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한겨레에서 박혜영 교수의 '시대를 읽는 문학' 꼭지를 스크랩해놓는다. 톨스토이 단편집에 실린 민담 <악마와 빵 한 조각>을 칼럼의 실마리로 삼고 있다. 안 그래도 국민소득 4만불 얘기가 다시 튀어나와 네티즌들을 불편하게 했는데, 러시아 민담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악마의 지혜'로 보인다.    

한겨레(09. 10. 10) '물질적 풍요’ 앞에 늑대가 된 인간 

옛날 러시아에 한 가난한 농부가 살았다. 이른 새벽에 밭일을 나간 농부는 아침식사로 빵 한 조각을 가져가 나무 밑에 놓아두었다. 어느덧 쟁기질이 끝나고 시장기가 돌자 농부는 나무 밑으로 다가가 빵을 찾았지만 이상하게도 빵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자 마음 착한 농부는 이렇게 말하며 맹물로 허기를 달랬다. “할 수 없구나, 어쨌든 한 끼 굶는다고 죽진 않을 테니까. 누구든 그 빵이 필요했으니 가져갔겠지. 그 사람이라도 잘 먹으면 좋겠군.”

그런데 가난한 농부의 아침을 훔친 자는 바로 악마였다. 악마는 농부가 죄를 짓게 만들려고 빵을 훔쳤는데 가난한 농부는 빵도둑에게 욕을 퍼붓기는커녕 오히려 축복을 내리며 자신의 허기를 달랠 뿐이었다. 당황한 악마는 이 일로 대악마에게 야단을 맞게 되었다.

악마다운 지혜가 부족했다는 대악마의 꾸지람에 이번에는 다른 술책을 간구하였다. 악마는 농부의 빵을 훔치는 대신 농부의 빵을 늘려주기로 했다. 농부의 부지런한 하인으로 숨어들어간 악마는 홍수가 들 것 같은 해에는 고지대에 씨를 뿌리라고 가르쳐 주고, 가뭄이 들 것 같은 해에는 습지에 씨를 뿌리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해서 농부는 해마다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곡식을 수확하게 되었다.

풍요로운 수확으로 곡식이 남아돌자 악마는 이것으로 술을 만드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허기를 달래주던 일용의 양식이 쾌락을 위한 도구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술이 생기자 농부는 친구들을 불러들여 먹고 마시며 놀았다. 이 술친구들은 처음엔 여우처럼 서로들 좋아하며 알랑거렸지만 곧 늑대처럼 변해 서로에게 사납고 거칠게 대하였다. 마침내 술자리가 끝날 즈음엔 인간의 모습은 사라지고 다들 돼지로 변해 모두 여기저기 흘리고, 소리치는 지저분한 짐승이 되어 있었다. 이 모양을 본 대악마는 몹시 흡족해하며 도대체 술에 어떤 악마의 묘약을 넣었기에 그토록 착하던 농부가 저처럼 짐승이 되었느냐고 물었다. 악마의 대답은 이랬다.   



“제가 한 일이라곤 농부에게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수확을 준 것밖엔 없습니다. 짐승의 피는 인간의 마음속에 항상 있으니까요. 인간에게 꼭 필요한 양밖에 없을 때까진 그 짐승은 잘 묶여 있지요. 한때 저 농부가 마지막 빵을 잃어버리고도 빵도둑에게 축복을 내렸던 것처럼요. 하지만 필요를 넘어 남아돌기 시작하면 인간은 거기서 쾌락을 찾아낼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제가 ‘술’이라는 쾌락을 알려주었죠. 신이 주신 선한 선물을 자신의 쾌락을 위해 쓰기 시작하자마자 그동안 묶여 있던 여우와, 늑대와, 돼지의 피가 다 뛰쳐나온 거지요.”  

러시아 농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이 민담은 <악마와 빵 한 조각>이라는 제목으로 톨스토이의 단편집에 실려 있다. 이 이야기에는 ‘잉여’를 바라보는 민중의 오래된 지혜가 잘 담겨 있다. 인간을 타락시키려는 목적으로 악마는 두 가지 수단을 동원하는데 처음엔 결핍이, 다음엔 잉여가 그것이다. 하지만 악마의 예상과 달리 결핍은 농부의 소박하고 검소한 삶의 태도를 더욱 북돋울 뿐이었다. 가난한 시절의 농부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이 부족할 때조차도 스스로의 욕망을 절제하고 달랠 줄 알았다. 오히려 농부가 타락하게 된 것은 너무 많이 생산하여 모든 것이 남아돌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과잉 생산에 취하기 시작하자 농부는 여우처럼 남에게 아첨을 하고, 늑대처럼 다른 사람을 난폭하게 대하고, 돼지처럼 혼자 독차지할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농부의 타락이 바로 결핍이 아닌 잉여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 다시 말하자면 필요를 넘어선 물질적 풍요는 신의 선물이 아니라 오히려 악마의 선물이라는 옛사람들의 믿음은 생산과 잉여를 바라보는 토착적 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아시아경제 김성곤 기자]이명박 대통령은 7일 "경제소득(1인당 국민소득)만 2만 불이 넘었고 곧 3만 불이 된다"면서 "아마 머지않아 3만불이 되고 더 빠른 시간 내에 4만 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반대로 대다수 지배엘리트들은 생산과 잉여야말로 낙원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한다. 가난을 치유하기 위해선 더 많은 물질적 풍요가 필요하다고 설득한다. 저개발이나 미개발은 야만이며, 더 많은 식량·석유·자동차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이 문명이자 진보라고 계몽한다. 아마도 검소한 삶의 방식이 우리 시대만큼 비웃음의 대상이 된 적도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 시대만큼 필요와 잉여의 기준이 사라지고, 소비와 낭비의 경계가 흐려진 적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지배엘리트들의 주장과 달리 마침내 풍요와 잉여의 시대가 도래하자 오히려 영혼은 타락하고, 사회는 사막처럼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얼마 전 <한겨레> ‘왜냐면’에 저소득층에 대한 학교급식비 지원이 너무 야박하다는 김호정 교사의 글이 실린 적이 있었다. 가난한 집 아이들 가운데 누구에게 급식비 지원을 해줄 것인지를 오직 몇 가지 규정에만 맞추라는 것도 야만적이지만, 더 나아가 무료급식 대상 인원을 미리 제한하여 그 가운데 누구누구를 골라내라는 식의 정부 방침은 그야말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짐승 같은 짓이었다.  

물론 예산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현재 학교마다 ‘학력향상 중점학교’니, ‘방과후 시범학교’니 해서 많은 지원금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일선교사들이 정부가 정한 인원보다 추가로 올린 서울시내 300여명의 학생들에게 돌아갈 급식비는 없었다. ‘저소득층’이니, ‘무료급식 대상자’니 하는 말도 어린 학생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난폭한 용어지만 그 대상에서마저 일부를 솎아내는 게 정부 방침이라는 기사를 접하고 보니 지금 소위 개발주의자들이 제시하는 풍요사회란 결국은 우리 사회를 지옥으로 이끌 악마의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염치도 없는 그런 풍요사회 말이다.(박혜영/인하대 교수·영문학)  

09. 1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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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0 1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0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외투 2009-10-10 19:18   좋아요 0 | URL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읽고 "Don't worry, be happy" 말의 의미를 느낀적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탁석산/창비)'와 비슷하네요. 교육행정관료의 소신있는 업무수행이 필요하겠는데요.

로쟈 2009-10-10 23:14   좋아요 0 | URL
한국인의 현실주의를 지적했는데, 때론 천박함과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