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한겨레의 '책과 생각'에 실리는 칼럼을 옮겨놓는다. 번역과 번역서에 대해서 짚어보는 '이현우의 언어의 경계에서' 꼭지인데, 이번에는 톨스토이의 대작 <전쟁과 평화>의 역사관에서 대해 적었다. 지난해 문학동네판에 이어서 최근 민음사판이 출간된 게 글을 쓴 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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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18. 07. 20) '역사'를 입에 놀리는 사람을 경계하기
레프 톨스토이가 한국에 처음 소개된 건 1909년 잡지 <소년>을 통해서였다. 최남선과 이광수가 주선자이자 그의 숭배자였다. 투르게네프와 함께 톨스토이는 1920년대 독자들에게 이광수만큼 많이 읽힌 것으로 알려진다. 그렇지만 어떤 톨스토이였나를 묻게 되면 대답은 궁색하다. 소설가로서 그의 대표작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는 해방 이후에야 번역되기 때문이다. 번역된 이후에도 한국 독자가 주로 읽은 건 카츄샤와 네흘류도프의 사랑 이야기 <부활>이었다. 톨스토이를 모르는 독자는 거의 없지만 그를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독자도 많지 않다. <전쟁과 평화>를 완독한 독자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한때 <안나 카레니나>도 강의에서 읽을 번역본이 없어서 애를 먹었는데 <전쟁과 평화>는 그보다 더 오랫동안 사정이 좋지 않았다. 오래된 번역본 두어 종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다 지난해에야 세계문학전집으로 새로 교정된 문학동네판이 출간되었고, 최근에 젊은 세대의 번역본으로 민음사판이 가세했다. 톨스토이의 걸작 <전쟁과 평화>를 읽을 수 있는 조건이 비로소 갖춰진 것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전쟁과 평화>는 무엇이 특별한가. 1869년판에 붙인 후기에서 톨스토이는 자신의 작품이 “장편소설도 아니고, 서사시도 아니고, 역사적 연대기는 더더욱 아니”라고 적었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과 그 패배라는 사건을 중심에 두고 1805년부터 1820년까지 러시아 사회의 모습을 담은 이 소설은 당시 기준으로 표준적인 유럽 장편소설을 초과하고, 과거 사실의 기록을 지향하는 역사 연대기도 훌쩍 넘어선다. 어느 한 범주로만 묶을 수 없어서 가족소설이면서 성장소설이고 전쟁소설이면서 역사소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톨스토이가 특별한 비중을 둔 것은 역사관의 개진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을 거리로 삼아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성찰해보려는 것이 그의 강력한 집필 동기였다. 그가 도달한 결론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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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톨스토이는 국가적 대세에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개인적 관심에만 골몰했던 사람들이 영웅적 행위를 통해 참여하려고 했던 사람들보다 훨씬 유익한 일을 했다고 본다. “역사적 사건에서 무엇보다 뚜렷한 교훈은 지혜의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다. 무의식적인 활동만이 열매를 맺을 뿐, 역사적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은 결코 그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문학동네) “역사적 사건들 가운데 가장 명백한 사건은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금지한 것이었다. 오직 무의식적인 활동만이 열매를 맺으며, 역사적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의의를 이해하지 못한다.”(민음사)
이러한 역사관에서 바라볼 때 나폴레옹 같은 세계사적 영웅이 역사를 움직여간다고 보는 영웅사관은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전쟁과 평화>에서 냉소거리가 되는데, 그가 아무리 군대를 지휘하고 명령을 내린다 하더라도 전장의 아수라장 속에서는 제대로 전달되지도 수행되지도 않는다. 나폴레옹 자신만 그렇게 믿을 뿐이다. 그렇다고 톨스토이가 민중사관에서처럼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본 것도 아니다. 톨스토이가 보기에 역사는 무의식적 과정이며 주체가 없다. 그것은 마치 사회성 곤충으로서 벌의 생활과 유사하며 실제로 톨스토이는 벌에 자주 비유한다. 개개의 벌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전체 군집의 생존과 존속에 기여한다. 역사적 과정에서는 인간도 이런 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교훈이다.
18. 07.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