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에 이어지는 브리핑이다. 멀리 가진 못해서 <세계의 문학>((2000 봄호), 247쪽, 그리고 <비평과 진단>(인간사랑, 2000), 17쪽부터가 이 글에서 다루어질 범위이다. 두 국역본이 부분적인 차이가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한데, 이어지는 내용을 비교하여 읽어보면 이렇다.

(1)하지만 부정관사는 자신이 생성시키는 용어가 정관사, 'le', 'la'를 말하게 하는 형식적 성격을 상실한 경우에만 그 힘을 발휘한다. 르 클레지오가 인디언이 될 때, 그는 항상 미완의 인디언, 즉 "옥수수를 재배할 줄도 나무를 잘라 카누 한 척 만들 줄도" 모르는 인디언인 것이다. 그는 형식적 성격들을 획득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인접지역으로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카프카에 따르면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수영 챔피언이 생성되는 것이다. 모든 글쓰기는 운동경기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런 운동경기는 결코 문학을 스포츠와 조화시킨다거나 글쓰기를 올림픽 게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도피와 탈퇴 속에서 실행된다. 앙리 미쇼는 '침대에 누워있는 운동선수'라는 말을 곧잘 쓰곤 했다."(<세계의 문학>, 247-8쪽) 

(2)하지만 부정관사는 자신이 생성시키는 용어가 정관사 'le', 'la'를 나타내게 하는 형태적 문자기호들을 빼앗길 때에만 그 힘을 발휘한다. 르 클레지오가 인디언이 될 때 그는 항상 미완의 인디언, 즉 "옥수수를 재배할 줄도 나무를 잘라 카누 한 척도 만들 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형태적 문자기호들을 얻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이웃관계의 지대로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카프카에 따르면 일류 수영선수도 예전에는 헤엄칠 줄 몰랐다. 어떠한 글을 막론하고 운동경기 같은 것을 내포하고 있지만, 문학과 스포츠를 조화시킨다거나 글로 올림픽게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운동경기는 도피와 유기적 탈퇴에까지 미친다. 앙리 미쇼는 '침대에 누워있는 운동선수'라는 말을 곧잘 쓰곤 했다.(<비평과 진단>, 16-7쪽)

(3)But the power of the indefinite article is effected only if the term in becoming is stripped of the formal characteristics that make it say the. When Le Clezio becomes-Indian, it is always as an incomplete Indian who does not know "how to cultivate corn or carve a dugout canoe"; rather than acquiring formal characteristics, he enters a zone of proximity. It is the same, im Kafka with the swimming champion who does not know how to swim. All writing involves an athleticism, but far from reconciling literature with sports or turning writing into an Olympic event, this athleticlsm is exercised in flight and in the breakdown of the organic body - an athlete in bed, as Michaux put it.(영역본, 2쪽) 

 

 

 

 

먼저 첫문장. 상식적으로 알아둘 일이지만, 들뢰즈가 예찬하는 것은 정관사(le/la; the)가 아닌 부정관사(un/une; a/an)의 세계이다. 익명적 혹은 비인칭적 세계(그걸 '다중'적 세계라고 애써 해석하게 되면 들뢰즈와 네그리의 접점이 마련된다). (2)의 번역이 (1)을 베꼈다는 건 이 첫문장에서도 확인된다. 대략, '형식적 성격'을 '형태적 문자기호들'로 대체했을 뿐이다. 물론 이 대체는 엉뚱한 것이다. 불어의 caracteres가 영어 character와 마찬가지로 '문자'나 '부호'로 뜻도 갖고 있(겠)지만, 여기서는 부정관사 대신에 정관사를 말하게 하는 특성들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어떤 걸 말하는가? 시 한편을 예로 들어보자. 이성복의 '남해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여기서 1행의 '한 여자(a girl)'가 어떻게 2행에서 '그 여자(the girl)'로 한정되는가? '돌 속에 묻혀 있었던 한 여자'라고 구체화/인칭화됨으로써이다. 그때 '돌 속에 묻혀 있었던'이란 한정어구가 들뢰즈가 말하는 '형식적 특성들'이다. 그러한 특성들/한정들에 의해서 '한 여자'는 비인칭성(4인칭)의 평면에서 인칭화된 공간으로 이동한다. 번역에서 '자신이 생성시키는 용어'라는 건 좀 불친절한데, 가령 '여성-되기'에서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거시기-되기'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거시기'가 아무런 한정을 받지 않아야 하며, 따라서 정관사를 수반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언제나 '어떤 거시기-되기'인 것이다.

이로써 유추할 수 있는 것이지만, '베컴-되기'나 '박지성-되기' 등의 고유명사-되기는 유사-생성의 사례들이다. 진정한 생성(되기)은 거꾸로 침대에 누워 있는 운동선수(an athlete in bed)' 되기이다. (르 클레지오에 따르면) 그것은  미완의, 되다 만 인디언, 즉 옥수수를 재배할 줄도 나무를 잘라 카누 한 척 만들 줄도 모르는 인디언-되기이고, (카프카에 따르면)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수영 챔피언-되기이다(<비평과 진단>에서 "마찬가지로 카프카에 따르면 일류 수영선수도 예전에는 헤엄칠 줄 몰랐다."라고 옮긴 건 문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소치이다).

정리하자면, "글쓰기는 운동경기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런 운동경기는 결코 문학을 스포츠와 조화시킨다거나 글쓰기를 올림픽 게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도피와 탈퇴 속에서 실행된다."

'도피'란 건 흔히 '도주'나 '탈주'로 옮겨지는 걸 말한다. 보지는 못했지만, 빔 벤더스의 영화 중에 <페널티 킥을 맞은 골키퍼의 불안>(1971)이 있는데, 그의 이 장편 데뷔작은 페터 한트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그는 <베를린 천사의 시>도 각본 작업에도 참여했다). 참고로, 한트케의 최신작은 작년에 발표된 <돈후안>(이며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작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오스트리아의 여성 작가 옐리네크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노벨 문학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페터 한트케다. 내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건 여자였기 때문이다." 하여간에 그 영화는 주인공인 골키퍼 브루노가 페널티 킥을 맞은 불안 때문에 경기장을 빠져나가 배회하는 걸 줄거리로 하고 있고 있다. 그런 게 '도주'이다('탈주'는 좀 낭만화된 표현이다).

 

 

 

 

그리고 국역본들에서 '유기적 탈퇴'라는 건 좀 부정확해 보이는데, 그냥 몸(유기체)이 고장나거나 부상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운동선수이지만, '침대에 누워 있는 운동선수'라는 것. 해서 '슈팅 라이크 베컴'이 아니라 '브레이크다운 라이크 베컴'이다(베컴에 언제 누워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문장만 더 읽어보자: "사람들은 동물이 죽는 만큼 더욱 동물이 된다. 정신주의적 편견과는 정반대로 제대로 죽을 줄 알며, 죽음을 느끼거나 예감하는 것은 바로 동물이다. 문학은 로렌스에 따르면, 고슴도치의 죽음과 더불어, 카프카에 따르면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 '부드러운 연민의 몸짓으로 내밀어진 우리의 붉고 작은 발들.' 죽어가는 송아지를 위해 글을 쓴다고 모리츠는 말하곤 했다."

 

 

 

 

D. H. 로렌스(1885-1930)는 자타가 공인하는 20세기 영문학 최대 작가 중 한 사람이지만, 내가 별로 읽은 바가 없는 탓에 '고슴도치의 죽음'이 어느 작품(혹은 에세이)에 나오는 얘기인지는 모르겠다(캥거루라면 몰라도). 그의 작품들은 주요 장편들을 포함해 대부분 번역/소개된 걸로 알지만.   

 

 

 

 

그리고 문학은 두더지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카프카. 그의 작품들 또한 전집 규모로 소개돼 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없을 듯하고 남은 건 그냥 읽어주는 것이겠다. 또한 아마도 들뢰즈의 카프카론에 대해서는 물론 책 한 권 분량을 써도 모자랄 테니까 여기선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참고로 올해 나온 카프카 책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빌헬름 엠리히의 <카프카를 읽다(전2권)>(유로서적). 카프카 연구자 빌헬름 엠리히가 1958년에 발표한 <프란츠 카프카. 그의 문학의 구성 법칙, 허무주의와 전통을 넘어선 성숙한 인간>을 번역하여, 총2권에 나누어 담은 책인데, "막스 브로트의 카프카 해석이 지배적인 시점에서, 막스 브로트와 다른 견해로 카프카를 해석한 작품으로, 오늘날의 카프카의 작품해석에 다양성을 부여했다고 평가받는"단다. 카프카 애독자들의 즐거움이겠다. 전집판으로 <소송>(솔출판사)이 얼마전 출간된 것도 기록해둘 만하다.   

그리고 모리츠. 칼 필립 모리츠(K. P. Moritz)를 말하는데, 그의 작품 중 <안톤 라이저>(문학과지성사, 2003)가 번역돼 있다. "괴테가 당대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 바 있는 칼 필립 모리츠의 심리소설"로서 "'안톤 라이저'라는 한 소년의 유년시절과 성장과정을 성인이 된 화자의 시점에서 그리고 있다"는데, 소개에는 "보잘것 없는 신분, 가난한 집 자식으로 태어난 소년의 성장사는 사회의 무시와 멸시, 냉대로 얼룩져 있다. 주인공은 진정한 배웅과 교양에 목말라하지만,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영혼의 훼손과 마음의 상처는 더해만 간다. 야비한 세상에 주눅든 안톤은 자폐와 분열, 감정의 과잉 상태에 빠져든다. 경건주의 신앙의 실상과 그 이면, 허영과 위선으로 가득찬 중간계급의 행태에 대한 비판적 묘사는, 18세기 독일의 사회사라 볼 수 있다."고 돼 있다.

모리츠는 "1756년 독일 북부 소도시 하멜른의 궁핍한 소시민 가정에서 태어나 모자 제조 기술을 익히는 견습생 생활을 했다. 에어푸르트 대학과 비텐베르크 대학을 다니며 신학을 전공하고 교사로 일하다가 1786년 이탈리아 여행길에 괴테를 만나 2년간 교류했다. 독일로 돌아온 뒤 1789년 바이마르 공국의 칼 아우구스트 공의 중재로 베를린 대학의 문학이론 및 고전문헌학 담당 교수가 되었다. 1793년 6월 26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그의 <안톤 라이저> 역자해설이 "'고통의 역사(Pathographie)와 소설의 형식"이란 제목을 갖고 있는 걸 보면, 사회사의 이면에서 '고통'이란 주제에 민감했던 작가로 보인다. "죽어가는 송아지를 위해 글을 쓴다"는 인용이 이해가 갈 만큼.

이해하기 까다로운 건 인용문의 첫문장인데, "사람들은 동물이 죽는 만큼 더욱 동물이 된다"(<세계의 문학>)나 "동물은 죽는 존재이기에 사람들은 더더욱 동물적이 된다."(<비평과 진단>) 같은 번역문들은 그 까다로움을 풀어주지 못한다. 영역본엔 "One becomes animal all the more when the animal dies."로 돼 있다(불어 원문은 "On devient d'autant plus animal que l'animal meurt."). 러시아어본은 "동물-되기는 동물이 죽을 때 더욱 확실해진다" 정도로 옮기고 있다.

 

 

 

 

문맥상, 그러니까 바로 앞에 나왔던 정관사/부정관사 문제와 연계시켜보자면, 여기서도 주목해야 할 것은 'the animal(l'animal)'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동물이 된다는 것은 특정한 동물이 되는 게 아니라 불특정의 동물이 되는 것이며, 죽음은 '그 동물'이라는 특정성으로부터 도주하는 것이자 해방되는 것이다. '남해금산'의 표현을 가져오자면, 죽음은 '그 여자'를 '한 여자'로 해소하고 다시 환원한다. 다시 '한 잎의 여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女子

이 시의 결론에서 "그러나 구누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라고 규정되는 것은 '한 여자'(=한 잎의 여자)가 결코 '그 여자'로 특칭되지 않는 것과 관련돼 있을 것이다(이 사랑은 '방법적 사랑'일까, '소유하지 않는 사랑'일까?). '여성-되기'라고 할 때 그 '여성'은 그러한 '한 여자'이면서 '한 잎의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여자'이다. '동물-되기'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죽어가는 동물이 될 때(동물들은 각자의/고유한 죽음을 죽지 않는다), 비로소 제대로 동물-되기에 이르며, 문학은 그때 거기서 시작된다. 이것이 들뢰즈 문학론의 핵심을 이룬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여간에 시간관계상 오늘은 여기까지 읽도록 하겠다(이런 진도라면 올해 안에 끝내긴 글렀다)... 

05. 12. 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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