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몽티를 마시며 무라카미 류를 읽는 건
미안한 일이지 자몽에게
자몽이 인질도 아니잖아
자몽을 엉덩이로 깔고 앉을 게 아니라면
자몽의 얼굴을 내리깔고 앉을 게 아니라면
그것도 보통 엉덩이가 아니지
거대한 엉덩이야 아주 거대한 엉덩이가
얼굴을 내리깔고 누를 때 나는
울지 않을 테야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아
자몽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
잘못은 무라카미 류에게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하여간에 류는
흑인 여자의 거대한 엉덩이에 깔려 헉헉거리지
자몽티를 마시며 무라카미를 읽다니
도대체 자몽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인지
류는 본래가 그런 류야
그렇게 밟혀보는 게 일이지
그에겐 거대한 엉덩이가 거대한 터널이고
아메리카야 발전소고 재판소야
어디로든 빠져나갈 수 없을 때
류는 토악질을 참으며 숨을 고르지
거대한 모든 것은 숨 쉴 틈을 주지
살아간다는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하지만 자몽만은 안 돼
이제 자몽을 집에 보내주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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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강의책을 찾아 책장을 두리번거리다(책이 이중으로 꽂혀있다) 끝내는 다시 주문했다(거의 매주 겪는 일이다). 책이 포화상태이고 강의도 포화상태여서, 하지만 담당자는 나 혼자뿐이라 사태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깊이 생각할 것 없이 바로 체념 모드로.

혹은 새로운 강의에 대한 구상으로. 내년 상반기 강의일정이 80퍼센트 가량 정해졌는데 주력은 19세기 영국문학과 제임스 조이스다. 그 가운데서도 워즈워스의 <서곡>과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가장 기대하는 작품(강의준비에 가장 품이 많이 들 거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까지 각 국가별 문학을 다루면서 주로 근대소설을 읽어왔지만 대표시인들도 한 명씩 끼워넣었다. 프랑스의 보들레르, 독일의 하이네, 미국의 휘트먼이 그에 해당하며 영문학에서는 워즈워스를 골랐다. <서정담시집>이 유명하지만 필생의 작품 <서곡>이 번역돼 있기에 특별히 고심하지 않았다. 워즈워스 연구서와 평전도 나와있기에 참고가 된다.

<율리시스>는 김종건 교수의 제4개역판까지 나와 있는 상태인데, 내년봄까지 변동이 없으면 어문학사판으로 읽게 될 듯하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민음사판과 펭귄클래식판이 아직 완간되지 않았다)와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강의에서 이미 다룬 뒤라 남은 건 <율리시스> 정도였다. 막대한 분량과 난해성 때문에 문학독자들을 주눅들게 하지만 <피네간의 경야>에 견주면 ‘읽을 수 있는 책‘에 속한다.

<율리시스>까지 내년 상반기에 독파하면 가을에 영국문학기행을 다녀올 계획이다. 30년간의 세계문학순례가 마무리에 들어서는 듯한 느낌이 든다(이 순례에서 얻은 결과는 여러 권의 책으로 정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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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2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12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wingles 2018-12-12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과 신체건강을 위해 조교겸 비서를 두셔야 겠어요~ㅎ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대중에게 오픈되는 강의인가요?

로쟈 2018-12-12 22:22   좋아요 1 | URL
네, 따로 공지할 예정입니다.~
 

전철역 앞 이디야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며
내게 남은 10분을 헤아린다
사형수의 마지막 5분을 생각하면
두 번 죽고도 남을 시간
나는 누군가에게
마지막 10분이었을 시간을 생각한다
나는 그때도 강의자료를 보고 있을까
몰락의 시간에도 밤은 부드러워라
타르코프스키가 말한 병사는
총살되기 직전 젖은 구두를 마른 곳에
얹어두고자 했지
그의 구두가 그의 유언이었지
그의 구두가 오래
그를 기억했는지는
타르코프스키도 말하지 않았다
내게는 3분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커피는 아직 식지 않았지만
나는 떠나야 하리
전철역 앞 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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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8-12-10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분의 달콤한 시간,
때로는 5분, 때로는 3분.
저의 달콤한 시간은
침대에서 뜨거운 커피마시며
멍하게 생각에 잠기기.
식기 전에
얼른 털어넣고
식탁으로 가서 커피잔에
물 붓고 영양제 몇 알 털어넣기.
그리고 아침일과를 시작합니다.

로쟈 2018-12-10 20:46   좋아요 0 | URL
커피 마실 시간이면 10분은 필요하겠는데요.~

로제트50 2018-12-10 21:14   좋아요 0 | URL
급하면 한 모금 마시기도-.-
 

열흘째 동행한 감기와 작별하고 정신을 가다듬는 중이다. 이번주 강의자료를 준비하다가 니체의 유고들을 마저 주문하고 실존주의 관련서도 추가로 장바구니에 넣었다. 니체와 실존주의가 연결되는 대목도 있는데, 공통의 뿌리를 지목하자면 도스토예프스키를 들어야 하리라(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 도스토예프스키와 헤겔의 관계에 대해 해명하는 것이 내년 과제 가운데 하나다. 강의에서 자주 언급하지만 좀더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다).

프랑스문학 강의에서 이번주부터 앙드레 말로를 다루는데 조만간 사르트르의 대표작들도 읽게 될 예정이다. 실로 오랜만에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생겼다(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해 대학에서 강의한 게 거의 이십 년 전이다). 전보다 사정이 나아진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니체의 관계, 그리고 실존주의의 관계에 대해서 좀더 명확하게 해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책장에서 눈에 띄어 빼온 메리 워낙의 <실존주의>(서광사)를 읽으면서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대체로 말하면, 실존주의 철학자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의 관심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이 관심은 사랑과 연대에 대한 관심으로 이행하게 된다. 그것이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여정이었으니,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이해는 실존주의에 대한 이해에도 필수적이다.

니체의 <권력의지>(부글북스)가 새로 번역돼 나와 구입했다. 니체 전집에서는 유고 19권-21권에 해당한다. 여동생이 악의적으로 편집했다고 해서 악명 높은 책이기도 한데 대조해볼 수 있는 전집판이 있기에 어떻게 ‘편집‘되었는가도 살펴볼 수 있겠다.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그리비)도 침대에 놓여 있는 책인데, 사르트르의 타자와 레비나스의 타자를 오랜만에 대놓고 비교해볼 참이다. 아, 이 정도만 해도 일거리가 적은 건 아닌데 전체 일정에 견주니 표도 나지 않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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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어 가며 갖게 되는 유감 중의 하나는 존경의 대상을 잃는 것이다. 그런 분들이 타계함으로써 잃게 되기도 하고 또 그렇게 존경할 만한 위인은 아니구나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잃기도 한다. 탄복할 만한 지성들도 나이와 함께 고루한 통념과 자기 경험에 함몰하는 걸 드물지 않게 목도한다. 영업용 택시 기사의 나이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지성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예외는 있다. 지난해 타계했지만 90세가 넘어서도 살아있는 지성의 풍모를 보여주었던 지그문트 바우만이 그런 경우다. <레트로토피아>(아르테)는 지난해에 나온 그의 유작. 책이 나오자마자 원서를 주문했고 며칠전에야 받았다. 내게 주말은 이런 책을 마음놓고 읽는 시간이라는 의미인데 주말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지방강의를 마치고 아직도 귀가길에 있으니 여유가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의지할 만한 지성이 여전히 책으로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는다. 귀가하는 대로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운 시대 다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바우만의 마지막 성찰과 통찰˝을 좀 넘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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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2018-12-09 1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책 보니 문득 15년전 읽었던 함석헌 선생님(그 사람을 가졌는가) 생각이 나네요~
헤엄쳐고 또 헤엄쳐도 책은 쓰나미처럼 몰려 오네요.~^^

로쟈 2018-12-09 18:16   좋아요 0 | URL
네 매주 물 먹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