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생에 할 일들 창비시선 390
안주철 지음 / 창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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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초와 이초 사이에 서식한다.

일초가 지나면 새해가 시작될 것이다.

나는 지난해가 되기도 하고

다음 해가 되기도 하겠지만

경계를 구걸할 만큼 가난하지는 않다.

나는 잡히는 대로 서식한다.

 

비가 내리고 비가 그친 오후에 나는 서식한다.

월급이 입금된 통장에서

빌려 쓴 미래가 모두 빠져나간 날처럼

나는 너덜너덜하게 서식한다.

 

나는 너와 헤어질 생각에 서식한다.

지금 세 들어 사는 낡은 생각과

함께 세 들어 살고 싶은 낡은 생각 사이에

조건이 맞지 않는 통화 기록처럼 서식한다.

 

나는 너와 헤어질 시간에 서식한다.

위치 추적이 불가능한 지대를 지나

나의 움막에 도착하려면 너는

나와 헤어질 장소를 짊어지고 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슬픔이다.

 

나는 어슬렁거리는 무릎에 서식한다.

한없이 세상 밖으로 녹아내리는 눈들과

내리는 눈 사이로 희미하게 저녁을 안치는

비탈진 골목처럼 서식한다.

 

나는 서식한다.

내가 나에게서 가장 멀리는 떠나는 순간에

용도와 흥미가 폐기된 가구처럼

나는 모든 것에 서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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