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했던 지난주와는 달리 이번주 북리뷰란은 북적거린다. 눈길이 가는 책들이 많고 손길이 갈 만한 책들도 여럿 된다. 먼저 손에 잡히는 책은 퇴근길에 서점에서 본 <아름다움의 과학>(프로네시스, 2008). '미인불패, 새로운 권력의 발견'이 부제다. 저자 울리히 렌츠는 독일의 의사이자 과학 저술가. 그의 책으론 <일 덜하는 기술>(문화과학사, 2003)이 번역돼 있다. 악셀 브라이히와의 공저이다.

Die Kunst, weniger zu arbeiten.

<아름다움의 과학> 표지에는 'The science of beauty'라고 박혀 있지만 원제는 <미, 과학 그 자체(Schönheit. Eine Wissenschaft für sich)>이다. 광고투로 말하자면, "아름다움은 과학입니다" 정도가 되겠다.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8. 03. 15) “아름다움 향한 광기, 왜 나쁜가”

솔직하고 거침없는 책이다. 아니 ‘도발적’이라고 해야 할까.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허위의식을 드러내고,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한다. 2006년 출간 당시 전 독일을 논쟁 속에 몰아넣었다. ‘아름다움의 과학’(The science of beauty)이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방점은 육체적·외적 아름다움에 찍혔다. 내면의 아름다움은 논외다. 독일의 의사이자 과학전문저술가인 저자는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들의 통념 혹은 사회적 금기에 ‘딴죽’을 건다. ‘도발적’인 책이 빠지기 쉬운 허술함 대신 치밀함으로 무장했다. 사회과학에서 진화생물학을 거쳐 역사 및 경제학까지 다양한 연구 및 통계 자료를 제시한다.

외모가 아니라 성격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에 있다고. 그러나 아름다운 외모야말로 삶의 중요한 덕목이자 재능이라는 게 이 책의 요지다. 좀 솔직해지자.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달라지는 게 얼마나 많은가. 학교에선 예쁜 아이가 더 많은 애정과 더 좋은 성적을 받는다. 호감 가는 외모는 면접이나 승진을 할 때도 유리하다. 그러니까 다들 성형외과를 찾지 않는가.

아름다움이 보는 이의 눈에 따라 다른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생각에도 이의를 단다. 아름다움은 정량화할 수 있는 객관적인 개념이라는 것. 물론 아름다움은 제 눈의 안경처럼 서로 다르지만 놀랄 정도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 전 세계의 수많은 연구에서도 미를 평가하는 기준이 기가 막힐 정도로 일치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가 500년 전 사람들처럼 여전히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다.

이 같은 주장이 페미니스트들의 원성을 살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름다움이 여성을 성적 쾌락의 대상으로 못박아두기 위해 ‘고안된 신화’라니까. 그렇다면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기마저 예쁜 얼굴을 더 오래 쳐다본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다양한 연구 결과들을 종합하면 예쁜 얼굴의 조건은 티없는 피부. 평균에 가까움, 대칭. 앳됨, 성숙함, 풍부한 표정, 포동포동한 볼, 두드러진 광대뼈와 핼쑥한 볼 등이다.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이유는? 진화생물학에 따르면 많은 종들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것들만이 이성을 사로잡아 번식에 성공하기 때문이다. 생존경쟁에 방해가 될 뿐인 화려한 깃털이 공작새에게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책에는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단정적인 표현들이 많다. “아름다움은 힘이다.” 두 사람이 좁은 인도에서 마주쳤을 때 양보를 받는 건 대체로 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연구 결과를 보라. “아름다움은 재능이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성적을 줄 때 외모에 영향을 받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아름다움은 선이다.” 서양에선 ‘선’과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쁘면 다 착하다.” 돌을 넣은 눈을 던져서 다른 아이를 다치게 한 7살짜리 아이가 예뻤다면 그저 개구쟁이의 짓궂은 장난, 예쁘지 않았다면 “범죄자의 싹수가 보인다”고까지 평가 받는다. 똑같은 범죄 행위를 두고 미인들에게는 ‘특별 할인행사’를 한다는 판결 통계도 있다.

그나마 위안(?)은 아름다움과 행복이 그다지 깊은 연관이 없다는 사실. 행복은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경우에만 온다. 특히 외모에 집중하는 사람은 더 아름다워지기를 꿈꾸는데 이것이야말로 도달하지 못할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것이다. 그런데도 모두들 “더 예뻐지면 더 행복해질거야”라고 중얼거린다. ‘더 예쁘게, 더 날씬하게, 더 젊게’는 이 시대의 표어다. 예전에는 아름다움과 젊음은 자연의 은혜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은 상태는 모두 병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름다움의 감옥’에 갇힌 꼴이다.



저자는 인간 안에 ‘아름다움을 향한 광기’가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아름다움을 향한 광기가 왜 나쁜가”라고 반문한다. 삶이란 하나의 시장이며 아름다움은 이 시장 안에서 높은 값이 매겨지는 상품이다.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은 수지타산이 맞는 일이다. 그럼 아름다워지려는 욕망의 한계선은? 성형수술이 당사자를 반드시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님을 잘 알지만 부작용이 전혀 없는 미용 알약이 나온다면 당연히 구매할 것이라는 게 저자의 솔직한 고백이다.

책에서 문제 삼는 건 새로운 자신을 창조해내는 놀이로서 아름다움의 추구가 미용산업 등 전문집단에 의해 변질됐다는 사실이다. 놀이의 즐거움 대신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지속적인 불안과 스트레스가 들어섰다. 수많은 연구들은 자신의 신체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불만은 더욱 커진다는 역설적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사랑받는 게 아니라 자신을 사랑할 때 행복한 것”이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꺼내든다. 한편으로는 “아름다움을 인정하자”고 제안한다. 아름다움은 언젠가는 끝나는 인생 그 자체이므로, “아름다움을 향한 광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름다움을 신격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잊으려고 애쓴다는 것”이라고 마무리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론으로 점철된 책은 아니다. 저자는 물론 역자도 말했듯이 책에서 보고하는 각종 실험 통계자료는 “통계자료일 뿐”이다. 일반화된 법칙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오히려 우리가 아름다움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게 하고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김진우기자)

08. 03. 14.

P.S. 정작 'The science of beauty'란 부제를 갖고 있는 책은 따로 있다. <미 - 가장 예쁜 유전자만 살아 남는다>(살림, 2000)라고 번역된 낸시 에트코프의 'Survival of the Prettiest'가 그것이다. 저자는 하버드 의대 교수이지만, 개인적으론 별로 읽을 게 없었던 책이다. 울리히 렌츠의 <아름다움의 과학>도 대략적인 요지는 낸시코프의 책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다만 '과학저술가'인 만큼 '교수'보다는 재미있게 써주었을지 모른다.

한편으로 '아름다움'이란 주제에 대해서는 예전에 쓴 '악의 기원으로서의 아름다운 여성'(http://blog.aladin.co.kr/mramor/1585706)도 참고해보시길. 그리고 더불어 지적하자면 '아름다움은 과학'이라는 객관적 사실과 '아름다움은 과학'이라고 말하는 발화행위는 같은 값을 갖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바보인 것과 그 사람을 바보라고 부르는 것은 별개의 사건이다. 아름다움이 힘이고 재능이란 건 우리가 다 아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앎을 발설하고 공표하는 건 별개의 문제이다. 이 페이퍼 또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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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5 09: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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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5 2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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