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를 정리하던 중 비공개로 예전에 스크랩해놓은 글 가운데 '라캉과 라클라우'라는 게 있어서 '로쟈의 지젝'으로 옮겨놓는다. 몇년 전 글이지만 '라캉주의 좌파'에 대해 글을 쓸 일도 있어서 요긴한 참고가 된다. 필자는 스타브라카키스의 <라캉과 정치>(은행나무, 2006)의 역자이며, 주로 라클라우-스타브라카키스와 라캉-지젝의 주장을 대비해서 정리해주고 있다. '정리'라곤 하지만 내용은 다소 전문적이다.      

 

담비(07. 05. 27)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급진적 정치철학으로

스타브라카키스의 저서 『라캉과 정치』의 영어판 부제는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기(thinking the political)’이지만 보다 더 정확한 부제를 달면 ‘라클라우와 라캉’ 정도가 될 것이다. 즉 이 저서는 라클라우를 정신분석화하고 있으며, 탈구나 헤게모니와 같은 라클라우의 개념을 통해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정치철학화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러한 시도만이 유일한 정신분석학의 정치철학화인가?’ ‘왜 정신분석학인가?’ 왜냐하면 푸코의 권력이론이나 들뢰즈·가따리의 정치이론과 같이 정신분석학에 근거하지 않거나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는 급진적인 이론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그것이 이 저서를 이론과 정치의 공간에서 맥락화하며 그 맥락화 속에서 보다 정확하게 이 저서가 담고 있는 이론적·실천적 함의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질문과 관련된 논쟁의 결절점을 제공해주는 (곧 도서출판b에서 번역 출간될)『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공저자인 라클라우와 버틀러, 지젝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선 ‘왜 정신분석학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버틀러와 지젝이 대립하고 있으며, 『라캉과 정치』가 제시하는 결론에 대해서는 라클라우와 지젝이 대립하고 있다. 그리고 이 논쟁들은 라클라우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는 『라캉과 정치』 안에서 다시 반향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라캉과 정치』를 맥락화하는 데 매우 유용한 논의들을 제공해준다. 우선 스타브라카키스와 지젝의 대립을 보여주는 두 언급을 보자.

급진적 민주주의와 라캉의 윤리
스타브라카키스는 민주주의의 역설로서 ‘동유럽과 남아프리카에서의 민주주의의 성공’과 서구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침울한 실망감을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 지젝은 동유럽에서의 민주주의가 오히려 근본적인 민족주의를 자신의 이면으로서 불러냈다고 지적한다. 이 서로 다른 지적은 두 이론가의 주장 모두 정신분석학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스타브라카키스는 사회주의를 포함한 모든 유토피아 정치는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그는 환상과 증상의 변증법이라는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와 대타자는 모두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주체는 환상을 통해서 대타자의 결핍을 메움으로써 자신의 결핍을 메우려 한다. 이를 라클라우의 용어로 번역하면 적대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사회적 환상을 통해 부인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적대의 한 담지자는 완전한 사회의 실현을 방해하는, 그렇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할 방해물(증상)로 환상화된다. 이런 맥락에서 스탈린의 굴락과 나치의 아우슈비츠는 유토피아 정치의 어두운 이면이다.  



그렇다면 이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통과하면서도 급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획이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스타브라카키스는 라클라우와 무페의 급진적 민주주의라고 대답하고 있다. 왜냐하면 급진적 민주주의는 사회적 적대와 그로 인한 사회적 탈구의 논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유일한 정치기획이며,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정치기획이기 때문이다. 라캉의 윤리적 행위가 환상의 가로지르기라면, 급진적 민주주의의 토대는 바로 이 윤리학에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윤리적 행위란 유토피아적인 조화의 윤리학을 넘어선 사회적 결핍의 제도화이며, 라클라우와 무페의 용어로 하자면 민주주의 혁명으로 창출된 권력의 공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정치의 유일한 이름은 오로지 라클라우와 무페 식의 헤게모니 투쟁이다.

지젝은 이와 같은 논의는 정치를 자유민주주의적 틀 안에 가두어버리고 진정한 행위를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라캉의 윤리적 차원을 잘못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스타브라카키스의 행위란 실재 앞에서의 항상 실패한 행위라는 것이다. 지젝은 행위를 ‘발생한 불가능’으로서 정의한다. 여기에서 불가능성이란 불가능성으로서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상징적 질서의 좌표 내부’에서 불가능한 것이라는 의미이며, 지젝이 예로 들고 있는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성과가 돌아가는 마이너스 성장률’과 같은 것들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행위란 사회-상징적 질서의 재정의 과정이다. 이러한 지젝의 논의는 어떤 점에서 라클라우와 버틀러와 다른 것일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지젝이 제시하는 것은 역사성(historicity)과 비역사적인 중핵 간의 변증법이다. 이 변증법의 제시를 통해서 지젝은 라클라우와 버틀러의 입장을 모두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심이 되는 개념은 바로 ‘보편성’ 개념이다.

텅 빈 보편성과 근본적 불가능성의 문제
라클라우에 따르면 보편성이란 그 내용이 선험적으로 결정될 수 없으며 항상 어떤 특정한 내용에 의해 헤게모니화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이 장소는 헤게모니라는 우연성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계급본질주의와 같은 정치적 본질주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리고 버틀러에 따르면 보편성이란 그 내용이 역사적인 배제/포함의 과정 속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특히 비역사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의한 성차의 구별이라는 본질주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즉 성차란 섹슈얼리티라는 본질적인 차원이 아니라 젠더라는 수행적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이것이 정신분석학적 본질주의를 넘어선 성차의 정치이다.

여기에서 지젝은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이들이 말하는 보편성 그 자체가 출현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성차의 우연성이든 정치의 우연성이든 이 모두는 특정한 역사적 형식이며, 이 형식이 출현하기 위해서 원초적으로 배제되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둘은 텅 빈 보편성을 헤게모니화하는 특수한 내용을 분석할 뿐 이 보편성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분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역사적이라는 것이다.

지젝은 이 두 가지 관계를 적대와 차이에 종속된 적대(또는 무페의 용어로는 대항의 논리로 번역된 적대)의 변증법으로 파악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근본적인 성적 적대란 ‘실재적으로 불가능한 것’(즉 외상적인 것)이며, 이 실재적 불가능성에 대한 각기 다른 대응을 통해 남/녀의 성차가 상징적으로 구성되고, 또는 이 불가능성의 원초적인 억압을 통해 텅 빈 보편성을 헤게모니화할 수 있는 장이 열린다는 것이다. 지젝의 논점은 정치적 적대 역시 이와 마찬가지의 논리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며, 결국 이 둘이 누락한 문제는 바로 이 (불)가능성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되는, 즉 사회적인 것을 구조화하는 전체적인 원칙이라는 것이다.

억압된 역사적 유물론의 회귀?
흥미롭게도 지젝의 행위 개념과 정치경제학과 계급투쟁이 지젝의 논의에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만약 근대 민주주의가 전근대사회와는 전혀 다른 사회조직화 원리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정초적 행위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지젝은 이 근대 민주주의(의 출현의 조건)를 자유와 평등에 대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논의와 연결시키고 있으며, 이와 동일한 논리로 라클라우와 무페의 다양한 주체성에 기반한 포스트모던 정치를 후기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한 지젝은 계급투쟁을 라클라우적 용어로 차이의 체계를 가로지르는 적대로 재개념화하며, 이러한 계급적대에 대한 분석의 누락은 포스트모던 정치가 자본주의를 탈정치화하는 징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지젝은 반자본주의적인 행위를 기존의 상징적 공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 즉 유토피아(u-topic)를 열어나가는 행위로 정의한다. 그러나 아직 지젝은 이러한 주장에 대한 정교한 이론화 작업을 내어놓고 있지 못하다. 만약 지젝의 입장에 동의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이병주 경희대 신문방송학 강사)  

10. 06. 26.  

P.S. 지젝 자신의 책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학에 관한 책도 연이어 출간되고 있기에 마지막 문단에서 필자가 제기한 '이론적 작업'에 대한 요구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면 또 애써 궁리해봐야겠고... 한편 지젝의 신작 <종말의 시대에 살아가기>(2010)는 어쩐 일인지 알라딘에서는 검색이 되지 않는다. 하는 수없이 아마존으로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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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7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7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지 2010-06-27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찾아보겠습니다^^

2010-06-28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8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로이트 관련서를 대출하러 도서관에 갔다가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한겨레를 사들었다. 새로 나온 책 몇 권과 안면을 트는 사이에 눈길을 사로잡는 그림이 있어서 주목하게 됐는데, <헨젤과 그레텔>(별천지, 2010) 새 번역본의 그림이었다. 국내에서도 영화로 만들어지고 오페라로 무대에 올려질 만큼 유명한 이 작품의 비밀은 그간에 '새엄마'로 번역되던, 헨젤과 그레텔의 엄마가 '친엄마'란 (불편한) 사실이다('새엄마'인 것이 진화심리학적으로는 더 말이 되긴 한다). 이번 번역본에서는 그걸 살렸다는 기사도 참고할 만하다(절충안으로 '못된 엄마'라고 한 모양이다). 사실 알고 보면 동화 중의 상당수는 '잔혹동화'라는 걸 새삼 일깨워준다. 원작의 비밀이 궁금하신 분들은 다시 손에 들어봐도 좋겠다.   

개인적으론 그림이 마음에 든다. 그림책 화가 주자네 얀센(Susanne Janssen)의 작품으론 <빨간 모자와 늑대>(마루벌, 2004)도 소개돼 있다(정말로 이름을 '주자네'라고 읽어주는지?). 저자가 '수잔네 얀젠'으로 표기됐으니 검색이 될 리 없다. '주잔네 얀센'이란 저자명으론 <피자를 구워주는 피아노 선생님>(비룡소, 2007)도 출간돼 있다. 일관성 없는 고유명사 표기가 불필요한 혼란을 야기시키는 사례다.    

한겨레(10. 06. 26) 오누이를 버린 건 누굴까 

헨젤과 그레텔을 내다 버린 것은 누구? 숲속에 버려진 어린 오누이가 갖은 기지를 발휘해 결국 집으로 돌아와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의 <헨젤과 그레텔>은 19세기 독일의 언어학자 야코프 그림과 빌헬름 그림 형제가 펴낸 <그림 동화집>의 한 이야기다. <그림 동화집>은 전해내려오던 민담들을 채록하여 쓴 것인데, <헨젤과 그레텔>은 중세 유럽에 만연했던 아동 유기 풍조가 반영된 것이다. 그림 형제는 <헨젤과 그레텔> 얘기를 통해 그런 세태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림 형제가 쓴 <헨젤과 그레텔>에서 가족이 굶주릴 처지에 놓이자 어린 헨젤과 그레텔을 버리도록 부추긴 이는 새엄마가 아니었다. 망설이는 아빠를 설득한 것은 엄마였다. 그동안 그림 형제의 <헨젤과 그레텔>을 그림책이나 동화로 펴낸 편집자·번역자들은 헨젤과 그레텔의 엄마를 차마 엄마라고 옮기지 못했다. 대신 ‘새엄마’니 ‘계모’로 번역했다. 새엄마는 나쁘다는 편견을 아이들에게 심는 데 번역판 <헨젤과 그레텔>이 한몫한 셈이다. 이는 비단 한국어 번역만이 아니다. 더러 유럽 언어권에서도 그러했다. 



별천지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한 그림책 <헨젤과 그레텔>은 처음으로 엄마를 엄마라 번역한 그림책이라 할 것이다. 그래도 차마 그냥 ‘엄마’로 옮기진 못하고 ‘못된 엄마’로 번역했다. 출판사 쪽은 그림 형제의 원작이 지닌 문학적 숨결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원작에 충실하게 ‘(못된) 엄마’로 번역했다고 밝혔다. 이 <헨젤과 그레텔>에는 독일의 그림책 화가 주자네 얀센(46)이 불타는 빨강과 칠흑 같은 검정을 주조로 형상화한 헐벗은 오누이와 굶주려 뼈만 남은 부모의 모습이 대담한 화폭에 담겨 있다.

그림 형제의 <헨젤과 그레텔> 속 악역은 엄마와 함께, 오누이를 잡아먹으려는 숲 속 마녀다. 악당을 모두 여성으로 설정한 반면, 아빠는 무능할지언정 ‘착한 아버지’라는 구도다. 두 번이나 아내와 합작하여 자식들을 버렸으며 아내가 (아마도 굶어) 죽고 나서도 살아남아 마녀의 보물을 갖고 돌아온 오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그는 과연 착한 사람일까. 동화 속에서 누군가는 착한 인물이어야 하고 누군가는 악당이어야 한다면, 약자인 여성을 ‘마녀 사냥’처럼 희생양 삼던 중세 유럽의 풍조를 이 또한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6살부터.(허미경 기자) 

10. 06. 26.  

P.S. 얀센의 그림을 조금 더 찾아봤다. 아이들은 좀 무서워하지 않을까 싶다. '6살부터'가 아니라 '16살부터'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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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6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6 1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7월로 넘어가기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이 남아 있지만, 쾌락원칙을 따르는 마음은 또 얼른 '본격적인' 방학으로 넘어갔으면 한다. 방학이라고 해야 대학강의만 없을 뿐이고 다른 일은 두 배가 되지만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에 대한 '로망'을 아무래도 무시하기 어렵다. 그 7월에 읽을 만한 책을 골라본다. 여름이 독서의 계절이라면 7월은 그 정점이 아닐까. 이달부터는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선정한 책들의 추천사가 한 줄로 짧아졌다. 덕분에 나도 '슬림'한 페이퍼를 올려놓을 수 있겠다.   

1. 문학  

신경숙 작가가 고른 책은 마종기 시인의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비채, 2010). "모국어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으로 투명한 서정의 언어를 선보이는 마종기 시인의 시와 시작(詩作)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는 소개다. 시집은 지난 봄에 <하늘의 맨살>(문학과지성사, 2010)이 출간됐다. 루시드폴과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아주 사적인, 긴 만남>(웅진지식하우스, 2009)도 이를 테면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이다.  

 

사실 마종기 시인의 전집은 환갑을 맞은 해이던 지난 1999년에 나온 바 있다. 이후로 시인은 세 권의 시집을 더 펴냈으니 '전집'이 무색하게 됐다. 칠순을 넘긴 시인의 열정이 아직 열일곱 살 소년 같다.   

2. 역사 

이덕일 소장이 추천한 책은 김시혁의 <통아프리카사>(다산북스, 2010). "월드컵이 열리는 아프리카 대륙의 역사를 우리 시각에서 평이하게 서술하여 읽어볼 만하다."는 것. 이건 안 읽어봐도 알 수 있는 추천 사유다. 아프리카사의 경우는 이미 한 차례 붐이 있었다. 분위기를 보니 '한비야 추천도서 목록'에 포함돼 베스트셀러가 된 루츠 판 다이크의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웅진지식하우스, 2005)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한 권 더 보탠다면 존 아일리프의 <아프리카의 역사>(이산, 2002)도 통사다. 월드컵 기간에 아프리카의 역사 한 권 정도 떼는 것도 '에티켓'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3. 철학 

김형철 교수가 추천한 철학분야의책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 알라딘에선 따로 소개가 필요없는 책으로 인문서 가운데는 올 상반기 최고 베스트셀러일 듯싶다. 속칭 '대박'이 난 책. 추천사유는 "일상생활에서 벌어질 수 있는 정의의 딜레마에 대한 도전적인 개설서로 매우 흥미로운 책"이라는 거. 아마도'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라는 소개가 독자들에게 어필하지 않았나 싶다. 같은 저자의 책인 <공동체주의와 공공성>(철학과현실사, 2008)에는 전혀 손길이 미치지 않는 것도 그런 심증을 갖게 한다. 어깃장을 놓자면 스테판 뮬홀의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한울, 2007)까지는 읽어주셔야 샌델을 포함한 '공동체주의'의 윤곽을 잡을 수 있다. 경로야 어찌됐던 간에 '정의'와 '도덕'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모을 수 있다면 지극히 다행스럽다.   

4. 정치/사회 

강정인 교수가 추천한 책은 <온 국민 주치의 제도>(시대의창, 2010). "우리나라 의료 체계의 문제점을 알기 쉽게 잘 지적하면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 추천사유다. 미국도의료 보험제도가 약간 바뀌었기에 좀 지나간 얘기일 수도 있지만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것은 역시나 마이클 무어의 <식코>(2008). 그리고 또 마침 출간된 책이 <또 하나의 혁명쿠바 일차진료>(메이데이, 2010)다. "쿠바에서 ‘건강형평성’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정치적인 것이 되었으며 이 개념을 제도화시켜 전 세계 유일한 일차의료제도를 만들어냈는가를 보여주는 책". 도입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영리병원 문제를 다룬 책도 출간되길 기대해본다(영리병원의 문제점을 지적한 기고칼럼은 http://h21.hani.co.kr/arti/culture/science/27588.html 참조).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추천한 경제/경영서는 <새뮤얼슨 교수의 마지막 강의>(YBM Sisa, 2010). "현대 경제학계의 거인 새뮤얼슨 교수의 경제 평론을 모아서 펴낸 책으로 대가다운 안목이 돋보이는 평론에서 경제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우게 한다."고. '평론'이라고 하지만 분량상 '칼럼' 모음집 성격의 책이다. 특이한 건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라는 새뮤얼슨의 책이 국내에 소개된 게 별로 없다는 점. 대표작인 <경제학>이 1959년부터 몇 차례 번역된 듯싶지만, 작년에 19판이 나온 원저를 따라가기엔 역부족이다. 평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다고 해야 할까. 공저인 <위대한 경제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지식산업사, 2008) 정도가 아직 절판되지 않은 책이다(서문만 쓴 책이지 않을까 싶다).   

6. 과학 

최영주 교수가 고른 과학분야의 책은 빌 브라이슨의 <거인들의 생각과 힘>(까치, 2010). "자신의 분야 이상을 뛰어넘는 창조적 생각으로 이 세상을 이끈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이 추천사유다. 저자가 빌 브라이슨으로 뜨지만 그가 서론과 편집을 맡았고 나머지는 영국의 대표적인 과학자들이 쓴 책으로 영국 '왕립학회 창립 350주년 기념 과학 에세이집'이다. 왕립학회의 역사가 곧 근대과학사라면 '대단한' 일이긴 하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빌 브라이슨의 대표작 <거의 모든 것의 역사>(까치,2003)을 다시 손에 들 수도 있겠다. 시간이 없으신 문들은 일러스트레이션판으로. 시간이 남는 분들은 아예 원서로.    

7. 예술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이태호의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생각의나무, 2010). "옛날 화가들이 다양한 재료 위에 그려낸 우리 땅의 모습이 집성되어 매우 흥미롭고 유익한 책"이라는 평이다. 그러고 보니 흥미로운 주제고, 진작에 이런 책이 나오지 않은 게 이상하다. 미술사가인 저자는 <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생각의나무, 2008)란 전작도 갖고 있다. '시리즈'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 싶다. 검색해보니 <미술로 본 한국의 에로티시즘>(여성신문사, 1998)이 절판된 책으로 뜬다. 때가 안 맞었던 듯한데, 포맷을 좀 바꾸면(표지라도) 재출간해도 되지 않을까싶다.   

8. 교양 

이한우 기자가 고른 교양서는 스티븐 로져 피셔의 <문자의 역사>(21세기북스, 2010)다. "지식 전달의 근본 매체인 문자의 탄생과 변화를 추적하며, 특히 한글의 세계적 위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는 게 추천사유다. <문자의 역사>란 타이틀로는 이전에도 두어 권 책이 나온 바 있지만, 가장 탄탄해 보인다.     

9. 교양 

손수호 논설위원이 추천한 교양서는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의 <축구란 무엇인가>(민음인, 2010). "전 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가 된 축구의 역사와 흥행에 성공한 비밀을 해독하고 있다"고. <끝나지 않는 축구 이야기>(북마크, 2010)나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 선수>(왓북, 2010) 같은 국내서도 눈에 띈다. 일단 '마크'만 해놓는다.    

10. 정신병 

내 맘대로 고르는 주제는 '정신병'이다. 그건 무엇보다도 '가장 유명한 정신병자'의 파울 슈레버의 회상록이 번역돼 나왔기 때문이다. <한 신경병자의 회상록>(자음과모음, 2010). 프로이트부터 벤야민, 라캉, 들뢰즈/가타리, 지젝, 카네티, 샌트너 등의 지성인들을 매혹시킨 바로 그 회상록이다. 나는 영역본과 샌트너의 연구서만 갖고 있었는데, 좀 여유를 찾으면 이제 이 기이한 정신병의 세계로 들어가볼 수 있겠다.  

   

그러러면 들뢰즈/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도 다시 나올 필요가 있다. 나도 사실 '슈레버'란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앙띠 오이디푸스>의 서두 덕분이었다. 푸코가 재판기록과 진술을 편집해놓은 <나, 피에르 리비에르>(앨피, 2008)도 이 참에 같이 읽어볼 수 있겠다. 피에르 리비에르는 젊은 농부로 1835년 6월 3일, 프랑스 노르망디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모친과 누이 그리고 남동생을 살해한 존속살해범이다. 절판된 책으론 엽기적인 '파팽 자매' 이야기를 다룬 <잔혹과 매혹>(이제이북스, 2005)도 같은 범주로 분류될 수 있는 책이다. 간단한 사건 개요는 이렇다.  

1933년 2월, 프랑스의 시골 도시 르 망에서 하녀로 일하던 한 자매가 주인 모녀의 눈알을 뽑아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눈알을 다 뽑은 뒤 자매는 망치로 주인 모녀의 머리를 때리고, 부엌칼로 몸통과 다리를 베었다. 일을 마친 자매는 범행을 은폐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다락방에 있는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웠다. 그리고 얼마 후에 들이닥친 경찰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당했다.



이 기이한 사건이 다양한 담론들을 생산해낸 건 당연한 일. 장 주네는 희곡 <하녀들>을 썼고(사진은 공연 이미지), 몇 차례 영화화되기도 했다. 여하튼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엔 이런 책들도 읽어볼 수 있겠다는 것.   

10. 06. 26.  

P.S. '7월의 읽을 만한 고전'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이 역시 우연찮게도 존속살해 사건을 다루고 있군. 개인적으론 한겨레교육문화센터의 강의도 예정돼 있어서 다시 읽어봐야 할 작품인데, 이번엔 민음사판으로 읽어볼 생각이다. 7월초엔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죄와 벌>, 그리고 7월말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그런 게 여름나기용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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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6-26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보면 전 '율 브리너'가 먼저 생각나곤 해요.(역시 활자보다 영상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티를 팍팍내고 있죠.)

로쟈 2010-06-26 15:32   좋아요 0 | URL
네, 그나마 요즘 학생들은 율 브리너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sophie 2010-06-26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하녀들이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던 거군요..

로쟈 2010-06-26 15:32   좋아요 0 | URL
네,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 더 있을 텐데, 소개된 건 장 주네뿐입니다...

2010-06-26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6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모사케르 2010-06-28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겨레 문화센터에 수강신청했습니다. 어떤 책을 먼저 읽어야 하는지.. 오랜만에 들어와서 커리큘럼 안내가 어디있는지 모르겠어요..

로쟈 2010-06-28 15:23   좋아요 0 | URL
http://blog.aladdin.co.kr/mramor/3790488 를 참고하시길.^^ 그냥 갖고 계신 책으로 읽어도 무방합니다...
 

아무래도 월드컵 기간이라 출판계와 서점계가 불황이라고 하는데, 그와 무관하게 개인적으론 주변에 쌓아놓고 있는 책들의 높이가 가속도가 붙은 듯이 올라가고 있다. 어제오늘만 하더라도 수중에 넣은 책이 열댓 권이 넘으니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거기에 포핟돼 있는 책이 토니 클리프의 <레닌 평전>(책갈피, 2010)이다. 전체 4부작 가운데, 3권이 이번에 나왔다. 로버트 서비스의 <레닌>(시학사, 2001)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자세한 평전이어서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토니 클리프는 트로츠키 전기 4부작도 갖고 있다). 일단은 어떤 책인지 소개기사를 참고하도록 한다.   

 

세계일보(10. 06. 26) 평등국가 꿈꾼 이상주의자 

칼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이 최초로 국가 체제에 적용됐던 소련은 이미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로 인해 혁명 전후의 러시아나 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레닌에 대한 논의조차 하지 말아야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가급적 레닌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고 애썼다. “스탈린주의가 레닌을 계승한 것처럼 전해지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레닌은 스탈린의 폭압적 정권 쟁취를 비판했고, 스탈린 같은 폭압적 지배계급이 러시아를 지배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노동자 계급이 평등하게 국가를 건설해 이상 사회를 펼치는 것을 꿈꾼 이상주의자였다.”

레닌은 죽기 전 스탈린과 끊임없는 노선 투쟁을 벌였다. 레닌은 노농감찰부를 당 기구에 구성해 당의 관료화와 당의 지배 계급화를 저지하려 애썼다. 레닌의 머리에는 ‘옛 소련식 팽창주의’는 없었다. 동유럽에 폭압적인 사회주의 체제를 이식하고 확산하려는 정책은 아니었다. 레닌은 불가피한 경우 폭력적 수단을 동원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스탈린처럼 탱크를 보내 동유럽을 공산화한다는 야심은 없었다.

저자는 “레닌은 진정한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소련이 무너진 것을 보고 기뻐했을 것이다. 자신의 동상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도 진심으로 기뻐했을 것이다. 소련은 사회주의 탈을 쓴 국가자본주의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레닌 역시 노동자들이 단결해 평등하고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이상론과, 필요하다면 폭력을 수반해야한다는 국가혁명론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레닌은 스탈린과는 분명히 다른 평등하고 이상적인 국가를 꿈꿨지만 건설 방법에는 한계를 노출하고 있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동안 출간된 많은 레닌 평전들은 레닌을 당대 현실을 초월한 성인처럼 묘사하고 그의 말과 글을 종교 경전이나 교리처럼 떠받들고 있지만 실은 대부분 아전인수격 해석에 가깝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이 책이 레닌의 장점과 정치적 위대성을 인정하면서도 러시아와 유럽의 다양한 사료와 문헌을 바탕으로 그의 오류와 한계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저자의 이 같은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정승욱 기자)  

10. 06. 25. 

P.S. '레닌 읽기'에 대해선 리스트를 만들어놓은 적이 있기에 따로 적지 않는다. 기회가 닿으면 조금 더 체계적으로 읽고 싶지만 당장은 계획일 뿐이다. 그럼에도 토니 클리프판 레닌 평전의 마지막 권 <볼셰비키와 세계혁명>이 조만간 출간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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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6-26 14:54   좋아요 0 | URL
토니 클리프를 그냥 저널리스트라고만 소개하다니 좀 이상하네요.유명한 트로츠키 주의자라고 소개해야 하는데...아마 기자가 저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나봐요.

로쟈 2010-06-26 15:27   좋아요 0 | URL
저자 소개에 '저술가이자 저널리스트'로 돼 있어요. 저도 '트로츠키주의자'로 알고 있었는데, 국가자본주의론을 주장하면서 '정설 트로츠키주의'와는 결별한 걸로 돼 있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06-26 21:42   좋아요 0 | URL
클리프의 저서 중 <소련국가자본주의>라는 책이 있는데 트로츠키의 소련체제 해석론과 공통점이 있느냐 여부로 이런 저런 논쟁이 있었습니다.우리나라에서는 정성진 씨가 이 분야의 전문가인데 정 씨 자신이 클리프가 주도한 사회주의노동당 계열이라서...우리나라 트로츠키 주의자들도 이쪽 계열이 강하지요.

루체오페르 2010-06-27 12:36   좋아요 0 | URL
공산주의자들이 이 땅에 와서 지금을 보면 참 만감이 교차할듯 싶습니다.
완전한 평등이라...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너무 몰랐던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류 역사 이래 단 한번이라도 성공한적 있었던지, 앞으로도 영원히 불가능할듯...

로쟈 2010-06-27 15:11   좋아요 0 | URL
지금 이대로 지속할 수는 없다는 판단이 중요한 것이죠.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구요. '본성'을 고려한 다윈주의 좌파적 기획도 있을 테고, 본성을 '개선'해야 한다는 기획도 가능하겠지요...

루체오페르 2010-06-27 19:30   좋아요 0 | URL
로쟈님 댓글은 항상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또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내일자 경향신문에 실은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오후에 일이 있어서 오전에 바쁘게 작성하여 보낸 원고인데, 매번 턱걸이하는 기분이 든다. '권장도서' 문제를 빌미 삼아 '몰상식한' 현실에 대한 소감을 간단히 적었다.     

경향신문(10. 06. 22) [문화와 세상]‘유해한 책’ 과 ‘유해한 현실’  

도쿄대 교양학부 교수들이 쓴 <교양이란 무엇인가>란 책을 읽다 보니 ‘읽어서는 안되는 책 15권’이란 항목이 눈에 띈다. 일본에도 우리처럼 아직 ‘불온도서’라는 게 있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아직 자아가 확립되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회복 불가능한 사태’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읽어서는 안 된다’고 따로 골라놓은 것이다. 물론 이런 목록은 거꾸로 ‘한번 읽을 테면 읽어보라’고 광고하는 의미도 갖는다. 2008년에 국방부 불온도서가 베스트셀러가 된 예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금지한 책의 목록에는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과 셀린의 <밤 끝으로의 여행>,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이 포함돼 있다. 읽다 보면 숨이 막힐 것 같다는 게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대한 평이고, 순진한 영혼을 전부 태워버릴 수도 있는 책이라는 게 <차라투스트라…>를 읽지 말도록 권유하는 이유다.

그런 금지도서 목록과 반대되는 것이 권장도서 목록이다. 각 대학별로 제시하는 필독 고전목록 외에도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그런 목록을 들여다보면 문득 권장도서 목록은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일단은 책이 너무 많으며, 따라서 다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전제다. 다 읽을 수 없기에 가려 읽어야 하고, 가려 읽기 위해서는 일종의 ‘가이드’가 필요하다는 믿음이 거기에 뒤따른다. 이 세상의 모든 책이 청소년에게 적합한 건 아니라는 판단에 동의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황석영의 단편 <삼포 가는 길>에서 등장인물인 술집 작부 백화의 “내 배 위로 연대 병력이 지나갔어”라는 대사가 청소년에게 ‘유해한’ 영향을 끼칠 수 있으므로 권장도서로는 불가하다는 주장과 마주하게 되면 ‘읽을 만한 책’의 기준에 합의하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무리 훌륭한 문학작품이라 하더라도 기준에 따라서는 ‘읽어서는 안 되는 책’에 포함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 반론을 생각해볼 수 있다. ‘진보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청소년을 여전히 자율적인 주체라기보다는 훈육적 대상으로 간주하는 태도가 문제다. 어느 정도의 독서력과 분별력을 갖춘 청소년이라면 어떤 책을 읽을지 말지는 스스로 판단하여 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때 중요한 것은 권장도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행여 그들이 ‘전염병’에라도 걸릴까 염려되어 ‘항균실’에 감금해놓기보다는 면역을 키워주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 것과 같은 이치다. 한편 ‘보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권장도서 목록 정도 가지고 과연 온전한 지도와 통제가 가능한지가 문제다. 과거 노출 수위가 높은 영화 장면들을 ‘가위질’하고 상영하던 것처럼 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 문제가 될 만한 대사와 장면을 삭제한 ‘안전한’ 문학작품만 청소년들에게 읽히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권장도서 목록에 빠져 있다고 청소년들은 <삼포 가는 길>을 안 읽게 되는 것일까?

아니, 더 근본적인 문제는 ‘유해한 책’ 이전에 ‘유해한 현실’이다. 사실 술집 작부의 말보다도 청소년들에게 더 유해한 것은 관행적으로 향응과 성접대를 받았다는 ‘스폰서 검사’ 스캔들이지 않을까? 무얼 보고 배우라는 것인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안보의식을 고취한다는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전쟁 시나리오나 공모한다는 서울시의 행태는 또 뭔가? 이런 ‘몰상식한’ 현실을 방기한 채로 과연 ‘청소년 권장도서’의 의의를 옹호할 수 있을까? 청소년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위해서도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권장할 만한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10. 06. 21. 

P.S. 기사를 옮겨놓기 위해 검색을 하는데, 내일자 '책읽는 경향'에서 다루는 책이 <로쟈의 인문학 서재>다. 반갑기도 하고 일견 놀랍기도 한 마음에 이 또한 옮겨놓는다(그래도 '유해한 책'은 아닌가 보다).  

경향신문(10. 06. 22) [책읽는 경향]로쟈의 인문학 서재 

반복하자면, 우리는 “Eat, Survive, Reproduce”(먹고 살아남아서 자손을 퍼뜨리는 일) 외에는 따로 일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 ESR가 우리의 존재 근거이자 원리이다. 인간이 ‘의미의 질병’을 앓는 동물인 것은, 그러한 ESR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에서는 이걸 우리의 대뇌가 급속하게, 불완전하게 진화한 결과로 본다.

니체의 표현대로, 우리의 위장을 닮은 대뇌가 해야 할 일은 위장과 마찬가지로 소화 작용일 뿐이다. 그러한 작용으로써 우리를 생존하게 하고 기운 나게 하는 것이 본분이지만, 이 대뇌는 언제부턴가 자신이 소화해낼 수 없는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 “What’s it all about?”(이게 다 무슨 수작일까? 혹은 이게 다 무슨 의미일까?)이 그 물음이다. 그것은 형이상학에 대한 물음이고 요구이다. (203쪽)

지금 이 대목에서 니체를 읽어주고 있는 로쟈 선생이 환기해주는 사실은 인간이란 먹고, 살고, 낳는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를 살고 다음 세대에게 그저 넘겨주는 역할만 하면 되는 ‘다리’일 뿐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은 먹고 살고 낳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느끼는 유일한 ‘동물’이다. 이 사실은 감동과 불편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동물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점에 안도감이 섞인 감동을, 우리는 동물처럼 단순한 마음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에 자부심이 섞인 불편함을.(권해진 | 미래의창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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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1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2 0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구보 2010-06-22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통해 니체,데리다,지젝 읽기가 좀더 명료해졌습니다.
다음 책 출간을 고대하는 독자로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로쟈 2010-06-22 17:25   좋아요 0 | URL
저자로서도 감사한 일입니다.^^;

2010-06-24 1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4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