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저자로부터 <나의 우울한 모던보이>(창비, 2005)를 선물받고 가장 먼저 읽어본 건 3부에 실린 '구름과 장미의 나날'이란 글이다('술과 장미의 나날'이 아니다!). 김춘수(1922-2004)의 처녀시집 <구름과 장미>(1948)의 표제작인 '구름과 장미' 읽기인데, 작년 11월에 타계한, 한국시의 이 대표적 시인 한 분을 기억하는 겸해서 그의 글을 읽었고 이 글을 쓴다. 시인의 죽음에 기대어 그의 처녀작을 읽는다?

 

 

 

 

그게 억지스러운 일은 아닌 게 시인의 대담을 포함하고 있는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민음사, 2001)에는 (이전에 지적한 바 있지만) 김춘수의 데뷔시집 <구름과 장미>가 <죽음과 장미>로 오기돼 있다(233쪽). 이러한 예기치 않은 우연/은유에 기대어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장미 되어 오는 것"이라고 시작되는 시 '구름과 장미'의 후렴은 '죽음과 장미 되어 오는 것'으로 다시 읽을 수도 있는 것.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 릴케를 떠올린다면, '죽음과 장미'는 한편 그럴 듯한 커플이 되기도 한다.

해서, 작년에 나온 시인의 유고시집 <달개비꽃>(현대문학)이 이어서 김춘수의 시와 에세이 선집들이 올해에도 연이어 출간되었으나 거기에 동참한 바 없는 나는 나대로의 애도의 뜻을 이 자리에서 표하고자 한다. 그건 모든 시는 결코 아니지만 김춘수의 어떤 시들이 나를 즐겁게 했던 기억을 내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애도의 뜻을 담고 있는 페이퍼이지만 이 글은 '즐거운 책읽기'로 분류된다. 하긴 친구의 책을 읽는다는 건 살짝 흥분되면서도 즐거운 일 아니겠는가?   

1948년이면 김춘수의 나이 26살 때이고 청마 유치환의 서문을 달고 있는 이 처녀시집은 자비로 출판된 시집이다. 그러니까 이 글의 대상은 '원로 시인' 김춘수가 아니라 '새파란' 김춘수, 반세기가 넘어갈 그의 시의 여정을 이제 막 시작한 '풋풋한' 청년시인 김춘수이다. 나 자신도 더듬어보아야 할 그런 시절의 시인. 그때 그는 이런 걸 써놓았다.  

 

 

 

직접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구름과 장미>의 맨앞에 실려 있다는 이 시는 시 자체보다는 제목의 상징성 때문에 자주 회자되는 시이다. 그 출처는 바로 김춘수 자신이며 이장욱도 곧장 인용하고 있는 대목에서 시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구름은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말이지만, 장미는 낯선 말이다. 구름은 우리의 고전 시가에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장미는 전연 보이지가 않는다. 이른바 박래어다. 나의 내부는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 구름을 보는 눈이 장미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구름은 감각으로 설명이 없이 나에게 부닥쳐왔지만, 장미는 관념으로 왔다."

인용한 대목은 이장욱의 책에서 재인용하지 않고 <김춘수 문학앨범>(웅진출판, 1995), 187쪽에서 인용했다('이른바 박래어다'라는 한 문장이 더 들어간다). 이 책은 김춘수 시의 독자라면 필히 소장할 만한 책인데, '앨범'인 만큼 연대기와 작품론, 자선 대표작들은 물론이고 시인과 관련한 사진자료들을 다수 싣고 있다. 시인의 서문에 따르면, "사진을 중심으로 한 이런 따위 문학앨범은 나 자신에게는 하나의 좋은 기념물이 되겠고, 나의 독자들께는 하나의 참고물 또는 흥밋거리가 되어 주리라고 기대해" 볼 만한 책이다. 이른바 종합선물세트 유형이다.   

이 인용에 대해서 이장욱은 시인의 발언을 시인 자신에게 되돌리고자 하는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이 시가 미당의 구름이나 릴케의 장미를 환기시킨다는 식으로 얘기하려는 게 아니라고 밝히면서 그가 원하는 건 '텅 빈 오독'이며, "이 잘못읽기로 그의 시적 편력을 은유하는 것"이라고 미리 단서를 단다. 요컨대, "구름과 장미의 나날. 이것은 그의 기나긴 시적 편력을 요약하고 있는 표현일는지도 모른다"(287쪽)는 것. "이 기나긴 시적 편력은 구름과 장미의 '사이', 혹은 구름과 장미의 '너머'에서 한 시인의 필생이 거쳐온 고투에 다름아니다"(288쪽)라는 것. 그의 생각을 조금 따라가보고, 나는 나 대로의 '오독'을 제시해보겠다.

"보편적 세계의 저 헛것으로 떠도는 관념(구름)들과 구체적 세계에 피고 지는 이 부질없는 실존(장미)에 대해서라면, 하긴 세상의 어느 시인이 하염없지 않았을 것인가. 그가 한때 머물렀던 무의미, 혹은 비대상의 시학이란 이 하염없는 자유에 다름아니었을는지도, 혹시 모른다. 이 하염없음에 자유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가 말했듯 허무의 산물이어서 역설적이다. 그것은 구름(관념)과 장미(세계) 어느 쪽에도 온전히 귀의하지 못했던 자의 비애일 터이다."(287-8쪽)

데뷔작이라 할 만한 한편의 시 읽기를 통해서 이렇듯 한 시인의 시적 편력 전체를 읽어내는 건 '오독'이란 전제하에서도 과감하며 경탄스럽다. 비록 그 시적 편력이 거의 완료된 시점(2001년)에 씌어진 글이어서 예언적이라기보다는 사후적인 성격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긴 하지만. 나에게 흥미로운 건 사실, 이러한 과감한/경탄스런 결론이 아니라 '잘못읽기'의 과정이다(어차피 죽음으로 마무리될 거라는 점에서 모든 생애는 '비애'의 정조를 지우지 못한다. 해서, 내 생각에 '비애'는 시인 김춘수만의 것은 아니다). 이장욱은 2연부터 읽어나간다(1연은 전제이지만 3연에서 반복되기에 뒤에 읽어도 무방하겠다).

눈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보곤

밤엔 뜰 薔薇와 

마주앉아 울었노니

 

"시 속으로 바람은 불고 구름은 흘러간다. 구름은 눈뜨면 물 위에 담기는 부드러운 가상(假象)이다. 그것은 형태를 지니지 않아 만져지지 않으며, 그것은 수면에 스스로를 비추며 흘러갈 뿐이어서 인간의 규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구름은 드러냄과 사라짐의 경계를 스스로 지우며 저 하늘에 유구하다. 그래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님은 구름이 되어 온다."

 

우선 1-2행에 대한 읽기인데, 공감할 만하지만, 구름과 장미에 대한 시인 자신의 규정과는 다소 어긋나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구름/장미를 낯익음/낯섬, 감각/관념의 짝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데 이장욱은 구름을 '일부러' 가상관념으로 읽어낸다. 그건 물론 예고된 바대로의 '잘못읽기'이다(한데, 그는 어째서 이 '잘못읽기'를 통한 결론을 시인의 시적 편력에 대한 요약으로 제시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어지는 3-4행 읽기.

 

"장미는 밤의 뜰에 피어 그의 울음을 받아준다. 그것은 제 구체적인 아름다움으로 어둠속의 그를 위무하며, 그것은 그의 밤 그의 뜰에 피어 있는 바로 그 장미인 것이어서 허허로울 수 없다. 장미는 꽃 지는 계절에 지는 꽃잎들 속으로 흩어질 유한(有限)을 제 운명으로 지니지만, 그래도 님은 장미가 되어 온다."

 

앞에서 구름을 '부드러운 가상'으로 읽은 이장욱은 이번엔 '장미'를 '구체적인 아름다움'으로 읽는다. 한데, 내가 읽기에 이 시에서 장미는 '그 장미'의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어서 "그의 밤 그의 뜰에 피어 있는 바로 그 장미"라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책에 실린 다른 글 '단 하나의 장미'에서 그가 적어놓은 바를 참조하면, 보통명사로서의 장미에 대해서 우리는 아름답다거나 아름답지 않다고 판단할 수 없으며,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것은 '장미 일반'이 아니라 '바로 이 장미'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예술'이라는 것은 삶과 세계를 끊임없이 '고유명사화'함으로써만 존속한다. 대상을 '고유명사화'하는 능력이야말로, 시인의 자질이다."(97쪽)

 

 

 

 

 

 

 

 

 

그 '고유명사화'가 '이미지화'가 환치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면, 내 생각에 김춘수는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현저하게 결여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는 '이 장미'가 아니라 '장미'에 대해서 노래하며, 더 나아가 '꽃'에 대해서 노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유명사화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과 동의어이다"란 이어지는 단언에 기대어 말하자면, 김춘수는 사랑을 현저하게 결여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실, 시에서 '의미'까지 배제하려고 했던 시인이 사랑타령을 늘어놓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쨍한 사랑노래'야말로 反김춘수적이지 않을까? 유일한 예외라고 할 만한 것이 먼저 사별한 아내에게 바치는 시들을 모은 시집 <거울 속의 천사>(민음사, 2001)일 듯싶은데, 그런 경우에도 내 기억에 시인은 단 한번도 아내의 이름(고유명사)를 시에서 호명하지 않았다. 아내는 '거울 속의 천사'로 이미지화되면서 오히려 일반화/추상회되었을 뿐이다.

 

해서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이장욱의 읽기가 그의 약속대로 '잘못읽기'라는 것.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장미로서의 님은 나와 더불어 구체적으로 울고, 구름으로서의 님은 물 위에 가상으로 떠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구름과 장미의 대비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름을 물위에 담고 밤뜨락의 장미와 마주앉아 우는 자의 자세이다. 그가 기다리는 님은 구름과 장미가 되어 올 것이지만, 이것은 예정이나 필연 혹은 당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슬프고 한량없으니, 그 슬픔과 한량없음을 서술하는 동사들은 온전한 능동형으로 스스로를 견뎌내고 있다. 그는 하염없는 나날을 지나며 물위에 구름을 '담고' 장미와 '마주앉아 운다.'"(286-7쪽, 강조는 나의 것)

 

나는 장미의 구체성과 구름의 가상성이라는 대비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중요한 건 그러한 대비가 아니며 '우는 자의 자세'라고 하니까 굳이 더 캐묻지는 않도록 한다. 대신에 구름과 장미의 관계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자. 1연에서 '임은 구름과 장미 되어 오는 것'이라고 명료하게 전제돼 있지만, 이때 구름과 장미를 연결시켜주는 등위접속사 '과'는 연의 구조에 있어서도 병렬성을 낳는다. 해서 2연의 내용을 산문적으로 풀면, 이렇게 될 것이다.

 

(아침에) 눈뜨면 나는 (눈)물 위에 구름을 담아보곤 했다.

밤엔 뜰 장미와 마주앉아 울었다/울곤 했다.

 

'밤엔'이란 시간부사가 전제로 하는 것은 '아침에'이며 그것은 전제되는 것이기에 생략 가능하다. 그리고, 구름을 '물 위에' 담아본다라고 돼 있지만, 이때의 2행 문두의 '물'은 1행 문두에 나오는 '눈'과 호응하면서 쉽게 '눈물'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물 위에 담기는/비치는 구름이면서 나의 눈물에 맺히는 구름이기도 한 것. 그리고 그렇게 '눈물'을 떠올릴 때 우리는 4행의 '울었다'는 동사와 자연스럽게 조우할 수 있다. 3행에서 '뜰에 핀 장미' 대신에 왜 ('뜰장미'도 아닌) '뜰 장미'를 고집했을까? 나는 그것이 '눈면'의 '뜨'와 호응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시어의 경제를 위해서 공통되는 내용들이 생략되긴 했지만, 1-2행과 3-4행은 구문적으로, 의미론적으로 반복이며 이 경우 구름과 장미는 말 그대로 등가적이다(즉, '구름이거나 장미'가 아니라 '구름과 장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구름은 뭐고 장미는 뭔가? 시인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구름은 우리의 고전 시가에 많이 나온다. 그럼 장미는? 서양의 현대시에 많이 나온다(특히 릴케의 시). 이런 식의 설명이 암시하는 것은 소재로서의 '구름'과 '장미'가 막바로 우리시와 서양시를 제유하고 있다는 것. '구름과 장미' 자체가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시인-화자의) 임으로서의 구름과 장미는 바로 '시' 혹은 시의 뮤즈이며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고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임을 가졌으나 시인으로서 나의 임은 시, 즉 구름과 장미이다, 라는 게 내가 읽는 이 시의 1연이다. 여기서, 이장욱이 의도적으로 배제한 바이긴 하지만, "미당의 구름이나 릴케의 장미"가 다시 환기되는 건 불가피하다. 물론 이 경우 미당과 릴케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시인의 제유이지만.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시의 2연은 낮이나 밤이나 임(=시) 생각을 했다는 것 정도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우는 자의 자세'를 이장욱은 강조했지만, 김춘수의 초기시들에서 '울다'란 동사는 마치 상투어처럼 빈번하게 등장한다. 가령 '부재'라는 시에서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나 '길바닥'이란 시에서 "언덕에는 전봇대가 있고/ 전봇대 위에는/ 내 혼령의 까마귀가 한 마리/ 종일을 울고 있다" 같은 연, 그리고 잘 알려진 시 '꽃을 위한 서시'에서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無名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같은 시구들을 대하자면, 이 '울음'은 서양시에서 "새들이 노래한다"를 "새들이 운다"라고 우리말로 옮길 때의 그 울음인 것이어서 '한량없긴' 하지만, '슬픈' 것은 아니다(그것이 슬픈 경우엔 "슬픈 소리로 울었다"라고 명시된다). 즉, 김춘수 시의 '울다'란 동사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건 어떤 태도이지 정조가 아니다. 이제 3연이다.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薔薇 되어 오는 것

 

이장욱의 해설: "구름과 장미 사이에서 그는 중얼거린다. 저마다 사람은 님을 가졌으나, 참으로 누가 제 님을 보았을 것인가? 그는 저 온전한 님을 온전히 볼 수 없어서 구름과 장미 사이에서 망연할 것이지만, 결국 그 기다림의 자세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에서, 하늘'만'의 그 '만'이 비교급의 조사인지 유일함을 표시하는 조사인지를 우리는 확정할 수 없다. 다만 그와 더불어 50여년 전의 저 구름과 장미에서 오늘의 구름과 장미에까지 흘러갈밖에."(287쪽)

 

1행의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에서 생략된 것은 목적어이다. 이장욱은 "참으로 누가 제 님을 보았을 것인가?"(=아무도 님을 보지 못했다)로 풀고 있지만,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님을 그들 자신은 누구도 보지 못했다라는 건 다소간 모순되는 진술이다. 내 생각에 이 '보다'란 동사의 목적어는 2연이고 2연의 '나'이다. 밤낮으로 님(=시)을 그리워하며 눈물짓고 울고 있는 '나'를 참으로 누가 보았을 것인가, 라는 것.

 

이어서 "(그리움이) 염없는 일수록/ 하늘만 하였[다]"는 건 이장욱의 지적대로 문법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모호한 표현이지만, 음성학적으론 '하-날'/'하늘'로 호응하기에 정당화된다. 즉, 그건 동어반복이다. '하늘만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은 단호하게 "구름과 장미 되어" 온다. 이건 사실의 확인이면서 시적 화자의 결의이다(시집 맨처음에 왔다면, 이 시는 '서시'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렇게 읽을 수 있는 건 이미 충분히 암시되었지만 내가 이 시를 일종의 시에 대한 시, 즉 메타시로 읽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쯤에서 상기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김춘수가 우리시사에서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한 가장 강하면서도 분명한 자의식을 평생 유지했던 시인이라는 점이다. 내 견문으로 그는 가장 많은 분량을 '시론'들을 써낸 시인이다(낱권으로 7권이고 전집 2권 분량이다. 페이지수로는 1,200쪽 가량). 25살 이후에도 시론을 갖지 않고 시를 쓰는 시인들을 그는 '아마추어'라고 부르며 신뢰하지 않았다. 해서 내가 보고 읽기에 그는 이성적인 통제에 매우 능한 대표적인 지성파 시인으로서 감상성과는 거리가 먼 태도를 평생 견지했다.

 

비록 이 시에서 '장미'란 시어가 등장하지만, 그때의 장미는 구체적인 꽃이라기보다는 '장미'라는 기표이고 추상이다(김춘수는 생화(生花)를 싫어한 조화(造花) 예찬론자였다). '하염없다'란 표현도 나오지만, 나는 그것이 '울다'와 마찬가지로 시적 상투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하염없는 날들이 흘러가고 그의 님은 아직도 구름과 장미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형체 있는 것과 형체 없는 것, 만져지는 것과 만져지지 않는 것, 구체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그리고 결국에는 죄와 구원 사이."(290쪽)라는 이장욱의 지적에 유보적이다. 분명 '구름과 장미 사이'에 김춘수는 놓여 있지만, 그때 '구름과 장미'가 의미하는 바는 시의 전통이자 시의 테크닉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내부는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 시인 자신의 해설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건 바로 이 문장이다. 그 금은 구름(=감각=전통)과 장미(관념=서양) 사이의 금이며, 김춘수라는 시인의 주체를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가져오자면) '빗금쳐진 주체'로서, 그러니까 진정한 주체로서 정립시켜주는 금이다. 알려진 바대로, 그가 시에 입문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39년 일본에 유학을 가서 대입을 목적으로 학원에 다니던 시절 한 고서점에서 구해 읽을 일역판 릴케 시집을 발견하고서이다. 그리고, 이어서 만난 일본인 교수의 시론 강의에 매혹되어 그는 시인으로의 길에 들어선다(2002년에 나온 <쉰 한편의 悲歌>(현대문학)는 그가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를 모델로 하여, '마침내' 그와 대결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그의 첫시집이 나온 것이 (그는 '의미에서 무의미까지'란 글에서는 1947년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1948년이니까 대략 9년만의 일이다. 릴케의 시에 영감을 받아 시를 쓰게 됐지만(=의식) 한국어로 시를 써야 한다(=언어)는 자의식, 그것이 흔한 해석대로. '장미'와 '구름'이 의미하는 바이다. 나는 이러한 사정이 정서적으로 '비애'의 함축을 갖는다고 보지 않는다(비록 그가 역사에 대한 허무주의적 태도를 견지했지만, 이때의 허무는 분명 비애와 구별된다). '구름과 장미의 나날'은 무의미시만큼이나 그리고 형이상학만큼이나 테크니컬하고 건조하다. 적어도 김춘수의 경우에는.

 

05. 12. 22.

 

P.S. 김춘수의 '구름과 장미'란 시에 대해서 나는 한번도 주목해 본 적이 없다(이 시에 대한 시인의 언급은 물론 유의미하지만). 따라서, 이장욱의 글이 아니었다면 이 글은 씌어지지 않았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씌어졌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김춘수의 초기시는 따로 있는데, 그건 'VOU'이다(아마도 내 친구와 나는 시에 대한 취향이 많이 다른 듯하다). 아래는 그 전문이다.

 

VOU라는 음향은 오전 열한시의 바다가 되기도 하고, 저녁 다섯시의 바다가 되기도 하다. 마음 즐거운 사람에게는 마음 즐거운 사람에게는 마음 즐거운 한 때가 되기도 하고, 마음 우울한 사람에게는 紫色의 아네모네가 되기도 한다.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김춘수답지 않은 이런 시에는 다른 시들과 비교할 때 특별한 테크닉이 구사되고 있지 않다. 하지만, 한때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내게는 좋아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시이다. 그러니 '구름과 장미'보다 나는 '자색의 아네모네'를 기꺼이 더 사랑해마지 않는 것이다...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薔薇 되어 오는 것


눈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보곤

밤엔 뜰 薔薇와 

마주앉아 울었노니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薔薇 되어 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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