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가 끝나고 귀가길에 속이 메슥거려서 집에 들어오자 마자 동네 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다 먹었다. 생각해보면 유지방이 속을 가라앉히는데 도움이 될 거 같지 않는데, 실제로 그랬다. 아무래도 낮에 아이스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 듯하다. 아무려나 불편한 느낌으로 시사 팟캐스트를 듣다가 '이주의 발견'을 적는다. 최진석의 <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그린비, 2017)이다. 제목보다는 부제가 책의 내용을 가늠하게 해주는데, '미하일 바흐친과 생성의 사유'가 부제다. 곧 오랜만에 나온 바흐친 연구서다.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다듬고 보완한 책이다.  



러시아문학 전공자의 바흐친 연구서로는 이강은의 <미하일 바흐친과 폴리포니아>(역락, 2011)와 이득재의 <바흐찐 읽기>(문화과학사, 2004) 등이 있었다(기타 영문학 전공자의 책들이 좀 있다). 이게 얼마나 오랜만에 나온 것인지 알 수 있다. 1990년대 영미는 물론 한국 인문학계도 강타했던 '바흐친 르네상스'를 회고해보건대 격세지감이 없지 않다. 



가령 바흐친의 주저에 해당하는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 민중문화>(아카넷, 2001)와 <말의 미학>(길, 2006), <도스또예프스끼 시학의 제문제>(중앙대출판부, 2011) 등이 모두 절판된 상태다. 또 바흐친의 주요한 소설론을 모은 <장편소설과 민중언어>(창비, 1998)까지도 절판된 지 오래 됐다. 이런 현황이 놀라워서 무슨 '담합'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을 정도다. 


이번에 나온 <민중과 그로테스크의 문화정치학>은 바흐친 사상의 여러 쟁점에 대해 상세하게 검토하고 있는 묵직한 저작이다. 바흐친뿐 아니라 바흐친 사상의 안팎을 폭녋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 강점이다. 때문에 연구서는 그 자체로 일독해볼 만하지만, 바라건대는 바흐친의 문학론과 소설론도 재출간돼 연구서만 읽게 되는 무안함을 덜어주었으면 싶다.  



참고로,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리클린의 <해체와 파괴>(그린비, 2009), 그렉 램버트의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자음과모음, 2013)을 옮겼고, <러시아 문화사 강의>(그린비, 2011)를 공역했다...


17. 0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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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책'을 고른다. 타이틀북은 앨버트 린드먼의 <현대 유럽의 역사>(삼천리, 2017)다. '대륙과 문명의 역사' 시리즈의 두번째 책으로 나왔다. <현대 아프리카의 역사>(삼천리, 2013)가 첫 책이었는데, 나오는 템포로는 완결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다섯 권의 목록에는 <현대 러시아의 역사>도 포함돼 있어서 고대하는 중이다).

 

 

원서의 부제는 '1815년에서 현재까지의 역사'다. 현대의 기준을 1815년 이후로 잡고 있는 것. 러시아와 동유럽의 역사가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 한다.

 

 

두번째는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의 하나로 나온 윌리엄 바이넘의 <서양의학사>(교유서가, 2017)다. "이 책은 오늘날의 의학을 이해하기 위해 서양 의학의 역사를 머리맡과 도서관, 병원, 지역사회, 그리고 실험실 의학이라는 다섯 가지의 유형에 따라 탐색한다." 저자는 <창의적인 삶을 위한 과학의 역사>(에코리브르, 2016)로 먼저 소개된 바 있다.

 

 

세번째 책은 프랑스의 국민만화가 자크 타르디의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1918>(서해문집, 2017). <그래픽노블 제1차 세계대전>(서해문집, 2017)과 나란히 나왔다. "2011년, ‘만화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아이스너상 두 개 부문을 수상작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할아버지의 일기를 토대로 작가는 전쟁 기간 참호 속에서 사라져간 병사들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구현해냈다."

 

 

네번째 책은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의 '트랜스내셔널인문학 총서'로 나온 <제2차 세계대전과 집단기억>(한울, 2017). 재작년, 2차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기획된 책이다. "동아시아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각국의 집단기억 사이에 발생하는 충돌이 한.중.일 3국의 정세에 미치는 영향부터 러시아에서 푸틴 정권이 높은 인기를 얻는 데 대전에 대한 집단기억이 활용되는 실상까지 집단기억이 만든 오늘날의 국내외 정세와 각국의 역사, 문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흉노.돌궐.위구르.셀주크.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를 다룬 이희철의 <튀르크인 이야기>(리수, 2017)다. "유라시아 북방초원에서 발발한 흉노제국(기원전 209년~)으로부터 시작하여 돌궐.위구르.셀주크 그리고 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대략 2,200년의 제국사를 다루고 있다."  국내 최초의 '튀르크 민족 통사'라는 점이 눈에 띈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가오훙레이의 <절반의 중국사>(메디치, 2017)와 피터 프랭코판의 <실크로드 세계사>(책과함께, 2017) 사이에 끼워넣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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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럽의 역사
앨버트 S. 린드먼 지음, 장문석 옮김 / 삼천리 / 2017년 6월
39,000원 → 35,100원(10%할인) / 마일리지 1,9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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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학사
윌리엄 바이넘 지음, 박승만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6월
14,500원 → 13,050원(10%할인) / 마일리지 72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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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1918- 자크 타르디의 대표작,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자크 타르디 지음, 권지현 옮김 / 서해문집 / 2017년 5월
18,500원 → 16,650원(10%할인) / 마일리지 92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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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2차 세계대전과 집단기억
아키코 다케나카 지음, 박찬승 엮음,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기획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7년 6월
23,000원 → 23,000원(0%할인) / 마일리지 230원(1%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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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저자'를 고른다. 먼저 백낙청 선생. <백낙청 회화록>의 6,7권이 10년만에 추가되었다. 1-5권은 지난 2007년에 한 질로 나온 바 있다.

 

"문학평론가이자 영문학자이며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이기도 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의 회화록. 2007년에 나온 <백낙청 회화록>(전5권)의 후속편이다. 이번에 출간된 <회화록> 6, 7권은 시기적으로 2007년 9월부터 2016년 12월, 이명박정부 직전부터 박근혜정부하 촛불혁명의 성과가 가시화하던 시점까지의 10년을 배경으로 한다. 최근 우리 역사에서 혹독하고 암담했던 9년이 새로운 희망과 기대로 마무리되는 극적인 반전의 시기다. 6, 7권에는 고은, 임동원, 윤여준, 이해찬, 김종인, 안병직, 최장집 등 원로에서부터 안경환, 송호근, 유시민, 노회찬, 진중권, 김두식 등 중견 보수·진보를 망라한 지식인그룹을 비롯하여 김미화, 김제동 등 문화계 인사까지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과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회화록'이 이만한 규모로 나온 전례가 없을 듯한데, 여하튼 반세기 이상 한국 지식장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지라 그가 나눈 대화록만으로도 한국 현대사의 거울이 된다. 더불어, 추가된 두 권은 그의 팔순을 기념하는 의미도 갖는 듯하다.  

 

 

중견 소설가 성석제의 신작과 개정판이 한꺼번에 나왔다.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문학동네, 2017)는 첫 작품집(1994)의 두번째 개정판이고,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문학동네, 2017)은 2003년판의 개정판이다.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문학동네, 2017)이 신작으로, 세 권 모두 '짧은 소설집'이란 공통점이 있다. 과거 엽편소설, 혹은 장편(掌篇)소설로 불린 장르를 요즘은 그냥 '짧은 소설'로 부르는 모양인데, 이 짧은 소설의 '거장'이 성석제다(러시아 작가 체호프의 단편가운데도 '짧은 소설'들이 많이 있다. '짧은 단편'이란 말은 중복 표현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긴 단편'들도 있으니 말이다).

"200자 원고지 10~30매 정도의 짧은 분량 안에 인생과 인간의 번뜩이는 순간을 담아낸 '짧은소설'은 SNS와 모바일환경에 익숙해진 젊은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으며, 우리 문학의 한 장르로 자리잡았다. 이 짧은소설계의 '거장'이라 할 수 있는 소설가 성석제가 새 책을 들고 돌아왔다.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2007)과 <인간적이다>(2010)의 일부 원고와 그후 2017년까지 써온 최근작을 엮은 <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에는 55편의 '압도적인' 짧은소설들이 담겨 있다."

세 권으로 모아놓으니 '성석제표' 소설의 특징과 성취가 가늠이 되겠다.

 

 

언론인 저술가 현이섭의 <중국지>(인물과사상사, 2017)도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 '마오쩌둥과 중국혁명 평석'이 부제다. "중국공산당의 혁명 역사인 마오쩌둥과 주변 인물들의 생애를 일화 중심으로 쉽게 풀어"낸 책이다.

"비밀해제 문건과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집필된 <중국지>는 알기 쉽고 흥미로운 서술을 통해 중국의 근현대사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국토 크기만큼이나 방대할 뿐만 아니라, 예측불허의 사건으로 점철되어 있는 중국의 근현대사를 치밀한 현실 정치 감각과 역사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심층적이고 폭넓게 분석.조망하고 있다. 또한 일반 독자들이 알기 힘든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나 피를 말리는 대치 상황 등이 생생하고 정밀하게 묘사되어 흥미진진하고 팽팽한 긴장감을 더한다."

 

 

마오쩌둥과 그의 시대에 관해서는 최근에도 계속 책이 나오고 있다(<마오쩌둥 평전>은 나도 흥미롭게 읽는 중이다). 중국현대문학 내지 당대문학 작가들을 읽다 보니 자연스레 마오와 덩의 시대 중국사 책들에도 손이 가게 된다. <중국지>도 그런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일독해봄직하다...

 

17. 0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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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학기행에서 만난 윤동주에 대해서는 짧게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보다는 조금 길게 다시 적은 글을 옮겨놓는다. 이달 '출판문화'(618호)에 실은 '책읽는 세상' 꼭지다. 윤동주의 시가 한국문학사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더 자세히 다루고 싶다.

 

 

 

출판문화(17년 6월호) 윤동주를 찾아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과 애송시를 꼽으라면 윤동주와 그의 ‘서시’가 단연 유력하다. 그의 이름 ‘동주’를 우리는 마치 그의 호처럼 부른다. 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도 펴낸 적이 없는 시인이 사후에 한국의 대표 시인으로 사랑받으리라고는 동주 자신은 물론 그의 동시대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아니 ‘별 헤는 밤’의 마지막 구절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는 사후의 이런 영예에 대한 예견으로 읽을 수 있을까.


올해는 일제 말기 일본 유학중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해방을 불과 수개월 앞두고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짧은 생애를 마친 윤동주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2월 30일생이므로 그에 대한 기념은 겨울에 이루어질 테지만 얼마 전 나는 조금 이르게 그의 흔적을 찾아서 ‘100주년 기념판’으로 나온 <윤동주 전집>(문학사상사, 2017)을 끼고 일본 교토에 들렀다. 교토의 도시샤(동지사) 대학은 동주가 일경에 체포되기 전 마지막으로 적을 둔 곳으로 교정에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1995년 그의 50주기를 맞아 세워진 것으로 육필로 쓰인 대표작 ‘서시’가 거기에 새겨져 있다. 하늘은 맑았고 아직 학기중이었지만 교정은 조용했다. 함께 문학기행에 나선 일행과 ‘서시’를 낭송한 다음에 윤동주의 하숙집터로 걸음을 옮겼다. 현재는 교토예술대학의 기숙사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도로변인 그곳에도 ‘서시’를 새긴 윤동주 시비가 세워져 있다.


1942년 연희전문을 졸업한 동주는 일본 유학길에 나서 당초 도쿄의 릿쿄 대학에 입학했다가 한 학기만에 그만두고 그해 10월 도시샤 대학으로 편입한다. 교토의 하숙집에서 대학까지는 걸어서 다녔다고 하는데 어림에 30분은 걸렸음 직했다. 이어서 찾은 곳은 1943년 7월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시모가모 경찰서인데, 여전히 경찰서 건물로 쓰이고 있었지만 옛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던 시인이 끝내 그 아침을 보지 못하고 숨진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고 숙연해질 따름이었다.

 


문학기행 둘째 날 아침에 우리가 찾은 곳은 교토 인근의 우지였다(교토부 우지시다). 시인이 1943년 5,6월경에 도시샤대 학우들과 같이 송별회차 나들이를 갔던 곳으로 이들은 현수교 다리 위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다리 난간을 배경으로 한 이 사진이 그가 남긴 마지막 사진이다. 우리 일행도 우지 강을 따라 같은 다리까지 걸어가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우지 강변에 올 10월까지 ‘시인 윤동주 기억과 화해의 비’가 세워진다. 그의 시 ‘새로운 길’이 육필 한국어와 일본어로 새겨질 예정이다. 아마도 기념비가 세워지게 되면 더 많은 한국인들이 우지를 찾게 될 듯싶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로 시작하는 동주의 시 ‘새로운 길’은 한•일간 ‘기억과 화해’의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거슬러 올라가면 시인 윤동주의 출발점이었다. 그가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펴내려고 했던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은 ‘서시’를 포함해 19편의 시를 수록할 예정이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일찍 쓰인 시가 바로 1938년 5월에 쓴 ‘새로운 길’이다. 애초에 <병원>이라는 제목을 가질 뻔했던 그의 자선 시집은 ‘서시’가 씌어진 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제목이 바뀐다. 창작 시기를 기준으로 하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새로운 길’에서 ‘별 헤는 밤’에 이르는 여정이다. ‘별 헤는 밤’을 탈고한 뒤 동주는 비로소 ‘서시’를 쓴다. 시집의 서언으로 쓴 시이다. ‘서시’를 쓴 이후 시인은 7편의 시를 더 남겼다. 


윤동주의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전집에 수록된 그의 시는 습작과 유고까지 포함하여 모두 97편이다. 그런데 시인의 의도를 존중하자면 이 가운데 19편이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시다. 그리고 이후에 쓰인 시 7편 가운데 날짜가 적힌 시 6편이 거기에 추가될 수 있겠다. 이 6편 가운데 마지막 시가 ‘쉽게 씌어진 시’로서 주목에 값한다. 도합 25편이다. 넓게 보자면 97편의 검토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윤동주 시’는 이 25편에 의해서 대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기적으로는 1938년 5월부터 1942년 6월까지 4년 남짓의 기간 동안 쓰인 시들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서도 핵심은 ‘서시’를 전후로 한 시들이다. ‘서시’에 앞서 ‘또 다른 고향’과 ‘별 헤는 밤’ 등이 있고 그 뒤에 ‘간(肝)’과 ‘참회록’이 놓인다. 이 중 ‘간’은 친숙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시다.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윤동주는 자선시집에 실릴 19편 가운데 마지막인 ‘별 헤는 밤’을 1941년 11월 5일에, 그리고 ‘서시’는 11월 20일에 썼다. 그런데 연희전문의 스승으로서 그의 시고를 받아본 이양하 선생은 몇 편의 시가 검열에 통과될 수 없을 뿐더러 신변에 위험이 올 수 있다고 충고하여 동주는 시집출판을 단념한다. 11월 29일에 쓰인 ‘간’은 오래 염원하던 시집 출간 좌절에 대한 울분을 토로한 것이다.

 


이미 ‘별 헤는 밤’에서 시인은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함께 프랜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같은 시인들의 이름을 나란히 호명한 바 있다. 잠이나 릴케 등의 시를 윤동주는 일어로 번역된 시집으로 읽었다. 일본의 한국문학 연구가 오무라 마스오의 지적대로 윤동주의 시세계 형성에는 한국문학과 함께 “1930년대의 일본문학 및 일본어를 통해 수용된 서구문학”이 큰 영향을 미친다. 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확인하게 해주는 시가 ‘간’이기도 하다. 서구문학 가운데 동주는 특히 릴케, 발레리, 지드 등을 탐독했는데, 그의 장서 중에는 지드 전집도 들어 있었다. 아마도 그가 읽은 일어판 지드 전집에는 <잘못 결박된 프로메테우스>(1899)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1960년대에 나온 휘문출판사의 한국어판 앙드레 지드 전집에는 <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떼>라는 제목으로 수록돼 있다).


우화적인 지드의 소설은 1890년대 파리의 한 다방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제우스가 부유한 은행가로 등장하고, 프로메테우스는 무면허 성냥 제조 혐의로 구속된다. 이야기의 발단은 제우스가 아무런 이유 없이 한 사람(코클레스)의 따귀를 때리고 다른 한 사람(다모클레스)에게는 500프랑의 돈을 익명으로 부친 데서 비롯한다. 여기서 무상의 행위, 즉 아무런 동기나 이유를 갖지 않는 행위가 작품의 모티프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독수리를 데리고 다니는데, 이 독수리는 그의 양심의 상징이다. 감옥에서 밤낮으로 뜯기면서 독수리는 살찌는 대신에 그는 점점 말라간다. 이윽고 해방된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에 대하여’란 주제로 대중강연을 한다. 저마다 자신의 독수리를 가져야 하며 독수리를 사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강연을 들은 다모클레스는 자신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500프랑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병이 들고 결국엔 죽고 만다. 다모클레스의 장례식에 뚱뚱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나타난 프로메테우스가 다모클레스의 죽음 덕분에 자신의 독수리를 죽였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과 함께 독수리 요리를 맛있게 먹는 걸로 이야기는 마감된다. 


흥미로운 것은 윤동주의 ‘간’에서 제시되고 있는 프로메테우스의 형상이 바로 지드의 프로메테우스와 닮았다는 것이다(“내가 오래 기르던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단, 지드의 프로메테우스가 양심의 투사(投射)였던 독수리를 죽임으로써 일종의 카니발적 결말을 유도하는 것과는 달리, 윤동주의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의 부리처럼 예리한 자아의식과의 긴장을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음으로써 내면으로의 끝없는 침잠을 감내한다. 윤동주만의 새로운 프로메테우스가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윤동주 읽기는 거기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17. 0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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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과학서'로 장대익의 <울트라 소셜>(휴머니스트, 2017)과 휠도블러/윌슨의 <초유기체>(사이언스북스, 2017)를 고른다. '울트라 소셜'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초사회성'이 되겠다. 책의 부제가 '사피엔스에 새겨진 초사회성의 비밀'이다. 



초사회성에 대한 강조는 유발 하라리의 책들에서도 읽을 수가 있기 때문에 <사피엔스>의 독자라면 <울트라 소셜>을 보교재로 읽어도 되겠다. 같은 주제를 다룬 책으론 데이비드 브룩스의 <소셜 애니멀>(흐름출판, 2016)도 나와 있다(보급판으로 표지가 바뀌었군). 



한편 <울트라 소셜>은 '다윈 3부작'을 내놓은 장대익 교수의 또 다른 과학대중화 시도이기도 하다. 가벼운 분량의 책으로 사피엔스에 대한 현단계 과학적 이해를 쉽게 설명한다. 고등학생 정도라면 능히 읽어볼 만하다. 

"2008년 <다윈의 식탁>으로 대중으로부터 진화론의 관심을 새롭게 불러일으킨 이후 최신의 과학 연구를 섭렵하며 꾸준히 책으로 써 낸 그는, <울트라 소셜>에서 진화생물학, 동물행동학, 영장류학, 뇌과학, 심리학, 행동경제학, 인공지능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 성과를 '초사회성'이라는 키워드로 꿰며 사피엔스 본성에 관한 큰 그림을 그려 냈다."


<초유기체>는 이미 <개미 세계여행>(범양사, 2015)를 공저한 바 있는 세계적인 개미 학자 베르트 횔도블러와 에드워드 윌슨, 두 사람의 새로운 공저다. '곤충 사회의 힘과 아름다움, 정교한 질서에 대하여'가 부제. 

"사회성 곤충 연구 분야의 두 거장, 베르트 횔도블러와 에드워드 윌슨은 <초유기체>에서 개미 군락을 집중 조명하며 초유기체의 본질과 의의를 펼쳐 보이고 있다. 초유기체를 구성하는 것은 세포나 조직이 아니라 밀접하게 협동을 하고 있는 동물 한 마리 한 마리이다. 그 초유기체를 들여다봄으로써 사회성 곤충의 생활사와 행동 양식을 통해 우리는 인간과는 다른 복잡한 사회가 진화한 방식, 그리고 사회 질서와 그것을 만들고 진화시킨 자연 선택 사이의 관계까지 엿볼 수 있다."


국내 다수의 책이 출간되어 있는 에드워드 윌슨의 경우에도 <지구의 정복자> 이후에 나온 책들을 <초유기체>와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초유기체> 이후에 나온 책들도 많이 있다...


17. 0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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