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06. 05. 10) '이-만-희 전작을 보고 싶다' 김은형 기자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 회고전으로 재조명했던 고 이만희(1931~75) 감독의 전작전 ‘영화천재 이만희’가 12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원장 이효인) 고전영화관에서 열린다. 지금까지 거장 감독의 대표작들을 상영하는 회고전은 종종 열려왔지만 전작을 상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부산에서 상영됐던 10편을 포함한 총 22편이 상영된다. 엄밀히 말해 이번에 상영되는 22편이 이만희 감독의 ‘전작’은 아니다. 61년 <주마등>으로 감독 데뷔한 이만희는 생전에 51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대표작 <만추>를 비롯해 이십여 편의 필름이 분실되거나 소실됐기 때문에 이번 상영작들이 현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만희 영화세계의 전부다.

상영금지된 지 37년만에 지난해 발견된 ‘휴일’로 개막
데뷔작 ‘주마등’ 대표작 ‘만추’ 등 20여편은 필름 없어

1931년 서울 왕십리에서 태어난 이만희는 한국 전쟁 뒤 연기자를 꿈꾸며 영화 이력을 시작했다. 단역배우와 조감독 생활을 거쳐 61년 감독 데뷔를 했으며 62년 스릴러 영화인 <다이알 112를 돌려라>로 연출력과 흥행력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다음해 연출한 대작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이만희를 당대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끌어올렸으며 볼 거리로서 한국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는 평을 얻었다.

이후 당시 한국 영화감독에게는 두통거리 숙제와도 같던 반공영화를 제작하면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7인의 여포로>(1964)에서 북한군이 인간적으로 그려졌다는 이유로 반공법 위반으로 수감됐으며 당국의 검열로 누더기가 된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해 큰 상처를 입자 이번에는 “진짜 반공영화를 만들자”고 작심해 만든 <군번없는 용사>(1966)역시 북한군의 제복이 너무 멋지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만희는 당대 감독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모든 다른 종류의 영화들에서 자기의 작가적 인장을 새긴 인물”이라고 평한 부산국제영화제 이만희 회고전의 기획자 허문영 프로그래머의 말대로 이만희 감독은 스릴러에서 전쟁 스펙터클, 문예영화, 웨스턴, 멜로드라마까지 종횡무진했다. 때로는 모더니즘의 미학을, 때로는 리얼리즘 미학을 구사하면서 독특한 스타일을 일구어갔으며 편집 도중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한 <삼포 가는 길>(1975)을 유작으로 남겼다.

이 가운데 아직 필름을 찾지 못한 <만추>(1966)는 이만희 영화세계의 전환점으로 꼽힌다. 당시 한국영화로는 파격적으로 대사가 거의 없었던 이 영화는 상업적 영화문법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작가주의로 진입했던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어둡고 절망적인 감독의 시선은 <휴일>(1968)에서 정점을 이루게 된다. 이 영화는 “우울하고 퇴폐적인 정서”라는 이유로 개봉이 무산됐다가 지난해 영상자료원 필름보관고에서 극적으로 발견돼 완성된 지 37년만에 관객에게 처음 공개됐다.

<휴일>을 개막작으로 시작되는 전작전에는 <검은 머리> <돌아오지 않는 해병> <마의 계단> <쇠사슬을 끊어라> 등 지난해 부산에서 상영된 대표작 외에도 <여자가 고백할 때> <생명>등 잠깐 개봉했다가 몇십년 동안 창고 속에 보관되어온, 알려지지 않은 작품도 대거 상영된다. 또 이만희와 함께 작업했던 시나리오 작가 백결, 촬영감독 이석기, 배우 백일섭, 양택조씨와 김경형, 김지운, 류승완, 정지우, 허진호 등 이만희 감독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받은 현역 감독들이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한다.

 

편집장이 독자에게  '1960년대를 위하여' 남동철 (05. 12. 23)

최근 CJ-CGV가 발표한 2005년 한국영화산업 결산자료를 보니 올해 극장관객수는 1억4천만명을 돌파할 것이라고 한다. 올 상반기엔 관객수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는 지표가 나왔으나 하반기 개봉한 한국영화들이 호조를 보이면서 영화시장이 9년 연속 성장을 멈추지 않게 됐다고 이 자료는 덧붙였다. 산업의 흐름에 관심있는 관계자들이라면 이런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성장폭이 줄고 있다는 점을 우려할 수 있겠으나 크게 봐서 한국영화산업은 아직 괜찮아 보인다. 새삼스럽게 한국영화산업이 호황이라는 걸 강조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관심을 끈 것은 최근 30년간 최고라는 올해 극장관객수가 역대 관객수 기록에선 고작 7번째라는 사실이다. 1969, 1968, 1970, 1967, 1966, 1971년 관객수가 1억4천만명보다 훨씬 많았다는 얘기다. 요즘 관객 가운데 한국영화산업의 전성기가 1960년대 중후반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그때가 지금보다 호황이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번호 특집기사에서 <씨네21>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는 김소영, 정성일, 허문영 세 평론가는 올해의 영화로 이만희 감독의 1968년작 <휴일>을 들었다. 실체를 확인할 수 없던 영화를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결과다. 그들은 <휴일>을 볼 수 있음으로 인해 한국영화의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이름이 이만희라는 걸 확인하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잊혀진 전통을 발견한 이 짜릿한 희열이 극소수 전문가들만의 것일 이유는 없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이런 기회를 제대로 활용해서 관객과 옛 한국영화 사이에 놓인 거리를 좁혀주길 기대해본다.

관객수 통계와 <휴일>의 예로 확인하듯 1960년대 한국영화의 실체는 아직 드러난 것보다 알려져야 할 것이 더 많다. 군사정권 시절에 생긴 단절이 한국영화사의 공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공백이 안타까운 이유는 역사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이 아니다. 할리우드가 그들의 전통을 화려한 신화로 포장해 반복 재생산하는 걸 보노라면 한국영화가 그렇게 못할 이유는 뭔가, 라는 생각이 든다. 고전기 할리우드를 무대로 삼은 영화들이 수없이 쏟아지는 것처럼 이제는 60년대 충무로에 관한 한국영화가 나올 때도 되지 않았을까? 이번에 <씨네21>이 출판하는 김수용 감독의 회고록 <나의 사랑, 씨네마>을 읽으면서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문예영화를 연출한 이 노감독의 글은 대단히 영화적이다. 일례로 이만희 감독의 영결식을 묘사한 글을 보자. “나는 어린 유자녀들을 보니 목이 메어 조사를 읽을 수 없었다. 시간을 끌다가 겨우 감정을 가다듬고 마이크 앞에서 입을 뗄 때였다. 갑자기 민방위 훈련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고, 사람들은 우르르 지하 다방으로 몰려 들어갔다. 20분 후 다시 마이크 앞에 섰지만 어쩐지 슬픔은 가고 마음도 가라앉았다. 나는 두루마리 조사를 움켜쥐고 즉흥적으로 입을 열었다.” <나의 사랑, 씨네마>는 사료적 가치 못지않게 드라마로서 흥미진진하다.

1960년대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이것은 호황의 절정을 맞은 한국영화가 기꺼이 맡아야 할 숙제 가운데 하나다(여기엔 <씨네21>이 맡아야 할 몫도 있을 것이다. <나의 사랑, 씨네마>의 출간처럼). 피터 잭슨이 1933년 원작영화를 보고 감독의 꿈을 키워 지금의 <킹콩>을 만든 것 같은 일이 한국영화에서 일어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고보니, 우리에게 이만희의 <휴일>을 보여달라. 그러면 진짜 멋진 영화를 만들겠다, 고 어디선가 누군가 외치고 있는 듯도 하다.

 

필름2.0(05. 09. 09) '잊혀진 거장 이만희의 영화에 대하여' 김영진 편집위원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대대적인 이만희 감독 회고전을 연다. 이어 내년에는 영상자료원에서 이만희 감독 전작전을 준비하고 있다. 너무 뒤늦은 감이 있지만 이만희 감독에 대한 본격적인 조망이 막 시작되는 참이다. 이것이 왜 너무 뒤늦었는가, 하는 것은 이만희가 동시대의 감독들뿐만 아니라, 그의 영화를 본 이들에게는 누구나 찬탄과 질시를 불러일으켰던 창작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40대 초반의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떴고 그후 한동안 망각에 묻혔다. 때로 명예의 월계관은 살아남은 이들의 전리품이 된다. 단절된 한국영화 역사의 연구에서 이만희는 저만치 밀려 있었다. 그 와중에 이만희에 대한 여러 영화인들의 회고는 거의 전설 수준으로 옮겨지곤 했다.

언젠가 이만희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한, 반 은퇴 상태에 있는 감독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이만희와 함께한 현장 생활이 거의 경이적인 것이었다고 했다. 이만희는 군사정권 체제 하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혐오감을 품고 있었고 자기 창작 생활을 거의 방기하듯이 했다. 그는 늘 술을 마셨고 현재 영화를 찍고 있는 상태에서 이미 다음 영화의 연출료를 받아 다 써버릴 만큼 애주가였다. 그의 때 이른 죽음은 바로 이 술로 인한 간 기능의 악화 때문이었다. 시나리오도 완성하지 않고 곧잘 영화를 찍은 그는 촬영 당일 아침이면 거의 난수표 수준의 암호 같은,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대사를 아무렇게나 갈겨쓴 콘티를 조감독에게 줬는데 거기에 적힌 소도구를 재빨리 동원하는 게 조감독의 가장 큰 임무였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찍었는데도 미스터리 스릴러영화를 잘 만들었던 이만희의 재능은 그것 자체로 미스터리였다는 것이다.

동세대의 감독들에게도 이만희는 연구 대상이었다. 이를테면 누구도 자신을 넘어서는 감독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고 김기영 감독도 이만희의 영화에 대해서는 깜짝 놀란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김수용 감독도 다른 사람이 넘어설 수 없는 경지에 가 있었던 감독이 이만희였다고 말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요절한 동료감독에 대한 예우일 수도 있지만 그 분들이 모두 동의했던 것은 이만희가 생전에 보여 준 것 이상의 것을 훨씬 더 보여 줄 수 있는 감독이었다는 점이다. 영세한 산업 규모로 굴러가던 60년대와 군사정권의 통제가 엄혹했던 70년대에 만들었던 이만희의 영화는 그런데도 빛나는 성취를 티내고 있었다. 그의 영화 중에는 거의 태작이 없다. 빠른 속도로 되는 대로 찍어낸 그의 영화에 미치광이 같은 시정신이 늘 살아 있었다는 것은 수수께끼다. 임권택 감독도 평론가 정성일 씨와 나눈 인터뷰에서 이만희 감독이 살아 있었으면 자신이 영화를 더 잘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경쟁에 있는 자로서, 아, 저 사람에게 지면 안 되겠다는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는 감독이 있다면 내게는 이만희 감독인 거요. 왜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냐면 내가 <증언>을 찍고 있었을 때 이만희 감독은 나와 마찬가지로 전쟁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를 만들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영화가 중간에 말썽이 많이 나고 해서 나머지를 임 감독이 좀 대신해줄 수 없냐고 해서 막장까지 갔는데, 남이 만들던 영화를 할 수는 없는 거요. 바보가 아니면. 그때 내가 속으로 생각을 해본 거요. 내가 만약 대신한다면 이만희 감독이 찍은 영화를 흔적 없이 해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아니더라고. 내가 흉내낼 수 없는 이 감독만의 세계가 있는 거요. 거기에는. 내게는 한국영화에 특히 그 두 사람이야. 김기영 씨하고. 도저히 그 사람들의 스타일은 내가 흉내 내서 비슷하게 할 수가 없겠다는 거지. 독특한 자기 양식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야.”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1973년에 영화진흥위원회의 전신인 구 영화진흥공사에서 직접 대규모 예산을 들여 제작한 국책 반공 전쟁영화였다. 영화진흥공사는 전쟁영화 연출 경험이 있는 이만희와 임권택에게 각각 <들국화는 피었는데>와 <증언>의 연출을 맡겼다. 사단 병력 규모의 군부대가 엑스트라로 동원되고 한 마을 전체가 세트로 지원된,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대작이었다.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극우 논객으로 유명했던 소설가 선우휘가 각본을 썼지만 감독 이만희의 관심은 각본에 담긴 선전영화의 의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특히 영화 초반 수십 분간 전개되는, 북한군의 탱크 위용을 보여 주는 장면은 압권이다. 탱크가 마을과 사람을 짓밟고 지나갈 때 장비가 열악했던 당시의 남한군은 그저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웬만한 총이나 화기에도 끄떡하지 않는 탱크에 맞서 남한군 병사들은 아예 수류탄을 지고 탱크에 뛰어드는 무모한 방법으로 목숨을 버린다. 그것은 영웅적인 활약으로 보인다기보다는 가공할 기계에 맞서는 인간의 힘겨운 투쟁을 그리면서 거의 무력감에 가까운 느낌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영화가 완성됐을 때 북한군의 잔학상과 그런 북한군에 맞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기를 바랐던 정부 당국으로부터 전쟁의 스펙터클에서 비극적인 무력감을 표현한 이 영화가 눈밖에 난 것은 당연했다. 제작 직후 가진 시사회에서 정보 당국은 이 영화에 대해 전면 개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영화 곳곳에 반공과 애국을 역설하는 상투적인 연설 투의 대사가 수시로 깔리고 화면의 연결이 성긴 흔적이 역력하지만(심지어 밤 전투 장면을 낮에 찍어 이어붙여 놓기도 한다) 감독 이만희는 당시의 제작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했던 풍부한 제작 조건에서 작업하면서 찍은 이 전쟁 스펙터클의 초점을 반공이나 북한에 대한 적대심이 아닌, 탱크에 짓밟히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전쟁에 대한 훨씬 더 추상적인 두려움을 보여 준다.

정부가 지원하는 국책 홍보영화조차도 자기 배짱대로 찍어버린 이 강골의 영화감독은, 그러나 또한 매우 서정적인 감성을 지닌 창작자였다. 이번에 영상자료원에서 발견돼 9월 2일 상영됐으며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공개될 이만희의 <휴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상영된 적 없는 작품으로, 이만희의 진면목의 일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영화는 제작 당시 너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상영 금지 처분을 당했다. 전옥숙이 기획하고 백결이 시나리오를 썼으며 신성일과 전지연이 주연한 이 영화는 일요일에 만나 데이트 하는 가난한 연인의 하루를 포착한 것이다. 이렇게 내용을 소개하면 매우 달콤한 영화인 듯싶지만 실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허무한 정조를 띠며 전개된다. 신성일이 연기하는 허옥은 무일푼 백수 청년으로 가진 것도 능력도 없으면서 턱없는 허풍으로 세상을 대하는 청년이다. 택시비도 없으면서 택시를 잡아타고 목적지 근처에 택시를 세워두곤 구멍가게에서 담배를 사는 척하며 거스름돈은 택시 운전사에게 받으라고 사기를 치며 달아나는 대책 없는 청년이다. 그런 그가 애인을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애인은 다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커피값이 없기 때문이다. 다방에서 만날 돈조차 없는 가난한 연인은 그렇게 일요일의 데이트를 시작한다. 나무들이 늘어선 비탈길을 나란히 걸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비루한 사랑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꽤 문학적 감성으로 치장된 이들의 대화는 결국 여자가 감추고 있던 비밀을 꺼내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자는 임신을 했고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그 뱃속의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여자는 무기력한 남자를 비난하지만 결국 아이를 떼는 데 동의한다. 남자는 낙태 비용을 얻기 위해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여자는 바람이 몰아치는 남산 중턱 벤치에서 하염없이 남자를 기다린다.

이렇게 펼쳐지는 <휴일> 도입부는 사건이 전개될수록 더 암담한 분위기로 치닫는다. 허옥이 돈을 빌리러 간 친구들은 다 제멋대로다. 여자를 후리는 데만 골몰하는 놈, 사회의 낙오자가 되어 술집에서 개똥 철학만 주워대고 있는 놈, 돈을 모아 현대식 아파트에 살며 목욕을 즐기며 으스대는 놈(그 당시에는 집에서 목욕을 한다는 것이 사회적 신분 상승의 자기 확인 행위였던 모양이다)들을 만나 새삼 깨닫는 것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폐허에 있다는 자각이다. 진부한 음악과 문학적 대사를 끼고 이만희는 이런 상황을 이미지로 다룬다. 술집에서 백수들과 ‘대학을 나오고도 사회에서 낙제한 것은 내 책임이 아냐’라는 따위의 시시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친구를 허옥이 찾아갔을 때 카메라는 그들이 벽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모습을 잡는다. 그들을 비추던 카메라는 그들이 화면 바깥으로 움직여 나갔을 때도 잠시 그들 배경의 벽을 응시하듯 잡는다. 의미 없는 낙서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는 그 벽에서 잠시 응시한 끝에 우리가 카메라를 통해 얻어내는 감정은 모멸감이라는 것이다. 어떤 지향으로 묶일 수 없는 삶에 대한 모멸이 거기 스며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남자는 방황하고 여자는 기다린다. 남자가 담배를 빼어물고 부스럭거리며 성냥을 찾으면 여자가 핸드백에 남자를 위해 지니고 다니는 성냥갑을 꺼내준다. 그러나 남자는 결코 여자의 마음에 아무것도 점화해줄 수 없다. 산부인과에서 낙태할 차례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대기실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남녀 주인공의 모습을 담은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들의 꽉 움켜잡은 손을 포착한다. 간호사의 발걸음이 들리고 진료를 받을 것을 채근하는 그녀의 목소리 끝에 내미는 손길은 남녀 주인공의 움켜쥔 손을 떼어놓는다. 사회적으로 공인되지 못한 이들의 결합은 그렇게 무력하다. 더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나, 이후 영화 내내 포착되는 주인공의 방황 장면은 60년대 말의 서울의 아름답지만 동시에 흉물스러운 표정을 간직한 풍경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들의 우울한 일요일을 위하여, 우울한 사람들끼리, 내일을 위하여, 어제를 위하여, 여자를 바람 맞힌 그 남자를 위하여, 남자를 바람 맞힌 그 여자를 위하여.’ 따위의 김승옥 소설 풍의 대사들이 술집에서 나누는 건배의 술잔 위로 겹쳐지는 이 영화의 분위기는 극한의 퇴폐와 무기력한 애상으로 치닫는다. 당시의 권력자와 그의 취향을 집행하는 관료들은 이런 퇴폐적인 우울함을 좋아하지 않은 나머지 상영 금지 처분이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런 시대적 맥락까지 더해서 이만희의 <휴일>은 보고 나면 뇌리에 서걱서걱하는 톱밥 소리가 들리는 듯한 감동을 준다. 영상자료원의 시사실에서, 그리고 곧 열릴 부산영화제의 대규모 회고전에서 이만희 감독 영화의 진가를 한번 음미하시길 바란다.

 


씨네21(06. 05. 12)

허문영 평론가가 말하는 지금 이만희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까지 갔던 것일까

이만희는 그의 영화를 보면 볼수록 더 말하기 힘든 감독이다. 이 말은 한 사람의 관객이자 평자로서 내가 한 감독에게 바칠 수 있는 최상의 찬사다. 이것은 그가 만든 모든 영화가 걸작이라는 뜻은 아니다. 실은 그렇다고 말할 자격도 없다. <만추>를 제외하고도 그의 영화 50편 가운데 우리는 반도 만나지 못했다. 이만희는 이제 막 말해지기 시작했고 앞으로 더 많이, 더 맹렬하게 말해져야 할 감독이다.

그의 작품들은 아예 행방조차 알 수 없거나(<만추> <시장> <7인의 여포로> 등등), 40년의 망각을 넘어 이제 막 도착했거나(<휴일>), 일부의 소리를 잃어버려 혹은 괴상한 계몽영화로 치부돼 창고에 처박혀 있었지만(<물레방아> <생명>), 그들을 한편씩 만날 때마다 보는 사람을 전율케 한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까지 갔던 것일까.

이만희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1년이면 30여편에 출연하는 배우를 불러놓고 기껏해야 2주에 한편을 촬영하며 그렇게 1년에 대여섯편을 찍어댄, 그러고서도 검열과 삭제와 금지의 지옥을 경유해야 하는 끔찍한 제작환경을 감안해 가산점을 줄 필요가 없다(이 가산점은 실은 정당한 것이지만). 이 천재가 모든 걸 극복했다는 말이 아니며 지혜롭게 타협했다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 저주받을 만한 존재 조건을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여 유의미한 상처로 만들어낸다. 이만희의 영화는 그 모든 악조건과 저주와 상처를 끌어안고, 영화를 사랑한 한 사내가 영화라는 매체의 심장에 기어이 이르려는 순간들의 숨막히는 기록이다.

<생명>
<생명>

여기선 다만 <생명>(1969)에 관해 말하고 싶다. <생명>은, 그의 영화 가운데 단 한편만 보기를 권해야 한다면, 가장 마지막에 권하고 싶은 영화다. 이 영화가 가장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개인적이기 때문이다. 한 시간 남짓한 짧은 영화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영화의 첫머리에 이런 구호가 떠오른다. “삼천만 한몸 되어 분쇄하자 북괴만행.” 이 영화는 탄광 매몰과 광부 구출 사건을 다루고 있으므로 ‘북괴만행’과는 무관하다. 그 구호 다음에는 이것이 ‘기록영화’라고 스스로 말한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픽션이므로 이것 역시 말이 안 된다. 이런 어이없는 자막이 들어간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이만희라는 인물이 당대의 질서와 맹렬하게 대립한 자취 혹은 그로 인한 상처의 흔적으로 읽힌다. <생명>은 한몸 되어 분쇄하자고 말해놓고 한몸이 되지 않는다. 기록영화라고 말해놓고 기록하지 않는다(여기선 기록영화라는 장르가 아니라 ‘기록’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리얼리스트의 계율이 중요하다). 이만희는 자기가 가장 무관심하고 가장 끌어안기 싫은 표지를 내세우고 그 안에서 완전히 반대편으로 가버린다.

이 영화에서 갱도 붕괴는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게 아니라 “무너졌다”는 외침 하나로 처리된다. 곧이어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몰려드는 기자들, 슬퍼하는 매몰 광부의 가족 등등 이런 영화가 기록해야 할 대상들은 모두 등장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는 그 모든 걸 무성의하게 보일 만큼 간략히 처리한다. 이만희는 정말 기록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한 장면은 자꾸 변주되면서 반복된다. 무너진 갱도에 홀로 갇혀 죽어가는 사내(장민호)의 모습. 그는 갱도에 갇혀 반쯤 실신한 상태로 꿈을 꾼다. 포성과 총소리, 비명이 환청으로 들려온다. 잠에서 깨면 좁은 갱도에는 물 떨어지는 소리만 청명하게 울려퍼진다. 이 영화는 이상하게 조용하다. 울부짖음도 분노도 환호도 없다. 그저 광부는 갇혀 죽어가고 있고 그의 가냘픈 신음 소리와 맑은 물소리가 전쟁의 기억이 만들어낸 간헐적인 환청과 함께 폐쇄공간을 채운다.

<생명>이란 영화는 놀랍게도 이것이 거의 전부다(구출 과정도 매몰과 마찬가지로 얼렁뚱땅 묘사된다). <생명>은 오직 갇혀서 죽어가는 사내의 형상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의 가장 냉혹한 대사. 신문기자(허장강)가 몰려든 사람들로 바빠진 다방 종업원에게 묻는다. “살아날 것 같은가요?” 종업원이 대답한다. “관심 없어요. 다만 빨리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가장 놀라운 순간은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다. 매몰 사건이 일어난 첫 장면에서 갱도 아래로부터 지상으로 올라가던 카메라는, 광부가 구출된 뒤에 지상에서 갱도 아래로 수직 낙하한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저 카메라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이미 무너져버린 그 갱도로 다시 가서 우리에게 뭘 보여주려는 걸까. 이 기괴한 카메라의 움직임보다 더 가혹한 절망의 영화언어를 기억해내기 힘들다.

이렇게 엉성하고 절충적인 영화에서 이처럼 숭고한 영화적 순간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믿겨지지 않는다. 나는 이만희의 모든 영화가 그런 순간을 또 어디엔가 감추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겠다. 그의 영화를 자꾸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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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는 전혀 고맙지 않은 한주였다(*이 글은 2003년 3월 중순에 씌어졌다).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서점을 순례하는 것은 짧은 앞치마로 쏟아지는 선물들을 받아야 하는 일만큼이나 곤욕이다. 혹은 손바닥으로 물을 움켜쥐는 일만큼이나 신나면서도 허전한 일... 요즘은 로또에 대해서 차츰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하여간에 쏟아진 책들 가운데, 일간지 리뷰에서 크게 다루지 않은 책들을 중심으로, 그럼에도 나의 눈길을 끈 책들을 중심으로 간략히 소개하기로 한다. 일종의 독전감(讀前感)이다.

 

 

 

 

가장 먼저 순위에 올려놓고 싶은 책은 에른스트 벨러의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책세상)이다. 벨러(1928-1997)는 니체 전문가인데, 독일 관념론 철학에 대한 연구서들을 갖고 있고, 슐레겔 전집의 편집자 및 국제적 학술지 <니체 슈투디엔(니체 연구)의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이번 그의 책은 얇지만 독일학계에서 나온 데리다론 가운데 손꼽히는 저작이고, 영역본(Confrontations: Derrida, Heidegger, Nietzsche)도 나와 있다.

한국어/독어본 제목에는 빠져 있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니체와 데리다의 대결이 아니라 니체를 사이에 둔 데리다와 하이데거의 대결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유명한 니체론에서(1/4이 <니체와 니힐리즘>(철학과현실사)이란 제목으로 번역돼 있다) 니체를 '마지막 형이상학자'로 규정하는데 반해서, 데리다는 <에쁘롱>(동문선, 1998)을 비롯한 여러 니체 읽기를 통해 오히려 하이데거 자신의 니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독해를 비판하다. 여기서 데리다는 하이데거에 대해 맞장을 뜨고 있는 것이다. 이 뜻밖의 번역서는 물론 나를 즐겁게 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번역 수준이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데리다를 다룬 책들 가운데 <데리다와 예일학파>(문학동네) 이후 나를 감동시킨 유일한 번역서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 부실한 번역에 대한 지적/비판이 많아짐에도 불구하고 정작 좋은 버역에 대한 격려는 드물다는 지적도 없지 않은데, 이 자리에서 인심을 좀 쓰자면, '정말 좋은 번역'이다. 역자의 이름은 박민수인데, 연대 독문과를 나오고 현재는 독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한다. 어쨌든 덕분에 나는 같은 역자가 번역한 볼프강 벨쉬의 <우리의 포스트모던적 모던1,2>(책세상, 2001)도 거금을 주고 사버렸다...

 

 

 

 

이런 좋은 번역을 빛내주기 위해서 조야한 번역 두 가지도 적어둔다. 역시 독일 학자 H. 키멜레의 <데리다-데리다 철학의 개론적 이해>(서광사, 1996)는 저자의 수준도 기대에 못미치지만 역자의 이해 수준은 한술 더뜬다. 그리고 또 만프레드 프랑크의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문예마당, 1996). 연대 독문과 출신들의 공역인 이 책은 정말 '읽을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아주 조야한 수준의 번역서인데, <신구조주의란 무엇인가1.2>(인간사랑)의 번역도 기대에 못 미치는 걸 보면, 한국어 프랑크는 좀 불운하다고 할 수 있다. 역시 책세상에서 나온 <현대의 조건>(2002) 정도가 체면을 지켜주는 정도이다.

 

 

 



그리고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 역사> 제3권(동문서). 4권짜리로 완갈될 이 책에 대해서는 이미 소개한 바 있다(*바로 다음달인 4월에 제4권이 출간됐었다! 참고로 영역본은 2권짜리이다). 역자는 제2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김웅권. 한때 신뢰했던 번역자에 대해서 지난 제2권 때문에 나는 실망을 금치 못했었는데, 이번에 만회가 될지 궁금하다. 68년을 전후로 한 프랑스 지성사의 현장을 역사학자 도스는 마치 CNN기자처럼 추적해 들어가는데, 읽은 소감은 나중에 다시 적기로 한다(*나는 이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부분적으로만 읽었다. 구입하는 건 '모험'으로 여겨졌기에).

동문선에서 나온 또다른 신간은 데이비드 혹스의 <이데올로기>이다(*이미지도 뜨지 않는 이 책은 번역이 미덥지 못하다. 지젝에 관한 짦은 절만 하더라도 오역이 속출한다). 이 책은 루틀리지에서 나오는 '새로운 비평용어' 시리즈의 한권인데, 같은 시리즈의 책으로는 폴 해밀튼의 <역사주의>(동문선, 1998)와 앤터니 이스트호프의 <무의식>(한나래, 2000), 조셉 브리스토우의 <섹슈얼리티>(한나래, 2000)가 있다. 이 시리즈에서 번역되었으면 하는 책은 그레이엄 앨런의 <상호텍스트성Intertexuality>(2000)이다.



 

 

 

존 롤즈의 <정의론>(이학사)의 개정판이 번역돼 나왔다. 윤리학 분야에서 지난 세기에 나온 가장 중요한 책의 한권인데, 역자는 초판을 번역한 황경식 교수. 앞부분의 이론 파트가 주로 개정된 부분이라고 한다. 황교수의 다른 책들은 아마 오래 기억될 듯싶지 않지만, 이 번역만큼은 고전의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 적어도 롤즈의 이름이 기억되는 한.

 

 

 



19세기 러시아 비평의 대명사 비사리온 벨린스키(1811-1848)의 선집 <전형성, 파토스, 현실성>(한길사)이 번역돼 나왔다. 1840년대의 벨린스키의 지명도는 비유하자면, 우리문학의 경우 1930년대의 임화에 비견될 수 있을 듯하다(*요즘 다시 드는 생각은 1960년대 이후의 '리얼리즘론'의 대표자 백낙청과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학술진흥재단의 번역지원총서의 하나인데, 러시아문학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리얼리즘 비평에 관심을 둔 문학도들에겐 아주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궁정사회>도 역시 한길사에서 나왔다. 엘리아스는 이미 <문명화과정1.2>, <죽어가는 자의 고독>의 저작으로 잘 알려져 있는 독일의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이다.

 

 

 

 

덧붙여, 후쿠자와 유키치의 <학문의 권장>(소화)도 번역돼 나왔다. <문명론의 개략> <학문의 향기>(학문을 권함)와 더불어 그의 3대 저작이라고 한다. 최근 <문명론의 개략>이 자주 언급되고는 있지만, 일본 사상가들에 대한 나의 지식은 지식이랄 것도 없기 때문에, 다른 분들의 소개를 기대한다.(*올 봄에 나온 유키치의 자서전은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의 <문명론의 개략>이 왜 (재)번역돼 나오지 않는지 궁금하다. 우리는 이웃나라 '일본'에도 별 관심이 없는 건 아닐까?)

 

 

 

 

자크 퐁타니유의 <기호학과 문학>(이대출판부)이 번역돼 나왔다(원저는 1999년작).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퐁타니유는 프랑스 기호학의 거두 그레마스(1917-1992)의 수제자로서 스승의 뒤를 이어 파리 기호학파를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기호학자이다. 역자에 의하면, 저자는 "이 책에서 많은 작가와 작품의 분석을 통해 자신의 방법론을 개발하고 그것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모든 문학은 본질적으로 '담화'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어쨌든 그레마스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 또한 교양 수준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레마스 계보의 기호학에 대한 배경 지식을 먼저 챙긴 다음에 읽어볼 만한 책이다(*아래는 노년의 그레마스).

참고로, 그레마스의 책은 <의미에 관하여>(인간사랑, 1997)이 김성도의 교수의 번역으로 나와 있고, 역시 김교수의 연구서 <구조에서 감성으로>(고대출판부, 2002)가 해설로서 자세하다. 연구서의 제목에서도 잠깐 비치지만, 내가 정말 고대하는 책은 그레마스/퐁타니유 공저의 <정념의 기호학>이다(*나는 불어본과 영역본을 갖고 있다. 이 또한 왜 번역되지 않는지 궁금한 책이다. 하긴 <구조의미론>도 아직 출간되지 않은 형편이니!).

참고로, 그레마스와 파리기호학파에 대한 입문서로는 안느 에노의 <기호학으로의 초대>(만남, 1997)와 <기호학사>(한길사, 2000)이 적당하다. 그레마스 학파의 담화분석에 대해서는 J. 꾸르떼의 <기호학 입문>(신아사, 1986)이 참고할 수 있는 책이다. 제목은 입문이라고 돼 있지만, 이 역시 교양서 수준은 아니다.

 

 

 



번역소설로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1-5>(현대정보문화사)을 빼놓을 수 없겠다(*헉, 7월까지 완간된 걸 보니 10권이다!). SF매니아나 애독자들에겐 필독서. 러시아 태생의 다재다능한 작가 아시모프에 대해서 내가 읽은 건 그의 자서전뿐인데, <아이작 아시모프 자서전1.2>(작가정신, 1995)는 재미로만 치자면 손에 꼽을 만한 자서전이다(입담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한가지 단점은 얘기가 중간에 끝난다는 것. 나는 그게 좀 수상해서 출판사에 문의까지 해봤는데, 원저가 그런 식으로 끝난다고 한다.

하여간에 이 자서전이 절판된 것은 좀 아쉽다. 그렇게 절판된 자서전들 가운데 또 기억나는 것은 <털없는 원숭이>의 저자인 동물학자 데즈몬드 모리스의 <옷을 입은 원숭이>(샘터사)이다.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번역됐지만(*원제는 '동물들과의 나날'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김석희씨의 번역이고 정말 재미있는 책이다(*모리스의 책들이 대부분 출간된 거에 견주면, 이미 번역돼 있는 그의 자서전이 '묵혀' 있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다른 번역소설로는 가브리엘 루아의 <내 생애의 아이들>(현대문학)에 눈길을 줄 만하다. 저자는 캐나다의 최대 작가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교사 체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라고. 고전 번역으로는 프란츠 카프카의 <성>(서울대출판부)이 이유선 교수의 번역으로 다시 나왔다. 솔출판사의 전집 번역 중 <성>에 대해서 불만들이 많은 것 같은데, 이번 번역은 그런 불만의 소리를 잠재워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중국작가 모옌의 <술의 나라1.2>가 책세상에서 번역돼 나왔다. 모옌은 장이모의 영화 <붉은 수수밭>의 원작자. 우리 고전소설 <구운몽>도 책세상과 민음사에서 나란히 다시 나왔다. 김병국 교수의 역주본(시인사, 1984)으로 읽은 지가 16년이나 되었는데, 다시 손에 들어볼 생각이다. 그리고 어린이용 책으로 로만 카차노프의 러시아 그림책 <체브라시카>(엔북)가 출간됐다.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이 만화 캐릭터가 원숭이도 아니고 곰도 아닌 자신의 정체성에 대래서 고민하다가 악어 철학자 게나와 전직 KGB스파이였던 할머니 사포클란과 함께 자기발견의 여정을 떠나는 걸로 첫권은 마무리된다. 이 만화는 5월중에 극장에서 개봉될 예정이라고도 한다(*정말 개봉됐었나?).

 

 

 



아마도 지난주에 나온 가장 중요한 번역서는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아랍, 이슬람, 문명>(까치글방)일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여러 매체에서 크게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이름만을 적어둔다. 이븐 할둔의 책으론 <이슬람사상>(삼성출판사, 1990)이 출간된 바 있지만, 현재는 절판되었다. 중앙아시아사 전공자로서 계속해서 무게 있는 저작과 번역서를 내고 있는 김호동 교수의 다음 작업이 기대된다. 제몫을 하고 있는 학자/교수들에 대해서도 충분한 관심과 격려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때 관심과 격려란 다른 게 아니라 책을 사는 것이다. "나는 꼭 읽을 책만 산다"는 건 야만인들의 신조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호동 교수의 책을 장서용으로 사두기를 권한다(10-11권 정도 되는 듯하다). 아울러 여유가 있으면 정수일 교수의 책들도(7-8권 정도 된다). 돈이 없는 나는 두고두고 사겠다...

얘기가 너무 길어진 듯하다(*이맘때만 해도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5권 정도를 꼽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지 않았다). 지난주에 나온 국내 저작에 대해서는 자리를 옮겨서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

 

 

 



덧붙임: 역시 AS이다. 지난번에 언급한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인간사랑)에 대한 가장 좋은 서평은 고병권의 것(한겨레, 3월 15일자)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신은 실존하는 모든 것들과 표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만물은 신의 표현이며, 신은 만물을 통해 구성된다. 표현된 것은 신의 능력이며, 표현되지 않은 것, 즉 신의 무능력을 존재하지 않는다. 표현되지 않은 세계, 표현되지 않은 관념을 추방하는 것. 모든 초월성을 거부하고, 내재성을 '이 세계'의 원리로 받아들이며, '이 세계'의 모든 생성을 축복하는 것. 그것이 스피노자의 철학이다."

원고지 한장의 요약으로서 탁월하다. 아울러 왜 이 내재성이 알튀세르의 마음을 끌었을까도 짐작하게 한다. 그것은 모든 초월성에 대한 거부로서의 유물론에 다름아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사람은 그런 초월성의 거부자들이 아니라 열렬한 옹호자들이다. 매일 아침 기도로써 하루를 시작한다는 부시 같은. 더불어 나는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한다는 사람들을 혐오한다!..

2003. 0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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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5-10 23:21   좋아요 0 | URL
로쟈님 들리세요? 로쟈님 페이퍼 볼때마다 보관함에 책 들어가는 소리가.

로쟈 2006-05-10 23:38   좋아요 0 | URL
이건 다 '지나간' 책들인데요. 보관함에 얼마간 넣어두셨다가 삭제하시면 됩니다.^^

瑚璉 2006-05-11 12:30   좋아요 0 | URL
정의론이 또 나왔습니까? 또 사야 하나(-.-;).

로쟈 2006-05-11 12:48   좋아요 0 | URL
재재작년 얘기인데요...

瑚璉 2006-05-11 15:13   좋아요 0 | URL
"존 롤즈의 <정의론>(이학사)의 개정판이 번역돼 나왔다." 를 "표지는 그대로 두고 새로 번역을 개정하여 나왔다"로 잘못 이해했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런지.

열매 2006-05-11 17:38   좋아요 0 | URL
이번주에 나온 비트겐슈타인의 선집과도 관련된 것인데요. 왜 저작권까지 새로 산 새 번역판(또는 개역판)을 낼 때 기존의 역자들을 고집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의론> 역시 구입할 때 대여섯군데 비교해보니 구판본과의 차이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물론 번역의 질이 좋아서일 수도 있지만 그런 책을 사려니 옛구판본의 싼 가격 생각이 절로 나더군요^^;
같은 고전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전문가들이 번역한다면 새로운 판본을 하나더 가질 수 있을텐데라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위의 후쿠자와의 책 중 <학문의 권장>과 <학문의 향기>는 같은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목만 바꿔 출판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率路 2006-05-11 22:46   좋아요 0 | URL
아아악~ 키멜레의 데리다 읽다말았는데 이젠 환불도 안되고 언제 읽을지 기약도 엄꼬...ㅠㅠ 초보자가 읽을만한 데리다는 뭐가 있을까나요??ㅠㅠ(이렇게 유령독자 신고합니다ㅋㅋㅋ)

로쟈 2006-05-12 09:06   좋아요 0 | URL
iami7725님/ <정의론>의 역자는 전공자인데다가 번역에 큰 흠이 없다면 따로 수고를 들일 필요는 없었겠죠(가격에 대해서는 저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후쿠자와의 책들은 그냥 나와 있는 번역본들의 이미지를 모두 올려놓은 겁니다...

분신사바스님/ 만화책 <데리다가>가 물론 가장 쉬운 입문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음 국내 필자들의 <데리다 읽기> 정도가 어떨까 싶네요. '생초보'라면 어느 책이든 어렵기는 마찬가지이겠지만, 분량이 얇다는 장점은 있습니다...
 

봄인 듯하더니 여름날씨로 직행하는 듯하다.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기엔 좀 후덥지근한 날에 별다른 즐거움이 있을 리 없어 틈틈이 책이나 몇 권 꼽아보기로 한다.  

 

 

 

 

주저없이 가장 먼저 꼽을 책은 루이스 메넌드의 <메타피지컬 클럽>(민음사, 2006)이다. '2002년 퓰리처상 수상작'이라고 표지에는 박혀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웬만큼은 신뢰할 수 있다(우리에겐 그런 도서상이 있는가?). 한데, 분야가 흥미롭다. "오늘날의 미국을 만든 단 하나의 사상, 프래그머티즘은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화두로 한 인물평전인 것이다. 감으로는 프래그머티즘 입문서로서뿐만 아니라 아예 미국학 입문서로서도 적격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짐작에, 루이스 메넌드는 <프래그머티즘의 길잡이>(철학과현실사, 2001)의 저자 루이스 매난드와 동일인이지 싶다(박스보관 도서라 바로 확인은 안되지만). 아무려나 나란히 '길잡이' 삼아 읽으면 되겠다. 아래 사진은 원서의 표지.

소개를 잠시 옮겨온다: "미국을 지금까지 유지시켜온 철학적 근간은 프래그머티즘(pragmatism), 즉 실용주의 철학이다. 이 책은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을 탄생시키는 데 공헌한 네 명의 학자를 추적한다. 법률가 올리버 웬들 홈스,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논리학자이자 과학자이며 기호학의 창시자인 찰스 샌더스 퍼스,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존 듀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아마도 지명도 순으로 재배열한다면, 듀이-제임스-퍼스-홈스 순이 될 듯하다. 국내에 번역/소개된 책들도 그러한 순서를 따르는데, 이번에 출간된 퍼스의 선집을 제외하면 퍼스와 홈스의 책은 아예 소개된 바 없다. 듀이의 경우에도 교육학 관련서 몇 권과 <경험으로서의 예술> 발췌본 정도가 체면치레를 하고 있는 정도. 친미니 반미니 해서 논란이 많지만,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미국에 관심이 없다고 해야 할 거 같다. 이번에 나온 <메타피지컬 클럽>이 그러한 무관심을 얼마간 만회해줄 것인지?

조금 더 옮겨온다: "제목인 '메타피지컬 클럽'은 1872년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서 이 네 사람이 서로 교류하면서 주축이 되어 만든 토론 모임의 이름. 이 책은 미국 지성사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네 학자의 삶을 다룬 전기이자, 이들이 활동한 남북 전쟁 이후 미국의 100여년 간을 담은 지성사이다. 또한 이들 학자들이 형성한 미국 정신의 근간인 프래그머티즘의 기원에 대한 입문서로 읽을 수도 있다."

어디 그것뿐인가? "전체적으로는 네 주인공의 삶을 순차적으로 묘사하면서 전쟁과 정치, 과학과 철학, 인류학과 심리학, 종교와 교육, 실재의 법 재판, 인종문제와 노동운동 등 개별적인 주제들을 정교하게 짜맞췄다. 또한 오랜 기간 수집한 1차 사료를 통해 이들의 생생한 육성을 들려주고, 챈시 라이트, 루이 아가시를 비롯한 이들 주변의 19세기 후반 미국의 대표적인 지성들과 유명인사들을 충실히 묘사했다." 이만한 수준의 현대 한국지성사나 러시아지성사도 읽어보는 게 나의 희망사항이다. 과문한 탓에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두번째로 꼽을 책은 <메타피지컬 클럽>의 한 꼭지인 찰스 샌더스 퍼스 선집 <퍼스의 기호사상>(민음사, 2006).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스위스의 기호학자 소쉬르와 함께 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퍼스는 현대 기호학의 창시자로 자리매김되는 인물이다(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 또한 퍼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칼 오토-아펠이나 하버마스 같은 독일 철학자들도). 하지만, 그 지명도나 위상에 비하면 그간에 기이할 정도로 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물론 관련 논문들은 드물지 않다), 이번에 체면 치레할 정도의 책이 출간된 것. 소개를 읽어본다.  

"한국 인문학계에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찰스 샌더스 퍼스는 미국이 배출한 가장 독창적이고 다재다능한 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이자, 기호학자이다. 이 책은 소쉬르와 함께 기호학의 선구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 그의 수학, 화학, 심리학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사상 가운데서 기호론과 현상론과 관련된 글들을 뽑아 한국 기호학의 권위자 김성도 교수의 손으로 편역한 것."

편제는 "총 4개의 장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현상론과 관련된 단락으로 그의 유명한 삼범주론을 주로 다룬다. 2장은 세미오시스 및 해석체 개념, 기호의 삼분법 등을 다루는 퍼스의 기호이론을 소개했으며, 3장에서는 감각론과 지각 이론에 대한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4장에서는 웰비 여사에게 보낸 서간문 가운데서 기호 이론과 관련된 부분들을 모았다. 부록으로는 퍼스의 초기 논문 가운데 기호학 및 인식론과 관련하여 핵심적인 논문이라고 파악된 두 편의 논문을 실었다. 또한 60여 쪽에 달하는 편역자의 해제를 덧붙여, 퍼스 연구의 불모지와 같은 한국에서 퍼스 사상의 핵심과 중요성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꾸몄다."

단, 훑어보면서 느낀 아쉬움은 원전의 출처가 대략적으로만 기재돼 있는 것. 그러니까 원문과 대조해서 읽으려고 할 경우엔 손품을 좀 팔아야 하게 생겼다. '고전'의 경우 출처가 구체적으로 명기된 대역본 체제를 나는 선호하는데, 현재의 출판여건은 그러한 체제를 아직 기피하는 듯하다.  

 

 

 

 

세번째 책은 새롭게 기획된 비트겐슈타인 선집으로 나온 책 두 권이다. 일단은 기존에 번역됐던 주저 <논리-철학 논고>와 <철학적 탐구>가 책세상에서 출간됐다. 이미 이 책들이 절판된 시점인지라 새로운 선집판은 반가움을 던져둔다. 기존의 번역은 손질한 듯한데, 표지가 통일돼 있는 것이 우선은 마음에 든다.

중복을 피해서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들로 비트겐슈타인 입문서를 꼽아보자면, 초급자에겐 <30분에 읽은 비트겐슈타인>(랜덤하우스중앙, 2004)가 가장 적합하겠고, 중급자는 박병철 교수의 <비트겐슈타인>(이룸, 2003)부터 시작하시면 되겠다. 학술서 범주에 들어갈 책으로는 남경희 교수의 <비트겐슈타인과 현대철학의 언어적 전회>(이대출판부, 2005)가 있다. 내가 가장 읽고 싶은 책은 스티븐 툴민 등이 쓴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이제이북스, 2005)이다.  

 
 
 
 
 
 
 

네번째 책은 종교학자 엘리아데의 신간 <신화, 꿈, 신비>(도서출판 숲, 2006)이다. 이미 <세계종교사상사>(이학사)까지 출간된 마당이기에 엘리아데는 '마무리' 모드로 진입한 게 아닌가랑 생각이 든다. 새롭게 출간되는 책들이 모두 '부록'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없다. 소개에 따르면, "엘리아데의 주요 저작 중 하나"로서, "지은이가 1948년에서 1955년 사이에 국제적으로 저명한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12편을 9편의 글로 간추려 엮은 것으로, 엘리아데 종교학의 진수를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연초에는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문학동네, 2006)이 출간된 바 있는데, 이론적인 성격을 많이 탈색하고 있어서 일반독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영원회귀의 신화>(이학사, 2003),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문학동네, 1999), <이미지와 상징>(까치글방, 1998) 등이 그런 범주에 드는 책들이 아닐까 싶고. 물론 엘리아데와 초면인 분이라면, (여러 번 언급한 듯한데) 정진홍 교수의 (살림, 2003)를 먼저 읽는 게 좋겠다. 

 

 

 

 

다섯번째 책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의 자서전 <영혼의 일기>(거송미디어, 2006)이다. 사실 <영혼의 자서전>(고려원, 1981)이 이미 출간됐었지만, 절판된 상태인지라 부득이 (분량상으론) 다소 부실해 보이지만 이 책을 꼽는다. 하긴 내가 읽었던 <영혼으로 서리라>(청하, 1989)도 두꺼운 분량은 아니었지만, 매우 인상적인 책이었다. 현재 읽어볼 수 있는 카잔차키스의 책으론 <그리스인 조르바> 정도인 듯하며, 중국과 일본 여행기 <천상의 두 나라>(예담, 2002)가 아직 절판되지 않았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예수의 마지막 유혹>의 원작자가 카잔차키스란 것도 상식으로 알아두어야겠다.

그리스가 낳은 최고의 작가(혹은 철학자)라고 말할 수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카잔차키스는 적어도 크레타 섬이 낳은 최고의 작가인 것만은 분명하며 책은 그의 영혼의 편력/투쟁을 기록한다. 사전에 알아둘 만한 내용을 옮겨온다.

-1885년 크레타 섬 이라클레이온에서 태어난 카잔차키스는 터키의 지배 아래 어린시절을 보내며 기독교인 박해 사건과 독립 전쟁을 겪었다.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그는 자유와 자기 해방을 얻기 위한 3단계 투쟁을 계획하였다. 1단계 투쟁은 압제자 터키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이는 크레타가 해방을 맞는 순간 2단계 투쟁으로 발전했다. 즉, 인간 내부의 무지, 악의, 공포 같은 모든 형이상학적 추상으로부터의 해방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3단계에서는 사람들이 섬기는 모든 우상들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만끽하고자 했다.

-이처럼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호메로스와 베르그송, 니체를 거쳐 부처, 조르바에 이르기까지 사상적 영향을 고루 받았다. 그리스의 민족 시인 호메로스에 뿌리를 둔 그는 1902년 아테네의 법과대학에 진학한 후 그리스 본토 순례를 떠났다. 이를 통해 그는 동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역사적 업적은 자유를 찾으려는 투쟁임을 깨닫는다.

-1908년 파리로 건너간 카잔차키스는, 경화된 메카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를 창출하려 한 앙리 베르그송과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신의 자리를 대체하고 '초인'으로서 완성될 것을 주장한 니체를 접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투쟁적 인간상"을 부르짖었다. 또한 인식의 주체인 '나'와 인식의 객체인 세계를 하나로 아울러 절대 자유를 누리자는 불교의 사상은 그의 3단계 투쟁 중 마지막 단계를 성립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아래 스틸사진은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1964)의 한 장면. 앤소니 퀸이 조르바로 열연했다.)

-그의 오랜 영혼의 편력과 투쟁은 그리스 정교회와 교황청으로부터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그의 대표작 <미칼레스 대장>,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그리스인 조르바>가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파문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1951년, 56년 두 차례에 걸쳐 노벨 문학상 후보에 지명되는 등 세계적으로 그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다른 작품들로는 <오뒷세이아>,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 <성 프란치스코>, <영혼의 자서전>, <동족 상잔> 등이 있다.(*아래 사진은 그의 묘지.)

 

해서, 카잔차키스와 한 계절을 나보는 것도 인생을 사는 한 가지 방법으로 나쁘지 않을 듯하다...

06. 05. 09-10.

P.S. 참고로, <메타피지컬 클럽>에 대한 한겨레신문(06. 05. 12)의 리뷰를 일부 옮겨온다. 작성자는 한승동 기자이다.

-2002년 퓰리처상 수상작 <메타피지컬 클럽>(민음사 펴냄)은 이 윌리엄 제임스와 법학자 올리버 웬들 홈스, 논리학자이자 과학자이며 기호학 창시자인 찰스 샌더스 퍼스, 철학자요 교육학자인 존 듀이 등 남북전쟁 이후 반세기의 미국 지성사를 지배한 네 거인 얘기를 중심으로 미국현대사를 재구성한다. 다양한 이력과 철학의 소유자인 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공통분모는 그들이 실용주의로도 번역되는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창시자들이라는 점이다. 부제도 ‘오늘날의 미국을 만든 단 하나의 사상 프래그머티즘은 어떻게 탄생했는가’다.

-하지만 이 책은 그들의 철학적 논의를 다룬 것이 아니라 ‘역사적 해석작업’이다. 따라서 딱딱하지 않다. 그들 4명에 관한 전기적 서술형식을 취하면서도 그들뿐만 아니라 부모와 형제 등 풍성한 가족 얘기, 그들 사이를 이어주는 에머슨, 다윈, 아가시 등 당대의 숱한 유·무명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들 사람얘기를 중심으로 전쟁과 정치, 과학과 철학, 인류학과 심리학, 종교와 교육, 법, 인종문제, 노동운동 등 다양한 주제들을 매우 구체적인 실증자료들을 토대로 정교하게 엮어 흥미진진하게 당대사정을 쫓아가는 재미가 있다.

-‘메타피지컬 클럽’이란 메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의 윌리엄 제임스 서재에 모이곤 했던 젊은 지식인들, 말하자면 이 책의 주인공들이 자신들 모임에 “반은 비꼬는 의미로, 또 반은 반항적인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1872년 1월에 결성됐고 퍼스, 홈스 외에 세인트 존 그린, 존 피스크, 첸시 라이트, 프랜시스 엘링우드 애벗 등이 멤버였다. (물론 인종차별주의자 애거시 등 기성 가치의 대변자들은 이 클럽 멤버가 아니었으며, 제임스는 애거시의 과학학교 제자였으나 그의 사상적 후예는 아니었다.) 9개월 정도밖에 존속하지 않았지만 미국사를 바꿔놓은 프래그머티즘의 산실이었다.

-모든 것은 남북전쟁(1861~65년)에서 시작됐다. 신무기와 전술 교체기에 일어나 엄청난 인명피해를 낳았던 그 전쟁 뒤 연방체제는 살아남았으나 미국은 거의 모든 면에서 새로운 나라가 됐다.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상흔을 남기는 전쟁들이 그렇듯 남북전쟁도 그 시대의 신념과 가설들을 의심하게 했다. 신념들은 미국이 전쟁으로 치닫는 것을 막지 못했고, 그래서 그것들은 전후의 새로운 세계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것처럼 보였다. 남북전쟁은 남부에서 노예제 문명을 쓸어버렸지만 그와 함께 북부의 지적 문화 거의 전부가 쓸려나갔다. 미국이 그 문명을 대체할 문화를 계발하고, 사상들을 찾아내고, 사고방식을 확립하는 데에는 거의 반세기가 걸렸다. 그 발버둥이 바로 이 책의 주제다.”

 

-듀이 등 네 사람은 그 발버둥의 중심에 있었고 그들이 새로 짜낸 사상은 교육, 민주주의, 자유, 정의, 관용에 관한 미국인의 사고방식을 바꿔놓았다. 그들의 프래그머티즘은 관념적 진리 추구에 매달려온 유럽철학 전통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인간 이성의 상대성·우연성·오류 가능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우리가 전적으로 어떤 진리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다른 진리들이 사실일 가능성은 항상 있다. …우리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는 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방식, 사실들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 우리가 보여주었던 관용에서 기인한다. 양자택일은 폭력이다, 프래그머티즘은 사람들의 신념이 쉽게 폭력으로 변질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었다.”

-2차대전 뒤 양자택일식 냉전 이데올로기가 판치면서 빛을 잃었던 프래그머티즘은 냉전 붕괴와 함께 적어도 반대입장을 경청하는 관용과 다양성 측면에서 부활의 조짐을 보였다. 그러나 네오콘 등장, 테러와의 전쟁이 상징하는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우리 편 아니면 적’식의 패권전략추구와 더불어 빛은 다시 꺼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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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10 09:15   좋아요 0 | URL
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서광사 판에서 손질된 게 있을까요? 서광사 판을 가지고 있는데 수정된 게 있다면 또 사야하는지...쩝...역자는 같은데 말이죠.

로쟈 2006-05-10 09:56   좋아요 0 | URL
저도 책의 실물은 보지 못한지라 당여히 대조해 보지도 못했습니다. 완전 개역본일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전 판본들이 절판된 상태이기 때문에 반갑다는 것이고, 제가 기대하는 건 이전에 출간되지 않았던 책들입니다...

비로그인 2006-05-10 22:58   좋아요 0 | URL
근데 비트겐슈타인 입문서 박병철 교수 것 원츄입니다.=.= =b
제가 처음으로 읽은 철학책인데. 2번 읽고서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얇으면서도 아주 좋아요.

근데 루이스 메넌드는 토마스 쿤과 관련이 있는 그 하버드대 총장 역임한 사람과 동일 인물인가요?

로쟈 2006-05-10 23:20   좋아요 0 | URL
이력에서 '하버드 총장' 얘기는 안 보이던데요... 2003년부터 하바드에서 재직중이긴 합니다. 책갈피와 알라딘에서 '뉴욕시립대학교' 교수라는 소개는 한물간 정보네요. 인터넷 검색에 10초만 투자하면 알 수 있는 내용인데...

yoonta 2006-05-10 23:32   좋아요 0 | URL
철학적 탐구 서점에서 얼핏 봤는데 잘못된 곳 바로잡았다고 하더군요. 껍데기만 바꾼 책은 아닌듯 합니다.

yoonta 2006-05-11 02:53   좋아요 0 | URL

비트겐슈타인 관련책 중에서는..

 

 

 

 

요 책이 아주 좋은 것 같더군요..평전이기도 하면서 그의 철학과 그 변화과정을 잘 살펴볼수있는 책입니다..

 초,중,고급 독자 모두에게 유용할듯 합니다.


로쟈 2006-05-11 09:0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이중에 저도 자주 언급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생략했습니다.^^

루들 2006-05-11 16:00   좋아요 0 | URL
쿤과 관련 있는 하버드대 총장은 제임스 코넌트(James Conant)를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최근에 눈길을 끈 외신 기사 두 건을 옮겨놓는다. 나중에 글감이 될 만하겠기에 일단은 '자료'로서 보관해놓고자 하는 것인데, 주제는 '남성'이다. 두 기사 모두 한국일보에 게재된 것으로 첫번째 기사는 '남성 피임약 세계 첫 개발'이란 제목이고, '슈퍼 정자'를 다룬 두번째 기사는 "아빠는 큰 키…푸른 눈…만능 스포츠맨…박사"란 제목이다.

 

 

 

 

한국일보(06. 05. 01) 정자 생산을 중단 시키는 남성 피임약이 세계 최초로 개발된다. 세계적인 의학전문지 란셋(Lancet)은 최신호(28일자)에서 호주와 유럽 14개 지역 등에서 1990~2005년 18~51세 남성 1,500명을 대상으로 30차례 실시한 임상시험 결과,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과 여성호르몬 프로게스트로겐을 함유한 남성 피임약이 100% 효과를 거두었다고 보도했다. 독일 쉐링과 네덜란드 오가논 제약사가 개발한 이 피임약은 향후 3~5년 내에 세계 최초로 시판될 것으로 보인다.

-이 호르몬제 남성 피임약은 여성용 피임약이 배란을 중지시키는 것처럼 정자 생산을 중단시켜 피임효과를 거둔다. 제약사들은 몸에 심는 임플란트와 먹는 약 등 2가지 형태로 만들어 시험해 왔다. 이 남성 피임약은 성욕감퇴 체중증가 우울증 등의 부작용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으며, 일부 임상시험자는 오히려 성욕이 증가했다. 남성 피임약 사용을 중단하면 3~4개월 뒤에는 정자 생산 능력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다.

-연구 책임자인 호주 시드니대 피터 리우 박사는 “이 남성 피임약은 신뢰성이 높고 복원이 용이하기 때문에 콘돔이나 정관수술 등 기존 남성 피임법보다 더 우수하다”고 말했다.

(*)여성 피임약의 개발이 원하지 않는 임신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프리섹스'를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여성의 자기결정권 향상에 혁명적인 기여를 했다는 점은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피임의 책임은 상당 부분 여성에게만 전가해온 것도 사실이다(더불어 '구멍난 콘돔'의 공포도 여전히 연인들을 부자유스럽게 했었다). 이제, 번거로운 수술 대신에 사용이 간편한 먹는 피임약이 상용화된다면, '피임'에 대한 책임은 남녀가 공평하게 나누어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경우, 남성 피임약은 남녀평등이라는 '의식'의 한 가지 물적 토대가 되어주는 것. 상상임신은 가능하지만, 상상피임은 가능하지 않다. 다시 말해서, 피임은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리고 '현실'이 바뀌어야 '관념'도 바뀌게 된다(혹은 현실은 관념의 변화를 강제한다).   

한국일보(06. 05. 08) 몇 차례 인공수정을 시도했다 실패한 미국 여성 멜리사 와이스(39)는 며칠 전 인터넷에 ‘물건’을 내놓았다. 6년 전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정자은행에서 3,000달러를 주고 산 ‘401호 정자’ 세트였다. 인공 수정이 실패한 그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내놓았는데 순식간에 팔렸다. 뒤늦게 ‘돈을 달라는 대로 줄 테니 남은 것이 없느냐’는 간청도 쏟아졌다. 와이스가 내놓은 401호 정자는 ‘슈퍼 정자’라 불리는 최고품이었다. 수요가 너무 많아 이미 2년 전 동난 것이었다.


 

 

 


-좋은 유전자를 갖고 있거나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충할 정자로 수정하는 ‘맞춤형 수정’이 늘면서 이처럼 일부 품질 좋은 정자는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 401호 정자를 제공한 주인공에 대한 관심도 가히 폭발적이다. 정확한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일계로 193cm의 큰 키에 푸른 눈과 갈색 곱슬머리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사 학위에다 만능 스포츠맨이며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효자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제공받아 태어난 아이가 매년 3만명이 넘었고 특히 같은 정자로 태어난 아이가 갈수록 늘고 있다. 401호 정자로 25명이 태어났고 한 보디빌더의 정자로도 같은 수가 탄생했다. 언론은 401호 정자 제공자를 추적하는 한편 미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401호 정자로 태어난 아이들을 일일이 찾아 이들을 비교하는 기사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401호 정자를 통해 아이를 낳은 엄마들은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받은 여성과 제공받은 정자로 태어난 사람들을 위한 인터넷사이트에서 육아 정보를 주고 받고 있다. 직접 만나 휴일이나 주말을 함께 보내기도 한다.

-이들 역시 정자 제공자가 누구인지 무척 궁금하지만 ‘사생활을 보호 받고 싶다’는 정자 제공자의 바람대로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같은 정자로 태어난 아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근친상간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영국은 법으로 같은 정자를 제공 받을 수 있는 여성 수를 10명으로 제한했지만 미국은 개별 정자은행 자율에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기사를 읽고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올린 것은 네덜란드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1995)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 안토니아는 임종을 앞둔 어머니를 찾아 딸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마을에 정착해 어머니의 오래된 농장을 운영하면서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 영화는 독립적인 여성, 안토니아를 중심으로 모녀 4대가 엮어가는 삶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그려나가는 가족 연대기라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적 삶의 방식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인 이 영화에서 아이를 갖기 위해 남자를 구하러(실상은 '정자를 구하러') 다니던 모녀의 모습이 얼핏 떠오른 것.

 

 

 

 

정자은행은 이제 그런 '수고'가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시대를 만들어놓았다. 더불어, 일부일처제의 근간도 미래에는 위협받을지 모르겠다. 자신의 정자로 25명의 아이들을 낳는다면, 유전자적 관점에서는 이미 '일부다처제'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큰 키…푸른 눈…만능 스포츠맨…박사"의 정자(유전자)가 선호된다면, 그보다 열등한 남성의 정자는 피임은커녕 갈수록 짝을 찾기 힘들어질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도래할지도 모르는 '슈퍼 정자의 시대', 그건 역설적으로 남성이 '제2의 성'으로 확실하게 전락하는 시대를 뜻하게 될는지?..

06. 05.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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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6-05-0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공공연한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에도 난자 불법거래가 있잖아요. 공부 잘 하는 이쁜 여대생 난자가 극히 선호되죠. 쩝.

2006-05-09 0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6-05-09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끌리는 제목이군요. 저도 한국일보서 그 기사 봤어요. ^^

로쟈 2006-05-09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관련 분야에 계신가요?^^
아프락사스님/ 뭔가 쓰고 싶도록 만드는 기사였습니다. 한데, 이 페이퍼는 (당장에는) '쓰지 않기 위해서' 올려놓은 것이긴 합니다.^^

조선인 2006-05-10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관련 분야가 아니라요, 여대 나왔거든요. 사례를 좀 알죠.-.-;;
 

뜻밖의 신간을 만나는 반가움의 반대편에는 없는 돈을 축내지 않아도 좋은 고마움이 있다(*이 글은 2003년 3월초에 씌어졌다). 서점에 갈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것이 바로 반가움이거나 고마움이다. 지난 두주 동안에도 많은 책들이 나왔지만(요즘 출판계를 불황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행히도 눈길을 끄는 책은 많지 않았다. 반가움보다는 고마움이 더 앞섰던 두주였다. 그럼에도 주목할 만한 책들 몇 권을 적어본다.

 

  

 



맨처음에 소개하고 싶은 책은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을유문화사)이다. 영화잡지 <프리미어>팀이 옮겼는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에버트는 퓰리처상까지 수상한 바 있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평론가이다. 나는 인터넷상에서 러시아 영화에 관한 그의 기사 몇 편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의 글들은 모아놓으면 더 힘을 발휘하는 거 같다(이와 반대되는 저자들도 많다). 추천사를 쓴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말을 빌면, "젠체하지 않고 냉소적이지 않으며 무한한 애정으로 영화를 껴안으면서 정확하게 분석적 거리를 유지하는 평문"들을 그의 책에서 만나볼 수 있다. 더불어, 들뢰즈, 라캉을 들먹여야지만 영화평론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이번주 <씨네21>의 특집도 '48권의 책으로 읽는 감독의 길'이었다. 그중 기자들이 비교적 길게 리뷰를 쓴 책들은 10권인데, 참고로 그 목록을 적어둔다. <채플린-거장의 생애와 예술>(한길아트),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길>(민음사), <나의 인생 나의 영화 장 르누아르>(시공사), <데즈카 오사무- 만화가의 길>(황금가지), <잉그마르 베르이만의 창작노트>(시공사), <히치콕과의 대화>(한나래), <올리버 스톤1,2>(컬쳐라인), <로저코먼- 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백 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푼도 잃지 않았는가>(열린책들), <펠리니>(한길사), <마틴 스코시즈- 비열한 거리>(한나래) 등이다.

나는 이 열권 중에 <감독의 길>(구로자와 아키라)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 <펠리니>는 그냥 갖고 있으며, <히치콕과의 대화>는 분실했다(조감독하는 동생 친구가 가져가버렸다, 필시). 해서 한때 영화평론에도 생각이 없지 않았던 자신이 다소 부끄러워졌다. 물론 영화관련서들을 몇십 권 갖고 있지만, 그래봐야 최소한 읽을 책의 3할이 못되는 책인 것. 하물며, 봐야할 영화들은 또 얼마나 봤을까?.. 참고로, 아주 최근에 영어로 된 러시아 영화 소개서 한권이 나왔다. 저자는 D. Gillespie이고 책제목은 'Russian Cinema'이다. 200쪽이 안되는 비교적 얇은 분량이다.

 

 

 

 

노마디스트들에겐 반가운 소식으로,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인간사랑)이 번역돼 나왔다(*내가 아직까지 번역서를 안 갖고 있는 거의 유일한 들뢰즈 책이 아닌가 싶다. 번역에 대해서는 그리 후한 평을 얻고 있지 못한 책이다). 들뢰즈가 쓴 스피노자 책은 두 권인데, <표현의 문제>는 그 중 두꺼운 책이다. 언젠가 철학과 대학원에서 스피노자 강의를 몇 차례 청강한 적이 있는데, 그때 부교재의 한권이었고, 나는 그 영역본을 갖고 있다. 하지만 도중하차했기 때문에 책의 내용이나 비중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의 철학사상>(갈무리) 정도를 참고해봐야겠다(*하트의 책은 <들뢰즈 사상의 진화>로 재번역돼 나왔다).

 

 

 

 

그리고 또 한권의 철학책. '이달의 철학자' 헤겔의 <믿음과 지식>(아카넷)이 번역돼 나왔다. 서점에 아직 진열되지도 않은 채 쌓여 있는 걸 봤는데, 분량이 그리 두껍지 않다. 헤겔 책을 그래도 남들만큼은 갖고 있는 편이지만, 신간은 전혀 생소하다. 야코비 등의 신학/철학에 대한 비판서인가 싶다. 하지만, 내가 더 바라는 것은 <정신현상학>이 좀더 읽을 만한 수준으로 재번역되는 것이다(*알다시피 이후에 <정신현상학>은 임석진 교수의 번역으로 개정본이 출간됐다. 그것이 '좀더 읽을 만한 수준'인가는 모르겠다. 몇 안되는 서평을 읽어봐도 가늠할 길이 없다).

 

 

 



-쥬디스 버틀러의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인간사랑)도 소리소문없이 번역돼 나왔다(원제는 'Bodies that matter'). 쥬디스 버틀러는 낸시 프레이저와 함께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는 영미권 여성철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이다. 페미니즘적 라캉 독해로 우리에겐 알려져 있는 듯한데, 신간은 최초로 번역된 그녀의 단행본 저작이다. <라캉의 재탄생>(창작과비평사, 2002)에 실린 라캉과 버틀러에 관한 장을 참조할 수 있다.



 

 

 

국내 저작으로는 주은우의 <시각과 현대성>(한나래)이 출간됐다.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손본 것인데, 이 주제에 관한 가장 묵직한 국내 저작이다. 아직 통독하지 않아서 뭐라 말할 순 없지만, 학위논문으론 김종엽의 <연대와 열광- 에밀 뒤르켐의 현대성 비판 연구>(창작과비평사, 1998)과 함께 가장 궁금했던 책이었다.

 

 

 

 

묵직하기론 <리오리엔트>(이산)도 만만찮다. 종속이론가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신작인데, 나로선 저자의 이름만 얼핏 들어본 적이 있다. 나로선 당분간 읽을 겨를이 없는 이 책에 대해선 중앙일보에 실린 최갑수 교수의 서평을 참조하시길.

 

 

 



영미문학연구회의 고전문학 번역평가 사업이 샘플이 공개됐다. 그 결과는 오늘자 한겨레에 실려 있다. 샘플 작품은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인데, 검토대상이 된 21종 가운데, 14종이 표절번역이었고, 나머지 7종도 거의 읽을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한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사태는 상당히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영미문학학회지인 <안과 밖>에도 매호 고전 번역을 검토하는 글이 실리는데, 지난호의 경우 도 결론은 디킨즈의 <위대한 유산>을 우리말로는 읽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평가사업의 보고서가 내년초쯤 책으로 출간된다고 하니까 기다려봐야겠지만(*2005년에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로 출간됐다), 총체적인 문제의 점검에 이어서 새로운 재번역서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사실 이런 평가사업은 다른 분야의 고전들에도 확대 적용되어야 한다. 학진(학술진흥재단)이 제대로 돈을 써야 하는 사업분야는 바로 이런쪽이다.

최근 일간지 북리뷰들에서 비판적인 읽기 코너들이 생겨나고 있어 고무적이다. 지난번에 소개한바 있던 중앙일보의 죽비소리가 그 스타트를 끊은 것인데, 출판계의 반응도 즉각적이다. 오역이 많은 걸로 지적된 <루시의 유산>과 <붉은 여왕>의 출판사측에서는 해당책들을 환불조치하거나 개정판과 교환해줄 방침이라고 한다. 언론의 파워가 이런 거구나 싶은데, 하여간에 좀 뻔뻔한 (부실한 지젝 번역서들을 양산하고 있는) 인간사랑을 비롯하여 몇몇 출판사들도 이 참에 각성했으면 싶다. 그리고 도서정가제가 실시되고 있으므로 책값의 거품도 좀 빠졌으면 싶고.

가만히 입다물고 있으면 좋은 책들이 거저 나오는 게 아니다. 책을 사랑하는 이들의 악착같은 관심과 비판이 더욱 요긴한 계절인 듯싶다...

2003. 03.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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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h1999 2006-05-09 02:30   좋아요 0 | URL
제 글에 리플 남겨주신 분 맞지요? 글이 굉장히 많네요.. 앞으로 자주 뵙겠습니다.

로쟈 2006-05-09 10:32   좋아요 0 | URL
예, 한 2-3년 되다 보니 많은 축에는 들어가는 모양입니다. 자주 오실 정도는 아니고 가끔 들러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