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개봉한 만다 쿠니토시 감독의 영화 <언러브드>(2002)에 대한 기사 두 개를 옮겨놓는다. 엊저녁 퇴근길에 문화일보에서 영화평론가 오동진의 리뷰를 읽은 게 계기가 됐다. 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나로선 비디오로 출시되기나 기다려야 할 형편이다. 미리 스크랩해두는 걸로 아쉬움을 달랜다.

문화일보(06. 05. 30) 돈 많은 벤처사업가 가쓰노(나카무라 도오루)와의 사랑을 뿌리치 고 택배 일을 하는 가난한 청년 시모카와(마쓰오카 슌스케 )에게 마음을 연 가게야마(모리구치 요코)는 그와의 첫 잠자리에 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린다. 남자가 처음이어서가 아니다. 시모카와와의 섹스가 특별히 그녀의 몸을 더 뜨겁 게 만들어서도 아니다. 가게야마는 이제야 처음으로 자신과 ‘맞는’ 남자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시모카와의 벗은 등을 힘껏 껴안으며 왜 우느냐고 묻는 그에게 “너무 좋아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시모카와는 가게야 마가 ‘좋다’라고 한 진짜 이유를 끝내 알아채지 못한다.

-언뜻 보면 동네 구청에서 일하는 9급 공무원 여성과 잘나가는 사 업가, 그리고 나이도 어리고 장래도 불투명한 한 청년의 그렇고 그런 3류 삼각관계를 그린 신파 TV드라마 같지만 <언러브드>는 그보다 훨씬 깊은 얘기를 다루는 작품이다. 한마디로 현대사회,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사랑의 본질을얘기하는 것인데, 그 내용이 너무 정곡을 찌르는 것이어서 때 론 섬뜩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지나친 진실은 일상을 뒤흔든다.

-흔히들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문제, 모든 차이를 덮어 버릴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산다. 그 ‘차이’ 란 때로 정치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문제일 수도 있으며 종교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차이의 요소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 핵심은 하나, 결국 계급적이라는 것이다. 지난한 계급의 역사에서 차이가 나는 남녀의 사랑이 해피엔딩이 된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됐을까. 그런 얘기는 정말 할리우드식 로맨틱 코미디나 공중파TV의 수많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언러브드>는 우리들의 그 같은 오래된 착각의 세상인식을 전복시킨다.

-남녀간의 차이는 차이로 존재할 뿐 그게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는다고 이 영화는 얘기한다. 여주인공 가게야마는 그 점을 너무 나 잘 아는 인물이다. 돈 많은 가쓰노는 그녀에게 수백만원짜리 의 드레시한 옷을 사 입히고 스노비시한 인간들이 넘쳐나는 최고 급 레스토랑에 데려가지만 가게야마는 가쓰노가 잠깐 일을 보러 간 사이 허름한 음식점에 가서 라면을 먹는다.

-가게야마는 가쓰노에게 옷을 돌려주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가쓰노는 레스토랑에 오랫동안 혼자 놔둬서 그녀가 화가 났다고 생각한 다. 그 ‘생각’의 차이는 끝내 좁혀지지 않는다. 가게야마는 가쓰노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최고급의 옷’일 뿐이다. 가게야마 는 가쓰노에게 얘기한다. “당신과 있으면 나는 내가 아니게 돼요. 나를 잃게 돼요”라고.

-가쓰노는 그런 그녀에게 화를 낸다. 가쓰노의 분노도 이해 못할 것이 아니다. 가쓰노는, 너 역시 나를 만나면서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지 않았느냐며 그녀를 힐난한다. 차이를 두려워하고 거부 하는 것 역시 자기만 상처를 받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이기심의 발로가 아니냐고 캐묻는다. 가난한 택배 청년 시모카와도 그녀를 괴롭히기는 마찬가지다. 그녀식으로 자신들이 ‘차이없음’에 만족하고 사는 것은 결국 이 사회에 두껍게 벽을 쌓고 고립돼 살아가려는 왜소한 행위일 뿐 이라고 그는 안달한다.

-가쓰노는 가게야마를 자신의 세계에 끌어들이려고 하고 가게아먀 는 시모카와를 자신의 세계에 정착시키려 하지만 정작 시모카와는 가쓰노처럼 되고 싶어한다. 이 기묘한 부조화의 순환구조. 과연 누가 옳은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계급을 뛰어 넘는 사랑은 가능한 것인가. <언러브드>는 그게 결코 녹록지 않은 일임을 보여준다. 멜로드라마를 보러 들어갔다 가 무거운 마음으로 극장 문을 나서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한겨레(06. 05. 25) 사는 게 그렇지만 연애도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취향이나 환경, 가치관은 한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고 또 그렇게 관계가 맺어진 뒤에도 선택의 순간은 끝나지 않는다. 여기에 타협과 포기가 끼어들고 이런 단어는 사랑이라는 우산 밑에서 헌신,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그런데 현실 속의 선택에는 매뉴얼도 존재한다. 부와 능력, 배경, 외모 같은 조건들이 그렇다. 보통의 선택은 투명하게 스스로의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 욕망과 객관적 기준의 타협이기 십상이다.

-사랑 이야기이면서 ‘사랑받지 못하는’이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언러브드>(24일 개봉)에는 남다른 선택을 하는 여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시청 하급 공무원인 미쓰코(모리구치 요코)는 능력을 칭찬하고 승진 준비를 하라는 상사의 격려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값싼 노동력에 만족하고 산다. 업무차 시청을 오가던 젊은 사업가 가쓰노(나카무라 도오루)는 참하고 조용한 미쓰코에게 반한다. 가쓰노가 연애를 걸어오자 미쓰코는 조용하게 그를 받아들이지만 가쓰노가 값비싼 드레스와 고급 레스토랑 등 자신이 속한 세계로 끌어당기자 싸늘하게 그를 거부한다. 대신 자신에게 무관심했던 아래층 택배청년 시모카와(마쓰오카 슌스케)에게 연애를 건다.

-미쓰코는 욕심없고 소박한 인물로 보인다. 그런데 가장 평범해 보이는 그의 세계는 이해받지 못한다. 욕심없고 소박하다는 게 어떻게 해 볼 수 없어서 자조하는 것이라고 해석되는 세상에서 그가 욕심없고 소박한 자신의 세계를 관철하는 건 초고속 승진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된다. 당연히 미쓰코를 ‘구제’해줬다고 여기는 가쓰노가 미쓰코의 거부를 이해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처음엔 미쓰코의 살뜰한 사랑을 반기던 시모카와도 싫증을 낸다. 미쓰코는 같은 세계에 있는 사람이라, 즉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어울리는 사람이라 시모카와를 좋아하지만 시모카와는 미쓰코에게서 별수 없는 패배자로서 자신의 거울을 보기 때문이다. 가쓰노는 버림받은 데 분노하지만 시모카와는 선택받은 걸 혐오한다. 결국 자신의 성을 완고하게 지키며 사랑을 하려는 여자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로 남는 것이다.

-<언러브드>는 순종적으로 보이지만 결코 타협하지 않는 여성 캐릭터를 통해 사랑에 있어 선택의 문제를 통렬하게 보여준다. 사랑이라는 주관적 단어를 마치 수학이나 화학의 복잡한 공식처럼 철저하게 분해하면서 그 안에서 선택이 작동되는 기제를 정교하게 보여주는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틀을 빌려왔지만 싸늘하리만치 냉정하고 이지적이다. 특히 영화의 막바지에 자신을 떠나려는 시모카와에게 미쓰코가 ‘사랑을 선택하는 기준’에 대해서 집요하게 설득하는 장면은 격렬한 토론장처럼 불꽃이 튄다. 영화 역시 밀도 있는 구성과 대사를 통해 사랑도 선택도 달콤한 휴식의 거처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투쟁의 장이라는 걸 관객에게 설득해내는 데 성공한다.(*이 리뷰는 김은형 기자의 것인데, 남성 평론가 오동진과는 달리 '계급적 문제'보다는 '캐릭터의 문제'에 더 주목하고 있다. '존재론적인 투쟁'?)

06. 05. 31.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6-05-31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영화는 어디서 하는거래요. 못봤는데. 씨네코아도 없고 씨네큐브에도 없으면 어디에서...?

waits 2006-05-31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필름포럼(예전 허리우드)에서 이번 주까지 하네요. (흡, 남의 서재에 답댓글을..;;)

Joule 2006-05-31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영화 봤어요. 이벤트라고 까만 색의 예쁜 머그컵을 주었는데 소감을 말하자면 6천원짜리 머그컵 사니 덤으로 영화를 보여준거야,라고 위안하고 싶더라는. 연극적이에요. 영화보다는 영화평들이 더 훌륭한 걸 보면 차라리 영화를 보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울림이 크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가와이 겐지가 음악을 맡았는데 애마부인 음악과 상당히 흡사한 분위기를 연출하더군요. 영화평에서 말하는 딱 그만큼만이에요. 그러나 다시 보라면 볼 것 같아요. 덤으로 주는 컵이 갖고 싶어서.

로쟈 2006-05-31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관 개봉하는 걸로 보아 흥행성이 없을 거라는 건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애마부인 음악'이라는 장르(?)도 있는 모양이군요.^^

마늘빵 2006-05-31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늘 보러갔다가 제가 도착한 시간이랑 상영시간이 너무 차이가 나서 모노폴리 보고 왔어요.

로쟈 2006-05-31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 같으면 저는 <모노폴리>를 먼저 보고, <언러브드>를 봤을 텐데요.^^
 

지난 5월 19일부터 6월 11일까지 종로구 창성동의 '갤러리 팩토리'에서는 2006 팩토리 기획 '현대 여성 미술의 새로운 표상 - 신여성'의 두번째 전시로 '김연태 회화전'이 진행중이다. 전시회의 타이틀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며(알다시피 메를로-퐁티가 같은 제목의 책을 쓴 바 있다), 나는 개막일에 들러서 작품들을 감상한 바 있다. 소개하는 뜻에서 몇몇 작품의 이미지와 해설을 옮겨온다. 전시회 해설은 독립 큐레이터 이순령씨가 썼다.

 

● 삶은 모호한 것 투성이이다. 논리적이지도 않고 쉽사리 길들여지지도 않는다. 세월의 켜가 쌓이면서 익숙해졌다는 안도감도 잠시, 늘 낯선 상황에 서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김연태의 작업에 다가가는 과정 역시 그러했다. 작업실에서 처음 작품을 마주했을 때 나는 보여줄 듯 보여주지 않는, 섣부른 접근을 허용치 않으려는 듯한 그 세계가 이내 궁금해졌다. 그리곤 거리를 두고 지켜보다가 조금씩 다가서서 조심스레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하지만 친숙해졌다고 생각하는 지금에도 여전히 그녀의 작품들과 대화하기란 쉽지 않다. 이 글은 어떤 판단을 유보하게 만드는 그 감추어진 내밀한 속 풍경을 엿보고자 하는 호기심에서 출발하였다.

● 회화나 입체, 설치에 이르기까지 김연태의 작업은 드로잉이 근간이 된다. 아크릴, 잉크펜을 사용하여 세필로 찰나의 인상을 포착하는 드로잉은 순발력이 뛰어난 그의 성격에 잘 맞는 매체이다. 초기부터 꾸준히 해온 드로잉 작업은 그녀 개인적으로는 일상의 투영이기도 하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만났는지 무엇을 읽고 느꼈는지 그 단상에 대한 흔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건이나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배제된 채 화면은 몇 개의 선으로 요약된다. 상대적으로 터치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 회화 작품조차 절제되고 그래서 때로는 비워진 듯 충만한 상태로 제시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드로잉의 연장선 상에 있기 때문이다.

●(김연태는) 작가 특유의 상상력에 의한 과감한 생략은 지루하고 산만한 세부를 잘라내고, 우리의 관심을 곧바로 사물의 핵심적 순간으로 이끌고 간다. 글에 비유하자면 장황한 미사여구를 곁들인 산문이 아닌, 암시적 단서를 던져주고 읽는 이의 반응을 지켜보는 시(詩)에 가깝다. 최소한의 언어로 가볍고 경쾌하게 대상을 요약하는 김연태의 드로잉은 그중에서도 하이쿠를 연상시킨다. 시이지만 이미지적 성향이 강한 하이쿠는 일상의 소소한 사건에 대한 인상을 간결한 시구로 표현한다. 이와 유사하게 그의 드로잉 작업은 슬쩍 무심한 듯 그은 몇 개의 선으로 대상을 압축하고 있다. 그리고 가볍고 단순해질 권리가 우리에게도 있다고 말한다.

● 우리의 삶에는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이 경계를 알 수 없게 뒤섞여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사람들의 관심은 민중, 역사, 정치 이데올로기와 같은 거대 담론에서부터 개인, 일상, 욕망 등의 사적인 가치로 옮겨가게 되었다. ‘사소한 것’이 ‘위대한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미술에 있어서 이러한 사소한 것들에 대한 관심은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여성을 중심적인 위치에 놓이게 한다. 김연태는 그만의 예민한 감성으로 그 징후를 드로잉 작업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 소소한 일상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그는 자신의 작업을 ‘상황과 장면의 기억 속에서 꿈을 꾸며 색을 입히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거기에 덧붙여 ‘나는 주제를 찾아 헤맨 적이 없다. 언제나 주제가 나를 찾아 왔을 뿐이다’라는 가브리엘 마르케스(Gabriel Jose Garcia Marquez)의 말을 인용한다. 작업노트 한 켠에 적혀 있는 이 문장은 작업에 임하는 그의 태도를 짐작케 하는 단서가 된다. 삶의 순간순간 찾아오는 느낌과 감정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는 데서 작업은 출발한다. 이렇듯 깨어있는 명료한 의식이 준비되어 있다면 그것은 예기치 못하게 스치는 작은 미동마저 포착할 수 있는 발화점으로 작용하기에 충분하다.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은 대상에 내재한 특질들을 포착해내는 명민한 능력의 소유자인 작가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그 느낌이란 우연히 접하게 된 어떤 것이 서서히 내적 사고를 점령해가고 결국 그것에게만 온 신경과 마음이 집중되는 것을 말한다. 김연태는 이렇듯 집중된 감정이나 스쳐 지나가는 한 순간의 침묵과 그 진실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 하지만 사소한 일상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개인적 감성과 기억을 더듬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친절하거나 투명하지 않다. 드로잉 안에서는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친근한 사물이 불안한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화면 속에서 발견되는 형태들은 그것의 일부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애매한 상태로 제시되기 때문에 우리는 당황스런 상태에 놓이게 된다. 김연태의 작업을 읽는 묘미는 이러한 익숙함과 낯설음의 공존에 있다. 일반적으로 비평이란 언어를 통해 작품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밝혀내거나 형식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이러한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반적 추측은 미끄러지고 작품의 의미를 관통하려는 노력은 공허함으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독자를 애매모호한 상태에 둠으로써 불확실한 감정을 촉발하는 것을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두려운 낯설음(uncanny)’이라고 정의했다. 익숙하지만 낯선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두려운 낯설음‘은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 김연태는 일상의 어떤 대상에 감추어진 시각적 가능성을 매우 예리하게 선별해낸다. 구체적인 형상에서 출발하되 사물을 물질보다는 사건으로서 상황으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말을 묘사함에 있어서는 어느 순간 우연히 눈에 들어온 말의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낯설고 서늘한 감정과 그 예기치 않은 상황이 주제가 된다. 말의 일부를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이미지로 수차례 전이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된 작품에는 더 이상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사물의 외연적 실체는 휘발되고, 그것과 닮았지만 그것이 아닌 새로운 문맥이 드러난다. 즉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면서도 현실의 모방이란 의무감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방식으로 해석의 문이 열린다. 작가는 완벽하게 이해될 수 있고 100% 소통가능한 현실로부터 의미를 면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럼으로써 주어진 개념의 틀에 갇히는 비평의 언어적 판단과 단정을 중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 분명한 사실은 그의 작품에는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생명의 에너지가 보이지 않지만 탐지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크고 요란한 동작보다는 섬세하고 작은 변화 속에 내재된 움직임이다. 우리는 의외로 작은 변화에 더 민감하다. 그 보이지 않는 힘을 김연태의 회화는 가시화한다. 그리고 일상적인 것에 내재된 비가시적인 형상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서 가늘고 섬세한 선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솜털처럼 예민한 실선들이 구두나 가방처럼 생명이 없는 사물의 표면을 감싸고 있거나, 탯줄과도 같은 생명선이 서로 관계없는 사물들을 연결하거나, 혹은 나무줄기처럼 뻗어가며 뿌리내리려는 사유의 이미지를 관찰할 수 있다. 이는 작가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이 속해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의 시각적 표현이다. 그에게 선은 더듬이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선을 긋는 것은 대상을 알아가는 가장 솔직한 방법인 동시에 자신에게로 향하는 행위인 것이다.

● 이처럼 김연태의 드로잉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선 상에 서있다. 이러한 태도에는 작가의 은밀한 욕망의 투사가 개입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내면화하는 응시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라캉(Jacques Lacan)의 욕망 이론에 의하면 응시란 타자의 영역에서 나에 의해 상상되는 응시를 말한다. 외부에 놓인 사물과의 관계를 정의하는 하나의 시각적 경험인 응시는 신비로운 우연의 형태로 갑자기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의 특징은 무엇인가 사라진 ‘결여’의 형태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김연태의 작업과 맞닿아 있다. 생략되고 숨겨지는 단계가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재현의 과정에는 시각을 통해 어떤 외적 실체로부터 진정한 자아를 도출해내려는 욕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타자에 대한 관심이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자기반영성의 미학이 된다”는 작가의 언급과 일치한다. 자기애적 성향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 사실 우리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자기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세계에 관여하고 상호작용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김연태에게 있어서 작업이란 자신을 감싸고 있는 모든 대상과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해가는 과정을 거쳐 자신의 내밀한 곳에 감추어져 있던 것을 끊임없이 새로 발견하는 일이다. 그것은 눈을 뜨고는 있지만 일상의 삶 속에 아직 잠들어 있는 감성들을 일깨우고, 책임과 의무로 가득한 삶의 무게를 덜어내고 자아를 되찾기 위한 여정인 것이다.

“길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풍경이지만, 길 위를 걷는 사람에게는 통로이다.” 앞으로 김연태의 작품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 지에 대한 예측은 지금처럼 모호한 채로 남겨두고 싶다. 그러나 그는 길 위에 서있고 좀처럼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심할 수 있고 기다려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전시는 그 예감에 대한 믿음이다.

06. 05. 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4년 연말에 쿠스투리차의 영화 'Life is a miacle'(2004)를 빌미로 하여 "쿠스투리차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요?"란 제목의 모스크바 통신문을 쓴 적이 있다. 주된 내용이 '기적'에 대한 것이어서 다시 정리하는 김에 '기적에 대하여'란 제목을 붙이도록 한다(이 글은 기적에 대한 나의 수다이다).

“지금 나는 졸리지만 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종이와 펜을 가지고 이야기를 쓸 것이다. 나는 내 안에서 어마어마한 힘을 느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어제 이미 다 생각해놓았다. 이것은 기적을 행하는 자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는 우리 시대에 살면서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기적을 행하는 자이며, 어떤 기적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를 아파트에서 쫓아낸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그 아파트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대신 아파트에서 고분고분 떠나 교외에 있는 헛간에서 지낸다. 그는 이 낡은 헛간을 아름다운 벽돌집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 헛간에서 살다가, 평생 동안 단 한번의 기적도 행하지 않은 채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이전에 한 차례 인용한 바 있지만, 하름스의 <노파>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앞에서 나는 ‘기적으로서의 삶(Life as a miracle)’과 ‘여행으로서의 삶(Life as a tour)’의 대립양상에 대해서 언급했는데(*단순하게 말하면, 여해에서 기적을 구하는 '여행으로서의 삶'은 '유사-기적으로서의 삶'이다), ‘기적을 행하는 자’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는 (1)평생 동안 단 한번의 기적도 행하지 않았다. (2)평생 동안 단 한번의 여행도 행하지 않았다(“계속 헛간에 살다가”)는 걸로 특징지어진다. 이건 변증법적 지양의 길인가, 아니면 제3의 길인가? 이하의 내용은 이 한 대목에 대한 주석의 성격을 갖게 될 것인바, 겸사겸사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쿠스투리차의 영화 얘기로 되돌아올 것이다.

 

 

 



아마도 ‘기적을 행하는 자’의 라캉적 명칭은 ‘주인기표’가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이며 나는 내가 말하는 바이다.” 여기서 기적이란 내가 나인 것이다. 왜냐하면, “상징적인 동일시와 상상적인 동일시의 불가능한 ‘원의 사각형’은 반드시 어떤 잔여물을 남”(<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216쪽)기기 때문이다. ‘원의 사각형’이란 말은 ‘square of the circle’의 번역인 듯한데, 사전에 다 나와 있는 바이지만, 그건 숙어적으로 (원을 네모지게 하는) ‘불가능한 일’을 가리킨다(우리말 ‘원의 사각형’이 그런 뜻을 갖고 있는가?). 때문에 “불가능한 원의 사각형”은 동어반복이며, “불가능한 일”로 충분하다. 다시 옮기면, “상징적인 동일시와 상상적인 (완벽한) 동일시는 불가능하며 그것은 반드시 어떤 잔여물을 남긴다.”

즉, 상징적/상상적 동일시는 불가능한 일이며 ‘미션 임파서블’이다. 그러니, ‘나(I)는 나(me)다’라는 상징적 동일시가 ‘기적’인 것은 당연하다. 특히나 나(me)가 ‘주인’ 혹은 ‘주인기표’일 경우에는 더더욱. 68혁명 이후의 현대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대학 담론’에서(그 담론 공식의 하단부에서) 드러나는 바는 (에릭 샌트너가 말하는바) ‘임명(investiture)의 위기’ 혹은 서임(敍任)/수임(受任)의 위기이다(지젝, <이라크>, 188-9쪽).

그러니까 (주인으로서의) 어떤 임무나 역할을 주려고 하지만, 아무도 안 받겠다며 거부하는 걸 말한다(예컨대, 아무도 반장 안 하겠다고, 아무도 대통령 안 하겠다고, 못 해먹겠다고 버티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서, “주체가 S(=주인기표)와 관계 맺는 것의 불가능성, 주체가 주인기표와 동일화하는 것의 불가능성 혹은 주체가 부과된 상징적 위임을 떠맡는 것의 불가능성”(<이라크>, 189쪽)을 가리킨다. 이 불가능성이 산출하는 것은 ‘상징적 동일성(=정체성)’의 상실이다. 즉, 상징적/사회적 정체성으로서의 ‘나(Me)’를 상상적 ‘나(i)’가 거부/회피함으로써 ‘나(i)≠나(Me)’가 되는 것이다(사회학자 미드의 ‘I-me’ 관계를 ‘i-Me’ 관계로 수정했다).

거꾸로, 기적이란 ‘내가 나인 것’이다. “아니, 이게 어떻게 나란 말인가?”란 부인으로부터 “나는 다름 아닌 나란 말이야!”란 수락에 이르는 여정(물론 이때의 ‘나는 나다’라는 건 동어반복이 아니다. 그것이 표시하는 건 역설적으로 동어반복의 불가능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은 ‘운명애’의 인간이다(비록 라캉은 니체를 참조하지 않지만). 그리고 이때의 운명은 (니체를 따를 때) 다리로서의 운명이고 몰락으로서의 운명이다. 너는 너의 운명(=몰락)을 사랑하는 자인가?

운명애로서의 ‘나=나’가 ‘기적’이라면, 그것에 대한 거부/회피로서의 ‘나≠나’가 흔히 가리키는 것은 투어이고 일탈/도착이다(흔히 ‘나’를 찾아간다는 명목의 이 행은 실상은 ‘나’로부터 미끄러지는 여행이다. 이런 여행담의 종결은 보통 집에 돌아와 보니까 거기에 ‘나’가 있더라는 식이니까). 그걸 좋은 쪽으로 말하면, 유목이고 탈주가 된다(무엇의 유목이고 탈주인가? 모든 경계를 넘나드는 블랙메일과 핫머니 아닌가? 정작 유목/탈주의 ‘모델’인 집시들은 탈주하고 있는가? 자신들이 탈주한다고 생각하는가? 무엇을 재배치하는가? 매번 재배치되는 건 전략 핵무기 아닌가? 사고/사유의 재배치는 뉴에이지즘과 과연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가? 생각을 바꾸면, 파트너를 재배치하고 체위를 바꾸면 새로운 세상이 되는가?).

하지만, ‘나=나’라는 상징적 동일시의 “상실의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갖가지 형태와 장치를 갖춘 향락으로 인해 온통 사방에서 시달리는 일이다…”(<이라크>, 189쪽) 번역문의 ‘향유’를 ‘향락’으로 고쳤다. ‘향유에 시달린다’는 건 우리말로 넌센스이다. 여기서 ‘갖가지 형태와 장치를 갖춘 향락’이란 지젝의 말은 비유적인 말이 아니며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



러시아의 한 TV채널에서는 ‘플레이보이’사(社)에서 만드는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매일같이 보여주는데, 요즘은 주로 스트립쇼와 ‘섹스의 모든 것’이란 제하의 프로그램이 나온다(‘모든 것이 가능한 섹스’라고 해야 할 듯하다). 스트립쇼야 흔하게(?) 보는 거지만, ‘섹스의 모든 것’에 나오는 것들은 간혹 엽기적일 때가 있다.

성기 피어싱부터 각종의 도구와 장치들을 이용한 새도-마조히즘과 집단섹스에 이르기까지 르포식으로 보여주는데(<아이즈 와이드 샷>에서도 보여지는 집단섹스 등은 ‘판타지’가 아니다), 참가자들은 다들 희열에 차 있는 듯하지만(혹은 희열을 연기하는 듯하지만) “온통 사방에서 시달리는” 그들은 사실 너무 고생스러워 보인다(아무런 마취도 없이 성기를 피어싱한다고 생각해보라).

‘향락’이라는 이름의 바로 그러한 고생/고통이 우리가 ‘나=나’라는 기적을 포기하는 대가로 얻는 ‘보상’이다(웬만하면 기적을 택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나는 소위 ‘성 범죄자들’이 보내져야 할 곳은 감옥이 아니라 이러한 (어떠한 금지도 없는) ‘섹스 천국’이라고 생각한다(그들에게 원하는 것을 주라!).(‘섹스 천국’의 유일한 금지는 외부에서는 절대로 아는 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베르톨루치의 문제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나=나’(라는 ‘파시즘’)에 대한 알레르기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안티-오이디푸스’적이다. 영화에서 말론 브란도와 마리아 슈라이버는 자신들의 이름을 지우며, 아파트라는 익명성의 공간에서 섹스만을 소통(불)가능성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들은, 특히 이해할 수 없는 아내의 자살 때문에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진 말론 브란도는 남편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으로부터, 자신의 수많은 (가짜)이름들로부터 필사적으로 벗어나고자(탈주하고자) 한다.

그에게서 ‘나=나’의 세계란 가식적인/의례적인 탱고의 세계에 다름 아니기에(그는 탱고경연장에서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까 보임으로써 그러한 세계를 욕보이고자 한다). 그러한 그가 도달하게 되는 마지막 지점은 물론 죽음이다(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지는 것이지만, 그에겐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죽음도 ‘껌’이었다). 그의 죽음을 순전히 부르주아 여성의 변덕/배신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 소박한 견해일 것이다.

‘나=나’라는 테마를 사이에 두고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 대척관계에 놓일 수 있는 것이 자크 도마엘의 <토토의 천국>이다(원제는 ‘영웅 토토’였던 듯하다). 신생아 병동에 난 화재소동 때문에 자신의 운명이 부잣집 아이의 운명과 뒤바뀌었다고 ‘믿는’ 토토는(자신의 연인도 빼앗긴다) 노인이 되어서 부도 위기에 몰린 이 재벌 친구(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한스’라고 해보자) 대신에 암살당하는 운명을 선택한다. 그는 그럼으로써 ‘나=한스’로 이행해가며, 자신의 ‘진정한 나(=한스)’로서 죽음을 맞는 ‘기적’을 연출한다. 그는 자기 운명의 주인공/영웅(Hero), 즉 주인-기표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 주인기표가 말 그대로 ‘죽음’을 의미하는 텅 빈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캐나다 감독 장 클로드 로종의 <레올로>에서 다루어지는 것도 같은 테마이다(나는 이 영화를 10년 전에 한 영화제에서 연거푸 보았다. 이 영화 또한 내게 ‘기적’을 보여주었다). 제대로 똥싸는 일에만 관심이 집중돼 있는, 몬트리올의 한 빈민가정에 태어난 소년 레오는 자신의 본래적 아버지는 시실리의 농부라고 ‘믿으며’ 그래서 자신의 이름도 이태리식으로 ‘레올로’라고 부른다.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무식한 아버지, 그리고 미친 누이들과 정신박약의 형 사이에서 삶을 버텨나가는 그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리고 옆집 처녀 비앙카를 사랑한다. 그러다가 비앙카가 돈을 받고서 할아버지에게 매춘을 한다는 걸 알고서는 할아버지를 죽이려다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다. 영화의 나레이터에게 남겨진 것은 레오, 아니 레올로가 남긴 기록들뿐이다. 그것은 레오가 레올로라는 상징적 위임을 떠맡고자 분투했던 날들의 기록들이기도 하다(하면, 기적들도 웬만하진 않다).

 

 

 



어쨌든 인상적인 것은 죽음/정신을 담보로 하더라도 끝까지 ‘나(me/Me)’라는 상상적/상징적 정체성에 도달하고자 하는, 혹은 그걸 유지하고자 하는 분투들이다 가령, 모파상의 단편 <쥘르 삼촌>은 여기서 좋은 분석거리가 된다. 거기서 문제되는 것은 한 가족의 상징적 정체성이다. 부자가 돼서 돌아올 걸로 이들 가족이 꿈꾸는 ‘쥘르 삼촌’이 아무리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허울은 필수적이다.

멕시코 감독 립스테인의 걸작 <짙은 선홍색>에서 자신의 ‘가발’에 악착같이 집착하는 대머리 이발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그 자신을 ‘가발을 쓴 나’하고만 동일시하고자 강박적으로 애쓴다. 가발을 안 쓰면 어떤가? 하지만, 그에게서 ‘가발을 안 쓴 나’는 곧 비존재(nothing)이다. 허리에 달랑 ‘새끼줄’ 하나만 두른 걸로 ‘의상’을 대신하는 한 원주민 부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새끼줄로 가려지는 부분도 없지만, 그들은 새끼줄을 안 찬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다(새끼줄도 안 차고 어딜 돌아다닌단 말인가?).

여기서 ‘쥘르 삼촌’과 ‘가발’과 ‘새끼줄’은 모두 동일한 의미연관을 갖는다. 즉,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실제로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다) 나/우리의 상징적 정체성에 필수적인 보증물이며 버팀목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이데올로기 이전의 차원에 있는 향락의 무의미한 중핵”으로서의 그것들은 이데올로기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이데올로기의 최종적인 버팀목으로 기능한다. <이데올로기>에서 지젝은 욕망의 그래프를 해설하면서 잉여 향락의 차원을 끌어오는바,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호명’(알튀세르) 너머의 차원에 있는, 이데올로기의 최종적인 버팀목으로서의 이러한 잉여물을 고려하기 위해서이다. 이에 따라 이데올로기 비판은 두 가지 상보적인 절차로 구성된다(이하 <이데올로기>, 217-223쪽 참조).



-하나는 담화적인 차원으로서 이데올로기 텍스트의 ‘증상/징후를 읽는 독법’이다. 이는 의미의 즉각적인 경험을 해체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의 영역이 얼마나 서로간에 이질적인 ‘부유하는 기표들’의 조립을 통해, 다시 말해 어떤 ‘매듭’의 개입을 통한 전체화를 통해 가능하게 되었는지를 입증해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의미의 즉각적인 경험’이란 건,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순진한 지각/수용을 뜻한다. 서로 이질적인 기표들이 어떤 ‘매듭’을 통해 얽어 매지고, 조립(=편집)됨으로써 산출되는 게 이데올로기적 텍스트인데(가령 신문의 지면을 보라), 그걸 자연스러운 것으로 지각/수용하는 데 이데올로기의 함정이 있다. 증상/징후 읽기는 그러한 자연스러움을 ‘해체’하는 것인바, 이러한 작업은 바르트의 신화 읽기와 유사하다.

-다른 하나는 향락의 중핵을 추출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가 (환상 속에 구축된 이데올로기 이전의) 향락을 함축하고 조작하고 산출하는 방식을 밝혀내는 것이다.

첫 번째의 ‘담화분석’을 두 번째의 ‘향락의 논리 분석’으로 보충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예증하기 위해서 지젝이 들고 잇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가장 순수한 육화’로서의 반유태주의이다. “담화분석의 수준에서 유태인의 형상 속에 투자된(=투여된) 상징적인 중층결정의 네트워크를 밝혀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첫째, 거기엔 전치의 과정이 있다. 반유태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계략(=속임수)은 사회적인 갈등(=적대)을 건전한 사회조직체와 그것을 부패시키는 힘으로서의 유태인 사이의 갈등(=적대)으로 전치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전치는 유태인과 돈 거래를 연관시킴으로써 가능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착취와 계급적인 적대의 근원은 노동계급과 지배계급의 기본 관계 속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인 조합이 계급투쟁을 대치하면서 ‘생산’력(노동자, 생산의 주최자…)과 ‘생산’계급들을 착취하는 상인들 사이에 위치하게 된다.”(218-9쪽)

마지막 문장은 오역인데, 러시아어본을 참조해서 다시 옮기면 이렇다: “그렇게 되면, 착취와 계급적 적대의 근원은 노동계급과 지배계급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생산계급(노동자+산업자본가)과 (생산계급을 착취하고 건강한 협력관계를 계급투쟁으로 변질시키는) 상인계급 사이의 관계가 된다.” 즉, 반유태주의는 ‘노동계급과 지배계급의 적대’를 ‘생산계급과 상인계급의 적대’로 전치시킨다. 이러한 전치를 보조하는 것이 응축(=압축)인데, “유태인의 형상엔 상하위계급들이 연상되는 특징들이, 상호 대립적인 특징들이 응축되어 있다. 유태인은 예를 들어 더러우면서도 지적이고, 음탕하면서도 (성적으로) 무기력하다 등등.”

담화분석에서는 이러한 유태인의 형상이 징후/증상이라는 걸 읽어낸다. 즉 그것이 코드화된 메시지이자 암호이고, 사회적 적대의 왜곡된 표상이라는 걸 읽어내는 것이다. 그러한 읽기가 바로 전치/응축작업의 ‘해체’이다. 하지만, 이러한 은유(=전치)-환유(=응축)의 논리 분석은 유태인의 형상이 얼마나 우리의 욕망을 사로잡고 있는지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유태인이 환상의 틀 속에 들어와 우리의 향락을 구조화하는 방식”을 고려하는 것이다.

“사회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의 목적은 바로 진정으로 존재하는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적대관계에 분할되지 않으며, 각 부분들 사이의 관계가 유기적이고 상보적인 사회에 대한 하나의 비전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경우는 물론 사회를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로서, 하나의 사회적 신체로서 보는 통합주의적인 관점이다… 우리는 물론 이러한 ‘하나로 통합된 신체로서의 사회’는 이데올로기의 근본적인 환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220쪽)

그렇다면, 이러한 통합주의적 비전과 적대적인 갈등에 의해 분열된 실제 사회간의 거리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유태인이다. “유태인은 건전한 사회조직을 부패시키는 이질적인 신체, 외부적인 요소이다. 요컨대 ‘유태인’은 물신이다. ‘사회’의 구조적인 불가능성을 부인하는 동시에 구현하는 물신인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것은 사회적인 장 속에서 향락이 분출되는 지점을 표시한다. 따라서 사회적인 환상이란 개념은 적대라는 개념에 대한 필수적인 대응물이다. 환상은 정확히 적대적인 균열을 은폐하는 방식이다.”

요컨대,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의 기능은 (사회의 구조적인) 이러한 비일관성을, 다시 말해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실패한 동일시를 보상해주는 것이다.” 예컨대, “파시즘에 있어 ‘유태인’은 파시즘 자체의 불가능성을 고려하고 표상하는 방편이다… 결국 ‘유태인’은 단지 어떤 근본적인 장벽에 대한 물신적인 구현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221-2쪽) 더불어 지적하자면, 스탈린 체제에 있어서 ‘인민의 적’들은 사회주의 자체의 불가능성을 고려하고 표상하는 방편이었다. 왜 우리가 완전한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도달하지 못하는가? 인민의 적들 때문이다! 왜 진정한 세계화가 실현되지 못하는가? 분파적 테러리스트들 때문이다! 등등.

“따라서 이데올로기 비판은 전체주의적인 응시에 의해 인식된 인과율의 연쇄를 전도시켜야 한다. ‘유태인’은 사회적 적대의 실제 원인이라기보다는 단지 사회가 하나의 완결되고 동질적인 전체로서 자신의 완전한 동일성은 획득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장벽과 불가능성의 구현물일 뿐이다. 유태인은 사회적인 부정성의 실제 원인이라기보다 사회적인 부정성이 실제의 현존을 떠맡는 지점이다.”(222쪽)

마지막 문장을 다시 옮기면: “유태인은 사회적 부정성의 원인이 아니다. 유태인의 형상은 사회적 부정성 자체가 실정적인 것으로 전화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 비판은 어떤 주어진 이데올로기적인 구성물 속에서 그것 자체의 불가능성을 표상하는 요소를 탐사하는/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사회적인 환상의 횡단’은 이런 식으로 ‘증상과의 동일시’와 상관적인 게 된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를 일종의 사회적 환상으로 다루는데, 사회적 환상과 개인적 환상이라는 (불)가능한 구분을 도입하자면, ‘쥘르 삼촌’과 ‘가발’과 ‘새끼줄’은 가족적/개인적 환상이기도 하다. 보다 일상적인 용어로 말해서, ‘환상’을 우리의 (구조적인) 실패에 대한 ‘핑계’가 되어주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의 기본문형은 “그것만 없(었)다면(if not only)” 혹은 거꾸로 “그것만 있(었)다면(if only)”이다. 쥘르 삼촌만 있다면, 가발만 있다면, 새끼줄만 있다면, 상징적 동일시가 가능해지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될 거라는 기대/가정이 바로 환상의 중핵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상의 횡단이란 쥘르 삼촌과 가발과 새끼줄이 다만 허울이며 핑계라는 걸 인지/확인하는 것이다. 즉, 쥘르 삼촌과 가발과 새끼줄과 유태인은 모두 ‘환상’이며, 그 너머에 있는 건 ‘실재라는 사막’이고 ‘shit’이며, ‘개똥’이고 ‘nothing’이라는 걸. 거기에 있는 건 궁극적으로 죽음 충동뿐이라는 걸. ‘개똥-되기’에의 충동.

앞에서 나는 ‘나=나’로의 이행이 (불가능한) 기적이며, ‘나≠나’(투어적 존재론)가 그러한 기적에의 거부/회피라고 말했지만, 그때의 불가능한 기적은 불완전한 기적이기도 하다. 보다 온전한 기적의 내용은 ‘나=나’가 아닌 ‘나=0’라는 사실의 인지/확인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그걸 ‘기적의 횡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즉, 진정한 기적이란 “나는 나이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기적이다(“주여,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걸 순차적인 것으로 이해하면, 기적은 두 번 일어나며, 두 번 일어나야만 한다. “나는 나다”라는 기적,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기적.



다시 반복하자면, 하름스의 <노파>에서 ‘기적을 행하는 자’는 (1)평생 동안 단 한번의 기적도 행하지 않았다. 왜인가? 그는 기적을 행하는 자이지만, 동시에 그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기적을 행하는 자이며, 어떤 기적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자신을 ‘기적을 행하는 자’와 동일시하기가 첫 번째 기적이라면, 그 ‘기적을 행하는 자’를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자’와 동일시하기가 두 번째 기적이다.

흔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적’이라고 일컬으며 축복하지만, 그건 기적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죽은 자가 부활하는 거야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일이지만, 그리스도는 신이며 최소한 신의 아들이 아닌가? 벼룩이 뜀뛰기를 잘 하는 게 기적이 아니듯이, ‘특별한 존재’가 기적(奇蹟)을 연출하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기적은 다른 데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물리고 싶다고 했지만,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모든 걸 뒤바꿔놓을 수 있었을 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진정한 기적은 바로 그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음’이다. 그걸 나는 ‘기적 없는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기적을 행하는 자’는 (2)평생 동안 단 한번의 여행도 행하지 않았다. 투어로서의 삶을 ‘나=나’로부터의 도피라고 했지만, 그러한 도피의 이면은 ‘나=0’과의 대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우리가 진정으로 주체가 되는 것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승인함으로써이다. ‘주체의 공백/궁핍(destitution of subject)’이란 말이 뜻하는바, 진정한 주체의 자리란 텅 빈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걸 무위(無爲)의 주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 없네”라고 한 가수는 노래했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 한, 내가 ‘당신’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이란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비라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으며, 혁명의 시간도, 민주주의도 도래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로 사랑과 자비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날 때, 혁명의 시간과 민주주의가 도래할 때,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우리는 결코 그것이 기적이라고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아무도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타르코프스키(1932-1986)의 마지막 영화 <희생>(1986)은 전적으로 ‘기적 없는 기적’에 바쳐진 영화이다. 자신의 아들 안드류샤에게 바친 이 영화의 이야기는 “은퇴한 노배우 알렉산더가 생일을 맞이하여 꾸는 세계 종말의 꿈과 그것을 막으려는 노력의 하루 낮 하루 밤”을 다루고 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에 따르면, ‘우리 세기(=지난 세기)의 마지막 우화’인 <희생>은 한마디로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에 관한 영화다. 그는 3차 대전(=세계의 종말)에 맞서서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지켜내고자 간절한 기도를 드리며 신에게 (종말 대신에) 오늘과 같은 하루가 내일 또 주어진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는 다음날, 어제와 같이 밝은 햇살의 아침을 맞이하게 되자 그는 신에게 감사하며 가족들 몰래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는 결국 앰뷸런스에 실려간다.

사실 이 영화는 암투병중이었던 타르코프스키가 자신의 영화적 유언으로 만든 것이며, 자신의 아들과 인류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 영화 속 알렉산더처럼 모든 걸 희생하겠다는 각오로 찍은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의 기적은 알렉산더의 간구대로 다음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다른 가족들에겐 일상적인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 것이었지만, 알렉산더는 그 하루에서 신의 은총과 기적을 본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한다(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자신의 ‘말씀’, 즉 로고스 또한 신에게 제물로 바친다). 만약에 당신이 이 ‘기적’ 같은 영화를 보면서 눈물 흘리지 않았다면(동시에 이 영화는 아주 코믹하다), 아직 당신의 삶은 기적이 아니라 투어에 가까운 것이리라.

바라건대, 당신 스스로가 ‘기적을 행하는 자’임을 믿을 것이며 세상은 너무도 많은 기적으로 충만해 있음을 믿을지어다. 아멘.

06. 05. 30.



P.S. 쿠스투리차의 <삶은 기적이다>에서는 시작 장면에서 “삶은 정말 기적이군!”이란 대사가 나온다. 우체부가 주인공 루카의 집 암탉이 닭장 둥지에 잔뜩 낳아놓은 달걀들을 보면서 감탄하며 내뱉는 대사이다. 전쟁과 난장 속에서도 (일상적) 삶이 끈질기게 이어지는 것, 그것이 쿠스투리차가 보는 기적이다.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버전으로 말하자면, (지진과 같은 재난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이 기적이다. 그렇듯, 기적은 활달하고 기적은 눈물나며, 기적은 충만하다. 눈물 흘리는 성상/성화나 불상/탱화를 찾아 다니는 이들만 모를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0년 여름에 한 카페에 올려놓았던 글을 다시 옮겨놓는다. 종교에 관한 토론/논쟁에 부득이하게 끼어들어 한 마디 거들었던 글인 듯하다. 다시 읽어보면서, 세월이 지남에 따라 무엇이 변하고 안 변하고 하는지를 알겠다.

저는 굳이 밝히자면, 무신론자이고, 범신론자입니다. 저에겐 무신론과 범신론의 차이가 잘 구별되지 않기에 그냥 막연하게 그렇게 분류하기로 하지요. 하긴 유신론이나 무신론이냐 하는 것이 대개는 기독교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판단 혹은 태도에 따른 것이어서, 그러한 사유 전통이나 범주의 바깥에서 바라볼 경우,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해야겠죠.

그리고 사실, 러시아의 무신론이란 것도 19세기에는 일종의 신앙이었기에, '무신론'에 말에 대한 '체감' 또한 저마다 다를 거라는 점도 인정해야겠구요. 하여간에 신의 존재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증명해 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자연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길게 논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또 제가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유대교적 전통이나 부정신학에서의 신은 똑같은 기독교적 신이라 하더라도 양상이 좀 다르다는 건 말씀드리고 싶어요. 요는 우리가 신에 대해서 알 수 없다는 것. 왜냐면, 우리는 무능력하고 어리석으며 모자라니까. 조금 만용을 부려 신의 존재를 증명했다고 해서, 그 증명 때문에 신이 존재하기 '시작'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만약에 '존재'한다면, 존재 '증명'이 안된다고 해서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겠죠.

요는 신의 존재 증명이니 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빌리면) 기독교적 담론 체계(/전통) 내에서의 언어게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믿는 자에게만 중요한. 믿지 않는 자에게는 바람에 흩날리는 비닐 봉다리만큼이나 사소한. 그러면서 때로 거룩한.

 

 

 

 

이러한 토론/논쟁에 제가 깊이 참여하지 않는 것은 오래 전부터 그러한 '게임'에 멀미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의 <대심문관>)이나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재미있게 읽었더랬습니다. 하지만, 관념이 주는 재미라는 건, 한 인류학자가 지적한 대로, 그저 '생각하기에 좋은 것(good to think)'이어서, 우리 삶을 가상으로만 지배할 따름입니다. 삶을 철학화하는 데 대해 반감을 가졌던 체홉의 경우를 떠올릴 수도 있겠네요.

이반 카라마조프가 가졌던 의문 중의 하나는 신의 존재라기 보다는 신의 의미입니다. 하여간에 이러저러한 신의 존재한다고 칩시다. 그리고 그러한 신(들)에 의해서 이 세계가 창조되었다고 칩시다.(그런 믿음은 가정이 아닐 경우, 대개는 용기의 결여에서 나오는 것인데- 즉 끝까지 가보지 않는 사유)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얼마만큼 달라지는지요. 순진한 어린아이들의 무고한 고통이 감면됩니까? 소위 세계 고가 탕감됩니까? 예수만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아침마다 전철역에서 설교하는 분도 있는데, 정말 그런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면, 제 생각에 그 믿음의 환희 때문에(혹은 두려움 때문에) 심장이 터져 죽든가 혼절하든가 해야하지 않을까 싶군요.

주인 의식을 가지고 사는 건 좋지만, 주인 의식이라는 게 자신이 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의식이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내가 사는 곳, 내가 속한 공동체, 내가 가진 믿음이 반드시 옳은 것이고 절대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보다 태만하며 부정직한 믿음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그러한 믿음은 '인간적'이기조차 합니다. 무능력하고 이기적이며 모자란...

 

 

 

 

'하늘을 나는 새, 들의 백합'이란 성경 구절도 있지만("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자신의 존재를 그 새들과 백합과 차별화시키면서 잘난 체하기보다는 그 새들과 백합의 자유로움과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본받아 보려는 삶이 제겐 좋아보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말할 수 있고,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걸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타자로서의 자신뿐만 아니라(우리는 자신에게 낯설지 않던가요?) 다른 이, 다른 존재들의 언어에 귀기울이기 위한 것입니다. 일종의 말건넴이지요.

정말로 보기에 좋더라는 세상에 살고 싶은 건 모든 사람의(모든 사람은 아닐 겁니다) 꿈이고 열망일 겁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을 손에 물 안 묻히고, 무슨 믿음 하나로 이루려고 하는 건 교만이겠지요. 믿거나 말거나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의 조그만 정의들을 위해서 조금씩 노력해 가는 것, 가끔은 퇴보도 하고 방황도 하면서 하여간에 어딘가를 주시하며 가는 것, 그것이 저에겐 신의 존재 증명보다도 신의 의미보다는 중요해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무신론자이고, 굳이 말하자면 범신론자입니다. 당신들이 모두 신으로 보이니까...

 

 

 

 

(*)마지막 멘트는 그냥 유머이다. 그리고 그 유머의 다른 말이 '이데올로기'이다.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인간을 신이나 벌레로 간주하는 태도가 이데올로기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사이의 어중간한 무엇이다. 혹은 침팬지와 보노보 사이의 '제3의 침팬지'일 뿐이다...   

06. 05. 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일보 문학기자(이면서 현재는 수석논설위원)인 박래부씨가 <작가의 방>이란 책을 최근에 냈다(서해문집, 2006). 지난주말에 북리뷰들을 읽다가 알게 된 것인데, 오늘자 한국일보(06. 05. 30)에 소개 기사가 실렸다. 기꺼이 옮겨오도록 한다. '남의 집' 혹은 '남의 서재' 구경에 특별히 취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 블로그 자체가 '나의 서재'인 만큼 작가들의 서재를 눈동냥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니까. 기사의 필자는 (동업자이면서 필히 후배일) 최윤필 기자이다.

한편, 박래부 기자는 직장 선배였던 김훈과 '문학기행'을 연재하기도 했었는데, 찾아보니 2004년에 세번째 판이 <제비는 푸른 하늘 다 구경하고>(따뜻한손)로 출간됐다. <화가 손상기 평전>(랜덤하우스중앙, 2000)도 그의 작품이다.

-‘작가의 방’…, 이라는 묘한 울림의 에스프리를 담은 책이 나왔다. 한국일보 수석논설위원인 문학기자 박래부씨가 우리 시대의 좋은 시인 소설가 6명- 이문열, 김영하, 강은교, 공지영, 김용택, 신경숙- 의 집을 찾아가, 집과 방과 책과 책상을, 거기에 녹아 든 햇살과 바람과 음악과 그림을, 또 그들의 시와 소설을 이야기한 책이다.

-그들의 빛나는 문학이 탄생한 공간과 거기에 투영된 작가 자신의 내면이 아스라한 거리를 두고 그들의 문학과 만나는 지점들. 필자는 그 지점의 표정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격조 있는 문체로 담아냈고, 출판저널 기자 박신우씨는 사진으로, 일러스트레이터 안희원씨는 맛깔스러운 그림으로 빈 곳을 채워주고 있다.

-처음 들른 ‘방’인, 소설가 이문열씨의 경기 이천 ‘부악문원’을 두고 그는 “그 자체가 평생 추구해온 탈이념적 복고주의적 이상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혹은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디세이에 다름 아닐 것”이라고 썼다. 그 정신적 ‘오디세이’의 서재는, 성채를 방불케 하는 규모와 공간 벽면을 가득 채운 저서에도 불구하고, 자기 과시나 예술적 취향에는 거의 돈을 들이지 않았다. 철저히 ‘기능적’이다. “검소한, 또는 무미건조해 보이는 취향 고백을 듣지 않더라도, 그의 소설 역시 예술지향적이기보다 철학지향적이다. 그러나 이는 그가 문학에만 전력투구하는 유형의 작가라는 것, 목표와 주제에 치열하다는 것을 말해준다.”(29쪽)

-이렇듯 그가 안내하는 작가의 방은 그들의 내밀한 사생활을 들여다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10여년 전 ‘문학기행’시절의 행로에서 문학이 배태된 거시 공간을 살폈다면, 이번 책에서 그는 작가들의 미시공간, 그리고 내면의 공간을 살핀다.

-자유로운 인문주의자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젊은 소설가이자 교수인 김영하씨의 연구실, ‘꾸밈없는 착함이 거처’하는 강은교 시인의 소박하고도 정갈한 방, 작은 도서관쯤은 될 법한 장서를 갖추고 책이 자신의 오락이라고 말하는 소설가 공지영씨의 ‘방’.

-시골 청년을 시인으로, 지식인으로 성장시킨 ‘조강지처 같은 책’들을 둘 데 없어 학교와 고향집, 전주의 아파트에 나눠 쌓아두고 있는 김용택 시인의 ‘방’을 나서며 그는, “자연 전체를 하나의 큰 서재로 여기는 시인은 드물지만 행복하다”(231쪽)고 썼고, ‘집 전체가 정갈한 카페’를 연상케 하는 소설가 신경숙씨의 집필공간 옆 책장에서는 ‘문학전집’을 꺼내보기도 한다. 작가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큰오빠가 선물한, 소설 <외딴방>에 그 과정을 쓰기도 했던 그 오래된 책이다.

-필자는 작가들의 서재에서 귀하고 반가운 책이나 사상가를 만나면 못내 지나치지 못하고 자신의 단상을 적는다. <외딴방> 이야기 끝에 필자의 대학시절 야학교사 경험을 이야기하는 등 기억을 더듬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작가의 방과 그들의 문학 이야기일 뿐 아니라, 기사로 문학텍스트를 심심찮게 압도했던 문학기자(필자)의 삶과 문학에 대한 열애의 은근한 추억담 같기도 하다. 책에 실린 사진들은 30일부터 내달 6일까지 종로구 사간동 ‘유갤러리’에서 전시된다.

06. 05. 30.


 

 

 

P.S. 서재 훔쳐보기가 흥미로웠다면, 아예 돗자리 펴고 작가들의 사생활까지 염탐해볼 수도 있겠다. 김화영 교수의 <한국 문학의 사생활>(문학동네, 2005)이 요긴한 길잡이가 되어줄 듯하다. 시인들 얘기는 <시인박물관>(현암사, 2005)에서도 엿들을 수 있겠고. 끝으로 맘에 드는 서재 이미지를 하나 옮겨온다. 다소 호사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는 게 염치 있어 보인다(물론 서가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야 하지만). 가끔은 내가 가족뿐만 아니라 책들도 혹사시키는 게 아닌가란 자책이 들곤 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瑚璉 2006-05-30 11:13   좋아요 0 | URL
마지막 이미지는 안보이는데요?

로쟈 2006-05-30 11:17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아직은 보이는데... 가 아니군요. 다시 구해와야겠습니다.^^

3794 2006-05-31 19:34   좋아요 0 | URL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는 게 염치 있어 보인다'// '염치 있어보인다' 는게 무슨 뜻인가요?^^;;

로쟈 2006-05-31 19:51   좋아요 0 | URL
염치란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입니다. 고작 책들로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는 건 염치 없는 일인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