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일 야구전이 있었고, 오늘 일본이 3-4위전에서 미국에 패한 탓에 포털에는 일본야구 관련 기사들이 많이 떠 있다. 덕분에 생각난 건 이번주에 출간된 <아쿠자, 음지의 권력자들>(이다미디어, 2008)을 포함해서 최근 한달 동안 일본 관련서들이 다수 출간됐다는 사실. 짐작에는 광복절이 낀 '8월 특수'가 아닌가도 싶다(3월에도 그런가?). 일본의 왜곡된 근대화를 지적한 <일본의 재구성>(마티, 2008)도 주목할 만한 책의 하나이다. 여느 일본 관련서들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책이 아니어서 일단은 리뷰만을 챙겨놓는다. 한겨레21의 리뷰가 자세하다(http://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8/08/021015000200808140723008.html).

  

한겨레21(08. 08. 14) 왜 일본은 텅 비어버렸는가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혹은 근대성)에 도달했는가. 이 질문은 답이 너무 뻔해 보이기 때문에 다르게 반복되어야 한다. 일본에서 ‘개인’은 무엇인가. 도쿄 후지산 기슭에는 ‘관리자 양성학교’라는 곳이 있다. 기업들이 사원의 실적이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사원들을 보낸다. 실패한 ‘사무라이’들은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9시 반에 일정을 마친다. 훈련생들은 이곳을 ‘지옥훈련소’라고 부른다. 1993년 일본 여성 오히와 사쓰키는 특이한 사업을 성공시켰다. ‘일본 효과성본부-재팬 석세스 프레지던트’라는 비범한 이름의 회사는 남들과 어울릴 줄 모르는 샐러리맨들을 교육함과 동시에, ‘가족 임대’ 사업을 했다. 노인 부부가 젊은 부부와 손자를 제공받거나 젊은 부부가 아이들과 조부모를 임대한다. 한 달에 두세 번, 다섯 시간에 12만엔.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을 반복해보자. 일본은 우리보다 먼저 근대를 쟁취했는가, 일본에서 개인은 무엇인가.



껍데기만을 모방하기
<일본의 재구성>(패트릭 스미스 지음, 노시내 옮김, 마티 펴냄, 2만6천원)은 오랫동안 일본에서 특파원으로 일한 미국 언론인의 책이다. 일본의 ‘재구성’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단단한 논지로 일본 사회를 중심까지 꿰뚫어버리는, 힘이 넘치는 탐구서다. 한 가지 의문. 일본은 늘 타자에 의해서만 제대로 조명되는 운명일까.

기업과 국가가 확장된 가족의 역할을 하고, 이웃나라에 쓰라린 원한의 감정을 품게 만들며, 자민당의 부패한 정치인들이 수십 년 동안 민주주의를 배반하는 일본. 문제는 무엇일까? 지은이는 ‘국민성’에 대한 논의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일본의 국민성이 아니라 왜곡된 근대화가 문제의 근원이라고 단정한다.

근대화와 동시에 군국주의로 달려가던 일본에도 패전이라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 당과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일본이 공산화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미국은 계기를 빼앗아버린다. 이것이 ‘역코스’라고 부르는 정책 변화다. 덴노(천황)는 죽지 않았다. 미국은 냉전시대의 성배인 안정과 경제 발전에 우선 가치를 두었다. 국가주의자의 제거가 중단되고 전쟁 물자를 공급했던 재벌 세력은 복귀했고 구시대의 정치 엘리트 세력들이 다시 일본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일본의 역사·전통·이미지의 재구축이 일어난다. 국민을 억누르던 봉건적 관습이 전통이 되었고, 이 전통은 전쟁에 반대하는 ‘선량한 덴노’로 구현된다. 일본은 한순간에 전쟁의 책임에서 벗어나 열심히 일하고 말 잘 듣는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다. 일본은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최대의 기회를 미국에 빼앗긴 것이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일본’은 새롭게 창조된 환상이었다.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스스로를 지워가는 개인이 일본의 전통이었을까? 고대 일본은 가부장제와 거리가 먼 모계사회에 가까웠다. 7세기 쇼토쿠 태자가 유교를 수입해 일본에 규율과 위계적 신분질서를 정착시켰다. 12세기 말부터 쇼군을 중심으로 하는 사무라이 정권이 700년이나 이어졌다. ‘할복’이 보여주듯, 무사는 개인이 은밀한 사적 영역으로 완전히 퇴각하는 현상을 처음 경험한 일본인들이었다.

이러한 사무라이 전통과 일본 정신이 애창되면서 일본 역사는 부분적으로 삭제된다. 봉건시대에 일어난 수많은 농민봉기는 전통에서 탈락한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근대성을 스스로 만들어갈 계기를 맞이한다. 에도시대가 끝나가던 마지막 몇 달간은 새로운 기대로 가득했다. 성적인 에너지로 가득한 축제가 이어졌다. 그러나 해방의 순간은 가고, 일본인들은 천황과 절대주의의 부활로 배신당한다. 일본은 민주주의를 비롯해 서구의 모든 것을 모방하지만, 그 ‘자기식의 변형’은 껍데기만을 발전시키고 속을 텅 비우는 것이다.

일본은 시민윤리가 들어설 자리에 기업적 가치관을 세워놓았다. 서류가방을 든 사무라이, 기업전사로 불리는 일본의 샐러리맨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생산체제부터 자율성은 부정된다. 재벌이 하청업체를 착취하는 구조가 완성된다. 노동자가 기업이라는 가족의 구성원으로 규정되는 체제 때문에 과로사 문제가 끊임없이 불거지고 있다. 근대화는 수단에서 목적으로 변신했고, 성장 이데올로기로 구체화됐다.

도시와 지방 사이의 구조에서도 자율성이 붕괴된다. 전후 모든 것이 중앙집권화하면서 근대 일본은 지역 정체성을 없애버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1972년에 정계의 실력자이자 킹메이커였던 다나카 가쿠에이는 총리직에 오르기 직전에 <일본열도 개조론>이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쓴다. 토건국가는 일본 전후 체제의 핵심이다. 모든 것은 공공사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중앙정부에서 시작된다. 수주 가격이 지나치게 부풀려진 게 분명한데도 유권자는 이런 사업을 환영한다. 건설회사는 선거운동에 거금을 기부하고, 정치가들은 건설회사에서 한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진단 아래 지은이는 일본의 미래를 위한 독특한 제안을 한다. 현재 일본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극우 국가주의가 아니라 ‘방기’다. 일본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손을 놓아버렸으며 국제 문제는 미국에 의존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이들은 천황이든 역사든 전후 헌법이든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로 묶어놓는다. 나카소네 전 총리 같은 극우만이 뒤틀린 방식으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빈자리를 이젠 일본의 신세대 국가주의자들이 채우고 있다.

지은이는 일본이 정체성까지 미국에 맡겨놓는 의존의 고리를 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헌 논의는 큰 계기가 될 수 있다. 헌법을 유지하든, 일본인의 손으로 다시 만들든, 재무장을 하든 안하든, 전 국민이 열린 토론을 거쳐 어떤 선택을 내린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격론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좋다. 스스로 문제의 해답을 찾고 자기 결정에 책임지는 과정을 통해… 미래를 지향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극우의 생각을 아예 활짝 터놓고 전국적인 논의에 불을 붙이면 헝겊을 벗겨낸 미라처럼 분해돼버릴 것이다.



일본의 미래에 대한 의문
지은이의 이런 논지는 때때로 한국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불편함은 지은이의 국적이 미국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서구의 근대화를 이상화하는 진화론적 관점에 서서 일본의 근대를 비판하며, 일본 사회에 ‘미성숙’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일본 특유의 경제발전 양식과 보호무역주의에도 이런 딱지를 붙이는 것은 때론 부당해 보인다.

무엇보다, 일본의 미래에 대한 제안은 몇 가지 의문을 던지게 한다. 지은이는 히로히토 천황의 죽음이나 국가주의의 재등장 등 몇 개의 빈약한 근거를 들어 지금 일본이 거대한 변화의 시점에 다다랐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일본이 자신의 정체성을 성찰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겪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미국과 일본의 관계에만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래서 개헌 논의 등을 통해 미국에 대한 의존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일본과 동아시아 국가의 관계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몇 개의 의문에도, 지은이가 견지하고 있는 논지의 핵심은 여전히 울림이 크다. 일본은 지금 격론을 벌이며 자신을 성찰하고 재구성해야 한다. 일본은 거울처럼 한국의 모습을 비춰준다.(유현산기자) 

08. 0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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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23 22:52   좋아요 0 | URL
패트릭 스미스의 이런 논리는 근대 자체에 대해 성찰하는 왈러스틴과 같은 이의 사상에 비해 얼마나 수준이 낮습니까.일본의 근대화를 비판하면서도 평화헌법을 바꾸라니...그럼 무슨 근대화를 이상으로 삼겠다는 것인가요.경향신문에 칼럼을 내고 있는 거번 맥코맥은 우익의 집요한 공세에 맞서 일본의 시민운동 세력이 평화헌법 고수를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가상하다고 말하는데, 아예 개헌을 하라고요? 이시하라 신타로 같은 개헌파가 득실득실해야 좋다는 말인지.

로쟈 2008-08-23 23:25   좋아요 0 | URL
"헌법을 유지하든, 일본인의 손으로 다시 만들든, 재무장을 하든 안하든, 전 국민이 열린 토론을 거쳐 어떤 선택을 내린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는 게 실상은 허구죠. 민주주의의 허구. 다수는 결국 개헌을 지지할 테니까요. 영화 <다크 나이트>는 그런 점을 잘 짚어주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3 23:51   좋아요 0 | URL
아직은 평화헌법 고수파가 대세인 듯 싶어요.여하튼 일본의 사상지도는 아직은 아사히 같은 신문이 산케이 요미우리에 맞서는 발행부수를 갖고 있는 게 현실이니까요.우리나라의 경향신문이나 한겨레 발행부수를 조중동과 비교한다면...이거 얘기가 안되죠.

로쟈 2008-08-23 23:58   좋아요 0 | URL
정치권만 나대는 건가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4 00:20   좋아요 0 | URL
2005년에 새역모라고 해서 거기서 새로운 일본사 교과서 만든다고 법석을 떨 때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이 곧 만주국이라도 세울 것 같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실제 그 교과서 채택한 학교가 하도 적어서 새역모가 분열되어 버렸거든요.흔히들 일본의 진보세력이 약하다 뭐다 하지만 솔직히 우리나라가 일본을 걱정할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우리도 내 코가 석자나 빠졌으니까요.우리나라는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엄존하고 있을 만큼 제도적 민주주의가 미약한데 정치적 허무주의가 선거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하고 있으니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거나 못 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 격이죠.비정규직의 확산은 이런 추세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구요.요즘 경향신문이 비정규직의 확산을 경제나 노동문제 뿐 아니라 정치적 의미에서도 분석하고 있는데 상당히 중요한 문제의식이라고 봅니다.

로쟈 2008-08-25 00:07   좋아요 0 | URL
평화헌법에 대한 논란이 자꾸 제기되기에 백중세인 줄 알았는데, 아직은 고수파가 대세라니 다행이네요. 가라타니 고진은 한 술 더 떠서 '평화헌법'을 일반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그러니까 그걸 '정상'으로 하자는 얘기죠...

노이에자이트 2008-08-26 17:08   좋아요 0 | URL
가라타니 상이 그런 이야기를...하긴 폭 넓은 사상을 가진 학자니까요.

로쟈 2008-08-26 20:57   좋아요 0 | URL
<세계공화국으로>의 취지가 그렇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26 22:31   좋아요 0 | URL
얼마 전 고인이 된 오다 마코토(하워드 진의 친구)상도 평화헌법 고수,미국과의 군사동맹 반대를 외쳤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죠.

로쟈 2008-08-26 22:38   좋아요 0 | URL
그걸 강대국에도 요구한다는 게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인데요, 흠...
 

<유럽적 보편주의>(창비, 2008)가 출간된 김에 월러스틴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근대세계체제 1-3>을 비롯해서 국내엔 대부분의 주저들이 번역돼 있는 듯하다. 개인적인 관심은 그의 '지식론' 내지는 '학문론', 사회과학의 변형(개방)에 대한 주장이다(일리야 프리고진과 같이 읽을 필요가 있다. <지식의 불확실성> 같은 경우는 제목에서부터 프리고진의 <확실성의 종말>을 떠올리게 하는데, 실상 프리고진에게 헌정된 책이기도 하다). 관련페이퍼로는 '월러스틴과 새로운 지식 패러다임'(http://blog.aladin.co.kr/mramor/110543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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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적 보편주의- 권력의 레토릭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김재오 옮김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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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불확실성- 새로운 지식 패러다임을 찾아서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유희석 옮김 / 창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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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이광근 옮김 / 당대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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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패권의 몰락- 혼돈의 세계와 미국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한기욱, 정범진 옮김 / 창비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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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23 22:38   좋아요 0 | URL
관련 페이퍼를 읽으니 그 문제의식이 설득력이 있군요.'근대'란 무엇인가.과학이란 무엇인가 전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브로델이야 왈라스타인이 브로델 연구소도 차린 적이 있으니 그런다 쳐도 프리고진이나 화이트헤드까지 언급하는 걸 보니 대단하군요.

로쟈 2008-08-23 23:29   좋아요 0 | URL
관련페이퍼는 잊어먹고 있던 건데, 작년에 고른 책도 이번에 마이리스트로 골라놓은 책들과 똑같더군요.^^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미니북'이 출간됐다. 작년에 출간된 <지식의 불확실성>(창비, 2007)과 같은 판형이지만 부피는 절반 정도인 <유럽적 보편주의: 권력의 레토릭>(창비, 2008)이 그것이다. 2004년에 한 대학에서 가진 세 차례 강연에다 결론적인 장을 덧붙인 책인데, '보편주의'에 대한 성찰과 함께 월러스틴을 이해하는 데에도 요긴할 듯싶다. '유럽적 보편주의 vs 보편적 보편주의'라는 프레임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말해주지만 월러스틴의 '레토릭'을 따라가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한국일보(08. 08. 23) 베푸는 듯 강요하는 강자의 논리

신대륙 정복에 나선 에스파냐인들이 아즈텍과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뒤 이 지역 주민들의 노동력을 강압적으로 착취했던 16세기. 에스파냐에서는 폭압적 식민지 경영방식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다. 철학자 세뿔베다는 아메리카인들이 문맹의 야만인이라는 점, 우상숭배와 인신공양 관습에 대해 처벌해야 한다는 점, 이 관습으로 인한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참사를 방지해야 한다는 점, 가톨릭 신부들을 보호해 기독교 전파를 꾀해야 한다는 점을 이유로 정당성을 옹호한다.

반면 신부 라스 까싸스는 이 논거는 소수의 악행을 정치구조의 문제로 일반화하고 있으며, 기독교 교리를 들어본 적조차 없는 사람들에 대해 무슨 권리로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겠느냐며 반박한다.
'세계체제론'으로 유명한 미국의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78)은 식민지경영을 둘러싸고 에스파냐에서 벌어진 16세기의 '세뿔베다-라스 까사스' 논쟁은 21세기적인 논쟁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세뿔베다의 논리를 문명화된 지역이 비문명화된 지역에 대한 개입을 정당화하려는 근대 이후 강자들의 전형적 논리로 본다.

이는 "이전에 존재한 바 없는 약간의 정의 내지 행복, 지적계몽의 여명, 의무감의 각성을 남겨놓은 것이 인도에서의 영국의 명분"이라며 인도지배를 정당성을 강변한 20세기초 인도총독 커즌경의 말이나 인권을 옹호하고 민주주의를 증진시킨다는 명목으로 이라크를 군사적으로 침범하고 시리아, 이란, 북한에 압력을 가하고 있는 오늘날 미국과 영국 등의 행태와 맞닿아 있다고 본다.

인권옹호와 민주주의 증진이라는 명제는 거창한 명분과 달리 실상은 근대세계체제의 강자들이 이익을 도모할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라는 것이 월러스틴의 생각. 그는 이런 가치들을 '유럽적 보편주의'(European universalism)라고 명명하며, 이 같은 보편적 가치가 과연 존재하는지를 묻고, 보편적 가치에 은밀히 관여하고 그것을 이행하는 힘있는 자들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것을 요구한다.

유럽적 보편주의는 동양을 덜 진보되고 야만적이고 몰개성적이고 정적으로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의 쌍생아다. 현재 우리가 유럽적 보편주의의 시기의 끝에 와 있다고 보는 저자는 따라서 지식인들에게 약자에 대한 강자의 개입을 위한 근거들을 객관적이고 회의적으로 볼 수 있는 '보편적 보편주의'(universal universalism) 로 무장한 비(非) 오리엔탈리스트가 되라고 주문한다.

이런 태도는 세계체제의 불평등의 결실을 누리고 있는 강자들로부터 인기가 있을 리 없지만, 월러스틴은 유럽적 보편주의와 보편적 보편적 보편주의의 싸움은 앞으로 25~50년 사이에 진입하게 될 미래의 세계체제가 어떻게 구성될지를 결정하는 주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예고한다. 저자가 2004년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에서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묶었다.(이왕구 기자)

08. 0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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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23 22:44   좋아요 0 | URL
19세기 이후의 제국주의 논쟁은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이 글을 보니 세뿔베다-라스 까사스 논쟁도 관심이 가는군요.

로쟈 2008-08-23 23:26   좋아요 0 | URL
책은 얇은데, 저는 좀더 정확하게 읽고 싶어서 원서도 주문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23 23:57   좋아요 0 | URL
이 분은 경제사학자로 구분해도 될 것 같아요.사실은 저도 경제사 공부하다 알게 되었으니까요.역시 역사학과 사회과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경제사를 기반으로 해야 할 것 같아요.

로쟈 2008-08-25 00:08   좋아요 0 | URL
이미 주저가 경제사 책 아닌가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6 17:09   좋아요 0 | URL
요즘도 역사학과 사회과학을 분리하려고 하는 이들이 꽤 있더라구요.
 

한때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에코의서재)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지만, 가장 저명한 행동주의 심리학자 B. F. 스키너의 책이 출간된 건 오랜만이 아닌가 싶다. 이번주의 신간 <자유와 존엄을 넘어서>(부글북스, 2008)가 일단 반가운 건 그래서인데, 개인적으로 그 반가움은 이 책이 잠시 20년쯤 전으로의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이기 하다. 학부때 읽은 책의 표지와 책장의 감촉이 잠시 되살아난 것. '비싼' 책이어서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구입했던 기억이 새롭다. 물론 지금은 어느 박스에 들어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디지털타임스(08. 08. 21) 인간행동은 자율보단 환경이 좌우

19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미국 심리학계를 휩쓴 행동주의 심리학의 기본 입장은 생각하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기억하는 `정신활동'은 직접적으로 관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환경의 자극에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에 집중했다. 그들에게 인간의 행동은 진화의 과정을 통해 유전적 자질과 외부 환경이 만들어낸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인간이 원래 목적적이고 자율적이라는 전통적 인간관은 허튼소리에 불과했다.

이 책은 프로이트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로 평가받는 행동주의 심리학자 스키너를 대중들의 뇌리에 사회사상가로 각인시킨 책이다. 스키너는 과학적 심리학에서 얻은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인간관과 문화관을 제시한다.

스키너는 자유와 존엄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관점을 분석하면서 책을 시작한다. 자유와 존엄을 누리는 인간 내면의 자율적인 존재가 행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강화요인을 통해 인간의 행동을 다듬어나간다는 것이 스키너의 일관된 주장이다. 따라서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열쇠도 인간의 성격보다는 인간의 행동을 개선하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세계에 중요한 문제들은 모두가 글로벌하다. 인구과잉, 자원고갈, 환경오염, 핵전쟁의 가능성 등이 그렇다. 이것들은 현재의 행동양식 때문에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결과들이다. 그러나 예상 결과를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런 예상 결과들이 인간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1972년 스키너는 이 책으로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하며 대중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동시에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은 맹공을 퍼부었다. 미국 대학생들에게 건전한 가치관을 심어주기 위해 조직된 비영리기관인 `대학비교연구소'는 이 책을 20세기 최악의 책 50권 중 하나로 꼽았다. 그런가 하면 노암 촘스키는 스키너를 비롯한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을 전체주의 사상의 지지자들이라고 공격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인간행동의 원인을 순전히 환경 탓으로만 돌리는 책의 내용에 경악을 거듭했던 것이다.

인간행동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스키너의 주장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자유와 존엄을 옹호하는 전통적 관점이 인간행동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인류가 당면한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행동이 인류문화의 생존을 돕는 쪽으로 다시 설계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거듭 강조한다. 읽어내기가 녹녹지 않은 분량에 몇몇 대목에서는 급진적인 성향도 보이지만 각종 사회현상의 분석을 통해 드러나는 스키너의 일관된 주장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진중한 메시지를 던진다.(이지성기자)

08. 08. 22.

P.S. 내가 읽었던 책은 심리학자 차재호 교수가 옮긴 <자유와 존엄을 넘어서>(탐구당, 1989)이다. 200쪽 조금 넘으니까 얇은 책이었는데, 대신에 딱딱한 하드카바였고 책값이 좀 셌다. 지금 확인해보니 알라딘에서도 1994년판을 판매하고 있다. 아직 품절되진 않은 모양이다(왜 같이 검색이 안되는지는 모르겠다).

스키너에 관한 가장 쉬운 입문서를 고르라면 나는 레즐리(레슬리) 스티븐슨의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일곱 가지 이론>(종로서적, 1981)을 꼽겠다. 그 일곱 가지의 하나로 스키너의 행동주의가 다루어지고 있다. 스티븐슨의 책은 판을 거듭하면서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갈라파고스, 2007)으로까지 확장됐지만, 아쉽게도 스키너에 관한 장은 빠지게 됐다.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게 이유였던 걸로 기억한다. 보다 전문적으론 임의영의 <스키너의 행동주의적 인간관>(문학과지성사, 1993)을 참조할 수 있다. 기억에는 행정학 전공인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스키너의 또다른 대표작 <월든 투>를 읽어야겠다(책의 이미지들은 편의상 사이즈가 맞는 걸로 가져왔다. <월든>이나 <월든 투>나 여러 종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 제목은 물론 헨리 소로의 <월든>에서 따온 것으로 스키너가 생각하는 이상세계를 그려내고 있다(그는 심리학을 전공하기 전에 영문학을 공부했다). 촘스키가 "스키너를 비롯한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을 전체주의 사상"이라고 공격했을 때, 그 사정권 안에는 <월든 투>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젝을 따라서 이렇게 반문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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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미로 2008-08-23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심리학에 빠졌을 때 스키너의 글들 접했어요^^같은 알라딘에 서평을 올리면서도 몰랐네요^^ 스윗도넛님 블로그에 갔다가 님의 글이 우수북로거로 추천이 됐기에 배우러 왔어요^^
가끔이라도 들러야겠네요^^

로쟈 2008-08-23 10:16   좋아요 0 | URL
네, 반갑습니다. 가끔 들르시길.^^
 

학교에 나오는 길에 읽은 경향신문이 기획기사를 옮겨놓는다. '정부수립 60주년' 기획기사로 이번주에는 '미국'을 주제로 하고 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8211903085&code=210000). 안 그래도 어제 하워드 진의 <권력을 이긴 사람들>(난장, 2008)을 읽느라 내내 '미국' 속에 빠져 있었는데(벤야민의 구분을 따르면, 하워드 진은 패자의 역사를 장엄하게 기록하고 있는 뛰어난 '역사적 유물론자'이다), 아침부터 또 '미국'이어서 좀 신물이 나려고 했다. "미국(아메리카)에 간다"는 말이 '자살'을 암시하던 19세기 러시아소설들이 문득 그립다...  

경향신문(08. 08. 22) 전쟁·가난 구원 ‘藥주고’ 학살·독재 후원 ‘病주고’

한국을 일제에서 해방시킨 미국
한국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그래서 특수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두 나라가 있다. 하나는 북한이요, 다른 하나는 미국이다. 남북한이 따로 유엔에 가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외교관계로 설정하기 어렵다는 논란을 감안한다면, 한국의 대외관계에서 가장 특수한 국가는 미국이다.

1882년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 한국의 근·현대사는 미국을 빼놓고는 서술하기 어렵다.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하기 위해 고종이 선택한 것은 ‘우호적 중재(good office)’ 조항을 협약에 넣었던 미국이었지만, 일본과의 밀약을 통해 한국과 필리핀에 대한 상호 지배를 인정한 것도 미국이었다. 일제강점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3·1 독립운동에 전 민족이 일어나도록 했던 것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였지만, 승전국의 식민지였던 조선에는 해당되지 않는 선언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을 결정적으로 이끈 것은 미국이었지만, 해방된 한반도의 남쪽에 미군정이 들어섰고, 미군정은 1948년 38선 이남에서 대한민국이 수립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 수립 직후 미군정이 해체되고 주한미군이 철수했지만, 곧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미군은 다시 한반도에 들어왔다. 미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더 이상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군에 의해 자행된 노근리 사건은 지금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 표상이자 독재 후원자로서의 이중성
주한미군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철수하지 않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한반도에 군사기지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주한미군이 대한민국의 안보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지만,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음으로 인해 미국은 5·16 쿠데타와 12·12 쿠데타, 그리고 광주민주항쟁 등 역사의 고비에서 민주주의를 말살한 군부를 묵인 또는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전쟁의 피해로부터 복구하는 데 있어서 미국의 역할 역시 결정적이었다. 1950년대 미국의 원조는 국내 자본 축적과 기업의 성장, 그리고 식량 공급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60년대 이후 급격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미국은 한국 경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장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한국 경제에 가장 취약한 구조적 문제가 되고 있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한국인들의 ‘신화’를 깨고 외국에 전투부대를 파견한 것도 미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전쟁 특수는 한국의 경제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명분 없는 파병으로 인해 한국 근·현대사에 큰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민주주의 실현과정에서도 미국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4·19 혁명이나 6·10 민주항쟁에서 미국의 개입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사실과 함께 미국식 민주주의를 모토로 한 교육은 시민들의 민주적인 의식을 확산시켰다. 그러나 4·3 항쟁과 광주민주항쟁에서의 미국의 역할은 반미의식의 확산에 중요한 계기가 됐다.

미국은 단순 외세 아닌 현대사의 주체
이렇게 한국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미국은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약도 주고 병도 주었다. 어떻게 보면 미국은 단순한 ‘외세’가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에서 주체의 하나로서 작동했다. 정치세력들의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잣대도 미국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구분되고,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집회에 성조기가 태극기와 함께 휘날리는 것도 한국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미국은 수많은 국가들 중에서 한국을 선택했을까? 역사·사회·지리 교과서에 수도 없이 반복되고 있듯이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한국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고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것은 한반도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지만, 한국만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터키나 파키스탄, 이란, 쿠바, 그리고 베트남 같은 경우 한국에서의 경우와 같이 미국이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특수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독재→민주화 불구 한·미관계 유지
또한 지정학적 위치만을 따진다면 냉전이 해체됨과 동시에 한반도의 가치는 바닥에 떨어져야 했다. 그러나 냉전 해체 이후에도 한국은 미국과의 특수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주한미군이 감축될 것이라고 하지만, 미군 기지는 계속 유지될 것이며, 한·미 FTA는 한국의 대통령 선거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하나의 쟁점이 되고 있다. 독재시대와 마찬가지로 대통령 당선자는 가장 먼저 미국을 방문한다. 그러나 평범한 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관심이 없다.

한국과 미국의 특수한 관계에 대한 비밀은 이제 다른 곳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 바로 한국인들 스스로가 미국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의 문제이다.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대부분의 독재정권들이 시민혁명이나 반대세력들의 쿠데타에 의해 무너졌다. 미국의 깊숙한 개입은 내부의 반대를 불러왔고, 결국 미국의 정책에 반대하는 정부가 수립됐다. 이란과 쿠바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독재정부가 무너져도, 민주주의 체제가 도입돼도 미국은 계속해서 특수한 존재였다. 결국 한국 스스로가 미국과의 특수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 대한 뿌리깊은 우호적 인식
바로 여기에 한·미관계의 특수성이 존재하고 있다. 미국의 정책이 독재정부를 지원하고 때로 한국보다는 미국 자체의 국가이익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경우도 있지만, 미국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이 한국 사회 내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 경향신문의 광복절 특집 설문조사는 미국이 한국에 너무나도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전체 설문대상자 중 두번째로 많은 23.8%가 한국에 가장 위협적인 국가로 미국을 뽑았지만, 동시에 45.4%라는 압도적인 다수가 가장 호감이 가는 국가로 미국을 선택했다.

이 결과는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모순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측면을 잘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에 반감을 갖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국인들 스스로가 갖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이 미국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즉, 한국 사회 내부에는 미국적인 것이 좋은 것, 또는 근대적인 것이라는 관념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물론 한국인들의 미국에 대한 호감이 한국전쟁과 전쟁구호, 그리고 남북대결이라는 냉전적 구조 등 역사적 경험에 기인하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왜 이러한 인식을 갖게 됐을까? 여기에는 미국의 대외정책의 특수성이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다. 미국은 다른 열강 제국과는 달리 ‘민주주의’와 ‘근대화’에 기반을 둔 ‘연성권력(soft power)’을 대외정책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다. 일본의 동화주의나 내선일체 정책이 또 다른 연성권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일본 중심적인 사고였기 때문에 식민지에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미국의 ‘민주주의’와 ‘근대화’ 이념은 다원적이고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갖고 있는 개념이었다.

구한말 외교관으로 파견된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에서 ‘근대’를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근대 한국의 주요한 인물들은 대체로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945년 이후 미국 원조의 중요한 부분은 교육원조였다. 1950년대 경영대학과 행정대학원 설립, 그리고 서울대학교에 대한 미네소타대학의 원조나 한국 교육자들을 미국에서 교육받도록 했던 피바디 계획 등은 모두 교육 원조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에서도 로스토의 근대화론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65년 한국을 방문한 로스토가 했던 ‘근대화’의 한 마디를 통해 한국 정부는 한국 사회 전체를 경제성장의 길로 동원할 수 있었다. 미국의 연성권력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인디펜던스 데이’, 드라마 ‘뿌리’나 ‘남과 북’을 통해 제3세계 사람들로 하여금 미국의 역사와 사회를 다른 나라의 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미국에 대한 객관적 인식 증대
결국 이러한 과정은 현재까지도 미국이 한국에서 특수한 국가로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한 한·미관계가 앞으로도 계속돼야 하는가? 겉으로 볼 때 한·미관계는 큰 변화 없이 계속돼 온 것 같지만, 모든 사물이 진화하고 발전하듯이, 한·미관계 역시 진화하고 발전해 왔다. 한국 사회는 미국을 더욱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제 한·미관계는 한 단계 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세계의 변화는 한·미관계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 기지의 재편도 그 과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세계의 변화에 걸맞은 변화가 오지 않는다면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과거와 같은 약소국이 아닌 한국이 오로지 미국만 바라보는 외교를 한다면, 이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며, 한·미관계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박태균 |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



“하나의 외국일뿐” 주체적 인식 확산 불구 이상국가 열망도 공존
지난 60년동안 우리의 대미인식은 가난과 전쟁에서 벗어나게 해준 ‘구세주’에서 우리와 대등한 하나의 외국 등으로 다양하게 변화해왔다. 해방 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엔 미군정이 들어서 친미·반공체제가 구축됐다. 이후 한국전쟁 시기 ‘인천상륙작전’으로 상징되는 미국·유엔의 지원과 구호품, 필수품 원조는 ‘미국=세계평화의 수호자, 자유민주주의의 보루’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이렇게 형성된 미국에 대한 호감은 4·19 혁명 이후 박정희 정권의 베트남전 파병 등으로도 이어졌다. 당시 베트남 파병에 대해선 한·일 협정과 대조적으로 학생운동권 일부를 제외하고는 별 반대가 없었다.

대미인식의 변화가 감지되는 것은 80년대부터다. 80년 5월 광주항쟁에 대한 전두환 군부의 무력진압을 미국이 방조하면서 ‘반미’ 감정이 폭발했다. 특히 82년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요구하며 일어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최초의 공개적 반미 투쟁이었다. 90년대에는 ‘윤금이씨 살해사건’ 등 미군 범죄를 계기로 반미 운동이 일어났다. ‘노근리 사건’은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구원자일 뿐 아니라 학살자이기도 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2002년 ‘미선이·효순이 장갑차 사망 사건’과 ‘SOFA 개정운동’은 균형 있는 관계에 대한 욕구에 불을 붙였다. 최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로 인해 촉발된 ‘촛불 집회’ 역시 과거와 달라진 주체적 대미 인식을 드러낸다. 그러나 ‘아메리칸 스탠더드’로 대변되는 이상적 국가로서의 미국에 대한 열망 역시 크게 공존한다. 한국은 미국에 최대 규모의 유학생을 내보내고 있으며 미국시민권을 얻기 위한 원정출산, 조기유학·영어몰입교육 열풍 등도 여전히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이로사기자)

08. 08. 22.

P.S. 기획기사의 다른 꼭지로 '자유주의와 미국'을 다룬 기사도 참고해볼 만하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8211908045&code=210000). 자유주의의 한국적 '굴절'에 대해서 잘 짚어주고 있다(한국에서는 사회주의자인 박노자에서 자유지상주의자인 복거일까지가 모두 자유주의의 스펙트럼에 포함된다. 대단한 오지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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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노바바 2008-08-22 15:10   좋아요 0 | URL
최근 출간된 책 중에 다음 두권이 관련되는 주제에 관한 것이네요. 둘다 가볍게 읽어볼만한 책들입니다.

왜 다시 친미냐 반미냐 - 전후 일본의 정치적 무의식
요시미 순야 지음, 산처럼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062241

아메리카나이제이션
김덕호, 원용진 엮음, 푸른역사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510671

로쟈 2008-08-22 19:48   좋아요 0 | URL
네, <아메리카나이제이션>이 있었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3 16:44   좋아요 0 | URL
해방이후 한미 관계사에선 미군정 통치기간과 역대 주한 미국대사들을 반드시 연구해야 합니다.특히 막후괴물 제임스 하우스만! 그의 증언록의 제목이 의미심장합니다.<한국대통령을 움직인 미국대위>.미군정기 부터 박정희 시대까지 한미관계의 막후에서 미묘한 흥정을 하던 그의 증언에서 우리는 공식적 역사 뒤편의 역사의 진짜 속살을 볼 수 있습니다.

로쟈 2008-08-23 20:55   좋아요 0 | URL
그런 증언록도 다 소개가 된 모양이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3 21:55   좋아요 0 | URL
네...사망 몇년 전에 나왔어요.박노자가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강추한 책이죠.(저는 하우스먼 증언록을 읽은 한참 뒤인 올해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었는데 하우스먼을 상당히 길게 언급한 것을 보고 역시 박노자의 독서범위가 대단하구나...하고 느꼈죠).절판되었는데 저는 당연히 헌 책방에서 샀어요.

로쟈 2008-08-23 23:21   좋아요 0 | URL
저는 주목하지 않고 읽었나 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24 00:00   좋아요 0 | URL
저는 아무래도 한국 현대사 쪽 독서가 많다 보니 시야에 잡히네요.

로쟈 2008-08-25 00:10   좋아요 0 | URL
사실 최근 정세만 아니면 현대사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을 텐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6 17:19   좋아요 0 | URL
경향신문엔 사진 설명에 이상훈과 강영훈만 명기했는데 기자가 다른 사람은 몰라서 그랬을까요? 제일 오른쪽은 채명신(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제일 왼쪽 이철승(호남 강경우익의 원로).80이 넘었는데 엄청나게 건강하신 분들이죠.좌익들에게 이 나라를 맡길 수 없다고 앞장서시느라 지금도 바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