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관련 학술교양서 두 권을 챙겨놓고 싶다. 이영석 교수의 <영국, 제국의 초상>(푸른역사, 2009)와 유명숙 교수의 <역사로서의 영문학>(창비, 2009)가 그 두 권의 책이다. <영국, 제국의 초상>에 대한 저자 자신의 소개와 <역사로서의 영문학>에 대한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서울신문(09. 10. 24) 근대 英사회상으로 24일의 한국 조명 

‘영국, 제국의 초상’(푸른역사 펴냄)은 빅토리아시대 후기 영국 사회의 다양한 내면 풍경을 그림처럼 섬세하게 되살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사회구조나 계급관계 같은 거시적 측면보다는 민주주의, 경제 불황, 빈곤, 인종, 여성 문제, 교육, 신앙, 과학 지식 등 미시적인 주제들을 당대 문필가들의 논설을 중심으로 탐색한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세계를 내 나름의 시각으로 재현해 독자 앞에 펼치고 싶었던 것이다.  

19세기 말 영국 사회의 풍경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민주주의가 왜 필요한지 되묻는 사람들, 대불황의 원인을 찾는 문필가와 이스트 엔드 빈민가에서 그 시대의 불행을 고민하는 박애주의자며 유대인 이민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이밖에도 집안의 천사 역할을 과감히 벗어던진 신여성과 당대 교육현실에 실망하고 불평하는 지식인들도 등장한다.  

영국의 근대화는 전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의 조건이 충분히 성숙한 가운데서 전개되지 않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전통의 지배가 여전히 강력한 사회에서 자본주의 및 그와 관련된 여러 경제적 변화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비유하면 영국의 근대는 조산에 따른 미숙아의 이미지와 같다. 이 경우 전통은 오히려 근대화의 토양이 되었으며 적대적 관계가 아닌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변모했다. 전통과 혁신, 지속과 변화의 야릇한 공존은 영국 근대사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빅토리아 시대 후기는 매우 중요하다. 이 시기에 영국 근대사의 이러한 특징이 커다란 파열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농업 불황기 전통적 지배세력의 급속한 몰락은 그 붕괴 과정의 물살 표면에 떠오른 포말이었다. 전통의 급속한 변화 또는 조락은 19세기 말 영국 사회의 두드러진 현상이었고, 궁극적으로 전통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온 영국 제국에 동요를 가져왔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나는 19세기 말 영국 사회의 내면풍경에 직접 다가서기보다는 당대의 대표적인 평론지 논설에서 논란이 된 주제들을 통해 그 풍경을 탐색하는, 다소 우회적인 방법을 택했다. 이 책에서 재현한 사회적 풍경들을 감상하다보면, 독자들은 어느덧 그 풍경이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정치적 논란과 불황, 빈곤과 이민자들, 여성 문제에서 시험에 관한 논쟁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도 매우 낯익은 풍경으로 다가온다. 집필과정에서 오늘의 시각을 의도적으로 투영하지는 않았는데도 이 같은 인상을 주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아마도 다른 사람의 삶의 세계에서 공감 영역을 찾아내고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의 경험을 더 넓혀가고자 하는 인문학 특유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이영석 광주대 교수)   

 

교수신문(09. 10. 19) 이글턴의 무엇을 넘어서고 무엇을 답습했는가

유명숙 교수의 『역사로서의 영문학』은 출간되자마자 일간지, 인터넷에 소개되고 학계의 중요한 책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신간학술도서로서 누리는 이 예외적인 지위는 창비, 서울대 교수라는 프리미엄만은 아닐 것이다. 허나, 바짝 긴장을 하고 들여다본 이 책은 며칠간 정독을 하고 요약을 해도 난공불락이었다. 저자가 간간히 개탄하는, 1960년 대 이후 영문학에 불어닥친 ‘탈문학’이 가져다준 ‘꼼꼼한 읽기 버리기’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나는 영락없는 꼼꼼히 읽기주의자인 근대적 산물이다. 비록 나의 학문이 얕다하더라도, 그리고 서로의 전공영역이 장르나 시대에서 약간 비껴가지만, ‘글의 보편성’과 동시대 학자로서의 ‘학문적 시대감각’이라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프리미엄을 걷어내고 이 곤혹스러움의 정체를 밝히는 것도 서평의 주요한 얼개가 되리라 생각한다. 

저자는, 테리 이글턴의 ‘탈문학’을, 립 밴 윙클이 1960년대 잠이 들어 1980년대 깨어났다면 느꼈을, ‘영문학에서의 상전벽해’로 보고 있다. (영)문학과에서 탈문학이 제기되는 아이러니를, 평생 긍정적 의미로 써온 단어들인 인본주의, 보편성, 진리 객관성이 부정적 함의를 띠는 것을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글턴은 경험주의적 전통이 강하고 이론이 약한 영국에서 프랑스 이론의 주자인 알뛰쎄르나 푸꼬의 이론을 받아들여 근대에 제도화된 ‘영문학’이 正典과 비정전, 본격문학과 대중문학 등으로 나누어 서양근대담론체제를 유지해온 이데올로기로 본다.

‘탈문학’과 서양근대담론체제
필자를 포함해 영문학 연구자들의 머리와 가슴을 가마솥 뚜껑처럼 눌렀던 이글턴을 저자는 작심하고 비판한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은 저자에게 있어 성장소설이다. 성장소설이란 ‘난 그렇게 자라 이렇게 성공했다’는 이야기이다. 이글턴을 이겨내고 드디어 학자로서 자립하게 됐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자 서평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글턴의 무엇을 넘어서고 무엇을 답습했는가. 

저자가 보기에, 이글턴은 정치성을 앞세우고 역사적 읽기는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이글턴은 프랑스 혁명기 이후 탈역사적인 상상력과 상징의 자율성을 특징으로 하는 낭만주의 담론이 낭만기의 인식소(episteme)로 작동했다고 본다. 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규정한 낭만적 환멸이 낭만주의 담론의 기반을 만들어 탈정치적인 근대 영문학이라는 제도가 성립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유명숙 교수의 비판은 탁월하다. 저자는 낭만(주의)기의 시와 낭만주의 담론은 다르다고 본다. 낭만기의 시는 워즈워스나 블레이크와 같은, 19세기를 전후로 한 프랑스 혁명기인 낭만기에 활동한 시인들의 작품 중 정전으로 진입한 저작을 의미한다. 낭만주의 담론은 19세기 말 빅토리아 시대에 있었던 것으로 낭만주의 시를 국민문학 정전으로 편성하는 과정에서 그 논거가 되는 일련의 가정들로 정치와 예술의 이항대립이 핵심이며 파시즘적 요소가 농후한 담론이다.  

그래서 저자는 본격적인 근대체제로 가는 격변기로 낭만기를 다시 읽고자 한다. 유 교수의 논의의 방점은, 19세기 말의 낭만주의 담론이 거의 100년이나 앞선 과거로 돌아와서 낭만기를 심미적이고 유기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 전후의 사상사적인 쟁투가 결국 19세기 말의 낭만주의 담론을 낳게 되는 역사적 과정을 추적하는 데 있다.

낭만주의 담론의 역사적 과정 추적
거칠게 요약하자면, 저자는 프랑스 혁명은 에드먼드 버크를 두령으로 하는 자유주의와 루소적 감성주의의 쟁투이며, 루소적 체제 순응으로 타협하지 못하고 니체적 ‘비판적’ 역사관을 지닌 감성주의 좌파 자꼬뱅의 극단성이 감성주의적 양육세대인 워즈워스와 블레이크를 환멸케 한 원인이라고 본다. 낭만적 환멸이란 혁명의 실패에 대한 절망적 현실인식 속에서 ‘주어진 의미체계’를 ‘나’의 일부로 맞대면하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의 모표를 꽂고 런던 거리를 활보하곤 했던 블레이크가 현실에 등을 돌리고 개인적인 신화체계를 구축했다는 식의 반전은 낭만적 환멸의 성격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낸다. 즉, 낭만기를 지배한 것은 정치와 예술의 이항대립을 내장한 낭만주의 담론이 아니라 혁명과 반혁명의 이분법적 틀이며, 낭만기는 탈정치화가 아닌, 정치적 과잉의 시대였다고 본다. 

이러한 감성주의적 극단성은 자연 공리주의적 개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극단적 효용성을 주장하는 공리주의는 식민지 경영으로 인한 유례없는 부의 유입과 산업혁명의 가속화로 혁명과 반혁명의 대립을 진보와 비진보의 담론으로 전환시켜 자유주의의 급진파를 설득해 참정권 및 개혁에 나선다. 이런 공리주의의 폐해를 인식한 J. S. 밀이 상상력을 중요시해 물질적 진보의 대립항으로 탈정치화된 예술과 문학이 존립근거를 얻게 되고 이것이 낭만주의 담론 구성의 핵심이 된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그렇다면 유명숙 교수는 이글턴의 무엇을 답습하고 있는가. 우선 저자는 ‘문학은 이데올로기’라는 이글턴의 명제에 충실할 뿐 아니라 프랑스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도 이념적 쟁투로 보는 철저한 사회적 구성주의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이글턴의 관점 그대로 18세기를 이상화한다.  

18세기는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고자 했던 시기이며 개인에서 공동체로 가는 혁명을 낙관하던 시대다. 이 낙관의 시대를 과격 자꼬뱅이 반동을 불러옴으로써 파괴시켰기 때문에 역사의 원죄를 그들에게 돌린다. 이것은 아렌트나 헌트 같은 자유주의적 정치사상가의 저작을 인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유명숙 교수가 자본의 가장 악랄한 마지막 원시적 축적기라 할 수 있는 18세기를 이상화하는 것은 21세기에 와서도 시민적 자본주의의 진보성을 낙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기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모든 장마다 되풀이되는 똑같은 소리다. 논의와 서술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장마다 이글턴적인, 난해하나 상투적인 문장들이 비슷비슷하게 널려있다. 약간 과장하면 1장에서 7장까지 똑같은 내용의 반복이다. 다만 주인공이 탈문학, 프랑스 이론, 낭만주의 담론, 감성주의 등으로 달라지느냐, 아니면 정보가 좀 더 추가되느냐 마느냐일 뿐이다. 더구나 논의의 전개를 좀 즐길만하면 이글턴이 역사성을 지니지 못했다는 비판을 하고 논의는 중도에 짤린다. 이것은 유명숙 교수가 아직도 강박적으로 이글턴에 묶여 있다는 뜻이다. 아니면 책의 퇴고과정을 철저히 거치지 않았거나.

강박 또는 집요한 문제의식
하지만 이 책은 저자의 학문적 깊이와 집요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데서 한편의 학문적 성장소설을 넘어, 앞으로 저자가‘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뉴턴’이 될 가능성까지 포함하고 있다. 아울러, 다른 한편으로 지식인에게는, 특히 이명박 정부 이후 더욱 매혹적으로 되는 ‘낭만적 환멸’이 아니라 ‘역사로서의 영문학’이 표제가 된 것은 그만큼 영문학이라는 분과학문의 담당자로서 느끼는 고뇌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김봉률 동국대·영문학)  

09.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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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프 하임 예루살미의 <프로이트와 모세>(즐거운상상, 2009)를 구하러 교보에 들렀다가 같이 집어든 책은 김병익 선생의 비평집 <기억의 타작>(문학과지성사, 2009)이다. 출간 소식을 알고 있었기에 '김병익 읽기' 리스트라도 꼽아놓으려던 참이었는데, 책의 3부에 '도스토예프스키 읽기'와 '토마스 만' 읽기에 포함돼 있어서 주저없이 계산대로 갔다(한데 돌아오는 버스에서 읽다보니 '비평'이 아니라 '메모'였다! 사연은 책머리에서 읽을 수 있다). 이청준과 박경리 세대의 비평가로서 유명을 달리한 '도저한 작가정신'들을 추모하는 글들이 비평이라기보다는 한 시대의 비망록으로 다가온다(책의 부제가 '도저한 작가정신을 위하여'이다). 인터뷰기사가 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마지막에서 두번째의 책’이라는 기분으로 이번 평론집을 묶었다는 김병익씨. 그는 근래 수술을 받은 아내 정지영씨를 “이 글들을 쓰는 즐거움을 모아 내가 인사를 드려야 할 마지막의, 그러나 가장 앞세워야 할 사람”이라고 서문에 썼다. 

세계일보(09. 10. 24) "문학은 기억의 회로를 통해 볼 수 있는 것” 

문학평론가 김병익(71)씨가 5년 만에 새 평론집을 묶어냈다. 김씨는 4·19 이후 한글세대의 선두에 서서 김현 김치수 김주연 등과 함께 ‘문학과지성’을 창간했고, 이후 ‘문지 그룹’의 좌장으로 한국문학의 현주소를 예리하게 관찰하고 이끌어온 장본인이다. 



이번 평론집 ‘기억의 타작’(문학과지성사)은 ‘도저한 작가정신을 위하여’가 부제인데, 이는 지난해 연달아 작고한 박경리 이청준 홍성원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들의 작가정신을 기리는 의미가 크다. 이번 책에는 이들 세 작가에 대한 회고와 추도 외에도 박완서 송영 김연수 황동규의 작품 해설과 강연원고와 에세이, 도스토옙스키와 토마스만 독서일기까지 망라돼 있어 노년에도 성실한 읽기와 쓰기를 중단하지 않는 노정이 생생하다.

그는 문학과지성사 대표에서 2000년 퇴임한 뒤 인하대 국문과 초빙교수와와 문화예술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거쳐 지금은 문학과지성사 상임고문이라는 형식상의 직함만 남겨두고 모든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다. 매주 목요일마다 문지에 나와 벗들과 소일한 뒤 귀가하는 게 유일한 공식 일정이다.

―서문에 ‘마지막에서 두 번째의 책’이라고 언급했는데 무슨 의미입니까.

“건강은 괜찮습니다. 이 책을 마지막이라고 하기에는 스스로 너무 안쓰러워서, 그냥 아쉬움을 남겨 두겠다는 기분으로 그리 썼습니다.”

―책에서도 깊이 언급했지만 지난해 소중한 문인들을 연달아 떠나보내면서 상심이 컸을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 문학의 아름다운 고전적 전통의 맥이 끊기는 느낌이라고 아쉬워했는데, 한국에서 품위와 자존의 문학은 이제 보기 힘들어지는 겁니까.

“작가가 한 시대의 표징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독일의 토마스만’이 아니라 ‘토마스만의 독일’을 먼저 떠올리게 되거나 우리나라에서는 이광수나 만해, 미당이나 황순원 같은 작가들을 통해서 한 시대를 보는 듯한 작가의 아우라를 느끼곤 했었지요. 21세기로 넘어오면서는 작가로서의 후광이나 위상이 굉장히 약화된 것 같습니다. 박경리 이청준 홍성원 같은 그 시대의 표징이 될 수 있는 작가로서의 존재를 앞으로는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일본이나 프랑스 문학인들이 이런 상황을 ‘문학의 종언’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은데, 문학의 독보적인 권위와 품위는 밀려나고 작가도 창조적인 멘토로서의 존재보다는 기능적이고 재기 있는 존재로 변한 건 아닌지 아쉽습니다.”

―요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나 행태가 마뜩지 않다는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박경리 이청준 세대의 표상이나 무게, 진정성 같은 것들을 지금 젊은 작가들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지요. 그들은 존재 자체로 시대를 증거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면에서 요즘 작가들이 운이 안 좋은 편이지요.”

그는 젊은 작가, 혹은 현금의 한국문학을 그 전 세대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낮추어 보는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 ‘젊은 작가’의 작품 중 신경숙(46)의 ‘엄마를 부탁해’를 감동적으로 읽었다고 했다. 그에게 신경숙은 젊은 작가일지 모르되 일반적인 눈높이로는 그네가 결코 젊은 축은 아니다. 그렇다고 지적했더니, 그는 다시 배수아(44)의 최근작 ‘북쪽 거실’을 “요설스럽게 맘껏 떠들었는데도 힘이 있고 세계의 핵심을 찌르는 것 같다”고 상찬했다. 그는 이어 “30대 혹은 20대 후반 작가들의 작품이 싱싱하고 재미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작품의 무게랄지 전달되는 역동적인 힘이 선배들에 비해 부족하다”고 부연했다.

―문학을 ‘기억의 예술’이라고 서문에 언급했는데, 나이 드는 게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에 유리한 조건일 수 있습니까.

“문학이 기억으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기억의 회로를 통해서 문학을 볼 수는 있습니다. 상당히 큰 부분이지요. 창조나 상상력의 부분을 시간의 축적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봐왔는데, 앞을 보기보다는 뒤돌아보는 시간이 훨씬 많아지니까 시간과 함께 축적돼온 기억들이 이제 와서 소중하게 여겨지고, 역사나 고고학 심지어 개인의 일기까지 기억을 위한 인간들의 작업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모든 기억을 다 정리할 순 없겠지만, 필요한 것들만 거두어 타작(打作)질한다는 의미로 이번 평론집 제목을 정했습니다.”

긴 세월 한눈 팔지 않고 낮은 목청과 분명한 취향으로 한국문학의 파수꾼 역할을 해온 ‘한글세대’ 1세대, 이제 한국문단의 ‘원로’ 반열에 올라선 김병익씨. 그가 ‘박경리 선생을 위한 단상’을 부제로 달고 써내려간 ‘도저한 삶, 자존의 문학’의 첫 문단은 젊은 에너지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늙어갈수록 더 깊어지는 문학의 힘을 충분히 웅변하는 명문이다.

-임종의 숨을 거두신 후의 시간이 아직 여물지 않아서인지 선생의 안색은 평소와 다름없이 맑고 깨끗했다. 꼭 감은 눈가 자위의 누르스름한 잔기에는 힘든 이승의 고달픔이 흐릿한 흔적처럼 남아 있지만 복스러워 보이는 입매는 미련을 버리려는 듯 앙다물려 있고 표정은 착잡했지만 평화로웠으며 얼굴은 한창 젊은 시절의 날선 품위와 노후의 넉넉한 고매함이 한 모습으로 어울려 강인하면서도 부드럽고 한없이 넓으면서도 가운데로 정기가 맺혀져 있는 옹골찬 인상을 보이고 있었다. 저것은 아픔일까 흐뭇함일까, 슬픔일까 해한(解恨)일까, 버티기일까 받아들이기일까.(84쪽) (조용호 선임기자) 

09. 10. 23.   

P.S. 김병익 선생의 책으로 내가 제일 처음 읽은 건 비평집이 아니라 번역서로, 조지 오엘의 <1984년>(문예출판사)이었을 것이다. 전세계가 백남준의 비디오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과 함께 시작했던 그해, 1984년에 가장 먼저 읽은 책이 바로 <1984년>이었다. 그리고 대학에 와서야 <들린시대의 문학>(문학과지성사, 1985)와 <전망을 위한 성찰>(문학과지성사, 1987) 같은 비평집을 손에 들었다. 특히 <전망을 위한 성찰>은 불문학 전공의 후배 비평가 진형준 교수가 TV에 나와 추천한 기억 때문에, 문학평론가 김병익, 하면 으레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평론집이다. 그리고 접한 책은 아마도 공역으로 펴낸 E. H. 카의 <도스토예프스키>(홍성사)와 유진 런의 <마르크시즘과 모더니즘>(문학과지성사, 1988) 같은 번역서들이었겠다.     

강렬한 주장이나 현란한 문체를 뽐내지 않아서 도드라지지 않지만 '맏형'을 연상시키는 온화함과 후덕함이 내가 떠올리는 그의 이미지이고 비평이다. 굳이 비평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한국 문단사 1908-1970>(문학과지성사, 2001)은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고, 내 생각엔 저널리즘에 몸을 담기도 했던 비평가로서 그만이 쓸 수 있는 책이다. 나는 그 속편을 은근히 기다리는 독자인데, 나올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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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0-24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시대의 사람은 친지들과 삶의 연대의식속에 살아갑니다. 작가는 떠나고 비평가만 남은 노년, 성실한 읽기와 쓰기속에 마지막 한 권의 잉태를 위한 희망속에 있으시군요. 사라진 존재가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온 것은 논증적 상상이 가능한 탓일까요.

로쟈 2009-10-24 08:54   좋아요 0 | URL
정말로 한 세월이 흐른 것 같습니다...

다이조부 2009-10-24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궁금한게 있는데요.

<황홀한 글감옥> 을 읽고 있는데 118페이지에 저자가 퀴즈를 내는데 저는

전혀 감이 오지 않네요. 선생님은 아실거 같아서 여쭈어 봅니다. ^^

옛날 양반님네들이란 평소에 세금 한 푼 내지 않았고, 국난이 닥쳐도 군대에 가지 않았던 부류들입니다. 그들은 백성의 ???이요, ???였습니다.

과연 이 ? 여섯 글자는 무엇일까요?

작가는 독자를 무시하는 처사 같아서 힌트는 주지 않는다는데 흑흑흑




2009-10-24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유 2009-11-02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확한 비평 그렇게 표현하면 좀 이상하지만 제로선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던 비평가예요
이 책에도 무릎을 치게 하는 표현이 있어서 기뻤답니다

로쟈 2009-11-18 19:07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느낌쉼표 2009-11-17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위에 매버릭꾸랑 님이 질문한 것 답이 뭐지요?

저도 마침 조정래씨 책을 읽다가 궁금해 하던 차라 여쭤봅니다.

2009-11-18 1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lovic9 2009-11-23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조정래 선생님의 황홀한 글감옥에서 그들은 백성의 ???이요, ???였습니다 의 여섯 글자가 정말 궁금해요.. 찾는다고 찾아봤는데 정말 모르겠어요 ㅠㅠ

2009-11-23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DAI 2009-11-24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조정래 선생님의 황홀한 글감옥에서 그들은 백성의 ???이요, ???였습니다 의 여섯 글자가 정말 궁금해요 찾는다고 찾아봤는데 정말 모르겠어요



2009-11-30 0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30 0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30 0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30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고운해 2009-11-30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조정래 선생님의 황홀한 글감옥에 나오는 퀴즈를 보고 여기 저기 찾아 봤지만 그 해답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선생님.. 그 여섯글자가 뭔지 가르쳐 주세요

2009-11-30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30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행복한 엄마 2010-09-12 21:41   좋아요 0 | URL
118쪽과 309쪽 정답이 뭐예요
 

아감벤의 <예외상태>(새물결, 2009)가 출간되었기에, 관련기사를 찾아보다가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등에서 주최하는 금요강독 모임 안내를 읽게 됐다. 격주로 금요일 저녁 대학로 이음책방에서 열리는데, 마침 금요일 오후에 근방에서 강의가 있기에 한번쯤 들러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새물결출판사의 'What'sUp' 시리즈 저자와 번역자들이 강사로 나선다. 아래는 소개와 일정이고, 다섯 권의 책을 리스트로 만들어놓는다.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는 언론정보학회 문화정치연구회, 이음책방과 함께 인문교양 및 사회과학 강독 모임을 총 5회에 걸쳐 개최할 예정이다. 이번 문화연대의 강독 모임은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에서부터 새로 나올 아감벤의 <예외상태>까지, 새물결출판사 시리즈를 저자․번역자와 함께 읽고 토론하는 자리다.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가 기획한 금요강독 모임은 대학로에 위치한 이음책방에 열린다.

이번 금요강독 모임은 상업적 소비문화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대학로의 이음책방이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한다는 의미를 갖는다.미디어문화센터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인문교양 및 사회과학 강독 모임을 마련할 계획’이라며 ‘이번 기획은 대안적 교통공간, 소수 지역매체인 이음책방을 자본의 침탈로부터 지켜보자는 실천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소개했다. 미디어문화센터는 ‘신자유주의 시대 우리에게는 (헌)책방도 바로 중요한 소수매체, 지역매체’라며 많은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했다.(미디어스)

장소 : 혜화동 이음책방
기간 : 10월 9일 ~ 12월 3일(2개월)
시간 : 격주 금요일 저녁 7시 - 10시(3시간)


주최 :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언론정보학회 문화정치연구회, 이음책방
후원 : 새물결출판사

진행 : 전규찬(영상원 교수, 문화정치연구회장)

일정 : 첫 번째 이음: 10월 9일 김항(고려대 연구교수), 『말하는 입과 먹는 입』 
두 번째 이음: 10월 23일 한보희(연세대 박사과정),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세 번째 이음: 11월 6일 김항(고려대 연구교수), 『예외상태』
네 번째 이음: 11월 20일 정일준(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쓰레기가 되는 삶들』
다섯 번째 이음: 12월 3일 박진우(연세대 국학대학원 연구교수), 『호모사케르』


참가비: 회당 5,000원 또는 이음책방에서 직접 책을 구입 시 무료


5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말하는 입과 먹는 입- ‘종언의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사유의 모색
김항 지음 / 새물결 / 2009년 2월
19,000원 → 17,100원(10%할인) / 마일리지 950원(5% 적립)
2009년 10월 22일에 저장
품절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슬라보예 지젝 지음, 한보희 옮김 / 새물결 / 2008년 1월
19,000원 → 17,100원(10%할인) / 마일리지 950원(5% 적립)
2009년 10월 22일에 저장
품절
예외상태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항 옮김 / 새물결 / 2009년 10월
22,000원 → 19,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6월 1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9년 10월 22일에 저장

쓰레기가 되는 삶들-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새물결 / 2008년 8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6월 1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9년 10월 22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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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0-22 23:13   좋아요 0 | URL
아, 어린 제가 군것칠한 돈이 없어 어디고 들어갈 때 없었지만
막연히 들어갈 수 있었던 유일한 곳인 그 골목에 서점같군요.

로쟈 2009-10-23 23:08   좋아요 0 | URL
혜화동에 사셨던가요?..

펠릭스 2009-10-24 07:14   좋아요 0 | URL
양희은의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를 보냅니다.

델러웨이부인 2009-10-24 22:12   좋아요 0 | URL
음.. 제가 좋아하는 오진경 디자이너의 작품이네요.(요새는 표지만 보인다는 - -;;)

로쟈 2009-10-25 11:12   좋아요 0 | URL
네, 표지 디자이너들의 또다른 세계가 있더군요...
 
사랑이란 이름의 수수께끼

독일의 거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새물결, 2009)이 번역되었기에 관련기사를 검색해보다가 작년에 나온 <낭만적이고 전략적인 사랑의 코드>(푸른숲, 2008)에 뒤늦게 주목하게 됐다. 미처 몰랐는데, 저자가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에 영감을 얻어서 쓴 책이라고("비개인화된 사회에서 개인적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소통 코드로서 사랑을 규정한 니클라스 루만의 화두로부터 시작해 사랑과 결혼이라는 주제를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한다"). 이제 그 '소스'가 되는 책이 출간됐으니 나란히 읽어봄 직하다. 루만의 책에 대해서는 주말에나 리뷰기사가 올라올 듯싶고, 여기선 <낭만적이고 전략적인 사랑의 코드>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해둔다.   

한겨레(08. 05. 14) 사랑은 움직인다, 21세기 실용 전술을 짜라 

“뭐니 뭐니 해도 제일 놀라운 것은, 우리는 사랑이 탈마법화됐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사랑 그 자체는 마법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정체가 발각됨으로써 사랑의 마법은 더 강력해질 수 있다. 사랑의 본질을 좀더 상세히 파악하면 유일무이한 사랑의 모델을 끌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이를 통해 사랑이 제 기능을 발휘하는 과정에서 유일성을 체험할 수 있다.” 



<낭만적이고 전략적인 사랑의 코드>는 사랑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서다. 독일에서 문학과 사회학을 전공한 지은이의 방법론은 니클라스 루만의 책 한 권에서 비롯했는데, 그것은 <열정으로서의 사랑>이다. 루만은 1982년에 펴낸 이 책에서 “근대적 사랑의 전형인 ‘낭만적 사랑’이 퇴조하면서 이해관계의 차가운 계산에 자리를 내어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하지만 지은이는 루만과 달리, 사랑의 신화가 소멸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사랑이 인간의 가장 소중한 체험을 구성하고 있다고 본다. 비록 낭만적 사랑이 예전처럼 존속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21세기 접어들어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실용주의와 맞물려 ‘전대미문의 새로운 형식’으로 융합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어 번역판의 해설을 쓴 김홍중(대구대 사회학 전임강사)씨는 지은이의 핵심 주장이라 할 ‘사랑의 새로운 결합’이 두 가지 현상의 중첩이라 말한다. 현대사회의 복잡성이 더해갈수록 개인은 자유로운 동시에 실존적 고독을 느끼게 된다. 하루의 많은 시간을 비개인적이고 사무적인 환경 속에서 보내는 현대인은 친밀하고 열정적인, 다시 말해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 안에서만 진정한 소통을 이뤄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책의 원제가 시사하는바, 그것이 우리들 ‘심장의 코드’(Der Code des Herzens)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같은 낭만적 사랑은 ‘자아의 희생’을 담보로 요구한다는 점에서 위험할 수 있다. 현대인이 과연 그와 같은 개체의 소멸을 견뎌낼 수 있는가 지은이는 묻는다. 때문에 낭만적인 사랑을 유지하되 그것을 위험하지 않은 정도에서 현실적 사랑의 가능성으로 창출할 필요가 생긴다. 이것이 지은이가 힘주어 말하는 사랑의 유형이다. “소통의 시대가 지나자 사랑은 실용적 단계로 진입하였고, 문제 지향성은 실천 지향성에 자리를 내주었다. 사랑은 묵은 허물을 벗고 시대에 맞는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실용적 사랑이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감정과 실리, 낭만과 현실주의, 열정과 자유방임은 새로운 결합에 도달하였다.”

루만의 이론을 이정표 삼아 지은이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소통 코드’라는 결론을 향해 묵직한 성찰을 시도한다. 시대별로 사랑이 어떤 변모를 겪었는지 훑어보고,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믿는 열정을 사랑의 맹점이라고 말한다. 대중매체의 확산과 함께 사랑도 급격히 진화하면서 프로그래밍되는 현실을 분석하는가 하면 소비문화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현대인의 사랑 풍속도를 해부해 보이기도 한다. 나아가 지은이는 전통적 가족 구조가 해체되면서 벌어지는 ‘가족의 탄생’을 짚어내는데 그 대표적 예로 별거 동침과 패치워크 가정을 들었다. 별거 동침은 가까운 곳에 각자 집을 얻어 살되 필요할 때 만나는 경우이며, 패치워크 가정은 재혼한 부부가 이전 결혼생활에서 낳은 아이를 데리고 들어와 구성된 형태를 가리킨다.

사람의 삶에서 온갖 다사다난을 만들어내는 사랑. 그 간난신고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 하는 현대인들에게 건네는 지은이의 충고. “아무리 투철한 전략도 사랑을 조종하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어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사랑의 계산 불가능성을 ‘백미러’로 계속 관찰하며 대처해 나간다면 위험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란 게 언제나 진행형이며 결코 완료형일 수 없다는 전제만 받아들인다면 눈을 쉬이 뗄 수 없게 만드는 책이다.(전진식 기자)  

09.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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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슴츠레 2009-10-22 10:46   좋아요 0 | URL
권기돈 씨와 조형준 씨 외에도 먼젓번 루만의 <사회체계이론(한길사)>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던 정성훈 씨가 참여하셨더군요. 제 짧은 식견 안에서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루만 전문가'이신 것 같은데 번역이 기대됩니다.

게슴츠레 2009-10-22 10:24   좋아요 0 | URL
책을 직접 읽어봐야 알겠지만 기사에 인용된 "근대적 사랑의 전형인 ‘낭만적 사랑’이 퇴조하면서 이해관계의 차가운 계산에 자리를 내어줄 것"이라는 루만의 비관적으로 보이는 입장이나, "낭만적인 사랑을 유지하되 그것을 위험하지 않은 정도에서 현실적 사랑의 가능성"을 말하는 슐트의 입장이나 그리 썩 시원하게 느껴지지는 않는군요. 그보다 "전략적"인 사랑과 "낭만적"인 사랑은 서로를 지탱해주는 보완물의 관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케이블TV에서 나오는 소개팅 프로그램에서 외모, 직업, 종교 따질 것 다 따지면서도 '저는 운명적인 한 번의 사랑을 믿어요'라고 말하는 분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그 분이 '이 분이 운명같다'라며 택한 분은 앞서의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이었죠. 스스로의 현실주의적 기준을 낭만주의적 양념으로 아름다게 합리화시키는 구조. 그런 맥락에서 슐트의 제안은 도달해야 할 목표라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현실이고, 루만의 예상은 이런 물신적인 구조까지는 다루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시스템론을 통한 '사랑'에의 접근은 이런 논의를 시작하고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물질적인 기초를 다지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군요. 얼마되지 않는 믿을만한 루만 번역서라는 데도 큰 의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로쟈 2009-10-22 11:31   좋아요 0 | URL
네, 오래 기다린 책인데, 기대를 갖게 합니다...
 

올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헤르타 뮐러의 문학세계를 조명해주고 있는 기사를 대학신문에서 스크랩해놓는다. 필자는 서울대 독문과의 최윤영 교수이다. 올해 출간됐다는 장편소설 정도는 국내에도 바로 소개됨 직하다.   

대학신문(09. 10. 19) 헤르타 뮐러, 침묵과 말하기 사이에서  

헤르타 뮐러(사진)가 2009년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탄과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루마니아에서 온 조그마한 독일 작가는 한국의 독어독문학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독일에서도 수상을 예상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응축된 시적 언어와 뛰어난 작품성은 일찍 인정받았지만 특이한 출신배경과 반복되는 소설의 내용(루마니아 전체주의의 압제에 대한 고발), 그리고 지난 10년간 이미 2명의 독어권 작가(독일의 귄터 그라스 1999년, 오스트리아의 엘프리데 엘리넥 2004년)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상황에서 큰 기대를 모으지 못했기 때문이다. 헤르타 뮐러는 노벨문학상을 탄 12번째 여성작가이며 클라이스트상을 위시한 다수의 주요 문학상을 받은 작가다.   

올해 56세인 헤르타 뮐러는 루마니아의 바나트-슈바벤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독일어를 사용하는 소수민족에 속한다. 이러한 출신배경과 가족사는 오랫동안 뮐러 작품의 주요 내용을 특징짓는다. 할아버지는 유복한 농부이자 상인이었는데 루마니아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재산을 몰수당했다. 어머니는 열여섯 살 때 소련으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했고 아버지는 전직 나치출신으로 트럭 운전사였다.뮐러는 시골 마을에서의 행복한 유년시절이 아니라 쇠락해가는 작은 마을에서의 폐쇄적이며 억압적이고 두려움에 가득 차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뮐러는 루마니아의 한 대학에서 독문학과 루마니아문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기계공장에서 통역 일을 했다. 1979년 스파이로 일하라는 루마니아 비밀경찰의 제의를 거부하면서 뮐러의 인생은 궤도에서 벗어난 험난한 길로 바뀌었다. 비밀경찰의 잦은 소환과 가택수색, 그리고 주변세계에서 받은 기생충 같은 인간이라는 모욕 속에서 뮐러는 독일어 개인교습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당시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정권에 대한 반감을 키워가던 작가는 자기 확신을 얻기 위해 첫 작품집 『저지대(Nieder-ungen)』를 루마니아에서 출판했다. 이 작품은 작가 나름의 그때까지의 삶에 대한 정리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제까지의 나의 삶을 철두철미하게 빗어 훑어 내렸다. 작은 마을에서의 유년 시절, 아버지의 나치 경력, 독일 소수민족의 나치 범죄에의 연루, 지금 내가 겪는 독재의 전횡을 말이다.”

1987년 뮐러는 작가인 남편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이후 작가로 유럽 문단에서 주목받게 됐다. 작가에게 독일이라는 공간은 언제든지 소환돼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줬지만 한편으로는 자기가 태어난 바나트 지방의 독일어와는 완전히 다른 독일어를 사용하고 다른 세계관과 인생체험을 가지는 사람들의 땅으로 여전히 그를 이방인으로, 고향 없는 작가로 만들었다.  



작가의 경력을 볼 때 큰 전환점이 된 것은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정권 치하에서의 자전적 삶의 기록을 많이 담은 장편소설 『마음 속의 동물(Herztier)』의 출간이었다. 이 작품은 대학으로 진학한 여주인공이 일상 삶에서 겪은 정치적 탄압을 묘사했다. 같은 기숙사 방의 친구인 롤라는 자신의 운명인 시골을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여러 남자를 만나다 체육선생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자살한다. 롤라의 기록을 읽은 주인공은 뜻이 맞는 대학생 그레고르, 쿠르트, 에드가와 이 사건을 이야기하게 된다. 이들은 모여 반정부 시를 짓고 자신들이 받는 일상의 정치 억압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결국 비밀경찰에게 이 일이 알려져 거의 모두가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된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헤르타 뮐러 글의 전체적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바로 완결되지 않은 단편적 구조, 에피소드식 이야기, 그리고 많은 신조어다. 폐쇄적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겪은 정치적 탄압과 두려움, 공포 속에서도 작가는 침묵하지 않고 용기를 내 발언하고 있지만 그의 언어는 노골적인 반정치 문학이나 구호문학이 되기보다는 일상 삶 안에서 냉철하고 조용하고 뚜렷한 이미지 언어로 전달된다. 『마음 속의 동물』은 “우리가 침묵하면 속이 편치 않고 우리가 말을 하면 우리는 조롱거리가 된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작가의 위치를 잘 드러내 준다.  



올해 출간돼 많은 찬사를 받은 장편소설 『숨 그네(Atemschaukel)』는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건, 즉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바로 나치의 후예로서 소련으로 압송된, 7만5천명의 루마니아-독일인들의 운명을 다루고 있다. 독일군에게 피해를 당한 소련을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17세부터 45세까지의 루마니아 거주 독일인들이 끌려간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은 오랫동안 터부시 돼왔다. 독일인이 가해자가 아니라 소수민족으로서 희생자로 산 삶을 주인공의 내부자 시각에서 그려낸 이 장편소설은 그 치밀한 묘사와 생생한 체험, 집중적인 시적 이미지, 그리고 거리를 두는 문체가 두드러지는데 작가로 하여금 노벨상을 받게 한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작가의 어머니가 실제로 겪은 사건이며 동시에 일찍 사망한 동료 시인 파스티오르의 고통스러운 회상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소련으로 압송된 수용소에서 사람들은 처음에는 개개인의 인생사를 가지고 있지만 수용소를 지배하는 극심한 굶주림과 억압 하에서 힘에 겨운 강제노역을 하면서 한명 한명 동물이 돼간다. 개인들의 회상 속에서 역사를 녹여내는 뮐러의 작품들은 종종 유사한 경험을 담아낸 솔제니친, 임레 케르테스, 프리모 레비와 비교되기도 한다

작가는 유럽, 독일, 그리고 현대 물질세계의 안락함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리가 잊고 있는, 같은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기억을 초지일관 기술한다. 거추장스러운 수사 없이, 강한 시적 이미지를 전달하는 산문 언어로 쓰인 그의 작품은 몰락해간 동유럽 소수민족의 역사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너무 늦은 과거”와 “너무 이른 미래”에 사는, 아직도 다수로 존재하는 ‘벌거벗은’ 사람들의 삶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최윤영_독어독문학과) 

09.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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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0-22 14:32   좋아요 0 | URL
문학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군요.

로쟈 2009-10-22 22:09   좋아요 0 | URL
네, 소설들이 있어서 다행이예요. 아무래도 시보다는 이해하기가 용이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