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 있는 사회와 모욕사회

내일자 '책읽는 경향'은 아비샤이 마갈릿의 <품위 있는 사회>(동녘, 2008)를 다루고 있다. 저자의 이름은 이 책을 여러 번 언급한 지금도 입에 익지 않지만, 저자의 문제의식은 우리 사회에서도 요효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선정자도 같은 생각이었을 텐데, 필자가 조국 서울대 교수로 돼 있다. 그러고 보니 '품위 있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보노보 찬가'와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을 듯싶다(<보노보 찬가>의 부제가 '정글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인간으로 살아남기'이다).  

경향신문(09. 10. 13) [책읽는 경향] 품위 있는 사회  

이명박 대통령은 ‘국격’을 높이자고 강조하며 그 방안으로 법질서 준수를 들고 있다. 대통령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법을 잘 지켰는지는 별도의 문제로 놓더라도, 품격있는 국가와 사회의 요체가 무엇인지 되돌아볼 필요를 느낀다. 



예루살렘 히브리대 교수인 아비샤이 마갈릿은 <품위 있는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을 물리적으로 학대하지는 않지만 제도적으로 모욕하는 ‘규제하는 사회’,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품위 있는 사회’를 구분한다. 그는 ‘품위 있는 사회’를 “구성원들이 자기가 모욕당했다고 간주할 만한 근거가 있는 조건에 맞서 싸우는 사회”라고 규정한다.

생존권을 외면하는 재개발을 추진하고, 이에 반대하는 철거민들을 ‘도시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강경진압하는 현 정부의 행태를 정당한 법치라고 볼 수 있을까. ‘공무집행’의 외관을 띤 정부의 행위야말로 ‘제도적 모욕’의 예이다. 그리고 장례도 미루고 7개월 이상 이러한 모욕에 맞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품위 있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품위 있는 사회’를 재화와 가치의 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지는 ‘정의로운 사회’와도 구별한다. 즉 ‘품위 있는 사회’는 정의로운 분배만이 아니라 그 분배의 절차와 방식이 모욕적이지 않기를 요구한다. 사회적 약자를 ‘동정’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받을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며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최근 ‘친서민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 정책이 기존의 부자 감세와 대기업 규제 완화 등 편향적 재화·가치 분배정책과 조화될 수 있을지, 이 정책이 ‘품위’를 실현하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갈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회의가 든다.(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09.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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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학회 발표회가 있었고, 오늘은 가족 모임이 있었다. 주말과 휴일에 이런 '행사'가 끼면 시간은 그냥 절로 간다. 책상머리에 앉으니 밀린 일들이 다시금 어깨를 짓누른다. 하지만 이왕 가는 시간이면 그렇게 3년 정도는 후딱 지나가면 좋겠다. 현 정권의 꼴 사나운 추태를 매일같이 접하는 것도 답답하고 역겹다. 지난주 터진 청와대 행정관의 한국디지털산업협회 기부금 출연 요구 건도 대표적인 권력남용 사례다. 필히 잊어먹지 말아야 하겠기에 관련기사와 칼럼을 스크랩놓는다.    



한겨레(09. 10. 08) “코디마, 직접 요구하다 안되니 청와대를 등에 업은 것 같다” 

청와대가 한국디지털미디어협회(코디마)에 거액의 출연금을 내도록 민간사업자인 통신 3사에 압력성 주문을 넣은 것은 내용적으로나 절차적으로나 모두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많다. 무엇보다 코디마는 업체 자율기구다. 지난해 10월 아이피티브이(IPTV) 사업에 참여한 통신 3사 등을 주축으로 구성된 사단법인이다. 따라서 정부 부처나 청와대가 나설 명분이 없다. 통신업계의 한 관계자는 “어떤 민간협회도 정부를 통해서 회비나 기금을 내도록 종용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요구한 출연금에 대한 근거도 분명치 않다. 박노익 청와대 행정관은 3사에 모두 250억원을 낼 것을 주문했다. 협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직접 나서 민간협회의 기금을 조성하는 이번과 같은 사례는 매우 이례적이다. 코디마와 유사한 성격인 케이블티브이방송협회가 340억원의 기금을 운영하고 있으나 이곳은 기금을 조성한 출범 당시에는 법적 근거가 있어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법정기구였다.

그런데도 청와대까지 나서 민간업체들한테 출연금을 요구한 것은 코디마 회장을 맡고 있는 김인규씨의 위세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다. 김씨는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의 방송담당 언론특보를 맡는 등 이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불린다. 지난해 한국방송 사장으로 유력했으나 언론특보라는 이유로 탈락한 뒤, 그해 10월 코디마를 만들어 회장으로 취임했다. 케이블티브이 업체의 한 간부는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이 대통령이 ‘김인규 나 좀 보자’ 할 정도로 측근 중의 측근”이라고 전했다.

코디마는 설립 당시 아이피티브이 3사로부터 20억원을 협회 운영비 명목으로 받았고, 이어 올해 하반기에 기금 조성을 한다며 거액의 출연금을 다시 요구했다. 통신업계의 한 임원은 “애초 코디마는 방통위에 기금을 조성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한 것으로 안다”며 “그 뒤 업체에 직접 요구를 하다 안 되니까 청와대를 등에 업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인규 회장은 이에 대해 “코디마를 설립할 때 통신사들이 기금을 만들어주기로 했었다”며 기금 조성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박노익 청와대 행정관도 “협회가 운영을 하려면 안정적인 재원 확보가 필요해 방통위에 근무할 때부터 계속 논의를 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피티브이 업체들은 코디마의 운영상 문제점 등을 들어 협회의 요구가 지나치다는 태도다. 2009년도 코디마 예산안을 보면 30억원의 예산 가운데 인건비와 일반관리비가 각각 13억원씩으로 돼 있고, 사업비는 2억원에 불과하다. 임직원이 19명인 점을 고려하면 1인당 평균 연간 급여가 7000만원에 이르는 셈이다.

한 아이피티브이 관계자는 “정권 실세가 달라고 하니까 안 주고 버티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또다른 아이피티브이 관계자도 “청와대와 방통위가 역점사업으로 아이피티브이를 추진하고 있고 그걸 지원하기 위해 정부 주요 직책에 하마평이 돌았던 사람이 협회장을 맡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곤혹스러운 처지를 내비쳤다.(박창섭 이문영 기자) 



한겨레(09. 10. 12) 권력남용보다 더 답답한 것은 

청와대 행정관이 기업들에 아이피티브이(IPTV) 사업 활성화를 명분으로 설립한 한국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코디마)에 100억 또는 50억씩의 거액의 기부금을 출연할 것을 독려했다 해서 말썽을 빚고 있다. 이들 기업은 아직 이익을 발생시키지 못한 것은 물론 사업 전망 자체도 불투명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사업이 지지부진한데도 내부적으로 납부를 결정한 상태라 하니 말이 독려지 기업들은 압력이라 느꼈음이 분명하다. 해당 행정관은 관련 업무를 챙기는 일환이었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행정관의 단순한 과욕이 아니라 권력 남용 사건이다.  

우선 청와대 행정관은 직급으로 그 영향력을 따질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대통령 중심제에서 청와대는 권력의 핵심이고, 그 속에서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관의 기금 출연 요청을 기업들이 행정관 개인 의견으로 간주하고 쉽게 무시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더군다나 해당 행정관은 아이피티브이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방송통신위원회 출신으로 위원회 시절부터 관련 업무를 취급해왔다. 청와대와 방통위 모두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백번 양보해서 개인의 판단이었다 할지라도 방통위 출신 행정관이 정관사항이라며 민간단체인 협회의 재원과 그 운영까지 걱정해주는 오지랖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협회장의 존재를 배제하고는 이해할 수 없다. 김인규 코디마 회장은 대선 시절부터 현 정부의 방송 관련 실세로서 <한국방송> 사장 후보로 꾸준히 하마평에 오르내리고, 차기 방통위원장감이라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 회장이 김인규씨가 아니더라도 코디마의 기금 모금에 행정관이 직접 움직였을 리는 없다고 본다. 권력 외부의 실세를 위해 권력이 움직인 것이다.

그런데 더욱 문제인 것은 이에 대해서도 각자의 이야기가 다르다는 점이다. 김 회장의 부인과 달리 청와대는 협회의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기금을 요청한 바가 없다는 김 회장의 말과 배치된다. 청와대의 말대로라면 협회 직원은 기업에 기금을 요청한 전후 회장에게 보고한 바가 없다는 것이니 김 회장은 허수아비 회장인가? 김 회장의 말대로라면 신규 진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들이 협회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거액을 출연할 수 있다고 믿는 천진난만한 회장님이라는 소리인데 이런 분이 협회를 이끌어 갈 능력이 있다고 봐야 할까?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 수많은 사건들에서, 대표적으로는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저지른 잘못보다는 잘못을 은폐하려 한 거짓말이 더 큰 화를 자초했음을 알고 있다. 이번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측면이다.

이번 사건을 접하면서 더 답답한 것은 권력 남용 사건 그 자체보다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잘못이라 인정하지 않는, 아니 아예 그렇게 느끼지도 못하는 것 같아 보이는 권력의 자세이다. 행정관 개인이 한 일이며 기금 규모를 얘기하지도 않았고 독려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청와대의 반응이다. 현재 밝혀진 결과만으로도 권력 남용임이 분명하고 관련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다른데, 적극적인 조사를 통해 진실이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4대강 사업을 가장한 대운하 강행, 용산참사에 대한 무대응, 미디어악법 관철 등 이 정부가 보이고 있는 일관된 ‘비판 무시 전략 자세’를 다시 확인하는 것 같아 씁쓸할 따름이다. 권력 남용, 거짓말, 그리고 무대응. 그래서 이런 것까지도 기사화하지 않는 우호적 언론들로 언론 구조를 개편하려 그리 애쓰는 모양이다.(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09.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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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0-12 08:52   좋아요 0 | URL
'코디마'의 회원업체는 40개이상이던데요. 민간협회지만 미디어시장의 통합된 경쟁력을 발휘하기 위해는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협회형식을 갖춘 민간 출현금에 힘입어 강력한 정치력을 갖춘 인물이 꼭지를 쥐고 있어 협회의 세계적인 경쟁력도 키우며 준기관화하겠다는 생각도 개입된듯 합니다.

geistes 2009-10-12 12:20   좋아요 0 | URL
필살의 독해력이거나 범접치못할 판단력이시네요.
농담이시죠?
'이씨 한국'이 말하는 (시장자율의)'세계적인 경쟁력'과 '준기관화' 사이의 넘사벽의 모순을 내면화하시고 계시는군요.

2009-10-12 14: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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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도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전3권, 갈무리, 2009)을 비롯하여 탐나는 책들은 여러 권 되지만, 역시나 당장 구입하거나 읽을 수 있는 책은 제한돼 있다. 프란츠 부케티츠의 <왜 우리는 악에 끌리는가>(21세기북스, 2009)만 일단 구해놓은 정도. <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열음사, 2009)가 나왔을 때 검색을 해보고 기다렸던 책인데,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 그리고 눈길이 가는 건 벤저민 와이커의 <세상을 망친 10권의 책>(눈과마음, 2009). 보수적인 신학자인 듯한 저자나 이 책 자체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가 꼽은 리스트에는 거꾸로 관심을 갖게 된다. 불온도서 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읽어볼 만한 책'들이 아닐까 싶어서다. 찾아보니 저자는 4권의 '예비 쓰레기'(Preliminary Screw-Ups)와 '10권의 진짜 쓰레기'(Big Screw-Ups), 그리고 1권의 '수치스러운 책'(dishonourable mention) 등 총 15권을 꼽아놓았다. 아직 국역본의 책소개가 올라와 있지 않지만(그래서 분류는 내 식대로 했다), 원저를 참고하여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마거릿 생어의 <문명의 중추>와 알프레드 킨제이의 책 <남성의 성적 행위>는 출간되지 않았기에 실제론 13권의 리스트이다(두 권도 마저 출간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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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1 0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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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1 01: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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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1 21: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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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1 22: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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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2 0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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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2 14: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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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2 15: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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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자 한겨레에서 박혜영 교수의 '시대를 읽는 문학' 꼭지를 스크랩해놓는다. 톨스토이 단편집에 실린 민담 <악마와 빵 한 조각>을 칼럼의 실마리로 삼고 있다. 안 그래도 국민소득 4만불 얘기가 다시 튀어나와 네티즌들을 불편하게 했는데, 러시아 민담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악마의 지혜'로 보인다.    

한겨레(09. 10. 10) '물질적 풍요’ 앞에 늑대가 된 인간 

옛날 러시아에 한 가난한 농부가 살았다. 이른 새벽에 밭일을 나간 농부는 아침식사로 빵 한 조각을 가져가 나무 밑에 놓아두었다. 어느덧 쟁기질이 끝나고 시장기가 돌자 농부는 나무 밑으로 다가가 빵을 찾았지만 이상하게도 빵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자 마음 착한 농부는 이렇게 말하며 맹물로 허기를 달랬다. “할 수 없구나, 어쨌든 한 끼 굶는다고 죽진 않을 테니까. 누구든 그 빵이 필요했으니 가져갔겠지. 그 사람이라도 잘 먹으면 좋겠군.”

그런데 가난한 농부의 아침을 훔친 자는 바로 악마였다. 악마는 농부가 죄를 짓게 만들려고 빵을 훔쳤는데 가난한 농부는 빵도둑에게 욕을 퍼붓기는커녕 오히려 축복을 내리며 자신의 허기를 달랠 뿐이었다. 당황한 악마는 이 일로 대악마에게 야단을 맞게 되었다.

악마다운 지혜가 부족했다는 대악마의 꾸지람에 이번에는 다른 술책을 간구하였다. 악마는 농부의 빵을 훔치는 대신 농부의 빵을 늘려주기로 했다. 농부의 부지런한 하인으로 숨어들어간 악마는 홍수가 들 것 같은 해에는 고지대에 씨를 뿌리라고 가르쳐 주고, 가뭄이 들 것 같은 해에는 습지에 씨를 뿌리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해서 농부는 해마다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곡식을 수확하게 되었다.

풍요로운 수확으로 곡식이 남아돌자 악마는 이것으로 술을 만드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허기를 달래주던 일용의 양식이 쾌락을 위한 도구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술이 생기자 농부는 친구들을 불러들여 먹고 마시며 놀았다. 이 술친구들은 처음엔 여우처럼 서로들 좋아하며 알랑거렸지만 곧 늑대처럼 변해 서로에게 사납고 거칠게 대하였다. 마침내 술자리가 끝날 즈음엔 인간의 모습은 사라지고 다들 돼지로 변해 모두 여기저기 흘리고, 소리치는 지저분한 짐승이 되어 있었다. 이 모양을 본 대악마는 몹시 흡족해하며 도대체 술에 어떤 악마의 묘약을 넣었기에 그토록 착하던 농부가 저처럼 짐승이 되었느냐고 물었다. 악마의 대답은 이랬다.   



“제가 한 일이라곤 농부에게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수확을 준 것밖엔 없습니다. 짐승의 피는 인간의 마음속에 항상 있으니까요. 인간에게 꼭 필요한 양밖에 없을 때까진 그 짐승은 잘 묶여 있지요. 한때 저 농부가 마지막 빵을 잃어버리고도 빵도둑에게 축복을 내렸던 것처럼요. 하지만 필요를 넘어 남아돌기 시작하면 인간은 거기서 쾌락을 찾아낼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제가 ‘술’이라는 쾌락을 알려주었죠. 신이 주신 선한 선물을 자신의 쾌락을 위해 쓰기 시작하자마자 그동안 묶여 있던 여우와, 늑대와, 돼지의 피가 다 뛰쳐나온 거지요.”  

러시아 농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이 민담은 <악마와 빵 한 조각>이라는 제목으로 톨스토이의 단편집에 실려 있다. 이 이야기에는 ‘잉여’를 바라보는 민중의 오래된 지혜가 잘 담겨 있다. 인간을 타락시키려는 목적으로 악마는 두 가지 수단을 동원하는데 처음엔 결핍이, 다음엔 잉여가 그것이다. 하지만 악마의 예상과 달리 결핍은 농부의 소박하고 검소한 삶의 태도를 더욱 북돋울 뿐이었다. 가난한 시절의 농부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이 부족할 때조차도 스스로의 욕망을 절제하고 달랠 줄 알았다. 오히려 농부가 타락하게 된 것은 너무 많이 생산하여 모든 것이 남아돌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과잉 생산에 취하기 시작하자 농부는 여우처럼 남에게 아첨을 하고, 늑대처럼 다른 사람을 난폭하게 대하고, 돼지처럼 혼자 독차지할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농부의 타락이 바로 결핍이 아닌 잉여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 다시 말하자면 필요를 넘어선 물질적 풍요는 신의 선물이 아니라 오히려 악마의 선물이라는 옛사람들의 믿음은 생산과 잉여를 바라보는 토착적 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아시아경제 김성곤 기자]이명박 대통령은 7일 "경제소득(1인당 국민소득)만 2만 불이 넘었고 곧 3만 불이 된다"면서 "아마 머지않아 3만불이 되고 더 빠른 시간 내에 4만 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반대로 대다수 지배엘리트들은 생산과 잉여야말로 낙원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한다. 가난을 치유하기 위해선 더 많은 물질적 풍요가 필요하다고 설득한다. 저개발이나 미개발은 야만이며, 더 많은 식량·석유·자동차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 문명이자 진보라고 계몽한다. 아마도 검소한 삶의 방식이 우리 시대만큼 비웃음의 대상이 된 적도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 시대만큼 필요와 잉여의 기준이 사라지고, 소비와 낭비의 경계가 흐려진 적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지배엘리트들의 주장과 달리 마침내 풍요와 잉여의 시대가 도래하자 오히려 영혼은 타락하고, 사회는 사막처럼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얼마 전 <한겨레> ‘왜냐면’에 저소득층에 대한 학교급식비 지원이 너무 야박하다는 김호정 교사의 글이 실린 적이 있었다. 가난한 집 아이들 가운데 누구에게 급식비 지원을 해줄 것인지를 오직 몇 가지 규정에만 맞추라는 것도 야만적이지만, 더 나아가 무료급식 대상 인원을 미리 제한하여 그 가운데 누구누구를 골라내라는 식의 정부 방침은 그야말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짐승 같은 짓이었다.  

물론 예산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현재 학교마다 ‘학력향상 중점학교’니, ‘방과후 시범학교’니 해서 많은 지원금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일선교사들이 정부가 정한 인원보다 추가로 올린 서울시내 300여명의 학생들에게 돌아갈 급식비는 없었다. ‘저소득층’이니, ‘무료급식 대상자’니 하는 말도 어린 학생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난폭한 용어지만 그 대상에서마저 일부를 솎아내는 게 정부 방침이라는 기사를 접하고 보니 지금 소위 개발주의자들이 제시하는 풍요사회란 결국은 우리 사회를 지옥으로 이끌 악마의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염치도 없는 그런 풍요사회 말이다.(박혜영/인하대 교수·영문학)  

09. 1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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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0 10: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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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0 1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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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0-10 19:18   좋아요 0 | URL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읽고 "Don't worry, be happy" 말의 의미를 느낀적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탁석산/창비)'와 비슷하네요. 교육행정관료의 소신있는 업무수행이 필요하겠는데요.

로쟈 2009-10-10 23:14   좋아요 0 | URL
한국인의 현실주의를 지적했는데, 때론 천박함과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관심을 모았던 올해 노벨문학상은 루마니아 출신의 독일 시인 헤르타 뮐러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올해는 물망에 오르지 않았던 의외의 인물에게 상을 주기로 한 모양이다. 한국 작가들에게도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 물론 앉아서만 기다릴 순 없는 일이기도 하다. 40년 간의 겸재 정선 연구를 갈무리하여 펴낸 최완수 선생을 봐도 그렇다. 20대에 시작한 연구를 매듭 짓기 위해 평생 빈둥거릴 새가 없었다는 이 미술사학자의 고백을 그의 자부심과 함께 스크랩해놓는다. 이번에 나온 <겸재 정선>(현암사, 2009)은 고가본이어서 내겐 말 그대로 '그림의 책'이지만 형편이 좀 피면 소장해놓고 싶다. 

 

한겨레(09.10. 08) "영광스런 겸재 연구…빈둥거릴 수 없었죠” 

“내가 평생을 걸고 겸재의 삶을 밝히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의 화풍은) 이렇게 밝혀지지도 않았을거야….”  

쪽빛 두루마기 입은 노학자는 환한 웃음을 띄우며 거침 없는 자신감을 내뱉었다. 금강산을 비롯한 이땅 강산의 아름다운 진경을 처음 붓질로 펼쳐 보여준 18세기 대화가 겸재 정선(1676~1759), 이 거장의 200여년전 인생길을 자기 인생에 포개며 평생을 연구한 미술사학자 최완수(67·간송미술관 연구실장)씨의 풍모는 당당하고도 단단했다.  



겸재가 세상을 뜬 지 250주년인 올해를 맞아 그는 약 40년간의 겸재 연구를 집대성한 대작 <겸재 정선>(전 3권, 현암사, 32만원)을 최근 펴내며 마음에 아로새겼던 필생의 숙원을 풀었다. 지난 6일 마련한 기자 간담회에서 그는 “이 책 속에 겸재 그림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자부했다.

<겸재 정선>은 1971년 간송미술관 첫 기획전으로 ‘겸재전’을 시작한 이래 이 미술관에서 8차례나 펼친 겸재 기획전과 그가 펴낸 관련 저술·논고, 다른 학자들의 연구 성과까지 총망라한 역저다. 1676년 서울 백악산 아래(현 청와대 근처)에서 태어난 겸재가 1759년 인곡정사에서 84살로 타계할 때까지 거장의 일대기를 고증해 되살리면서 <청풍계><해악전신첩>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등의 걸출한 산수, 풍속화 등의 명작들과 더불어 화풍의 변천, 관직 생활 등을 낱낱이 담아냈다. 2년 넘게 집필한 본문만 200자 원고자 3673장에 달하며, 원화처럼 재현한 도판 206장, 참고그림(삽도) 147장이 들어갔다. 저자가 직접 18차례나 교정을 거듭했을 정도로 지극정성을 기울였다고 했다. 겸재의 가계도와 가정 형편, 교우 관계, 학맥 등과 당대 정치·사회 정세까지 철저한 문헌 고증으로 세밀하게 담아내 겸재의 시대를 재구성한 것이다.

“저나 간송이나 겸재와의 만남은 숙명이었어요. 간송미술관을 세운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이 일찍부터 겸재 그림의 가치를 알아보고 일제 강점기 명작들을 집중 수집했고, 1966년 간송미술관에 들어온 저는 그린 연대가 확실한 간송의 수집 기준작들을 보면서 연구를 거듭했으니 말이죠. 생전 겸재의 문집이 수십권이나 있었다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져버린 현실적 제약이 내게 그의 일대기를 복원하도록 만든 셈이지요. 글쎄, 약 40년간 겸재 연구는 한마디로 영광스러웠다고나 할까요. 그건 곧 조선의 문화가 영광스러웠다는 것이겠지….” 

숱한 겸재 기획전과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등의 기념비적 저술로 다진 연구 성과들을 갈무리 하기 위해 최씨는 “알려진 겸재 관련 문집은 거의 독파했다”고 한다. 특히 권섭, 이천보, 이하곤 등 1700년대 초반 태어나 이율곡의 조선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삼으며 성장한 18세기 선비 세대들이 겸재를 진경산수의 거장으로 등극시킨 핵심 지지세력이었음을 치밀하게 고증한 것도 이 저술의 성과라고 강조했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전시 준비 과정에서 새롭게 발굴해 큰 화제를 모았던 겸재의 풍속 기록화 <북원기로회도첩>에 대한 상세한 분석글도 실려 눈길을 끈다.

“보탤 내용은 여전히 많지만, 올해가 겸재 서거 250주년이라 작심하고 일단 마무리지은 겁니다. 이전에 내가 냈던 겸재 관련 저술들이 그림 성격 등에 따라 작품들이 흩어져 있었다면, 이번에 나온 책은 시기의 흐름에 따라 총체적으로 서술하는 편년체 형식으로 작품들을 배치해 일목요연하게 그림들을 볼 수 있어요. 그림에 한문으로 적은 제시, 제발 등도 빠짐없이 번역했으니 앞으로 겸재 연구자들이 많이 나올 겁니다.”

잘 알려진대로 최씨는 1970년대 이래 간송미술관을 중심으로 조선 왕조 시대의 사상, 문화적 역량을 재조명해온 ‘간송학파’ 학자들의 수장이다. 조선의 문화 르네상스기로 불리는 18세기 문예활동에 대한 집요한 연구의 결실로 ‘진경산수’, ‘진경문화’ 등의 용어를 유행시킨 주역 또한 그다. 특히 70년대초만 해도 ‘서민예술’‘실학의 산물’ 등으로 인식됐던 겸재 진경 그림의 성격과 위상을 재정립한 것은 오롯한 그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문화 중흥기 그 정점에서 진경산수화를 꽃피운 겸재의 인생 전모를 복원한 이번 저술 또한 그런 연구 작업의 한 획을 긋는 열매다.  

서울대 사학과를 나와 국립박물관에서 일했던 그는 자신의 은사였던 미술사학자 고 최순우(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소개로 스물다섯 나이에 간송미술관에서 일하게되면서 겸재 컬렉션과 인연을 맺었다. “일제 근대사학의 영향으로 조선 왕조의 문화가 정체됐다는 당시 선입관에 맞서려면 조선왕조 500년 문화사의 절정인 18세기 ‘진경시대’를 조명해야한다고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그 시각적 실체인 겸재의 그림을 연구하게 됐다”는 회고다. 평생 빈둥거릴 새가 없었다는 최씨는 “후학들이 진경 문화가 나온 시대상의 전모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당부도 했다.  

“1970년대 처음 국역 <추사집>을 냈던 추사 김정희의 작품들과 진경 시대 문화의 또다른 산물인 조선왕릉 석물에 대한 연구 성과도 정리하려고 해요. 나이들어 체력이 다하면 제자들이 뒷받침해주겠지요.”(노형석 기자) 

09. 10. 08. 

 

P.S. 형편상 <겸재 정선>을 소장하긴 어려워도 최완수 선생의 <우리문화의 홤금기 진경시대 1,2>(돌베개, 1998) 정도는 이 참에 가까이 두어도 좋겠다.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대원사, 1999)을 따라가봐도 좋겠고. 절판된 <진경산수화>(범우사, 1993)는 도서관에서 한번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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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9-10-08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틀즈 앨범도 그렇고 뿌리깊은 나무의 판소리 전집도 그렇고 DG 기념반들도 그렇고 이젠 <겸재 정선>까지..소장가치도 가치려니와 정말 듣고 싶은 노래들이고 그림인데..제게도 그것들을 다 갖기엔 벅차요...한꺼번에 이렇게 쏟아지니.

로쟈 2009-10-08 22:22   좋아요 0 | URL
소장용이니 그렇다고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도 없고요.^^;

2009-10-08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8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10-08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송학파가 노론 계승의 성격이 강하지요.그 반대파는 정조-남인을 추앙하구요.교과서에 진경산수화라는 용어를 쓰게 한 이가 바로 최완수.이 책 출간은 오늘 거의 모든 일간지들이 다뤘더군요.아마 반대진영 학자들의 반응이 나올 겁니다.흥미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로쟈 2009-10-08 23:13   좋아요 0 | URL
겸재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주장이 있는 건가요? 이 분이 거의 독보적인 업적을 쌓은 듯한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10-08 23:33   좋아요 0 | URL
예...반대파들은 최완수 씨가 진경산수화라는 용어로 당시 화풍을 규정한 데 대해서 반대하는 것입니다.게다가 간송학파는 이이-송시열-등 노론 정통을 주장하기 때문에 거기에 반대하는 학자들이 겸재(물론 겸재나 추사가 노론계열인 건 사실이지요)가 노론인 것을 너무 강조하는 거 아니냐고 지적하지요.원래 영정조 시대가 논쟁거리가 많아요.아마 정조독살설 빼고는 진경산수화를 둘러싼 논쟁이 가장 치열할 겁니다.

네모선장 2009-10-09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고등학교 교사로 있습니다만 이럴땐 제가 있는 곳(학교^^)이 좋아요.
학교 도서관에 교사용 도서로 신청해버리면 되거든요~^^
연 예산이 천만원 가까이 되니까요. 어디에 쓸 줄 몰라 쩔쩔매시거든요. 담당선생님이...
^^; 제가 보기엔 사야할 책들이 너무나 많은데....

로쟈 2009-10-09 10:10   좋아요 0 | URL
네, 고등학교 도서관이 대학도서관보다는 아늑할 거 같습니다. '소장'의 의미도 더 날 거 같고.^^

2009-10-09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9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09-10-10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라는 말속에는 문화재도 포함되었습니다. 문화재가 잘 보존되었으면 합니다. 첫째는 후대인들의 관심의 정도 같습니다. 최근에 10일간 전시된 '몽유도원도/안견'도 어떻게 일본으로 유출되었는지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내것이 벌건 대낮인데도 옆집에 버젖이 자랑스럽게 걸여 있다니,, 문화제가 사설로 유출되어 공공장소에서 빛을 못보고 있는 경우인데, 다른 나라의 박물관에라도 있으면 간접 홍보 효과도 있을텐데요.지성적인 재력가들이 사회환원차원에서 밖의 우리 문화재 수집에 대한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겠는데요. 비싼 그림 놀이공원 창고에 두신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