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 관련서를 대출하러 도서관에 갔다가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한겨레를 사들었다. 새로 나온 책 몇 권과 안면을 트는 사이에 눈길을 사로잡는 그림이 있어서 주목하게 됐는데, <헨젤과 그레텔>(별천지, 2010) 새 번역본의 그림이었다. 국내에서도 영화로 만들어지고 오페라로 무대에 올려질 만큼 유명한 이 작품의 비밀은 그간에 '새엄마'로 번역되던, 헨젤과 그레텔의 엄마가 '친엄마'란 (불편한) 사실이다('새엄마'인 것이 진화심리학적으로는 더 말이 되긴 한다). 이번 번역본에서는 그걸 살렸다는 기사도 참고할 만하다(절충안으로 '못된 엄마'라고 한 모양이다). 사실 알고 보면 동화 중의 상당수는 '잔혹동화'라는 걸 새삼 일깨워준다. 원작의 비밀이 궁금하신 분들은 다시 손에 들어봐도 좋겠다.
개인적으론 그림이 마음에 든다. 그림책 화가 주자네 얀센(Susanne Janssen)의 작품으론 <빨간 모자와 늑대>(마루벌, 2004)도 소개돼 있다(정말로 이름을 '주자네'라고 읽어주는지?). 저자가 '수잔네 얀젠'으로 표기됐으니 검색이 될 리 없다. '주잔네 얀센'이란 저자명으론 <피자를 구워주는 피아노 선생님>(비룡소, 2007)도 출간돼 있다. 일관성 없는 고유명사 표기가 불필요한 혼란을 야기시키는 사례다.
한겨레(10. 06. 26) 오누이를 버린 건 누굴까
헨젤과 그레텔을 내다 버린 것은 누구? 숲속에 버려진 어린 오누이가 갖은 기지를 발휘해 결국 집으로 돌아와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의 <헨젤과 그레텔>은 19세기 독일의 언어학자 야코프 그림과 빌헬름 그림 형제가 펴낸 <그림 동화집>의 한 이야기다. <그림 동화집>은 전해내려오던 민담들을 채록하여 쓴 것인데, <헨젤과 그레텔>은 중세 유럽에 만연했던 아동 유기 풍조가 반영된 것이다. 그림 형제는 <헨젤과 그레텔> 얘기를 통해 그런 세태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림 형제가 쓴 <헨젤과 그레텔>에서 가족이 굶주릴 처지에 놓이자 어린 헨젤과 그레텔을 버리도록 부추긴 이는 새엄마가 아니었다. 망설이는 아빠를 설득한 것은 엄마였다. 그동안 그림 형제의 <헨젤과 그레텔>을 그림책이나 동화로 펴낸 편집자·번역자들은 헨젤과 그레텔의 엄마를 차마 엄마라고 옮기지 못했다. 대신 ‘새엄마’니 ‘계모’로 번역했다. 새엄마는 나쁘다는 편견을 아이들에게 심는 데 번역판 <헨젤과 그레텔>이 한몫한 셈이다. 이는 비단 한국어 번역만이 아니다. 더러 유럽 언어권에서도 그러했다.
별천지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한 그림책 <헨젤과 그레텔>은 처음으로 엄마를 엄마라 번역한 그림책이라 할 것이다. 그래도 차마 그냥 ‘엄마’로 옮기진 못하고 ‘못된 엄마’로 번역했다. 출판사 쪽은 그림 형제의 원작이 지닌 문학적 숨결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원작에 충실하게 ‘(못된) 엄마’로 번역했다고 밝혔다. 이 <헨젤과 그레텔>에는 독일의 그림책 화가 주자네 얀센(46)이 불타는 빨강과 칠흑 같은 검정을 주조로 형상화한 헐벗은 오누이와 굶주려 뼈만 남은 부모의 모습이 대담한 화폭에 담겨 있다.
그림 형제의 <헨젤과 그레텔> 속 악역은 엄마와 함께, 오누이를 잡아먹으려는 숲 속 마녀다. 악당을 모두 여성으로 설정한 반면, 아빠는 무능할지언정 ‘착한 아버지’라는 구도다. 두 번이나 아내와 합작하여 자식들을 버렸으며 아내가 (아마도 굶어) 죽고 나서도 살아남아 마녀의 보물을 갖고 돌아온 오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그는 과연 착한 사람일까. 동화 속에서 누군가는 착한 인물이어야 하고 누군가는 악당이어야 한다면, 약자인 여성을 ‘마녀 사냥’처럼 희생양 삼던 중세 유럽의 풍조를 이 또한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6살부터.(허미경 기자)
10. 06. 26.
P.S. 얀센의 그림을 조금 더 찾아봤다. 아이들은 좀 무서워하지 않을까 싶다. '6살부터'가 아니라 '16살부터'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