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안티쿠스, 2008)에서 서론에 해당하는 처음 세 장을 읽었다. 절반은 지난달에 읽은 것인데, 이 노학자의 경륜 있는 강의에서 몇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 중 하나는 단테의 <신곡>과 같은 '클래식'(고전)을 읽는 의의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마미치는 그 '클래식'이란 말의 어원적 의미부터 검토하는데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는 듯해서 정리해놓는다.

 

 

 

 

단테의 <신곡>을 읽는 일은 우선 첫째로 ‘클래식을 공부한다’는 의미가 있다. 아니 오히려 클래식 ‘에서’ 배운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겠다. ‘을’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것과 자신과는 거리가 있게 된다. 물론 단테 ‘를’ 공부하는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단테 ‘에게’ 배운다, 즉 자기 자신이 그 속으로 들어가 공부하고 참여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단테를 공부하는 것은 이처럼 고전 ‘에서’ 배우는 일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단테에게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고전’이라는 어휘는 본래 어떤 의미를 가진 말이었을까. ‘고전’은 영어로는 '클래식(classic)'인데, 그 밖의 유럽 언어도 대부분 맨 첫 글자나 맨 마지막 글자만 다를 뿐 발음은 모두 ‘클래식’이다. 클래식은 라틴어 '클라시쿠스(classicus)'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형용사이며 처음부터 ‘고전적’이라는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니다. 클라시쿠스는 사실 ‘함대(艦隊)’라는 의미를 가진 '클라시스(classis)'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형용사이다. 함대라는 말은 군함이 적어도 두세 척 이상은 있다는 뜻이다. 클라시스는 ‘군함의 집합체’라는 의미였다.(14쪽)

그러니까 어원에서부터 따져보자면 '클라시스(명사) -> 클라시쿠스(형용사) -> 클래식(명사)'의 순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기원적 의미는 '함대'라는 것. 로마 해군의 함대를 가리키던 말이 '클라시스'였고 거기에 대응하는 영어라면 'fleet' 정도겠다. 군함 한 척이 아니라 최소한 두세 척은 거느리고 있는 '선단' 말이다. 그럼 이 '클라시스'에서 파생된 '클라시쿠스'는 무슨 뜻인가?   

'클라시쿠스'라는 형용사는 로마가 국가적 위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국가를 위해 군함을 그것도 한 척이 아니라 함대(클라시스)를 기부할 수 있는 부호를 뜻하는 말로 국가에 도움을 주는 사람을 가리켰다(로마에는 징세 제도가 있었지만, 군함은 세금이 아니라 기부를 모아 만들었다).

그러니까 클라시쿠스란  "함대(클라시스)를 기부할 수 있는 부호"를 가리키는 말이다. 요즘은 고대 로마시대만큼 전쟁을 자주 벌이지는 않으니 '클라시쿠스'에 상응하는 사회적 계층이 무엇인지 확언하기는 어려우나 수십에서 수백 억원 정도를 사회나 국가에 기부할 수 있는 형편의 '부호'를 가리킬 수는 있겠다(하기야 요즘 시세로 '함대'를 기부하려면 수조 원이 들 터이지만). 그 정도면 재벌 내지 준재벌이겠고(물론 탈세하는 게 아니라 세금 왕창 내는 걸 기준으로). 인터넷을 찾아보니 "고대 로마 시민은 6계급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그 최상급을 클라시쿠스(Classicus)라고 하였다. 여기서 뜻이 변하여 예술상의 최고 걸작도 '고전'이라 부르게 되었다."란 설명도 나온다. '클라시스'와의 연관성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사회적 최상층을 가리킨다는 점은 공통적으로 말해준다.  

그렇다면 다시, 이 '클라시쿠스'와 '클래식'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마미치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그렇다면 국가적 위기에 함대를 기부할 수 있는 상황을 인간의 심리적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인간은 언제든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러한 인생의 위기에 당면했을 때, 정신적인 힘을 주는 책이나 작품을 가리켜 '클래식'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는 중세의 비교적 이른 시대, 즉 교부시대부터 그러한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15쪽)

이에 따르면 '클라시쿠스'와 '클래식'은 유비적 관계다. <국가적 위기 : 클라시쿠스 = 인생의 위기 : 클래식>. 다시 말해 '클래식'이란 인생의 위기에 '함대'만큼의 든든한 힘을 주는 작품을 말한다. 비유컨대, 위대한 고전은 거대한 '항모 선단'쯤 되는 것이다(때문에 조각배 몇 척 가지고 '고전'을 참칭하면 곤란하겠다). 더불어 '위기'에 직면하고 있지 않다면 '고전'은 '쇳덩이'에다 '종잇더미'에 불과한 것이겠고. 정리하면 이렇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먼저 밝혀두어야 할 것은 '클라시스'는 원래 ‘함대’라는 의미였으며 '클라시쿠스'는 국가에 함대를 기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애국자이기도 하고 재산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것이 변화하여 인간의 심리적 위기에 진정한 정신적 힘을 부여해주는 책을 일컬어 '클래식'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비단 책뿐만 아니라, 회화든 음악이든 연극이든 정신에 위대한 힘을 주는 예술을 일반적으로 '클래식'이라 부르게 되었다."(15쪽)

 

 

 

 

 

 

 

 

 

  

그럼, 이 '클래식'은 어떻게 '고전'이 되었나? "일본에서는 '클라시스'에서 유래한 '클래식'을 ‘고전’이라 번역한다. 이는 오래 전부터 소중하게 여겨온 서적[典], 요컨대 고전이 그러한 교화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클래식의 번역어로 선택된 것이다. ‘典’은 상형문자로 다리가 달린 책상 위에 옛 책의 형태인 두루마리를 소중히 올려놓는 것은 의미한다. 책상 위에 올려둔다는 것은 ‘읽지 않고 쌓아두기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소중히 여기고 늘 열심히 읽는다는 뜻이다."(15-16쪽)

 

이 '고전 읽기'가 주로 인문학의 소관이며 인문학 공부이다. 그리고 <신곡> 읽기가 바로 그러한 공부이다. 때문에 이마미치 교수는 '고전'으로서의 <신곡>을 읽기 전에 이러한 '서설'을 붙여둔 것이고. 이러한 설명을 읽으며 떠올리게 된 생각은 '고전학'로서의 인문학이 기원적으로는 클라시쿠스의 역할을 하는, 클라시쿠스의 학문이면서 클라시쿠스를 위한 학문이 아닌가라는 점. 애국자이면서 재산가인 이들을 위한 인문학.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국가석학들의 인문학, CEO를 위한 인문학이 되겠다.

 

 

 

 

 

 

 

 

 

 

그리고 그러한 인문학 옆에 '인생의 위기' 혹은 '나락'에 떨어진 이들을 위한 '노숙자 인문학'이 있겠다. 노숙자? 이마미치 교수가 '클라시쿠스'와 대비시켜서 설명해주고 있는 '프롤레타리우스'가 로마시대의 '노숙자' 아닐까? 

 

"덧붙여 국가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자기 자식 ― 자식은 프롤레스(proles)라고 한다 ― 밖에는 내놓을 게 없는 사람, 국가에 헌상할 것이라곤 프롤레스뿐인 사람을 프롤레타리우스(proletarius)라고 불렀다. 따라서 '클라시쿠스'가 재산이 있어서 국가를 위해 함대를 기부할 수 있는 부유층을 가리킨데 반해, '프롤레타리우스'는 오직 자기 자식을 내놓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을 의미했다. 바로 이 라틴어 '프롤레타리우스'에서 빈곤한 노동계급을 의미하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독일어가 생겼고, 그 후 유럽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오늘날 '클라시쿠스'는 ‘고전적’, '프롤레타리아'는 ‘노동계급’을 의미하는 말이 되어 이 두 단어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옛 로마문화에서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 단어였으며, 생각해보면 프롤레타리우스라는 형용사는 서글픔이 깃든 말이기도 하다."(14-15쪽)  


  

 

한국어의 말장난을 갖다 쓰자면 '클라시쿠스'는 '맨션계급'이고 '프롤레타리우스'는 '맨손계급'이다. 그리고 요즘에도 인문학은 이 두 계급에 '봉사'한다. 오른손으로는 CEO를 위한 인문학최고위과정을 만들고 왼손으로는 노숙자를 위한 인문학 프로그램을 만든다. 모순적인가? 단테와 같은 '위대한 시인'들의 첫번째 조건으로 이마미치 교수가 꼽고 있는 인간론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인간의 고귀함과 나약함, 다시 말하면 휴머니티의 빛과 그림자, 인생의 행복과 적막 양면을 두루 살피고 인간에 관한 사상을 형성하는 시각이 위대한 시인에게는 반드시 있다"(68쪽)고 믿는다.  

 

그런 관점에서 말하자면, 클래식은 '고귀한 자'도 읽어야 하고 '나약한 자'도 읽어야 한다. '고귀한 자'는 고전을 통해서 자신의 의무를 상기할 필요가 있고 '나약한 자'는 자신의 처지를 극복할 용기를 얻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인문학은 배분되어야 한다.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자면 '고전의 나눔'이라고 해야 할까? 감성적인 것뿐만 아니라 인문적인 것에 있어서도 '나눔'은 필요하다. 그래야 '공통적인 것'들을 창출할 수 있으며 진정한 민주주의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인문주의(휴머니즘)보다 먼저 오지 않는다... 

 

08. 03. 16.

 

 

P.S. 이 글은 온라인 학술저널 담비에도 게재되었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MAIN&rsec=MAIN&idxno=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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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클래식과 프로레탈리아, 류차달 할아버지
    from 일체유심조 2008-03-19 14:18 
    우연히 들른 블로그에서 클래식과 프로레탈리아의 어원에 대한 재미있는 해설을 봤다. 요컨대 클래식이란두 세 척 이상의 함대를 일컫는 말로 해양 패권을 다투던 고대 유럽에서 이런 함대를 로마라는 국가에 제...
 
 
2008-03-16 2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3-16 21:43   좋아요 0 | URL
적어도 서양학의 경우에 일본과 막바로 비교할 순 없겠죠.--;

virtuepeak 2008-03-17 0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신곡을 암송했다고 하던데, 클래식에 진정으로 충실한 사례라는 생각이 드네요.

로쟈 2008-03-17 13:01   좋아요 0 | URL
좁혀 말하면, 죽음의 면전에 들고 갈 수 있는 책이 '고전'이겠죠...

섬나무 2008-03-1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께 드리는 내 메모들

표현주의는 간단히 초월될 수 없지만 표현성은 늘 초월되어 왔다. '순진한 단어' 들이 거주하는 텍스트적 변형<텍스트들 간의 오고감>이 존재하는 한 우리가 가정하는 의미의 내재성은 이미 자신의 외재성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의미(의 내재성)>은 항상 이미 <먼저> 자신을 바깥으로 데려간다<운반한다> 그것은 어떠한 표현행위 이전에 (자신으로부터) 이미 벗어나있는 <달라져있는> 것이다.


랑가주(언어활동)를 적극적으로 체득화한것이 언어로서의 시적언어이다. 시적언어는 언어의 안과 밖이 나뉘는 경계에 위치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았거라 ,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난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빈 집> 기형도


기형도의 '식물적' 상상력을 구성하는 핵심은 '전정'과 '모종'이다 - 정과리 <무덤 속의 마젤란>-



북아메리카 중서부 대초원에서 서식하는 들쥐 ‘불스’와 산에서 서식하는 들쥐는 생김새는 거의 비슷하지만, 애정생활에 관한 한 완전히 상반된 특징을 보인다. 대초원에서 서식하는 들쥐는 끔찍이 서로를 아끼는 낭만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평생 한 파트너하고만 짝짓기를 하며, 나중에 직접 만든 둥지에서 새끼를 함께 돌본다. 반면 산에 사는 그들의 동족은 정반대의 애정생활을 보인다. 수컷은 새끼를 낳아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며, 곧장 다른 암컷의 치마 속을 호시탐탐 노린다.

유전자 측면에서만 보면, 두 들쥐는 거의 동일하다. 지난 15년간 들쥐들을 연구해온 미국 에모리대학 래리 영 박사팀은 대초원에서 서식하는 성실한 수컷 들쥐에게 ‘바소프레신’이란 호르몬을 차단하는 약물을 투여하고, 암컷에게는 옥시토신을 차단하는 약물을 투여했다. 바소프레신과 옥시토신은 자식과 배우자에 대한 애착을 유발하는 호르몬이다. 이들을 차단하는 약물을 투여하자, 순식간에 그들의 태도는 돌변했다. 평소에 그렇게 자상하던 수컷이 교미가 끝나기가 무섭게 자취를 감췄고, 암컷 또한 파트너에 대한 흥미를 곧바로 잃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다음 연구 결과였다. 이번에는 산에 서식하는 들쥐를 유전적으로 변형해 바소프레신 수용체와 옥시토신 수용체의 양을 늘렸더니, 바람둥이 수컷 들쥐들이 갑자기 ‘자상한 아버지’로 돌변했다. 예전의 불성실함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대초원에 서식하는 들쥐처럼 그들도 이제 한 파트너에게 전념하고 새끼를 키우는 데 전념하더라는 것이다.

비록 들쥐를 통한 연구 결과이긴 하지만, 사람에게도 뇌 속에 어떤 호르몬이 좀더 지배적인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사랑관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남성의 갱년기- 남성은 30세부터 '테스토스테론'이라는 호르몬이 매년 1%씩 감소한다.

증세- 권태, 허무감, 우울증, 의욕상실, 무기력, 만성피로, 업무저하, 체력저하,

두통, 눈의 피로감, 어지러움, 수면부족, 불면증, 근육통, 관절염.


그는 자신이 갱년기의 허무감과 우울증에 의해 연애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있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그의 바소프레신도 테스토스테론처럼 꾸준히 감소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의 메모는 어디로 벗어난 걸까.

로쟈 2008-03-19 22:59   좋아요 0 | URL
요즘 같아서는 저도 호르몬 주사를 좀 맞아야겠습니다.--;
 

어제는 토요일이지만 격주 등교일이었고 낮에 아이를 데리러 잠깐 초등학교에 다녀왔다. 오다가다 아파트 단지의 목련나무들에 아직 꽃망울도 올라오지 않은 걸 보고 예년보다 좀 늦은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요즘 예년보다 날씨가 찬 탓인지도 모르겠다. 할일이 너무 많다는 핑계로 잠시 손을 놓고 있다가 예전에 쓴 시가 떠올라 옮겨놓는다(그래봐야 답답한 마음이 가실 리 없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한 주 정도는 더 지나야 꽃이 피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도 싶다. 아무튼 곧 꽃망울들이 올라오고 흐드러지게 만개하리라. 그렇게 또 봄날의 며칠이 지나가리라...  

목련꽃 그늘 아래 울다

목련꽃 아직 움트기 전, 바알갛게 졸아든 마음으로
목련꽃 그늘 아래 나 언제쯤 울어볼 수 있을까
목련꽃 그늘 아래 기대어 한참을 마음놓고
목련꽃 아직 움트지 않았던 시절을 울어볼 수 있을까
목련꽃 아름아름 마음 환하게 울어볼 수 있을까

08. 03. 16.

P.S. 목련을 노래한 시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건 아무래도 박목월의 '사월의 노래'라고 해야겠다. 가곡으로도 만들어진 시 말이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그나저나 4월이 벌써 그리운 걸 보면 아무래도 올 3월은 지옥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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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6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3-16 11:54   좋아요 0 | URL
'세월이 가면'을 합창해야겠습니다.^^;
 

언제부턴가 글쓰기, 책읽기에 관한 책들의 출간이 부쩍 늘어났다. 일종의 트렌드다. 글쓰기 교재의 범람이 최근에는 인터넷 시대 블로거들의 요구에도 많이 빚지고 있다면 책읽기 교본도 그러할까? 일본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와 중국 소설가 한샤오궁의 독서법/독서록이 나란히 출간된 걸 보면서 잠시 궁금하다.  

한국일보(08. 03. 15) 中·日의 책 읽기 대가들이 말하기를…

일본과 중국의 실력있는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33)와 한샤오궁(55)의 신간은 모두 책에 관한 것이다. 차이는 제법 크다. 히라노씨는 현대사회의 권장 독서법인 속독(速讀) 대신 지독(遲讀) 혹은 슬로 리딩(slow-reading)을 권하면서 그 방법을 세세히 전하고, 한씨는 책을 매개로 사회문화 전반에 대한 자기 사유를 펼친다. 전자가 ‘실용서’라면 후자는 ‘문화비평서’다.

서문에 “천천히 시간을 들이면 독서는 즐거워진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전부라고 할 수도 있다”고 적은 히라노 씨의 책은 기초편ㆍ테크닉편ㆍ실천편의 교재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형식만 그런 게 아니다. 이 ‘소설가 선생님’의 가르침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아주 자신만만하다. 특히 테크닉편에서 제시한 열댓 개의 지침을 직접 문학작품 독해에 적용하는 실천편을 읽다보면 까다로운 수학문제를 눈앞에서 명쾌하게 풀어주는 과외교사가 절로 연상된다.

저자가 제안하는 슬로 리딩의 골자는 꼼꼼한 텍스트 분석을 통해 작가의 진의(眞意)를 정확히 밝혀내자는 것. 다층적 의미를 내포하는 작품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 카프카의 단편 <다리>를 분석할 땐 “소설을 읽는 방법에 정답은 없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럴 때라도 그는 문장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미진함이 최소한으로 졸아들 때까지 분석하고 추론한다.

박학한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따지면 창작자의 숨은 의도가 드러난다는 것이니 일반 독자라면 따를 만한 방법이다. “작자에게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독자의 의문이나 반론에 대답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등 자신의 창작 경험에 비춰 일러주는 내용도 눈에 띈다(저자는 책 말미에 자기 장편 <일식>의 창작 의도를 자세히 설명하기도 한다).

슬로 리딩의 가치를 밝히는 기초편엔 오늘날 정보 과잉 문명에 대한 저자의 비판의식이 또렷하다. 그는 속독을 통해 책을 단시간에 많이 읽었다고 자랑하는 풍토를 ‘빨리 먹기 대회’에서 실력을 자랑하는 이들과 다를 바 없다고 일축하며 “독서량은 슬로 리딩이 가능한 범위로 충분하며, 그 이상은 무의미하다”고 단언한다. 양에서 질로, 망라형에서 선택형으로 독서법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프로 독서가’를 자처하는 저자의 제언이다.

작년 말 <마교사전>으로 국내에 첫 소개된 한씨는 80년대 심근(尋根ㆍ뿌리찾기) 문학을 주창-그 선언문으로 평가받는 글 ‘문학의 뿌리’가 이번 책에 수록됐다-해 중국 문단의 흐름을 바꾸는 등 지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다. 80년대~2000년대 발표한 산문이 묶인 1부에서 저자는 동양-서양, 문학-철학-사회과학을 폭넓게 횡단한다. 서양 사상가만 따져봐도 아리스토텔레스 칸트부터 헤겔 마르크스 토인비 바르트 푸코 사르트르 그람시를 거쳐 헌팅턴 후쿠야마까지 두루 섭렵한다.

한씨는 이 광대한 지식의 역사에서 양질의 책을 골라내고, 거기서부터 논의를 출발한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 등장인물 ‘사비나’의 외침, “나는 세속적인 것이 싫어!”를 인용하며 사회와 역사의 “변증법적 아포리아와 이율배반의 아이러니”를 살피고, 소동파의 시에서 ‘비굴한’ 도연명과 ‘광분하는’ 니체 사이, 건강한 반(反)세속주의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저자의 도저한 학식과 다방면의 관심사는 일관된 변증법적 사유틀 속에서 질서를 잡는다. 그는 상반된 입장의 어느 편도 들지 않고 각각을 분석/종합하며 한걸음 나아간 생각에 제시한다.

2부엔 저자와 쑤저우대 왕야오 교수와의 2002년 네 차례에 걸친 인터뷰가 실렸다. 기호, 언어, 역사, 문학을 주제로 한 인터뷰에서 저자는 대중매체의 도덕성 위기를 지적하고, 각 언어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짚으며 언어 다양성을 지지하는 등 오늘날 세계적 현안에 대해 명쾌한 의견을 제시한다. <마교사전>을 비롯한 대표 작품의 창작 의도를 직접 설명하는 부분도 흥미롭다.(이훈성기자)

08. 03. 15.

P.S. 두 작가의 소설을 모두 읽어본 바 없지만, 한샤오궁의 독서록은 관심이 간다. 히라노가 제시하는 슬로 리딩은 평소에 실천하고 있는 것이기에 따로 '코칭'이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지만, 한샤오궁을 통해서는 중국 지식인의 독서 풍경을 곁다리로 엿볼 수 있지 않을까(일본의 경우엔 다치바나나 요네하라 등을 통해서 접할 수 있었다). "서양 사상가만 따져봐도 아리스토텔레스 칸트부터 헤겔 마르크스 토인비 바르트 푸코 사르트르 그람시를 거쳐 헌팅턴 후쿠야마까지" 중국에 어떻게 소개되고, 어떻게 읽히는지 궁금하다. 우물을 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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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8-03-15 22:04   좋아요 0 | URL
이승우씨의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고 있다던가에서도 천천히 읽기가 소설가가 되는 길이라고 했던 듯. 저는 뒷 얘기가 궁금해서 손가락이 자꾸 넘어가던데요^^

로쟈 2008-03-16 09:50   좋아요 0 | URL
소설가가 되는 길은 아예 천천히 베껴쓰기죠.^^

수유 2008-03-15 23:09   좋아요 0 | URL
조간 북 섹션에서 읽고 목록에 올렸다지요..일식을 읽은 독자로서.. '遲讀'에 마음이 쏠려서..

로쟈 2008-03-16 09:49   좋아요 0 | URL
<일식>이 인상적이셨나 보군요.^^
 

이달 들어 묵직하거나 발랄한 문학 평론집들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 정과리부터 정여울까지, 혹은 중견 평론가에서 젊은 피까지다. 몇 권의 리스트를 챙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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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3월 15일에 저장

프랑켄 마르크스- 황호덕 비평 문학론
황호덕 지음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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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첫 평론집이지만 최근에 나온 가장 '무거운' 평론집(비평+문학론). 책도 하드카바다. '한국 현대비평의 성좌들'을 그려내는 시각과 발걸음이 호방하다. 다만 꼼꼼하지는 않아서 각주에 오타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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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메 2008-03-15 11:48   좋아요 0 | URL
정과리의 이번 평론집은 전작들에서 문득문득 드러나던 과도한 현학성의 자취를 걷어낸 것처럼 보이더군요. 그에 더해, 섬세한 텍스트 읽기를 뒷받쳐주는 그만의 화사한 문체가 인상적입니다. 그동안의 평론집에 부제처럼 붙던 '존재의 변증법'이라는 관념의 언어를 버리고 '네안데르탈인'
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언표를 머리에 두는 것이 그 이유인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읽을만한 비평집이 출간된 것 같군요.

로쟈 2008-03-15 11:52   좋아요 0 | URL
'존재의 변증법'은 4에서 끝난 건가 보군요.^^

수유 2008-03-15 13:27   좋아요 0 | URL
덜 현학적이라 하니 읽어볼 마음이 생기는군요..시인들부터!!

그리메 2008-03-15 13:48   좋아요 0 | URL
저도 확실히 '귀향'이 더 재밌는 것 같습니다. ^^

수유 2008-03-15 17:1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아직 손에 들어온건 아니지만 다시금 그 옛날의^^ 평론의 시대를 맛보고싶어지네요..그랬으면 합니다.
 

한산했던 지난주와는 달리 이번주 북리뷰란은 북적거린다. 눈길이 가는 책들이 많고 손길이 갈 만한 책들도 여럿 된다. 먼저 손에 잡히는 책은 퇴근길에 서점에서 본 <아름다움의 과학>(프로네시스, 2008). '미인불패, 새로운 권력의 발견'이 부제다. 저자 울리히 렌츠는 독일의 의사이자 과학 저술가. 그의 책으론 <일 덜하는 기술>(문화과학사, 2003)이 번역돼 있다. 악셀 브라이히와의 공저이다.

Die Kunst, weniger zu arbeiten.

<아름다움의 과학> 표지에는 'The science of beauty'라고 박혀 있지만 원제는 <미, 과학 그 자체(Schönheit. Eine Wissenschaft für sich)>이다. 광고투로 말하자면, "아름다움은 과학입니다" 정도가 되겠다.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8. 03. 15) “아름다움 향한 광기, 왜 나쁜가”

솔직하고 거침없는 책이다. 아니 ‘도발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허위의식을 드러내고,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한다. 2006년 출간 당시 전 독일을 논쟁 속에 몰아넣었다. ‘아름다움의 과학’(The science of beauty)이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방점은 육체적·외적 아름다움에 찍혔다. 내면의 아름다움은 논외다. 독일의 의사이자 과학전문저술가인 저자는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들의 통념 혹은 사회적 금기에 ‘딴죽’을 건다. ‘도발적’인 책이 빠지기 쉬운 허술함 대신 치밀함으로 무장했다. 사회과학에서 진화생물학을 거쳐 역사 및 경제학까지 다양한 연구 및 통계 자료를 제시한다.

외모가 아니라 성격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에 있다고. 그러나 아름다운 외모야말로 삶의 중요한 덕목이자 재능이라는 게 이 책의 요지다. 좀 솔직해지자.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달라지는 게 얼마나 많은가. 학교에선 예쁜 아이가 더 많은 애정과 더 좋은 성적을 받는다. 호감 가는 외모는 면접이나 승진을 할 때도 유리하다. 그러니까 다들 성형외과를 찾지 않는가.

아름다움이 보는 이의 눈에 따라 다른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생각에도 이의를 단다. 아름다움은 정량화할 수 있는 객관적인 개념이라는 것. 물론 아름다움은 제 눈의 안경처럼 서로 다르지만 놀랄 정도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 전 세계의 수많은 연구에서도 미를 평가하는 기준이 기가 막힐 정도로 일치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500년 전 사람들처럼 여전히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다.

이 같은 주장이 페미니스트들의 원성을 살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름다움이 여성을 성적 쾌락의 대상으로 못박아두기 위해 ‘고안된 신화’라니까. 그렇다면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기마저 예쁜 얼굴을 더 오래 쳐다본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종합하면 예쁜 얼굴의 조건은 티없는 피부. 평균에 가까움, 대칭. 앳됨, 성숙함, 풍부한 표정, 포동포동한 볼, 두드러진 광대뼈와 핼쑥한 볼 등이다.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이유는?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많은 종들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것들만이 이성을 사로잡아 번식에 성공하기 때문이다. 생존경쟁에 방해가 될 뿐인 화려한 깃털이 공작새에게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책에는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단정적인 표현들이 많다. “아름다움은 힘이다.” 두 사람이 좁은 인도에서 마주쳤을 때 양보를 받는 건 대체로 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연구 결과를 보라. “아름다움은 재능이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성적을 줄 때 외모에 영향을 받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아름다움은 선이다.” 서양에선 ‘선’과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쁘면 다 착하다.” 돌을 넣은 눈을 던져서 다른 아이를 다치게 한 7살짜리 아이가 예뻤다면 그저 개구쟁이의 짓궂은 장난, 예쁘지 않았다면 “범죄자의 싹수가 보인다”고까지 평가 받는다. 똑같은 범죄 행위를 두고 미인들에게는 ‘특별 할인행사’를 한다는 판결 통계도 있다.

그나마 위안(?)은 아름다움과 행복이 그다지 깊은 연관이 없다는 사실. 행복은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경우에만 온다. 특히 외모에 집중하는 사람은 더 아름다워지기를 꿈꾸는데 이것이야말로 도달하지 못할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것이다. 그런데도 모두들 “더 예뻐지면 더 행복해질거야”라고 중얼거린다. ‘더 예쁘게, 더 날씬하게, 더 젊게’는 이 시대의 표어다. 예전에는 아름다움과 젊음은 자연의 은혜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은 상태는 모두 병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름다움의 감옥’에 갇힌 꼴이다.



저자는 인간 안에 ‘아름다움을 향한 광기’가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아름다움을 향한 광기가 왜 나쁜가”라고 반문한다. 삶이란 하나의 시장이며 아름다움은 이 시장 안에서 높은 값이 매겨지는 상품이다.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은 수지타산이 맞는 일이다. 그럼 아름다워지려는 욕망의 한계선은? 성형수술이 당사자를 반드시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님을 잘 알지만 부작용이 전혀 없는 미용 알약이 나온다면 당연히 구매할 것이라는 게 저자의 솔직한 고백이다.

책에서 문제 삼는 건 새로운 자신을 창조해내는 놀이로서 아름다움의 추구가 미용산업 등 전문집단에 의해 변질됐다는 사실이다. 놀이의 즐거움 대신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지속적인 불안과 스트레스가 들어섰다. 수많은 연구들은 자신의 신체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불만은 더욱 커진다는 역설적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사랑받는 게 아니라 자신을 사랑할 때 행복한 것”이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꺼내든다. 한편으로는 “아름다움을 인정하자”고 제안한다. 아름다움은 언젠가는 끝나는 인생 그 자체이므로, “아름다움을 향한 광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름다움을 신격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잊으려고 애쓴다는 것”이라고 마무리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론으로 점철된 책은 아니다. 저자는 물론 역자도 말했듯이 책에서 보고하는 각종 실험 통계자료는 “통계자료일 뿐”이다. 일반화된 법칙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오히려 우리가 아름다움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게 하고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김진우기자)

08. 03. 14.

P.S. 정작 'The science of beauty'란 부제를 갖고 있는 책은 따로 있다. <미 - 가장 예쁜 유전자만 살아 남는다>(살림, 2000)라고 번역된 낸시 에트코프의 'Survival of the Prettiest'가 그것이다. 저자는 하버드 의대 교수이지만, 개인적으론 별로 읽을 게 없었던 책이다. 울리히 렌츠의 <아름다움의 과학>도 대략적인 요지는 낸시코프의 책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다만 '과학저술가'인 만큼 '교수'보다는 재미있게 써주었을지 모른다.

한편으로 '아름다움'이란 주제에 대해서는 예전에 쓴 '악의 기원으로서의 아름다운 여성'(http://blog.aladin.co.kr/mramor/1585706)도 참고해보시길. 그리고 더불어 지적하자면 '아름다움은 과학'이라는 객관적 사실과 '아름다움은 과학'이라고 말하는 발화행위는 같은 값을 갖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바보인 것과 그 사람을 바보라고 부르는 것은 별개의 사건이다. 아름다움이 힘이고 재능이란 건 우리가 다 아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앎을 발설하고 공표하는 건 별개의 문제이다. 이 페이퍼 또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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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5 09: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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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5 2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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