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에 대한 비판에는 어떤 것들이 있냐고 에바님이 물어오셔서 몇 군데 검색을 해봤다. 몇 편의 글들에 대한 서지 정도를 확인해두었는데, 영문 서지인지라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그러다 우연히 눈에 띈 건 다름아닌 내가 3년전에 쓴 것이다. 다시 읽으며 약간의 '시간차'를 느끼게 되지만, '자료'로 치면 무난할 것도 같아서 그냥 옮겨놓는다(지젝에 관해 쓴 자료들을 다 옮겨놓은 줄 알았는데 창고에 없다!).  

인터넷 검색(산책)을 하다가 작년(*2003년) 10월 6일자 이대학보에 실린 '지젝 특집'을 읽게 되었다. 당시 각 대학 학보마다 지젝의 방한을 맞이하여 학술면 특집을 마련했더랬는데, "욕망과 실재로 현대사회를 본다"라는 이 특집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이 특집은 "사회를 구하는 환상, 이데올로기"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지젝의 작업을 개관하는 기사와 함께, 각각 그의 행동적 지식인으로서의 실천에 대한 지지와 이론적 작업에 대한 비판을 담은 짧은 기고문 두 편으로 구성돼 있다. 내가 제목에서 '두 가지 의견'이라고 한 것은 이 두 기고문을 말한다.

먼저 허윤(국문4)은 자신이 지젝을 좋아하는 이유를 열거한다: "그는 학문이 삶과 괴리되지 않음을, 사상이 현실을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라는 것을 보여주는 활동가다. 이것이 내가 지젝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사람들은 학자는 상아탑에 갇혀 현실을 보지 못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젝은 상아탑의 높은 벽을 부수고 두 발을 땅에 붙인 채로 자신의 사상을 펼친다. 개인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 보는 것으로 여겨졌던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을 현실사회와 연결시키고 현실을 개선해 나가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이 짧은 기고문의 마무리인데, 여기에 그대로 옮긴 이유는 내가 지젝을 좋아하는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근래에 나는 그보다 열정적인 목소리로 우리의 전지구적/인간적 현실에 대해서 발언/비판하는 사례를 보지 못했다(<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내가 작년에 읽은 가장 감동적인 책이다). 지난번 방한 강연회에서의 그의 거친 목소리와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복장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바이지만, 그는 이론적/사회비판적 저작들을 계속 내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즘의 인물은 아니다. 요컨대 '교수'나 '학자' 타입이 아니라, '활동가'이다.

사실 그가 슬로베이나의 류블랴나 대학에서 맡고 있는 지위도 우리식의 '연구교수' 같은 것이어서 강의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그는 강의로부터 면제돼 있다). 그것은 슬로베니아 당국 혹은 대학권력과의 마찰/불화의 결과이지만, 그는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전화위복으로 삼는다. 우연찮게(우연은 아니다. 그는 대담에서 영화에 대한 관심/열정은 철학보다도 앞선 것이었다고 말하니까) 대중적인 영화들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으로 '뜨게' 되었지만, 그의 그러한 '전술'은 사실 기대 이상의 효과를 낳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건 충분히 훌륭한 '미끼' 역할을 해준 것이니까. 사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부터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친-지젝파들은 애초에 라캉을 읽어보겠다는 욕심을 갖지 못했거나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다.

대담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의 라캉 이해는 전적으로 자크-알랭 밀레에 기대고 있다. 밀레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지젝도 가능하지 않았을 법하다. 하지만, 그가 이론가이자 해석가로서 밀레와 구별되는 지점은 이미 언급되었다시피, 그가 '활동가'라는 점에 있다. 물론 그가 활동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라캉의 이론과 독일 관념론 같이 아주 난삽한 '이론'이긴 하지만, 이때의 이론은 이미 실천으로서의 이론이다. "정신이 뼈"라는 헤겔의 문구를 반복하자면, 그에게는 "이론이 곧 실천"이다(반면에 '실천적 이론'이라거나 '이론적 실천'이라는 표현은 여전히 이론/실천의 이분법적 도식안에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와 작업,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열정은 '연구'에 바빠서 미처 사회적 '활동'을 할 만한 여가가 없는 책상물림들에겐 충분히 자극적이며 모범이 될 만하다. 그러한 모범에 따른다는 것은 무사안일하게 'mere life'나 'mere study'에 함몰돼 있는 '왜소한' 자신의 삶/학문을 더이상 방치하지 않는 것이며, 지금까지의 습관/관행을 "이건 아니지!"라고 거부하는 것이다.

이어서 진태원(서울대 철학과 강사)은 지젝의 세계적인 유명세("동유럽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주류 철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를 진단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이론'(이건 비교문학쪽 소관이다)과 '철학'(분석철학이나 현상학)을 구분하는 미국 학계의 제도적 특성 때문인데, "더 나아가 이는 지젝의 논의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즉, "지젝은 정교한 논변을 제시하는 전통적인 철학자들과는 달리 다양한 대중문화의 사례들의 제시를 통해 자신의 이론, 곧 라캉의 정신분석을 예증하는 논의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주장을 설득시키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이론의 타당성을 따지기 어렵게 만든다." 이것은 같은과 김상환 교수의 "지젝은 여러 이론들의 활로를 찾는 공을 세웠지만 독자적인 이론가는 아니"라는 평가와도 맥을 같이 한다.

사실, 이러한 평가/비판은 니체의 철학을 무체계적이라고 하여 '문학류'로 취급하거나, 데리다의 철학을 지나치게 수사적(동시에 수행적)이라고 하여 '비철학'으로 간주해버리는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데리다의 <에코그라피>를 번역하기도 한 이에게서 이러한 태도를 다시 확인하는 것은 다소 의외이다. 국내 '유일의' 데리다 전문가 김상환 교수의 평 또한 그간에 '데리다'에게 쏟아졌던 단골 비판이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다. 문제는 지젝의 실재가 아니라 지젝의 대가적 명성을 아직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함'이 아닐까?

진태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또한 지젝의 급진적인 사회적 변혁에 관한 주장은 경험과학적 지식으로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어 논증적 효력이 떨어진다"고 비판하는데, 이 또한 비판을 위한 비판밖에는 되지 못한다. 최근에 바울이나 레닌에 경도되어 있는 지젝에 따르면, 진정한 행위(act)는 어떤 계획이나 고안에 의해서 성취/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겪어낸다거나 통과한다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다. 경험과학적 지식에 의해 뒷받침된 사회변혁의 사례가 과연 있었던가? 지젝의 말대로, '지식'은 사후적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의미화하기 위해서 마련되는 것이다. 지젝도 인용하고 있는 영국 사회철학자 존 엘스터에 따르면, 새로운 것은 항상 "본질적으로 부산물인 상태"이지, 결코 선행 계획의 결과가 아니다. 지젝이 강조하고 있는 행위에의 결단에 대해서,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지식(증거)를 제시하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내보여라, 그럼 신을 믿겠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신앙은 도약의 문제이다).

평자는 당부의 말로 덧붙인바, "앞으로 '이론가' 지젝의 핵심과제는 라캉 사유의 약점이기도 한 '진리와 경험적 지식 사이의 괴리'를 해결하는 것인 듯하다"라고 했는데, 평자가 과연 "진리와 경험적 지식 사이의 일치'(이건 상당히 프래그머티스틱한 주장인데)야말로 이론의 목적이자 철학의 지향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좀 의심스럽다. 평자가 전공한 스피노자가 과연 그러한 철학자이며, 헤겔이 그러한 철학자이며, 알튀세르가 그러한 철학자인가? 그러한 논리에 따르면,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양자역학의 진리(이론)는 전부 넌센스가 될 것이고, 무의식의 진리(앎)를 말하는 정신분석학 또한 잠꼬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사실 지젝이 재미있게 읽히는 것은, 내 경우에, 상당히 역설적이고 급진적인 그의 주장들이 매우 실감있다는 점 때문이다. 말 그대로 아주 리얼한 것이다. 책속의 진리야 말로 지젝이 혐오해 마지 않을 만한 것인데, 지젝의 '이론'을 책속의 진리로만 치부하는 것은 비판으로서도 좀 고약하다...

04. 01. 07/ 07. 0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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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1-14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아, 이것이 지난번에 어느 페이퍼에서인가 암시(?) 되었던 로쟈님과 진태원님의 견해 차이군요. ^^

로쟈 2007-01-14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캉이나 지젝이나 모두 거부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게 수용되는 거라고 했으니까 학계/대학에서의 거부감 같은 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만 제생각엔 거부의 '논리'가 불충분한 게 아닌가 싶어요...

sommer 2007-01-15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부정성으로 귀결되는 '반성'과 무관하게 '행위'를 강조하는 '형이상학적 활동가'가 곧 지젝이 아닐까 생각을 해 봅니다. 하이데거가 실패했던 그 지점에서 물구나무를 서는...사례가 곧 이론이 되는 '매뉴얼'처럼 말이지요...

로쟈 2007-01-1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행위'가 '자기부정성'(반성)과 무관하다고 보시는 건가요? 오히려, 자기부정, 지젝식 용어로는 자기철회의 제스처가 바로 행위인데요. '형이상학적 활동가'란 명칭도 형이상학을 새롭게 정의하지 않는 한 지젝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suture님의 자세한 입론을 기대합니다...
 

안톤 체호프의 '희극' <갈매기>가 정초에 무대에 올려진다는 소식이다. 전세계에서 <햄릿> 다음으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라고 하니까 드문 일도 아니며 이상한 일도 아니다. 다만 국내에서 공연되는 <갈매기>를 본 적이 없어서 얼마간 흥미는 갖게 된다. 공연기간이 짧아서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매일경제(07. 01. 11) 안톤 체호프 `갈매기`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인간

'인간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하면서 자신에게만은 철저히 몰두한다.'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가 한 말이다.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그의 정의는 탁월하다.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르면서 사랑하고 싶어하고 또 사랑받고 싶어하는, 상대에게 진정으로 뭔가를 주는 데는 지독히 서툴면서 자신은 의지하고 기대고 싶어하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인 까닭이다.

극단 여백(대표 오경환) 창단 10주년 기념작 '갈매기'는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잘 그린 연극이다. 모자 관계인 여배우 아르카지나와 작가 지망생 코스차, 아르카지나의 애인인 소설가 트리고린, 배우 지망생 니나의 얽히고 설킨 관계를 통해 자기애에 빠져 타인의 고통에 무심하고 사랑에도 서툰 인간의 모습을 고찰한다.



'갈매기'는 '세 자매' '벚꽃동산' '바냐 아저씨'와 더불어 체호프의 4대 장막극 중 하나. 명확한 사건이나 주제가 없어 난해한 작품으로 알려졌지만 체호프 서거 100주년이었던 2004년부터 지난해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극단에 의해 여러 차례 공연된 바 있어 연극 애호가들에게는 익숙한 작품이다.

평범하고 하찮기까지 한 일상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삶의 진실을 섬뜩할 만치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는 점이 '갈매기'의 가장 큰 매력이다. 작품 번안과 연출을 맡은 오경환 대표는 "'갈매기'는 우리가 얼마나 끔찍하게 삶을 흘려보내고 있는지를 투명하게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말했다. 선종남 유준원 박현미 박찬국 정선철 이보영 등이 출연한다. 16~21일 대학로 우석레퍼토리극장. 2만~2만5000원. (02)762-0810(노현 기자)

07. 01. 14.

Чехо в театре - Чайка
 
P.S.  사진은 극단의 동료들에게 <갈매기>를 읽어주고 있는 안톤 체호프(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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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4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1-14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글쎄요, 체홉의 작품으로는 들어본 바가 없는데요(제가 두루 알지는 못하지만). 체홉의 작품으로는 좀 '쎈' 설정 같기도 하구요(일단 누굴 죽이고 하는 얘기가 그의 취향은 아니라서요). 체홉의 작품이라면 놀랄 일이지만, 아무래도 후자쪽 같습니다...

릴케 현상 2007-01-25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매기는 연영과 애들이 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아 보고 싶네염
 

작년에 '2006년의 영화책'으로 <트뢰포>(을유문화사, 2006)와 함께 꼽았던 책이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을유문화사, 2006)였다. 우연찮게도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됐는데, 이 책에 대한 서평으로 연초에 읽어두었던 것을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지난 2003년에 반쪽짜리 책이 나왔을 때 추천사를 쓰기도 했던 영화평론가 김영진씨의 칼럼이다. 저널리즘의 현장에서 씌어진 '적임자'의 서평이다. 더불어 기대하게 되는 것은 한국 영화비평에서의 '로저 에버트들'이다. '들뢰즈들'이나 '지젝들' 말고.

필름2.0(07. 01. 05)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에 대한 서평

얼마 전 모 신문사의 신춘문예 영화평론 심사를 맡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래의 평론가를 꿈꾸며 보내온 글들을 숙독했다. 장년층의 필자들도 상당수 있었던 것이 특기할 만했으며 글에 인용되는 지식의 범주가 꽤 광범위해서 은근히 놀랐다.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똑똑한 글들이 많은데 인상적인 글이 적다는 것도 신기했다. 대다수의 글들이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는 주인 입장이 되어 평론 대상이 되는 영화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었다. 이렇게 위압적이며 수직적으로 어떤 특정지식에 의지해 영화를 내려다보며 훑는 글은 매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똑똑한 티가 나긴 하지만 글을 읽고 나면 거기 분석된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다. 영화와는 상관없는 성실한 대학원생의 리포트를 읽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좋은 평론은 언제나 작품과 수평적으로 대화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평론이, 평론이 아니라 이론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1960년대의 구조주의 열풍 이후 한때 영화학계의 신념이 됐다. 검증될 수 없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며 영화가 좋다,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삼류 저널리즘의 인상비평에서나 할 짓이라는 통념은 오늘날에도 완강하게 통용되고 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런 글들에서는 대개 열정과 공감이 사라진 것을 보게 되는 대신 평자들이 표현자와 맞먹으려 들며 과시하려 드는 자기도취의 흔적을 보게 된다. 평자가 표현자의 위치에 오르려는 것은 자연스런 욕망이며 그게 결핍의 표현으로써 시지푸스의 운명처럼 거듭된 성실성으로 나타날 때 위대한 평론이 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와 반대로 평자가 이미 표현자의 자의식을 갖고 대상이 되는 작품을 제멋대로 갖고 놀며 군림하려 들 때 그 평론은 추악해지기 쉽다. 영화보다 평론가의 자의식과 지식이 더 돋보이는 대다수의 평론은 그래서 불편하다. 이게 동시대의 대중뿐만 아니라 동업자들끼리도 평론을 잘 읽지 않는 이유다.



그런 심정으로 나름대로 반성하고 있는데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 1권의 개정판과 <위대한 영화> 2권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1권의 추천사를 쓴 사람의 입장에서 그 뉴스는 기분 좋은 것이었다. 미국의 스타 평론가의 글을 묶은 두툼한 분량의 책이 상당량 팔려나갔다는 것은 여하튼 이곳에 평론을 읽는 독자들이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필자는 사실 <위대한 영화> 역서를 읽기 전에는 에버트의 평론집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시카고 선타임스’에서 수십 년 동안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름을 건 텔레비전 비평쇼를 진행하는 이 할아버지 평론가는 지금도 엄청나게 많은 양의 평론을 쓰고 있지만 그가 텔레비전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거나 내리거나에 따라 때로 영화의 흥행 성적이 갈라지는 그 위대한 영향력 말고 대체 취할 것이 뭐가 있겠느냐 싶었다.
이런 선입견은 인정에 끌려 추천사를 써줘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정식 출판되기 전의 역서를 읽은 후 손쉽게 무너졌다. 영화평론가로서는 미국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에버트의 경력이 괜한 허명은 아니었다는 자책이 생겼다.

기자로 시작해 평론가로 자리 잡은 에버트의 글은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도 읽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명료하고 쉽다. 사람들은 그의 글을 읽고 영화를 볼까 말까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토록 폭력적인 저널리즘 독서 환경에서 단련된 에버트의 문장은 담담하면서도 신중하고 때로 신랄하며 종종 열정적이다. 그는 개봉영화들을 따라가는 집필활동 틈틈이 고금의 명작들을 소개하는 칼럼을 쓰고 그 영화들을 스크린으로 상영하는 영화제를 개최하며 관객들과 일주일 동안 특정 영화를 숏 바이 숏으로 분석하는 세미나를 열기도 한다. <위대한 영화>는 그런 에버트의 과외활동의 산물인데,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에버트가 점점 더 많이 영화를 알아가는 사랑의 방식이 독자에게도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는 솔직하게 예전 기자 시절에 썼던 영화평의 태도를 스스로 비판하기도 하고, 접하지 않아 일정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독자들에게 강요하지 않고도 명작들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준다.

에버트의 책 초고를 읽으며 근사한 문장이 나올 때마다 옮겨 적던 필자는 그게 10쪽을 넘어가자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영화의 이미지가 주는 매력을 활자로 따라잡는 불가능한 임무를 때로 해내는 에버트의 손이 행한 기적에 부러움을 느꼈다. 이를테면 그는 니콜라스 뢰그의 매혹적이지만 플롯이 헝클어진 영화 <쳐다보지 마라>를 옹호하면서 이렇게 쓴다.

“유령이 출몰하는 도시 베니스가 〈쳐다보지 마라〉에서보다 더 우울한 모습을 보였던 적은 결코 없었다. 도시는 광대한 공동묘지처럼 보이고 돌덩이들은 축축하고 연약하며 운하에는 쥐떼가 우글거린다. 앤소니 B. 리치몬드와, 크레딧에는 오르지 않은 뢰그가 담당한 촬영은 베니스에서 사람들을 제거해버린다. 북적거리는 길거리나 대운하 인근에서처럼 베니스 거주자나 관광객들을 볼 수 있는 몇 가지 장면이 있지만, 존과 로라가 (처음에는 함께, 나중에는 별도로) 길을 잃는 한결같은 두 장면에서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거리와 다리와 운하와 막다른 골목과 잘못된 모퉁이는 그것들끼리 서로서로 포개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에버트는 이런 유형의 영화들이 ‘플롯에서 자유롭고, 어떤 최종적인 설명도 제시하지 않는, 하나의 체험으로만 존재하는 영화’이며 관객인 우리는 ‘소풍을 따라 나섰다가 안전하게 돌아온 소녀들과 비슷하다’고 본다. 이것은 결국 우리 시대에 점점 사라져가는 영화보기의 매혹과 미덕에 관한 장 뤽 고다르의 다음과 같은 잠언을 인용하는 것과 연결된다. “영화는 역이 아니다. 영화는 기차다”라는 고다르의 말을 언급하며 에버트는 자크 타티의 <윌로씨의 휴가>를 보기 전까지는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전혀 몰랐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영화를 ‘역’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기차’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차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대신 빨리 목적지인 종착역에 도착하려 안달하는 어린애와 같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팜므 파탈>과 같은 영화가 대중의 적대감을 사는 것에 대해서도 에버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작품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요즘 관객들의 조바심을 고발하는 고발장이라 할 수 있다. 요즘 관객들은 괴롭힘 당하기를 원하지, 유혹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에버트에 따르면 “대부분의 영화는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영화의 플롯에 의해 규정되거나 제한된다는 암묵적인 가정에 따라 만들어진다. 그러나 인생은 이야기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야기가 인생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와 어른들을 위한 영화의 차이점이다.” 이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를 분석하면서 에버트가 정의하는 영화의 꼴인데, 이런 방식으로 에버트가 끌어내는 영화의 매력의 범주는 넓게 뻗어간다.

그는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들>을 찬양하면서 빠른 글 호흡으로 그 영화의 비범한 시각적 특질을 따라잡는다. “레오네는 롱 숏으로 화면을 시작해 권총, 얼굴, 눈동자, 그리고 비지땀과 파리들을 클로즈업으로 작업해 들어가면서 이 장면을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길게 끌고 나간다. 자신이 서스펜스를 얼마나 길게 유지할 수 있을지를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시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게 진짜 서스펜스이기는 한 걸까? 전적으로 스타일의 시험이었고, 장면 자체에 주의를 끌려는 의도에서 비롯한 감독의 고의적인 조작이었을 것이다. 레오네가 장난을 치곤 했던 패러디의 자유를 여러분이 맛봤다면, 여러분은 그의 방법을 이해할 것이다. 이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대담한 제스처를 향한 찬양이다.”

‘대담한 제스처를 향한 찬양’, 이런 식의 표현은 멋지다. 에게, 겨우 그것 같고 그러냐고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렇다. 우리가 거대한 틀에 갇혀 영화를 보는 고정관념을 에버트는 쉽게 넘어선다. 그가 영화의 시각적 스타일 못지않게 상세하게 접근하는 배우들의 매력을 서술할 때도 마찬가지다. <스카페이스>에서의 알 파치노의 연기를 칭찬하면서 그는 파치노가 토니 몬타나라는 인물을 ‘오페라 같은 규모로 연기해낸다’고 쓴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그는 책상 위에 코카인을 쌓아놓고는 삶 그 자체를 흡입하려고 기를 쓰는 것처럼 그 속에다 코를 처박는다. 파치노는 코에다 흰색 분말을 묻힌 채로 그 장면을 연기했다. 종종 패러디되는 디테일이지만, 이것은 자신의 욕망을 제외하고는 만사에 무관심한 사람으로 변해버린 남자를 보여주기 위한 적절한 선택이었다. 파치노가 <스카페이스>에서 한도를 넘어선 연기를 했다면, 그것은 캐릭터가 그를 그곳으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한계를 넘어선 세상, 그곳이 바로 토니 몬타나가 사는 곳이다.” 이런 문장은 쉬워 보이지만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로 영화를 따라잡는 경지의 출발점은 자기도취가 아니라 영화대상과의 일체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의 평론은 보여준다.

07. 0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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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철학입문>(까치글방, 2006)이 출간됐다. 출간일자는 작년말이지만 지난주에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알라딘의 '새로 나온 책'을 둘러보다가 발견하게 됐다. 지난주에 유난히 읽을 만한 책들이 많이 쏟아져 나온 탓에(홉스봄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나 다니엘 벨의 <탈산업사회의 도래> 등) 미처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는데, "하이데거가 1928~29년 겨울 학기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을 수록한 강의록"으로서 지난 1996년 하이데거의 전집 제27권으로 출간되었다는 이 책은 충분히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아직 영역본은 나오지 않은 듯하다). '하이데거의 모든 책'이기도 하지만, 게다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철학 입문' 아닌가?

하이데거  

그런 '입문'이란 단어를 제목에 달고 있는 책으로 나는 <형이상학 입문>(문예출판사, 1994)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다. 우연이지만, 내가 하이데거에 매혹당하게끔 한 책이 바로 <형이상학 입문>이었다. 그러니 <철학 입문> 또한 철학 입문이면서 동시에 하이데거 입문으로의 역할을 덩달아 해줄 거란 기대를 갖는 건 억지스럽지 않다. 1928-9년이면 주저인 <존재와 시간>을 발표한 직후이고 갓 마흔이 된 '젊은' 거장의 염력이 거침없을 때이다. 해서, 이 겨울에 딱 3일 정도 바람이라도 쐬러 가면서 들고 가고픈 책이다.

하이데거와 전혀 '안면'이 없는 독자라면 <30분에 읽는 하이데거>에서부터 역자이기도 한 이기상 교수의 <하이데거 철학에의 안내>(서광사, 1993)나 역시나 하이데거 전공자인 박찬국 교수의 <들길의 철학자, 하이데거>(동녘, 2004)를 미리 혹은 같이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내가 감동적으로 읽었던 조지 스타이너의 <하이데거>(지성의샘, 1996)도 지난번에 절판된 듯하다고 적었지만 다시 나왔다). 한데, 하이데거는 가장 기초적인 물음(들)을 던지면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기 때문에 그냥 차근차근 따라가봐도 팍팍하거나 멀미나지 않는다. 아니, 그냥 장서용이면 어떤가. 폼나지 않나. '하이데거' 그리고 '철학입문'.

 

 

 

 

재작년 여름에 데리다의 <정신에 대하여>(동문선, 2005)가 출간되었을 때 책소개를 하면서 몇 자 적어놓은 걸 다시 읽어봤는데, 이왕 하이데거를 펴보았다면 하이데거론도 곁들어 얼마쯤 읽어두면 좋겠다. 나도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정신에 대하여>에서, 이전의 소개를 반복하자면, "데리다는 하이데거와 관련하여 한번도 질문된 적이 없는 '정신(Geist)'의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하이데거의 철학은 해체/구축한다. 이런 '대결' 장면은 며칠전 이종격투기 프라이드 경기에서 표도르('효도르'라는 이름은 러시아어가 일어로 음역된 걸 다시 옮겨오면서 생긴 '괴상한' 이름이다)와 크로캅이 맞붙은 것만큼이나 흥미진진한 볼거리이다. 그런 걸 놓쳐도 좋은 삶은 또한편 나름대로 재미있을지 모르겠으나 내가 부러워하는 삶은 아니다."

앨런 메길의 <극단의 예언자들: 니체, 하이데거, 푸코, 데리다>(새물결, 1996)은 네 철학자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안내서이다. 하이데거 편을 데리다 편과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그리고 부르디외의 하이데거 비판서 <나는 철학자다>(이매진, 2005)도 (원제인)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 비판으로 읽어봄 직하다. 한데,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 그리고 라캉주의자가 되기 이전에 하이데거 전공자였던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 책의 1장은 '칸트 독자로서의 마르틴 하이데거'를 다루고 있는데, 주로 <존재와 시간>에서의 곤궁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한길사, 2001)에서 어떻게 극복/회피하려고 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상당 부분 뒤흔들어놓는다(나는 지젝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도달해 있는/있을 경지가 부럽다).  

 

 

 

 

물론 <철학 입문>을 통해서 하이데거의 사유에 맛을 들이고 매혹을 느낀다면 이후엔 그의 주저들에 도전해볼 수 있겠다. 하이데거만큼 상대적으로 풍족하게 번역/소개된 철학자도 국내엔 많지 않다. 게다가 번역의 수준도 높은 편이다(당장 헤겔과 비교해 보라). <존재와 시간>에서 <이정표>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그렇게만 읽어도 우리의 한해는 다 가고 말 것이다. 맨날 하는 소리이기도 한데, 인생은 행복하기에는 너무 길지만 공부하기에는 너무 짧다...

07. 0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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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1-14 12:44   좋아요 0 | URL
얼마전부터 로쟈님 글을 훔쳐보기만 했는데 이제 아예 본격적으로 훔쳐가고 있습니다. 제 페이퍼 폴더에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로쟈님의 인상깊은 정보와 글을 퍼담고 있습니다. 항상 발전의 자극이 되어주셔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의 글도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7-01-14 12:48   좋아요 0 | URL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관심을 나눠가질 수 있다면 그만큼 '친구'가 늘어나는 것인데 저로서도 반갑고 고마운 일이지요.^^

에바 2007-01-14 13:00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부러워 하는 경지의 "지젝을 비판하는 사람들"에는 누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또 지젝 비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알려주시면...^^;;

로쟈 2007-01-14 13:03   좋아요 0 | URL
얼치기 비판은 많습니다. '대중적인' 스타들이 안티팬을 거느리는 것처럼. 다만, 제가 궁금한 건 진지한 비판이고, 그 비판의 조건입니다. 그런 '경지'를 저도 좀 보고 싶다는 말씀이었습니다(가령 지젝의 하이데거론에 대한 재비판 같은). 지젝 연구서가 올해만 해도 3권 정도 근간 예정인 걸로 압니다. 그런 '경지'의 가능치/근사치도 조만간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biosculp 2007-01-14 17:16   좋아요 0 | URL
철학입문-23000, 미완의 시대-22500, 탈산업사회의 도래-40000.
나오는 책들은 반가운데 가격이 압박으로 다가오네요.

로쟈 2007-01-14 17:44   좋아요 0 | URL
제게 그 '압박'은 '구박'의 형태로 현시됩니다. '도대체 제 정신이야?', 제가 제일 자주 듣는 소리죠...

2007-09-04 0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장-뤽 낭시에 관한 자료를 옮겨놓는다. 필립 라쿠-라바르트의 공동작업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낭시는 흔히 '데리다 사단'으로 분류되는 철학자인데, 데리다 스스로가 이 '제자'에게 상대한 두께의 저작을 헌정했을 정도로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국내에서 출간된 책 가운데는 블랑쇼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문학과지성사, 2005)에 낭시의 공동체론이 들어가 있고, <숭고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2005)는 낭시 등이 편집한 책이다(참고로, 그의 저서가 일본어로는 10권 이상이 번역돼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일간지에 연재된 글들을 모은 <세계 지식인 지도>(산처럼, 2002)에서 대략적인 소개를 읽어볼 수 있다.

 

 

 

 

난데없는 낭시 타령인가 싶지만, 러시아 학자와 낭시와의 대담 하나를 번역하게 될지 몰라서 어제 도서관에 갔다가 영역본으로는 가장 최신간인 <다양한 예술: 뮤즈들2(Multiple Arts: The Muses II)>(스탠포드대학출판부, 2006)를 대출했다. <뮤즈들>에 이어서 자투리글들을 모은 낭시의 예술론집인데(불어 원서가 있는 건 아니고 영역본의 편자가 낭시의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표지의 사진이 인상적이어서(게레로의 작품이라고만 나온다) 검색해봤지만 찾지 못했다. 어쨌든 이 두 책을 소개한다는 명분으로 이 페이퍼는 '세계의 책'으로 분류된다. 아직 주저들이 번역/소개되지 않은 철학자이지만(나는 네댓 권의 영역본과 연구서를 갖고 있다) 불시에 또 소개될지 누가 알겠는가.

달랑 이런 내용만 띄워놓기는 멋쩍으니까 참고자료도 하나 덧붙여둔다. 앞서 언급한 블랑쇼의 책을 번역한 박준상씨가 2003년 6월 동국대학교 대학원신문에 게재한 소개의 글이다.

장-뤽 낭시와 공유·소통에 대한 물음

박준상 (연세대 철학과 강사)

1. 공유 내의 존재 etre-en-commun
여기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장-뤽 낭시Jean-Luc Nancy(1940- )에 대해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하는가? 그의 사상의 특성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것을 밝혀봄으로 논의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낭시의 사유의 핵심에 정치적인 것이 놓여 있으며, 그의 사상은 시종일관 정치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일반적인 관점으로만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




많은 다른 정치사상가들의 경우에 그러하듯, 낭시는 물론 정치적 사건들(동구권의 해체, 걸프전), 정치적 변화들(세계화, 서양중심주의의 한계), 정체政體들·이데올로기들(민주주의, 공산주의, 나치주의)에 대해 구체적 분석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분석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개입일 뿐이고 구체적인 정치적 판단으로 이어질 뿐이며, 모든 경제·문화·사회현상들을 총체적으로 설명 가능하게 하는 어떤 초월적 원리를 배경에 깔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낭시의 정치철학은 이른바 '형이상학적'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매우 급진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정치가 가능하기 위한 전제 또는 조건으로서의 정치적인 것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치적인 것이란 이미 공동존재(함께 있음, etre-avec)에, 인간들 사이의 소통에 기입되어 있으며, 어떤 '우리'의 존재의 수행(실현, 표현)이다. '우리'의 존재, 다시 말해 '나'의 존재도 타자의 존재도 아닌, 모든 단일성, 동일성(정체성), 내재성 바깥의 존재, 고정된 개체의 속성에 따라 규정되는 존재가 아닌, '나'와 타인 사이의 보이지 않는 관계 내의 존재, 관계에만 정초될 수 있는 존재.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인으로 귀결되는 자기의식의 반대편에 놓이는 존재, 또한 어떤 주제theme에 고정되어 동일화된, '내'가 구성한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존재. 정치적인 것으로써 '우리'의 존재의 수행이란 '우리'의 서로에게로 향함·나타남, 관계 내의 서로를 향한 실존들의 만남, 접촉touche이다. ('접촉'은 낭시의 용어이지만, 그 중요성을 부각시킨 사람은 그의 동료,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이다. 데리다의 낭시에 바쳐진 저서, <접촉, 장-뤽 낭시> 참조, J. Derrida, Le Toucher, Jean-Luc Nancy, Galilee, 2000.)



낭시는 보이지 않는 관계('나'와 타인은 보이지만 그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의 존재, 공유 내의 존재를 조명하며, 거기에 그의 사유, 정치적 사유의 핵심이 있다. 그러나 '나'와 타인―또는 타인들―의 관계를 정치에까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이거나 과장이 아닌가? 분명 '나'와 타인 사이의 관계의 존재, 공유 내의 존재 그 자체는 정치가 아니다. 그러나 공유 내의 존재는 '나'와 타인 사이의 모든 종류의 만남의 근거에 있는 나눔partage, 어떤 '무엇'을 나눔이 아닌, '우리'의 실존('우리'의 있음 자체)의 나눔의 양태, 나눔의 전근원적 양태를 지정한다. 공유 내의 존재는 인간들 사이의 모든 종류의 소통과 공동체 구성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나아가 현실의 정치적 결정·행동에 있어 결코 간과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유 내의 존재는 '정치적'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정치의 근원이다.

아마 낭시는 공유 내의 존재가 지금까지 한번도 제대로 사유된 적이 없이 망각 가운데 묻혀버렸다고 말할 것이다. 이제까지 나눔과 공동체라는 정치적 문제에 있어, '무엇'을 나눔과 '무엇'에 기초한, '무엇'을 위한 공동체만이 부각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20세기에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세계 전역에 걸쳐 진행된 마르크스주의 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하나의 '무엇', 즉 재산의 공유共有였다.

나치는 열광적인 정치공동체를 이루었지만, 그것은 공동의 이념적 '무엇'(반유대주의와 게르만 민족의 우월주의)의 기초를 바탕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공동체가 가시적 '무엇'(재산, 국적, 인종, 종교, 이데올로기)의 공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을 때, 그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왜곡, 말하자면 보이는, 쥘 수 있는―전유專有할 수 있는―동일성의 지배, 공유 내의 존재의 망각. 그 '무엇'에 따라 전개될 수 없는, 그 '무엇'이 목적일 수 없는, 실존의 나눔의 망각, 함께 있음 자체의 망각. 하이데거는 우리가 존재자에 대한 이해와 소유라는 관심에 사로잡혀 존재망각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낭시는 우리가 보이는 '무엇'에 대한 공유 바깥의 나눔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관계에 기입되는 공유 내의 존재를 망각했다고 말할 것이다.

거기에 결국 낭시의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정치적 물음이 있다. '우리'가 함께 있는,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무엇' 때문이 아니며, '무엇'을 나누기 위해서도 아니다(우리는 재산을 공유하기 위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이 말은 재산을 나눈다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있는 이유와 목적은 다만 함께 있다는 데에 있다. 함께 있음의 이유와 목적은 함께 있음 그 자체이다. 다만 함께 있기 위해 함께 있음, 즉 공유 내의 존재를 위한 함께 있음, '무엇'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음 자체를 나눔, 다시 말해 '나'와 타인의 실존 자체가 서로에게 부름과 응답이 됨, '우리'의 실존들의 접촉.



2. 유한성의 경험
공유 내의 존재,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시적 어떤 것의 공유가 아니라, 타인이 '나'를 향해 다가옴, '내'가 그 다가옴에 응답함, 즉 '내'가 타인을 향해 건너감, 타인을 향한 외존外存ex-position, 관계 내에 존재함, 어떠한 경우라도 비가시적, 동사적 움직임들의 부딪힘, 접촉이다. 유한有限한 자들의 만남. 낭시는 현대철학에서 많이 언급되고, 그 중요성이 강조된 '유한성finitude'이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사상가이다.

인간의, 인간들의, '우리'의 유한성, 여기서 유한성은 첫째로 완전한 내재성內在性의 불가능성이다. 완벽히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을 수 있는, 그 스스로에 정초된―그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결정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율성을 가진 개인이란 없다. 인간은 항상 자기 아닌 자에게 열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에게로 향함, 그에게 노출되어 있음, 그를 향한 외존, 관계 내에 존재함, 그것이 '나'의 존재의 조건이다. 인간은 자유의 존재가 아니라, 그가 향해 있는 타인에 의해 제약된 존재, 하지만 그 제약으로 인해 비로소 의미sens에 이를 수 있는 유한한 존재이다. 유한성 가운데에서의 존재란 먼저 외존 가운데에서, 관계 내에서의 존재, 폐쇄성과 내재성 바깥의 존재를 의미한다.

두 번째로 유한성은 만남의 유한성을 가리킨다. '우리'의 실존들의 접촉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지속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접촉은 불규칙적, 단속적 시간에, 즉 시간성 내에서 전개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식을 통해 확인하고, 표상할 수 있는 '무엇'에 정초되어 있지 않고, '무엇' 바깥의 타인의 나타남에 응답하는 순간의 정념情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접촉, '무엇'에 의하지 않는, '무엇' 때문이 아닌 급진적인 만남, 그것에 정념만이, 극단의 단수성(singularite, 타인의 나타남의 단수성)을 긍정하면서, 답할 수 있다. 정념, 만져지지 않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무엇'에 따라 고정될 수 없는 관계 자체에 대한 감지.

그러나 만남의 유한성은 인간들의 관계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나아가 지속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다만 그 유한성은 관계를 '내'가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즉 타인을 '나'에게 필요한 그 '무엇'의 요구에 따라 어떤 동일성 내에로 동일화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에 따라 그것은, 만일 '무엇'이 관계를 지배할 때, 그러한 지배(예를 들어 재산의 지배, 정치적 이념의 지배, 인종과 국적의 동일성의 지배―지금 이 땅의 경우 학벌과 지역적 동일성의 지배)에 지속적으로 저항할 수 있게 하는, 근거·이유·목적도 없는 만남, 또는 그 자체가 이유와 목적인 만남, 즉 실존들의 접촉과 그 순수성을 정당화한다.

세 번째로 낭시가 말하는 유한성은, 그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 한계상황(죽음, 병, 고독)에 놓여 있는 인간의 존재양태를 표현한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낭시에게 유한성은 공유 내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하이데거는 죽음에로의 접근이 '나'로 하여금 일상적이고 평균적인 존재양태, '그 누구Man'의 지배에서 벗어나 본래적 실존에로 눈을 돌리게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반해 낭시는 죽음에로의 접근의 경험이 '나'로 하여금 본래적 실존에로 돌아가게 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외존(타인을 향해 존재함, 타인과의 관계 내에 존재함)을 통한 급진적인 공유 내의 존재를 부르게 한다고 본다. 죽음에로의 접근의 경험은 '나'와 자신의 본래적 관계의 회복을 요청한다기 보다는, 죽음이라는 절대타자 앞에서 '나'의 동일성이, 그것이 무엇이든, 한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07. 01. 13.

P.S. 한 분이 귀뜀해주신 바에 따르면 국내에도 개봉된 바 있는 영화 <텐 미니츠 첼로>(2002)에 낭시가 직접 출연했다. 열 명의 감독이 찍은 단편영화 열 편으로 구성돼 있는 <텐 미니츠 첼로>의 다섯번째 영화가 바로 클레르 드니 감독의 <낭시를 향해서(Vers Nancy)>이다. 기차여행을 하면서 10분간의 철학적 대화를 나눈다고 하는 이 영화의 시놉시스는 이렇다. 

철학자 장 뤽 낭시와 그의 학생 중 한 사람인 안나가 기차여행을 하며 서로 나누는 대화만으로 이루어진 영화이다. 낭시는 ‘침입자’라는 단어로 이민자들이나 타자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불안과 공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또한 인종융합에 관한 미국적 개념인 ‘도가니’가 차이를 포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비판하며 더불어 이들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태도에 대해 반성하고 있다. 길게 이어진 대화가 끝난 후 그들의 자리에 한 흑인이 들어와 조용히 묻는다. “언제 도착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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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1-13 17:38   좋아요 0 | URL
세계 지식인 지도 저런것도 있었나요. 당장에 보관함 넣습니다. 김상환 교수가 엮은거네요?

로쟈 2007-01-13 17:41   좋아요 0 | URL
중앙일보엔가 연재됐던 글들입니다...

토마스 2007-01-14 22:40   좋아요 0 | URL
장-뤽 낭시가 등장하는 영화도 있습니다. 국내에서 개봉되었던 옴니버스 영화 <텐 미니츠 첼로> 중 클레어 드니가 연출한 <낭시를 향해서>에 등장합니다. 기차 안에서 주인공은 장-뤽 낭시와 그의 철학적 개념인 환대, 타자 등에 관한 대화를 나눕니다. 그러고보면, 이 영화의 제목이 꽤 의미심장하지요. 낭시는 레비나스와 데리다 이후 환대, 타자에 관한 성찰을 친절하게 영화에서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영화감독들이 가끔 영화를 통해 사상을 전하는 일이 있기는 하지요.

로쟈 2007-01-14 22:32   좋아요 0 | URL
요긴한 정보군요.^^ 눈에 띄면 구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