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안티쿠스, 2008)에서 서론에 해당하는 처음 세 장을 읽었다. 절반은 지난달에 읽은 것인데, 이 노학자의 경륜 있는 강의에서 몇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 중 하나는 단테의 <신곡>과 같은 '클래식'(고전)을 읽는 의의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마미치는 그 '클래식'이란 말의 어원적 의미부터 검토하는데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는 듯해서 정리해놓는다.

 

 

 

 

단테의 <신곡>을 읽는 일은 우선 첫째로 ‘클래식을 공부한다’는 의미가 있다. 아니 오히려 클래식 ‘에서’ 배운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겠다. ‘을’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것과 자신과는 거리가 있게 된다. 물론 단테 ‘를’ 공부하는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단테 ‘에게’ 배운다, 즉 자기 자신이 그 속으로 들어가 공부하고 참여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단테를 공부하는 것은 이처럼 고전 ‘에서’ 배우는 일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단테에게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고전’이라는 어휘는 본래 어떤 의미를 가진 말이었을까. ‘고전’은 영어로는 '클래식(classic)'인데, 그 밖의 유럽 언어도 대부분 맨 첫 글자나 맨 마지막 글자만 다를 뿐 발음은 모두 ‘클래식’이다. 클래식은 라틴어 '클라시쿠스(classicus)'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형용사이며 처음부터 ‘고전적’이라는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니다. 클라시쿠스는 사실 ‘함대(艦隊)’라는 의미를 가진 '클라시스(classis)'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형용사이다. 함대라는 말은 군함이 적어도 두세 척 이상은 있다는 뜻이다. 클라시스는 ‘군함의 집합체’라는 의미였다.(14쪽)

그러니까 어원에서부터 따져보자면 '클라시스(명사) -> 클라시쿠스(형용사) -> 클래식(명사)'의 순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기원적 의미는 '함대'라는 것. 로마 해군의 함대를 가리키던 말이 '클라시스'였고 거기에 대응하는 영어라면 'fleet' 정도겠다. 군함 한 척이 아니라 최소한 두세 척은 거느리고 있는 '선단' 말이다. 그럼 이 '클라시스'에서 파생된 '클라시쿠스'는 무슨 뜻인가?   

'클라시쿠스'라는 형용사는 로마가 국가적 위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국가를 위해 군함을 그것도 한 척이 아니라 함대(클라시스)를 기부할 수 있는 부호를 뜻하는 말로 국가에 도움을 주는 사람을 가리켰다(로마에는 징세 제도가 있었지만, 군함은 세금이 아니라 기부를 모아 만들었다).

그러니까 클라시쿠스란  "함대(클라시스)를 기부할 수 있는 부호"를 가리키는 말이다. 요즘은 고대 로마시대만큼 전쟁을 자주 벌이지는 않으니 '클라시쿠스'에 상응하는 사회적 계층이 무엇인지 확언하기는 어려우나 수십에서 수백 억원 정도를 사회나 국가에 기부할 수 있는 형편의 '부호'를 가리킬 수는 있겠다(하기야 요즘 시세로 '함대'를 기부하려면 수조 원이 들 터이지만). 그 정도면 재벌 내지 준재벌이겠고(물론 탈세하는 게 아니라 세금 왕창 내는 걸 기준으로). 인터넷을 찾아보니 "고대 로마 시민은 6계급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그 최상급을 클라시쿠스(Classicus)라고 하였다. 여기서 뜻이 변하여 예술상의 최고 걸작도 '고전'이라 부르게 되었다."란 설명도 나온다. '클라시스'와의 연관성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사회적 최상층을 가리킨다는 점은 공통적으로 말해준다.  

그렇다면 다시, 이 '클라시쿠스'와 '클래식'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마미치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그렇다면 국가적 위기에 함대를 기부할 수 있는 상황을 인간의 심리적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인간은 언제든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러한 인생의 위기에 당면했을 때, 정신적인 힘을 주는 책이나 작품을 가리켜 '클래식'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는 중세의 비교적 이른 시대, 즉 교부시대부터 그러한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15쪽)

이에 따르면 '클라시쿠스'와 '클래식'은 유비적 관계다. <국가적 위기 : 클라시쿠스 = 인생의 위기 : 클래식>. 다시 말해 '클래식'이란 인생의 위기에 '함대'만큼의 든든한 힘을 주는 작품을 말한다. 비유컨대, 위대한 고전은 거대한 '항모 선단'쯤 되는 것이다(때문에 조각배 몇 척 가지고 '고전'을 참칭하면 곤란하겠다). 더불어 '위기'에 직면하고 있지 않다면 '고전'은 '쇳덩이'에다 '종잇더미'에 불과한 것이겠고. 정리하면 이렇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먼저 밝혀두어야 할 것은 '클라시스'는 원래 ‘함대’라는 의미였으며 '클라시쿠스'는 국가에 함대를 기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애국자이기도 하고 재산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것이 변화하여 인간의 심리적 위기에 진정한 정신적 힘을 부여해주는 책을 일컬어 '클래식'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비단 책뿐만 아니라, 회화든 음악이든 연극이든 정신에 위대한 힘을 주는 예술을 일반적으로 '클래식'이라 부르게 되었다."(15쪽)

 

 

 

 

 

 

 

 

 

  

그럼, 이 '클래식'은 어떻게 '고전'이 되었나? "일본에서는 '클라시스'에서 유래한 '클래식'을 ‘고전’이라 번역한다. 이는 오래 전부터 소중하게 여겨온 서적[典], 요컨대 고전이 그러한 교화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클래식의 번역어로 선택된 것이다. ‘典’은 상형문자로 다리가 달린 책상 위에 옛 책의 형태인 두루마리를 소중히 올려놓는 것은 의미한다. 책상 위에 올려둔다는 것은 ‘읽지 않고 쌓아두기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소중히 여기고 늘 열심히 읽는다는 뜻이다."(15-16쪽)

 

이 '고전 읽기'가 주로 인문학의 소관이며 인문학 공부이다. 그리고 <신곡> 읽기가 바로 그러한 공부이다. 때문에 이마미치 교수는 '고전'으로서의 <신곡>을 읽기 전에 이러한 '서설'을 붙여둔 것이고. 이러한 설명을 읽으며 떠올리게 된 생각은 '고전학'로서의 인문학이 기원적으로는 클라시쿠스의 역할을 하는, 클라시쿠스의 학문이면서 클라시쿠스를 위한 학문이 아닌가라는 점. 애국자이면서 재산가인 이들을 위한 인문학.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국가석학들의 인문학, CEO를 위한 인문학이 되겠다.

 

 

 

 

 

 

 

 

 

 

그리고 그러한 인문학 옆에 '인생의 위기' 혹은 '나락'에 떨어진 이들을 위한 '노숙자 인문학'이 있겠다. 노숙자? 이마미치 교수가 '클라시쿠스'와 대비시켜서 설명해주고 있는 '프롤레타리우스'가 로마시대의 '노숙자' 아닐까? 

 

"덧붙여 국가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자기 자식 ― 자식은 프롤레스(proles)라고 한다 ― 밖에는 내놓을 게 없는 사람, 국가에 헌상할 것이라곤 프롤레스뿐인 사람을 프롤레타리우스(proletarius)라고 불렀다. 따라서 '클라시쿠스'가 재산이 있어서 국가를 위해 함대를 기부할 수 있는 부유층을 가리킨데 반해, '프롤레타리우스'는 오직 자기 자식을 내놓는 것밖에 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을 의미했다. 바로 이 라틴어 '프롤레타리우스'에서 빈곤한 노동계급을 의미하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독일어가 생겼고, 그 후 유럽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오늘날 '클라시쿠스'는 ‘고전적’, '프롤레타리아'는 ‘노동계급’을 의미하는 말이 되어 이 두 단어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옛 로마문화에서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 단어였으며, 생각해보면 프롤레타리우스라는 형용사는 서글픔이 깃든 말이기도 하다."(14-15쪽)  


  

 

한국어의 말장난을 갖다 쓰자면 '클라시쿠스'는 '맨션계급'이고 '프롤레타리우스'는 '맨손계급'이다. 그리고 요즘에도 인문학은 이 두 계급에 '봉사'한다. 오른손으로는 CEO를 위한 인문학최고위과정을 만들고 왼손으로는 노숙자를 위한 인문학 프로그램을 만든다. 모순적인가? 단테와 같은 '위대한 시인'들의 첫번째 조건으로 이마미치 교수가 꼽고 있는 인간론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인간의 고귀함과 나약함, 다시 말하면 휴머니티의 빛과 그림자, 인생의 행복과 적막 양면을 두루 살피고 인간에 관한 사상을 형성하는 시각이 위대한 시인에게는 반드시 있다"(68쪽)고 믿는다.  

 

그런 관점에서 말하자면, 클래식은 '고귀한 자'도 읽어야 하고 '나약한 자'도 읽어야 한다. '고귀한 자'는 고전을 통해서 자신의 의무를 상기할 필요가 있고 '나약한 자'는 자신의 처지를 극복할 용기를 얻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인문학은 배분되어야 한다.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자면 '고전의 나눔'이라고 해야 할까? 감성적인 것뿐만 아니라 인문적인 것에 있어서도 '나눔'은 필요하다. 그래야 '공통적인 것'들을 창출할 수 있으며 진정한 민주주의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인문주의(휴머니즘)보다 먼저 오지 않는다... 

 

08. 03. 16.

 

 

P.S. 이 글은 온라인 학술저널 담비에도 게재되었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MAIN&rsec=MAIN&idxno=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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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클래식과 프로레탈리아, 류차달 할아버지
    from 일체유심조 2008-03-19 14:18 
    우연히 들른 블로그에서 클래식과 프로레탈리아의 어원에 대한 재미있는 해설을 봤다. 요컨대 클래식이란두 세 척 이상의 함대를 일컫는 말로 해양 패권을 다투던 고대 유럽에서 이런 함대를 로마라는 국가에 제...
 
 
2008-03-16 2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3-16 21:43   좋아요 0 | URL
적어도 서양학의 경우에 일본과 막바로 비교할 순 없겠죠.--;

virtuepeak 2008-03-17 0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신곡을 암송했다고 하던데, 클래식에 진정으로 충실한 사례라는 생각이 드네요.

로쟈 2008-03-17 13:01   좋아요 0 | URL
좁혀 말하면, 죽음의 면전에 들고 갈 수 있는 책이 '고전'이겠죠...

섬나무 2008-03-19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께 드리는 내 메모들

표현주의는 간단히 초월될 수 없지만 표현성은 늘 초월되어 왔다. '순진한 단어' 들이 거주하는 텍스트적 변형<텍스트들 간의 오고감>이 존재하는 한 우리가 가정하는 의미의 내재성은 이미 자신의 외재성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의미(의 내재성)>은 항상 이미 <먼저> 자신을 바깥으로 데려간다<운반한다> 그것은 어떠한 표현행위 이전에 (자신으로부터) 이미 벗어나있는 <달라져있는> 것이다.


랑가주(언어활동)를 적극적으로 체득화한것이 언어로서의 시적언어이다. 시적언어는 언어의 안과 밖이 나뉘는 경계에 위치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았거라 ,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난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빈 집> 기형도


기형도의 '식물적' 상상력을 구성하는 핵심은 '전정'과 '모종'이다 - 정과리 <무덤 속의 마젤란>-



북아메리카 중서부 대초원에서 서식하는 들쥐 ‘불스’와 산에서 서식하는 들쥐는 생김새는 거의 비슷하지만, 애정생활에 관한 한 완전히 상반된 특징을 보인다. 대초원에서 서식하는 들쥐는 끔찍이 서로를 아끼는 낭만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평생 한 파트너하고만 짝짓기를 하며, 나중에 직접 만든 둥지에서 새끼를 함께 돌본다. 반면 산에 사는 그들의 동족은 정반대의 애정생활을 보인다. 수컷은 새끼를 낳아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며, 곧장 다른 암컷의 치마 속을 호시탐탐 노린다.

유전자 측면에서만 보면, 두 들쥐는 거의 동일하다. 지난 15년간 들쥐들을 연구해온 미국 에모리대학 래리 영 박사팀은 대초원에서 서식하는 성실한 수컷 들쥐에게 ‘바소프레신’이란 호르몬을 차단하는 약물을 투여하고, 암컷에게는 옥시토신을 차단하는 약물을 투여했다. 바소프레신과 옥시토신은 자식과 배우자에 대한 애착을 유발하는 호르몬이다. 이들을 차단하는 약물을 투여하자, 순식간에 그들의 태도는 돌변했다. 평소에 그렇게 자상하던 수컷이 교미가 끝나기가 무섭게 자취를 감췄고, 암컷 또한 파트너에 대한 흥미를 곧바로 잃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다음 연구 결과였다. 이번에는 산에 서식하는 들쥐를 유전적으로 변형해 바소프레신 수용체와 옥시토신 수용체의 양을 늘렸더니, 바람둥이 수컷 들쥐들이 갑자기 ‘자상한 아버지’로 돌변했다. 예전의 불성실함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대초원에 서식하는 들쥐처럼 그들도 이제 한 파트너에게 전념하고 새끼를 키우는 데 전념하더라는 것이다.

비록 들쥐를 통한 연구 결과이긴 하지만, 사람에게도 뇌 속에 어떤 호르몬이 좀더 지배적인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사랑관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남성의 갱년기- 남성은 30세부터 '테스토스테론'이라는 호르몬이 매년 1%씩 감소한다.

증세- 권태, 허무감, 우울증, 의욕상실, 무기력, 만성피로, 업무저하, 체력저하,

두통, 눈의 피로감, 어지러움, 수면부족, 불면증, 근육통, 관절염.


그는 자신이 갱년기의 허무감과 우울증에 의해 연애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있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그의 바소프레신도 테스토스테론처럼 꾸준히 감소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의 메모는 어디로 벗어난 걸까.

로쟈 2008-03-19 22:59   좋아요 0 | URL
요즘 같아서는 저도 호르몬 주사를 좀 맞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