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일정은 온전히 셰익스피어에 할애되었다. 그의 고향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 생가와 거주했던 집, 와과의였던 맏사위의 집, 무덤이 있는 트리니티성당, 그리고 아내 앤 해서웨이의 생가를 차례로 찾았다. 이미 길잡이 책으로 황광수의 <셰익스피어>(아르테)를 읽은 터라 낯선 곳은 아니었다. 그래도 현지에 있다는 실감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비가 흩뿌리는 흐린 날씨여서 렌즈를 닦아놓은 듯 모든 것이 더 깨끗하고 명료하게 보였다.
스트랫퍼드는 생각보다 큰 마을이었다(지방도시라고 해야할 듯). 가령 헤세에 대한 기억으로만 이루어진 것 같은 독일의 작은 마을 칼브처럼 셰익스피어로 ‘도배‘돼 있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그에 비하면 셰익스피어는 마을의 자연스런 일부처럼 보였다. 그 당시 튜더양식의 집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어서 셰익스피어의 생가나 뉴플레이스(그의 집)가 돌출돼 보이지 않았다.
현장방문 덕분에 셰익스피어의 연보를 새로 환기하게 되었다. 모호한 가운데서 신고기록으로만 남아있는 그의 자취를 실물들이 증언해주고 있어서다. 생가에 있는 침대(유언에 적힌 ‘두번째로 좋은 침대‘)와 당시 두번째로 큰 집이었다는 뉴플레스를 구입한 33살의 셰익스피어의 모습이 그려졌다(그는 바로 전해에 아들 햄닛을 잃는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재력이었다(구입에 6년치 교사 연봉의 비용이 들었다고).
은퇴후에 다시 내려온 집에서 맏사위와 돈독하게 지내는 모습도 인간 셰익스피어의 잘 알려지지 않은 대목이다. 죽기 직전에 둘째사위가 불륜으로 아이를 갖게 되자 부랴부랴 유언장을 고쳐적었다는데(둘째 내외한테는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 이미 셰익스피어 자신이 몸져누운 상태였다. 그는 1616년 4월 23일에 세상을 떠난다. 단순계산으로 52세의 나이였다.
그렇지만 진정한 셰익스피어의 신화가 시작되는 것은 사후 그의 지인들에 의해 1623년 첫 전집이 출간되면서부터다. 그의 작품을 통해서 우리가 만나는 셰익스피어와 스트랫퍼드 출신의 ‘글쟁이‘ 셰익스피어 간에는 간극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강의에서는 강조했다. 평범한 셰익스피어와 비범한 셰익스피어. 이 간극이 근대 영국문학의 원점이면서 세계문학의 출발점이다. 인간을 발명해낸 작가가 바로 셰익스피어이기에.
스트랫퍼드에까지 들고온 책은 <셰익스피어> 외에도 <빌 브라이슨의 셰익스피어 순례>(까치)와 <셰익스피어 소네트>(민음사)가 더 있는데, 당연히 조금 들춰보려는 의도였지만 숙소로 들어서자 곧바로 잠이 들고 말았다(빌 브라이슨의 책은 이곳에서도 기본서였다). 서서히 여독이 쌓이는 모양이다. 현재 머무는 곳은 옥스퍼드인데 아침식사를 마치면 제인 오스틴 투어를 위해 바스로 이동할 예정이다. 그리고 저녁에는 종착지 런던에 드디어 입성하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런던, 찰스 디킨스의 런던,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의 런던이다...