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오늘도 나는 광야를 달려간다"에 이어지는 브리핑이다. 들뢰즈의 <비평과 진단>에 실린 에세이 '문학과 삶'  읽기인데, 지난번 브리핑에서 다룬 건 <비평과 진단>의 서문이었다. 텍스트 '문학과 삶'의 국역본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내가 지속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번역서 <비평과 진단>(인간사랑, 2000)에 실린 것이고(15-24쪽), 다른 하나는 계간 <세계의 문학>(2000년 봄호)에 실린 것이다(246-253쪽). 이 후자에 붙여진 제목이 "문학은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이다.

발행년도는 갖지만 후자가 먼저 출간되었는데, 가독성이 앞엣것보다는 낫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예비적인 정보 없이 두 텍스트를 읽어본다면, 후자가 전자를 교정한 번역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데, 문장이나 문투가 유사한 대목이 많다. 나는 <비평과 진단>의 번역이 <세계의 문학>의 번역을 베꼈을 거라는 의혹을 갖고 있다. 동일한 오역이 발견되는 대목도 있기 때문이다(나는 년도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세계의 문학> 번역이 <비평과 진단>을 베끼면서 교정한 것인 줄 알았다). 한데, 흔히 공부 못하는 학생이 컨닝하는 식의 번역이어서 베끼면서도 더 알아먹을 수 없도록 개악한 형국(그러기도 쉽지 않을 터인데).

아무려나 들뢰즈의 문학론을 집약하고 있는 텍스트를 정리해보도록 한다. 내가 주로 인용하는 것은 <세계의 문학>의 번역이며, <비평과 진단>은 필요할 경우에 대조하는 방식으로 글은 전개될 것이다. 처음 몇 문장은 이렇다.

  

 

 

 

"확실히 글쓰기는 체험한 재료에 표현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은 곰브로비치(Gombrowicz)의 말과 행동처럼 오히려 비정형이나 미완성을 향한다. 글쓰기는 늘 미완성으로 끝나는, 늘 일어나고 있는 생선/변화의 문제이다. 그것은 체험할 수 있거나 체험된 모든 재료를 벗어난다."(246쪽) 맨마지막 문장만 <비평과 진단>에는 "살기에 편하거나 체험된 모든 재료를 벗어난다"로 옮겨져 있을 뿐 두 번역본이 동일하다. '체험할 수 있거나/살기에 편하거나'는 불어의 le vivable(영어의 the livable)의 번역인데, 나는 언젠가 (<세계의 문학>에 대한 참조 없이도) '살기에 편하거나'란 번역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가능한 삶'이란 함축을 갖는 '체험할 수 있거나'가 내가 보기엔 더 정확한 번역이다.

Gombrowicz photo

 

 

 

 

 

 

폴란드 작가 비톨트 곰브로비치(1904-1969)의 작품은  <페르디두르케>(민음사, 2004)와 <포르노그라피아>(민음사, 2004)가 거의 동시에 출간됨으로써 국내에 소개되었다(<비평과 진단>에는 생몰년대가 '1905- '로 역주에 표기돼 있는데 무얼 참조한 것인지 모르겠다). 알라딘에 소개돼 있는 간단한 약력은 다음과 같다.

"1904년 폴란드 남부의 말로시체에서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뜻에 따라 귀족적인 가톨릭 학교를 거쳐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법학에 흥미가 없던 차에 대학 졸업 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철학과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곧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중단하고 귀국했다. 변호사 개업을 준비하는 틈틈이 작품을 쓰기 시작해서 1933년 첫 작품집 <미성숙한 시절의 회고록>을 출간했다. 평단의 비난과 대중의 지지를 동시에 받으며 작가의 길을 결심하고 희곡 <부르고뉴의 공주 이본>과 첫 장편 <페르디두르케>를 발표했다. 1939년 아르헨티나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다음 날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소식을 듣고 귀국을 포기했다. 그 후 그의 작품은 나치에 의해 긴 판금에 들어갔다. 지방 신문사와 은행을 전전하며 생계를 꾸리면서 두 번째 장편 <대서양 횡단선>을 완성했다. 1933년부터 잡지 <쿨투라>에 관여하면서 경제적 사정이 나아지자 다시 전업 작가로 돌아섰다. 1957년 폴란드 자유화 운동의 결과 일시적으로 검열이 약화되면서 몇몇 작품들이 출간되었지만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다시 금서로 묶여 1960년대 중반까지 판금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고국 폴란드에서와는 달리 30개 언어로 번역, 소개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세 번째 장편 <포르노그라피아>를 발표한 후 1963년 포드 재단의 기금을 받아 아르헨티나를 떠나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네 번째 장편 <코스모스>를 발표하고, 1968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1969년 프랑스 방스에서 별세했다."

그러니까 네 편의 장편소설이 그의 주저인 듯한데, 작년에 출간된 이 번역본들을 나는 아직 안 읽어봤기 때문에 논평할 처지는 못된다. 하지만 작년 모스크바 체류시에 러시아어로도 번역본들이 나와 있는 걸 확인했었다(기억에 구입하지는 않았지만). 참고로, 최근에 폴란드 문학의 거장 헨릭 시엔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 1846-1916)의 노벨문학상 수상작(1905) <쿠오바디스>(민음사)가 수상 100주년 기념으로 출간됐다(폴란드어 완역본은 최초가 아닐까 싶다). 라틴어 'Quo Vadis?'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란 뜻이다. 오래전 내가 본 영화에서는 라스트 신에서 베드로의 대사였다.

1905년이면 곰브로비치가 한 살 때이고, 프랑스에선 사르트르가 태어나던 해이다. 미하일 바흐친은 10살이었고, 그해 러시아에서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닥터 지바고>의 초반부에 묘사된다). 아래는 1905년 1월 '피의 일요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벌어진 차르 군대에 의한 시민 학살 장면이다(올해가 가기 전에 기억해 두도록 한다).  

Bloody Sunday Attack

아무려나 그해 가을 러시아와는 역사적으로 앙숙인 나라 폴란드의 작가 시엔키에비치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도 건너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것. 그리고 곰브로비치는 그 폴란드 문학의 또다른 거장이라는 것. 다시 들뢰즈로 돌아오면 첫문단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것은[글쓰기는] 과정, 다시 말해서 체험할 수 있거나 체험된 것을 가로지르는 삶의 이행이다. 글쓰기는 생성/변화와 불가분의 것이다. 우리는 글을 쓰면서 여성이 되거나 동물이 되거나 식물이 되기도 한다. 또한 미립자가 되어 지각 불가능한 것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여성-되기, 동물-되기, 식물-되기, 지각불가능한 것-되기 등은 들뢰즈 문학론의 '표지' 같은 것이어서 요즘은 우리 주변의 비평이나 논문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구호들'이다(가장 쉬운 안내는 콜브룩의 <질 들뢰즈>를 참조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작품론에의 적용은 <들뢰즈와 문학-기계>에 실린 글들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되기'의 사례들로 최근 시의 경향들을 분석해 보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과제 중 하나인데, 가령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안, 2005)가 여자-되기 혹은 여장남자-되기의 사례라면 김민정의 <날으는 고슴도치아가씨>는 동물-되기(보다 구체적으론 고슴도치-되기)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만한다(이에 대한 '읽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당장 돈이 되는 일도 아니므로).

들뢰즈의 이어지는 문단: "이러한 생성/변화들은 르 클레지오의 한 소설 작품에서처럼 특정한 선을 따라 서로 연계되어 있거나 아니면 러브크래프트의 힘찬 작품에서처럼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문, 문지방, 지역 등에 따라 모든 층위들에서 공존한다. 생성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남자가 모든 재료에 강요되는 지배적 표현형식으로 제시되는 한 남자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거들먹거리는 남자들은 들뢰즈적 생성(되기)에서 열외라는 얘기겠다(하긴 그들은 필연코 뭐가 돼야 할 만큼 뭐가 아쉬울 리 없을 테니까).  

<비평과 진단>에서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따라서 인간은 모든 재료에 강요된다고 주장하는 지배적 표현형식으로 표상되는 한, 사람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다."(16쪽)라고 돼 있다. 전혀 감을 잡고 있지 못한 번역이라는 걸 알 수 있다(클브룩의 <질 들뢰즈>에서도 역자는 '남자/남성'이라고 옮겨져야 더 적합한 대목들에서 'man'을 '인간'이라고 옮기고 있다). "사람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다"라니?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1940- )의 책들은 데뷔작인 <조서>(세계사, 1989; 민음사, 2001)를 필두로 해서 이래저래 20여 권 가까이 번역/소개돼 있다(그는 지난번 서울 국제문학포럼에 참석차 내한한 바 있으며 작가 황석영과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2001년인가에도 방한한 적이 있으니까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 내가 읽은 건 <조서>뿐이어서(그것도 15년쯤 전에 읽은!) "특정한 선을 따라 서로 연계되어 있"다는 르 클레지오의 작품(들)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 라고 쓰려는데, 들뢰즈의 각주에 따르면 "작품 <조서>에서 르 클레지오는 여자로의 생성, 쥐로의 생성, 그리고 지작할 수 없는 생성 속에 소멸해 가는 한 인물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로선 계속 도망다니는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H. P. 러브크래프트(1890-1937)는 내게 생소한 작가인데, '미국 출신의 호러 작가'라니까 그럴 만하다(호러는 소설이건 영화건 잘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 소개를 잠시 옮겨오면 "미국 로드 아일랜드주에서 태어났다.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가 8살 때 사망한 아버지, 신경질적인 어머니 아래서 악몽에 시달리는 유년기를 보냈다. 그 자신 18세에 정신쇠약으로 학교공부를 포기하고 독서광으로 지냈다. <위어드 테일즈> 등의 잡지의 인기작가였던 그는 생전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으나 현재는 진정한 '미국적 판타지의 창조자'로 평가받고 있다. 암으로 사망했다."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고 47살에 사망했으니까 애드가 앨런 포우만큼이나 불우한 작가의 계보에 속하는 모양이다. 국내에는 1992년부터 띄엄띄엄 소개된 걸로 나오는데, 올해 <러브크래프트 코드(전5권)>(책세상)이 한꺼번에 나왔으니까 그의 독자들에겐 '기념비적인' 해가 될 만하다. 판매율이 저조한 걸로 보아 그가 국내에선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어쨌든 영미문학 애호가인 들뢰즈에 따르면, 그의 "힘찬 작품에서처럼 (생성은)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문, 문지방, 지역 등에 따라 모든 층위들에서 공존한다."

"반면에 여성이나, 동물, 미립자는 자신의 고유한 형식화를 벗어나는 도피 성분을 항상 지닌다. 남자라는 수치심, 이것보다 더 좋은 글쓰기의 이유가 있을까? 주체가 여성일 때조차도 그녀는 여성으로 생성되어야만 한다. 이 생성은 그녀가 간청할 수 있을 어떤 상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생성은 어떤 형식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여성, 어떤 동물, 어떤 분자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인접지역이나 식별이 불가능한 미분화된 지대를 찾아내는 것이다."(247쪽)

세 가지가 지적될 필요가 있다. 먼저, "남자라는 수치심, 이것보다 더 좋은 글쓰기의 이유가 있을까?" 다시 말해서, 글쓰기는 남자임(being a man)으로부터의 도주이다. '글쓰는 자'는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에 대해 거북해 하고 부끄러워하는 자이다. 그리고, 둘째, "주체가 여성일 때조차도 그녀는 여성으로 생성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생물학적 여성은 들뢰즈의 여성-되기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그러니까 여자라고 해서 이 '여성-되기'에서 무슨 특권을 갖는 게 아니다). '여성'은 '소수자'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기에. 그리고 끝으로 이 되기의 지향점은 "어떤 여성, 어떤 동물, 어떤 분자"와 더 이상 구분/식별되지 않는 익명적, 비인칭적 장에 들어서는 것이다.

Andre Dhotel

서동욱의 <들뢰즈의 철학>(민음사, 2002)의 에필로그는 '하나의 삶'이란 제목을 갖고 있는데, 그때 '하나의 삶(une vie; a life)'에서 '하나'가 뜻하는 바는 고유성이나 단독성이 아니라 이 '익명성'이고 '비인칭성'이다. 그 사례로 들뢰즈가 들고 있는 것은 앙드레 도텔(Andre Dhotel; 1900-1991)의 성상체(aster)이다. 들뢰즈의 각주에 따르면, 이 '성상체-되기'는 도텔의 <우화 같은 연대기(La Chronique fabuleuse)>의 225쪽을 참조할 수 있다(번역본엔 222쪽이라고 오기돼 있다). 나는 표지의 이미지만을 참조할 수 있는데(두번재 이미지), 혹 세번째 이미지의 풀 같은 종류가 아닐까 싶다(마지막 이미지는 작가 앙드레 도텔과 그의 캐리커쳐).

문학을 그러한 '성상체'로 만든다면, 거기서 "성(sexes)이나 속(genera), 계(kingdoms) 사이를 무언가가 지나간다." 여기서 '계'란 '동물계', '식물계'라고 할 때의 '계'이다. 이 사이로 지나간다는 말은 동물도 아니고 식물도 아닌,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분류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지나간다는 뜻이겠다. "예컨대 여자들 사이의 여자, 동물들 중의 하나처럼 생성은 언제나 <-사이>이거나 <-중에>이다."(영역: "Becoming is always 'between' or 'among': a woman between women, or an animal among other.") 그러니까 들뢰즈의 생성(되기)란 '군계일학(群鷄一鶴)' 즉 닭의 무리 속에 끼여 있는 한 마리 학이 되는 걸 뜻하는 게 아니라 '군계일계(群鷄一鷄)' 곧, 닭의 무리 속에 끼여 있는 한 마리 닭이 되는 걸 말한다. 왜 이런 노래 있잖은가. "나는 한 마리 이름없는 닭/ 닭이 되어 살고 싶어라" 이 닭털 같은 나날들을?!

 

 

 

 

05. 12. 25-27

P.S. 분량상으론 '문학과 삶'의 한 페이지를 읽었다. 글이 늘어지고 있는 탓에 몇 차례 분재해야겠다. 저녁시간이 다가온바 육신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도 먹어야겠고. 우리의 '두더지'는 다음 연재에서 죽을 것인바, '문학'도 그때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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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ai 2006-09-19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뒷북입니다만, 동서의 H. P. 러브크래프트(HPL) 선집 판매가 저조한 건 수준(그리고 상식) 이하의 번역 때문일 겁니다. 동서에선 그 선집을 내기 전에 이미 몇 작품을 묶어 [공포의 보수]라는 한 권으로 낸 적이 있는데, 이번 선집에도 그 번역을 재탕했다고 하며 나머지 작품들 번역수준도 과히 기대 이하라고 하거든요. 국내 HPL 매니아들은 황금가지 쪽의 전집을 (기약도 없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로쟈 2006-09-20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언제나 걸림돌이 되는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