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작가상과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정미경의 신작 소설집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생각의나무, 2006)의 리뷰 기사를 옮겨온다. 최근에 발표된 한국작가들의 단편소설들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두어 명의 다른 작가와 함께 정미경은 '눈에 띄는', 혹은 한 작품에서 작가 즐겨 쓴 표현을 빌리자면 '안기는' 작가이다. 무엇보다도 안정감 있는 문장이 신뢰감을 주고 부르주아적 삶의 엘레강스한 비루함을 포착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새로운 걸 발견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네 잔혹한 일상을 정확하게 기록해두는 것도 작가의 덕목이다). 이 '관심 작가'의 작품들을 더 읽어볼 생각을 하게 된 이유이다. 기사의 타이틀은 "거짓말 하는 자여, 그대 약한 자여!"이지만, 본문중의 표현으로 바꾸었다.

한국일보(06. 07. 15) 진실은 과연 아름다운가. 삶의, 그리고 일상의 아름다움을 위해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과연 진실인가. 그렇다면 너무 뻔하지 않은가. 또 그렇다면 삶이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버젓해보이는 것들의 빈약한 실체를 흔히 본다. 거짓이 진실을 지탱하고 진실이 거짓을 거느림으로써만 간신히 서는 삶의 어쩌지 못할 국면들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 때의 진실과 거짓은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극명하게 맞서는가. 우리의 판단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스스로를 심판하는 일이기에 그렇다. 하루의 생을 연장하기 위해 허구의 교태를 떨어야 하는 ‘세헤라자데’가 바로 우리 자신(‘무언가’)이기에,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면은 설탕보다, 화장지보다, 혹은 와인빛 루주보다 더 필수적”(‘표제작’)임을 알기에 그렇다. 정미경씨의 소설집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생각의 나무)는 그렇게 ‘비루한 다큐멘터리’ 같은 우리 삶의 이면들을 차갑게 응시한다.

 

 

 

 

-돈으로 이국(異國) 사형수의 신장을 사서 생을 연장한 뒤 그 죄의식에 시달리는 ‘무화과나무 아래’의 ‘나’는 카메라를 매고 위험한 분쟁지역만 찾아 다닌다. 삶과 죽음의 경계로 자신을 내모는 ‘나’에게 참다 못한 연인은 이렇게 말한다. “잘난 척 하지 마. 만약에, 돌아갈 수 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것 같아? 아니잖아.”(58쪽)

-‘무언가’에는 타인의 음탕한 목소리를 들어야만 간신히 발기하는 남자 ‘K’와 그 ‘조잡한 픽션’ 속에서 스스로 사랑 받는 여자를 연출함으로써 대리 만족하는 ‘나’가 나온다. 엉터리 개발정보로 땅을 파는 회사의 전화 상담원인 ‘나’는 환멸의 일상에 지친, K의 성적 환상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고용된 존재다. 그렇지만 문득 이 미친 사랑놀이를 고객인 K보다 ‘내’가 더 원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떨쳐내지 못할 헛것들을 붙들고 산다는 점에선 K와 내가 다를 게 없”(110쪽)지 않은가. 다르지 않음은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서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의 자조와 냉소와 푸념과 탄식은, 수긍하기 싫지만 엄연히, 우리 일상의 국면에 닿아있고, 빈약한 실체의 육성으로 사무친다.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만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말하는 나까지도 위로하고 감동시킬 수 있는 진화된 거짓말을 하고싶다."(‘무언가’)

"사람들은 관계를 망가뜨리는 건 거짓말이나 불성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 사이를 끊어놓는 것은, 물 위로 떠오른 익사체처럼, 대개 감추어져야 할 사실이다. 대부분의 진실은 불결하고 때로 사악하다.…모든 거짓말은 아름답다. 자신을 혹은 상대를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 누구나 거짓말을 하니까. 다만 끝까지 지켜지지 못한 거짓말만이 더 날카로운 칼이 되어 자신을, 상대방을 깊이 찌른다."(‘모래폭풍’)

-그럼에도 “사람은 참 재미있는 동물이다. 때때로 한없이 사소한 것에 기대어 삶의 참담한 무게를 견”디고, 제 울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집요한 일상의 힘에 맞선다. 비루한 연애에 힘겨워 하며 매달 월급날마다 백화점에 들러 자신에게 선물을 부치는 여자(‘검은 숲에서’), ‘서로의 은닉된 삶의 한 조각씩’을 나누며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서로를 대하는 남자와 여자(‘표제작’) ….

-작가는 이 서글픈 삶의 이야기를 ‘바다 위로 빗방울이 스미는 풍경’을 바라보며 ‘비냄새, 바다냄새’를 맡고 선 자의 표정과 내면으로 나직이 전한다. 위안이나 희망은 자욱한 해무 속 저 멀리 아득한 수평선 너머에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작품들은 표제작에서 말한 ‘케타민’ 주사앰플 같은 것인지 모른다. 악몽을 꾸게 하는 마취약물. 그 주사를 맞고 잠들었다 깨어나면 누워있는 병실이 얼마나 평온하며 따스한 곳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는….(최윤필 기자)

06. 07. 15.

P.S.  작가의 장편소설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현대문학, 2005)는 전년도 동인문학상 후보작이기도 했는데, 당시에 조선일보에 게재됐던 후보작가 인터뷰를 자료삼아 옮겨온다.

조선일보(05. 09. 29) 자본주의의 본질은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확대 재생산, 그리고 그것의 성취 속도를 놓고 벌이는 경쟁적 질주에 있다. 2005 동인문학상 최종 후보작 네 작품 가운데 유일한 장편소설인 정미경 씨의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현대문학)는 바로 욕망과 질주를 정색하고 다룬 작품이다.

―동인문학상이란 어떤 상이라고 생각하나.

“아 그런 어려운 질문을….(웃음) 단편이 아닌, 장편이나 소설집에 주는 상으로서는 공정하고 투명해서 작가로서는 받고 싶은 상이다.”

―심사위원들께 불만은 없는가.

“상이 오래되다 보니 원로해지셨는데, 다양한 시각으로 작품을 봐주셨으면 한다.”

―당신은 철저한 자본주의자인가.

“사람이 지배하던 돈이 스스로 생명력을 갖고 진화하면서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후기 자본주의에서 카지노 자본주의로 넘어와 이젠 뭐든지 ‘한탕’하려고 한다. 문학에서도 팔리면 선(善)이고 안 팔리면 쓰레기다. 나도 거기서 자유롭지 않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런 질문을 받으면 기자가 되고 싶다.(웃음) 소설가마다 자기가 생각하는 소설이 다를 것이다. 나는 소설이 나를 매혹했기 때문에 쓰기 시작했다. 사랑, 소설, 결혼처럼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것에 인간이 매혹되는 것 같다.”

―이번 후보작을 보면 1987년 ‘6월 항쟁’의 현장에 있었던 5명의 젊은이들이 15년 뒤인 2002년 6월 월드컵 열기로 들뜬 광화문 거리에서 철저히 변화된 모습으로 만난다. 신분상승, 명예욕, 자본주의적 욕망에 중독된 그들이 타락하는 방식으로 변화하는 이유는 뭔가.

“모두가 타락하는 것은 아니고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한다. 사회의 영향을 받게 돼 있다.”

―소설 도입부에서 주인공 이중호는 시속 180㎞로 자동차를 몰며 엑스터시를 즐긴다. 운전할 때 과속하는가.(정미경 씨는 폭스바겐의 골프를 몬다.)

“어떤 사람이 내가 운전하는 걸 보더니 ‘소설 쓰지 말고 카 레이서로 나서라’고 했다. 굉장히 과속하는 편이다. 고속도로에서 속력을 낼 때는 계기판을 안 본다.”(*정미경은 '대한민국 1%'의 감성을 다룰 줄 아는 아주 드문 작가이다.)

―금융투자기법, 정치권의 움직임 같은, 일반적인 접근이 쉽지 않은 영역에 어떻게 취재를 했는가.

“자료도 모으고, 전문가 인터뷰도 하고, 그들이 일하는 현장도 가 보고, 직접 투자도 해보았다. 충격적이고 재미있었다. 특히 선물 옵션은 하루 만에 열 배 이상 따거나 마이너스가 되기도 했다. 이번 소설의 주인공이 금융투자 전문가인데 콜걸을 10명 이상 만나면서 한 번도 섹스를 하지 않는다. 돈 잃고 따는 것 이외는 관심이 없다.”

―소설 쓸 때 몰입을 위해 어떻게 하나. 휴대폰 꺼놓기, 가족과 헤어져 있기 같은…?

“집 근처 작업실이 하나 있다. 걸어서 6, 7분 정도. 각성 효과를 위해 커피, 녹차, 물을 마시고, 점심은 안 먹는다. 집중력이 떨어지니까. 냉장고에 포도와 감을 넣어 놓았는데 손을 안 댔더니 나중에 건포도와 곶감이 돼 있었다. 동창도 연락을 안 해준다. 거의 왕따다.”

―남편(김병종)이 유명 화가이며 산문집도 여러 권 냈는데,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방해가 되는가.

“이 질문 빼달라.(웃음) 도움도 걸림돌도 되는 양면성이 있다. 내가 피해를 줄 때도 있다. 그 사람 책 나왔을 때 ‘마누라가 써 준 거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큰아이도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는데 선생님이 ‘네 엄마가 써줬냐’고 하더라는….”

―이번 작품이 마음에 드는가.

“인간을 확대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여전히 수다스러웠다. 안드레 코스톨라니라는 금융투자가가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라는 말을 했다. 나도 내 마음의 열정을 차갑게 다루었으면, 소망하고 있다.”(*쿨하다는 건 이 작가의 강점으로 보인다. 감정의 군더더기를 비교적 남기지 않는다는 것. 건포도나 곶감처럼 더 말린다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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