 만하다. 판매율이 저조한 걸로 보아 그가 국내에선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어쨌든 영미문학 애호가인 들뢰즈에 따르면, 그의 "힘찬 작품에서처럼 (생성은)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문, 문지방, 지역 등에 따라 모든 층위들에서 공존한다."

"반면에 여성이나, 동물, 미립자는 자신의 고유한 형식화를 벗어나는 도피 성분을 항상 지닌다. 남자라는 수치심, 이것보다 더 좋은 글쓰기의 이유가 있을까? 주체가 여성일 때조차도 그녀는 여성으로 생성되어야만 한다. 이 생성은 그녀가 간청할 수 있을 어떤 상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생성은 어떤 형식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여성, 어떤 동물, 어떤 분자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인접지역이나 식별이 불가능한 미분화된 지대를 찾아내는 것이다."(247쪽)

세 가지가 지적될 필요가 있다. 먼저, "남자라는 수치심, 이것보다 더 좋은 글쓰기의 이유가 있을까?" 다시 말해서, 글쓰기는 남자임(being a man)으로부터의 도주이다. '글쓰는 자'는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에 대해 거북해 하고 부끄러워하는 자이다. 그리고, 둘째, "주체가 여성일 때조차도 그녀는 여성으로 생성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생물학적 여성은 들뢰즈의 여성-되기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그러니까 여자라고 해서 이 '여성-되기'에서 무슨 특권을 갖는 게 아니다). '여성'은 '소수자'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기에. 그리고 끝으로 이 되기의 지향점은 "어떤 여성, 어떤 동물, 어떤 분자"와 더 이상 구분/식별되지 않는 익명적, 비인칭적 장에 들어서는 것이다.

Andre Dhotel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의 에필로그는 '하나의 삶'이란 제목을 갖고 있는데, 그때 '하나의 삶(une vie; a life)'에서 '하나'가 뜻하는 바는 고유성이나 단독성이 아니라 이 '익명성'이고 '비인칭성'이다. 그 사례로 들뢰즈가 들고 있는 것은 앙드레 도텔(Andre Dhotel; 1900-1991)의 성상체(aster)이다. 들뢰즈의 각주에 따르면, 이 '성상체-되기'는 도텔의 <우화 같은 연대기(La Chronique fabuleuse)>의 225쪽을 참조할 수 있다(번역본엔 222쪽이라고 오기돼 있다). 나는 표지의 이미지만을 참조할 수 있는데(두번재 이미지), 혹 세번째 이미지의 풀 같은 종류가 아닐까 싶다(마지막 이미지는 작가 앙드레 도텔과 그의 캐리커쳐).

문학을 그러한 '성상체'로 만든다면, 거기서 "성(sexes)이나 속(genera), 계(kingdoms) 사이를 무언가가 지나간다." 여기서 '계'란 '동물계', '식물계'라고 할 때의 '계'이다. 이 사이로 지나간다는 말은 동물도 아니고 식물도 아닌,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분류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지나간다는 뜻이겠다. "예컨대 여자들 사이의 여자, 동물들 중의 하나처럼 생성은 언제나 <-사이>이거나 <-중에>이다."(영역: "Becoming is always 'between' or 'among': a woman between women, or an animal among other.") 그러니까 들뢰즈의 생성(되기)란 '군계일학(群鷄一鶴)' 즉 닭의 무리 속에 끼여 있는 한 마리 학이 되는 걸 뜻하는 게 아니라 '군계일계(群鷄一鷄)' 곧, 닭의 무리 속에 끼여 있는 한 마리 닭이 되는 걸 말한다. 왜 이런 노래 있잖은가. "나는 한 마리 이름없는 닭/ 닭이 되어 살고 싶어라" 이 닭털 같은 나날들을?!

 

 

 

 

05. 12. 25-27

P.S. 분량상으론 '문학과 삶'의 한 페이지를 읽었다. 글이 늘어지고 있는 탓에 몇 차례 분재해야겠다. 저녁시간이 다가온바 육신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도 먹어야겠고. 우리의 '두더지'는 다음 연재에서 죽을 것인바, '문학'도 그때 시작될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ai 2006-09-19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북입니다만, 동서의 H. P. 러브크래프트(HPL) 선집 판매가 저조한 건 수준(그리고 상식) 이하의 번역 때문일 겁니다. 동서에선 그 선집을 내기 전에 이미 몇 작품을 묶어 [공포의 보수]라는 한 권으로 낸 적이 있는데, 이번 선집에도 그 번역을 재탕했다고 하며 나머지 작품들 번역수준도 과히 기대 이하라고 하거든요. 국내 HPL 매니아들은 황금가지 쪽의 전집을 (기약도 없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로쟈 2006-09-20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언제나 걸림돌이 되는 번역...
 

보통은 12월 23일이 동지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어젯밤 자정 뉴스를 보니 어제가 동지였다. 뒤늦게 지난 주말 사다놓은 즉석 팥죽을 먹어볼까 하다가 야식도 이미 먹은 터라 참아두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야 (맛은 없지만) 구색을 차리느라 '동지 팥죽'을 먹었다(해서 이 글은 죽먹은 힘으로 쓰는 것이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건 '저 동지의 불빛 불빛 불빛'이란 시구였는데, 기형도(1960-1989)의 시 '위험한 가계 1969'에 나오는 것이다. 생각난 김에 몇 자 적어둔다.

 

 

 

 

제목 그대로 '위험한 家係-1969'는 초등학교 2학년쯤이었을 어린시절 가족사에 대한 회상으로 구성돼 있다. 6개의 절로 돼 있는데, 동지의 불빛이 언급되는 건 맨마지막 절이다.

그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 하시고 굳은 혀. 어느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에요. 우리가 모두 낫는 날이 봄이에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 보면 빙판 밑으로는 푸른 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 반듯한 불들은 꺼지지 않았다. 아주 추운 밤이면 나는 이불 속으로 해바라기 씨앗처럼 동그렇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비로소 찾아오는 우리들의 환한 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저 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 (<전집>, 95쪽)

 

 

 

 

기형도의 많은 시들이 그의 유년시절과 불행한 가족사에 바쳐져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것이다. '위험한 가계'는 그 사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그려내고/진술하고 있는 시인데, 그 시작은 아버지의 병환이다. 시의 서두에 진술된 대로,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92쪽) 그리고 이어진 건 이 가족의 '동지', 즉 '긴 밤'이고 '아주 추운 밤'이다(문득 일찍 겨울이 들이닥쳤다는 파키스탄의 지진 피해지역이 떠오른다). 유년의 화자가 희원하는 건 "우리가 모두 낫는 날" 곧, 아버지가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고, 가족이 다시 '봄'을 맞이하는 것이다. 올해처럼 눈이 많이 내렸다는 1969년 겨울의 일이다(물론 이번 호남지역의 폭설은 기상관측사상 '최악'이라고 기록된다지만).

 

 

 

 

시의 이 마지막 대목에서 유년의 화자는 그래도 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며 '환한 가계'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지금은 "해바라기 씨앗"처럼 웅크리고 자지만, 언젠가 "아주 큰 꽃"을 어머니에게 보여드릴 거라고 다짐해보는 것이다. 언제가는 '용수철(spring)'처럼 튀어오를 '아주 큰 꽃'과 '환한 가계'!  

1968년하면 떠올려지는 건 '68혁명'이지만, 1969년이 내게 떠올려주는 건 한 시인의 불행한 가족사이다(그런데 이 구체적 가족사는 '그토록 쓰라린 삶'이라는 보편성을 상기/환기시켜주는 힘을 갖고 있다. 그게 시의 힘이고 문학의 힘이다). 시인의 요절 1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1999년에 <전집>이 출간됐었는바, 우연찮게도 그건 이 시에서 제시된 가족사의 불행 30주년을 상기시켜주기도 했다(그 1999년 12월 말에 나는 한 독서대학에서 기형도의 시에 대해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1969년의 겨울, 이후로 시인은 20년의 삶을 더 살았을 뿐이다. 그는 어머니께 '아주 큰 꽃'을 보여드렸을까?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었을까?  

 

 

 

 

기형도가 유년에 가졌던 꿈이 특이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가상'으로만 설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론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여타의 유년시들과 기형도의 시를 차별화시켜주는 것일 듯싶은데, 시에서 그 방법론은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꽃 모종을요."라고 제시돼 있다. <전집>을 읽으면서 새삼 주목하게 된 것이지만, 기형도 특유의 '식물적' 상상력을 구성하는 핵심은 이 '모종'과 '전정'이다(내 견문에 이 '전정'에 최초로 주목한 비평가는 정과리이다. 기형도에 대한 그의 평문은 <무덤 속의 마젤란>(문학과지성사, 1999)의 가장 중요한 꼭지를 이룬다. 기형도에 관한 필수적인 참고문헌이지만, 나는 그가 이 '전정'을 기형도의 시적 세계관의 근간으로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모종'이란 다른 짝에 주목하지 않어서라고 생각한다).

전정(剪定)은 <전집>에 포함돼 있는 그의 일기 중 한 대목에 등장하는데(1982. 6. 16), 그는 먼저 '가치치기'란 뜻의 전문용어인 '전정(trimming)'을 정의하는바, "관수 재배에 있어서 균일한 발육과 수형(樹形)의 정리를 목적으로 가지의 일부를 잘라내는 일"이 전정이다. 그것은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인간에게도 누구나 잎이 주렁주렁 달린 가지가 서너 개 이상 있다. 그 개별적 가지들은 시간의 묶음이며 그 시차인 공간인 가지 안에는 석은 잎부러 부활해가는 잎, 돋는 잎 등이 달려 있다. 그 잎들은 나무의 물관, 체관의 관다발로부터 양분 및 수분을 공급받으며 또 외적인 요소, 즉 햇빛을 이용하여 녹색 동화작용을 일으켜 내적 에너지를 확충한다. 고로 잎은 나무(自我)와 햇빛(外界)의 유기적 매체이다. 개별 인간과 보편 세계의 이질성을 이어주는 것은 '동일인으로서의 인칭'이다. 우리는 그러한 인칭을 2인칭화(사랑, 친구, 가족)한다. 그러나 과수뿐 아니라 인간의 사육 기간 중에서 우리의 관계들 속에는 엄연히 칼날 같은 전정이 가해진다. 그것은 소극적으로 타의에 의한 단절의 전정과 적극적(주관성) 전정으로 구분한다."(<전집>, 321-2쪽)

 

  

 

 

이틀 전에 군대에 입대한 자신의 친구 조병준(내가 알기론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의 저자. 더불어, 성석제, 원재길 등이 일기 속에도 자주 등장하는 기형도의 절친한 친우들이었다)과의 관계(=가지)에 대한 상념을 채워나가고 있는 일기인데, 마지막 문단에는 이런 내용도 보인다: "자네가 보여준 믿음이나 우려는 정말 값진 것이므로. 너와의 가지는 나의 전정이 환상 그 밖으로의 소멸임을 내가 인식함으로써 톱날의 부위에서 벗어나야 함을 안다. 이러한 또 하나 나의 성찰이 순간적 긍휼이나 동정의 잔해로써 기억되지 않아야 함을 기원한다."(324쪽) 20대 대학생의 관념성(미숙함)이 엿보이는 문장이긴 한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기형도의 인식론적 구도이며, 그것은 '가지/전정(가치치기)'란 틀을 갖고 있다. 

그의 시들에서도 두드러지지만 다른 날짜의 일기들에서 빈번하게 출몰하는 식물성 은유들은 이 '가지/전정'의 틀이 기형도 세계인식과 언어운용의 '보편문법'이 아닌가란 생각마저 갖게 한다(오래 전 나는 '기형도의 보편문법'이란 제목의 평문을 기획했었다). 가령, "또 하나 내 청춘의 필름이여, 유리컵 속으로 곧게 뿌리를 내린 둥근 파의 유약함이여-"라거나 "기차 소리여, 나는 아예 네 앞에서 소리 죽여 울고 있는 캄캄한 정전의 필라멘트였지. 아니 하나의 전율로서 소스라치는 일년초 식물이었는지 몰라." 같은 대목들이 그렇다.

이러한 기형도식 식물(나무)의 자기규정과 생존방식이란 무엇인가? (1)나는 식물/가지이다. (2)나는 열매/성장을 위해서 가지치기(=아픔, 상실, 희생)를 해야 한다. (3)나는 (가지)모종을 통해서 삶을 다시 회복한다. 여기서 핵심은 물론 전정(가치치기)모종(옮겨심기)이다. 이런 구도를 전제로 할 때, 앞에서 인용한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란 시구는 그가 어린날에 깨달은 '삶의 방법론'을 집약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읽을 경우, 그의 시 '식목제'의 다음과 마지막 대목이 보다 명료하게 와닿지 않는가?  

보느냐, 마주보이는 시간은 미루나무 무수히 곧게 서 있듯

멀수록 무서운 얼굴들이다, 그러나

희망도 절망도 같은 줄기가 튀우는 작은 이파리일 뿐, 그리하여 나는

살아가리라 어디 있느냐

植木祭의 캄캄한 밤이여, 바람 속에 견고한 불의 立像이 되어

싱싱한 줄기로 솟아오를 거냐, 어느 날이냐 곧이어 소스라치며

내 유년의 떨리던, 짧은 넋이여

여기서 인용한 대목의 "개별 인간과 보편 세계의 이질성을 이어주는 것은 '동일인으로서의 인칭'이다."라는 문장을 음미해보자. '개별 인간'과 '보편 세계'의 매개자로 기형도가 설정하고 있는 것이 '동일인으로서의 인칭', 곧 그가 '사랑, 친구, 가족'이라고 토를 달고 있는 '2인칭'이다. 그리고 이때의 2인칭이야말로 기형도적 세계의 핵심이다. 그것은 개별적 자아의 테두리 바깥으로 가지치기되는 존재이면서 아직 3인칭적 보편 세계로는 편입되지 않은 상태의 무엇을 지칭한다.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이란 시에서 그 2인칭은 고드름이란 형상으로 응집돼 있다: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라고 2칭으로 호명되는 그 고드름(그런 의미에서 기형도의 시는 '2인칭의 시'이며, 이것은 1인칭적 고백이나 3인칭적 묘사와는 차별적인 시이다).

흔히 처마밑에 매달려 있는 고드름은 문밖에서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서 있지만 결코 바깥세계로 '도주'하거나 하는 '즐거운 액체'의 형상이 아니다. 한 자리에 붙박혀/꽂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식물적이며, 공중에 매달린 '가지모종'을 연상시킨다. 기형도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어쩌면 강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전정된 이후의 가지가 새로 모종되는 것처럼 어딘가에 꽂혀 뿌리를 내리고 싱싱한 줄기로 솟아올라 '불의 立像'이 되고자 하는 자기암시적 갈망이다. 하지만 그러한 갈망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자기정립을 현실화하기엔 그는 너무 연약한 '작은 이파리'였다(줄기가 아니라). 마치 이런 아버지의 운명을 따르는 것처럼: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시려고."

다시 1969년으로 돌아가보자. 반장이었던 유년의 시인에게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나서겠다고 하나, 시인은 만류한다: "선생님, 가정 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선생님은 말한다: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시인은 다시 말한다: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후에 시인은 긴 방죽을 걸어오며 몇 번이고 책가방 속에 들어 있는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한다. 그리고는 풀밭에 잠시 '꽂혀서' 잠을 잔다: "둑방에는 패랭이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강조는 나의 것)

'작은 씨앗들'이 '큰 꽃'을 피워내는 게 생명의 미스터리이고, 삶의 미스터리이다. 유년의 시인 또한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라고 대견스레 물을 때 그러한 미스터리를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과 의지를 동시에 피력한 것이리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미스터리는 그가 "끝끝내 갈 수 없는 生의 僻地"였다. 그는 다만, "저 고단한 燈皮를 다 닦아내는 薄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잠시 유예하던 '마지막 한 잎'이었기에...

05. 12. 23.

P.S. 이상이 내가 기형도의 시에 대해 갖고 있는 대략적인 구도(말하자면 '매트릭스')이다. 자세한 분석은 따로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이나, 핵심적인 얘기는 갈무리돼 있다. 끝으로 초등학교인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돼 있는 그의 시를 옮겨놓는다. 어제 김춘수의 시를 다루며 '울다'란 동사 얘기를 했었는데, 나를 울리는 건 '밤새 울었다'류의 그런 상투형이 아니라 그냥 한 어린아이의 훌쩍거림이다(나는 딸아이를 몇 번 훌쩍거리게 한 기억이 있다. 그런 생각하면 나도 훌쩍거리고 싶어진다). 당신 또한 '유년의 윗목'에서 한번쯤 훌쩍거려보았다면, 시는 그냥 이와 다른 게 아니어도 무방할 것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 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 주말에 저자로부터 <나의 우울한 모던보이>(창비, 2005)를 선물받고 가장 먼저 읽어본 건 3부에 실린 '구름과 장미의 나날'이란 글이다('술과 장미의 나날'이 아니다!). 김춘수(1922-2004)의 처녀시집 <구름과 장미>(1948)의 표제작인 '구름과 장미' 읽기인데, 작년 11월에 타계한, 한국시의 이 대표적 시인 한 분을 기억하는 겸해서 그의 글을 읽었고 이 글을 쓴다. 시인의 죽음에 기대어 그의 처녀작을 읽는다?

 

 

 

 

그게 억지스러운 일은 아닌 게 시인의 대담을 포함하고 있는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민음사, 2001)에는 (이전에 지적한 바 있지만) 김춘수의 데뷔시집 <구름과 장미>가 <죽음과 장미>로 오기돼 있다(233쪽). 이러한 예기치 않은 우연/은유에 기대어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장미 되어 오는 것"이라고 시작되는 시 '구름과 장미'의 후렴은 '죽음과 장미 되어 오는 것'으로 다시 읽을 수도 있는 것.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 릴케를 떠올린다면, '죽음과 장미'는 한편 그럴 듯한 커플이 되기도 한다.

해서, 작년에 나온 시인의 유고시집 <달개비꽃>(현대문학)이 이어서 김춘수의 시와 에세이 선집들이 올해에도 연이어 출간되었으나 거기에 동참한 바 없는 나는 나대로의 애도의 뜻을 이 자리에서 표하고자 한다. 그건 모든 시는 결코 아니지만 김춘수의 어떤 시들이 나를 즐겁게 했던 기억을 내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애도의 뜻을 담고 있는 페이퍼이지만 이 글은 '즐거운 책읽기'로 분류된다. 하긴 친구의 책을 읽는다는 건 살짝 흥분되면서도 즐거운 일 아니겠는가?   

1948년이면 김춘수의 나이 26살 때이고 청마 유치환의 서문을 달고 있는 이 처녀시집은 자비로 출판된 시집이다. 그러니까 이 글의 대상은 '원로 시인' 김춘수가 아니라 '새파란' 김춘수, 반세기가 넘어갈 그의 시의 여정을 이제 막 시작한 '풋풋한' 청년시인 김춘수이다. 나 자신도 더듬어보아야 할 그런 시절의 시인. 그때 그는 이런 걸 써놓았다.  

 

 

 

직접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구름과 장미>의 맨앞에 실려 있다는 이 시는 시 자체보다는 제목의 상징성 때문에 자주 회자되는 시이다. 그 출처는 바로 김춘수 자신이며 이장욱도 곧장 인용하고 있는 대목에서 시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구름은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말이지만, 장미는 낯선 말이다. 구름은 우리의 고전 시가에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장미는 전연 보이지가 않는다. 이른바 박래어다. 나의 내부는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 구름을 보는 눈이 장미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구름은 감각으로 설명이 없이 나에게 부닥쳐왔지만, 장미는 관념으로 왔다."

인용한 대목은 이장욱의 책에서 재인용하지 않고 <김춘수 문학앨범>(웅진출판, 1995), 187쪽에서 인용했다('이른바 박래어다'라는 한 문장이 더 들어간다). 이 책은 김춘수 시의 독자라면 필히 소장할 만한 책인데, '앨범'인 만큼 연대기와 작품론, 자선 대표작들은 물론이고 시인과 관련한 사진자료들을 다수 싣고 있다. 시인의 서문에 따르면, "사진을 중심으로 한 이런 따위 문학앨범은 나 자신에게는 하나의 좋은 기념물이 되겠고, 나의 독자들께는 하나의 참고물 또는 흥밋거리가 되어 주리라고 기대해" 볼 만한 책이다. 이른바 종합선물세트 유형이다.   

이 인용에 대해서 이장욱은 시인의 발언을 시인 자신에게 되돌리고자 하는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이 시가 미당의 구름이나 릴케의 장미를 환기시킨다는 식으로 얘기하려는 게 아니라고 밝히면서 그가 원하는 건 '텅 빈 오독'이며, "이 잘못읽기로 그의 시적 편력을 은유하는 것"이라고 미리 단서를 단다. 요컨대, "구름과 장미의 나날. 이것은 그의 기나긴 시적 편력을 요약하고 있는 표현일는지도 모른다"(287쪽)는 것. "이 기나긴 시적 편력은 구름과 장미의 '사이', 혹은 구름과 장미의 '너머'에서 한 시인의 필생이 거쳐온 고투에 다름아니다"(288쪽)라는 것. 그의 생각을 조금 따라가보고, 나는 나 대로의 '오독'을 제시해보겠다.

"보편적 세계의 저 헛것으로 떠도는 관념(구름)들과 구체적 세계에 피고 지는 이 부질없는 실존(장미)에 대해서라면, 하긴 세상의 어느 시인이 하염없지 않았을 것인가. 그가 한때 머물렀던 무의미, 혹은 비대상의 시학이란 이 하염없는 자유에 다름아니었을는지도, 혹시 모른다. 이 하염없음에 자유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가 말했듯 허무의 산물이어서 역설적이다. 그것은 구름(관념)과 장미(세계) 어느 쪽에도 온전히 귀의하지 못했던 자의 비애일 터이다."(287-8쪽)

데뷔작이라 할 만한 한편의 시 읽기를 통해서 이렇듯 한 시인의 시적 편력 전체를 읽어내는 건 '오독'이란 전제하에서도 과감하며 경탄스럽다. 비록 그 시적 편력이 거의 완료된 시점(2001년)에 씌어진 글이어서 예언적이라기보다는 사후적인 성격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긴 하지만. 나에게 흥미로운 건 사실, 이러한 과감한/경탄스런 결론이 아니라 '잘못읽기'의 과정이다(어차피 죽음으로 마무리될 거라는 점에서 모든 생애는 '비애'의 정조를 지우지 못한다. 해서, 내 생각에 '비애'는 시인 김춘수만의 것은 아니다). 이장욱은 2연부터 읽어나간다(1연은 전제이지만 3연에서 반복되기에 뒤에 읽어도 무방하겠다).

눈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보곤

밤엔 뜰 薔薇와 

마주앉아 울었노니

 

"시 속으로 바람은 불고 구름은 흘러간다. 구름은 눈뜨면 물 위에 담기는 부드러운 가상(假象)이다. 그것은 형태를 지니지 않아 만져지지 않으며, 그것은 수면에 스스로를 비추며 흘러갈 뿐이어서 인간의 규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구름은 드러냄과 사라짐의 경계를 스스로 지우며 저 하늘에 유구하다. 그래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님은 구름이 되어 온다."

 

우선 1-2행에 대한 읽기인데, 공감할 만하지만, 구름과 장미에 대한 시인 자신의 규정과는 다소 어긋나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구름/장미를 낯익음/낯섬, 감각/관념의 짝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데 이장욱은 구름을 '일부러' 가상관념으로 읽어낸다. 그건 물론 예고된 바대로의 '잘못읽기'이다(한데, 그는 어째서 이 '잘못읽기'를 통한 결론을 시인의 시적 편력에 대한 요약으로 제시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어지는 3-4행 읽기.

 

"장미는 밤의 뜰에 피어 그의 울음을 받아준다. 그것은 제 구체적인 아름다움으로 어둠속의 그를 위무하며, 그것은 그의 밤 그의 뜰에 피어 있는 바로 그 장미인 것이어서 허허로울 수 없다. 장미는 꽃 지는 계절에 지는 꽃잎들 속으로 흩어질 유한(有限)을 제 운명으로 지니지만, 그래도 님은 장미가 되어 온다."

 

앞에서 구름을 '부드러운 가상'으로 읽은 이장욱은 이번엔 '장미'를 '구체적인 아름다움'으로 읽는다. 한데, 내가 읽기에 이 시에서 장미는 '그 장미'의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어서 "그의 밤 그의 뜰에 피어 있는 바로 그 장미"라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책에 실린 다른 글 '단 하나의 장미'에서 그가 적어놓은 바를 참조하면, 보통명사로서의 장미에 대해서 우리는 아름답다거나 아름답지 않다고 판단할 수 없으며,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것은 '장미 일반'이 아니라 '바로 이 장미'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예술'이라는 것은 삶과 세계를 끊임없이 '고유명사화'함으로써만 존속한다. 대상을 '고유명사화'하는 능력이야말로, 시인의 자질이다."(97쪽)

 

 

 

 

 

 

 

 

 

그 '고유명사화'가 '이미지화'가 환치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면, 내 생각에 김춘수는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현저하게 결여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는 '이 장미'가 아니라 '장미'에 대해서 노래하며, 더 나아가 '꽃'에 대해서 노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유명사화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과 동의어이다"란 이어지는 단언에 기대어 말하자면, 김춘수는 사랑을 현저하게 결여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실, 시에서 '의미'까지 배제하려고 했던 시인이 사랑타령을 늘어놓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쨍한 사랑노래'야말로 反김춘수적이지 않을까? 유일한 예외라고 할 만한 것이 먼저 사별한 아내에게 바치는 시들을 모은 시집 <거울 속의 천사>(민음사, 2001)일 듯싶은데, 그런 경우에도 내 기억에 시인은 단 한번도 아내의 이름(고유명사)를 시에서 호명하지 않았다. 아내는 '거울 속의 천사'로 이미지화되면서 오히려 일반화/추상회되었을 뿐이다.

 

해서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이장욱의 읽기가 그의 약속대로 '잘못읽기'라는 것.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장미로서의 님은 나와 더불어 구체적으로 울고, 구름으로서의 님은 물 위에 가상으로 떠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구름과 장미의 대비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름을 물위에 담고 밤뜨락의 장미와 마주앉아 우는 자의 자세이다. 그가 기다리는 님은 구름과 장미가 되어 올 것이지만, 이것은 예정이나 필연 혹은 당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슬프고 한량없으니, 그 슬픔과 한량없음을 서술하는 동사들은 온전한 능동형으로 스스로를 견뎌내고 있다. 그는 하염없는 나날을 지나며 물위에 구름을 '담고' 장미와 '마주앉아 운다.'"(286-7쪽, 강조는 나의 것)

 

나는 장미의 구체성과 구름의 가상성이라는 대비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중요한 건 그러한 대비가 아니며 '우는 자의 자세'라고 하니까 굳이 더 캐묻지는 않도록 한다. 대신에 구름과 장미의 관계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자. 1연에서 '임은 구름과 장미 되어 오는 것'이라고 명료하게 전제돼 있지만, 이때 구름과 장미를 연결시켜주는 등위접속사 '과'는 연의 구조에 있어서도 병렬성을 낳는다. 해서 2연의 내용을 산문적으로 풀면, 이렇게 될 것이다.

 

(아침에) 눈뜨면 나는 (눈)물 위에 구름을 담아보곤 했다.

밤엔 뜰 장미와 마주앉아 울었다/울곤 했다.

 

'밤엔'이란 시간부사가 전제로 하는 것은 '아침에'이며 그것은 전제되는 것이기에 생략 가능하다. 그리고, 구름을 '물 위에' 담아본다라고 돼 있지만, 이때의 2행 문두의 '물'은 1행 문두에 나오는 '눈'과 호응하면서 쉽게 '눈물'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물 위에 담기는/비치는 구름이면서 나의 눈물에 맺히는 구름이기도 한 것. 그리고 그렇게 '눈물'을 떠올릴 때 우리는 4행의 '울었다'는 동사와 자연스럽게 조우할 수 있다. 3행에서 '뜰에 핀 장미' 대신에 왜 ('뜰장미'도 아닌) '뜰 장미'를 고집했을까? 나는 그것이 '눈면'의 '뜨'와 호응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시어의 경제를 위해서 공통되는 내용들이 생략되긴 했지만, 1-2행과 3-4행은 구문적으로, 의미론적으로 반복이며 이 경우 구름과 장미는 말 그대로 등가적이다(즉, '구름이거나 장미'가 아니라 '구름과 장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구름은 뭐고 장미는 뭔가? 시인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구름은 우리의 고전 시가에 많이 나온다. 그럼 장미는? 서양의 현대시에 많이 나온다(특히 릴케의 시). 이런 식의 설명이 암시하는 것은 소재로서의 '구름'과 '장미'가 막바로 우리시와 서양시를 제유하고 있다는 것. '구름과 장미' 자체가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시인-화자의) 임으로서의 구름과 장미는 바로 '시' 혹은 시의 뮤즈이며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고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임을 가졌으나 시인으로서 나의 임은 시, 즉 구름과 장미이다, 라는 게 내가 읽는 이 시의 1연이다. 여기서, 이장욱이 의도적으로 배제한 바이긴 하지만, "미당의 구름이나 릴케의 장미"가 다시 환기되는 건 불가피하다. 물론 이 경우 미당과 릴케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시인의 제유이지만.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시의 2연은 낮이나 밤이나 임(=시) 생각을 했다는 것 정도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우는 자의 자세'를 이장욱은 강조했지만, 김춘수의 초기시들에서 '울다'란 동사는 마치 상투어처럼 빈번하게 등장한다. 가령 '부재'라는 시에서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나 '길바닥'이란 시에서 "언덕에는 전봇대가 있고/ 전봇대 위에는/ 내 혼령의 까마귀가 한 마리/ 종일을 울고 있다" 같은 연, 그리고 잘 알려진 시 '꽃을 위한 서시'에서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無名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같은 시구들을 대하자면, 이 '울음'은 서양시에서 "새들이 노래한다"를 "새들이 운다"라고 우리말로 옮길 때의 그 울음인 것이어서 '한량없긴' 하지만, '슬픈' 것은 아니다(그것이 슬픈 경우엔 "슬픈 소리로 울었다"라고 명시된다). 즉, 김춘수 시의 '울다'란 동사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건 어떤 태도이지 정조가 아니다. 이제 3연이다.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薔薇 되어 오는 것

 

이장욱의 해설: "구름과 장미 사이에서 그는 중얼거린다. 저마다 사람은 님을 가졌으나, 참으로 누가 제 님을 보았을 것인가? 그는 저 온전한 님을 온전히 볼 수 없어서 구름과 장미 사이에서 망연할 것이지만, 결국 그 기다림의 자세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에서, 하늘'만'의 그 '만'이 비교급의 조사인지 유일함을 표시하는 조사인지를 우리는 확정할 수 없다. 다만 그와 더불어 50여년 전의 저 구름과 장미에서 오늘의 구름과 장미에까지 흘러갈밖에."(287쪽)

 

1행의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에서 생략된 것은 목적어이다. 이장욱은 "참으로 누가 제 님을 보았을 것인가?"(=아무도 님을 보지 못했다)로 풀고 있지만,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님을 그들 자신은 누구도 보지 못했다라는 건 다소간 모순되는 진술이다. 내 생각에 이 '보다'란 동사의 목적어는 2연이고 2연의 '나'이다. 밤낮으로 님(=시)을 그리워하며 눈물짓고 울고 있는 '나'를 참으로 누가 보았을 것인가, 라는 것.

 

이어서 "(그리움이) 염없는 일수록/ 하늘만 하였[다]"는 건 이장욱의 지적대로 문법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모호한 표현이지만, 음성학적으론 '하-날'/'하늘'로 호응하기에 정당화된다. 즉, 그건 동어반복이다. '하늘만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은 단호하게 "구름과 장미 되어" 온다. 이건 사실의 확인이면서 시적 화자의 결의이다(시집 맨처음에 왔다면, 이 시는 '서시'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렇게 읽을 수 있는 건 이미 충분히 암시되었지만 내가 이 시를 일종의 시에 대한 시, 즉 메타시로 읽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쯤에서 상기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김춘수가 우리시사에서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한 가장 강하면서도 분명한 자의식을 평생 유지했던 시인이라는 점이다. 내 견문으로 그는 가장 많은 분량을 '시론'들을 써낸 시인이다(낱권으로 7권이고 전집 2권 분량이다. 페이지수로는 1,200쪽 가량). 25살 이후에도 시론을 갖지 않고 시를 쓰는 시인들을 그는 '아마추어'라고 부르며 신뢰하지 않았다. 해서 내가 보고 읽기에 그는 이성적인 통제에 매우 능한 대표적인 지성파 시인으로서 감상성과는 거리가 먼 태도를 평생 견지했다.

 

비록 이 시에서 '장미'란 시어가 등장하지만, 그때의 장미는 구체적인 꽃이라기보다는 '장미'라는 기표이고 추상이다(김춘수는 생화(生花)를 싫어한 조화(造花) 예찬론자였다). '하염없다'란 표현도 나오지만, 나는 그것이 '울다'와 마찬가지로 시적 상투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하염없는 날들이 흘러가고 그의 님은 아직도 구름과 장미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형체 있는 것과 형체 없는 것, 만져지는 것과 만져지지 않는 것, 구체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그리고 결국에는 죄와 구원 사이."(290쪽)라는 이장욱의 지적에 유보적이다. 분명 '구름과 장미 사이'에 김춘수는 놓여 있지만, 그때 '구름과 장미'가 의미하는 바는 시의 전통이자 시의 테크닉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내부는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 시인 자신의 해설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건 바로 이 문장이다. 그 금은 구름(=감각=전통)과 장미(관념=서양) 사이의 금이며, 김춘수라는 시인의 주체를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가져오자면) '빗금쳐진 주체'로서, 그러니까 진정한 주체로서 정립시켜주는 금이다. 알려진 바대로, 그가 시에 입문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39년 일본에 유학을 가서 대입을 목적으로 학원에 다니던 시절 한 고서점에서 구해 읽을 일역판 릴케 시집을 발견하고서이다. 그리고, 이어서 만난 일본인 교수의 시론 강의에 매혹되어 그는 시인으로의 길에 들어선다(2002년에 나온 <쉰 한편의 悲歌>(현대문학)는 그가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를 모델로 하여, '마침내' 그와 대결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그의 첫시집이 나온 것이 (그는 '의미에서 무의미까지'란 글에서는 1947년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1948년이니까 대략 9년만의 일이다. 릴케의 시에 영감을 받아 시를 쓰게 됐지만(=의식) 한국어로 시를 써야 한다(=언어)는 자의식, 그것이 흔한 해석대로. '장미'와 '구름'이 의미하는 바이다. 나는 이러한 사정이 정서적으로 '비애'의 함축을 갖는다고 보지 않는다(비록 그가 역사에 대한 허무주의적 태도를 견지했지만, 이때의 허무는 분명 비애와 구별된다). '구름과 장미의 나날'은 무의미시만큼이나 그리고 형이상학만큼이나 테크니컬하고 건조하다. 적어도 김춘수의 경우에는.

 

05. 12. 22.

 

P.S. 김춘수의 '구름과 장미'란 시에 대해서 나는 한번도 주목해 본 적이 없다(이 시에 대한 시인의 언급은 물론 유의미하지만). 따라서, 이장욱의 글이 아니었다면 이 글은 씌어지지 않았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씌어졌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김춘수의 초기시는 따로 있는데, 그건 'VOU'이다(아마도 내 친구와 나는 시에 대한 취향이 많이 다른 듯하다). 아래는 그 전문이다.

 

VOU라는 음향은 오전 열한시의 바다가 되기도 하고, 저녁 다섯시의 바다가 되기도 하다. 마음 즐거운 사람에게는 마음 즐거운 사람에게는 마음 즐거운 한 때가 되기도 하고, 마음 우울한 사람에게는 紫色의 아네모네가 되기도 한다.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김춘수답지 않은 이런 시에는 다른 시들과 비교할 때 특별한 테크닉이 구사되고 있지 않다. 하지만, 한때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내게는 좋아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시이다. 그러니 '구름과 장미'보다 나는 '자색의 아네모네'를 기꺼이 더 사랑해마지 않는 것이다...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薔薇 되어 오는 것


눈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보곤

밤엔 뜰 薔薇와 

마주앉아 울었노니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薔薇 되어 오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