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의 날 핵심 일정은 몬타뇰라의 헤세 박물관을 찾는 것이었다. 몬타뇰라가 스위스 시골의 작은 마을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루가노 시의 일부라고 해도 믿어줄 것 같다. 루가노 시는 이탈리아 국경에 가까운 도시로 이탈리아어가 통용된다(알려진 대로 스위스는 다언어 국가인데 독일어 사용자가 인구의 70퍼센트, 프랑스어 20퍼센트, 그리고 이탈리아어 10퍼센트라고 한다). 루가노는 루가노 호를 안고 있는 호반 도시이고 몬타뇰라는 루가노 호수의 전경이 발아래 펼쳐지는 산동네다. 산동네로는 대형차량이 진입할 수 없어서 일행은 버스에서 하차하여 20분 가량 언덕길을 올라갔다.
헤세가 몬타뇰라로 이주한 것은 결혼생활의 위기를 겪고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던 1919년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아내의 정신질환, 그리고 자신의 신경쇠약으로 고통받던 헤세는 융의 제자 자크 랑 박사의 면담치료 덕에 위기를 극복한다. 그 치료담이기도 한 것이 <데미안>(1919)이다. 인생이란 각자가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여정이라는 깨달음을 담고 있다.
가족을 떠나서 홀로 몬타뇰라의 카사 카무치(카무치의 집)으로 옮겨온 것은 그러한 깨달음을 몸소 실행에 옮긴 것이라고 할까. 카사 카무치는 17세기 건축물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개성을 뽐낸다. 헤세는 작은 방 하나에 세 들어 살면서 새로운 삶을 실천한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렸다. 이 시절의 모습이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1919)에 그려진다.
헤세의 몬타뇰라 시절은 거주지를 기준으로 두 시기로 나뉜다. 카사 카무치(1919-1931)와 카사 로사(1931-1962) 시기. 카사 카무치 시기에 헤세의 첫아내 베르누이와 이혼하고 두번째 아내 루트 뱅거와의 짧은 결혼생활도 종지부를 찍는다. <싯다르타>(1922)와 <황야의 이리>(1927), <나르치스와 골드문트>(1930)가 이 시기에 쓰인다. 헤세의 마지막 대작 <유리알 유희>는 카사 로사 시기의 대표작. 니논과의 세번째 결혼생활이 카사 로사에서 이루어진다.
헤세 박물관은 바로 카사 카무치의 부속건물에 위치하고 있다. 미처 몰랐던 사실인데 카사 카무치나 카사 로사나 지금은 모두 개인 소유여서 박물관이 들어서지 못했다. 차선으로 마련된 것이 현재의 박물관이고(말하자면 헤세가 살았던 집의 옆집이다) 1997년에 개관했으니 역사도 생각보다는 짧은 편이다.
헤세 박물관에서 나온 노 여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카사 카무치 주변과 외관, 그리고 박물관의 전시물들을 구경했다. 일부는 이미 사진과 영상으로 보아온 것이어서 친숙했다. 관람을 마치고 단체사진을 찍은 뒤에 일행은 헤세의 무덤으로 가기 위해 언덕길을 내려왔다. 곧바로 가로수가 멋지게 늘어선 아본디오 성당으로 항했으나 성당 부속의 묘지는 도로 맞은 편에 있었다. 성당 묘지라고는 해도 규모가 있는 편이었는데 미리 사진에서 보고온 터라 헤세의 무덤을 찾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번째 아내 니논이 헤세 곁에 나란히 묻혀 있었다.
헤세 일정을 마무리하며 나는 주로 <데미안>의 주제와 문제성에 대해 짧게 강의했다. 스위스문학기행 3일차의 일정이 그렇게 소화되었고 일행은 점심을 먹은 뒤 루가노 호숫가와 구도심 산책에 나섰다. 이탈리아어 지역에 온 만큼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언덕길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해가 지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우중산책 길이 되었다. 핵심 일정을 끝낸 뒤여서 어떤 비가 오더라도 무방했다. 루가노 호수를 바라보며 여행자의 마음도 호수를 닮아가는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