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손택의 신간 <강조해야 할 것>(시울, 2006)을 어제 받아들었다. '최근에 나온 책들'이라고 매번 소개하지만, 정작 내가 구입하는 책들은 40% 이내이다. 그러니까 5권을 언급하면 2권 이내의 책을 사는 것이며 그 정도만 돼도 3할은 넘는 '타율'이 아닌가라며 자위하는 편이다. '손택의 모든 책'이라고 할 만하지만, 두툼한 데다가 가격도 만만찮은 책을 바로 주문을 넣은 데에는 호워드 호지킨(Howard Hodgkin, 1932- )의 그림 '인도의 하늘(Indian Sky)'을 두르고 있는 표지도 한몫했다. 원서의 표지이기도 한데,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장정이 가장 화려하며 때문에 눈길을 끌지 않을 수 없다. '강조' 하나는 제대로 하고 있는 표지이다.

국역본이 배달되자 마자 나는 도서관에서 며칠전에 확인해둔 원서 'Where the stress falls'(2001)를 대출했다. 서가의 제자리에 꽂혀 있지 않아서 직원에게 찾아봐줄 것을 부탁까지 했었는데, 다행히도 퇴근시간 전에 연락이 왔고 나는 그 책의 첫 대출자가 되었다(대출시스템이 전산화 돼 있기 때문에 최종대출일이 기록으로 남는다). 말하자면, '새책'이란 얘기이고, 이런 책을 대출할 때는 마치 직접 새책을 구입한 것 같은 부듯함을 느끼게 된다. 아래 사진은 2001년 한 서점에서 자신의 신간을 소개하고 있는 수잔 손택.

그리고 오늘, 읽어야 할 책들의 산더미 속에서도(나는 한번에 대략 10여권 이상의 책들을 건드린다) 마수걸이로 에세이 한편 정도는 읽기로 하고 편 것이 2부 '내가 읽은 것들'의 첫번째 에세이 '시인이 쓴 산문'이다. 처음엔 1부의 첫번째 에세이 '영화의 한 세기'를 읽으려고 했으나, 원서와 대조해본 결과 국역본의 차례는 1부와 2부가 바뀌어져 있었다. 즉 원서에는 '내가 본 것들(Seeing)'보다 먼저 나오는 것이 '내가 읽은 것들(Reading)'이고, 그래서 나 또한 그에 따라 2부를 먼저 읽기로 한 것(아마도 출판사로선 시작부터 '시인의 쓴 산문'을 읽어낼 독자가 많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을 법하다).

흥미롭게도 '시인이 쓴 산문'은 러시아 작가들, 특히 여성시인 마리나 츠베타에바(1892-1941)에 관한 에세이였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출전에 따르면 이 에세이는 원래 츠베타예바의 산문집 <사로잡힌 영혼(Captive Spirit: Selected Prose)>(1983)의 서문으로 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손택은 러시아문학에 정통하다). '즐거운 책읽기'까지 적어놓으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그 때문이다. 더불어 몇 가지 번역상의 오류도 눈에 띄기에 교정해두고자 한다.

"19세기의 러시아가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1958년에 카뮈가 파스테르나크에게 경의를 표하는 어느 편지에서 이렇게 단언했다는 걸로 에세이는 시작하는데(그러니 러시아문학에 대한 참조 없이 카뮈를 읽는 일도 속없는 일이다), 그해에 스웨덴 한림원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했었다. "실제로 지난 25년 동안 뛰어난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이 번역되어 재발견되고 복권되었다."라는 건 지난 1983년 시점에서 영어권의 사정을 말한다. 20년이 더 지난 시점에서의 한국의 사정은 아직 턱도 없는 형편이다(단적으로 츠베타예바의 '시인이 쓴 산문'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전공자들의 반성이 요구된다(어떠한 핑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혼을 바꿔놓은 19세기의 러시아는 산문작가들이 이뤄낸 업적이었다. 반면 20세기의 러시아는 주로 시인들의 업적이다. 물론 시를 통해서만 이루어진 업적은 아니다. 시인들은 산문을 통해서도 격정적인 의견을 쏟아냈다. 하지만 진지함이라는 이상은 필연적으로 비난을 불러일으킨다."(193쪽)

처음 두 문장은 타당한 주장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두 문장은 좀 의문스럽다. 원문은 "About their prose the poets espoused the most passionate opinions: any ideal of seriousness inevitably seethes with dispraise."(3쪽)이다. 'about their prose'가 '산문을 통해서도'란 뜻이 되는 건지 일단 의문이고(상식적으로 왜 '산문에 관해서'가 아닐까? 손택의 어법인가?), '하지만'은 왜 들어갔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이어지는 내용이 자전적 산문에 대한 파스테르나크의 폄하이기 때문에 맥락상으로도 두 문장의 의미는 와닿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산문에 대해서 시인들이 격정적인 의견을 쏟아낸 것이고, (산문에서의) 어떠한 진지한 목적(이념)도 불가불 (시인들의) 비난을 사기 마련이다, 라는 정도의 뜻이 아닌가 싶다(손택의 어떤 문장들을 상상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읽기가 편하지 않다). 그럼 이어지는 내용은 무엇인가?

 

 

 

 

"파스테르나크는 죽기 전까지 몇십 년 동안 자신이 청년기에 썼던 뛰어나고 섬세한 자전적 산문(예를 들면 <안전통행증>)을 지나치게 자의식적이고 모더니즘적이라며 폄하했다. 반면 당시 집필하고 있던 작품 <닥터 지바고>는 자신이 쓴 글 중에서 가장 진실하고 완벽한 작품이 될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비교가 불가능한 자신의 시 작품을 제외하고 말이다." 

번역문에는 오역이 포함돼 있기에 원문을 제시한다: "Pasternak in the last decades of his life dismissed as horribly modernist and self-conscious the splendid, subtle memoiristic prose of his youth (like Safe Conduct), while proclaming the novel he was then working on, Doctor Zhivago, to be the most authentic and complete of all his writings, beside which his poetry was nothing in comparison."

원제인 'A Poet's Prose'를 '시인이 쓴 산문'으로 옮긴 데에서 전문번역자로서 역자의 솜씨를 짐작할 수 있지만(대부분은 그냥 '시인의 산문'이나 '한 시인의 산문'이라고 옮길 것이다), 인용한 대목에서만큼은 실수가 도드라진다. 전체가 한 문장인 원문을 역자는 세 문장으로 분할했는데, 방점은 파스테르나크가 산문을 폄하했다는 데 놓여 있으므로 순서상으론 번역문의 첫번째 문장이 맨마지막으로 처리되어야 한다.

더불어, "beside which(=Doctor Zhivago) his poetry was nothing in comparison."을 "비교가 불가능한 자신의 시 작품을 제외하고 말이다"라고 옮긴 건 이해가 불가능한 오역이다. "<닥터 지바고>에 비한다면 그의 시들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 아닌가?(참고로, <안전통행증>은 <어느 시인의 죽음>(까치, 1977)로 번역돼 있으며, 말년의 파스테르나크와의 인터뷰는 <11인의 위대한 작가들>(책세상, 1997)을 참조할 수 있다. 원래는 <나의 삶, 나의 문학>(책세상, 1989)로 소개됐던 책이다. 언론인 김성우의 러시아문학기행 <백화나무 숲으로>(제3문학사, 1991)의 파스테르나크 편도 유용하다. 아들 예브게니와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아래 사진은 파스테르나크가 숨은 거둔 모스크바 근교의 페레젤키노의 별장(다차). 가보진 못했는데, 지금은 파스테르나크 박물관이라고.  

해서 전체 문장을 다시 옮기면, "자신이 쓰고 있던 소설 <닥터 지바고>가 가장 진실하고 완벽한 작품이 될 것이며, 거기에 비한다면 그가 쓴 젊은 날의 시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공언하면서도 말년의 이십여 년간 파스테르나크는 (<안전통행증)> 같은)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한 섬세하고 빼어난 자전적 산문을 지나치게 자의식적이고 모더니즘적이라고 격하시켰다." 아래 사진은 1934년 작가동맹회의에서의 파스테르나크.

파스테르나크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모더니즘 최대 시인 중 한 사람인 오시프 만델슈탐(1891-1938)은 산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산문의 핵심은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산문자가나 수필가에 의미있는 것이 ㅣ시인에게는 (전적으로) 헛소리에 불과하다." 손택의 보충설명: "산문작가는 동시대인이라는 구체적인 청중에게 말을 건네야 하는 반면, 일반적으로 시는 시간적으로 먼 미지의 수신인을 향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한데, 웬 그녀? 원문의 '만델슈탐'을 다시 받기가 그랬는지 역자는 인칭대명사로 바꿔주는데, 그렇다고 성(性)까지 바꿀 필요가 있었을까? 만델슈탐의 아내 '나제쥬다 만델슈탐'이 걸출한 회고록의 저자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이는 '나제쥬다'가 아니라 '오시프'이므로 '그'라고 해야겠다. 사진은 1930년대 체포된 만델슈탐의 프로필 사진. 그는 1938년에 숙청됐다.  

이러한 배경설명하에 등장하는 이가 츠베타예바이다. 그녀 또한 시가 문학의 정점이라고 생각했는바, 어느 정도였느냐면 푸슈킨의 소설 <대위의 딸>에 대해서 "푸슈킨은 시인이었다. '고전적' 산문이라 할 수 있는 <대위의 딸>만큼 시적 호소력을 보여주는 작품은 없다"라고 했다. 즉, 푸슈킨이 소설을 시로 간주하는 것. 왜? 위대하니까? 만약 어떤 산문/소설이 위대하다면 그건 '시'이다. 시만이 위대하니까.

이러한 '편견'은 이 시기 러시아 시인들에게 널리 공유된 믿음이어서 손택은 망명시인 브로드스키(1940-1996)의 예를 덧붙인다(번역서에서 '이오시프 브로드스키'란 러시아식 이름을 '조지프 브로드스키'라고 영어식으로 읽어준 건 유감스럽다. 성경의 인물을 따라 '요셉 브로드스키'라고 타협할 수도 있을 텐대, '조지프'는 아무래도 낯설며 떨떠름하다). 그에 따르면 위대한 산문이란 "다른 표현수단을 통해 씌어지고 있는 시"이다.

"시를 이렇게 정의내리는 것은 실상 동어반복이나 마찬가지이다. 마치 산문을 '산문적인 것'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산문적인'이라는 말을 '지루하고 평범하며 단조로운'이라는 폄하적 의미로 생각하는 것은 정확하게 말해 낭만주의 시대의 사고이다." 손택의 논평이다. 어쨌거나 "문자의 공화국은 실상 귀족사회"이고 "이곳에서 귀족의 작위는 바로 '시인'이다." 여기서 '문자의 공화국'은 'the republic of letters'인데, 복수형의 'letters'는 '문학'을 뜻하므로 '문학의 공화국'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 듯하다.

요컨대, "러시아 문학은 시인에 대한 낭만주의적 사고를 계승하고 있다. 현대 러시아 시인들에게 '시'는 비참하고 속된 현재와 사회주의 체제의 지리멸렬함에 맞서는 자유이자 개인성이며 체계에 순응하지 않는 정신이다(진정한 산문은 결국 국가라는 듯 말이다). 따라서 그들이 시의 절대성을 단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물론 시의 근원적 우월성을 주장했던 건 러시아 시인들만이 아니며 손택은 발레리와 거트루드 스타인 등의 사례를 더 예시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인들이 산문을 썼다는 것. 손택의 서평 대상이 되고 있는 츠베타의 경우를 포함해서 말이다. 이에 대한 애기는 좀더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때 마저 다루도록 하겠다...

 

06. 04. 29 - 05.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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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5-03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은 본문에 적은 대로입니다(필요한 문장도 다 적었습니다). 'nothing in comparison'이 '견줄 수 없이 뛰어난'이란 뜻을 갖고 있나요? 'beside which'도 '-는 차치하고'의 뜻인가요? 저로선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더불어, 파스테르나크가 시라는 장르를 높이 평가했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초기시는 높이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닥터 지바고>에 대해선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실상 <닥터 지바고> 자체가 '소설로 쓴 시'입니다... 제가 너무 성급했군요.^^

bluegoby 2006-05-03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실수한 걸 깨닫고 고치려고 들어와 보니 로쟈님이 벌써 답글을 달으셨네요.
먼젓글은 무시해 주세요.

털세곰 2008-01-10 0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소개해주신 영역본 쯔볘따예바 산문집(Captive Spirit)의 링크를 따라가면 위키의 그녀 사진이 나옵니당^^ 그리고 이제는 영어책 못 읽겠어요. 하도 멀리하다보니 로쟈님 번역문의 오류 등을 원본과 대조해 지적해주시는 것들은, 정말 제게는 어디가 번역이 틀렸지 할 정도입니다 ㅠ.ㅠ

로쟈 2008-01-10 09:49   좋아요 0 | URL
링크가 그쪽으로 바뀌었군요. 러시아어나 영어나 읽는 만큼이죠. 한데, 중요한 건 한국어 같아요...
 

'곁다리텍스트'란 카테고리를 만들어놓고 며칠 묵혔다. 이미 대여섯 권의 책에 관한 대여섯 편의 이야기들이 내정돼 있지만, 따로 짬을 내기가 힘들다. 그래도 시작은 해놓아야겠기에 몇 자 적기로 한다. 사실 곁다리텍스트란 말을 상기하게 된 건 최근에 나온 치프킨의 <바덴바덴에서의 여름>(민음사)에 붙여진 수잔 손택의 서문에서 '범소설(parafiction)'란 단어를 발견한 덕분이다.

 

 

  

 

"나는 이 책을 지난 한 세기의 소설과 범소설(parafiction)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며 창조적인 성취를 이룬 작품에 포함시키고 싶다"라고 그녀는 치프킨의 소설에 대해 적었는데, 거기서 'parafiction'을 '범소설'이라고 옮긴 게 눈에 띈 것이다. 'para'란 접두어는 (against란 뜻도 갖고 있지만) beside란 뜻을 갖고 있으며 'parafiction'은 정격소설에는 포함하기 곤란하지만 소설이란 말의 외연을 최대한 확장시킬 때 포함될 수 있는 가장자리 소설을 뜻한다. 치프킨의 소설이 그렇게 분류된 건 그것이 역자의 지적대로 "소설과 다큐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곁다리텍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paratext'를 가리키며 그것은 텍스트의 범위를 최대한 확장시킬 때 포함될 수 있는 가장자리 텍스트들을 가리킨다. 그걸 '곁다리텍스트'라고 최초로 옮긴 이는 내가 알기에 비평가 김현이었다. 그 번역어를 나는 비평집 <분석과 해석>(문학과지성사, 1988)에 실린 맨마지막 글 '서문과 독자'에서 처음 보았다. 몽테뉴의 <수상록>, 루소의 <고백>,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등장하는 네 개의 서문/서시를 분석하고 있는 그 글에서 김현이 '곁다리텍스트'란 말로 지칭한 것은 '서문'이지만 그 말이 반드시 서문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 점은 비평가 스스로가 미리 밝혀놓고 있다. 그의 논변을 따라가 본다.

 

 

 

 

(1) "어디까지를 텍스트라고 부를 수 있을까? 라고 묻는다면, 그런 질문도 질문일 수 있나 하는 회의가 곧 생겨날지 모른다. 텍스트란 어떤 제목 밑에 딸린 모든 것을 포괄하는 중성적 명칭이다. 텍스트는 모든 쟝르적 구분과 양적 구분을 함축하고 있는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텍스트는 매우 자명한 개념처럼 보인다."(*텍스트의 개념은 자명해 보인다.)

(2) "그러나 그 텍스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텍스트를 이루는 요소들이 간단하고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제목과 필자의 이름, 그 다음 책 뒷표지나 앞날개에 붙어 있는, 물론 없을 수도 있는 요약문들과 필자 소개문들; 맨 첫 페이지나 맨 마지막 페이지에 붙어 있는, 이것 또한 없을 수도 있는 인용문들; 띠지에 씌인 글들. 이런 것들은 텍스트에 속하는가, 안 속하는가? 어디까지를 텍스트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는 우스꽝스러운 질문도, 그 문제에 허심탄회하게 접근하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하지만 텍스트의 개념/경계를 확정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3) "텍스트와 관련된 모든 것은 다 텍스트이다라고 동어반복적으로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우선 제목과 필자의 이름에 대해 그것을 텍스트라고 분명히 말할 수도 없지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 다음의 것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 문제에 대한 비교적 합리적인 접근은 제라르 쥬네트라는 프랑스의 한 비평가에 의해 행해졌는데, 그는 텍스트에 붙어 있는 모든 것을 곁다리텍스(paratexte)라고 부르기를 제안하고 있다."(*쥬네트는 텍스트와 곁다리텍스트를 구분하자고 제안한다.)

(4) "곁다리텍스트란 엄격한 의미에서 텍스트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아니 텍스트라고 부르기는 좀 거북하지만, 텍스트에 붙어 텍스트가 되고 있는 텍스트들이다. 곁다리텍스트 중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서문이다. 서문, 혹은 서시는 텍스트 전체의 구조를 암시하거나 텍스트 생성의 비밀을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서문은 텍스트와 그것을 쓴 사람 사이의 가교이다. 그것은 사람과 텍스트에 다 같이 관련을 맺고 있다. 서문 연구는 텍스트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부분이지만, 그 연구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서문학이라고 불러야 할 서문 연구는 서문이 곁다리텍스트이지만 텍스트 못하지 않는 중요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313-4쪽, 강조는 나의 것)

다시 김현의 정의를 반복하자면, "텍스트라고 부르기는 좀 거북하지만, 텍스트에 붙어 텍스트가 되고 있는 텍스트들"을 우리는 '곁다리텍스트'라고 부를 수 있다. 가령, 치프킨의 소설 텍스트에 에피그라프로 붙어 있는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한 구절이 그런 곁다리텍스트의 또다른 사례이다: "당신의 터무니없는 말은 얼마나 건방지고 뻔뻔스러운가. 그런데, 그러면서도, 당신은 그토록 겁을 먹고 있으니!"

'곁다리텍스트'란 카테고리는 바로 그런 곁다리들, '덧붙어 딸린 것들'을 위한 자리이다. 그런 것들이 생색내는 자리이다. 실상은 이러한 류의 페이퍼 같은 하이퍼텍스트가 곧 파라텍스트가 아닌가란 생각도 든다. 책으로 묶기에는 거북하지만, 그렇다고 내칠 수도 없는 그런. 나는 그런 텍스트들에 애착을 느낀다...

06. 0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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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3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경증이긴 하지만 '문자중독증'이 있는 나는 여하튼 뭐든 읽을 거리를 갖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없다고 해서 발작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기 때문에 '경증'이다). 거의 언제나 손에 가방을 들고 다니고, 또 대개는 너무 많은 책들을 넣고 다닌 탓에 팔길이가 좀 늘어나기까지 했다(하긴 중고등학교 때의 무거운 책가방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나의 '가방 모찌' 경력은 4반세기를 넘어서고 있다). 저녁시간 전철을 타고 집에 가는 길에도 (특별한 읽을 거리가 없는 한) 신문이라도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엊저녁에도 '문화일보'를 읽다가 얻은 소득이 있어서 여기에 옮겨놓는다(한동안 읽을 거리가 없는 신문이었는데, 최근에는 제값을 한다). 언젠가 패러디의 문제를 다루게 되면 인용해먹을 생각인 인터넷유머 '고스톱 만가' 시리즈와 함께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 것은 이왕주 교수의 칼럼 '진정한 영웅'이었다(이런 자질구레한 쓸 거리들을 다 적어놓기에도 '하루'는 역부족이다. 하긴 별것도 아닌 벌이에 충당해야 하는 시간으로도 모자란 것이니! '벌이'가 아닌 글들의 8할은 바람결에 흘려보내는 수밖에 없다).

<철학풀이, 철학살이>(민음사, 1994)부터 최근의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효형출판, 2005)까지 뜸하지는 않을 만큼의 저서를 내고 있는 저자의 글을 내가 본격적으로 읽어본 적은 없다. <소설 속의 철학>(문학과지성사, 1997) 같은 책이 그렇듯이 '칼럼집'이라는 가벼운 형식과 '철학'이라는 무거운 콘텐츠가 잘 버무려질 수 있을 거란 기대를 내가 별로 갖고 있지 않아서였다. 어제 읽은 칼럼은 그런 생각을 재고해보도록 만들었다. 나는 그의 <쾌락의 옹호>(문학과지성사, 2001) 같은 '가벼운' 책을 오늘이라도 사들게 될 것이다. 아래의 칼럼 때문에.

 

 

 

 

문화일보(2006. 04. 27) 한국계 천재 소녀 골퍼 미셸 위가 국내 재벌기업이 후원하는 골 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온다고 한다. 한 신문은 미국에 서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오는 이 열일곱 살짜리가 벌어들이는 연간 수입이 우리 돈으로 약 26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미셸 위. 어쨌든 대단하다(*그녀는 잔디밭의 영웅이다). 하인스 워드의 경우처럼 미셸 위의 방한은 영웅에 목마른 이 반도를 또 한번 들뜨게 할 것 같다.



-그러나 대중의 이런 환호에는 돌이켜 살펴봐야 할 대목이 있을 것이다. 공자도 ‘모든 인간들이 달려들어 환호하는 일에 반드 시 반성해서 살펴야 할 무엇이 있다(衆好之必察焉)’ 고 충고했다. 워드와는 달리 미셸 위 신드롬은 이뤄놓은 성취가 아니라 이루게 될 성취라는 불확실한 미래에 터잡고 있다. 그만큼 위태로 운것이다. 속절없이 스러져버린 미래의 천재, 가능성의 영웅이 얼 마나 많더냐.

-며칠 전 서울 등촌동의 한 아파트에서 화재가 났다. 부모 없는 사이 초등학생 세 명이 라이터놀이하다 불을 낸 것이다. 마침 서울 화곡여자정보산업고 1학년 여학생 10명이 그 곁을 지나다가 연기와 화염에 싸인 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어린이들을 합심하여 침착하게 구해냈다.(*이 여학생들은 지난 월요일 서울시 소방방재본부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이 여학생들도 남들처럼 그 상황을 무심히 스치거나 외면하거나 기껏 119에 신고하는 것쯤으로 떼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과감히 그 상황 안으로 뛰어들어 하마터면 화마 속에 사라져갈 뻔한 어린 생명들을 건져냈다. 그 여학생들 가운데 누군가가 동갑내기 미셸 위처럼 유명하게 될지 어떨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저 모두 남들처럼 대학에 진학하거나 직장에 취직하거나 결혼해서 이름 없이 그냥 평범하게 살아갈지 어떨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만은 단언할 수 있다. 그들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이제 좀더 예민한 후각과 눈으로 이웃과 주위에 고통 받는 이웃은 없는지, 상처로 휘청거리는 타인은 없는지 살피며 살아가리라는 것을. 그리고 구원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수난자들에게 기꺼이 손을 뻗쳐 붙들어주리라는 것을.

-영웅은 대중의 환호나 갈채 속에서만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내게는 이 이름 없는 여학생들이야말로 진짜 영웅으로 보인다. 자가용 비행기쯤이야 없으면 어떠냐. 그 치열한 성장기에는 그냥 우산없이 내리는 비에 흠뻑 젖어 걸어가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도움이 필요한 약자들에게로 열리는 그 따뜻한 마음을 생애 동안 지켜내는 것이다.(*이 여학생들은 '이미지'도 없다.)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에서 주인공인 가출 청소년 홀든 콜필드는 머나먼 서부로 떠나기에 앞서 만난 여동생 피비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난 조그만 꼬마들이 뛰어노는 넓디넓은 호밀밭을 늘 눈앞에 그려보곤 해. 수많은 꼬마 녀석들이 있을 뿐 어른은 나밖에 없는 거야. 오직 나밖엔. 나는 언제나 아득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지. 내가 하는 일은 그 꼬마녀석들 중에 누구라도 낭떠러지 쪽으로 다가서려면 달려가서 붙잡는 거야. 애들이란 달릴 때 저희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모르잖아? 그럴 때, 내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그 애를 붙들어주는 거야. 이게 내가 하루종일 하게 되는 일의 전부지. 나는 정말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어. 이게 바보짓인 줄은 나도 알아. 하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이것뿐이야.”(*주인공의 이 대사는 사실 이 작품의 감동을 상당 부분 감당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누가 우리 청소년들에게서 회의와 절망만을 확인하는가. 이런 소녀들이 있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들 모두가 그저 이기적인 공부벌레가 되어 책상 앞에만 붙들려 있는 것도 아니고, 콘서트에서 노래하는 가수들에게 열광하거나 컴퓨터 게임 같은 것 에 몰두하면서 생을 소모하고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 자신이 어린 영혼들이면서 더 어리고 더 약한 영혼들이 뛰노는 호밀밭 가장자리의 낭떠러지 곁을 지켜주는 파수꾼으로 나서기도 하는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의 표상이 아닐까. 누가 그 이름을 기 억하는가, 기억하지 않는가는 중요한 게 아니다. 잊어진다는 것, 그냥 사라져간다는 것, 그게 또 무슨 상관이랴. 호밀밭의 파수꾼은 훈장을 위해, 그 잘난 포상을 위해 낭떠러지를 지키는 게 아니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러는 것일 뿐이다.

06. 04. 28.

P.S. 좌파니 우파니, 뉴라이트니 뉴레프트니 하는 치들이 아니라 세상은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러는 것일 뿐'인 이 파수꾼들에 의해 조금씩 나아지는 거라고 나는 믿고 싶다, 아니 믿고 있다. 적어도 '잔디밭-세상'이 아닌 '호밑밭-세상'에서는 그렇다. 참고로, 홀든은 '그냥 그러고 싶지 않을 뿐'인 바틀비의 짝패이다. 밥먹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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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6-04-28 11:48   좋아요 0 | URL
좋은 글.... 오... "중요한 것은 도움이 필요한 약자들에게로 열리는 그 따뜻한 마음을 생애 동안 지켜내는 것이다." 진짜 어려운 말이네요!

로쟈 2006-04-28 16:31   좋아요 0 | URL
'말'이 어려운 건 아니고 실행하는 게 좀 어려운 일이죠.^^
 

강의준비를 위해 지난 학기 강의자료들을 정리하다가 프린트아웃 해놓은 모스크바 통신문 하나를 읽었다. 2005년 1월 17일에 모스크바에서 씌어진 것인데, 귀국을 2주 가량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거의 막바지 통신문이었고, 분량으로 보아 5-6시간은 족히 걸렸을 법하다. 최근에 교수신문에서 '우리 학문과 철학'이란 기고문을 옮겨놓은 바 있는데, 그와 관련한 '나의 의견'으로 참조가 될 만하겠기에 정리해서 '창고'로 옮겨놓는다(다시 읽으면서 '철학적 농담'이라면 나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초월적 비평과 치과적 진료'라는 이전 통신문의 '보유'로 씌어진 것이지만, 여기서는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로 제목을 고쳐달도록 하겠다. 내가 보유하고자(보태어 채워넣고자) 했던 문단(=구멍)을 밝히고 있는 대목에서부터 시작해보자(아래는 모스크바 대학 건물의 일부).

 

짐작에 주로 ‘구멍’에 해당한 건 다음의 한 단락이다: “한편,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에 대한 참조 없이 철학적 로고스만으로도 철학은 구성될 수 있다(주로 수학/논리학에서 바탕을 마련하고 있는 후설의 현상학이나 초기 분석철학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하지만,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를 끊임없이 참조함으로써 자극과 영감을 얻는 철학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들뢰즈, 데리다, 후기 하이데거 등을 단번에 꼽을 수 있으며, 사르트르도 물론 여기에 포함된다. 더불어 도스토예프스키와 탈무드로부터 근원적인 영감을 얻고 있는 레비나스의 윤리학까지).” 이와 비교할 때 다른 구멍들은 부차적/부수적이거나 사소한 듯하며, 나는 이 문단에 대해서만 주로 군말을 채워넣기로 하겠다.

이 문단에서 나는 로고스에 대한 모종의 유형학을 제시하고 있는데(‘로고스’는 이성, 논리, 언어를 포괄하는 말로 사용하겠다), 나열된 걸로만 따지자면 로고스에는 철학적 로고스도 있고, 소설적/시적 로고스도 있다(다른 문단에서 ‘과학적 로고스’도 언급했지만, 여기선 생략한다). 그리고 그러한 전제하에서라면, 소설적/시적 로고스(‘문학적 로고스’라고 통칭하겠다)의 포함 유무에 따라 (내가 보기엔) 철학의 두 가지 유형이 가능하다. (1)철학=철학적 로고스, (2)철학=철학적 로고스+문학적 로고스. 그러니까, 인용한 문단은 그러한 유형학을 풀어서 얘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첫번째 유형의 사례로 후설의 현상학과 초기 분석철학(전기 비트겐슈타인과 논리실증주의)을 들었고, 두번째 유형의 사례로 들뢰즈, 데리다, 후기 하이데거, 레비나스 등을 들었다(흔히 ‘철학의 미학화’라고 비판받기도 하는 유형이다).

나는 이 두 유형 사이에 어떤 우열을 가정하지 않았다. 내가 주장한 건 이 두 가지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건 반대로 문학의 경우에도 두 가지 유형이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1)문학=문학적 로고스, (2)문학=문학적 로고스+철학적 로고스. 문학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를 모두 구성인자로 갖고 있음에도, 어떤 경우엔 철학이 되고 어떤 경우엔 문학이 되는가란 질문이 가능한데, 나는 각각의 경우에 (야콥슨의 용어를 쓰자면) ‘지배소(dominant)’가 다른 거라고 답하겠다(쉽게 말하면, 방점이 다른 것). 해서, ‘문학적인 철학’(실존주의가 대표적이다)이 있는 반면에, ‘철학적인 시/소설’(릴케나 퐁주의 시, 혹은 투르니에나 아이리스 머독의 소설을 예로 들 수 있을까)도 있는 것이다.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를 양 극점으로 놓는다면, 철학과 문학의 이 네 가지 유형은 스펙트럼화될 수 있다.

<철학적 로고스 – 철학적/문학적 로고스 – 문학적/철학적 로고스 – 문학적 로고스>

이러한 스펙트럼이 갖는 장점은 철학과 문학의 관계를 (단선적으로가 아니라) ‘중층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즉 철학이냐 문학이냐라는 이분법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 더불어, 너무 철학적이라거나 문학적이라는 이유로 각각의 ‘동네’에서 배제되는 ‘경계적’ 작가/철학자들을 이러한 구도에서는 정당하게 고려할 수 있다(가령, 니체의 경우).

흔히 이성이나 논리와 동일시되는 로고스를 언어적 차원에서 재규정할 경우에, 스펙트럼의 양 극단에 놓이는 것은 ‘기의-논리의 극대화’와 ‘기표-논리의 극대화’이다. 기의-논리가 극대화된 지점에서 우리는 자연어에서 기표성을 배제한, 아니 자연어 자체를 배제한 기호논리학의 세계를 만나게 되며(‘자연어’란 한국어, 영어, 일어 같은 개별 언어를 말한다), 기표-논리가 극대화된 지점에서 우리는 자언어의 기의성을 최대한 배제한 (기표의) 순수유희를 만나게 된다(가령 칼리그람이나 철자시). 전자는 세탁기처럼 기표의 때를 계속 세탁해대며(그렇게 해서 언어를 ‘흰 빨래’처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내가 이해하는 ‘백색의 신화’이다), 후자는 단어에 폭탄을(아니면 쓰레기통이라도) 갖다 퍼부음으로써, 기의를 증발시키거나 해체시킨다.

즉, 극단적으로는 철학적 로고스가 자연어를 인공어화 하려는 지향성을 갖는다면 문학적 로고스는 자연어를 자움어(러시아 미래파의 표현을 빌자면 ‘새의 언어’)화 하려는 지향성을 갖는다('자움'은 '초이성'이란 뜻이다). 가령,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란 동요에서 리듬을 만들기 위해 들어간 “나리 나리”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기에 철학적 로고스의 관점에선 불필요한 ‘잉여’이지만, 문학적 로고스의 관점에선 오히려 필수적인/본질적인 ‘요소’이다. 더불어 지난 통신문의 제목을 만들어준, 나보코프의 칼람부르 ‘dental and transcendental’은 철학적 로고스가 보기엔 불쾌한 넌센스에 불과하겠지만, 문학적 로고스가 보기엔 유희적 ‘통찰’을 담고 있다. 거기에서 암시되는 바이지만, 언어의 유형학 또한 하나의 스펙트럼을 구성한다. 그건 아래와 같다.

<인공어(=기호) - 자연어 - 시어 - 자움어(=새의 언어)>

‘2차 모델화 체계’(유리 로트만)로서의 문학어는 자연어를 재모델화, 재코드화한 것이다. 그러한 재모델화/재코드화의 방식은 다양해서, 장르나 문체, 기법 등을 포괄한다.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슈클로프스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문학)이란 기법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로트만에 따르면, 이 기법에는 또 플러스(+) 기법과 마이너스(-) 기법이 있다. 문학이론도 깊이 들어가자면 나름대로 복잡한데, 여기선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조금 단순화시켜서 말하자면 문학이란 자연어를 낯설게 사용한 것이다(해서, 지각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오브제를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함으로써 미적 효과를 창출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공통적인 건 어떤 형태(form)에 대해서 사고한다는 점이고, 그런 점에서, 문학은 조형예술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미국의 신비평가들은 시를 ‘잘 빚어진 항아리’에 비유했다).

문학적 로고스는 기본적으로 언어의 조형화, 혹은 조형적 언어를 통해서 의미를 산출한다(야콥슨을 따라서 좀 어렵게 말하자면, 그것은 통합체적인 언어를 계열축에 따라 투사한다). 즉, 문학은 어떤 조형적 입체이며, 거기서 중요한 건 볼륨이다. 언어는 문학적 로고스 안에서 자신의 풍만함을 자랑한다(철학에 코기토가 있다면 문학에는 코르셋이 있다).

반면에 철학적 사유의 근간은, 그것이 형식논리(아리스토텔레스)이건 변증법적 논리(헤겔)이건 간에 논리에 있으며(해서 ‘논증’은 철학적 로고스의 가장 중요한 구성소이다. 논리는 철학의 정신을 구성하는 ‘뼈다귀’이다), 논리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order)이다(문학의 언어가 주로 분칠하고 치장하는 언어라면, 철학의 언어는 명령하고 주문/요청하는 언어이다). 똑 같은 언표들이라도 배치순서가 바뀌면 (문학에서는 새로운 의미가 창출되지만) 철학적 논리는 한순간에 비논리 혹은 모순으로 전락한다(예컨대 3단논법의 논항들을 뒤섞어보라). 그러한 논리가 지향하는 것은 모순의 배제 혹은 지양이다. 의미론적 차원에서 논리적 모순의 등가물은 넌센스(무의미)이다. 때문에, 어떤 철학적 논증/저작에 대해 ‘넌센스’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 된다(가령, “그게 말이 되냐?”) 반면에 문학에서의 ‘넌센스’는 그 자체가 하나의 기법이자 전략이며, 장르, 더 나아가 사조를 이루기도 한다.

철학적 논리를 구성함에 있어서 순서가 중요하다고 하면, 철학적 담론의 구성인자가 되는 언어에 대해서 엄격한 훈령이 하달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른바 ‘동작 그만!’이 요구되는 것이다. 해서, 풍만한 문학이 ‘언어의 카니발’을 떠올리게 한다면, 강파른 철학은 ‘사유의 학교’(야스퍼스)를 넘어서 ‘사유의 군대’이기도 하다(우리가 학교 졸업하면 군대 가듯이). 그리하여 좋은 문학이 우리를 도취시키는 문학이라면, 좋은 철학은 우리에게 어떠한 빈틈도 내보이지 않는 깐깐한 철학이다(칸트에게, 헤겔에게, 스피노자에게 빈틈이 있던가?). 이러한 철학이 요구하는 언어는 당연히 바지춤 추스르기에도 바쁜 어영부영하는 자연어가 아니라 깍두기 머리에 자세 제대로 나오는 보편어 혹은 인공어이다(JSA 출신인 한 후배는 요새도 자세가 나온다).

 

알다시피, 철학사에서 그러한 보편어의 역할을 해온 것이 중세와 근세의 라틴어였고, 요즘은 영어이다(아마도 독어가 넘버2 정도이고). 해서, 적어도 국제적인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아니 하다 못해 철학 전공이라고 명함이라도 내밀기 위해서는 영어로 책이나 논문을 써야 하는 것(한국어로 논문을 쓴 철학박사들? 그들도 최소한 번역투의 문장으로 논문을 써야 한다. 영어나 독어에서 바로 번역한 듯한 논문. 즉, “이게 원래는 한국어 논문(수준)이 아닙니다”는 걸 보여주고 암시하는 논문 말이다). 이때 영어는 일개 자연어가 아니라 특별한 자연어, 즉 보편어로서의 위상을 점유한다(미국이 일개 국민/민족국가 레벨을 넘어서듯이). 그러니 다들 철학은 주로 미국에서(혹은 독일에서) 공부하는 것이며(러시아 철학 전공자는 내가 아는 한 한 명도 없다), 철학을 말할 때는 영어나 독어를 반드시 병기해야 하는 것이다(한국어라는 자연어는 철학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 미국철학회 회장까지 역임한 재미철학자 김재권의 경우, 미국의 철학과 대학원생들에게 철학논문 문장의 모범으로 제시될 정도로 탁월한 영어를 구사하는데, 대학생 때 미정부 장학생으로 유학을 떠난 그가 한국어를 거의 망실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한국어라는 자연어가 그의 ‘보편적’ 사고에 거의 ‘간섭’을 하지 않는 것). 나는 대학 1학년때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들>(심재룡 편)이란 책을 읽었었는데, 거기에 수록된 글에서 김재권이 강조한 것은 한국에서 철학하는 ‘보편적’ 자세였다. 즉, 철학함에 있어서 국적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 그 국적이란 건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언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철학함에 있어서 자연어의 구속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 왜냐? 철학의 문제들이란 보편적이기 때문에(하지만, 그에게 자연어인 영어는 동시에 보편어이기도 하다는 걸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분석철학 계통의 심리철학 권위자인 김재권의 ‘보편적 문제’란 심신문제, 즉 ‘mind-body problem’이다. 주로, 마인드(=심리현상)와 바디(=물리현상) 간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 형식논리상으로 기본적인 입장은 둘로 나뉜다. 관념론(마인드는 바디와는 별개로 ‘실재’한다)과 유물론(마인드는 부재하거나 바디에 수반되는 현상이다). 물론 각각의 입장은 다시 세분되며(가령, 유물론은 환원적 유물론과 비환원적 유물론으로 나뉠 수 있다) 김재권은 자신이 제창한 ‘수반이론’으로 유명한데, 분류하자면 ‘환원적 유물론’에 속한다(내가 이해한 대로 얘기하자면, 기본적으로 심리현상은 물리현상으로 환원가능하며, 물리현상에 수반되는 현상이라는 것).

나는 그의 주장에 많은 부분 동의하지만, 그 동의는 ‘심신문제’라는 (임의적인) 문제틀을 고수하는 한에서이다. 그 문제틀의 임의성에 대해서는 언젠가 김재권의 내한 강연을 언급하면서 김용옥이 지적한 것인데(아마도 무슨 TV강연에서였다), 가령 기(氣)철학적 세계관 혹은 논리에 선다면, 마인드와 바디라는 별개의 ‘실체’는 인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마인드가 바디에 수반된다든가 하는 논리도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된다(우리말의 ‘몸’/‘맘=마음’ 또한 마인드/바디와는 다른 ‘논리’를 갖고 있다). 김재권은 심신문제의 보편성을 주장하지만, 그의 수반이론이 진지하게 수용/검토되는 것은 (제도적으로) 영미권의 분석철학계 내에서일 뿐이다(혹은 그러한 문제틀이 ‘이식된’ 한국 대학의 철학과도 포함될는지 모른다).



물론 수반이론은 대단히 ‘논리적인’ 이론이며, (비판도 허용하지만) 설득력 있는 이론이다. 하지만, 이론의 논리성이 반드시 문제틀의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그건 나름대로 재미있는 ‘미식 축구’가 ‘재미의 보편성’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 수반이론을 말하고 김재권을 대단한 철학자로 추켜세우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이론이 보편적이거나 최고의 심신이론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한국인, 적어도 한국계 철학자이기 때문이다(비록 그가 한국어를 거의 잊었다고 하더라도).

김재권이 분석철학계의 가장 저명한 한국인 철학자라면 현상학계에서 대가급으로 인정받는 한국인 철학자는 역시 미국과 독일에서 활동하는 조가경이다(훨씬 아래 세대로는 분석철학의 이승종, 현상학의 이남인 정도가 유명한 듯하데, 공통적인 건 영어/독어로 책을 썼다는 것). 그의 초기 주저가 한국어로 쓴 <실존철학>인데, 이후에 외국으로 떠난 그가 독어, 혹은 영어로 써서 명성을 얻은 책들은 내 기억에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

20세기 전반기 서구철학의 가장 대표적인 두 조류가 현상학과 분석철학이라고 할 때, 두 한국인 철학자가 관련학계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물론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둘 것은 두 사람이 ‘한국인’ 철학자일 뿐이며, 자연어로서의 ‘한국어’가 걸려있는 ‘한국철학’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그건 ‘한국인 문학’이 ‘한국문학’과 별개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두 사람은 한국어 철학, 즉 자연어 철학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인데, 사실 그러한 문제의식의 결여/부재는 현상학과 분석철학의 철학적 입장/강령에 기본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결여/부재가 새겨져 있다?).

 

20세기 서구철학을 흔히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로 특징지을 때(한때 분석철학계의 기린아였던 리처드 로티는 <언어적 전회>란 책을 편집하기도 했다), 그것이 주목한 것은 사유와 언어의 관계, 보다 구체적으로는 사유에 있어서 언어의 매개성이었다. 아주 당연한 듯하지만, 우리는 ‘언어’로 사유한다는 것. 즉, 사유의 언어-의존성에 대한 자각이 ‘언어적 전회’의 일차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이때의 언어란 바로 ‘자연어’로서, 그리고 ‘일상어’로서의 개별 국어이며, ‘언어적 전회’는 이 자연어/일상어의 ‘존재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태는 정반대로 간다. 언어-의존성에 대한 자각의 이면은 이러한 자연어/일상어의 ‘병리성’에 대한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사유는 자연어로 이루어지는바, 철학적 사유가 오류를 범하는 주된 이유가 그 자연어의 병리성(=결함)에 있는 게 아닌가 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비유컨대, 철학적 작전이 매번 실패하는 원인이 ‘병력 자원’의 부실에 있다는 걸 사단장-철학이 알게 된 것. 이후에 대대적인 군기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건 아주 당연하다(아예 “적은 우리 안에 있다!”고 선언하면서).

 

 

 

 

철학의 과제가 ‘언어비판’, 더 나아가 ‘언어치료’에 있다고 하는 주장은 이러한 사정을 잘 요약한다(주객이 전도된 것이지만, 분석철학은 전투의 승리가 아니라 사병-언어의 닦달에 더 관심을 두게 된다. 맥아더-비트겐슈타인은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해소’일 뿐”이라는 어록까지 남기며 철학계에서 잠시 사라지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다시 등장하는 것이 기호로서의 인공어이다. 철학논문은 가급적 기호논리와 명제함수, 수식 등으로 가득 채우고, 자연어는 가급적 배제할 것(비유컨대, 이러한 인공어들이 ‘특전사’라면, 자연어는 ‘방위병’이었다). 철학은 점점 소수정예화하며, 자신들의 은어만으로 소통하게 된다. 그런 틈바구니 속에서 방위병-자연어의 애환이 무시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한편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이 직면했던 문제는 영미의 분석철학과는 다소 달랐다. 한전숙의 <현상학>(민음사)에 소개된 일화에 따르면, 어릴 적에 후설은 무슨 공이 같은 걸 죽창 갈아서 송곳을 만드는 일에 몰입했다. 이런 케이스를 의대생들은 흔히 ‘옵세(obsessed)’라고 부르는데, 저자는 후설의 ‘라디칼리즈무스’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든다. 중도적인 입장에서 내가 현상학을 정의하자면, 그건 ‘Obsessed Radicalism’쯤 되겠다(‘강박적 급진주의’ 혹은 ‘강박적 근본주의’?). 왜 근본적/급진적이냐면,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을 다시 정초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로티의 분류에 따르면, 현상학 또한 정초주의적 철학에 속한다. 정초주의적 철학들이 목을 매는 것은 철학의 확실한 토대, 곧 ‘확실성’이다. 어떠한 ‘지진’과 ‘해일’로부터도 자유로운. 혹은 그럴 거라고 착각하는).

자세한 내막을 알지는 못하지만(주저인 <논리연구>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 그러니, 현상학에 대해서 한마디 하려면 그 방대한 저작을 영어나 독어로 읽으라는 것. 나는 <현상학> 입문서나 <현상학적 운동> 같은 책을 참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러시아어로는 후설이 제법 번역돼 있다), 후설은 수학적 대상들이 논리적인 것이냐(=논리주의) 심리적인 것이냐(=심리학주의)는 논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제3의 것이라는 걸 입증하고자 했는데, 주로 그의 문제의식은 당시에 대두하던 심리학으로부터 철학 고유의 영역을 발견/보존하는 것이었다(당시 늙은 철학은 학문계의 새로운 강자인 심리학과 ‘의식’이란 방을 같이 쓰게 됐으므로 자기-갱신이 요구됐던 것. 철학의 회춘).

상식적인 얘기를 좀 늘어놓자면, 그렇게 해서 그가 발견한 것이 ‘지향적 의식작용’(=노에시스)과 ‘지향적 대상’(=노에마)이다. 지향적 의식이란 건 특정 개인의 심리상태나 의식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초월적 의식’이고(<논리연구>와 거의 동시에 나온 책이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인데, 현상학은 철저하게 ‘의식철학’이라는 점에서 ‘무의식의 과학’인 정신분석학과 대비된다. 현상학적 입장에서 프로이트를 수용한 것이 사르트르의 실존적 정신분석이다. 그는 무의식을 ‘자기기만’이자 ‘넌센스’로 간주했다), 지향적 대상은 그러한 의식에 현상하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실제 대상을 넘어서는 ‘초월적 대상’이다.



어떤 개별적 의식이 어떻게 초월적 의식이 되는가? 그건 옵세적 ‘집중’을 통해서이다. 공이를 갈아서 송곳을 만들듯이 한 가지 일에 집중하다 보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텅빈 상태가 된다. 멍청하게 되는 거지만, 좋게 얘기하면 사심(私心)으로부터 자유로운 ‘맑은 연못’처럼 된다(현상학과는 좀 다른 방식이지만, 롤즈의 <정의론> 또한 그런 식의 ‘맑은 연못’, 혹은 백지상태로의 환원을 상정한다. 정의의 조건으로서). 그 ‘맑은 연못’이 초월적 의식이다. 그건 개별적인 의식과 무관하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의 상관물로서 연못에 비치는 것이 초월적 대상이다. 이제 그렇게 비친 것이 대상의 본질이며 그것을 ‘그대로’ 기술하는 것, 그게 현상학적 기술이다.

대학 1학년 첫학기에 들은 종교학 강의에서 ‘종교현상학’에 정통하던 담당교수는 현상학의 예로 “독서백편 의자현(讀書百篇 意自現)”이란 한문 구절을 들었다. 책을 백번(백편?) 읽으면, 뜻이 저절로 나타난다는 것(현상학적 연애술? 백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책을 백번 읽는 게 말하자면 ‘송곳 갈기’이고, 지향적 의식작용이다. 그러면, 먹물 뿌려놓은 글자들(=실제 대상)에서 ‘뜻’이라는 지향적 대상이 우리의 머리속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옳거니, 그거로군!”).

사실 여기까지는 방법론상으로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그러한 지향적 대상을 ‘그대로’ 기술하는 것. 무엇으로? 자연어로! 후설의 철학적 작전은 나무랄 데 없지만(제갈공명 뺨 치지만), 작전을 실행할 병사들(=방위병들!)을 그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비유컨대, 분석철학은 훈련만 뭐빠지게 하고, 현상학은 작전만 아주 열심히 세운다. 해서 분석철학엔 작전이 부재하고, 현상학은 병사들이 부실하다). 그의 관심은 주로 언어보다는 의식이며, 언어 이전의 경험에 집중돼 있는 것이다(이것이 내가 후설이 ‘언어적 전회’ 이전의 철학자라고 보는 이유이다).

 

 

 



지난번 통신문에서 사르트르의 <구토> 얘기를 잠깐 했지만, 이 소설은 셀린느의 소설 외에도 후설의 현상학이 없었더라면 씌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1933년(28세) 베를린에 있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불어를 가르치면서 1년간 체재하는데(레이몽 아롱이 부추겼다던가?), 거기서 후설의 현상학을 접하고 폭 빠지게 된다. 아마도 후설을 오래 사숙했더라면, 후배인 메를로-퐁티처럼 ‘정통’ 현상학자가 됐을지도 모르지만(메를로-퐁티는 벨기에의 루뱅에 있는 후설-아카이브에서 후기 후설의 원고들을 직접 열람하고 <지각의 현상학>을 구상한다), 사르트르는 살짝 현상학의 맛만 보고 돌아오기 때문에(혹은 폼만 잡고 돌아오기 때문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현상학을 전개하게 된다. 그게 <상상력>과 <존재와 무> 등의 저작으로 출현하게 되고.

이 사르트르(혹은 로캉탱)의 지향적 대상은 주로 잉크병이나 물컵 종류이다. <구토>는 시작에서부터 현상학적 집중/환원을 시연(試演)해 보이는바, “예를 들어 여기에 나의 잉크병이 든 종이 상자가 있다고 하자. 내가 ‘전에’는 그것을 어떻게 보았으며 지금은 그것을 어떻게… 그런데 그것은 직육면체요 테이블 위에…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런 것이라면 아무 할말이 없다. 바로 그런 일을 피해야만 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신기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구토>, 하서, 5-6쪽)

로캉탱의 말을 빌어오자면, 현상학은 현상학적 환원이란 절차를 통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을 신기하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다. 그것은 잉크병 하나, 맥주병 하나에 대해서도 책 한권 분량을 써낼 만한 ‘꺼리’들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현상학이 아니라면 <존재와 무>는 분량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상학이 그런 꺼리를 제공해주지 못하는 구석이 있으니, 대표적인 것이 ‘역사’이다(‘역사현상학’이라고 최근에 좀 개척되는 듯도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는 지향적 대상으로 삼기에는 너무 덩치가 크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시간 경험이나 지각 경험 따위는 자신의 직접적인(내밀한) 경험의 대상으로서 ‘현상학적 환원’이 가능하다(후설이나 하이데거나 다 ‘시간’만을 존재의 중요한 범주로서 다루었다. 그건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를 어떻게 환원하는가? 역사는 어디에 있는가? 더불어, 현상학은 현실의 긴급성에 대응하지 못한다. 송곳이 될 때까지 갈아야 하고, 뭐가 나타날 때까지 백번을 보거나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라크 폭격 장면을 백번쯤 반복해서 보면 혹 모르겠다, ‘미 제국주의’라는 뜻이 노에마로서 현상하는지도...

 

나는 앞에서 언어적 전회의 내용이 사유의 언어-의존성에 대한 자각이면서 동시에 (철학어로서) 자연어의 자격미달(=병리성)에 대한 인식이었다고 했는데, 그럴 경우 그에 대한 방책으로서 두 가지 방향성이 주어진다. 왼쪽으로도 갈 수도, 오른쪽으로 갈 수도 있는 것. 비유컨대, 방위병-자연어/일상어에게는 두 갈래 길이 놓여 있다. 특전사-인공어로의 길과 당번병-시어로의 길(특전사와 ‘특권층’인 당번병은 무시당하지 않는다).

<인공어 ← 자연어 → 시어>

(1)<자연어→인공어>라는 방향은 이미 라이프니츠가 주장한바 있는데, <논리-철학논고>의 비트겐슈타인이나 비엔나학파(논리실증주의)의 철학자들이 선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어중이떠중이들의 언어(=일상어)에 오염되지 않은 언어로 통해서 ‘건강한’ 사유가 구축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수축주의적 방향은 언어-의존성이란 문제를 횡단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는 것이다(반면에 현상학은 언어-의존성이란 문제를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인간이 너무 잡다한 종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성찰을 아바타나 사이버 모델에 의존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2)<자연어→시어>라는 방향은 후설의 수제자였지만, 현상학에서 존재론으로 ‘전향’함으로써 후설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하이데거에서 사례를 찾을 수 있다(‘우리말로 철학하기’에 나선 이기상 교수가 하이데거 전공자인 것은 자연스럽다). 어차피 사유가 언어-의존적이라면, 최상의 언어, 최고의 언어를 사유의 질료로 삼아야 한다는 건 자연스러운 요구이다. 그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할 때, 그 언어는 ‘일요일의 언어’인 시어인 것이다. 은유적인 언어가 개념어보다도 더 탁월한 사유의 질료라는 걸 입증해 보인 니체의 경우도 이러한 계보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문학적 대상의 이념성’이라는 후설적 주제의 박사학위논문을 구상했지만(‘철학자 데리다’에 대한 정치한 분석서를 쓴 로돌프 가셰는 데리다에게 가장 중요한 철학자가 후설이라고 말했다), 끝내 완결짓지 못하고 그라마톨로지와 차연의 세계로 넘어가게 되는 데리다의경우도 하이데거와 유사한 ‘전향’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데리다 전문가로서 김상환 교수가 가장 유려한 문체를 자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데리다 전문가가 글을 못쓴다는 건 넌센스이다). 지향성이나 이념성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는 언어인 것이다(사실 언어와 철학이란 문제는 훨씬 방대한 규모의 논의를 필요로 한다. 이런 정도의 글은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언젠가 나는 이 문제와 정면대결할 기회가 오기를 기대한다. 방위병들을 데리고?).

대략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서두에서 ‘구멍’으로 제시한 문단을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한편,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에 대한 참조 없이 철학적 로고스만으로도 철학은 구성될 수 있다(주로 수학/논리학에서 바탕을 마련하고 있는 후설의 현상학이나 초기 분석철학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일단 나의 방점은 철학적 로고스만으로도 철학이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며, 괄호안의 내용은 그 사례이다.

 

 

 

 

러셀은 자신의 <서양철학사>에서 서양철학자들을 신학적 계보와 수학적 계보로 구분한바 있다. 그에 따를 때, 후설이나 비트겐슈타인 등은 모두 수학적 계보에 속한다. 나는 후설의 현상학이 수학/논리학에서 바탕을 마련하고 있다는 지적이 어떤 근거에서 무리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가 현상학적 환원의 사례로 자주 드는 것도 삼각형 같은 것인데 말이다(어떠한 변양에도 동일성이 유지되는 이상형/이념형으로서의 삼각형이 삼각형의 노에마이다). 사실, 후설에 대한 관심은 일차적 관심이 아니라, 하이데거나 데리다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이차적 관심이다. 내가 직접적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철학자에 대해서 여러 말을 늘어놓지 않겠다(그런 후설이 내게 지향적 대상으로 현상할 리도 만무하고).

그리고 이어서, “하지만,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를 끊임없이 참조함으로써 자극과 영감을 얻는 철학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들뢰즈, 데리다, 후기 하이데거 등을 단번에 꼽을 수 있으며, 사르트르도 물론 여기에 포함된다. 더불어 도스토예프스키와 탈무드로부터 근원적인 영감을 얻고 있는 레비나스의 윤리학까지).” 이제껏 해명해 온 것이니 여기서도 이해하기에 억지스러운 대목은 없어 보인다(에스토니아 태생의 레비나스는 어린시절 읽은 러시아 문학에 깊은 감화를 받았음을 고백한다).

나는 두 가지 유형의 철학에서 어떤 우열을 가정하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두번째 유형, 즉 소설적 로고스/시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의 교합으로 이루어진 철학(그건 문학이어도 무방하다)에 애착을 갖고 있다(나는 이미 지난번 통신문의 말미에서 갈채와 꽃다발을 던진바 있다). 때문에, 사르트르와 데리다가 나의 ‘영웅’이었던 건 우연이 아니다. 나는 로고스의 마임극을 사랑하는 것이다… 

 

 

 

 
P.S. 짧게 마감하려고 했던 글이 본의 아니게 또 (예상보다) 길어졌다. 좀 딱딱한 글이었던 것 같아서 시 한편을 옮겨둔다. 오규원의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이다(언젠가 한번 인용한 적이 있다). 아마도 ‘한국현대시와 현상학’이란 테마의 평문을 쓴다면, 내 생각에 오규원은 가장 먼저 거론돼야 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다만, 그의 주된 관심은 의식과 대상이 아니라 현상과 언어이다). 그는 사르트르가 잉크병을 바라보듯이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를 바라본다. 아마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으리라. 세보고 또 세보았으리라. 그리고 그걸 기술한다. 정확하게 있는 것들만. 정확하게 반짝이는 것들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들, 하지만, 없지 않고 차라리 있는 것들이 때로 정겹고 그냥 아름답다. 비록 깨어져 있더라도.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플라타너스가 쉰일곱 그루, 빌딩의 창문이 칠백열아홉, 여관이 넷, 여인숙이 둘, 햇빛에는 모두 반짝입니다.

대방동의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양념통닭집이 다섯, 호프집이 넷, 왕족발집이 셋, 개소주집이 둘, 레스토랑이 셋, 카페가 넷, 자동판매기가 넷, 복권 판매소가 한 군데 있습니다. 마땅히 보신탕집이 둘 있습니다. 비가 오면 모두 비에 젖습니다. 산부인과가 둘, 치과가 셋, 이발소가 넷, 미장원이 여섯, 모두 선팅을 해 비가 와도 반짝입니다.

빨간 우체통이 둘, 학교 담장 밑에 버려진 자전거가 한 대, 동작구 소속 노란 소형 청소차가 둘, 영화 포스터가 불법으로 부착된 벽이 셋, 비디오 가게가 여섯, 골목에 숨어 잘 보이지 않는 전당포 안내 표지판과 장의사 하나, 보도 블록 위에 방치된 하수도 공사용 대형 원통 시멘트관 쉰여섯이 눈을 뜨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표 가변 차선 표시등 하나도!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한 줄에 아홉 개씩 마름모꼴로 놓인 보도 블록이 구천오백네 개, 그 가운데 깨어진 것이 하나, 둘…… 여섯…… 열다섯…… 스물아홉…… 마흔둘……

 

P.S.2. 이 ‘깨어져 있음’에 대한 관심이 내게 빈틈없는 철학적 로고스보다는 문학적 로고스에 끌리도록 만든다(‘빈틈없는 것들’이 철학적 로고스에 끌린다면, ‘깨어진 것들’은 문학적 로고스에서 안식을 찾는다). 우리는 거기에 그렇게 깨어져 있는 것들이다.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 즉 ‘거기에 있음(being-there)’을 비틀어서 말하자면, 우리는 ‘거기에 깨어져 있음(being-broken-there)’이다. 그렇게 ‘널브러져 있음(being-scattered-there)’이다. 그렇게 ‘찌그러져 있음(being-battered-there)’이다. ‘모어-베터-블루스(More better blues)’를 들으며(이 ‘blues’에 군복이란 뜻도 있다는 건 아이러니이다)... 그렇게 (얼룩덜룩) ‘희미해져 있음(being-blured-there)’이다. 그렇게 ‘어색해져 있음(being-awkward-there)’이다.

 

 

 

 

“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보여주긴 싫었어…”를 흥얼거리며, 신병반(awakward squard)으로 들어갔었지… 몇 달이 지나고 나는 당번병 방에서 <자기 앞의 생>을 읽었지. 거기서 제대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기다리고 있음(being-waiting-there)’. 그리고 또 몇 달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고 나는 출근하는 대신에 시립도서관에 가서 <농담>을 빌려와 읽었지. 그리고는 이렇게 물어보았어. “O my life, o my God, you have to be joking?!” 그러더니 쩝쩝, 아직도 이런 농담을 쓰고 있네, 젠장...

06. 0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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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4-26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님 철학의 어떤 분야 강의하세요? 궁금궁금.

로쟈 2006-04-26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문학강의 하는데요(--;)...

마늘빵 2006-04-26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로쟈님 철학 전공 아니셨나요? 아 러시아 문학이세요? 엄... 온갖 철학자들을 다 다루셔서 철학전공하신줄 알았어요.

로쟈 2006-04-26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적 농담'이 부전공입니다...

마늘빵 2006-04-26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대단하신 내공이십니다.

로쟈 2006-04-26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농담에도 내공이 필요하긴 합니다. 거울 보면서 매일 연습합니다.^^

2006-04-27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akeaftermopo3 2021-09-29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시다는 말밖에는 ...
 

내일, 곧 4월 26일은 지난 1986년 구소련(현재는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에서 원전 폭발 사고가 일어난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작년 이맘때 이런저런 관련 자료들을 검색해본 일이 있는데, 어느 새 1년이 흘렀다. 따로 준비한 건 없고, 대신에 녹색연합의 블로그에서 '체르노빌, 잊지 못할 이름'이란 글을 옮겨온다. 열심히 준비한 글이며 필자는 김미영 활동가이다. 문단조절이나 원문에 첨부된 2장의 사진 외의 이미지 부가 등은 모두 나의 조작이다.

-며칠 전부터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대한 기사가 드문드문 보이더니 사고 당일인 26일에 가까워오자 버스 안 라디오 뉴스에서도 그 원전 사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체르노빌에 관한 글 한편을 써보겠다고 다짐한 이후 체르노빌이란 글자만 들어도 귀가 솔깃해지고 그 글자가 들어간 잡지도 여느 때와 달리 제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올해가 20주기 되는 해인지라 다른 때보다 기사가 더 많은 이유도 있겠지만 역시 관심이 있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체르노빌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 사고가 있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던 저는 올해가 그 사고가 일어난 지 20년 째 되는 해라는 것도 최근에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사고가 왜 일어났으며 어떻게 진행되었고 후에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인터넷과 잡지 신문을 토대로 제가 나름대로 쌓은 내용을 지금부터 나누려고 합니다.

-체르노빌은 그 당시의 구소련, 지금의 우크라이나의 한 도시입니다. 1986년 4월 26일 이른 새벽 1시 경에 체르노빌 원전에서는 출력을 낮추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총 4개의 원자로 중 제 4호기에서 그 실험은 진행되었는데 사고 전까지는 가장 좋은 운전실적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실험이 원자로에 주게 될 부담과 안정성에 대한 검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운전 담당자와 안전 담당자가 충분히 정보를 교환하지 못한 관계로 실험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불행히도 운전원들이 자동정지 장치를 꺼버리는 실수로 인해 원자로 출력은 순간적으로 치솟았고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열이 발생하여 핵연료는 녹아내렸습니다. 이어서 뜨거운 핵연료와 물이 만나 증기폭발이 발생하였고 추가적인 폭발로 인해 원자로 및 건물의 지붕까지 날아가 버리는 대형사고가 터지게 된 것입니다.



-그 폭발 당시 원전의 모습이 어떠할지는 상상할 수 있을까요? 기록에 따르면 방사성 파편, 흑연조각(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는 감속재로 흑연을 사용하게 설계되었습니다), 먼지 등이 거대한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저는 텔레비전이나 책에서 핵실험 시 생기는 거대한 버섯구름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모습을 상상해보았습니다. 진화작업으로 수천 톤의 납과 모래를 부었지만 거대한 불길은 열흘이 지나서야 잡혔습니다. 당시 발전소에 있던 연구원들이나 관리요원들이 사망하거나 방사능에 노출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진화작업을 하던 소방요원들도 그대로 방사능을 뒤집어썼습니다.



-사고 후 소련의 대처방법은 사고만큼이나 끔찍합니다. 인근 다른 국가들은 물론 체르노빌 주변 지역의 주민들도 전혀 사고 소식을 몰랐다고 합니다. 방사선 물질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에서 평소와 마찬가지로 밭을 일구고 야외파티를 하고 운동을 했겠지요. 스웨덴 과학자들이 평소보다 높은 농도의 방사능을 감지하고 바람방향을 이용해 역추적을 한 결과 사고의 존재가 외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소련은 원전 사고를 시인했고, 상세한 내용을 발표한 것은 2주일이나 지나서였습니다.

-주변 지역 사람들은 공포에 빠졌고 되도록이면 사고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소련은 서둘러 사고를 수습, 오염을 제거하려고만 하였고, 이는 오히려 피폭 피해를 더욱 가속화하였습니다. 현장정리에 제대로 된 안전장비 없이 동원된 사람들이 모두 80만명에 이른다고 하니, 그 당시 소련의 사고 대처는 슬프기까지 합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에 대한 현재 사람들의 관심사는 사고 피해가 어느 정도이고, 얼마나 지속될 것이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입니다. 체르노빌 주변지역에는 유독 기형아출산율과 암 발생률이 높습니다. 기형적으로 머리가 큰 어린이 사진, 갑상선 수술 후 목에 난 수술자국을 보여주는 소녀 사진, 기운 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 사진을 보면 인간이 고안해낸 기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주변국인 영국, 스웨덴 등지에서도 고농도의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었습니다.

-피해 규모 통계 자료는 조사단체마다 너무나 다르게 내어 놓고 있습니다. 최근에 그린피스가 내 놓은 조사 자료에 의하면 20년 전의 이 사고로 인해서 앞으로 발생할 암이 27만 건이라고 합니다. 덧붙여서 그린피스는 그중에서 약 10만 건은 무척이나 치명적일 것이라는 전망을 하였습니다.  유엔의 자료는 또 다릅니다. 4만 명이 암에 걸릴 것이고 그 중에서 1만 6천명은 갑상선암으로 고통 받을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습니다.

-암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방사선에 노출되었다고 해서 바로 암에 걸리는 것도 아니라서 정확한 통계를 내기란 어렵겠지요. 하지만 사고 지역과 가까운 벨로루시에서 사고 이후에 갑상선 암 발생률이 30배나 높아졌다는 일례만 보더라도 원전사고로 인한 방사선 유출이 인체에 치명적인 것은 분명합니다. 암 뿐만 아니라 성장장애, 노화촉진, 정신질환, 기형아출산 등 그 피해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아직도 그 곳 주민들에게 남아있습니다. 향후 30년간은 계속 추이를 지켜봐야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그리고 방사능을 피해서 고향을 떠나야했던 슬픔, 피폭된 자들이라고 낙인 찍혀야했던 삶의 고통은 수치화 할 수 없겠지요.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일까요? 사고가 일어난 후 소련은 인근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지금은 그곳에서 허가받은 사람들만이 외부로부터 오염되지 않는 식품과 정기건강검진을 제공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땅은 사고 당시 방사능 물질을 그대로 안고 있습니다. 20년이 지났지만 방사능의 양이 그대로 남아있는 지역이 대다수라고 합니다. (방사능의 반감기는 물질에 따라 평균 30년 정도) 이곳의 숲, 강에서 잡히는 동식물들의 방사성물질은 먹이사슬을 타고 인간에게까지 충분히 올 수 있습니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로 반핵의 움직임이 크게 일었습니다. 그러나 유가는 계속 올라가고 기후변화 협약으로 이산화탄소를 절감해야하는 과제를 떠안자 너도나도 다시 핵에너지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각자의 입맛에 맞는 통계자료를 들이대며 서로의 입장을 정당화 시킵니다. 과학자들은 지금도 연구실에서 좀 더 안전한 방식의 핵발전 방식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한국수력원자력 역시 가동되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와는 가동 방식이 확연히 다르고 훨씬 안전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한 우리는 방사성물질 누출 사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고가 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핵폐기물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핵폐기물을 아무리 꽁꽁 싸매어 깊이 묻어 둔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그것도 어떻게든 인간의 손을 거쳐 다시 처리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미래세대에게 무거운 짐을 떠안기는 일입니다. 따라서 원자력발전소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 - 지구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해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는 청정에너지로서 핵발전소를 가동해야 한다는 논리가 아닌,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핵 발전소의 사고와 처리 곤란한 핵폐기물을 미래세대에게 영원히 물려주느니, 이제부터라도 햇빛과 바람을 이용한 안전하고 재생가능한 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한 정책적 연구와 과감한 지원과 투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체르노빌 원전사고 20주기 맞이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25일 화요일 오전 11시에는 종로에서 추모 퍼포먼스가 있고 오후 6시에는 인사동 남인사 마당에서 추모 촛불 문화제가 열립니다. 이 때 사진 전시와 영상물 상영, 문화공연이 함께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지금도 www.enviroasia.info 및 각 환경단체 홈페이지에서 핵 확산 저지 한-일 서명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회 의원회관 로비에서는 체르노빌 핵사고 사진전이 27일에서 28일 양일간 열립니다.

-마지막으로 유엔의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체르노빌 사고에 관해 언급한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합니다. “체르노빌은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이름이다. 체르노빌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보이지 않는 적과 알 수 없는 근심걱정을 담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사건이다.”   



06. 04. 25.

 

 

 

 

P.S. 체르노빌 사고는 당시 한창 진행중이던 사회주의 재건(페레스트로이카) 운동을 '넌센스'로 만들어놓은 사건으로 기억된다. 그로부터 5년후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은 붕괴되었다. 어떠한 이념도 그러한 재난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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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4-25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 가끔 와서 올려놓으신 귀한 자료 함부로 퍼갔습니다. 용서해주실거죠? 또 퍼갈게요.^^

로쟈 2006-04-25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온 자료인데요 뭐.^^

twoshot 2006-04-26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끔찍합니다. 그리고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

마노아 2006-04-26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덕분에 좋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체르노빌 이야기를 소재로 쓴 시미즈 레이코의 "달의 아이"가 떠오릅니다. 좋은 글 퍼갈게요.

여울 2006-04-26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재활용되지 않는 폐기물을 남기는 사업이 (담수화와 친환경)이란 광고로 주입되고 있는 것은 아시죠.
중동에 설치해서 담수를 생산한다고 하면, 전쟁으로 피격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안전하다고, 돈 벌기위해 수출한다는 것을 아무리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아도 납득을 할 수 없군요.  갖은 돈을 들여 광고로 세뇌되는 현실... ...???
 

원자력硏-두산重, 해수 담수화 본격 추진

한국원자력연구소(소장 장인순)와 두산중공업(대표 김대중)이 원자력을 이용한 해수 담수화 기술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

원자력연구소는 29일 연구소 대회의실에서 두산중공업과 이 분야 사업을 공동으로 본격 추진키 위한 상호협력협정을 체결할 예정이라고 28일 밝혔다.

원자력연구소와 두산중공업은 이 협정에 따라 원자력연이 해수 담수화 등을 위해 지난 2002년 우리 고유 모델로 개발한 `일체형 원자로(SMART)'의 산업화와 해외시장 개척, 수주때 공동 또는 컨소시엄 형식으로 상호 협력해 나가게 된다.

일체형 원자로는 다목적 중소형 원자로로, 원전터빈에서 사용한 폐증기를 활용,바닷물을 증발시켜 높은 순도의 식수 및 공업용수를 1일 4만t씩 생산할 수 있을 뿐아니라 10만KW 정도의 전력도 생산할수 있는 안전하고 경제적이며 친환경적인 최첨단 원자로다.

원자력연은 이 일체형 원자로의 기술검증을 위해 지난해 세계 해수 담수화 설비시장의 40%를 점유하고 있는 두산중공업 등과 파일럿 플랜트 건설을 추진키로 했으며, 두산중공업 등은 2008년까지 총 2천500억원이 투입되는 이 플랜트 건설사업비의70%인 1천750억을 부담할 예정이다.

원자력연 관계자는 "두 산.연은 이를 통해 얻은 일체형원자로의 설계 및 건설기술을 바탕으로 공동으로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게 된다"고 설명했다.

오는 2011년께는 우리나라도 약 20억t의 물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일체형 원자로를 이용한 해수 담수화 사업은 국민들이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미래식수원 확보와 함께 소규모 전력 생산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 물이 부족한 중동,북부 아프리카 및 중남미 지역에 진출할 수 있는 국가 수출전략 품목으로도 부상할 전망이다.

< 출처 : 대전=연합뉴스, 2004. 1. 28 >

sayonara 2006-04-26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르노빌 사고 당시 초등학생이었는데... 신문을 보니 방사능 오염으로 수박만해진 사과를 보고 마냥 좋아했던 기억이... -_-; 어린 시절이란 때론 철없이 잔인한가 봅니다.

로쟈 2006-04-26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rcus님/ 남의 일이 아닌 거 맞습니다.
마노아님/ 저도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작년에야 기억해 냈습니다.
여울마당님/ 2004년 일이면 벌써 상당히 진행중일 수도 있을 거 같군요. 사실, 배아줄기 세포 연구에 투자할 비용이라면, 대체 에너지쪽이 더 '현실적'인 것도 같은데요...
sayonara님/ 저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모스크바에 있을 때 유난한 싼 채소, 감자 따위는 먹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었죠. 체르노빌산이라고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