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열의 수난 - 장정일 문학의 변주
문광훈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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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지 칼럼 등에서 자주 접하던 문광훈 교수의 책을 처음 읽었다. 하지만 보론까지 포함하여 본문 365쪽의 책을 한 시간만에 읽었으니까 그냥 넘겨본 수준이다. 이유가 없지는 않다. 읽으려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지만 읽을 만한 구석이 별로 없고 또 잘 읽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저자와는 코드가 전혀 맞지 않는 듯한데, 서점에서 거의 살 뻔했으나(재고도서에는 있었지만 매장에는 없었다) 구하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은 게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진다.    



일단 '장정일 문학의 변주'란 부제를 달고 있어서 나는 의당 '작가론' 정도의 책인 줄 알았지만 <정열의 수난>은 내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책이다(물론 '역사-서사-권력-문화의 관계'도 속표지에는 부제로 돼 있다). 장정일을 다루고는 있으나 주로 <중국에서 온 편지>란 중편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에(이 작품은 나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온전한 작가론은 아니며, 그렇다고 작품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제시하고 있는 '작품론'도 아니다. 아니 애초에 그러한 것은 책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글은 작품에 대한 단순한 해설이나 해석을 의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소설 언어를, 그 언어의 권력 성찰적 본성을 우리 사회의 이념적-문화적 갈등의 문제 지평에 놓고, 그것이 가치의 개방과 삶의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때 감각과 사고의 갱신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23쪽)는 게 의도이기에(하지만 나는 저자의 문제의식 자체가 너무 추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왜 장정일인가? 저자가 묻고 답하는 바에 따르면, 일단은 "기질적으로 유사하게 느껴져서"라고 한다. 그리고 그걸 보충해서 "내가 그를 읽는 가장 중대한 이유는 그의 글이 내가 말하고 싶은 바를 내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데에 가장 유쾌한 성찰 재료가 되기 때문이지 싶다."(13-4쪽)라고 적는다. 거기에 정답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책은 '문광훈이 말하고 싶은 바'를 늘어놓을 따름이지 장정일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해주는 바가 없다(그냥 저자의 '지리한' 예술론만 나열된다). 나로선 '중국'에서 온 편지만큼이나 해독하기 난해하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책장을 넘겼지만 정작 <중국에서 온 편지>가 다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전체 8장 중 5장(148쪽)에 가서이다(책의 절반이 서론이다!) 아무리 '에세이'라고 쳐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게 저자의 스타일인 것인지? 그냥 이 작품에 대해서라면 <독서일기7>(랜덤하우스, 2007)에서 장정일 자신이 말해놓은 게 훨씬 짧고 유익하다(그는 이 소설을 <일월>이란 희곡으로도 각색했는데 그에 대한 소개글이다).  

그렇게 좀 허무하게 본론이 다 끝나면 '한국 사회에서 장정일 읽기'라는 보론이 나오는데, 이 또한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나는 '장정일이 어떻게 읽혔는가, 내지는 어떻게 읽히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 글을 기대했지만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장정일을 읽는다는 것'에 주안점을 둔 듯하다. 그의 결론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민주적 사회질서는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위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엘리트 중심의 협소한 정치 행위가 아니라 시민 중심의 광범한 참여로부터, 불신과 배제의 원리가 아니라 인정과 포용의 원리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347쪽) 너무 지당하신 말씀이라 종이가 아깝게 여겨진다.

저자의 예술론: "예술은 논리와 개념으로 삶이 비틀어지기 전의 정치 이전적 세계 - 원형적이고 근원적 진리가 비유적으로 현현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작품에 대한 감상, 곧 심미적 경험이 '민주주의를 내실화'하는 데 기여한다고 한다. 왜인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지지하는 평등,자유, 박애, 인권, 생명, 평화와 같은 보편 가치들이 나날의 생활 안으로, 개개인의 습관과 사고, 행동과 양식 안으로 육화되어야 한다. 작가는 바로 이런 일에 자신의 표현을 통해 참여하는 대표적 존재이다."(353쪽) 요컨대, 사회주의 예술론의 민주주의 버전 같다. "문학예술은 민주적 가치를 생활에서 육화하기 위한 상상력의 의미화이다."란 단정적인 규정은, 하지만 민주적인 규정인 것인지?



아무튼 내가 요약할 수 있는 저자의 입장은 이런 정도이다: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들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예술의 힘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어떻게 글을 쓸 것이고, 이렇게 쓰인 글을 어떤 믿음으로 읽을 것이며, 또 이렇게 읽은것이 어떻게 나날의 자양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술-아름다움-반성과 자유-평등의 세계공화국, 이 둘 사이의 거리는 그다지 멀어 보이지 않는다.(...) 장정일의 소설 <중국에서 온 편지>가 보여주는 문제의식도, 그 문화적-문화적 의미도 이 점에 닿아 있지 않나 여겨진다."(356쪽)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350쪽이 넘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건 말 그대로 '수난'이지 않나 여겨진다.

저자로서의 변명 내지는 자긍심: "글을 쓰는 것이 간단하지 않지만, 나는 글을 쓰지 않을 때보다 쓸 때 더한 행복을 느낀다."(103쪽) 그의 '행복'을 탓하거나 말리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게 쓸 경우에라도 '구체적으로' 쓰는 게 좋지 않을까? 2장의 제목을 ''욕됨을 견디다': 나, 문광훈의 경우'라고 달아놓았지만 저자는 자신이 두세 해 전부터 '나이 마흔이 무엇인가'란 문제에 골몰해왔다는 것 말고는 그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그리고 '욕됨'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종암결찰서의 전경들' 정도가 유일하게 구체적인 '지표'이다). 근래 드물게 읽은 기이한 책이고 저자이다. 아무래도 '마흔'이 문제였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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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2009-07-21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마흔이 문제였던 듯하다....
개인적으로 매력을 느낀 책이 번역되지 않아 기다리다 지쳐서
오역을 강행하는 결례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장자 & 노자 : 道에 딴지걸기 지식인마을 6
강신주 지음 / 김영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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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노자도 어쩔 수 없이 전국시대(BC 403-221)를 살다간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 전국시대에는 춘추시대(BC 770-403)보다 갈등과 대립이 더 심했다. 어떤 제후도 천하 통일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 언제까지 국가를 통치할지 장담하지 못하던 시대였다. 이때 노자가 혜성같이 나타나서 국가를 오랫동안 통치하는 방법과 천하를 통일하는 방법을 제안했던 것이다.-92쪽

국가는 기본적으로 통치자(군주)와 피통치차(민중)로 나뉘는 위계적 체계다. 국가가 원활하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일종의 교환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국가라는 체계를 지탱하는 이 교환관계의 고유한 특성이다. '교환'은 기본적으로 A에게 B로 무엇인가 전달되면 B에서 A로도 무엇인가 전달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원활히 기능하려면 통치자가 피통치자에게 무엇을 받았을 때, 통치자도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어야만 한다. -94쪽

국가 체계를 유지하는 교환의 논리를 어긴 사람은 통치자의 자리에 있을 수 없다. 그런 사람은 통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도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은 오직 수탈만을 일삼지 그것을 재분배하려고 하지 않는다. 노자는 통치자인 군주가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인 재분배의 도를 외면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97쪽

노자철학은 분명 영원한 진리의 철학이다. 그렇지만 그가 영원하다고 본 것은 '국가'와 '천하'라는 정치구조에 관한 것이었다. 결코 정치구조를 넘어서는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가 아니었다.(...) 그의 철학은 국가의 형식적 작동원리를 규명하고 정당화함으로써 어떻게 하면 '군주'가 이 원리에 따라 '올바른' 통치자가 될 수 있을지에 집중되어 있다. 결국 노자는 '국가'의 존재 이유에 근본적으로 반성하지 못한 사상가였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 철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104-105쪽

사회민주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노자철학도 기본적으로 현존하는 체제를 극복하는 전략일 수 없다. 다만 현존하는 체제를 안정적으로 작동하도록 만들어 영속화하려는 고도의 전략일 뿐이다.(...) 노자철학이 기본적으로 남음이 있는 사람에게서 출발한다는 사실과 남음의 혜택을 받을 부족한 사람이 다수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다시 말해 노자철학의 재분배는 '남음'과 '부족'이라는 위계성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논의될 수 있다. -109-110쪽

노자에게 진정한 통치자는 '남는 것이 있는데도 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그것을 부족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와중에 휘말려 있는 국가를 통일할 진정한 큰 국가는, '작은 국가의 아래에 있게 되면 작은 국가를 취할 수 있는' 국가다. 작은 국가의 아래에 있다는 것은 작은 국가를 수탈하기에 앞서 작은 국가를 보호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키아벨리가 말한 사랑의 방식을 적용한다는 말이다.-125쪽

노자의 '소국과민'이라는 정치이념에는 통치자의 강력한 지배의지가 함축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노자가 통치자에게 권한 정책의 결과는 물론 겉으로 보면 평안하고 질박하기까지 한 시골 마을의 풍경이다. 사람들은 바로 이것에 현혹되어 노자의 정치이념이 목가적 공동체, 원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오해했다. 그러나 평안하고 질박한 풍경 뒤에는 통치자의 강력한 통치권 행사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피통치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막고 문자를 통한 반성적 사유와 이론적 대화능력을 근본적으로 없애려는 정책이 어떻게 문명에 저항하는 '작은 정부'나 '유토피아적 원시공동체'와 들어맞을 수 있을까?-130쪽

노자는 대가를 바라는 뇌물(수탈)을 마치 선물인 것처럼 포장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오직 이럴 때에만 피통치자는 통치자에게 알아서 자발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통치자는 통치자에게 자신이 알아서 복종한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무위자연'이라는 노자의 유명한 주장의 실제 의미다. 통치자는 '수탈이나 억압이 아니라는 직접적인 통치 행위', 즉 유위의 정치가 아니라 '재분배나 자애로움이라는 간접적인 통치 행위', 즉 무위의 정치를 수행해야 한다. 오직 이런 무위의 정치만이 피통치자가 통치자에게 '알아서 스스로(自然)' 복종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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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24 0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밌죠? :) 쉬우면서 깊이도 있고 재미도 있고. 참 괜찮았던 책입니다. 저자의 생김새와는 달리;;;

가넷 2007-07-24 09:28   좋아요 0 | URL
하하;;; 저자분이 살짝 산적같기는 하지만 ...-_-;;

로쟈 2007-07-24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파격적인 노장론이라고 생각하는데('노장철학은 없다'는 것이니까요!) 학계에서도 '이단'으로 내몰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영업비밀을 그렇게 다 누설해놓아서)...

마늘빵 2007-07-25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이 분의 관련 책이 꽤 많은걸로 알고 있는데, 아직 다른건 못봤습니다. 관심 많이 가는 철학자입니다.

로쟈 2007-08-29 19:35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론 좀더 정치한 연구서가 나왔으면 하는 생각도 갖게 됩니다.

비공개 2007-08-29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사에서 이분을 초대하여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강의를 듣고 파격적인 언사때문에 언짢아 하시는 분들도 있으셨지만, 무정부주의자다워서, 그리고 철학자다워서 반가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책도 한번 읽어보아야 겠네요.

로쟈 2007-08-29 19:35   좋아요 0 | URL
'파격적인 언사'의 수위가 궁금하네요.^^

심승보 2007-10-28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오래 전에 출간되었던 박이문 교수의 <노장사상>과 김형효 교수의 <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이 가장 유명하면서도 깊이있는 대표적 연구서가 아닐까 합니다. 또한 김용옥의 관련서 <노자철학 이것이다> <노자와 21세기> 등을 역시 빼놓을 순 없겠구요. 책세상 문고판으로 나온 김시천의 <철학에서 이야기로 - 우리시대의 노장 읽기>는 비교적 최근까지 이루어진 국내외 노장사상 연구사 검토에 유용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로쟈 2007-10-28 10:34   좋아요 0 | URL
'노자 읽기'목록을 예전에 이미 작성해 놓았습니다. 심승보님의 읽기를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심승보 2007-10-28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확인해 보았습니다. 박이문 교수의 <노장사상>과 김형효 교수의 <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이 빠진 것이 다소 아쉽지만 유용히 참고하였습니다. 저도 내년부터 시간이 좀 나게 되면, 제 나름의 리스트들을 작성해 보겠습니다.

로쟈 2007-10-28 23:53   좋아요 0 | URL
두 책 모두 저도 읽어본 책들입니다. '노자 읽기' 목록이어서 '노장' 연구서는 배제한 기억이 있습니다. 강신주에 따르면 '노자 & 장자'가 아니라 '노자 vs 장자'의 구도이기도 하구요...
 
레오 스트라우스 -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박성래 지음 / 김영사 / 2005년 7월
품절


자유주의의 기본단위가 개인이라면 고대 그리스철학을 따르는 스트라우스 이론의 기본단위는 레짐이다. 그리고 스트라우스가 말하는 '정치'는 근대인들이 보통 생각하는 정치보다 훨씬 광범위하며 우리 생활의 곳곳에 스며 있는 '고대적인 정치'이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문화적 상대주의를 지독히도 싫어한다. 스트라우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여러 레짐들을 비교한 뒤 좋은 레짐과 형편없는 레짐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45-46쪽

스트라우스의 입장에서는 이런 근대성과 자유주의, 가치중립주의, 역사주의는 위장된 상대주의, 허무주의에 불과하다. 스트라우스는 근대 이성주의는 그래도 도덕이 유지될 거라는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도덕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고대의 현인들은 '도덕'에는 절대적 근거가 없으며 그것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리석은 대중들에게까지 발설하지 않는 신중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상대주의와 허무주의가 어리석은 대중들에게까지 확산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덕을 내팽개칠 것이고 서구문명에는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게 니체의 교의를 따르는 스트라우스의 걱정이다. -70쪽

스트라우스는 단호함의 적절한 대상으로 진리를 내세운다. 스트라우스는 '무엇에 대한 단호함인가?'라고 스스로 물은 후 '진리에 대한 단호함이다'라고 스스로 대답할 것이다. "진리가 없다는 것이 진리"라는 니체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정치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혼란을 막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절대적인 진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75쪽

"인간의 최고 활동인 철학 혹은 과학은 '만물'에 대한 의견을 '만물'에 대한 지식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다. 그런데 의견은 사회의 구성요소다. 그러므로 철학 혹은 과학은 사회가 숨쉬고 있는 기초를 해체하려는 시도다. 따라서 그것들은 사회를 위태롭게 만든다.(...) 철학 혹은 과학과 사회의 관계와 관련하여 이러한 견해를 견지하는 철학자나 과학자들은 사회의 바탕을 이루는 의견들에 대해서 다수가 갖고 있는 무조건적인 신뢰를 위태롭게 만들지 않고도 소수에게는 자신들이 진리라고 간주하는 것을 밝힐 수 있게 하는 특이한 글쓰기 방식을 채택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들은 밀교적(esoteric) 가르침으로서의 진정한 가르침과 공개적(exoteric) 가르침으로서의 사회적으로 유용한 가르침을 구분하게 된다." -86-87쪽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플라톤이 넌지시 혹은 우물쭈물 말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플라톤의 진짜 가르침일 가능성이 높다. '플라톤이 여기서 무엇을 말했나'보다 '플라톤이 여기서 무엇을 말하지 않았느냐'에 더 주목해서 살펴봐야 진짜 가르침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여기서 이 말을 했다가 저기서는 저 말을 한다면 둘 중에 하나는 진짜 가르침이고 다른 하나는 가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97쪽

스트라우스가 정치철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 계기[는] 서구와 근대성의 위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정치철학의 역사를 연구했다.(...) 스트라우스는 마키아벨리가 고대 정치철학의 전통을 파괴하고 정치와 도덕을 분리시킨 근대 정치철학의 시조라고 본다. 그에게 마키아벨리는 도덕적 혼란이라는 근대성의 위기, 서구문명의 위기를 불러온 장본인이다. -108-112쪽

스트라우스는 판단을 내리기를, 인간본성과 인간사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관찰은 올바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트라우스 자신도 마키아벨리에 동의한다는 말이다. 다만 플라톤처럼 몰래 속삭이면서 말해야지 마키아벨리처럼 그렇게 큰소리로 떠들어대면 곤란하다는 얘기다. 결국 스트라우스가 마키아벨리를 비난하는 진짜 이유는 마키아벨리가 너무 사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순진하기 때문이다. -114-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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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avinsky 2007-07-22 0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저 책이 나왔을 때 서점에서 잠시 읽어본 적이 있는데 니체 철학이 저런 정치철학을 나았다는 것에 뒤통수를 얻어 맞았다는...

로쟈 2007-07-22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시즘으로 전용되는 것과 비교하면 약소한 듯한데요. 책은 약간 선정적이지만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저자가 자신한 대로 적절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스트라우스 정치철학에 다들 입문해야 하는 건 아닐 테지만...
 
행동과 사유 - 김우창과의 대화
김우창 외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7월
품절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내 마음속에 늘 있었던 것은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영문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영문학을 이 질문을 통해서 바라보아온 것이 나의 독특한 문제의식이라면 문제의식이 아닌가 합니다. 영문학은 한국의 전통과 관련이 없고, 우리의 삶의 급박성과도 관련이 없고, 또 어떻게 보면 제국주의적 질서 안에서의 힘의 불균형에서 생겨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 영문학을 하는가 하는 질문이 다른 많은 걸 생각하게 하고 읽고 쓰는 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16-17쪽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 그리고 철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명하게 의식하지는 아니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던 질문들은 철학적인 것들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정치학에서) 문과나 철학으로 바꾸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학에서는 외국문학이 국문학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이고 그래서 영문과를 택하게 되었지요.-18쪽

내가 서울대에 들어간 해에 서울대에 제일 많이 진학한 고등학교가 광주고등학교였어요. 왜 그랬느냐 하면, 서울 사람들, 경상도 사람들은 후퇴하고 전쟁하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광주는 그런 혼란과 고통은 없고 비교적 평화스러웠거든요. 그때 서정주 선생도 조선대학에 와 있었고, 우리 고등학교 선생 중에도 서울대 박홍규 교수가 와서 가르쳤는데, 우리 3학년 담임으로는 이후에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가 되신 나종일 선생이 계셨지요.-22쪽

우리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나 대학에 다닐 때에는 책이 많았어요. 학교 공부는 적고 책은 많은 때였습니다.(...)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질문은 내가 흔히 받는 질문인데, 나한텐 독일 철학과 독문학이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반드시 영향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고 또 그 무렵에 그것을 많이 공부했기 때문은 아니지만, 독일의 관념철학 또는 이상주의, 서양어로는 결국 같은 말이 되는데, 그것에 대하여 늘 친화감을 가져왔던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23-24쪽

헌책방 얘기를 하였지만, 어떤 미국사람이 "아이들은 책 많은 환경에 두면 호기심 때문에 책을 보게 되는 것이니 학생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할 필요가 없다"라고 했죠. 우리도 길바닥에 책이 많으니까 저절로 보게 된 거죠. 그리고 오늘날처럼 산업화, 능률화된 사회가 아니라서 책방 주인이 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책방 주인하고 이야기를 많이 했죠. -24쪽

손창섭이나 장용학, 이범선의 소설을 대학교 다닐 때 보고 비참함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년 전에 다시 보니까 그 시대가 '얼마나 인간적인 시대냐'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직장에서 잘려 먹을 것도 없는데 의사인 친구의 치과 사무실에 나가 아침부터 앉아 있다가 의사가 점심 먹으러 가면 따라가서 먹는 얘기 같은 것을 생각해보면, 능률화되고 경영 합리화가 되어 있는 치과에 가서 그러기 힘들죠. 대학 입학 시험에서도 가령 독일어 시험문제 같은 것은 등사된 것이었는데, 출제 교수가 직접 나와서 읽고 설명하고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허술하다고 할까, 인간적이랄까 그런 면도 있었지요. -28-29쪽

가장 중요했던 건 자유로웠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대학에서도 그러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것도 많지 않고 요구도 적으니까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40년째 가르치면서 출석 점검을 별로 하지 않았어요. -33쪽

대학 시절 그리고 그 후에도 사르트르, 키르케고르, 하이데거가 유행했는데, 김동리 선생까지 실존주의를 논했으니까 전쟁과 관계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 이후에도 실존철학은 내게 중요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돌아보건대, 단순화하여 말하기는 어렵지만, 하이데거는 나에게 추상적 관념이나 체계 또는 이데올로기로써 단순화될 수 없는 세계의 현존에 대한 느낌을 심어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공리적인 조작, 과학기술적인 조작은 물론이고 관념으로 운산으로 조작되지 않는 신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그에게 있습니다. 사르트르하면 실존, 자유, 책임, 현실참여 등등을 그의 주된 개념들로 생각할 수 있지만, 되돌아보건대, 나에게 중요했던 것은 인간의 주체적 자유에 대한 독특한 이해, 독일의 관념철학에 연유하면서도 그가 살았던 현실 속에서 특히 강조하게 된 주제척 자유에 대한 이해가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41-42쪽

전라도 사람이라고 해서 대학 입학하고 취직하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결혼을 하는 데 문제가 있었으면 몰라도 인생에서 전라도 사람이냐 경삼도 사람이냐에 따른 중요한 고비나 계기에 부딪히지 않았기 대문에, 편한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는 여전히 전라도 사람이라는 범주가 중요한 사회적-구조적 범주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민주적이고 평등한 질서의 확보라는 보다 일반적 과제의 수행으로써 해결되지 않을 문제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50-51쪽

모든 사람이 작은 개체에 불과하고 또 그 개체가 주어진 사회의 조건에 의하여 현실적으로 또 지적으로 제한된다는 것을 반성하는 것은 바로 보다 큰 보편적 진리로 나아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이지만, 그러한 제한 조건이 모든 정당성의 기준에서의 사실 인식을 불가능하게 한다면, 비판 자체도 부정되는 것이죠.(...) 실존적 상황에 의하여 생각이 제한되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입장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사회 내의 의사소통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적인 작업은 자기 변명과 자기 이익의 옹호를 위한 수단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정치 기획 그리고 노동자가 아닌 지식인으로서의 마르크스의 관계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되지요.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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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7-21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4년에 이 책이 <사유의 공간>과 함께 출간되었을 때 바로 구입해 탐독하면서 김우창 선생의 학문 세계에 새삼스레 탄복하고 감복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오랜만에 기억을 상기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07-07-21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책으로채우리 2009-12-01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인터넷 기사를 읽다 알라딘 가입에 이어 이 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예쓰모모 서점만 줄곧 이용하다 알라딘에 발을 붙이려니 낯설 달까요..여긴 방문객이 이렇게 많은 블로그도 있구나 싶고..암튼 책 선택에 편식증이 있는 저에게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행동과 사유가 눈에 띄어서 클릭했어요..왜인지 읽고 싶어집니다. 읽고 나면 유식해질 것 같은 느낌까지 드는데..ㅎ 품절이네요........ ㅡㅡ; 예쓰모모로 가야하나여.....ㅎ여하간 꼭 읽어보겠어요.그런데,로쟈님의 모습은 검정티 청바지 저 모습이신가요. 설마.......어떤 유명한 작가나 석학은 아니겠지요..전 모르게는게 많아요.아.궁금해.
 
꿀벌의 언어 - 이재룡의 문학 이야기
이재룡 지음 / 현대문학 / 2007년 4월
품절


프랑스인, 영국인, 독일인이 각각 낙타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프랑스인은 대뜸 근처 동물원으로 달려갔다. 반 시간가량 낙타에게 빵을 던져주고, 우산으로 쿡쿡 찔러보기도 하고, 동물원의 수위에게 몇 마디 질문도 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저녁나절에 낙타에 대한 재치만점의 자극적 기사를 휘갈겨 신문사에 보냈다.-7쪽

영국인은 홍차를 챙긴 배낭과 편안한 야영도구를 짊어지고 사막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삼년간 체류하며 낙타에 대한 두툼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학회에 제출했다. 체계도 없고 결론도 없는 무질서한 글이지만 자료적 가치가 풍부한 보고서였다.-7쪽

한쪽 기사는 경박하고 다른 보고서는 보편적 개념을 담지 못했다고 비웃으며 독일인은 몇 년 동안 도서관에 처박혀 '자아 개념에 입각한 낙타에 대한 개념들'이라는 세 권 분량의 저서를 완성했다. 도서관에서 쓴 그의 저서는 곧바로 다시 도서관 서고에 들어갔다. -7-8쪽

똑같은 과제를 받은 한국인은 어디로 갈까? 동물원, 사막, 도서관에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눈앞의 컴퓨터에 검색어 '낙타'를 친 뒤 15분 만에 깨끗한 파일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다시 인터넷에 올라간 파일은 통신망을 타고 순식간에 퍼졌다. 입심에만 의존한 재치만점의 화려한 수사학, 체계는 없지만 고지식한 경험론, 낙타와는 무관한 관념론을 적당히 버무리고 사진, 만화, 소리까지 곁들인 동영상이 담긴 파일은 인터넷 최강국에서는 누구나 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 모든 언어를 관장하는 메타언어 '검색'은 우리에게 이제 익숙한 단어이다. 경험주의, 관념주의를 지난 세기의 사유방식이라 비웃는 검색주의가 우리의 이데올로기이다. -8쪽

그러나 조금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검색이란 단어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체험과 연관된다. 잠시 검문검색이 있겠습니다, 라는 말에 공연히 가슴 졸였던 시절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때 지구상에서 가장 잦은 검색을 당했던 민족이었다. 속된 말로 많이 맞아본 뒤에 제대로 때릴 줄 알게 된 것이다.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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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6-17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흥미롭군요-

마늘빵 2007-06-17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나온 책이죠. 관심가던데.

기인 2007-06-18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대단한데요. :)

로쟈 2007-06-18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익한 산문집입니다.^^

곰탱이 2008-01-28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거의 블로깅하는 과정과 흡사합니다. 흥미롭네요 ㅎㅎ

미지 2010-06-12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재밌겟는데요, 저도 읽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