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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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주체와 여성 주체의 주요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의 파트너가 그들에게서 보는 것과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라캉이 성차화(sexuation) 공식에서 지적한 바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 모두 대타자가 사실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에 끌린다. 글너데 남성은 여성에게서 숭고한 대상을 찾고 여성은 남성에게서 상징적 권력을 찾는다. -159쪽

정신분석에서는 상징적 권력과 남근을 관련짓는다. 하지만 남성 쪽에 있는 남근은 남성에게는 결코 행복을 주지 못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여서이 바로 이 남근과 관련을 맺는다 하더라도 남성은 그것을 전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성은 끊임없이 자신의 상징적 기능을 떠맡으려 애쓰는데, 그 이유는 여성이 남성에게서 보는 것이 그 상직적 기능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성의 이런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하는데 그 시도가 불안과 억제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160쪽

라캉에 따르면 여성의 경우에 욕망의 구조와 관련된 근원적인 불만족은 거세 이전의 것이다.(...) 그러니까 거세는 여성에게 부차적인 것이다. 따라서 "여성에게 그것은 애초에 자신에게 없는 것, 자신의 욕망의 대상이 될 그런 것인 반면, 남성에게 그것은 처음부터 자신이 아닌 것이고, 바로 자신이 실패하는 곳이다." 이에 따라 여성은 남성이 자신에게서 보는 대상을 자신이 소유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염려하고, 그래서 자신 안에 있는 자신 이상의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궁금해 한다. 또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여성은 끊임없이 대타자의 욕망을 묻는다. -162쪽

요컨대 남성은 자신의 상징적 역할을 맡을 수 없어 외상을 입고 여성은 대타자의 욕망의 대상을 소유할 수 없어 외상을 입는다. 이는 왜 일부 남성들이 삶을 계획된 그대로 꾸려가는 일에 그토록 몰두하고,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여성과의 마주침을 몹시 두려워하는지 알려 준다. 남성은 스스로 부과한 규칙을 고수함으로써, 상징적 질서가 온전하고 그것이 자신에게 남근적 권력을 부여했으리라는 확신을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갖게 된다. 하지만 욕망의 대상에 가까이 가게 되면 이 환상이 붕괴되어 그 남성은 발가벗겨지고 그의 본질적 불능과 무력이 노출되는 것이다. -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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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그늘 - 신경숙 산문집, 개정판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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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사람들은 내가 쓴 소설을 두고 내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그 소설을 썼느냐고 묻는다. 그만 닫혀 버리는 내 말문. 문학관이 무어냐고 묻는다. 막막해져버리는 내 심상. 돌아서면 쓸쓸해진다. 언제부턴가 나 자신을 소설과 떨어뜨려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는데 소설을 왜 쓰느냐고 물으면 겨우 글쎄요, 라니. 상식적인 물음엔 반드시 명확한 답이 있는 법이라고 생각해왔다. 소설가에게 소설을 왜 쓰느냐 묻는 것은 상식적인 질문이겠기에 겨우 글쎄요, 라고 말하는 나 자신을 의심도 해보았다. -50쪽

나는 소설가이고 소설을 썼고, 그 소설에 대해 무슨 얘기를 썼느냐? 묻는데 왜 어버버거리는가?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이렇게 뒤집어도 보았다. 소설가에게 문학관이 무어냐고 묻는 건 상식적인 질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50쪽

한순간도 멈춰 있지 않고 움직이는 이 삶을, 그 유동적인 삶의 어느 순간을 붙잡아놓았을 소설을 두고 어떻게 한마디로 말해줄 수 있겠느냐, 말해본들 변할 게 아니냐고. -50쪽

나는 아무런 비밀도 없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사람들도 생각하고, 내가 보는 것들을 사람들도 보고 있다고 느낀다. 돌연한 향기를 발견했다가 놓치고 다시 발견했다가 놓치는 흠투성이로 살아가며 내 소설도 진행시켜나갈 것이다. 그러기에 나의 가장 구석진 곳을 써놓은 소설에 대해서조차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52쪽

내 소설은 본능적인 이해가 필요한 것 같아요, 삶을 본능적으로 이해하듯 말이에요, 라고.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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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생에 할 일들 창비시선 390
안주철 지음 / 창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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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초와 이초 사이에 서식한다.

일초가 지나면 새해가 시작될 것이다.

나는 지난해가 되기도 하고

다음 해가 되기도 하겠지만

경계를 구걸할 만큼 가난하지는 않다.

나는 잡히는 대로 서식한다.

 

비가 내리고 비가 그친 오후에 나는 서식한다.

월급이 입금된 통장에서

빌려 쓴 미래가 모두 빠져나간 날처럼

나는 너덜너덜하게 서식한다.

 

나는 너와 헤어질 생각에 서식한다.

지금 세 들어 사는 낡은 생각과

함께 세 들어 살고 싶은 낡은 생각 사이에

조건이 맞지 않는 통화 기록처럼 서식한다.

 

나는 너와 헤어질 시간에 서식한다.

위치 추적이 불가능한 지대를 지나

나의 움막에 도착하려면 너는

나와 헤어질 장소를 짊어지고 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슬픔이다.

 

나는 어슬렁거리는 무릎에 서식한다.

한없이 세상 밖으로 녹아내리는 눈들과

내리는 눈 사이로 희미하게 저녁을 안치는

비탈진 골목처럼 서식한다.

 

나는 서식한다.

내가 나에게서 가장 멀리는 떠나는 순간에

용도와 흥미가 폐기된 가구처럼

나는 모든 것에 서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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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전집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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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한다. 그해 가을 주인은 떠나 없고 그리움이 몇 개 그릇처럼 아무렇게나 사용될 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짧은 촛불들을 태우곤 했다. 그렇게 가을도 가고 몇 잎 남은 추억들마저 천천히 힘을 잃어갈 때 친구여, 나는 그때 수천의 마른 포도 이파리가 떠내려가는 놀라운 空中을 만났다. 때가 되면 태양도 스스로의 빛을 아껴두듯이 나 또한 내 지친 정신을 가을 속에서 동그랗게 보호하기 시작했으니 나와 죽음은 서로를 지배하는 각자의 꿈이 되었네. 그러나 나는 끝끝내 포도밭을 떠나지 못했다. (「포도밭 묘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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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문학 2014.봄 - 통권64호
21세기문학 편집부 엮음 / 21세기문학 / 2014년 2월
품절


진보는 우리의 원죄를 줄이는 데 있다고 보들레르는 말했다. 우리가 생명이기에, 우리가 인간이기에 저질러야 하는 죄를 늘 의식하고 한 걸음이라도 벗어나려는 정신의 훈련이 곧 진보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 욕망이 없이 생명은 유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욕망의 피안을 상상하지 않는 인간의 삶은 없다.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윤리와 미학의 이 근거를 한시도 잊지 않을 수 있는 근력을 기르기 위함이다. 당신보다 더 날카로운 칼이 어디 있겠는가. - 282쪽

문학의 이론은 대체적으로 모든 작품이 어떻게 서로 같은가를 말한다. 문학의 현장에서 일하는 당신은 한 작품이 다른 작품과 어떻게 다른가를 말해야 한다. 그 일을 위해 가장 많이 협조를 구해야 할 곳은 바로 당신이 읽고 있는 그 작품이다. 작품은 제 출생을 말하고 제 성장을 말하고, 자신이 왜 여기 있으며 왜 여기 있어야 하는가를 말한다. 작품은 저를 폭로한다. 작품은 또한 자신을 감춘다. 제 출생과 성장을 감추고, 제 존재 이유를 감춘다. 당신은 작품의 말을 찬찬히 듣고, 때로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하며 따귀를 갈겨야 한다. 당신은 작품의 마음을, 그 핵심을 공략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 독창성을 발견해야 한다. 당신은 작품의 발자국을, 그것이 멈출 때까지, 밟아가야 하며, 멈춘 다음에도 다시 가게 될 방향을 짐작해야 한다. - 283쪽

비평가가 아직 평가를 받지 못한 작가에 대해 언급하려면 여러 가지 위험이 뒤따른다. 그러나 문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험이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백지 앞에 앉아 있을 때, 그가 쓰려는 한 낱말, 한 문장이 다른 낱말, 다른 문장보다 더 낫다고 말해주는 확실한 지표는 아무것도 없다. 한 낱말이 모험이고, 한 문장이 모험이다. 소설가와 시인이 모험할 때 당신도 모험하지 않을 수 없다. 모험이었던 것이 이미 모험이 아닌 것이 되었을 때만 당신이 말을 하려 하다면,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나 같다. 모험하지 않는 당신의 말에 새로운 말이 있을 수 없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비평가는 몇 개의 빈약한 개념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그러나 눈치 보며 휘두르며, 평생을 산다. 새로운 재능을 발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을 발굴하는 것이다.- 289-290쪽

우울증 환자는 어디서나 패배를 본다. 이 패배의식은 어떤 종류의 순결성에 그 밑거름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울증 환자는 좋은 소설가가 될 수도 있고 좋은 시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울증으로 좋은 비평가가 되기는 어렵다. 비평가는 자기 앞의 텍스트를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려는 사람이다. 당신이 읽는 모든 것이 쓸모없어 보인다면 그것은 당신이 엄격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태하기 때문이며, 당신이 상상했던 것과 세상이 다르다고 떼를 쓰는 식의 유아적 분노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확신 없는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불안을 자신이 이야기하려는 작가의 책임으로 돌리고, 동료들이 성공하는 원인을 세상의 몰이해에서 찾는다면 당신은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시인과 소설가는 외롭게 자기 길을 모색한다. 비평가인 당신은 여러 길에서 그들과 더불어 한 시대의 길을 모색한다. 그 길이 덜 외로운 것은 아니지만, 당신의 우정을 당신의 독창성으로 삼을 수는 있다. 현장의 사상가는 늘 명랑하다.(황현산)-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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