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문학평론가 김수이 교수의 세번째 평론집이 출간됐다. 두께에 비해 비싼 책이어서 서점에서 들었다가 놓은 적이 있는데(구입은 좀더 짬을 봐야겠다), 중앙일보의 '손민호 기자의 문학터치'란에서 다루고 있기에 겸사겸사 옮겨온다. 김교수는 시 전문 비평가로서 가장 부지런하다는 평을 듣고 있고, 지난 계절부터는 <문예중앙>의 편집위원으로 가세했다(중앙일보에서 거들 만하군). 아무튼 같은 세대 비평가가 활발한 활동으로 주목받는다는 게 기분이 나쁘진 않다. 같이 늙어갈 터이지만 대가급 비평가들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중앙일보(06. 07. 15) 시를 향한 가없는 애정

-글을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 글을 읽으면 글쓴이의 면모가 보인다. 가령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하곤 사이가 안 좋고,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에 대해선 경기를 일으키는 것쯤 이내 알아챌 수 있다. 비평가일수록 더 하다. 비평이란 게 참견하고 가타부타 따지는 일이라서 그렇다. 가치가 배제된 비평은 세상에 없다. 해설에도 가치는 개입한다.

 

 

 



-그러나 꼭 그런 건 아닌가 보다. 예외가 있다. 비평가 김수이(37)다. 말하자면 그는, 좀체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평론가다. 최근 출간된 세 번째 비평집 <서정은 진화한다>(창비)를 보자. 젊은 비평가이니만큼 김근.황병승.김언 등 젊은 시인에 대한 관심은 쉬이 짐작했던 터다. 한데 정현종.최하림.정호승 등 시단의 중진을 정성껏 호명하고선 김혜순.김언희.김선우 등 여성시 계보를 죽 훑는다. 그러더니 불쑥 '지게꾼 시인' 김신용을 칭찬한다. 그렇다고 민중시 계열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과거 민중시 계열이 대거 몰린 요즘의 생태시를 그는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를 좀더 알아보기로 했다. 석사논문 주제가 김수영과 김춘수였다. 흥미로운 조합이다. 시대와 문학의 거리를 묻는 듯 보였다. 1997년 등단할 땐 기형도와 남진우를 파헤쳤다. 독한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시인들이다. 80년대라는 시대적 고민도 읽혔다. 그러나 박사학위 주제는 서정주였다. 미당의 미학, 욕망의 변화 양상을 분석했다. '도대체 정체가 뭐냐'고 물을 만한 시적 편력이다(*머 그래봐야 다 시인들(!)이지만, 다방면으로 두루 훑었다는 얘기는 되겠다. 즉, 기본기가 튼튼하다는 것).

-오히려 김수이의 정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현대시를 다 끌어안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계파와 경향, 진영과 계보 따위는 상관없는 것이다. 진실한 문학이라면, 온몸으로 앓은 시라면 모두 보듬으려는 것이다. 하여 사방에 대고 잔소리만 해댄다는 소리도 듣는 것이다. 만인의 편이라는 건, 만인이 적이라는 얘기도 된다.

-평론집 제목에서 '진화'는 두 가지 의미다. 진화(進化)와 진화(鎭火)를 동시에 뜻한다. 내일의 서정으로 나아가고 어제의 서정은 꺼트려야 진정한 서정이란 의미다. 부단히 움직이라는 다그침으로도 읽힌다. 그러나 이 단호한 몸가짐에서 시를 향한 가없는 애정을 읽는다.



-김수이에 따르면, 시인들은 '그리고'나 '그러므로'가 아닌, '그러나'와 '그럼에도'에서 시작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와 '그럼에도'에 존재해야 시다. 설명되거나 부연되어선 시가 아니다. 그래서 다시 김수이에 따르면, 시는 요약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요약될 수 없는 것처럼. 아니 요약되어선 아니 되는 것처럼.

06. 07. 16.

P.S. 저자를 평론가로 '호명'해준 문학비평가 황종연 교수는 추천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현재 평단에는 김수이만큼 부지런하게 시를 읽고 정확하게 시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는 평론가도 드물다. 그에게는 국내의 어떤 유수한 시인의 언어도 낯설지 않으며 어떤 새로운 유행도 당혹스럽지 않은 듯하다. 김수이의 평론을 읽어보면 작품의 유형이 아무리 달라도 비슷한 높이에서 검토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대상 작품이나 시인에게 잠복된 의식의 행로가 정연하게 검출되는 한편, 동시대 시의 역동적인 구도 속에 수려하게 배치되는 광경을 접하게 된다." 하니, 동시대 시의 지리부도 같은 걸 그에게서 기대할 수 있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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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는 G8 서방 선진국 정상회담이 열리고 있다. 이전엔 'G7+1'이라고 표기했던 듯한데, G8이라고 하는 걸 러시아도 당당히 '선진국'  대우를 받는 모양이다. 하긴, 경제적으로야 아직 거기에 못 미치지만 외교적, 군사적으로야 못 끼여들 건 아니겠다. 오마이뉴스(06. 07. 15)에서 관련기사를 옮겨온다. 필자는 정인고 기자이고, 타이틀은 '푸틴, 피터 대제의 꿈에 도전하나'이다. '표트르 대제'를 '피터 대제'라고 표기하는 것으로 보아 필자는 러시아통은 아니고 영어권 보도을 종합해서 기사를 작성한 듯하다.

피터 대제의 야망이 반영된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 G8 정상회담의 공식로고(왼쪽)와 피터 대제의 청동기마상

-1703년 피터 대제는 핀란드만과 네바강의 어귀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영어 ST. PETERSBURG), 즉 '성베드로의 도시(상트 - 성, 페테르 - 베드로, 부르크 -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이 도시는 1712년에 완공된다. '성베드로의 도시'란 뜻도 가지지만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의 도시'란 뜻도 포함하고 있다). 서구 유럽 지향적 전제 군주의 결정에 따라 러시아는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고, '서구를 향한 창', '북방의 베니스'는 이렇게 해서 탄생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천국의 열쇠를 쥔 사도 베드로처럼 발트해로 나가는 열쇠이자 서구로 향하는 길목의 열쇠를 지니고, 러시아의 황실 문장인 '쌍두 독수리'처럼 동과 서를 바라보며 세계의 중심을 이곳에 건설하겠다는 피터 대제의 야망과 의지가 반영된 도시이다. 이제 피터 대제의 장엄한 모습은 G8의 로고 모델이 되어, 300년이 지난 지금 그의 대작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러시아의 현대판 짜르 푸틴에 의해 그 꿈이 실현되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서방 선진 8개국 회담의 올해 의장국인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간) 열리는 이번 G8회담을 통해 러시아의 재건을 다짐하고 있다. 이번 G8회담의 공식 의제는 에너지 안보, 전염병 예방, 교육 세 가지다. 여기서 푸틴의 야심은 에너지 분야에 있다. 이미 올 1월 우크라이나와의 가스분쟁을 통해 전세계에 러시아의 야욕을 보여줬다. 냉전 시절 러시아가 핵무기 보유국으로 미국과 함께 세계를 지배했던 강국이었다면, 오늘날의 러시아는 에너지를 기반으로 과거 소련시절 초강대국의 면모와 위상을 되찾으려 하고 있다.

President of the Russian Federation Vladimir Putin

-한편 임기를 1년 남긴 푸틴은 이번 G8회담을 통해 자신의 인기와 권력을 더욱 견고히 하여, 순조로운 권력이양 또는 3선 전략을 추진하고자 한다. 러시아 대통령은 헌법상 연임만 가능하나, 헌법을 개정하거나 벨라루시와의 통합을 통한 신 헌법에 의해 장기집권의 길을 실현시킬 수 있다.

인권 들먹이는 서방국들, 뒤로는 자원협력 손 내밀어

▲ G8 정상회담이 열리는 콘스탄틴 궁전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인공위성, 핵무기보다 더 무서운 것은 러시아의 자원'이라고 말했듯이, 러시아는 석유와 가스를 포함한 풍부한 자원과 최근 에너지 가격 폭등으로 인한 경제적 성장으로 자원 부국의 강점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러시아의 인권과 민주주의 퇴보를 들먹이고 G8회담 보이코트까지 거론하며 러시아를 압박했던 서방국들도 러시아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는 실정이다.

-푸틴의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는 세르게이 이바노프 러시아 부총리 겸 국방장관은 푸틴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권위주의를 강화하며 러시아를 후퇴시키고 있다는 서방 정치인들의 발언에, "민주주의는 감자가 아니다, 감자가 자라지 않는 곳에 감자를 심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며 러시아를 건들지 말라고 경고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 회담을 통해 서방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듯하다. "러시아는 주권국가이니 러시아의 내부 일에 간섭하지 말고 러시아를 존경하라, 그렇지 않으면 협력(에너지)과 상호이익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는 과거 소련시절의 대중 선동술을 이용해 G8의 의장국, 개최국의 모습을 러시아인들에게 보여주고 대국으로서의 부활을 꾀하고 있다. 에너지 무기화 정책의 선봉장인 국영 에너지기업 '가즈프롬'은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으며, 부시와의 단판 승부를 통해 마지막 남은 WTO 가입 동의안을 매듭지어 러시아를 글로벌 경제대열에 합류시키고자 한다.

-제2선에서는 체젠문제, 인권문제, 민주주의 퇴보, 언론의 자유를 거론하며 러시아를 비난하지만, 제1선에서는 에너지 협력과 공동 경협 프로젝트 및 투자 제안을 하는 서방국가들의 딜레마를 푸틴은 너무나 적절하게 잘 이용하고 있다. KGB출신 답게 심리전과 전략의 대가이다. 300년전 피터 대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고자 했던 야망을 푸틴은 자신의 고향인 이곳에서 G8 정상회담을 통해 실현시키려 하고 있다.

▲ G8회담에 맞춰 새롭게 단장한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

06. 07. 16.

P.S. 한편에서는 G8 회담 반대시위도 있었던 모양이다. "양키 고우 홈!"이란 피켓도 보인다.

P.S.2. 동아일보의 칼럼 하나도 참고삼아 옮겨온다. 타이틀은 '푸티니즘'이고, 필자는 김순덕 논설위원이다.

동아일보(06. 07. 15) 어제 국제유가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가장 기뻐하는 사람 중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있을 게 틀림없다. 석유생산량 세계 2위인 러시아의 대통령답게 국민의 지지도가 유가와 동반상승해 70%를 넘겼다. 오늘부터 러시아에서 열리는 G8(선진 7개국+러시아) 정상회의 참가자 가운데 이만한 인기를 누리는 지도자는 없다. 비결은 ‘강한 나라, 강한 리더’로 요약된다.

러시아 경제는 2000년 푸틴 대통령 취임 이래 연평균 6% 성장했다. 임금이 매년 10%씩 올라가니 국민은 대통령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을 것이다. 물론 유가상승 덕이 크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이룩한 ‘정치적 안정’이 없었다면 고도성장과 국민적 자부심의 회복이 지금만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 G8 정상회의에서 북한 미사일이니, 에너지 안보니 아무리 큰 의제를 외친대도 러시아인들의 귀엔 안 들릴 것 같다. 그들의 주제는 하나다. ‘다시 보라, 세계무대로 돌아온 위대한 러시아를!’

푸틴 대통령의 카리스마를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시초프)의 증손녀 니나 흐루셰바는 ‘푸티니즘(Putinism)’이라고 했다. 스탈린 숭배, 공산주의, KGB 정신에 약간의 시장주의를 합친 변종 이데올로기다. 1991년 소련 붕괴 뒤 러시아인들은 극심한 혼돈과 빈곤을 체험하며 민주주의에 실망했다. 당당했던 소련과 러시아제국, 스탈린과 황제가 그리워졌다. 자유가 좀 없었지만 그건 일부 개인의 문제였다. 그때 일거에 혼란을 정리하고 국민을 사로잡은 영웅이 푸틴이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자유민지주의와 더 멀어진 나라가 됐다. 경제는 물론이고 의회와 사법부, 언론까지 몽땅 크렘린 손아귀에 잡혀 있다. 부패와 비효율이 엄청나다. 오일머니만 믿고 산업경쟁력을 키우지 않는 대가도 언젠가 치를 것이다. 아무튼 푸틴이라는 ‘괴물’을 어찌 대해야 할지 G7 정상들은 고민스러울지 모른다. 외교의 거장 헨리 키신저는 무겁게 말하고 있다. “적으로 여기면 잘못이다. ‘표트르 대제(大帝)’ 같은 러시아 파워가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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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철학,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 내용에 부합하는 제목이지만, 그냥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라고만 제목을 달았다(시는 철학을 그렇게 유혹한다). '시와 철학'에 관해 몇 마디 적을 일이 있었는데,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서 이전에 쓴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의 내용을 많이 가져왔다. 다시 읽어보지 않아 무얼 쓴 건지 분명하지 않지만, 일단은 창고에 넣어둔다. '아주 오래된 연인들'은 물론 O15B의 아주 오래전 음반에 들어 있는 곡명이기도 하다.

"철학과 시 사이에는 오래된 일종의 불화가 있다네. 이 싸움은 중요한 것일세, 여보게 글라우콘!.. 적어도 시에 자극되어, 올바름과 그 밖의 다른 훌륭함(덕)에 무관심해질 만큼 되어서는 아니되네.”(플라톤, <국가>)

 

 

 

 

플라톤의 회상에서처럼 시와 철학 사이의 관계는 오래된 불화의 관계이다. 따라서 ‘시와 철학’에 관해 몇 마디 적는 일은 이러한 불화의 내력을 들추는 일과 무관하지 않겠다. 하지만, 내력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불화의 원인일 것이다. 그것을 오래된 것으로 만들어놓는 구조적이고 필연적인 원인, 혹은 조금 현학적으로 말해서, 불화의 발생론적 구조, 그걸 잠시 생각해볼까 한다.

어떤 ‘오래된’ 불화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지속적인 관계이다. 끈끈한 인연이 아니고서야 서로가 서로를 불만스러워하는 티격태격의 관계가 반복/지속될 리 없다. 말하자면, 그들은 의무감으로 전화를 걸어서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는 ‘아주 오래된 연인들’인 것이다. 서로를 불편해하면서도 끝내 헤어지지는 못하는 연인들 말이다.


그렇다면, 시와 철학을 묶어주는 끈은 무엇인가? 그들은 왜 서로에 대해 ‘넌 정말 아니거든!’이라고 겉으로는 넌더리를 내면서도 ‘그래도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되지!’라고 아쉬워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공통의 지반(地盤) 위에 자리하고 있는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이다. 그 지반이란 바로 언어, 곧 로고스(logos)를 말한다.

 

 

 

 

 

 

 

 


알려진 바대로,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시와 철학은 그 로고스의 두 자녀이자 아종(亞種)이다. 그것을 각각 시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라고 부르기로 하자(횡설수설을 시라고 부르지 않는 이상 시가 자기 나름의 로고스를 갖다는다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물론 시와 철학이 규범적 범주라면 시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는 양태적 범주이며, 이 두 범주가 동일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규범적 범주로는 변종적인 사태, 곧 ‘시적인 철학’과 ‘철학적인 시’ 따위를 포괄하여 다루지 못하겠기에 양태적인 유형학의 도움을 빌어서 시와 철학의 관계를 새롭게 말해보자는 것이다.


흔히 이성이나 논리와 동일시되는 로고스를 언어적 차원에서 재규정할 경우에, 시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의 양 극단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기표-논리의 극대화’와 ‘기의-논리의 극대화’이다. 기의-논리가 극대화된 지점에서 우리는 자연어에서 기표성을 배제한, 아니 자연어 자체를 배제한 기호논리학의 세계를 만나게 되며(‘자연어’란 한국어, 영어, 일어 같은 개별 언어를 말한다), 기표-논리가 극대화된 지점에서 우리는 자언어의 기의성을 최대한 배제한 기표의 순수유희를 만나게 된다(가령 칼리그람이나 철자시). 이런 시는 어떤가?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가령 이 시 윤동주의 <팔복(八福)>만 하더라도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란 구절을 여덟 번 반복하고 있는바, 이러한 반복은 비록 순수유희가 아닌 정서적인 강도의 강화를 지향하지만 의미론적으론 ‘잉여’이다. 기의-논리 극대화의 관점에서라면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8”이라 기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간단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철학적 로고스는 세탁기처럼 기표의 때를 계속 세탁해대며(철학적 로고스의 강경파들은 그렇게 해서 언어를 ‘흰 빨래’처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시적 로고스는 단어들에 폭탄 세례를 퍼부음으로써 기의를 증발시키거나 해체시키고자 한다(김춘수의 무의미시나 이승훈의 비대상시 등의 계보는 전범적인 사례이다).

 

 

 

 

 

 

 

 

 

즉, 극단적으로는 철학적 로고스가 자연어를 인공어화하려는 지향성을 갖는다면 시적 로고스는 자연어를 자움어(러시아 미래파 시인들의 표현을 빌자면 ‘새의 언어’)화 하려는 지향성을 갖는다(러시아어에서 '자움'은 '초이성'이란 뜻이다). 이 자움어를 한국의 ‘미래파’ 시인들이라면 ‘시체들의 언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의 질긴 자궁을 어디에 두었나

광장의 시체들을 깨우며

새엄마를 낳던 시끄러운 밤이여.

꼭 맞는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황병승, <검은 바지의 밤> 부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을 따라서 조금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시란 자연어를 낯설게 사용한 것이다(해서, 지각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오브제를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함으로써 미적 효과를 창출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공통적인 건 어떤 ‘형태(form)’에 대해서 사고한다는 점이고, 그런 점에서 시는 조형예술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 미국의 신비평가들이 시를 ‘잘 빚어진 항아리’에 비유한 건 따라서 자연스럽다.  


시적 로고스는 기본적으로 언어의 조형화, 혹은 조형적 언어를 통해서 의미를 산출한다(야콥슨을 따라서 좀 어렵게 말하자면, 그것은 통합체적인 언어를 계열축에 따라 투사한다). 즉, 시는 어떤 조형적 입체이며, 거기서 중요한 건 볼륨이다. 언어는 시적 로고스 안에서 자신의 풍만함을 자랑한다(요컨대, 철학에 코기토가 있다면 시에는 코르셋이 있다!).


반면에 철학적 사유의 근간은, 그것이 형식논리(아리스토텔레스)이건 변증법적 논리(헤겔)이건 간에 논리에 있으며(해서 ‘논증’은 철학적 로고스의 가장 중요한 구성소이다. 논리는 철학의 정신을 구성하는 ‘뼈다귀’이다), 논리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order)이다. 시의 언어가 주로 분칠하고 치장하는 언어라면, 철학의 언어는 명령하고 주문/요청하는 언어이다. 똑같은 언표들이라도 배치순서가 바뀌면 문학에서는 새로운 의미가 창출되지만 철학적 논리는 한순간에 비논리 혹은 모순으로 전락한다(예컨대 3단논법의 논항들을 뒤섞어보라). 그러한 논리가 지향하는 것은 모순의 배제 혹은 지양이다.


의미론적 차원에서 논리적 모순의 등가물은 넌센스(무의미)이다. 때문에, 어떤 철학적 논증/저작에 대해 ‘넌센스’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 된다(가령, “그게 말이 되냐?”) 반면에 시에서의 ‘넌센스’는 그 자체가 하나의 기법이자 전략이며, 장르, 더 나아가 사조를 이루기도 한다. 철학적 논리를 구성함에 있어서 순서가 중요하다고 하면, 철학적 담론의 구성인자가 되는 언어에 대해서 엄격한 훈령이 하달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른바 ‘동작 그만!’이 요구되는 것이다.


해서, 풍만한 시의 언어가 ‘언어의 카니발’을 떠올리게 한다면, 강파른 철학은 ‘사유의 학교’(야스퍼스)를 넘어서 ‘사유의 군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철학이 일차적으로 요구하는 언어는 당연히 바지춤 추스르기에도 바쁜 어영부영하는 자연어가 아니라 깍두기 머리에 자세 제대로 나오는 보편어 혹은 인공어이다.

 

 


 

 

 

 

 

 

20세기 철학을 흔히 ‘언어적 전회’로 특징지을 때 그것이 주목한 것은 사유와 언어의 관계, 보다 구체적으로는 사유에 있어서 언어의 매개성이었다. 아주 당연한 듯하지만, 우리는 ‘언어’로 사유한다는 것. 즉, 사유의 언어-의존성에 대한 자각이 ‘언어적 전회’의 일차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이때의 언어란 바로 ‘자연어’로서, 그리고 ‘일상어’로서의 개별 국어이며, ‘언어적 전회’는 이 자연어/일상어의 ‘존재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태는 정반대로 간다. 언어-의존성에 대한 자각의 이면은 이러한 자연어/일상어의 ‘병리성’에 대한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사유는 자연어로 이루어지는바, 철학적 사유가 오류를 범하는 주된 이유가 그 자연어의 병리성, 혹든 결함에 있는 게 아닌가 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비유컨대, 철학적 작전이 매번 실패하는 원인이 ‘병력 자원’의 부실에 있다는 걸 사단장-철학이 알게 된 것이고 이후에 대대적인 ‘군기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건 자연스럽다. 철학의 과제가 ‘언어비판’, 더 나아가 ‘언어치료’에 있다고 하는 주장은 이러한 사정을 잘 요약한다. 하지만, 이때 철학적 로고스에 치료의 방책으로 주어지는 것은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이다. 두 갈래의 길이 있는 것이다: <인공어 ← 자연어 → 시어>


(1) <자연어→인공어>라는 방향은 이미 라이프니츠가 주장한 바 있는데, <논리-철학논고>의 비트겐슈타인이나 비엔나학파의 논리실증주의 철학자들이 선호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어중이떠중이들의 언어(=일상어)로 오염되지 않은 인공어로 통해서 ‘건강한’ 사유가 구축될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시어는 자연어의 병리성이 극대화된 구제불능의 것으로 간주될 법하다. 하지만, 이 수축주의적 방향은 한편으론 언어-의존성이란 문제를 횡단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너무 잡다한 종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성찰을 아바타나 사이버 모델에 의존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2) <자연어→시어>라는 방향은 후설의 수제자였지만, 현상학에서 존재론으로 ‘전향’함으로써 후설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하이데거에서 대표적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어차피 사유가 언어-의존적이라면, 최상의 언어, 최고의 언어를 사유의 질료로 삼아야 한다는 건 자연스러운 요구이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할 때, 그 언어는 무엇보다도 ‘일요일의 언어’인 시어인 것이다. 은유적인 언어가 개념어보다도 더 탁월한 사유의 질료라는 걸 입증해 보인 니체의 경우도 이러한 계보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대략 이러한 구도하에서라면, 시와 철학의 오래된 불화에 대해서 다시금 말해볼 수 있을 듯하다. 이미 들었던 비유를 계속 갖다 쓰자면,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관계란 인력과 척력이 동시에 작용하는 관계이다. 철학적 로고스가 <자연어→인공어>로 가고자 할 때, 시적 로고스는 그 대척점에 놓이게 된다. 즉, 철학은 시를 밀어낸다. 가령,


첫 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박상순,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부분

 


 

 

 

 

 

 

 

 

라는 시적 규정을 가지고 사유의 알고리듬을 구축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하지만, 또 한편으론 <자연어→시어>의 방향에서 철학적 로고스는 그 자신의 빈곤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영감을 시적 로고스로부터 제공받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철학은 시를 적극적으로 끌어당긴다. 


휴일은 가죽과 망토뿐이네. 휴일이여, 나를 빌려가세요. 언제나 당신을 위해 숨을 쉬겠어요.

-김행숙, <8요일> 부분

 

 

 

 

 

 

 

 

 


에서처럼 철학적 로고스는 시의 가죽과 망토를 빌려다가 새로운 숨을 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철학은 시적 로고스를 끊임없이 참조함으로써 자극과 영감을 얻으며 스스로를 갱신해간다.


이 두 갈래의 방향이 모두 철학적 로고스의 길로 포함된다면, 시와 철학의 관계가 발생론적으로 밀고 당기는 ‘오래된 불화’를 연출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해할 만한 일이다. 철학은 시라는 항성에 대하여 언제나 가깝고도 먼 타원형의 궤도를 그리며 자기의 존재를 가늠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러니 여보게 글라우콘, 무엇보다도 시를 조심하게나!”

 

06. 0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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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7-16 0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행숙 첫 시집을 읽어보려고 들어왔다가... 와, 너무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항상 부러움과 주눅듦을 느끼며 로쟈님 글을 읽기는 합니다만, 이 글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네요. 열광적으로 즐겼습니다!! 브라보...............

미지 2010-07-16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신. 06. 07. 16 이라는 숫자가 눈에 띄어 다시 보니, 지금은 10. 07. 16 으로 표기되네요 ^^ 인공적 시어 같은데요...^^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눈에 띄길래 옮겨온다. 인도의 한 가정부가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공하게 됐다는 내용이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공한 印 가정부의 인생역전"이 기사의 타이틀이다. 조만간 번역/소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프리뷰'로 분류해놓는다.

Baby Haldar

한국일보(06. 07. 15) 시골 출신의 가정부에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른 한 인도 여성의 고단했던 삶이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화제의 인물은 자전적 소설 <평범하지 않은 인생(A life less ordinary)>를 펴낸 바비 할더(32).

-프랑스 일간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은 14일 못배운 인도 여성들이 전통이란 미명 하에 얼마나 억압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책이 그동안 소설가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소재를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며 자세히 소개했다(*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인도 출신의 이론가 가야트리 스피박이다. 가정부 또한 그녀가 말하는 '하위주체'가 아닌가?).

 

 

 

 

-4살때 어머니가 가출하고 12살때 강제로 결혼한 뒤 남편에게 온갖 구박을 박다가 결국 집을 뛰쳐나올 수 밖에 없었다는 할더는 책의 첫 부분을 이렇게 시작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거의 바깥에서 살았고 가족 부양은 아예 신경쓰지 않았다. 어느 날 엄마는 시장에 간다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나는 4살이었다. 하루는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집에 쌀이 없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이후 계속해서 다른 새엄마가 들어오는 가운데 할더는 가정불화와 가난 때문에 학교를 그만뒀다. 그러던 어느날 할더의 언니는 강제로 결혼해야 했다. 먹을 것이 없다는게 이유였다. 하지만 이때 할더는 어린 나이에 시집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몰랐다. 할더는 아버지가 자신보다 나이가 배가 많은 남편에게 시집가라고 했을 때에도 "결혼하면 모든게 좋을거야. 최소한 밥은 실컷 먹겠지"라고만 생각할 정도로 세상물정에 어두웠다.

-하지만 결혼생활이 지옥이란 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혼 이듬해에 임신을 했지만 산부인과 의사는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했다. 하루하루가 악몽인 가운데서도 할더는 2명의 아이를 더 나았다. 그러던 어느날 할더는 남편이 던진 돌에 맞아 머리가 찢어졌다. 먼저 시집갔던 언니는 형부에게 맞아 죽었다는 말도 전해졌다.

-집을 나오기로 결정한 할더는 무작정 뉴델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도시의 중산층 가정에서 가정부나 청소부의 일을 하면 되겠지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하지만 도시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아들을 한 집에 하인으로 보내고 자신도 가정부로 일하면서 생활은 좀 나아졌지만 그녀가 만나는 집주인들은 인간도 아니었다. 어떤 집주인은 일을 많이 부려먹으려고 업무 시간에는 아이들을 다락에 가두라는 요구까지 했다. 그녀는 "한 집주인은 커미와 음료수, 과일 등 시키는 대로 갖다주고 나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마사지를 하라고 했다. 정말이지 잠시도 쉴새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13살때 엄마가 된 뒤 너무나도 고통스런 삶을 살았던 바비의 어떤 과거를 보더라도 그녀가 인도 문학계에 혜성으로 떠오른 이유를 찾아내기는 힘들다. 사실 지독한 집주인들에게 시달리면서 혼자서 3명의 자식을 부양해야 했던 할더로서는 독서라든가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할 엄두를 내지도 못했다. 그랬던 할더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은 그녀가 인류학 교수 출신의 브라둡 쿠마르의 집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교수들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서재를 청소하라고 시켰을 때 할더가 먼지를 털면서 슬쩍슬쩍 책을 읽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쿠마르는 할더가 작가로서의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고 연필과 노트를 주면서 글을 써보라고 권유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25세였다. 할더의 글을 읽고 뭔가 특별하다는 판단을 했던 쿠마르는 계속 글을 써보라고 권했고 몇달 뒤 그는 할더와 마주 앉아 책을 낼 수 있도록 문법상의 오류와 중복된 부분을 뜯어 고친 뒤 이를 복사해 출판사에 있는 친구에게 보냈다.

"아주 좋아하더군요. 내 글이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연상하게 했던가 봐요. 그래서 매일 내가 겪은 삶을 써내려 갔죠. 그때만 해도 책으로 나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Light and Darkness

-할더의 글은 문단에서 획기적이란 평가를 받으면서 인도에서 사용되는 몇가지 언어로 출판돼 그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여성들을 독자로 끌어들이고 있다. 올 초에는 영문판도 나왔다. 이 책에는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나 어떠한 감상주의적 색채도 없다. 할더는 아버지나 남편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하거나 분노를 표출하지도 않는다(2004년 9월의 BBC기사를 보니까 그녀의 첫번째 책은 <빛과 어둠(Aalo Aandhari)>(사진)이며, 이 작품은 영화화 제안까지 받아놓고 있다고 한다. <평범하지 않은 인생>은 그녀의 신작이면서 자전적인 대표작인 모양이다).

-하지만 할더는 그들에 관한 `팩트'만 갖고도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담한 수법'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뉴델리 인근 구르가온에 있는 쿠마르씨의 하인숙소에 살고 있는 할더는 지금도 낮에는 가정부로 일하면서 밤에 아이들이 모두 잠들고 나면 비로소 글을 쓴다.

"글을 쓸 때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또 글을 마무리하고 나면 아버지와 남편에게 나름대로의 복수를 한 것 같아 마음도 한결 가벼워져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 줄은 정말 몰랐어요" 힌두스탄 타임스는 서평에서 "이 책은 인도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는수백만 밑바닥 여성들의 운명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평가했다(*제1세계에서 근대문학은 이미 종언을 고했지만, 제3세계에서 근대문학은 아직 '미완의 기획'인 것. 인간의 운명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이 우리 주변에서는 점차 쇠퇴해가고 있는 '위대한 문학'이다).

-IHT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프랑크 매코트가 소년기의 비참한 생활을 엮은 자서전인 <안젤라의 재>에 견줄만한 이 책이 1970년대 북인도에서 살았던 한 여성의 황량한 기억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전했다.(정규득 특파원)

06. 07. 15.

P.S. 바비 할더(1972- )의 자전적 소설 <평범하지 않은 인생>이 생각보다는 빨리 번역돼 나왔다. <신데렐라가 된 하녀>(문이당, 2006)이 그것이다. 제목 대로라면 작가=신데렐라이다?! ..

06. 1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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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07-15 19:19   좋아요 0 | URL
(*교수들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_.. 라고 표시해 둔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

로쟈 2006-07-15 19:39   좋아요 0 | URL
사실 가정부 할더 덕분에 교수 쿠마르의 이름이 '불멸'의 반열에 오를지도 모를 일이니까 할더 또한 쿠마르의 은인인 셈이죠. 그런 게 변증법이기도 하구요...

이리스 2006-07-15 22:38   좋아요 0 | URL
누구를 만냐느냐, 그것도 언제 어떤 상황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은 꽤, 크게 바뀌지요.
 

오늘의 작가상과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정미경의 신작 소설집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생각의나무, 2006)의 리뷰 기사를 옮겨온다. 최근에 발표된 한국작가들의 단편소설들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두어 명의 다른 작가와 함께 정미경은 '눈에 띄는', 혹은 한 작품에서 작가 즐겨 쓴 표현을 빌리자면 '안기는' 작가이다. 무엇보다도 안정감 있는 문장이 신뢰감을 주고 부르주아적 삶의 엘레강스한 비루함을 포착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새로운 걸 발견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네 잔혹한 일상을 정확하게 기록해두는 것도 작가의 덕목이다). 이 '관심 작가'의 작품들을 더 읽어볼 생각을 하게 된 이유이다. 기사의 타이틀은 "거짓말 하는 자여, 그대 약한 자여!"이지만, 본문중의 표현으로 바꾸었다.

한국일보(06. 07. 15) 진실은 과연 아름다운가. 삶의, 그리고 일상의 아름다움을 위해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과연 진실인가. 그렇다면 너무 뻔하지 않은가. 또 그렇다면 삶이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버젓해보이는 것들의 빈약한 실체를 흔히 본다. 거짓이 진실을 지탱하고 진실이 거짓을 거느림으로써만 간신히 서는 삶의 어쩌지 못할 국면들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 때의 진실과 거짓은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극명하게 맞서는가. 우리의 판단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스스로를 심판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하루의 생을 연장하기 위해 허구의 교태를 떨어야 하는 ‘세헤라자데’가 바로 우리 자신(‘무언가’)이기에,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면은 설탕보다, 화장지보다, 혹은 와인빛 루주보다 더 필수적”(‘표제작’)임을 알기에 그렇다. 정미경씨의 소설집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생각의 나무)는 그렇게 ‘비루한 다큐멘터리’ 같은 우리 삶의 이면들을 차갑게 응시한다.

 

 

 

 

-돈으로 이국(異國) 사형수의 신장을 사서 생을 연장한 뒤 그 죄의식에 시달리는 ‘무화과나무 아래’의 ‘나’는 카메라를 매고 위험한 분쟁지역만 찾아 다닌다. 삶과 죽음의 경계로 자신을 내모는 ‘나’에게 참다 못한 연인은 이렇게 말한다. “잘난 척 하지 마. 만약에, 돌아갈 수 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것 같아? 아니잖아.”(58쪽)

-‘무언가’에는 타인의 음탕한 목소리를 들어야만 간신히 발기하는 남자 ‘K’와 그 ‘조잡한 픽션’ 속에서 스스로 사랑 받는 여자를 연출함으로써 대리 만족하는 ‘나’가 나온다. 엉터리 개발정보로 땅을 파는 회사의 전화 상담원인 ‘나’는 환멸의 일상에 지친, K의 성적 환상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고용된 존재다. 그렇지만 문득 이 미친 사랑놀이를 고객인 K보다 ‘내’가 더 원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떨쳐내지 못할 헛것들을 붙들고 산다는 점에선 K와 내가 다를 게 없”(110쪽)지 않은가. 다르지 않음은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서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의 자조와 냉소와 푸념과 탄식은, 수긍하기 싫지만 엄연히, 우리 일상의 국면에 닿아있고, 빈약한 실체의 육성으로 사무친다.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만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말하는 나까지도 위로하고 감동시킬 수 있는 진화된 거짓말을 하고싶다."(‘무언가’)

"사람들은 관계를 망가뜨리는 건 거짓말이나 불성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 사이를 끊어놓는 것은, 물 위로 떠오른 익사체처럼, 대개 감추어져야 할 사실이다. 대부분의 진실은 불결하고 때로 사악하다.…모든 거짓말은 아름답다. 자신을 혹은 상대를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 누구나 거짓말을 하니까. 다만 끝까지 지켜지지 못한 거짓말만이 더 날카로운 칼이 되어 자신을, 상대방을 깊이 찌른다."(‘모래폭풍’)

-그럼에도 “사람은 참 재미있는 동물이다. 때때로 한없이 사소한 것에 기대어 삶의 참담한 무게를 견”디고, 제 울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집요한 일상의 힘에 맞선다. 비루한 연애에 힘겨워 하며 매달 월급날마다 백화점에 들러 자신에게 선물을 부치는 여자(‘검은 숲에서’), ‘서로의 은닉된 삶의 한 조각씩’을 나누며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서로를 대하는 남자와 여자(‘표제작’) ….

-작가는 이 서글픈 삶의 이야기를 ‘바다 위로 빗방울이 스미는 풍경’을 바라보며 ‘비냄새, 바다냄새’를 맡고 선 자의 표정과 내면으로 나직이 전한다. 위안이나 희망은 자욱한 해무 속 저 멀리 아득한 수평선 너머에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작품들은 표제작에서 말한 ‘케타민’ 주사앰플 같은 것인지 모른다. 악몽을 꾸게 하는 마취약물. 그 주사를 맞고 잠들었다 깨어나면 누워있는 병실이 얼마나 평온하며 따스한 곳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는….(최윤필 기자)

06. 07. 15.

P.S.  작가의 장편소설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현대문학, 2005)는 전년도 동인문학상 후보작이기도 했는데, 당시에 조선일보에 게재됐던 후보작가 인터뷰를 자료삼아 옮겨온다.

조선일보(05. 09. 29) 자본주의의 본질은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확대 재생산, 그리고 그것의 성취 속도를 놓고 벌이는 경쟁적 질주에 있다. 2005 동인문학상 최종 후보작 네 작품 가운데 유일한 장편소설인 정미경 씨의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현대문학)는 바로 욕망과 질주를 정색하고 다룬 작품이다.

―동인문학상이란 어떤 상이라고 생각하나.

“아 그런 어려운 질문을….(웃음) 단편이 아닌, 장편이나 소설집에 주는 상으로서는 공정하고 투명해서 작가로서는 받고 싶은 상이다.”

―심사위원들께 불만은 없는가.

“상이 오래되다 보니 원로해지셨는데, 다양한 시각으로 작품을 봐주셨으면 한다.”

―당신은 철저한 자본주의자인가.

“사람이 지배하던 돈이 스스로 생명력을 갖고 진화하면서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후기 자본주의에서 카지노 자본주의로 넘어와 이젠 뭐든지 ‘한탕’하려고 한다. 문학에서도 팔리면 선(善)이고 안 팔리면 쓰레기다. 나도 거기서 자유롭지 않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런 질문을 받으면 기자가 되고 싶다.(웃음) 소설가마다 자기가 생각하는 소설이 다를 것이다. 나는 소설이 나를 매혹했기 때문에 쓰기 시작했다. 사랑, 소설, 결혼처럼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것에 인간이 매혹되는 것 같다.”

―이번 후보작을 보면 1987년 ‘6월 항쟁’의 현장에 있었던 5명의 젊은이들이 15년 뒤인 2002년 6월 월드컵 열기로 들뜬 광화문 거리에서 철저히 변화된 모습으로 만난다. 신분상승, 명예욕, 자본주의적 욕망에 중독된 그들이 타락하는 방식으로 변화하는 이유는 뭔가.

“모두가 타락하는 것은 아니고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한다. 사회의 영향을 받게 돼 있다.”

―소설 도입부에서 주인공 이중호는 시속 180㎞로 자동차를 몰며 엑스터시를 즐긴다. 운전할 때 과속하는가.(정미경 씨는 폭스바겐의 골프를 몬다.)

“어떤 사람이 내가 운전하는 걸 보더니 ‘소설 쓰지 말고 카 레이서로 나서라’고 했다. 굉장히 과속하는 편이다. 고속도로에서 속력을 낼 때는 계기판을 안 본다.”(*정미경은 '대한민국 1%'의 감성을 다룰 줄 아는 아주 드문 작가이다.)

―금융투자기법, 정치권의 움직임 같은, 일반적인 접근이 쉽지 않은 영역에 어떻게 취재를 했는가.

“자료도 모으고, 전문가 인터뷰도 하고, 그들이 일하는 현장도 가 보고, 직접 투자도 해보았다. 충격적이고 재미있었다. 특히 선물 옵션은 하루 만에 열 배 이상 따거나 마이너스가 되기도 했다. 이번 소설의 주인공이 금융투자 전문가인데 콜걸을 10명 이상 만나면서 한 번도 섹스를 하지 않는다. 돈 잃고 따는 것 이외는 관심이 없다.”

―소설 쓸 때 몰입을 위해 어떻게 하나. 휴대폰 꺼놓기, 가족과 헤어져 있기 같은…?

“집 근처 작업실이 하나 있다. 걸어서 6, 7분 정도. 각성 효과를 위해 커피, 녹차, 물을 마시고, 점심은 안 먹는다. 집중력이 떨어지니까. 냉장고에 포도와 감을 넣어 놓았는데 손을 안 댔더니 나중에 건포도와 곶감이 돼 있었다. 동창도 연락을 안 해준다. 거의 왕따다.”

―남편(김병종)이 유명 화가이며 산문집도 여러 권 냈는데,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방해가 되는가.

“이 질문 빼달라.(웃음) 도움도 걸림돌도 되는 양면성이 있다. 내가 피해를 줄 때도 있다. 그 사람 책 나왔을 때 ‘마누라가 써 준 거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큰아이도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는데 선생님이 ‘네 엄마가 써줬냐’고 하더라는….”

―이번 작품이 마음에 드는가.

“인간을 확대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여전히 수다스러웠다. 안드레 코스톨라니라는 금융투자가가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라는 말을 했다. 나도 내 마음의 열정을 차갑게 다루었으면, 소망하고 있다.”(*쿨하다는 건 이 작가의 강점으로 보인다. 감정의 군더더기를 비교적 남기지 않는다는 것. 건포도나 곶감처럼 더 말린다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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