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중의 <청춘을 읽는다>(돌베개, 2009) 때문에 다시금 읽어볼 생각을 갖게 된 책은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의 <일본의 사상>(한길사, 1998)이다. 오래전 처음 구입할 당시 머리말과 해제 정도를 읽어두었던 듯싶은데, 이미 소장본은 박스에 들어간 지 오래고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도 너무 낡았기에 2003년에 나온 3쇄를 다시 구입했다. 최근에 마쓰모토 겐이치의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문학과지성사, 2009)도 훑어본 터여서 마루야마를 진득하게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더 들었는지도 모른다. 오래 전부터 숙제로 안고 있는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문학동네, 2007)까지 읽으면 성공이겠는데, 아무래도 그건 겨울로 넘어갈 듯싶다. 그래도 내친 김에 마루야마 마사오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둔다(참고로 최근 선정된 '동아시아 100권의 책'에는 마루야마의 <강의록>이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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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사상
마루야마 마사오 / 한길사 / 1998년 2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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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마루야마 마사오 지음, 김석근 옮김 / 한길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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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치사상사연구
마루야마마사오 / 통나무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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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충성과 반역- 전환기 일본의 정신사적 위상
마루야마 마사오 지음 / 나남출판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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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9-11-03 01:19   좋아요 0 | URL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읽고싶네요. 언제 읽을지는 알 수 없지만... -_-

로쟈 2009-11-03 20:23   좋아요 0 | URL
후쿠자와의 책은 왜 다시 나오지 않는지 의문이예요...

비로자나 2009-11-03 13:35   좋아요 0 | URL
소장본이 박스에 들어간 지 오래, 라서 새로 사야 하는 지경이라... 로쟈 님의 서고(서재보다 서고가 더 적확한 말이 되겠군요 ^^)가 더더욱 보고 싶군요. ㅎㅎ

로쟈 2009-11-03 20:24   좋아요 0 | URL
번듯한 서고를 가질 형편이 못 돼서 이런 일이 벌어지니다.^^;
 

매주 월요일 한겨레신문에 전면광고로 나가는 휴머니스트 북리뷰 3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김용석의 <서사철학>(휴머니스트, 2009)에 대한 소개를 청탁받고 쓴 것이다.  

휴머니스트 북리뷰(09. 11. 02) 스토리텔링, 그 비밀의 문을 열다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아우르면서 유례없는 ‘깊이와 넓이’의 인문학적 사색을 펼쳐온 철학자 김용석의 새로운 책이 출간됐다. 이번엔 아주 묵직하다. 제목부터가 한푼의 에누리도 없다. 서사철학! 일단 육중한 책의 무게가 월척의 손맛을 느끼게 한다. 마치 거대한 향유고래가 수면으로 솟아오르는 걸 보는 기분이랄까. 이건 ‘책’이라기보다는 그냥 ‘강적’이다!   

‘서사’에다 ‘철학’이 붙었다. 무엇을 다루는 것인가? 사실 이야기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틈틈이 보아온 것이어서, 제목을 통해 나는 ‘이야기에 대한 본격적인 철학적 탐구’ 정도를 떠올렸다. 그러고는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나 노에 게이치의 <이야기의 철학>을 얼핏 상기했다. 하지만, 저자의 스케일은 이 두 사람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가 다루는 일곱 가지 이야기 장르 가운데 ‘만화’와 ‘영화’는 물론 ‘진화’까지 포함된 걸 보고서 나는 저자의 상대가 그 자신밖에 없음을 알아차렸다.  

저자 또한 그런 자부심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철학자들이 지혜를 사랑하는 ‘필로소피아’의 정신으로 찾고자 한 세상의 이치가 크게 ‘원리’와 ‘윤리’, ‘진리’라고 말하면서 이제 네 번째 탐구의 대상으로 ‘설리(說理)’를 내세울 때 그는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철학의 제4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요컨대 그는 ‘이야기의 철학’을 주창하며, ‘설리의 철학자’를 자처한다.   

물론 계보가 없는 건 아니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이야기 철학’ 또는 ‘서사철학’의 원조로 꼽는다. 하지만 알다시피 <시학>은 ‘비극’이라는 한 가지 장르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것은 서사철학의 가능성이지 그 전모가 아니다. 그 서사철학이 거대한 윤곽을 드러내면서 이름에 걸맞은 규모를 자랑하게 된 것은 전통적인 서사 장르뿐만 아니라 대화와 혼화, 만화까지 포괄하여 서사철학의 집대성을 시도한 <서사철학>에 와서이다. “이야기에 대한 철학적 관심과 연구를 총괄하여 서사철학이라고 부른다”는 정의 그대로다. 과연 저자가 그어놓은 서사철학의 경계 바깥이 가능할지 궁금할 정도로 저자는 다양한 장르와 범위에 걸친 이야기들을 다룬다.  

‘서사’ 또는 ‘이야기’라고 했지만 요즘 뜨는 말로는 ‘스토리텔링’이다.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옛말이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옛말이다. 요즘 이야기는 상종가다. 어디서나 주문하고 이야기를 보챈다. 사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건 이야기를 말하며 이야기와 만난다. 리쾨르의 말을 빌면, 우리의 정체성 자체가 이야기로 구성되는 것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서사 장르에 한정하더라도 우리의 주변은 온갖 신화적 이야기와 중세적 판타지와 마술적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우리의 주인공은 해리 포터이고, 우리의 연대기는 나니아 연대기이며, 우리의 성공담은 언제나 모든 난관들을 극복해 나가는 모험 서사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우리는 이야기를 지어내면서 누군가가 만들어내는 이야기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세상 자체가 이야기의 중층 구조다. <서사철학>은 이러한 이야기들의 세계, 이야기들의 우주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고, 무엇을 해석할 수 있는지 시범적으로 보여준다. 한마디로 장관이다.   

비록 아직 불안정하며 불완전한 ‘시론(試論)’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하지만 지나친 겸손이자 과소평가다. 자신의 텍스트 읽기를 여러 스토리텔링이 품고 있는 철학 콘텐츠를 발굴하는 작업 정도로 정의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허구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곧 ‘서사적 인간’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사철학>은 서사철학을 넘어선다. 그것은 ‘서사적 인간학’을 창출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곱 가지 특색을 지닌 장르에 대한 연구로 구성된 <서사철학>이 ‘이야기 탐구의 아이리스’가 되기를 바란다는 저자의 기대는 이미 이루어졌다. 단, 내가 염두에 둔 ‘아이리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무지개의 여신 아이리스가 아니라 요즘 뜨고 있는 블록버스터급 드라마 <아이리스>다. <서사철학>은 오랜만에 등장한 인문서의 블록버스터다.  



09. 11. 02.   

P.S. <서사철학>에서 이채로운 것 중의 하나는 저자가 '서사'를 'tale'의 번역어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서사철학'의 영어표현은 'Philosophy of Tale'이다. 나는 '서사'가 서사학의 대상인 '내러티브'를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story'도 'narrative'도 아닌 'tale'이었던 것. 이게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개인적으로 더 따져보려고 한다. 마침 서사학의 원조라 할 블라디미르 프로프의 <민담의 형태론>(박문사, 2009)이 새로 번역돼 나왔다. 이번이 세번째이지 싶다. 그러고 보니 <서사철학>에서 다루고 있는 아이리스(무지개), 곧 신화, 대화, 진화, 동화, 혼화, 만화, 영화라는 일곱 장르에 하나가 더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신화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인 민담, 곧 민화(民話)가 그것이다. 물론 대개의 민화는 동화적 요소를 갖고 있기에 그렇게 포괄될 수도 있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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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krad 2009-11-02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사=내러티브라고 고민없이 생각해왔는데 tale이라니 좀 놀랍네요.
tale이라는 말에서는 이야기의 창조성이랄까 왠지 원초적인 느낌이 듭니다.^^

로쟈 2009-11-03 00:31   좋아요 0 | URL
제 느낌에는 narrative가 tale보다 더 포괄적인 듯싶어요...

놀이네트 2009-11-03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문사의 새 번역본은 두께가 두 배 값은 세 배가 되었네요. 다른 논문들을 좀 넣었을까요?
쁘로쁘 광팬이라...

로쟈 2009-11-03 20:26   좋아요 0 | URL
그런신가요? 먼저 보시고 제게도 알려주시길.^^

펠릭스 2009-11-03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차안에서 '서사철학' 서평을 읽으며 생각했죠.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시민에게서 이성주의(계몽)
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한게 아닌가 싶어요.

로쟈 2009-11-03 20:27   좋아요 0 | URL
한겨레의 서평을 읽으셨나 보네요.^^

당근주스 2009-12-21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례사 서평처럼 보입니다. 웬지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청탁받고 쓰신 서평이라서 그런지 광고하시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9-12-22 00:10   좋아요 0 | URL
전면광고로 나가는 서평이라고 미리 적었습니다. 그래도 KBS의 책읽는밤에서 '올해의 책'의 하나로 선정했구요, 책은 드물게 볼 수 있는 노작입니다.

당근주스 2009-12-22 12:53   좋아요 0 | URL
광고로 나가는 서평이니 주례사 서평일 가능성이 많아 보였습니다.또
'올해의 책' 선정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선정한 사람도 신뢰가
가지 않고요. 제 생각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독서대학 르네21의 이번달 금요대중강좌는 '책을 말하는 책'을 주제로 다룬다. 네 차례 강좌 중 한 꼭지를 나도 맡게 되었는데(http://www.renai21.net/bbs/settlement_view.php?s_id=61&schedule_type=4)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금요일 저녁(19시 00분 ~ 21시 30분) 광화문 대한성공회 대강당을 찾으시면 된다. 유료강좌이며 선착순 마감이다. 강좌 소개와 함께 일정을 안내한다.  


  

1. 11월 6일: 김이정, <순례자의 책> 

 

2. 11월 13일: 이현우, <로쟈의 인문학 서재> 

 

3. 11월 20일: 정혜윤, <그들은 한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4. 11월 27일: 조병철,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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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2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2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09-11-03 10:29   좋아요 0 | URL
듣고 싶군요

로쟈 2009-11-03 20:28   좋아요 0 | URL
저녁시간인데, 강좌가 운영되더라고요...
 

이번주 교수신문에 실은 칼럼을 옮겨놓는다(일부 오탈자를 수정했다). 내주에 수능시험도 있는지라 최근에 읽은 사이토 다카시의 <독서력>(웅진지식하우스, 2009)을 잣대로 삼아 학생들의 '독서력'에 대한 단상을 적어보았다(사이토 다카시는 일본의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저명한 학습법 멘토로서 국내에도 수십 권의 책이 소개돼 있다). 공부와 독서를 양자택일 관계로 만드는 현행 입시제도에 대해서 재고해보자는 제안도 담고 있다. 대학에서는 독서를 장려하고 독서력을 길러주는 강좌와 교육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으로서 독서력이 '공부'의 핵심이라면 말이다.  

교수신문(09. 11. 02) 필독 리스트와 독서력! 

해마다 비슷한 통계가 나오지만, 작년 한국 성인의 연평균 독서량은 11.9권이었다. 한 달 평균 한 권 정도의 책을 읽는 셈인데, 주로 읽는 책이 소설(21.4%)과 수필/명상집(7.4%), 경제/경영서(5.9%) 순이었다. 대학생이라면 사정은 좀 나을지 모르겠지만, 평균적으로 한국인의 독서량은 ‘경제수준에 걸맞은 문화국가’와는 거리가 멀다. 이명박 대통령의 말대로, “우리민족의 유전자엔 강한 문화적 기질과 욕구가 있다”고 한다면 독서에 대한 욕구 또한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혹 그러한 기질과 욕구를 억압하는 잘못된 사회적 제도와 여건에 있는 건 아닐까.

올해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예년의 경우 시험을 치른 수험생들은 하고 싶은 일들 가운데 하나로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 것’을 꼽았다. 학교시험과 수능시험 등에 매달리다보니 정작 책을 읽을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게 학생들이 현실이라는 얘기다. 사정은 일본도 비슷한 모양이어서 교육심리학자 사이토 다카시의 『독서력』(웅진지식하우스)에 보면, 저자 또한 독서가 부정되는 입시에 대한 강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그는 아예 독서력을 묻고 평가하는 것이 입사시험이나 대학입시의 중요한 전형방식이 돼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시험방식이 공부 방식을 결정하는 현실에서라면 그의 제안을 우리의 처지에 맞게 적극적으로 고려해 봄직하다. “대학, 특히 문과 계열의 공부는 책을 읽는 것이 핵심이다. 설사 이과 계열이라도 논리적인 사고를 단련하는 데 독서는 필수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입장에서 보면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높은 수준의 독서력을 갖추고 있으면 그만이다.” 같은  그의 주장을 우리도 반박하기 어렵다면 말이다.

교육 현장에서 사고력과 상상력은 언제나 강조돼 왔다. 하지만 독서력의 경우는 어떨까.  독서가 자아 형성을 위한 양식이고 커뮤니케이션의 기초로서 우리의 세계관을 확장시켜준다고 보는 사이토 다카시는 ‘독서력 형성’이 학교교육의 최대 과제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우리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교육의 목표와 과제에 대해 다시 설정해볼 필요가 있다. 공부와 독서를 따로 분리시키는 시험방식을 고수하면서 독서를 권장하는 것은 입바른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궁극적으론 학생들을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책을 안 읽는 인간과 책을 못 읽는 인간.”(김경욱, ‘위험한 독서’)이란 분류법에서 못 벗어나게 만들 것이다.   

물론 제도적인 차원의 개선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장에 기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독서력의 기준을 제시하고 독서를 장려하는 일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사이토 다카시는 ‘문고본 100권과 신서본 50권’을 독서력의 기준으로 제시하는데, 우리의 상황에 맞게 바꿔보자면 ‘문학작품 100권과 교양서 50권’ 정도가 된다. 여기서 ‘문학작품’은 가벼운 읽은 거리가 아닌 ‘고전’ 수준의 작품을 말하고, ‘교양서’는 과학교양서를 포함한 인문·사회과학서적을 가리킨다. 이런 분량의 책을 4년 정도의 기간 안에 독파하는 것이 독서력 형성의 지름길이라고 사이토 다카시는 말한다. 우리의 경우에도 각 대학별로 필독 고전의 리스트는 많이 제시하고 있다. 다만 독서를 학생들의 자발적인 의지에만 내맡겨두는 것은 효과가 적지 않나 싶다. 관련강좌를 개설하거나 여러 유인책을 통해서 학생들의 독서의지를 적극적으로 북돋아줄 필요가 있다.

사이토 다카시의 강의 사례도 그런 경우다. 그는 자신의 강의실을 학생들이 ‘동아리’로 생각하도록 유도한다고 한다. ‘독서부’에서 제대로 된 지도자에게 지도를 받으면 꽤 높은 수준의 책도 읽게 되더라는 것이 그의 경험담이다. “내 강의실은 운동부 학생들로 붐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책을 거의 잡아본 적이 없다. 그래도 역시 대학생인 만큼 나와 함께 독서토론회를 하다 보면 석 달 안에 도스토옙스키나 니체 등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일주일 안에 너끈하게 읽게 된다.”

독서 경험이 축적되는 가운데 독서력이 붙고 독서에 자신감을 갖게 되면, 대학에서의 공부는 평탄해진다. 다양한 수준의 독서를 통해서 자신의 독서력을 지속적으로 단련시켜나가는 일이 남을 뿐이다.

이 독서력의 마지막 단계는 무엇인가. 음식에 패스트푸드와 풀코스 요리가 있는 것처럼 책에도 한번 훑어보기만 해도 충분한 책과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 하는 책이 있다. 그리고 같은 책이라 하더라도 건너뛰면서 읽어도 좋은 부분과 천천히 정독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때문에 독서의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이러한 단계까지 거친다면, 마지막으론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수준이 된다. 여러 권의 책을 기어를 바꿔가면서 읽을 수 있다면 대학생의 독서력으론 더 바랄 게 없다. 그들은 사회인이 돼서도 꾸준히 자신의 독서력을 단련하고 세계관을 확장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한국인의 연평균 독서량도 조금 다른 수치를 보여주게 되지 않을까. 독서강국으로서의 문화국가를 잠시 꿈꾸어본다. 

09. 1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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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11-02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한국 성인의 연평균 독서량은 11.9권이었다면 상당히 양호한 편이네요.하지만 출판사 3만개중 91%가 일년에 책 한권 출간하지 못하는 현실을 볼때 대한민국이 독서 강국이 되기는 참 요원해 보입니다.

로쟈 2009-11-02 23:00   좋아요 0 | URL
독서강국의 지표라면 최소 일주일에 한권은 돼야 할 텐데요.^^; 그래봐야 하루 30분 정도의 독서시간입니다...

펠릭스 2009-11-03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에게 맞는 독서법도 중요할듯 해요

로쟈 2009-11-03 20:29   좋아요 0 | URL
그걸 찾아야 하지요...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의 칼럼이 얼마전부터 '언어학 카페 말들의 모험'으로 바뀌었다.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거쳐서 다시 '전공'인 말들의 세계, 언어학의 세계로 돌아온 것.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1999/2007)을 읽고서 '아, 고종석!'이라고 무릎을 쳤던 나로선 반가운 일이다. 이런 칼럼이 일간지에 연재된다는 사실 자체도 고무적이고. 그가 세 차례에 걸쳐 나눠 실은 '번역이라는 고역'을 옮겨놓는다.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용어들을 소개하면서 용어번역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숙고해보도록 한다.    

한국일보(09. 10. 12) 번역이라는 고역(苦役) (上)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ㆍ1903~1978)라는 일본인 언어학자가 있습니다. "고바야시 히데오? 들어본 이름이군!" 하는 독자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고바야시 히데오는 언어학자 고바야시 히데오가 아니라 예술비평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ㆍ1902~1983)이기 쉬울 거예요. 성(姓)은 같지만, 이름의 한자가 다릅니다.

언어학자 고바야시 히데오는 이름이 닮은 한 살 위의 평론가만큼 20세기 일본 지성사를 요란스럽게 살아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언어학사 책 한 구석에 흐릿한 윤곽으로 웅크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를 일으켜 세워 양지바른 곳으로 불러내 봅시다.

스물다섯 살 때인 1928년, 고바야시 히데오는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CLG)를 일본어로 옮겨 출간했습니다. 고쇼인(岡書院)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이 일본어판 CLG의 표제는 <겐고가쿠겐론(言語學原論)>이었습니다. <겐고가쿠겐론>은 1916년 로잔과 파리에서 초판이 나온 CLG의 첫번째 번역본입니다. 그러니까 프랑스어로 쓰인 CLG의 첫 번역본은 일본어판이었습니다. 오늘날 CLG는 한국어를 포함한 스물 남짓의 자연언어들로 번역돼 있습니다.

유럽어 번역본이 일본어 번역본보다 시기적으로 늦은 데는 유럽인들이 일본인들보다 프랑스어를 읽기가 더 쉬웠다는 사정도 개입했겠습니다만, 그 사실 때문에 고바야시 히데오의 높은 안목을 지나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원서가 나오고 10여 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프랑스어권 바깥의 어느 언어학자도 굳이 번역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CLG가 일본인 청년 고바야시의 눈에는 단번에 '고전(古典)'으로 비쳤던 것입니다. <겐고가쿠겐론>은 1939년 출판사를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으로 옮겼고, 1972년 고바야시가 직접 개역(改譯)하면서 표제를 원서 제목에 맞추어 <잇판겐고가쿠고기(一般言語學講義)>로 바꿨습니다.  

그런데 고바야시 히데오 이래 수많은 CLG 번역자들은 소쉬르 고유의 프랑스어 용어들, 곧 우리가 지난번에 살폈던 '랑그' '파롤' '랑가주' '시니피앙' '시니피에' 따위를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맞춤한 역어(譯語)를 찾기 힘들다는 핑계로 우리처럼 프랑스어 단어를 그대로 썼을까요? 아니면 억지로라도 그 대응어를 찾아냈을까요? 역자들 대부분이 그 용어들에 대응함직한 말을 제 모국어에서 찾아내려 애썼습니다. 그 애씀의 과정은 소쉬르를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이론의 영역을 넓힌 이들이 새로운 개념을 담기 위해서 고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새 말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예컨대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문화적 복제자'(replicator)라는 개념을 담기 위해 '밈'(meme)이라는 말을 새로 고안해냈습니다. 그러나 더 일반적인 경우는 이미 사용되고 있는 일상어에 특별한 뜻을 담는 것입니다. 소쉬르의 '랑그'(langue), '파롤'(parole), '랑가주'(langage)가 전형적입니다.

일상 프랑스어에서 '랑그' '파롤' '랑가주'는 평이한 말입니다. '랑그'는 그저 '언어'라는 뜻입니다. 랑그 마테르넬(langue maternelle)은 '모국어'이고, 랑그 알망드(langue allemande)는 독일어입니다. '파롤'은 그저 '말'이라는 뜻입니다. 파롤 드 디외(parole de Dieu)는 '하느님의 말씀' 곧 복음(福音)입니다. '랑가주'는, '랑그'보다 조금 무거운 느낌을 주긴 하지만, 역시 '언어'라는 뜻입니다.

랑가주 나튀렐(langage naturel)은 '자연언어'이고, 랑가주 아르티피시엘(langage artificiel)은 '인공언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들의 쓰임새가 다르기는 하지만, 본디부터 그 말들에 각각 언어의 추상적 측면, 언어의 구체적 측면, 언어활동 전체라는 뜻이 또렷이 담겼던 것은 아닙니다. 이 말들에 그 특별한 개념들을 담은 것은 소쉬르지요.

이 때, 프랑스어의 일상어 단어들(여기선 '랑그' '파롤' '랑가주')에 거의 대응하는 일상어 단어들을 갖춘 자연언어로 소쉬르 용어를 옮기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해당 일상어를 그냥 가져와도, 어차피 CLG에 소쉬르의 설명이 있으니, 독자들이 오해할 여지가 크지 않습니다. 스페인어가 그런 경우입니다. 소쉬르의 '랑그'를 '렝과'(lengua)로, '파롤'을 '아블라'(habla)로, '랑가주'를 '렝과헤'(lenguaje)로 옮기는 데, 스페인어 배경의 언어학자들은 거의 다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어만 해도 일이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일상 이탈리아어에는 일상 프랑스어의 '랑그'와 '랑가주'에 해당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링과'(lingua)와 '링과조'(linguaggio)가 그것입니다. 그러니 소쉬르의 '랑그'를 '링과'로, '랑가주'를 '링과조'로 옮기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문제는 '파롤'에 있습니다. 물론 일상 이탈리아어에는 일상 프랑스어 '파롤'에 얼추 대응하는 단어도 있습니다. '파롤라'(parola)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어 '파롤라'는 그저 '말'이라는 뜻으로 쓰기도 하지만, '낱말' 곧 '단어'(프랑스어의 mot)라는 뜻으로 더 자주 씁니다.

소쉬르 식으로 표현하자면, 프랑스어 '파롤'과 이탈리아어 '파롤라'는 가치(valeur)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CLG에는 '단어'(mot)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그러니, '파롤'을 '파롤라'로 옮겨 버리면, 프랑스어 '모'(motㆍ단어)를 번역할 말이 없어집니다. 이런 혼돈을 무릅쓰고 소쉬르의 '파롤'을 '파롤라'로 번역하는 이탈리아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탈리아 언어학자들은 소쉬르의 '파롤'을 고스란히 가져와 그냥 '파롤'이라고 씁니다. 본문의 다른 단어들과 체(體)를 달리해, 외국어 단어라는 것을 드러내줄 때가 많지요.

프랑스어 '랑그'와 '랑가주'의 (형태적) 구별이 없는 자연언어의 경우, 소쉬르가 특별한 의미를 담은 이 두 단어를 구별하는 것은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닙니다. 예컨대 영어가 그렇습니다.(일본어나 한국어는 말할 나위도 없지요) 일상 프랑스어의 '랑그'와 '랑가주'는 둘 다 일상 영어의 '랭귀지'(language)에 해당합니다. 웨이드 배스킨(Wade Baskin)이라는 언어학자는 CLG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랑그'를 '랭귀지'로, '파롤'을 '스피킹'(speaking)으로, '랑가주'를 '스피치'(speech)로 일관되게 옮겼습니다. 로이 해리스(Roy Harris)라는 언어학자의 전략은 전혀 달랐습니다. <소쉬르 읽기(Reading Saussure)>라는 단행본 소쉬르 연구서를 내기도 한 해리스는 CLG를 영어로 옮기면서, 가장 중요한 단어라 할 '랑그'를 그때그때 맥락에 따라 달리 번역했습니다.

소쉬르가 특별한 의미를 담은 '랑그'는 '랭귀지 스트럭처'(language structure), '링귀스틱 스트럭처'(linguistic structure), '링귀스틱 시스템'(linguistic system) 따위로 옮긴 반면에, 일상적 의미의 '랑그'는 앞의 관사를 변화시켜 가며 '랭귀지'로 옮겼습니다. '랑가주' 역시 그저 '랭귀지'로 옮겼지요. 해리스는 또 '랑가주'를 '스피치'로 옮긴 것(배스킨이 그랬지요)이 엄청난 오역이라고 공박하면서(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우리들도 공감할 수 있는 지적입니다), '스피치'를 '파롤'의 역어로 삼았습니다. 해리스의 주장과 실천이 그의 옳음을 증명해주지는 못하지만, 번역이라는 행위의 어려움을 증명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아무런 선례의 혜택도 입지 못한 고바야시 히데오는 소쉬르 용어들을 뭐라 옮겼을까요? 그는 '랑그'를 '겐고(言語)'로, '파롤'을 '겐(言ㆍ말)'으로, '랑가주'를 '겐고가쓰도(言語活動)'로 번역했습니다. 또 '시니피앙'은 '노키(能記)'로, '시니피에'는 '쇼키(所記)'로 옮겼습니다. 고바야시의 선례를 따라 한국어판 CLG(들)도 '랑그'를 '언어'로, '랑가주'를 '언어활동'으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각각 '능기'와 '소기'로 옮겼습니다. 한국어판에서는 '파롤'을 주로 '화언(話言)'이라 옮기는데, 이 말 역시 일본식 조어(造語) 냄새를 풍깁니다. 게다가 고바야시의 '겐'이 일상어인 데 견주어, '화언'이라는 말은 일상에서 너무나 먼 말입니다. '화언'은 소쉬르가 '랑그'와 대립시켜 거론한 '파롤'의 역어로밖에 쓰지 않는 말이고, 그래서 프랑스어 '파롤'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말입니다.

청각이미지와 개념을 각각 가리키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역어들은 더욱 그렇지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역시 일상 프랑스어치고는 조금 무거운 말이지만, '능기'와 '소기'에 댈 게 아닙니다. '기표'나 '기의', '기고보(記號母)'나 '기고시(記號子)' 같은 다른 한일(韓日) 역어들도 그렇습니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라는 말을 그냥 쓰느니만 외려 못하게 돼버렸지요.  

한국일보(09. 10. 19) 번역이라는 고역 <中> 

소쉬르 용어의 번역 문제를 조금 더 짚어봅시다. 언어활동('랑가주')의 개인측면과 사회측면을 각각 '파롤'과 '랑그'라고 부르면서, 소쉬르는 일상 프랑스어 '파롤' '랑그' '랑가주'의 의미가 자신의 일반언어학 용어 '파롤' '랑그' '랑가주'의 의미에 너무 깊이 간섭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는 '랑가주'를 '랑그'와 '파롤'로 나누어 논한 뒤, 얼른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우리가 정의한 것은 사물이지 낱말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겠다. 그러므로 언어에 따라서 몇몇 용어들이 모호해져 서로 깔끔하게 대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확립한 구별에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고 나서 소쉬르는 독일어와 라틴어의 예를 듭니다. 그의 말을 계속 들어보지요. "가령 독일어 Sprache는 '랑그'와 '랑가주'를 뜻한다. Rede는 '파롤'에 얼추 대응하지만, 거기에 '디스쿠르'(discoursㆍ담화)라는 특수 의미를 보탠다. 라틴어 sermo는 외려 '랑가주'와 '파롤'을 의미하는 한편, lingua는 '랑그'를 가리킨다. 어떤 낱말도 앞에서 자세히 설명한 개념들 중 하나에 정확히 대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낱말에 내려진 모든 정의(定義)는 헛되다. 사물을 정의하기 위해 낱말에서 출발하는 것은 나쁜 방법이다."

<일반언어학강의>(CLG)의 라틴어 번역본은 없습니다. CLG가 출판된 20세기 초는 라틴어가 이미 유럽 지식사회의 공용 문어 자리를 잃은 지 오래니 그럴 만합니다. 독일어 번역본은 당연히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지닌 것은, 헤르만 로멜(Herman Lommel)이라는 사람이 옮긴 <그룬트프라겐 데어 알게마이넨 슈프라흐비센샤프트(Grundfragen der Allgemeinen Sparchwissenschaft)>입니다. 1967년 베를린에서 나온 책이군요. 원본 표제의 '강의'(Cours)가 로멜의 독일어 번역본에선 '근본문제'(Grundfragen)로 바뀐 게 눈에 띕니다.

그렇다면 로멜은 소쉬르의 '랑그' '파롤' '랑가주'를 뭐라 옮겼을까요? 독일어에 능숙했던 소쉬르의 조언을 따랐을까요? 곧이곧대로 따르진 않았습니다. 로멜은 '랑그'를 '슈프라헤(Sprache)'로, '파롤'을 '슈프레현(Sprechenㆍ말)'으로, '랑가주'를 '멘슐리혜 레데(menschliche Rede)'로 옮겼습니다. 독일어 감각이 무디니, 이 번역이 잘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판단을 삼가겠습니다. '랑가주'를 '멘슐리혜 레데' 곧 '사람의 말'로 옮긴 데서, 로멜이 겪었을 고충이 드러납니다.

일상 프랑스어의 '랑그'와 '랑가주'에 (의미적으로만이 아니라 형태적으로) 대응하는 낱말을 제 어휘목록에 지닌 자연언어들(지난번에 살핀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가 그랬지요) 이외의 언어(영어가 그랬지요)로 이 두 용어를 구별해 옮기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어와 독일어가 그럴진대, 일본어로 이 둘을 구별해 옮기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고바야시 히데오가 그것들을 '겐고(言語)'와 '겐고가쓰도(言語活動)'로 옮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이 두 역어는, '랑그'와 '랑가주'처럼, 형태적 공통인수를 지녔습니다. 그리고 '랑그'가 '랑가주'의 부분집합이듯, '겐고'가 '겐고가쓰'의 부분집합임이 한눈에 드러납니다.

일상 프랑스어의 '랑가주'보다 일상 일본어의 '겐고가쓰도'가 조금 무거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군요. 번역이라는 병치레가 수반하는 발열(發熱) 증상 정도로 생각합시다. '파롤'을 '겐(言)'으로 옮긴 것도 잘된 번역 같습니다. "겐(言) 오 마타나이"(말할 것도 없다, 자명한 일이다) 같은 예에서 보듯, 일상 일본어 '겐'은 일상프랑스어 '파롤'에 얼추 대응합니다.

그러나 '파롤'의 한국어 번역어 '화언(話言)' 앞에선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군요. 물론 이 말을 표제어로 올린 한국어사전도 있긴 합니다. 예컨대 이희승 국어대사전엔 '화언'이 "말을 함. 이야기함. 또, 그 말이나 이야기"라 풀이돼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 한국어에서 '화언'은 죽은 낱말, 없는 낱말입니다. 반면에 '파롤'은 일상 프랑스어에서 싱싱하게 꿈틀거리는 낱말입니다. 그 두 말 사이의 거리는, 일상 독일어 '페어슈탄트(Verstand)'나 일상 영어 '언더스탠딩(understanding)'과 한국어 '오성(悟性)'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더 멀어 보입니다.

'오성'이라는 말도, 철학적 맥락 바깥에선 쓰지 않는 탓에, 부적절한 역어의 대표적 예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립니다(사실 일본사람들이 '고세이ㆍ悟性'로 옮긴 것을 그냥 베껴온 것이긴 합니다). 그런데 '화언'은 '오성'보다 더 굳어있는 말입니다. '파롤'을 '화언'으로 옮기는 것은 그 말을 아무 의미 없는 소리뭉치로, 예컨대 '비디비디'나 '쿵빠짜'로 옮기는 것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비디비디'나 '쿵빠짜'가 한국어 공간에서 생명 없는 말이듯, '화? 역시 방부제로 처리한 주검이나 다름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파롤'을 차라리 '말'로 옮기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그 말이 소쉬르 언어학의 맥락에선 언어활동의 개인측면을 가리킨다는 것이 어차피 명시될 테니 말입니다. '말'이라는 말이 영 내키지 않았다면(도무지 학술용어처럼 들리지 않았다면: 사실 이건 커다란 편견이지요. 학술어는 흔히 일상어의 특별한 사용일 뿐이니까요),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그냥 '파롤'이라고 놔둘 수도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예를 따르려 합니다. 아니 그들보다 더 나아가려 합니다. '파롤'은 물론이고 '랑그'나 '랑가주'라는 말도, 소쉬르의 맥락에서는, 그냥 가져다 쓸 생각입니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능기'와 '소기', '기표'와 '기의'라는 말의 생기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라는 말의 생기보다(심지어 한국어 텍스트 안에서도) 덜하다고 여겨서입니다.

소쉬르 번역과 관련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용어가 또 있습니다. '음성학'과 '음운론'입니다. 지금의 언어학자들에게 음성학은 '포네티크(phonetiqueㆍ영어로는 phonetics)'의 대응어이고, 음운론은 '포놀로지(phonologieㆍ영어로는 phonology)'의 대응어입니다. '포놀로지'와 '포네미크(phonemiqueㆍ영어로는 phonemics)'를 구별하는 언어학자도 있는데, 말소리에 관한 이 학문들의 분류와 그 내용은 언젠가 자세히 살필 기회가 있을 겁니다. 이 자리에선 음성학과 음운론의 차이를 짧게 얘기하고, 이 용어들이 소쉬르 번역에서 왜 문제가 되는지만 살피겠습니다.

음성학은 음성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음운론은 음운(이라기보다 차라리 '음소'라고 해야겠네요. 음운과 음소의 구별에 대해선 뒷날을 기약합시다)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음성은 말소리 일반을 가리키고, 음소는 한 자연언어에서 실현되는 말소리 가운데 의미와 관련이 있는 말소리들을 가리킵니다. 아주 거칠게 도식화한다면, 음성학은 파롤의 언어학에 속하고, 음운론은 랑그의 언어학에 속합니다.

'동물의 살'을 뜻하는 한국어 낱말은 '고기'입니다. 이 단어의 첫 자음과 둘째 자음은 다 'ㄱ'으로 표기됐지만, 서로 다른 소리로 실현됩니다. 즉 첫 자음은 [k]로 실현되고 둘째 자음은 [g]로 실현됩니다. 둘째 자음도 본디는 [k]였지만, 두 모음(두 유성음) 사이에서 유성음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어 화자들에게 이 두 소리는 똑같이 들립니다. 한국어 음성학은 이 [g] 소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 음운론은 거기 관심이 없습니다. 한국어에서 [g]는 독립된 음소가 아니라 음소 {k}의 환경적 변이음일 뿐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물고기'에서는 첫 'ㄱ'이 /k'/로 실현됩니다. 이 경우의 /k'/도 음소 {k}의 환경적 변이음이긴 합니다. 그러나 한국어 음운론은 /g/와는 달리 /k'/에는 관심이 있습니다. '굴'[kul]과 '꿀'[k'ul]의 비교에서 보듯, 한국어에서 {k'}는 {k}와 대립해 의미 차이를 만들어내는 버젓한 음소이기 때문입니다.

CLG 서론의 마지막 장(章)과 그 부록은 'phonologie'에 대한 논의입니다. 그런데 소쉬르가 여기서 실제로 논의하는 것은 (음운론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음성학'이라고 부르는 것과 거의 겹칩니다. 소쉬르의 phonologie는 오늘날의 phonologie와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이 때 이 'phonogie'를 '음운론'이라 옮겨야 할까요, 아니면 '음성학'이라 옮겨야 할까요? CLG의 한국어판 둘 가운데 한쪽은 '음성학'을 골랐고, 다른 쪽은 '음운론'을 택했네요. 영어로는 이 'phonologie'를 'phonology'로 옮기는 게 옳을까요, 아니면 'phonetics'로 옮기는 게 옳을까요. 웨이드 배스킨은 'phonology'라 옮겼고, 로이 해리스는 'physiological phonetics'라 옮겼군요. 참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한국일보(09. 10. 26) 번역이라는 고역 <下>

방부 처리한 주검에 '파롤'의 한국어 역어 '화언'을 견주며, 저는 번역자의 무성의와 무감각을 탓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공정한 비판이었을까요? 부분적으로만 그렇습니다. 소쉬르의 '파롤'이 일상어의 특별한 사용이었듯, 한국어에서도 특별한 사용을 통해 전문용어 노릇을 겸할 수 있는 일상어를 찾아냈다면 좋았겠지만, 번역자 처지에선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사실 적지 않은 (전문용어들의) 역어들이 주검 상태에서 생애를 시작합니다. 운이 좋아 거기 생기가 깃들이면 그 낱말이 일상어로 자리잡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 말은 전문용어 사전 속에만 숨어있게 됩니다. '화언'은 운이 나빴을 뿐입니다.

이를테면 메이지(明治) 시대 초기의 일본인들은, 오늘날 한국인들이 '화언'이란 말에서 느끼는 낯섦보다 더 지독한 생경함을 '샤카이(社會)'라는 말에서 느꼈을 겁니다. 오늘날의 일본인들은 영어 낱말 society를 대뜸 '샤카이'에 대응시킵니다. 일본사람들을 따라서, 오늘날의 한국인들도 society를 즉시 '사회'에 대응시킵니다. 그렇지만, 일본어에서 '샤카이'가 society의 역어로 정착된 것은 18세기 말 이래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뒤의 일입니다.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가운데 큰 것 하나는 일본 전통사회에 society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동료들끼리의 결합을 뜻하는 society는 전통 일본에도 있었지요. 그러나 가장 넓은 범위의 서로 모르는 개인들이 모여 이룬 집단을 뜻하는 society는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만큼 이 단어의 번역은 쉽지 않았고, 최후의 승자로 남은 '샤카이'조차 처음엔 '방부 처리한 주검'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말이 생기를 얻은 것은 수많은 일본인들이 그 말을 society라는 의미로 사용한 덕분입니다. '샤카이'가 운이 좋았던 거지요. 현대 일본의 정신적 초석을 놓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ㆍ1835~1901)만 해도, 1868년 영어로 된 경제학 교과서를 <세이요지조 가이헨(西洋事情 外篇)>이라는 표제로 일역하며, society를 '닌겐고사이(人間交際)' '고사이(交際)' '구니(國)' 따위로 옮겼습니다. 세이후(政府)나 세조쿠(世俗), 소타이진(總體人) 같은 낱말도 그 시절 '샤카이'의 경쟁어였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현대한국어 문장이나 현대일본어 문장은, 심지어 그 문장들이 한국학이나 일본학을 논하고 있을 때조차, 압도적으로 '번역된 유럽'이라는 점을 지적해야겠습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글에는 한두 세기 전 한국인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주로 한자어)이 많은데, 그 말들은 대개 유럽 사회에서 태어난 개념들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 번역의 주체는 18세기의 란가쿠샤(蘭學者ㆍ네덜란드어 문헌들을 통해서 유럽 문화를 연구하던 이들)와 19세기 중엽 이래의 에이가쿠샤(英學者ㆍ영어 문헌을 통해 서양 문화를 연구하던 이들)를 비롯한 일본인 번역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두 세기 남짓 기간에 걸쳐 유럽(아메리카까지 포함한) 문화 전체를 한자로 옮겨내 제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번역된 유럽'은, 19세기 말 이래 반세기 이상 한국이 일본문화권의 일부를 이루면서, 고스란히 한국어에 이식됐습니다. ('란가쿠[蘭學]' 이래 일본인들이 수행한 번역활동을 비롯해 번역행위의 세계문명사적 의의와 그 양상은 졸저 <감염된 언어>[1999]의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글에 비교적 소상히 적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는 '번역된 유럽어'로 독자 여러분과 소통하고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닙니다. 란가쿠샤 이래의 일본인 번역가들은 유럽을 한자어로 옮기면서, 이미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비슷한 개념어를 가져다 쓰기도 했지만, 완전히 새로운 말을 만들어낸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 신조어들은, 대체로, 우리의 '화언' 같은 주검 상태로 일본어 세계에(그리고 나중에는 한국어 세계에) 머리를 들이밀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신조어들 가운데 수많은 말이 살아남아 지금 현대일본어와 현대한국어 어휘부의 뼈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새 번역어들이 주검 상태에서 생기를 얻는 과정을 야나부 아키라(柳父章)라는 일본인 번역학자는 '카세트 효과'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카세트'는 보석상자라는 뜻입니다. 그의 말을 잠깐 들어볼까요? "새로 만든 말은 카세트를 닮았다. 그 말 자체가 매력이다. 그리고 속에 깊은 의미가 틀림없이 담겼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사람들을 끌어서 자꾸 그 말을 쓰도록 부추긴다. 빈약한 의미밖에 지니지 못한 신조어는 그 반복 사용 과정을 통해 이윽고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된다. 처음엔 단지 아름다움 때문에 보석상자를 찾던 사람들이 끝내 보석을 간수하는 데 그 상자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의미나 역할이 아니라 말 자체에 매혹되는 첫 체험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결국 그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번역을 위해 새로 만들어진 말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보석상자 같은 것이다."(<번역이란 무엇인가>)

그러니까 야나부에 따르면 수많은 신조어들이 처음엔 빈 보석상자였다가 나중엔 보석이 담긴 상자가 되는 겁니다. 물론 끝내 빈 보석상자에 머물러 사람들의 손길에서 멀어지는 경우도 많지요. 영어 단어 'society'의 역어 자리를 놓고 '샤카이'와 경쟁하던 '닌겐고사이'나 '소타이진'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은 오직 '샤카이'라는 카세트에 보석을 담았던 것입니다. '파롤'의 역어 '화언'은 아직 빈 카세트 같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안에 보석이 담길 것 같지 않습니다. 보석을 담게 될 카세트는 차라리 '파롤'이라는 외래어 같군요. '카세트 효과'는 신조어에서만이 아니라 외래어에서도 나타납니다. 처음 듣는 외래어는 빈 카세트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빈약한 의미밖에 지니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거기 매혹된 사람들이 자꾸 쓰다 보면 언젠가 보석을 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시나브로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렇지만 '화언'이 영원히 빈 카세트로 남게 된다 해도, 역자들을 크게 탓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번역의 역사에서 끝내 빈 카세트로 남게 된 말은 무수히 많으니까요. 오히려 그 번역의 시도를 상찬하는 것이 올바를 것 같습니다. 번역은 한 세상에 또 한 세상을 들여놓아 세상을 입체화하는 엄청난 일이니까요. 란가쿠 이래 일본인들의 번역활동이 일본에(그리고 나중에는 한국에) 유럽 전체를 들여놓아 일본인들의(그리고 이내 한국인들의) 세계인식을 크게 확장시켰듯 말입니다.

번역이 늘 인식의 지평을 넓히겠다는 욕망에서 실천되는 것은 아닙니다. 번역은 때로 일종의 배타적 종족주의, 문화적 국수주의를 연료로 삼기도 합니다. 모국어 순화운동이 그 전형적 예입니다. 일본인들이 '메이시(名詞)'라고 옮긴 영어 낱말 noun을 우리 역시 '명사'라고 옮깁니다. 그러나 언어민족주의자들은 이 번역어를 다시 '이름씨'로 번역합니다. 일본인들이 '도시(動詞)'라고 옮긴 영어 낱말 verb를 우리 역시 '동사'라고 옮깁니다. 그러나 언어민족주의자들은 이 번역어를 다시 '움직씨'로 번역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 이중번역에 커다란 뜻이 있을까요?

물론 개인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민족 수준에서도 자존감은 매우 커다란 심리적 자산입니다. '명사'나 '동사'라는 말이 '메이시'나 '도시'라는 일본어를 그대로 베낀 것은 분명하고, 그것이 언짢아 '이름씨'나 '움직씨'라는 말을 만들어내 쓰고 싶어하는 마음을 깔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름씨'나 '움직씨'가 '명사'나 '동사'보다 '혈통적으로' 한국어에 가까워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이름씨'나 '움직씨'는 한자로 표기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명사'와 '동사'가 '메이시'와 '도시'를 고스란히 베껴낸 것이라면, '이름씨'와 '움직씨'도 '명사'와 '동사'를 고스란히 베껴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두 번째 번역을 통해서 인식의 지평이 조금이라도 넓어졌다 할 수는 없으니까요. 말하자면 '이름씨'와 '움직씨'는 지적 작업의 결과라기보다 말놀이의 결과입니다. '메이시'와 '도시'가 지적 작업의 결과인 것과는 크게 다르죠. 지적 작업에 이르지 못하는 이 말놀이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낱말의 생명력이 반드시 '혈통'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다시 야나부의 말투를 빌려오자면, '명사'와 '동사'는 이제 보석을 가득 채운 카세트입니다. '이름씨'와 '움직씨'는 민족주의자들의 수십 년 열정을 비웃듯 아직도 빈 카세트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언젠가 보석이 담길 거라 자신할 수도 없고요. 

09. 11. 01. 

 

P.S. 칼럼에서 주로 언급되고 있는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는 두 종류의 한국어본이 있지만,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최승언 역의 <일반언어학 강의>(민음사)가 유일하다. 바로 이 책에서 '파롤'의 번역어로 '화언'을 쓰고 있다. 발췌본인 김현권 역의 <일반언어학 강의>(지만지, 2009)에서는 어떤 번역어들을 사용하고 있는지 아직 확인해보지 못했다. 제자들이 받아적은 강의록을 옮긴 <일반언어학 강의>와 달리 뒤늦게 발견된 소쉬르 자신의 노트를 대본으로 한 <일반언어학 노트>(인간사랑, 2007)는 <일반언어학 강의>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독해볼 만한 책이다. 나도 작년쯤 구입만 해놓은 상태이지만.   

  

고종석이 인용하고 있는 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야나부 아키라의 책으론 <번역어 성립사정>(일빛, 2003)이 있다. 그의 다른 책들도 소개됐으면 싶지만(칼럼으로 봐서는 <번역이란 무엇인가>란 책도 있는 듯하니까) <번역어 성립사정>마저 절판된 게 우리의 궁색한 현실이다. 고종석의 <감연된 언어>도 물론 같이 읽어봐야 하는 책이며, 한권 더 덧붙이자면 이연숙의 <국어라는 사상>(소명출판, 2006). 일본에서의 '국어' 개념의 성립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근대 일본의 언어 인식의 근저를 밝히고자 한 책이다. 1996년 이와나미서점에서 출간되어 이듬해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하는 등 일본에서 화제를 모았다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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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ine 2009-11-01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한국의 경우 소쉬르 연구의 깊이는 굉장히 얕은 상황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통해서 랑그, 파롤, 기표등의 용어가 알려지면서 그 개념이 모호해지는 측면이 있는거 같습니다. 사실 라캉은 소쉬르를 추켜새우긴 해도 그가 쓰는 개념과는 안드로메다급으로 다른 의미로 이 개념을 쓰고 있는데 말이죠...

로쟈 2009-11-01 20:37   좋아요 0 | URL
소쉬르보다 라캉이 먼저 소개된 건 아니구요, 국내에서 소쉬르 연구가 라캉 연구보다 깊이가 얕은 것도 아닙니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하지만,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학이 없었다면 라캉의 정신분석학(정신분석학의 언어학적 전회)도 어려웠겠죠...

2009-11-01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1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park6 2010-03-15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민음사)를 읽고 있습니다.

이글을 통해 소쉬르 읽기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요ㅎㅎ

이런 좋은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