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유운성의 <유령과 파수꾼들>(미디어버스)을 읽다가 줄리안 반즈의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 가져온 인용을 재인용한다. 평범한 독자와 비평가의 차이에 대한 반즈의 지적이다.

˝평범한 독자가 전문비평가보다 책을 더욱 즐겁게 읽는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자가 후자보다 한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음을 나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잊을 수 있다. 스타키 박사외 같은 이들은 기억력의 저주를 받고 있다.˝

이에 따르면 평범한 독자와 전문비평가를 가르는 기준은 ‘기억력의 저주‘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은가이다. 그리고 그게 기준이라면 나는 평범한 독자와 전문비평가(내지 전문강사) 사이를 오고가는 듯싶다. 매주 많은 작품을 강의하면서 놀라운 기억력을 갖고 있다는 얘기도 간혹 듣지만 막상 강의했던 작품도 핵심을 떠올리지 못해 애를 먹는 일이 적지 않다. 거꾸로 그렇게 유사백지 상태에서 작품을 읽다가 새로운 해석에 닿기도 하므로 망각의 저주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강의의 편의를 위해서라면 기억력의 저주가 훨씬 더 나은 선택지다. 여하튼 기억과 망각의 문제는 일방적으로 어느 한 쪽을 편들 수 없다. 복잡하고 복합적이어서다.

한편 미디어버스라는 출판사는 희소한 책들도 출간과 근간 목록으로 갖고 있는데, 알렉산드로 루도비코의 <포스트디지털 프린트: 1894년 이후 출판의 변화>는 <유령과 파수꾼들> 덕분에 발견하게 된 책이다. 매일같이 검색한다고는 해도 놓치는 책이 적지 않다는 걸 새삼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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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론 안다, 우리는 단지 운이 좋아서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고 있다는 것을.
폭염 속에서도 희희덕거리고 있다는 것을.
어젯밤 꿈도 아니고 오늘 낮에
나는 그늘진 곳이 전혀 없는 표정으로
골프 스윙에 대해 노닥거리는 얘기를 들었다.
˝허리가 받쳐줘야 해.˝
그러자 나는 지구의 종말이 와도
아쉬울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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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술>과 <외로운 도시>의 저자 올리비아 랭의 버지니아 울프에 관한 에세이 <강으로>(현암사)가 나왔길래 아침에 주문하고 저녁에 받아보니 엉뚱하게도 <강의 언어>라는 동화소설이다. 제목을 잘못 클릭하고 주문까지 한 모양. 폭염의 후유증은 이런 데서도 나타나는가 보다.

‘강이 들려주는 세상 이야기‘가 부제인 <강의 언어>의 저자는 귀도 미나 디 소스피로인데, 이름도 생소할 뿐더러 국적도 오리무중이다(놀랍게도 책은 여러 권 소개돼 있다). <나무의 언어>가 대표작인데, 저자 프로필은 이렇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유서 깊은 이탈리아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밀라노에서 자랐다. 헝가리 출신인 작곡가 미클로스 로짜의 지도를 받았던 그는 스승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남캘리포니아 대학의 영화제작과를 다녔다. 2018년 현재 마이애미로 이주하여 아내, 세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

아르헨티나인이면서 이탈리아인이고 동시에 미국인인 것인가? 올리비아 랭을 읽으려고 했던 내가 왜 엉뚱한 저자의 국적에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지. 그저 한여름밤의 해프닝이랄 밖에. 기필코 내일은 ‘강으로‘ 나가볼 계획이다. ‘강의 언어‘는 누구한테 들려준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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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핑 전집'(아르테)이 출간되었다. 전10권(확인해보니, 기존 황금가지판과 코너스톤판 전집이 20권짜리다). 이렇게 분량이 많았었나 싶지만, 여하튼 결정판이라고 하니까 뭔가 '결정된' 듯해서 반갑다. 기억에 뤼팽에 매혹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가 아니었나 싶다. 아마도 당시 구할 수 있었던 2-3권의 뤼팽 시리즈를 읽지 않었던가 싶은데, 40년 전에 이 전집을 접할 수 있었다면 까무러쳤겠다. 지금이야 물론 그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10권이면 언제 읽겠냐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리를 생각해서 리스트로 묶는다. 일단은 5권까지만 구입할까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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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1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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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2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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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3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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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판 아르센 뤼팽 전집 4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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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자 한겨레의 '책과 생각'에 실리는 칼럼을 옮겨놓는다. 번역과 번역서에 대해서 짚어보는 '이현우의 언어의 경계에서' 꼭지인데, 이번에는 톨스토이의 대작 <전쟁과 평화>의 역사관에서 대해 적었다. 지난해 문학동네판에 이어서 최근 민음사판이 출간된 게 글을 쓴 계기다...


 


한겨레(18. 07. 20) '역사'를 입에 놀리는 사람을 경계하기


레프 톨스토이가 한국에 처음 소개된 건 1909년 잡지 <소년>을 통해서였다. 최남선과 이광수가 주선자이자 그의 숭배자였다. 투르게네프와 함께 톨스토이는 1920년대 독자들에게 이광수만큼 많이 읽힌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지만 어떤 톨스토이였나를 묻게 되면 대답은 궁색하다. 소설가로서 그의 대표작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는 해방 이후에야 번역되기 때문이다. 번역된 이후에도 한국 독자가 주로 읽은 건 카츄샤와 네흘류도프의 사랑 이야기 <부활>이었다. 톨스토이를 모르는 독자는 거의 없지만 그를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독자도 많지 않다. <전쟁과 평화>를 완독한 독자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한때 <안나 카레니나>도 강의에서 읽을 번역본이 없어서 애를 먹었는데 <전쟁과 평화>는 그보다 더 오랫동안 사정이 좋지 않았다. 오래된 번역본 두어 종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다 지난해에야 세계문학전집으로 새로 교정된 문학동네판이 출간되었고, 최근에 젊은 세대의 번역본으로 민음사판이 가세했다. 톨스토이의 걸작 <전쟁과 평화>를 읽을 수 있는 조건이 비로소 갖춰진 것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전쟁과 평화>는 무엇이 특별한가. 1869년판에 붙인 후기에서 톨스토이는 자신의 작품이 “장편소설도 아니고, 서사시도 아니고, 역사적 연대기는 더더욱 아니”라고 적었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과 그 패배라는 사건을 중심에 두고 1805년부터 1820년까지 러시아 사회의 모습을 담은 이 소설은 당시 기준으로 표준적인 유럽 장편소설을 초과하고, 과거 사실의 기록을 지향하는 역사 연대기도 훌쩍 넘어선다. 어느 한 범주로만 묶을 수 없어서 가족소설이면서 성장소설이고 전쟁소설이면서 역사소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톨스토이가 특별한 비중을 둔 것은 역사관의 개진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을 거리로 삼아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성찰해보려는 것이 그의 강력한 집필 동기였다. 그가 도달한 결론은 무엇인가.



놀랍게도 톨스토이는 국가적 대세에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개인적 관심에만 골몰했던 사람들이 영웅적 행위를 통해 참여하려고 했던 사람들보다 훨씬 유익한 일을 했다고 본다. “역사적 사건에서 무엇보다 뚜렷한 교훈은 지혜의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활동만이 열매를 맺을 뿐, 역사적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은 결코 그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문학동네) “역사적 사건들 가운데 가장 명백한 사건은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금지한 것이었다. 오직 무의식적인 활동만이 열매를 맺으며, 역사적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의의를 이해하지 못한다.”(민음사)


이러한 역사관에서 바라볼 때 나폴레옹 같은 세계사적 영웅이 역사를 움직여간다고 보는 영웅사관은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전쟁과 평화>에서 냉소거리가 되는데, 그가 아무리 군대를 지휘하고 명령을 내린다 하더라도 전장의 아수라장 속에서는 제대로 전달되지도 수행되지도 않는다. 나폴레옹 자신만 그렇게 믿을 뿐이다. 그렇다고 톨스토이가 민중사관에서처럼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본 것도 아니다. 톨스토이가 보기에 역사는 무의식적 과정이며 주체가 없다. 그것은 마치 사회성 곤충으로서 벌의 생활과 유사하며 실제로 톨스토이는 벌에 자주 비유한다. 개개의 벌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전체 군집의 생존과 존속에 기여한다. 역사적 과정에서는 인간도 이런 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교훈이다.

18. 0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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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8-07-20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전쟁과 평화를 읽지 않았습니다 -.- 근데 읽어도 그 뜻을 모를 게 확실했네요. 로쟈님 글을 읽고나니 읽어야겠다 싶습니다. 힌트를 얻고나면 어려운 문제도 풀 수 있으니깐요!

로쟈 2018-07-20 08:47   좋아요 0 | URL
안식년때 한번 읽어보시길.~

ara 2018-07-20 05: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민음사판 번역자 연진희입니다. 톨스토이가 국내에 소개되는 과정이며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대한 조명을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이 작품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아무리 많은 말을 쏟아도 부족하겠지만, 특히 역사관은 <전쟁과 평화>에서도 아주 중요하고 의미 있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로자님의 서재에 댓글을 남기기로 한 것은 번역자로서 제 오역을 발견하고 수정할 기회를 주신 것에 무엇보다 감사하고 이 지면을 빌어 독자분들께 사과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인용해 주신 부분은 4권 1부 4장 33쪽입니다. ()에 적힌 글이 수정을 반영한 부분입니다.

“역사적 사건들 가운데(에서) 가장 명백(분명)한 사건(것)은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금지한 것이었다(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무의식적인 활동만이 열매를 맺으며, 역사적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사건의) 의의를 이해하지 못한다.”(민음사)

바로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설사 그 역(그것)을 이해하려 애쓴다 해도 그는 그 무익함에 충격을 받고 말 것이다.‘에서도 수정이 필요합니다.

무심코 제가 이해하고 싶은 방향으로 독해하여 대명사가 지시하는 바를 정확히 간파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출간 전까지 최대한 검토하고 검토했는데도 이 부분의 실수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로자님의 칼럼 덕분에 감사하게도,오류를 확인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혹시 앞으로도 이것만이 아니라 다른 오류나 어색한 부분을 발견하시면 꼭 연락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역사관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테마에 대해서도 로자님의 글을 또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다른 독자분들께도 동일한 간청을 드립니다. 독자분들의 의견을 제대로 확인하고 반영해서 쇄를 거듭할수록 더욱 온전하게 성장하는 번역서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민음사에는 다음 쇄부터 수정이 적용될 수 있도록 말씀을 드려놓겠습니다.

* 제 이메일 주소는 jhyeon02@hanmail.net입니다.

로쟈 2018-07-20 08:50   좋아요 0 | URL
아. 번역은 어려운 문제이고 더 낫게 혹은 다르게 번역할 수 있는 여지는 늘 있지요. 방대한 작품을 옮기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 더 나은 번역으로의 성장은 저도기대할게요.~

러브굿 2018-07-23 10:47   좋아요 0 | URL
오역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요. 빠르게 바로잡아 주시면 독자로서 고맙죠.

연진희님 번역을 뒤늦게서야 접하고서 팬이 되었습니다.

간결하고 명확한 문장이 놀라워서, 번역문이 이럴 수 있나,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봤습니다. 원문 찾아서 비교도 해 보고요. 물론 저야 러시아 어를 모르지만 단어 모양과 나열 방식을 보면 짐작할 수 있거든요.

전자책으로도 어서 나왔으면 좋겠네요.

혹시 다음에 번역할 작품을 알 수 있을까요? 아직 일정이 없으신가요?

러브굿 2018-07-23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톨스토이가 왜 그렇게 공격을 많이 당했는지 이제야 알았네요. 민중사관과 영웅사관 양쪽에서 모두 싫어할 수밖에 없었네요. 정치적으로 회색주의자는 돌팔매를 맞을 수밖에 없죠.

로쟈님 덕분에 ‘전쟁과 평화‘가 새롭게 보이네요.

로쟈 2018-07-23 22:52   좋아요 0 | URL
톨스토이의 역사철학은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