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제목만으로도 저자를 맞힐 수 있다. 그렇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자음과모음)의 저자 사사키 아타루의 신작이다. <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여문책). 문제는 제목만으로는 무슨 책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 힌트는 저자의 관심이 지속적으로 ‘후쿠시마 이후‘에 놓여 있다는 것 정도다.

˝1755년에 발생한 리스본 대지진 이후 대지, 이성, 토대를 뜻하는 ‘그룬트Grund’, 즉 ‘근거’가 흔들렸음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 더럽혀진 대지에 다시 하나의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나아가 텍스트에 의한 혁명, 비판적 성찰을 근간으로 한 새로운 예술 창조, 진정한 민주제의 확립 등을 설파한다.

전작인 <제자리걸음을 멈추고>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강연, 기고, 대담, 철학적 에세이 등을 묶어 펴낸 것으로, 이번 책에서는 저자 자신에 관한 에피소드가 상당히 많이 담겼다는 차이점이 있어 색다른 재미를 더한다.˝

주저인 <야전과 영원>(자음과모음) 이후의 책들로는 <제자리걸음을 멈추고>와 <춤춰라 우리의 밤을 그리고 이 세계에 오는 아침을 맞이하라> 등이 소개되었는데 거기에 덧붙여 <이 나날의 돌림노래>도 근간으로 예고돼 있다. 더 밀리기 전에 사사키 아타루도 ‘처리‘해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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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일정이 아직 남아 있기는 하지만 한주간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난 뒤의 피로와 방심 속에서 ‘이주의 발견‘을 고른다. 레이첼 코벳의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뮤진트리).

제목에서 릴케를 떠올렸다면 시를 좀 읽은 축에 속한다(릴케의 시 ‘표범‘에 나오는 구절이다). 책은 릴케와 로댕의 삶을 같이 다른 일종의 듀오그라피이고, ‘릴케의 로댕, 그 절대성과 상실에 관하여‘가 부제다.

˝이 책은 육십대의 합리적 프랑스인 로댕과 이십대의 낭만파 독일인 릴케. 두 사람의 삶이 얼마나 긴밀하게 얽혀 있었고, 한 사람의 예술적 진전이 어떻게 상대방의 것을 따라갔는지, 너무나 대조적인 두 성향이 어떻게 상호보완적으로 이어졌는지를 기록한 다층적이고 서정적인 탐구서이다.˝

릴케의 로댕론을 기본 자료로 해서 따라가볼 만하다. 10월이 다 지나갔으니 어렵겠지만 11월에는 겨울이 오기 전에, 아주 오랜만에 릴케도 좀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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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올라오는 길에 시와 소설을 같이 쓰는 임솔아의 첫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문학과지성사)을 읽었다. 보통 시집은 최고의 시 한편만 고른다는 기분으로 읽는데, 그러면 밑지지 않으면서 빨리 읽게 되는 이점이 있다. 이 시집에서는 ‘모래‘가 그 한 편이다.

제목대로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이 나오는 시도 들어 있기는 하지만(그들은 ‘예보‘라는 시에 나온다), 내 마음을 끈 것은 ˝오늘은 내가 수두룩했다˝로 시작해서 ˝오늘은 내가 무수했다˝로 마무리되는 시이다.

오늘은 내가 무수했다.
나를 모래처럼 수북하게 쌓아두고 끝까지 세어보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말은 얼마나 오래 혼자였던 것일까.

시의 마지막 연인데 말장난에다 정서를 얹는 스킬이 이 시인의 장기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그런 장기가 제대로 발휘된 시는 많지 않다. ‘모래‘는 표본이 아니라 예외에 가까운 시이다. 처음 세 연을 읽어 본다.

오늘은 내가 수두룩했다.
스팸 메일을 끝까지 읽었다.

난간 아래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물방울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떨어지라고 응원해주었다.

내가 키우는 담쟁이에 몇 개의 입이 있는지
처음으로 세어보았다. 담쟁이를 따라 숫자가 뒤엉켰고 나는
속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기본적으로는 언어유희적 착상에 의해 이끌어지는 시이지만 어떤 정서를 건드린다(주로 동사들이 그런 환기력을 갖는다). 시의 각 연은 모래알처럼 별다른 연관 없이, 끈끈함 없이 나열돼 있는데, 보통은 흠이 되지만 이 시는 제목이 ‘모래‘이기에 그 또한 효과적인 전략으로 간주할 수 있다. 5연에 가서, ˝깁스에 적어주는 낙서들처럼/ 아픔은 문장에게 인기가 좋았다˝는 또 얼마나 재치 있는 진술인가.

그런가 하면 너무 나이브해서 당혹스런 구절도 만나게 된다. ‘아름다움‘이란 시의 한 연이다.

이곳을 떠나본 자들은
지구가 아름다운 별이라 말했다지만
이곳에서만 살아본 나는
지옥이 여기라는 걸 증명하고 싶다.

시집 전체에서도,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시에서도 맥락을 찾기 어려운 돌발적인 진술이다. ‘포즈‘로서도 점수를 주기 어렵다.

기린이 보고 싶어서
기린을 보러 간다

기린은 보지 못하고
기린을 만든다

(...)

기린에 기린이 없어서
지구에 지구가 없어서
사람에 사람이 없어서
좋다

(...)

세계가 세계로부터 헛걸음을 한다
나는 나를 모형들과 함께 세워둔다 (‘모형‘)

전문을 다 적지는 않았지만 다 적더라도 별로 나아지지 않는 시다. 이렇게 ‘헛걸음‘ 하도록 만드는 ‘시‘까지도 시집에 포함하게 되면 시인의 역량뿐 아니라 저의까지도 의심하게 된다(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시집에는 그 흔한 해설도 붙어 있지 않은데 혹 그런 이유에서인가란 생각도 들었다.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로서 ‘모래‘와 괴괴한 시들의 차이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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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 100주년 관련서가 계속 나오고 있는데, 이번주에는 국내 학자들의 논문모음집이 <다시 돌아보는 러시아혁명 100년>(전2권, 문학과지성사)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다시 돌아보는 러시아혁명 100년>은 오늘날의 시점에서 러시아 혁명기 당대를 새롭고 다르게 조망하고자 했다. 총 두 권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 최근 수년간 학계와 여러 토론 공간에서 발표된 논문과 평론 들이 실렸는데, 서로 상치되는 해석적 경향조차 포함될 정도로 다양한 입장과 관점을 두루 통합하여 제시했다.

1권에는 혁명 해석사를 한눈에 정리, 분석한 한정숙의 글에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면면을 추적한 심광현의 글까지, 다양한 주제와 관점을 보여주는 정치․사회 분야의 논문 10편이 실렸다. 2권에는 러시아 혁명이 문학에 불러온 변화의 과정을 조망한 박종소의 글부터 레닌과 스탈린 시대의 포스터 속 레닌 이미지의 특징과 변화를 분석한 김정희의 글까지, 러시아 혁명과 예술의 관계를 다룬 인문․예술 분야의 논문이 실렸다.˝

안 그래도 20세기 러시아문학 강의를 하면서 러시아혁명사를 입에 달고 다니는데 국내 학자들의 최신 관점과 성과를 한 눈에 들여다볼 수 있게 돼 반갑다. 관심을 더 확장하면 <1905년 러시아혁명과 동아시아 3국의 반응>(그린비)까지도 챙겨볼 수 있겠다.

이달과 다음 달에는 관련 학회행사들도 크게 개최될 터인데, 그 결과물은 아마도 내년에나 출간되지 않을까 싶다. 내년은 작가로는 솔제니친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 겸사겸사 절판된 <수용소군도>(완역본)과 <제1권>도 다시 나오면 좋겠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당분간은 러시아혁명 얘기가 끊이질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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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반기의 다재다능했던 작가로 시, 소설, 희곡 모든 장르에 걸쳐 작품을 남긴 알프레드 드 뮈세의 대표 소설 <세기아의 고백>이 새 번역본으로 나왔다. 작년에 나온 것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판이고 이번에 나온 건 한국문화사의 학술명저번역총서판이다. 같은 작품의 번역본이건만 책값은 (양장본을 기준으로 해도) 두 배 이상 차이가 나서 과연 번역도 그만한 차이에 값하는지 궁금하다.

찾아보니 뮈세의 작품은 <세기아의 고백> 외에도 시선집과 희곡집이 더 나와 있다. 희곡 가운데서는 <마리안의 변덕>(연극과인간)이 눈에 띄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20세기 프랑스 희곡선‘ 시리즈에 들어가 있다. 역자는 <세기아의 고백>(한국문화사)을 옮긴 김도훈 교수로 뮈세 전공자다.

언젠가 적었는데 뮈세에 대한 관심은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에 기인한다. 레르몬토프가 영향을 받은 작품 가운데 하나여서다. 기회가 닿으면 두 소설을 비교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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