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도 깜짝 놀란 만한 책이 나오지는 않았지만(*이 글은 2004년 1월 중순에 씌어졌다), 제법 관심이 가는 책들이 여러 권 나왔다. 제일 먼저 손꼽고 싶은 것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후)이다. 이 책을 꼽은 것은 물론 시의성 때문이다. 소개글에 의하면, “<타인의 고통>은 9.11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을 비롯해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 전쟁 전후의 현실 정세에 대한 (저자의) '지적' 개입이다.” 원제는 'Regarding the Pain of Others'(2003)인데, 전체가 131쪽밖에 안되는 얇은 책이고(행간도 넓다), 일종의 포르노그라피로서의 전쟁사진론 정도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이 번역되면서 250쪽이 넘는 책으로 부풀려졌다(값은 15,000원).


처음엔 장삿속이겠거니 했는데, 인터넷서점의 책소개를 참조해보니까 영어판에 없는 도판 48장이 한국어판에는 들어가 있다고 한다(나는 아직 책의 실물을 보지 못했다. *나중에 복사했다). 게다가 역시 원서에는 없는 4편의 글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책은 원서보다도 더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번역 또한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을 번역한 바 있는 경험자가 맡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신뢰가 간다. 손택은 촘스키만큼이나 현 부시 행정부에 대해서 비판적인 지식인인데(그가 좌파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9.11 관련으로 뉴욕타임즈에 실린 칼럼을 나는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은 9.11 관련 필독서의 한권이 될 만하다고 본다.


두번째 책은 실천문학사에서 ‘실천인문총서’의 한권으로 나온 <문화의 숙명>이다. 부제는 ‘기어츠의 문화이론에 대한 발전적 논의’이고, 원제는 The Fate of "Culture" : Geertz and Beyond(1999). 기어츠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20세기 후반 미국을 대표하는 인류학자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문화유물론의 마빈 해리스가 과학 정향적인 인류학을 대표한다면, <문화의 해석>(까치, 1998) 등을 통해 ‘중충적 해석’(두꺼운 묘사)을 주창하는 기어츠는 인류학을 일종의 해석학으로 간주한다. 재미있는 것은 해리스와 기어츠 둘 다 인도네시아에서 현지조사 작업을 했다는 것.


덕분에 그의 저작은 문학적인 풍모마저 풍기는바, <슬픈 열대>의 레비-스트로스가 이에 견줄 만하다. 신간은 “각 분야의 저명한 학자 7인이 기어츠의 문화이론의 의미와 그 영향에 대해 조명하고 있는”데, 이중 문학비평가이자 셰익스피어 전문가인 하버드대학의 스티븐 그린블래트 교수는 ‘신역사주의(New Historicism)’의 대표자로서 유명하며, <마르탱 게르의 귀향>(지식의풍경, 2000)으로 유명한 여성 역사학자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도 필진에 참여하고 있다.

세번째 책은 조르주 귀스도르프의 <신화와 형이상학>(문학동네). 원제는 'Mythe et Methaphysique'(1984)이며, 이름이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은 저자 귀스도르프는 1912년생으로 48년에 바슐라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책소개에 의하면, “이 책은 '철학개론'이라는 부제를 붙여 1953년에 출간한 것을 30년이 지난 1983년 개정판 서문을 더하여 재출간 것으로, 지은이는 양차 세계대전 직후 이성 중심적 사유에 큰 회의를 느끼고 인간 존재 규명으로서의 철학을 신화라는 비이성적 영역으로 확장하기 위한 시도로서 이 책을 집필하였다.” 요컨대, 반세기 전 사르트르가 주름잡던 시대의 책이다. 요즘 신화, 판타지 열풍에 대해 좀 숙고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만한 책처럼 보인다.


네번째 책은 험프리 카펜터가 쓴 <톨킨 전기>(해나무). 500쪽이 넘는 이 책은 "J.R.R.톨킨 저작권협회가 유일하게 공식 인증한 톨킨 전기"라고 한다. 영화 <반지의 제왕> 덕분에(나는 아직 1편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일부 마니아들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지게 된 작가 톨킨의 세계에 입문하려는 이라면 빼놓을 수 없을 법하다. 이미 톨킨의 전기로는 <톨킨 - 판타지의 제왕>(작가정신, 2003)이라고 나온 것이 있는데, 분량은 신간보다 다소 얇지만, 표지가 유사하기 때문에 자칫 헷갈릴 수도 있겠다. 전문가들이 권장하는 건 단연 <톨킨 전기>라는 걸 유념해야겠다.





톨킨의 영화만 보는 게 다소 멋쩍은 독자라면, 얼마전에 나온 <철학으로 반지의 제왕 읽기>(이룸, 2003)도 관심을 가져볼 만하겠다. 제목에 ‘철학’이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잘 팔려나가는 책이다(*그밖에도 여러 종의 관련서들이 나와 있다). 물론 이 분야의 히트작은 <매트릭스로 철학하기>(한문화, 2003)이지만.





톨킨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환상적인’ 남미 작가 보르헤스의 문학강연집도 소리없이 작년말에 출간됐다.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르네상스)가 그것인데, 원제는 'This Craft of Verse'(2000), 그러니까 ‘시의 기교’쯤으로 번역되는 책이고, 보르헤스가 1960년대말에 하버드대학에서 여섯 차례 특강한 내용이라고. 원제에서 알 수 있지만, 내용은 전적으로 시에 관한 것이다. 200쪽이 안되는 분량에 다소 부담스런 책값이지만, 보르헤스의 강연을 유료 청강한다는 기분으로 손에 들면 되겠다(*이후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먼저 읽어볼 만한 보르헤스 입문서는 김홍근의 <보르헤스 문학전기>이다).




다섯번째 책은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온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미 여러 종의 번역서가 나와 있는 책이지만, 신간은 가장 원문에 가깝게, 충실하게 (시적으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아직 실물을 보지 못해서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현재 나와 있는 번역서들 중에서 가장 저렴한 것만은 틀림없으므로 아직 이 고전이 서가에 안 꽂혀 있는 이라면 이참에 구입해 두시기 바란다(지난번에 나온 <팡세>와 마찬가지로).
고전 중에 한권 더 소개하자면, 러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이반 부닌(1870-1953)의 대표작(1910년작) <마을>(삶과꿈)이 번역돼 나왔다. 역자는 부닌 전공자로서 이미 <비밀의 나무>(원제는 <어두운 가로수길>)를 2000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한바 있는데 이 책은 이미 절판됐다. 그러니 당장 안 읽을 책이라도 사두는 수밖에. 대학원 첫 학기에 부닌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좀 게을러서 이 중편소설을 읽어두지 못했다. 왠지 인도인의 인상을 풍기는 이 작가에게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도 못했었고.
개인적으로 나는 체호프와 부닌, 그리고 고리키가 톨스토이 문학의 유산을 3등분해 가지고 있는 걸로 본다. 톨스토이의 미학(체호프)과 종교성(부닌), 그리고 민중성(고리키)이 그것이다. 불교철학과도 깊은 친연성을 갖고 있는 부닌은 오히려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나는 그 낯설지 않다는 점이 불만이지만). 관심있는 분이라면, 그의 짤막한 단편 중에서 <사랑의 문법>(소담출판사, 1996)에 실려 있는 <일사병>을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비교해서 읽어보시길.



기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동경대의 정교수가 된 강상중 교수의 신간 <내셔널리즘>과 <세계화의 원근법>(이산)이 동시에 출간됐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의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도 사놓고 안 읽었기 때문에, 이 신간들마저 소화할 만한 여력/자격이 안된다(*강상중의 자전적인 이야기는 <재일 강상중>(삶과꿈, 2004)을 참조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젠 원로급 문학비평가라고 해야 할 김병익씨의 ‘책으로 쓰는 자서전’ <글 뒤에 숨은 글>(문학동네)도 나왔다. 아마도 인생을 정리할 만한 나이에 도달한 듯싶다. 책이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겸연쩍어서라고. 김병익의 제자를 자처하는 고종석이 추천사를 쓰고 있기도 한데, 김병익은 고종석이 그렇듯이 일급의 비평가/소설가라기보다는 일급의 저널리스트라고 해야 온당하다(이건 폄하의 의미가 아니다).(*김병익의 책은 이후에 <그래도 문학이 있어야 할 이유>, <게으른 산책자의 변명> 등이 더 출간됐다.)

또, 장서가라면 탐이 날 만한 책이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한국대표시인 초간본총서’이다. 전질이 20권인데, 나는 당장에라도 몇 권은 살 용의가 있었지만, 전질을 세트로 판매하기 때문에(게다가 비닐포장돼 있다) 나는 책의 내용을 구경도 하지 못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여러 사람이 수고했겠지만, 제일 공이 큰 사람은 아무래도 열린책들의 돈줄인 프랑스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형형색색의 이 초간본총서 20권이 그의 ‘나무’에 매달린 열매들처럼 보인다(서점에 나란히 배열돼 있기도 하고)...




끝으로, 내주가 설연휴이니만큼 선물용 도서 두어 권. 지난주 서평 1면을 장식하고 분야별 주간베스트 1위에 오른 얀 아르튀르-베르트랑의 <발견: 하늘에서 본 지구 366>(새물결). 아는 사람을 알겠지만, 이 책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지구를 찍은 366장의 사진과 그에 대한 간략한 논평을 싣고 있다. 사진의 사이즈가 생각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부피에 비해선 저렴해서(33,900원인데, 요즘 갈비짝을 생각해보라) 연초에 선물하기엔 딱 좋은 책이다(독서의 부담이 없기 때문에!).
책을 좀 읽는 분에게라면, 전설로 회자되던 <신영복의 엽서>(돌베개)가 어떨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육필 원고를 영인한 책이다. 책은 “신영복 선생이 사형 선고를 받은 1969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시절부터 1988년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할 때까지 옥중생활 전 기간에 씌어진 기록과 엽서들”을 담고 있는데, “철필로 새기듯 또박또박 눌러 쓴 글씨와 여백을 이용해 그려넣은 작은 그림 등은, 영인본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는 세월의 깊이와 감동을 생생하게 전달한다”고. 책값은 조금 더 비싼 38,000원. 이런 책들은 갖고 있기에 아깝기/비싸기 때문에 선물하기에 적당하다.



덧붙임: 손택의 책을 사기 위해 서점엘 갔다가 벤자민 바버의 <지하드 대 맥월드>(문화디자인)가 눈에 띄길래, 같이 사들고 왔다. 작년 8월에 출간된 걸로 돼 있는데, 그때 내가 바쁘긴 바빴다 보다. 책이 나왔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서 신간인 줄 알았다. 바버는 <강한 민주주의>(인간사랑, 1992)가 번역/소개된 바 있는 저명한 정치학자이고, <지하드 대 맥월드>는 9.11을 미리 예견한 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바버의 책으론 <강한 시민사회, 강한 민주주의>(일신사, 2006)가 최신간이다). 지젝도 <실재의 사막...>에서 이 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요지는 과연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지젝은 사회주의가 대안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어쨌든 책도 두툼하고 반가운 책이다.
그리고 시몬 듀링의 <푸코와 문학>(동문선)이 번역돼 나왔다. 언제 또 판권은 구했는지, 동문선은 이것저것 안 거드리는 책이 없어 보인다. 원제는 'Foucault and literature : towards a genealogy of writing'(1992)이다. 이미 오래전에 복사해둔 책인데, 읽어볼 기회가 생긴 거 같다. 단, 역시나 비인간적인 책값이 문제이다. 399쪽에 26,000원. 들뢰즈와 문학을 다룬 책들도 여러 권 있는데, 분위기를 맞추자면, 이들도 곧 번역돼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국내 저자들의 책에 관심이 소홀했던 것 같아서 한권 더 추가하면, 임철규 교수의 <눈의 역사, 눈의 미학>(한길사)이 출간됐다. 440쪽에 22,000원. 연대 영문과 교수인 저자의 가장 큰 공헌은 프라이의 <비평의 해부>(한길사)를 역간한 것이다. 개인 저작으로는 <왜 유토피아인가>(민음사, 1994)에 이어 오랜만에 나오는 책인 거 같다. 사실, 눈(eye)에 대해서라면, 역사나 미학 말고 철학과 정신분석학에서도 할말이 많은 주제이다. 오늘 책을 검색하다 보니까 장 스타로뱅스키(Starobinski)의 영역된 저작중에는 <살아있는 눈(The Living Eye)>(Harvard Univ Pr, 1989)도 들어 있었다. 관심을 가져볼 만하고, 관련문헌도 제법 많은 주제이다...
2004. 0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